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 화 사랑에 있어 여자도 때론 돈키호테가 된다.
당장 세상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지구에 종말이 오는 것도 아닌데 내일이면 올해의 마지막이 될
날을 기리기 위해, 아쉬운 마음으로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려 한다. 한 해를 보내는 이별
의 대한 슬픔과 새 해를 다시 맞이하는 만남의 기쁨의 마음을 동시에 가지고 말이다. 우리는 만남과
이별에 대해선 너무 익숙해져 있다. 태어남도 그러했고, 존재와 함께 움직이는 시간도 그러했으며,
해가 바뀌는 것도 그러하다. 사소한 일상들이 알고 보니 만남과 헤어짐의 반복이었다. 우리는 마지
막 날인 내일을 함께 하기로 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우리들은 각자의 시간을 보냈었다. 어쩌면 우리
가 함께 할 수 있는 그 해의 마지막 날이 될 지도 몰랐다.
“마지막이란 말은 어떤 상황이든, 슬픈 것 같아. 매번 아쉽고, 후회스러운 일들만 생각 나. 다시 새로
운 시간이 주어지면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겠지? 언제나 또 아쉽고, 후회스럽고.”
차가운 치즈 케익을 한 입 먹으며 나는 넋두리처럼 중얼거렸다.
“누구나 다 그렇게 살아. 똑같이 아쉬워하고, 후회하고. 내가 그날, 너를 그렇게 보내 버린 것과
다시 보지 않았다는 것이 후회되는 것처럼.”
그의 앞에 놓인 고구마 케익은 손을 대지 않은 채 멀쩡하게 놓여 있었다. 그는 케익을 먹는 대신
커피를 마셨다.
“지금 나한테 고백이라도 하는 거니?”
“일편단심, 내 순정을 말하는 게 아냐. 손톱을 자르고 보니, 보기 좋게 정돈이 되더라. 그렇지만 한
번 자른 손톱이 다시 자라지 않는 건 아니더라구. 너를 다시 만나게 되면 그것이 모두 추억이었다고
말할 만큼 시간이 흘렀으니, 신나게 추억이라 말할 수 있을 것 같았어. 손톱은 계속 자라고 있었고,
나는 그걸 자르는 순간에 모든 것이 정리된 것이라 착각하고 있었던 것 같아.”
그의 말에 나는 순간 준하를 떠올렸다. 처음이라 떨렸고, 벅찼으며, 가슴 절절했던 사랑. 그 사랑의
모든 것을 곁에서 보았던 그. 아무렇지도 않게 나는 그를 보면서 준하를 떠올리지 않고, 그때의 일
을 떠올리면서 그에게 미안해하지 않으며 살 수 있을까. 문득문득 그는 나와 준하의 기억을 떠올리
면서 화가 나진 않을까. 때론 과거가 현재에, 혹은 미래에 상처를 줄 수 있음을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내 진심은 준하와는 상관없이 별개의 문제야. 일부러 숨길 필요도 없고, 털어 놓을 필요도 없잖아.
중요한 건, 난 과거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야. 의심하지 마. 내가 어떨 거라는 짐작 같은
것도 함부로 하지 마. 자신 없었다면 애초에 시작도 하지 않았어. 우리가 만나지 못했던 그 긴 시간
동안 내가 누굴 만났으며, 사랑했었는지를 말해야 한다면 아마도 내가 더 불안할거야.”
그의 말에 나는 뭐라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사실, 그에 대한 내 감정조차도 섣부른 판단을 할 수
없었다. 나는 그저 치즈 케익을 다 먹어 치우고, 그의 고구마 케익에 눈독을 들였다. 그가 슬며시
자신의 케익을 내 앞으로 밀어 주며 말했다.
“당장 대답을 원하는 건 아냐. 우리에겐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이건 그냥 개인적인 질문이야. 준하도 알고 있니?”
“숨길 필요도 없지만, 굳이 알아야 할 필요도 없지. 아마 눈치는 채고 있을 거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는 척 하기란 쉬운 일이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척 하기
란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안다. 사랑하는 마음을 들키지 않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말하지 않아
도 그것은 금방 탄로가 나는 법이다.
“무모하고 싶지 않아. 그런 위험을 감당해낼 나이도 아니구. 생각해볼게. 장담은 못 해.”
“사랑 자체가 무모한 거야.”
나는 더 이상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고구마 케익을 먹는 일에만 열중했다. 오늘따라 케익
이 무척 달콤하다.
지란은 기어이 외박을 하고, 늦은 아침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밤새 무엇에 시달렸는지 피로
가 잔뜩 끼어 있음에도 표정은 무척이나 밝았다. 그녀는 늦게까지 침대 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나를
흔들어 일으켰다. 그러더니 비장한 표정으로 마주보고 앉아 말했다.
“나 어제 누구랑 있었는 줄 아니?”
“둘 중에 한 명이겠지.”
“정말 그렇게 생각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나는 헝클어진 머리를 벅벅 긁어대며 시큰둥하게 물었다.
“나, 어제 현우가 아니라 그 남자랑 같이 있었어.”
“드디어 사고를 치셨군.”
들떠 얘기를 꺼낼 땐 현우가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 챘다.
“그동안 현우가 나한테 한 짓을 생각하니까, 오기가 생긴 것도 사실이야. 그런데 만날수록 이 남자,
진국이더라. 어제 현우를 먼저 만났어.”
“바쁜 하루를 보내셨군.”
“현우랑 완전히 끝냈어.”
“뭐라구?”
나는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놀랬지? 나도 놀랬어. 내가 그럴 줄은 몰랐거든. 너, 현우 얼굴을 봤어야 해. 그 표정이 얼마나 고소
했는지 아니? 저 아님,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할 줄 알았겠지.”
“너, 진심이야?”
“나, 너한테 이제 싫증났어. 우리 헤어져. 그렇게 말했더니 현우, 완전히 똥 씹은 표정이었어. 자기
한테 화난 거 있냐구 묻더라. 내가 그랬지. 아니, 너한테 화가 나는 게 아니라, 나한테 화가 나. 너란
인간이 대체 어디가 그렇게 좋았나 싶어서. 사람 볼 줄 모르는 이 어리석은 유지란한테 화가 난 거라
고 말해줬어. 얼마나 통쾌했는지. 처음이었어. 현우가 내 손을 덥석 잡더라. 유치한 신파극이라도
한 판 벌리려나 싶었지. 자기가 앞으로 잘하겠대. 무조건 잘못했다 그러더라. 그래서 말했어. 나두
사랑보다 밥이 더 중요하다는 걸, 너한테서 배운 것 같다고. 고맙다. 밥 잘 먹고 잘 살어. 그리곤, 삼
년 넘은 우리의 사랑이 그 자리에서 아주 깨끗하게 정리된 거지.”
“정말…….끝난 거야?”
“그렇다니까.”
나는 그녀의 말이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저러다 또 하룻밤이 지나면 마음이 달라지겠지. 지란
이 현우가 아닌, 그 늙은 남자를 사랑한다고 하는 것 또한 대단한 충격이었다.
“그 사람이 현우보다도 훨씬 좋아?”
“투자 가치가 있어. 내 미래를 투자할만한 사람이야.”
“사랑은 투자가 아냐.”
“왜 이러셔? 내가 현우랑 헤어지는 것에는 너랑 혜나가 박수를 쳐야 하지 않니?”
“그건 그렇지만.”
나는 대체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사람하구 결혼하기로 결심했어.”
“뭐?”
이보다 더 큰 충격이 또 있을까.
“물론 현우를 만날 때도 결혼이 하고 싶었어. 하지만, 이 남자는 그런 내 소망을 더 간절하게 만들
어. 그래서 내가 어젠 머리를 썼지 않겠니?”
나는 멍하니 그녀의 말을 듣고 있을 뿐 무어라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술을 마셨어. 일부러 취한 척을 했지. 그리곤 내가 그를 모텔로 유인한 거야. 그 남자, 얼마나 순진
하시던지.”
그리곤 킥킥대며 웃기까지 하는 지란은 더 이상 내가 알고 있던 그녀가 아니었다.
“당장 오늘 밤, 이 남자를 유혹하지 못하면 결혼도 끝이겠구나 싶었거든. 사실, 그동안 우리 키스도
한 번 안 했어. 나이만 먹었지, 완전 쑥맥이더라구. 모텔에 들어가서는 용기 있게 내가 먼저 덮쳤어.
그제야 그도 서서히 본능을 드러내기 시작하더라. 오늘 아침까지도 우린 너무나 헤어지기 싫어서
몇 번을 망설였는지 몰라. 서영아, 나 어제 그이하구 네 번이나 했어.”
얼굴까지 붉히며 지란이 호들갑스럽게 말을 마쳤다. 나는 둔탁한 무엇에 머리를 맞은 사람처럼 그녀
를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놀랬니? 많이 놀랬어? 이 정도 가지고 뭘 그렇게 놀라니?”
그때 현관 벨이 울렸다.
“혜난가 보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지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나는 벌어진 입을 그제야 다물었다.
“방금 무슨 일이 있었지?”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혜나와 똘똘이를 안고 있는 세현이 거실
로 막 들어서고 있었다.
“넌, 꼬라지가 왜 그래?”
무릎이 튀어 나온 늘어진 쫄 바지에 헐렁한 민소매 티를 입고 있는 나를 쭈욱 훑어보던 혜나가 물었다.
“왜 이렇게 일찍들 오셨어?”
하품을 늘어지게 하며 묻자 지란이 똘똘이를 안아 들며 말했다.
“지금부터 준비하려면 시간 좀 걸리잖어. 우리, 똘똘이는 오늘 컨디션이 어떠신가?”
“웬만하면 좀 씻고 나와라. 그게 뭐냐? 남자도 있는데.”
“나두 웬만한 것엔 익숙해져서 괜찮아.”
혜나의 말에 세현이 웃으며 말했다.
“니들 언제부터 반말이야?”
“대학 동창인데, 새삼스럽게 웬 존댓말?”
“둘이서 장 봐 와. 얼른 씻고 준비해.”
혜나의 말에 나는 그제야 미적대며 욕실로 들어갔다. 거울 속의 나는 엄청나게도 지저분했다. 눈곱
이 낀 건 예사고, 머리를 얼마나 긁어댔는지 산발인데다, 잠을 너무 잔 탓인지 얼굴까지 부어 있었
으니. 혜나가 그렇게 말할 만도 했다. 이런 모습을 내가 남자 앞에서 보인 적이 있었던가. 그저 겉치
장에 신경 쓰며, 조금도 헝클어진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했던 지난날의 나를 기억해낸다. 마지막 이
별을 통보할 때나, 통보 받는 마지막 날까지도 나는 상대에게 조금의 단점도 보이지 않기 위해 얼마
나 노력을 했던가. 잠을 자고 난 아침이면 그가 먼저 깨어 지저분한 나를 보게 될까봐 먼저 일어나
말끔하게 씻고, 단장을 하던 때도 있었건만. 화장발, 조명발은 그렇다 치더라도 깔끔한 이미지는 심
어줘야 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었건만. 그렇다면 나는 차세현,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일까.
긴장이 없는 만남은 무엇일까. 나는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서둘러 씻었다.
카트를 밀며 코너를 돌 때마다 그가 재료들을 골라 넣었다. 언젠가 여기서 그와 마주쳤던 일을 새삼
떠올리면서 나는 그가 고르는 재료들을 눈여겨보았다. 그는 생각보다 참으로 세심한 것 같았다.
허긴, 디자이너라는데 그 정도는 기본이겠지.
“난 요리는 꽝인데.”
“내가 잘 해.”
나의 말에 그가 덤덤하게 툭 던지며 육류코너 앞에 섰다.
“살림두 잘 못 해. 태생이 게을러서 말야.”
“그것두 내가 잘 하고.”
“그렇다고 돈을 잘 버는 건 아냐.”
“내가 벌면 돼.”
나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네 사람이 먹을 양만큼 주시면 됩니다.”
그는 소고기를 가리키며 직원에게 말했다. 그가 나의 시선을 느꼈는지 그제야 돌아보며 물었다.
“왜?”
“니가 뭐든 다 하면, 난 뭘 하니?”
“그냥 가만히 내 옆에 있기만 하면 돼.”
“감동적이네. 그렇게 말하니까 슬쩍 땡길라 그러네.”
“여자가 이래서 큰 실수를 범하게 된다니까. 입에 발린 소리에 금방 넘어가잖아.”
그가 웃으며 농을 하자 나는 그의 팔을 꼬집으며 흘겨 주었다. 이런 사소한 농담과 행동이 스스럼
없다는 것이 또 한 번 놀랍다.
“이러니까 우리 부부 같지 않냐?”
“싫진 않다는 거, 그게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너는 사랑이란 걸 너무 대단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사랑도 어차피 일상생활이야. 우리가 제 손
으로 먼저 인생이란 녀석을 끝장내지 않는 이상, 살아지는 것처럼 그냥 사랑도 살아지는 거야.
사랑을 너무 과대평가 하지 마. 그래서 이별 앞에서 대책 없이 무너지는 거야.”
“똑똑하기까지 하네.”
나는 알고 있었다. 내 사랑을 언제나 늘, 과대평가하고 있었다는 걸. 아니라고는 하지만, 사실 내
사랑은 멋진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시작되어, 남아지길 원하고 있었다. 사랑에 너무 많은 사치와
허영심을 넣었던 탓에 나는 대책 없이 무너지곤 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세현이 요리를 맡았고, 혜나와 나는 그의 조수를 맡았다. 그리고 지란인 똘똘이와 함께 블록 쌓기를
하고, 또 했다. 반복적인 아이의 놀이는 지란의 진을 빼고 있었다. 그래도 지란은 아이를 좋아했다.
단순한 반복놀이만 아니라면 하루 종일 놀아줄 수 있을 것이다. 손이 많이 가는 잡채요리는 지란이
좋아하는 음식이다. 지단을 만들고, 시금치를 다듬고, 오뎅을 볶고, 돼지고기와 당근을 볶아야 한다. 나는 시금치를 다듬고 앉아 있었고, 혜나는 지단을 만들기 위해 달걀의 흰자와 노른자를 나누고 있었다. 세현은 소고기 전골을 만들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지란이 얘기 들었니?”
시금치를 다듬으며 혜나에게 묻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탁월한 선택이라고 봐.”
“현우랑 헤어질 줄은 몰랐어.”
“잘한 거야. 걘 꽝이었어.”
“결혼하겠다는 말은 어떻게 생각해?”
“나이는 문제 될 게 없어. 여덟 살이 적은 남자도 아니구, 많다는 건 문제 되지 않아.”
“나이가 문제가 아냐. 갑자기 태도가 달라진 지란이 당황스러울 뿐이지.”
“변할 때도 됐잖아. 실연을 거듭하면 할수록 사람은 현명해져.”
“그런 것 같아. 나도 나를 장담할 순 없으니까.”
“머리를 그렇게 길게 잘라 내면 어쩌니?”
다듬던 시금치를 내려다보았다. 잘라 낸 것보다 남겨진 것이 오히려 더 초라하다.
“나도 고백할 거 있어.”
“양파랑 파 좀, 썰어 줄래?
그때 세현이 끼며 말했다. 혜나가 냉장고 문을 열고 양파와 파를 꺼냈다. 나는 혹시라도 혜나의 고백
이 지란의 고백만큼이나 충격적이지 않길 바랬다. 깨끗이 씻은 양파와 파를 가지고 와서 혜나는 도
마 위에 올렸다. 그리곤 나지막이 말했다.
“아이가 아팠을 때, 내가 더 힘들었던 건 다른 이유가 있어서였어.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기도
하는데, 그날은 정말이지 내 대신, 아이가 벌을 받는 것 같아 정신이 확 깨더라구.”
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하는 마음에 귀를 기울이며 시금치를 다듬는 데에 열중을 했다.
“박 수찬씨 기억하니?”
“박 수찬?”
“왜, 회계사라는 사람 말야.”
“아, 얌전한 고양이?”
“얌전한 고양이?”
나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세현의 눈치를 보며 쿡쿡 웃어댔다.
“그러게, 그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앉았다.”
“무슨 말이야?”
“아이가 아프던 날, 나는 그 남자랑 모텔에 있었어.”
혜나의 말에 나는 너무 놀라 시금치를 떨어뜨렸다. 그녀는 세현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놀랄 줄 알았어. 내가 미친년이지. 아이가 아프다고 언니가 나한테 전화를 몇 번씩이나 했던 모양
인데, 남자한테 미쳐서 전화를 못 받았던 거야.”
나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니들이 아주, 내 머리를 앞 뒤 사정없이 후려치는구나.”
“그렇게 됐어. 웃긴 게, 사고를 치려니까 용감해지더라. 나랑 연애하고 싶냐구 물었더니 그 남자,
얼굴 빨개져서는 고개를 끄덕이더라. 사랑해서 그 남자랑 잤다고는 생각 안 해. 난 지란이하고 다른
경우니까. 아직 남편도 있는 유부녀에다가 말야.”
“유부녀가 다른 남자랑 잘 생각은 어떻게 했니?”
“그이는 잤잖니. 그것도 새파랗게 젊은 년이랑. 나라고 못할 거 없단 오기도 사실 있었어.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던 것 같아. 싫진 않았어. 그 남자가 내민 손을 뿌리치고 싶진 않았던 거야. 잡기 전
엔 무섭고, 떨려서 망설였는데 막상 잡고 보니, 겁이 하나도 안 나더라.”
“얘, 똘똘이 배고픈가 봐. 먹을 거 없어?”
그때 지란이 주방으로 들어오며 묻자 혜나의 말은 거기서 끊어졌다.
“잠깐 있어 봐.”
혜나는 밥을 조금 떠서 조금 전에 부쳤던 지단을 잘게 잘라 참기름을 넣고, 김가루와 함께 버물려
작은 주먹밥을 만들었다. 지란은 냉큼 아이의 밥을 집어 먹었다.
“뭘 그렇게 정성을 들여?”
지란이 세현의 옆에 붙어 서며 물었다. 앞치마까지 두른 그의 모습은 마치 가정주부와도 같았다.
세현은 막 혜나가 썰어 놓은 양파와 대파를 냄비에 넣을 참이었다.
“공주님들이 먹을 음식인데, 정성이 부족하면 되겠어?”
“너, 맘에 든다.”
지란이 그의 엉덩이를 툭 치다 나를 돌아보고는 아차 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니 거 마음대로 주물러서 미안하다. 깜박했어.”
“죽을래?”
나는 한 번 흘겨주고, 지란이 아이의 밥을 가지고 나가는 걸 본 후 서둘러 혜나를 돌아보았다.
혜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중요한 건, 그 후로는 진전이 없다는 거야. 아이가 막상 그렇게 아프고 나니까, 내가 한 짓이 엄청
난 것이란 생각이 들더라구. 그제야 꿈쩍도 안하던 양심이 쿡쿡 찔렸나봐. 아이에겐 미안하지만,
사실 그이한테는 미안한 생각 전혀 안 들어. 아이 때문에 내가 그 사람과 더 이상 진전할 수가 없었
던 거야. 그이하고는 아무 상관없이 말야.”
“그 사람은 뭐래?”
“나, 아직 유부녀라는 거 그 사람도 너무나 잘 알고 있어. 내가 선뜻 답을 내리지 못하는 것에 그
사람도 뭐라 할 수 없는 상황이구. 처녀도 아니고, 나이 어린 계집도 아닌데 몸 한 번 섞은 이유로
책임감 운운할 나이는 아니잖아. 그 사람도 잘 알고 있어. 자기가 할 수 있는 게 아직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그래서 내 결정만 기다리고 있는 중이야.”
“너 술 마셨더랬니?”
“아니, 너무 멀쩡한 정신에 사고를 쳤어. 술기운 탓으로 그런 일을 저지르고 싶진 않았어. 당당하게
모텔로 걸어갔는걸.”
나는 혜나의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남자가 잠깐 그리웠던 거니? 나두 그런 적 몇 번 있어. 이 나이에 경험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고,
내가 성녀도 아닌데 그런 기분이 안 들겠니? 비참하지만, 때론 자위도 생각해본 적 있어. 차라리
그게 깨끗하겠다 싶어서. 근데, 그것도 영 안 내키더라. 섹스만 그리운 게 아니었어. 따뜻한 몸이
그리웠던 거야. 살을 한 번 섞게 되면, 그 느낌을 잊을 수가 없잖아.”
나의 말에 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이유도 분명 있었을 거야. 근데 그게 다는 아니었어. 내가 무언가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건, 그 사람이 정말로 싫진 않다는 거야. 난 지금 아이가 있는 가정과 그 사람의 사이에서 갈등
하고 있는 것 같아. 확실치는 않지만.”
“난 아직, 니네 남편 이해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지만 지금 상황에선 니가 섣부른 판단을 하지 않았
으면 좋겠어. 지란인 그렇다 쳐. 넌, 현명한 애잖아. 쉽게 결정하고, 판단해서 행동에 옮길 그런 애가
아니야. 더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결정했음 좋겠어.”
“그래서 지금 생각 중이야. 아이는 내 발목을 잡고, 그 사람은 내 손을 잡고 있어. 어느 쪽이든 내가
뿌리쳐야 하는데, 아이 쪽은 분명 아니라는 사실이야.”
어쨌든 지금으로선 혜나의 말에 안심할 수 있었다. 나중에 손바닥 뒤집듯 엎어질 수 있는 일이긴 하
지만, 나는 혜나가 쉽게 아이를 포기할 친구는 아니라는 걸 확신하니까. 그녀도 아이도 다 같이 행복
해지는 방법은 없을까. 아이에게 새로운 아빠를 준다는 것은 역시 어려운 결정이다. 당장 그녀에겐
행복을 장담할 순 있지만, 아이에겐 상처의 시작이므로. 그리고 그 상처가 오래 지속되면, 그녀도
행복을 더 이상 장담할 수 없게 되므로.
“걱정하지 마. 가끔 여자도 무모해지고 싶을 때가 있잖아. 남자만 당당하게 대놓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여자도 그렇게 할 수 있어. 과감하게 무모해지고 싶을 때가 한 번쯤은 있으니까.”
“돈키호테가 남자라는 법만 있니?”
내 말에 혜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현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나를 보며 물었다.
“그대도 내게 돈키호테가 되어 줄 순 없나?”
그의 물음에 나와 혜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만찬의 준비는 끝났다. 이제 축제를 즐길 일만 남은 셈이다. 벌써 저녁 일곱 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우리는 식탁에 모여 앉아 허기진 사람들처럼 저녁을 서둘러 먹어 치웠다. 만들기까지는 많은 정성
과 시간이 걸리는데도, 먹어 치우는 데에는 한 순간이다. 우리는 웃음꽃을 피울 수 있는 데까지 피
웠다. 어찌나 웃어댔는지, 머리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세현은 세 명이 여자들 속에서도 튀지 않고,
양념처럼 잘 버물려져 있었다. 그는 스펀지처럼 어떤 분위기에서도 잘 흡수하는 듯 했다. 어느 집에
서도 이런 시간이 흐르고 있겠지. 집집마다 마지막 날에 미처 하지 못한 고백을, 혹은 고민을,
그리고 함께 나누었던 지난 시간에 대한 행복을 이야기 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새해에 대한 기대
로 가슴은 한껏 부풀어 올라 있을 것이다. 마지막 날은 솔직하지 못했던 사람들도 솔직해질 것이고,
용서 받지 못할 일도 용서를 받으며, 서로에게 침묵의 포옹을 깊게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똘똘이
를 재우고 우리는 재야의 밤을 함께 보내기 위해 거실에 앉았다. 탁자 위에 케익을 올려놓고, 촛불
을 켰다. 텔레비전을 통해 전해지는 보신각 주변에는 많은 인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우리는 긴장하고 있었다. 드디어 종이 울리기 시작하자 우리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하나, 두울, 세엣…….우리는 큰 소리로 숫자를 부르기 시작했다. 숫자가 하나씩 더해질 때마다 우리
의 목소리는 한층 높아졌다.
열 두울. 우리와 이별한 모든 것들이, 열세엣. 제 자리로 돌아가 사랑하게 하시고. 열 네엣. 우리의 젊
은 상처들이, 열다섯. 우리들의 마음을 더 키워, 열여섯. 우리에게 소외되고, 버려진 모든 것들을.
열일곱. 우리들의 사랑으로 다시 지켜내기를. 그렇게 중얼거리며 나는 종소리를 가슴에 간직하고
있었다. 서른 번째의 종소리가 울리자 세현은 샴페인 병을 들었다. 우리는 다 같이 마주보고 앉아
서른하나, 서른 둘, 마지막 서른셋을 크게 외치는 순간 세현은 샴페인을 동시에 터뜨렸다. 우리는
아이처럼 흥분하여 서로의 손을 잡고 몸을 들썩거렸다. 서른 세엣. 아직도 만나지 못하고 차례를
기다리고 있을 우리들의 사랑과 증오를 위하여. 그리고 세상의 모든 삼십대를 위하여. 우리는 건배
를 했다. 이 순간에 우리가 함께 할 수 있음을 나는 감사했다.
“나, 오늘 무지 행복해.”
그렇게 말하자 마치 준비라도 한 것처럼 나는 눈물을 흘렸다. 느닷없는 울음을 터뜨리자 지란이 뒤
를 이어 눈물을 쏟았다. 그리고 혜나까지도. 우리는 이렇게 기쁜 날에, 웃음보다도 눈물로 축제의
기분을 달랬다. 우리 셋은 손을 꼬옥 잡고 그렇게 이천육 년의 마지막 밤을 가장 솔직한 눈물로 배웅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