'내조의 여왕' 무당역(役) 정수영
'환상의 커플' 미친 강자역 이어 천연덕스러운 연기 선보여 주목
할아버지가 고(故) 정한모 시인
'천연덕스럽다'란 말은 어쩌면 배우 정수영(27)을 위해 존재하는지도 모르겠다.
1982년생. 방송출연 경력이 불과 3년밖에 안 되는 초짜 연기자. 한데도 사람들은 또렷이 기억한다. 2006년 드라마 '환상의 커플'에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강자'를. "날씨가 무척 더운 걸 보니 눈이 오려나 봐요?"라고 속삭이며 노란 들꽃을 머리에 꽂을 때, 사람들은 "저 여자 정말 미친 것 같다"고 했다.
지난 19일 종영한 '내조의 여왕'은 또 다른 반전(反轉)의 시작. 그녀가 딸만 셋인 손님에게 "아들이 나중에 크게 출세할 거야"라고 말하는 한심한 점쟁이로 등장하자 시청자 게시판엔 "정수영씨가 그때 '강자' 맞나요?"란 질문이 폭주했다. 요새는 SBS 드라마 '시티홀'에서 "바빠서 오줌 쌀 시간도 없어!"라고 투덜대는 시청 9급 공무원 '정부미'로 출연 중이다.
20일 광화문에서 만난 정수영은 전혀 다른 모습이다. 얌전하게 빗어 내린 머리칼에 단정한 원피스. 그녀는 "연기를 잘해서인 건지, 분장을 잘해서인 건지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잘 못 알아봐요. 나이보다 얼굴이 늙어보여서 그런가?"라고 말하며 웃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연기과 4학년. 고등학교 때까지 성악을 공부했던 정수영은 "그야말로 충동적으로 연기자가 됐다"고 말했다. "대학교 입학 원서를 성악과에 넣으려고 했는데, 옆 창구를 보니 연기과도 있더라고요. 원서 가격이 똑같아서 한번 넣어봤어요. 하하."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지만 후회는 없었다. 19살 때 처음 선 연극무대에서 그녀는 전율(戰慄)을 맛봤다. "관객이 3000명이 넘게 모였는데도 전혀 떨리지가 않았어요. 와…, 근데 연극 딱 끝나고 사람들이 날 보러 대기실에 있다는 말을 듣고 다리가 풀리더라고요!"
처음 대학로 소극장 무대에서 연기를 하고 쥔 돈이 20만원. "어떻게 번 돈인데…" 싶어 한동안 책갈피에 끼워놓고 가끔 쳐다만 봤다. 노래 솜씨가 소문나면서 '유린타운' '그리스' '렌트' 같은 뮤지컬 무대에서 섰다. 드라마 제작자 송병준씨가 그녀를 뮤지컬 무대에서 발견하고 드라마 '환상의 커플'에 캐스팅한 게 2006년.
정수영은 "이래저래 운이 참 좋았다"고 하지만 '내조의 여왕'을 연출했던 고동선 PD는 "철저히 노력으로 여기까지 온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시놉시스에도 희미하게만 표시돼 있던 인물을 머리 싸매고 연구해서 팀 버튼 영화에나 나올 법한 인물로 그려가지고 왔어요. 크레파스로 스케치해서. 깜짝 놀랐죠."
정수영은 "철저하게 미리 설정을 짜놓지 않으면 안심이 안 돼서 그렇다"고 했다. "제가 연기한 인물들이 워낙 다 특이하잖아요. '강자'는 정신이 나간 나머지 지나치게 행복한 사람이니까 목소리도 음계 중 '솔'이나 '라'에 해당하도록 신경 썼고, '지화자'는 음침한 무당이니까 한 옥타브 내려간 '라' 음에 맞게 발음했어요. 어깨를 무너뜨리고 턱을 길게 빼고 말하는 버릇까지 미리 정해놨죠."
하나에 미치면 '마음에 들 때까지' 파고드는 이 근성은 집안 내력이라고 했다. 1988년 문화공보부 장관을 지냈던 고(故) 정한모 시인이 할아버지. 아버지는 도예가 정진원 동덕여대 교수다.
"어린 시절, 책이 가득해 발 디딜 틈조차 없는 방에서 할아버지와 놀았어요. 할아버지는 원고지를 며칠이고 노려보곤 하셨죠. 나중에서야 그게 시어(詩語) 한 단어를 생각해내기 위해 그렇게 고민하셨단 걸 알았어요. 대본을 읽으면서 가끔 그 장면을 생각해요. 그리고 중얼거리죠. 그래, 나도 '결정적인 한 장면'이 떠오를 때까지 계속 읽고 생각하자. 요즘 생각하는 건 그것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