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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전두환의 증거 사진들입니다

정우영 |2009.07.10 07:19
조회 1,340 |추천 16
 파트 1  


1979년 10월 18일, 부산과 마산의 대규모 민주화 항쟁에 맞서 박정희는 계엄령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전두환과 다를 것 없는 발상을 생각하게 되죠.

 


 

전두환의 5.18과 도대체 무엇이 다릅니까?

특히 지역주의로 대통령을 몇 번 더 해먹은 사람의 입장에서, 자신을 키워준 연고지에 총을 쏘는 잔악한 행동.

이것이 배신자 박정희의 인생이었습니다. (파트 2에 계속됩니다)

 

 


 

 

 

파트 2

 

 

박정희의 본명이 다카기 마사오라는 것은 이제 왠만한 사람들은 알 것이라고 사료 됩니다만,

그의 친일 행적이 어느 정도까지였는지는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일제 식민지 시대는 일본군의 총칼앞에 머리를 숙여야 했던 시기이기 때문에

친일을 했다고 해서 무조건적인 처벌만 한다는 것은 능사가 아닙니다.

따라서 친일에도 정도를 가리고, 심한 친일의 경우엔 본보기를 보여야 했던 것이 해방 이후의 상황입니다.

(물론 그 친일파 청산을 담당하던 반민족 특별위원회는 미국에 의해 강제해산됩니다)

(또 목숨과 전 재산을 헌납하면서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 앞에 감히 친일파들은 당당할 수 없습니다)

 

박정희의 행적만 일목요연하게 쓰면 이렇습니다.

 

만주 군관학교 → 만주 독립군(중국, 한국) 토벌활동 → 일본 사관학교 → 혈서 충맹(진급을 하기 위해 천황에게 혈서로 충성맹세했다는 것은 조선인으로서 유일하다) →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미국에 대항하는 일본 관동군의 일원으로 활약 → 공산당 남로당 가입(일본이 패망하고 한국이 해방되자, 소련군이 진척한 북한의 정리된 모습에 매료되어 김일성에게 충성 맹세를 했던 것으로 봅니다) → 공산당 활동으로 사형선고되나 동료의 도움으로 무기 징역으로 감형 → 한국전쟁 발발 이후 미국의 친일파 대거 기용시에 공산당 경력에도 불구하고 한국군의 소령으로 특채 → 만주 군관학교(친일파) 동문들과 함께 쿠데타 참여 → 고참과 반대파를 피로 숙청하고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박정희의 공산당 활동입니다.

 

박정희가 쿠데타를 성공해서 고참들을 숙청했다고 하자 북한에서는 난리가 났죠. 마침내 통일의 그 날이 왔다. 이게 무슨 소리인고 하니, 박정희는 남로당 군책이라는 중요한 직위를 맏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요즘말로 하면 간첩 중의 상간첩이죠. 그랬던 사람이 쿠데타로 대통령에 등극하니 북한에서는 사람을 보내 박정희를 떠보고 이제 남북이 합쳐 공산주의로 나아가자는 계기로 삼자는 공문을 보냅니다. 그러나 박정희는 배신의 인생을 걸어왔던 자신의 감에 의해, 미국을 선택하고 남로당 군책의 직위를 버리며, 극단적인 반공을 내세우고 마치 자신이 한국의 반공을 책임지는 위치로 부각하게끔 만듭니다.

 

이처럼 박쥐의 인생(무려 5번에 걸친)을 살아온 박정희의 과거는, 박정희의 삶을 지배해왔고 또 쿠데타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대한민국의 성장에만 몰두하게 됩니다. 이는 동기적인 측면에서는 훌륭할지 모르나, 결국 노동자 탄압과 불균형 발전과 재벌 특혜로 인한 비 정상적인 성장을 유도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파트 3

 

 

박정희의 공과 과는 구분해야 한다고하지만,  사실 그의 공이라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은 극히 적습니다. 단지 독재 기간이 워낙 길었고 김일성 뉴스와 다를바 없는 박정희 뉴스로 세뇌당한 국민의 영웅이 남아 있을 뿐이기에, 그의 단점은 모두 무마되고 장점만이 부각되는 기이한 현상들이 발현됩니다. 그로 인해 그 유신 시대를 살았던 부모 아래 커간 우리의 현 세대들은 박정희가 정말로 훌륭한 인물이었다는 착각 속에서 그를 떠올리게 됩니다.

 

그러나 그의 유일한 공이라고 할 수 있는 경제에서조차도, 결코 다른 동북아 개발국(대만, 홍콩, 싱가폴)보다 좋지 않은 모습이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의 경제적 성과는 긴 독재 기간이 낳은 유산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먼저번의 글에서 경제적 성과를 비판하고 인정한 부분이 있는데 다시 한번 정리를 해본다면,

 

비판1 - 독재 18년을 거치며 정권 교체의 과도기 없이 철권통치를 한 부분은 경제성과가 될 수 없다

비판2 - 우리와 비교할 수 있는 대만, 홍콩, 싱가폴보다 경제 성과가 좋지 않았다.

비판3 - 베트남 전쟁과 독일 파견으로 인한 수익금은 국민의 피와 땀이었지 그의 공이 아니다.

 

인정1 - 고속도로 건설은 지역불균형을 가져오긴 했으나 장기적인 안목으로는 좋은 선택이었다.

인정2 - 보호무역주의 기간산업 육성 역시 장기적인 플랜으로는 손색이 없었다.

 

이렇게 구분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박정희의 경제적 성과가 위의 비판 3가지를 간과하고 간혹 언급되던데 그것은 결코 올바른 방식은 아닙니다.

 

또한 박정희의 경제성과가 초창기 눈부신 발전의 형태에서 현재 부작용의 실타래로 이어지고 있는 점을 볼 때, 박정희의 방식이 낳은 다른 경제적 문제들을 이제는 고려해 보아야 할 때입니다. 캠브리지대 장하준 교수는 박정희식 경제개발을 칭찬했지만, 그것은 보호무역주의였지 독재에 의한 반민주 인플레이션 성장은 아니었습니다.

 

새롭게 제기되어야 할 박정희식 경제성장의 맹점

 

1 - 지역 불균형이 초래한 지역 감정으로 인해 국민이 겪어야 할 고통과 과제

(예: 90년대에 군대에 가면 특히 감정 대립이 심한 전라도와 경상도 고참들은 이유없이 타지 후임을 괴롭히게 됩니다. 당한 전라도 후임은 고참이 되어 경상도를 괴롭히고 또 그것이 반복되는 악순환입니다. 회사에 가도 아직까지 지역감정은 분명히 존재하는 현실입니다)

 

2 - 재벌 특혜로 인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받는 설움의 가시화

재벌 공화국을 만들어 놓았기에, 우리 사회의 힘은 기득권에서 출발하게 됩니다. 정경유착과 정치 부패도 이 재벌 공화국이 끼친 영향이 아주 큽니다. 단기적 수출 신장에서는 재벌 위주가 유리할지 모르겠지만, 장기적인 내수-수출 협력화를 고려한다면 중소기업이 탄탄한 나라일수록 훨씬 성장 잠재력이 큰 법입니다.

 

3 - 저임금 노동자의 공로를 무시한 처사

왜 부모님들이 푼돈의 임금에 만족하고 악착같이 모아서 당신들을 키웠습니까? 자식들에게는 이 가난을 되물림하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박정희와 같은 윗대가리들은 잘살아보세, 새마을 운동 같은 언어 도단으로 국민을 현혹했을지는 몰라도 실제로 고픈 배를 잡아가며 사업주에게 착취당하며 나라를 발전시킨 숨은 공로는 오로지 우리나라의 70~80년대 노동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당시의 산업 형태는 대부분 노동자였고 그들은 저임금에도 악착같이 일하는, 즉 선진국에서도 이해하기 힘들 정도의 우수한 노동력이 발휘되었기에 큰 성장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현재 중국의 무서운 발전 속도도 이와는 어느 정도 비슷한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는 부분입니다.

 

 

박정희가 독재를 했지만 경제를 살려 놓지는 않았느냐?

감히 그 분을 모욕하지 말아라.

 

이것이 70~80년대 일했던 부모님들이 우리에게 남겨주는 말입니다.

그리고 여기계신 광장에 수많은 분들도 이와 유사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김일성을 주군으로 삼고 빨갱이 간첩질을 했고, 일본군 장교로 한국 독립투사들을 죽이고 고문하고,

국민의 목숨을 담보로 전쟁을 계획하고, 국민의 피땀을 자신의 공로로 선동했던 한 사람이 과연 ..

국민의 영웅까지 될 자격이 있는지는 상당한 의문입니다.

또한 유일한 공이라고 하는 경제마저도 부작용의 여파로 지금의 실업난, 비정규직으로 몸살을 앓고 있으니 ..

과연 이 나라를 이끌었다는 박정희의 성장방식이 정말 옳았는지 돌아볼 때입니다.

 

박정희의 공로로 우리가 인터넷을 하고 있다니요? 그렇다면 당시 빈민국 중국은 왜 인터넷을 합니까?

중국 공산당의 공로인가요? 개방을 했던 등소평과 천안문 사태 주역 후진타오 주석의 공로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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