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맨 위) 김극충신각(金棘忠臣閣)
조선시대 정점에 선 최고 명문가
시조 김선평. 왕건 도와 고려 개국공신 반열 올라
16세기 후반 김응생 형제 청주 강서동에 터잡아
'안동 김씨'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세도정치 또는 조선의 명문대가일 것이다.
'조선은 김씨의 나라지 이씨의 나라가 아니다'라는 말이 회자될 만큼 한 시대를 풍미한 이들 문중의 위세는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실제로 조선 말 순조 임금 이후로 영의정과 좌의정. 우의정 등 정승이 모두 신안동김씨에서 나와 나라의 권력을 좌지우지했음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안동 김씨는 조선 후기 명문가 반열에 오른 (신)안동 김씨를 일컫는다.
김씨는 우리나라 성씨 중에서도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진 성씨로 조선씨족통보에 623 본이 기록될 정도로 대성을 이뤘다. 그중 안동 김씨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두 문중이 있는데. 이를 구분하기 위해 (구)안동 김씨. (신) 안동 김씨로 표기하고 있다.
잠깐 짚고 넘어가자면 (구)안동 김씨는 신라 경순왕의 넷째아들의 둘째 아들 김숙승을 시조로 하고 있고. (신)안동김씨는 고려 개국공신 김선평을 시조로 하고 있어 두 문중의 뿌리가 다름을 알 수 있다.
조선의 5대 명문가에 꼽히고 있는 (신)안동 김씨는 조선중기까지는 명문가라기보다는 보통의 양반가문이었다.
시조 김선평이 930년 고창성전투(안동의 옛이름)에서 왕건을 도와 승전한 후 고려 개국공신에 오르며 기반을 닦게 되고. 후손들이 안동을 본관으로 삼아 양반가로의 가계를 잇는다. 그러다 조선말에 이르러는 세도가문으로의 명성을 떨치게 되는데. 이들의 영향력은 조선이 멸망하는 후기까지 약 60년간 지속된다.
(신)안동 김씨가 권력의 기반을 잡은 것은 광해조 때 도정을 지낸 김극효가 좌의정과 대제학을 지낸 정유길의 사위가 되면서 였으며. 광해군의 장인인 유자신과 동서간이 되므로 서서히 권력의 터를 다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 문중이 명문가의 반열에 오르기까지는 그 중심에 조선중기 인조때 김상헌의 활역이 컸다. 이후 '금관자가 서 말'이라고 비유될 정도로 정·종 2품이상 관료직을 독점하며 조선 후기를 쥐락펴락했던 것이다.
세도정치가로 명성을 날렸던 이들 문중이 청주와 인연을 맺은 것은 15세기 말 김응생과 김계생 형제가 청주 강서동으로 낙향해 정착하면서다. 약 400년간 지역에 뿌리를 두고 청원군과 괴산군. 음성군 일원으로 뿌리내리며 살아온 문중의 행보는 가문의 위세에 비하면 턱없이 미약하다.
현재 청원군 북이면 현암리에는 16세기 초 무인출신 김극의 충효각이 남아있을 뿐 문중의 유적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에 대해 김효동 전 (신)안동김씨 충북지회장은 "세도정치의 직손 후예가 아니라 지역에 낙향한 후 조용히 살았기 때문"이라며 "그러다 보니 뚜렷한 유적을 남기거나 활발한 지역 활동으로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고 들려줬다.
◆ 인물 & 인물
강력한 권세로 중앙정치 좌지우지
광해군때 김극효. 권력 기반 마련
현재 걸출한 인물 각계각층 포진
시조 김선평이 왕건을 도와 개국공신에 오르며 안동 김씨는 탄탄한 가문의 뿌리를 내린다. 비교적 순탄한 양반가로 안동에 터전을 잡은 이들이 권력의 기반을 잡은 것은 광해군때 도정을 지낸 김극효에 의해서다. 김극효는 정치권 핵심 인물과 인척관계를 맺으며 중앙정치권으로 자연스럽게 발을 들여놓는다.
특히 그의 아들인 김상헌은 대제학과 판서를 두루 거치면서 두각을 나타낸다. 그는 병자호란때 척화를 주장하다 심양에 잡혀가는 등 파란을 겪게 되는데. 이때 남긴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라는 시조는 지금도 읊어지는 구절이다. 그러나 김상헌은 곧바로 심양에서 풀려나 좌의정에 오르면서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된다.
이러한 정치권의 진입은 (신)안동김씨가 세도정치로의 이행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는데. 당시 장동(현재 효자동)에 살았던 김상헌으로 인해 (신)안동김씨를 장동김씨라고도 부른다. 이후 후손들은 부자 영의정. 형제 영의정. 부자 대제학 등 12명의 정승과 3명의 왕비 그리고 수십명의 판서를 배출하며 '금관자가 서 말'이라고 비유될 정도로 관료직을 독점하며 조선을 쥐락펴락하게 된다.
특히 조선 후기 (신)안동김씨의 세도정치는 김수항을 주축으로 김조순이 이어간다. 정승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문중의 인물들은 김조순의 딸이 순조의 왕비가 되고. 당시 대비의 수렴청정이 끝나고 다음해 죽자. 김조순을 필두로 (신)안동김씨의 세도정치를 개막한다.
이 무렵 정치권을 살펴보면 김조순의 오촌 종숙인 김이익이 병조판서. 김이도는 예조·형조판서에 올랐으며. 김달순 우의정. 김문순 이조판서. 김희순 이조판서. 김조순의 조카 김교근은 여러 판서를 거치며 조정의 병권과 상권과 인사권 등을 맡는 등 한 문중에서 요직을 독차지한다. 그리고 호위대장 김조근의 딸이 헌종의 왕비로 책봉되고. 아들 김좌근이 영의정. 손자 김병기는 이조판서. 김문근의 딸이 철종의 왕비가 되면서 이들의 세도정치는 60년간 막강한 위세를 떨치게 된다.
화려한 문중의 권력만큼이나 인물도 많이 배출되는데. 조선 말기부터 문중의 근대 인물로는 방랑시인 김삿갓으로 발 알려진 김병연과 일본의 선진문물 도입을 주장했던 개화파 김옥균. 독립운동가 김좌진 장군. 그의 아들 김두한이 꼽을 수 있다.
그리고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문중 인물로는 김낙현 전 청원군수. 김중한 전 충주시장. 김용한 전 청주고 교장. 김성년 동인당 원장. 김효동 시인. 김동년 대청호미술관장. 김준동 신용보증재단 이사장. 김창한 오창농협조합장. 김완식 법무사. 김영한 조계종 포교사. 김기동 청주시의원. 김부한 원로교육자 등이 있다.
청원군 북이면 현암 1구 마을 안쪽에 세워진 김극의 충효각. 김극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인조임금을 모시고 피난. 청군에 대항해 싸우다 24세의 젊은 나이로 전사하자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인조 임금이 정려를 내렸다.
청원군 북이면 현암 1구는 (신)안동김씨의 집성촌으로 100호가 모여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