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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누구신가?

기웅서 |2009.07.16 00:13
조회 29 |추천 0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움을 얻는다.

이 믿음은 인간 안에 내재된 가능성 혹은 외부로 나타난 인간의

행위로서 말미암음이 아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은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 에베소서2:8-13 >

 

에베소서만큼 예정의 교리에 대해서 자세하게 말하는 서신은 없다.

물론 로마서에서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구원의 원리에 대해서 논리정연하게(물론 엄밀히 말하자면 논리라

할 수는 없다)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에베소서에서 드러난 구원의 원리는

로마서에서 드러난 원론적인 성격에서 진일보進一步했다는 점에,

뚜렷한 차별성이 드러난다고 본다.

구원받은 성도로써의 하나님께 대한 반응의 원리를 말함에 있어서

로마서의 그것은 12장에서부터 출발한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므로'라는 접속어는 로마서 1장에서부터 11장까지의

원론적인 부분에 대한 진술로부터 삶의 영역으로의 연결과 전환을

의미할 수 있겠다.

 

1장에서 11장까지의 진술은 대부분 선언과 선포와 단순한 서술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12장에서부터는 ~하자, ~하라 등

실제적인 움직임을 요구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절대적인 분량을 두고 봤을 때,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구원의 원리에 대해 진술함에 있어 거의 70% 이상을 할애했다.

이는, 로마에 있는 성도들의 지적 수준과 이성적 판단 능력을

고려한 치밀한 저작 의도가 이 서신에 배어있음을 짐작케 한다.

 

에베소서 역시 로마서와 같이 서신의 형식이지만 그 진술은

다소 협소한 의미를 지닌다. 아까도 언급했듯이

에베소서에 흐르는 전체적인 서술적 특징은

우리가 하나님께 택함 받은 존재이며 이는 능동적인 것이 아닌

하나님의 의지로 인한 선택이지, 인간 편에서 거절하거나 수용하는

양자 택일의 영역이 아님을 진술함과 동시에

그 이후에 하나님께 대한 반응 역시 하나님께서 각양 선한 것들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가능하다는 전적인 '은혜'임을 강조한다.

즉, 선택 이후의 삶의 영역에서 동일하게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능력으로 덧입기를 강권하고 있는 것이다.

 

구원 이후의 삶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성도라면

바울이 에베소서 말미에서 말하고 있는 영적 전쟁을

주의 깊게 묵상해야 할 것이다.

에베소서에서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우리가 얻는 구원은 보이지 아니하는 절대 주권자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의해 이루어진 구원이

역시 보이지 아니하는 치열한 영적 전쟁이라는 과정을 통해

성도의 삶에서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하기에 구원 받은 이후의 삶에 대하여

바울은 전반부 3장의 비중과 동일하게 후반부의 3장에서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성도가 구원받았는가 구원받지 않았는가를 엄밀하게 구분하는

척도는 인간에게 있지 않다. 오직 말씀에 자신을 비추어

하나님의 시각에서 스스로를 냉철하게 판단하는 자만이

자신이 받은 구원이 무엇이며 구원하심에 대한 나의 반응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인식을 할 수 있을 따름이다.

때문에 구원에 대한 판단은 그 누구에게도 없되,

다만 자기 자신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구원의 출발점이 로마서와 에베소서에서 서술하는 바,

하나님의 은혜, 즉 값 없이 주시는 선물이라는 진리에 동의함이라면

적어도 그 구원은 안전하다.

하지만 그 구원의 안전함에 안주하는 구원은 구원하신 자에 대한

마땅한 반응이라 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시험의 결과를

알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 사람은 자신의 점수를 이미 알고 있다.

때문에 그는 공부를 열심히 하던지 못하던지 이미 정해진 결과를

뒤바꾸려는 어떠한 노력도 기울일 필요가 없는 셈이다.

만약 우리가 받은 구원의 결과를 이미 알고 있는 상태에서

자신이 해야할 의무를 도외시하거나 불성실하게 행한다면

그 구원은 참으로 가치 없는, 지극히 값싸고 하찮은 것에 

불과할 것임을 부인할 사람은 없으리라. 혹 부인한다면

우리가 받은 구원이 보화이며 진주라는 4복음서의 말씀을

다시 한번 진지하게 묵상해보기 바란다.

 

구원이란 죽기 전에는 알 수 없지만, 

숨이 붙어있기까지 구원에 대한 확신 없이 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우리는 마땅히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며

이 구원은 하나님이 베푸신 것이기에 파기되거나 소멸될 수 없는

성질의 것임을 확실하게 믿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서 끝난다면 우리는 100점짜리 시험 결과를 알고서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 불성실한 학생이 될 것이다.

학교에서 잠을 자거나 무단 조퇴나 결석을 하더라도 

양심의 가책이나 불안감, 죄책감조차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바울은 로마서 12장 이하의 진술에서, 

에베소서 4장 이하의 진술에서

'그러므로'라는 접속어로부터 시작하여 성도의 마땅한 행위에 대해

목청을 높여 외치고 있다.

특별히 에베소서에서 바울이 말하는 바 구원받은 성도들의 삶은

가시적인 영역에 머무르는 삶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에게 대함이라  < 엡6:12 >

 

그리고 바로 예의 '그러므로'가 등장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 엡6:13 >

 

이 말씀 이후의 내용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음에도

실제로 취하지 못하는 것이다.

추상명사를 실존명사와 결합하여 치환하는

이 기발하고 명쾌한 진술 앞에서,

우리는 큰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고 추상적인 의미에만

집중하다보니, 정작 우리의 싸움의 성격에 대해서는 망각하기

십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진정으로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기에,

영적인 세계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충만히 채워주시는 성령의 능력과

진리의 허리띠, 의의 흉배,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신,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말씀의 검을 취하지 않는다면

필패必敗할 수밖에 없다.

 

구원이란 나의 믿음의 근원이 하나님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의 근원되신 이께서 이 믿음을 지켜주심에 대한

믿음이다.

즉, 예정된 믿음이 선포적인 믿음이라면 그 이후의 믿음은

지켜나가야 하며 나아가 적극적으로 이 믿음을 무너뜨리려 하고

흔들려고 하는 세력과의 치열한 다툼을 통해서 쟁취해야 하는

분투와 승리를 통한 실제적인 믿음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영적 전투가 없는 인생이라면,

자신의 구원과 믿음을 냉철하게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주를 믿는 자는 핍박을 받을 것이라는 메시지가

그저 평평한 종이에 새겨진 검은 글씨라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을 대하면 대할수록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이 영적 전쟁에서 한 순간도

승리할 수 없는 존재가 인간임을 깊이 깨닫게 된다.

매순간 성령의 조명하심과 깨닫게 하심의 역사가 없이는

소경과 귀머거리와 벙어리 같은 존재에 불과한 내 모습을

더욱 깊숙히 들여다보게 된다.

이 자각 역시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불가능함을

인정하지 아니할 수 없다.

 

찬송의 한 구절만이 귀에 맴돈다.

 

"주의 크신 은혜로써 구원을 받았네

 주여 다시 우리들을 버리지 마소서

 내 죄로 인하여 영永 죽을 우리를

 주의 크신 그 은혜로 다시 삶을 얻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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