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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 -20-

러브콜 |2007.03.13 10:15
조회 304 |추천 0

숨겨진 과거

  나는 이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가끔 의사로부터 사형선고를 받고서도 신념과 의지로 재생에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었고, 텔레비전에서도 본 적이 있었다. 양선아라고 그 기적의 주인공이 되지 말라는 법은 그 어디에서도 없었다.

  나는 친구들에게, 후배들에게, 선배들에게, 알고 지내던 모든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어 위암에 대한 자료를 뭐든지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한동안 연락을 끊고 있다가 불쑥 전화를 해서 엉뚱한 부탁을 하는 나를 의아해 하는 그들에게 나는 「글을 한 번 써 보기 위해 그런다」는 핑계를 댔다.

  특히 나는 치료법에 대해서 더 많은 자료를 필요로 한다고, 그리고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는 말을 강조했다. 내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그들은「후세에 길이 남을 좋은 작품을 쓰기 바란다」면서 진정으로 내 부탁을 들어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나는 큰 감동을 받았다. 한결같이 좋은 사람들이었다. 어쩌면 그들이 보내 주는 그 자료 속에 기적이 숨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 기적이 틀림없이 숨어 있을 것이라고 나는 믿고 싶었다.

  제일 먼저, 물분자를 음이온 시켜 음이온화된 암세포와 결합하게 함으로써 암세포의 성장을 억제할 뿐만 아니라 암세포까지 죽이는 기적의 물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나는 그 길로 달려가 그 물을 구해다가 양선아에게 마시게 했다.

  그런데 정말 기적이 일어난 것일까? 하루 지난 다음 날 거짓말처럼 그녀의 통증이 멎은 것이다.

 「선생님, 지난번 내 생일 때 끓여 주셨던 그 미역국이 먹고 싶어요.」

  통증이 멎자 양선아는 제일 먼저 미역국을 찾았다.

 「알았어. 내가 금방 끓여 줄게.」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서둘러 미역국을 끓였다.

 「선생님이 끓인 미역국은 정말 맛있어요.」

  양선아는 비록 적은 양이었지만 내가 끓여 준 미역국을 어린아이들이 초콜릿을 먹듯이 아주 맛있게 먹었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잔혹할 만큼 기적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계속해서 주위의 사람들로부터 별의별 많은 정보가 입수되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 가장 절망의 늪에 빠져 있던 내 마음에 희망을 준 것은 방송국 PD인 선배의 말이었다. 그 선배의 말에 의하면 자기가 알고 지내는 의사의 어머니가 위암 판정을 받고 한의원에서 조제해 준 약을 복용한 후 완쾌되었는데,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의사의 어머니는 생존해 있다는 것이다.

  나는 큰 기대감을 가지고 선배가 소개해 준 그 한의원으로 달려갔다.

 「그 동안 치료를 쭈욱 해봤지만 어떤 사람은 약을 먹고 호전되는 사람이 있었고, 또 어떤 사람은 별 차도가 없었습니다. 아마 그 차이는 환자 자신의 마음에 있는 것 같아요.」

  한의사는 약을 조제해 주면서 환자의 의지를 강조했다.

  양선아는 그 한의사가 조제해 준 약을 곧바로 복용했으나 설사만 할 뿐 이렇다 할 차도를 보이지 않았다. 마음의 의지만 가지고도 안 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으며, 이제 가을이 깊어 가고 있었다.

  양선아의 몸은 점점 야위어 갔으며, 통증 때문에 잠 못 드는 밤이 잦아졌다.

 「얼마나 남았을까…….」

  양선아는 신음처럼 낮게 중얼거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차가운 바람이 칼날보다 더 날카롭게 슬픔으로 가득 찬 그녀의 가슴을 베고 지나갔다. 그녀는 베란다 창문을 열어 놓은 채 흔들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고 밖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진통 주사를 맞고 난 후라 통증은 없었다.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나뭇잎들이 불어오는 바람에 하나, 둘…… 계속해서 힘없이 떨어져 쓸쓸하게 뒹굴고 있었다.

 「휴-!」

  점점 앙상해지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던 양선아는 오래 전에 읽어 기억이 희미한 오 헨리의 단편소설「마지막 잎새」를 떠올리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 소설에서 폐렴을 앓고 떨어지는 담쟁이덩굴 잎새를 세면서 죽어 가는 존지, 존지를 살리기 위해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 그 담쟁이덩굴에다 마지막 잎새를 그려 붙여 놓고 죽은 늙은 화가 버만을 생각하면서 양선아는 자신도 모르게 떨어지는 나뭇잎을 바라보며 수를 거꾸로 세고 있었다.

 「서른, 스물아홉, 스물여덟, 스물일곱…….」

  하지만 양선아는 나무잎이 다 떨어져 앙상한 나뭇가지만 남는다고 해도 죽고 싶지 않았다. 절대적으로 죽어서는 안 되었다. 저 나무에다 마지막 잎새를 그려 붙여 놓을 늙은 화가 버만 같은 사람은 없었지만 그녀에게는 그녀를 아껴 주고 사랑해 주는 이재우가 있었다. 그의 품안은 그녀에게 있어서 포근한 아버지요, 든든한 오빠요, 다정한 친구요, 따뜻한 애인이었다.


  어머니의 말에 의하면 양선아의 아버지가 죽은 것은 그녀가 네 살 때였다. 그녀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단 한 가지도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애틋하게 그리움 같은 것을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녀에게 아버지를 떠올리게 하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없게 한 것은 아버지의 존재를 한사코 감추려 했던 어머니의 영향이 전혀 없었다고 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양선아가 아버지에 대해 물을 때마다「네가 네 살 때 죽었다」는 한 마디의 말로 함축해 버리고 입을 다물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무슨 일을 하던 사람이고, 왜 죽었는지도 말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이름 석자도 몰랐고, 아버지와 관련된 사진조차도 한 장이 없었다.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 하나로만으로도 양선아는 슬프고, 괴로웠다. 그건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보다도 남들이 다 있는 아버지가 자신에게 없다는 사실이 가난해서 도시락을 못 싸 오는 친구처럼 그녀를 슬프게 하거나 괴롭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런데 양선아가 대학교 삼 학년 때 아버지가 서울 그룹의 양필동 회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양 회장이라는 것을 안 것은 양 회장의 죽음을 매스컴에서 대문짝만하게 다루고 난 열흘 뒤였다.

  어머니 또래의 웬 남자가 고개를 뻣뻣이 들고 도도하게 집으로 찾아온 그 날, 어머니는 당황해 하며 죄지은 사람처럼 황급히 발밑으로 시선을 떨어뜨리고 그 남자를 맞이했다. 양선아는 방안에서 들려오는 작은 소리에서 양 회장이 아버지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충격 받기는커녕 그냥 남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처럼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었다. 아버지가 네 살 때 죽었다고 거짓말을 한 어머니에 대한 원망도 없었다. 그녀 또한 그 사실에 대해 어머니에게 단 한 마디도 묻지 않았다.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그때 찾아온 남자는 그녀의 배다른 큰오빠가 되는 셈이었다.

  그날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그 남자가 들고 온 많은 서류에다 묵묵히 양선아와 남동생의 도장을 찍어 줬는데, 그녀는 그게 아마도 상속에 관한 서류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어쩌면 많은 돈이 걸려 있는 문제인 것도 같은데 모든 걸 포기하고 아무 말 없이 도장을 찍어 주면서까지 그 남자의 집안과 그녀를 연결시키려고 하지 않은 어머니로 인하여, 우리나라의 대재벌인 양 회장이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도 그녀의 환경에 달라진 것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동네 입구에 있는 시장에서 작은 생맥주집을 운영하고 있던 어머니는 생활비는 물론 양선아와 남동생의 대학교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하루도 쉬지 않고 기름에 닭을 튀겨 사람들에게 맥주를 팔았고, 그녀는 그런 어머니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공부를 했다.

  그렇게 일 년이 흐르고 나서 양선아의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 어머니가 운영하는 생맥주집이 세 들어 있는 건물이 전기 누전으로 인하여 불이 났던 것이다. 불행 중 다행으로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소방도로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곳이라 건물 전체가 고스란히 타도록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화재보험에도 가입되어 있지 않은 건물이라 그 어디에서도 보상을 받을 수 없었다.

  그 충격으로 실신한 양선아의 어머니는 일어나지 못하고 계속 앓아누워 있어야 했다.

  그때부터 양선아의 삶은 어둡고 긴 터널 속을 걷기 시작했다. 정상적인 직장에서 받는 월급으로는 어머니의 약값과 남동생의 학비는 물론 그 동안 장사를 하면서 진 빚을 갚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오랜 갈등과 고민 끝에 그녀가 선택한 것은 그런 대로 고소득을 올릴 수 있는 룸살롱이었다. 룸살롱에는 이미 그녀와 같은 처지였던 친구가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이루어졌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스물다섯 살이었다.

  룸살롱「아방궁」에 처음 나가던 날 정지영 마담이 신기하다는 표정을 하고서 양선아에게 너 소설가라면서? 라고 물었고,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소설가가 아닌 것도 있었지만, 이젠 소설가가 되고 싶었던 꿈을 가슴속에 묻어버려야 하는 괴로움 때문이었다.

  그렇게 해서 양선아는 눈물을 머금고 마음에도 없는 남자들에게 억지웃음을 지으며 술을 따르고, 춤을 추고, 몸을 팔았다. 그녀는 그런 밑바닥 생활을 일 년 반 동안 하면서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어 버렸다.

  양선아가 룸살롱에 나가 처음부터 몸을 판 것은 아니었다.

  어느 날 룸살롱의 전무가 친구 유진이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려는 양선아를 다시 아가씨들의 대기실 안으로 불러들였다.

 「전무님, 왜요?」

 「넌 아름다운 여자야.」

  전무의 표정은 화가 난 듯 투박한 소나무 껍질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런데 넌 너무 잘난 척하고 있어.」

  전무의 냉소적인 말투에 양선아는 의아해 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았다.

 「네가 여기 나오는 이상은 싫든 좋든 손님이 원하면 이차를 나가야 하는 법이야.」

  전무가 여기서 말하는 이차는 손님과의 외박을 의미했다. 양선아는 드디어 올 것이 오고 말았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걸 느꼈다.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유혹을 뿌리쳤던가. 이젠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할 생각이라면 당장 여길 그만 두어야 할 거야.」

  전무가 대기실 문을 신경질적으로 닫으며 나갔다. 입술을 깨문 양선아의 눈이 발갛게 충혈 되었다. 사랑은커녕 정도 들지 않은 남자들에게 사타구니를 벌려 몸을 맡긴가는 것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이곳을 그만 둘 수는 없었다. 그녀는 적지 않은 수입으로 인하여 나아지는 생활을 보면서 꿀맛을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과거엔 여자에게 있어서 순결이 목숨보다 소중한 것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현재에 와서 퇴색되어 가는 순결이라는 것 때문에 그 꿀맛을 잃어버리기에는 너무나 안타까웠다.

  양선아는 그때 침대 하얀 시트에 빨간 피를 묻히게 했던 첫 경험의 남자를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남자의 이름은커녕 얼굴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날 양선아는 한참을 어둠 속에서 무릎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흘렸다. 적어도 그녀는 순결만큼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잃으려고 했었다. 그녀는 뻥 뚫린 가슴속으로 밀려오는 허전함 때문에 뼛속까지 스며드는 차가운 새벽바람을 맞으며 호텔을 나와 친구들과 자취하고 있는 잠원동 원룸으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도 계속 소리 없이 흐느꼈었다.

  양선아가 그런 생활을 하면서 그나마 참고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려운 고비가 있을 때마다 그녀는 그 남자의 보호를 받았다. 그의 가슴은 넓고 포근했었다. 비록 처자식이 있는 유부남이었지만 그녀 역시 그 남자를 사랑했었다. 원하지 않는 결혼을 하기 전까지는. 그 남자의 이름은 최은수였다.

  그 동안 양선아는 최은수를 잊고 지냈었다. 아니, 사실은 잊고 지냈던 것은 아니었다. 오직 잊고 싶어 애썼을 뿐이었다. 잊고 싶었던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사랑하지도 않은 남자와 결혼을 한 것은 돈도 돈이지만 지난 과거 생활에서의 도피였으며, 그 과거를 기억 저편으로 꼭꼭 묻어 두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결혼 생활 일년 동안 묻어 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죽어서 땅 속에 묻혀 살이 썪을 때까지 과거의 기억은 미친개의 이빨처럼 그녀를 끝까지 물고 늘어질 것이다.

  양선아가 원하지 않는 결혼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오직 돈이 필요해 룸살롱에 다녔던 이유와 같았다.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하는 여느 여자들처럼 희망이나 행복을 가지고 결혼한 게 아니었고, 그녀는 다만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이왕 결혼을 선택한 이상 양선아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하고 싶었다. 그녀는 결혼하기 전 자신에게 속한 과거의 파편 하나라도 앞으로 남편이 될 남자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특히 그녀는 자신의 처녀성을 남편에게 확인시켜 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는 처녀막을 수술하는 대신 결혼식에 앞서 달거리가 얼추 끝나는 날을 선택해서 남편을 유혹하고, 떳떳하게 자신의 처녀성을 확인시켜 줄 수 있었다. 그날 남편은 그녀가 묻힌 침대 하얀 시트의 빨간 피를 보고 매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나 불행한 사람들이 다 그렇듯이, 행복은 양선이의 곁에 한순간도 머물지 않았다. 애당초 그녀의 결혼은 깨지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시어머니가 운영하는 옷가게에서 심부름이나 하면서 용돈을 타 쓰는 남편은 한 마디로 놈팽이나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세 살 때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 밑에서 제멋대로 자란 외아들이라 모든 게 자기 마음 대로인 남편의 비위를 맞추는 게 양선아는 룸살롱에서 손님들의 비위를 맞추는 것보다 더 어렵고 힘들 때가 있었다. 거기다가 늦게 결혼한 탓인지 몰라도 약간의 의처증까지 있어 그녀의 단독 외출을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 그녀는 닭장에 갇힌 암탉이었다.

  또 남편은 몸이 뜨거운 남자였다. 한 달에 한 번씩 찾아오는 달거리도 개의치 않고, 하루도 빠짐없이 양선아의 몸을 원했다. 남편은 자기 전에 성관계를 갖지 않으면 잠을 못 자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룸살롱 호스티스의 경력을 갖고 있는 양선아는 항상 남편에게 미안한 감정과 죄책감을 가지고 어떠한 고통이라도 참고 견뎌 내기 위해 입술에 피가 날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그렇게 해야만 조금이나마 과거의 어두웠던 그늘과 죄책감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병환 중이던 어머니의 죽음으로 양선아는 더 이상 버틸 힘을 잃고 말았다. 다행히 아이가 생기지 않아 남편과 홀가분하게 갈라설 수 있었다.

  룸살롱에서 호스티스 노릇을 할 때 양선아는 실수로 중절 수술을 두 번이나 한 적이 있었다. 태어나기도 전에 죽은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몰랐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 후부터 하고 싶어도 임신이 되지 않는다는 거였다.

  양선아는 결혼하고 몇 개월 동안은 남편보다 시어머니의 보살핌으로 그럭저럭 평온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에게서 임신 소식이 없자 갑작스럽게 마음이 돌변한 시어머니는 금방 숨이 끊어질 사람처럼 안달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시어머니의 안달이 그녀를 들들 볶는 극성으로 발전하면서 상당히 위협적인 불안이 회오리바람처럼 그녀를 휘감으며 괴롭혔다.

  시어머니의 극성에 못 이겨 이 병원 저 병원을 옮겨 다니며 의사에게 아랫도리를 내보이는 수치심보다 먹이를 노리는 살쾡이 같은 시어머니의 날카로운 눈빛이 양선아를 더 참담한 심정으로 몰고 갔다. 그녀나 남편이나 의학적으로 별다른 이상이 없었지만, 죄인 취급은 그녀가 당해야 했다.

  어느 병원에서나 이제 결혼한 지 몇 달이나 되었다고, 급하게 마음먹지 말고 느긋하게 기다리면 좋은 소식이 있을 거라는 의사의 위로가 있었지만 그녀는 시어머니의 냉랭한 시선을 점점 견딜 수가 없었다.

  양선아는 아이를 낳지 못 한다는 죄책감 때문에 자기 손으로 남편에게 첩실(妾室)을 골라 주는 조선 여인이 못 되더라도 정씨 가문의 대를 끊는 원인 제공자가 되어 원한을 한 몸에 받고 싶지 않았다.

  양선아의 입에서 이혼 이야기가 먼저 나오자 무엇보다도 며느리가 손자를 낳아 주길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던 시어머니가 드러내 놓고 반가워했다.

  그러나 결혼할 때 있었던 거래조건 때문에 위자료는 받지 못했다. 아니, 이혼 얘기가 나오자마자 결혼할 때의 일을 밤을 새워도 끝이 없을 것 같이 미주알고주알 따지는 시어머니를 보며 더럽고 치사해서 아예「위자료」의「위」자도 꺼내지 않았고, 결혼한 지 일 년 만에 이혼을 했다. 그때 그 집을 나올 때의 그녀의 기분은 결혼할 때처럼 한편으로는 두려우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후련하기도 한 복잡 미묘한 감정을 느꼈었다.

  처음엔 무일푼으로 시작된 이혼 생활이라 무척 힘들고 고생스러웠지만 양선아는 자유라는 게 어떤 건지 절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게 행복이었던 것이다. 대학 선배의 도움으로 좋은 직장을 잡을 수 있었고, 신춘문예에 수필이 당선되면서 문단에 등단도 했고, 이제 힘든 일도 부러울 것도 없었다. 그런데 가까이 오는 줄 알았던 행복의 여신은 애당초 그녀를 멀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양선아에게 있어서 갑작스런 남동생의 죽음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충격이었고 엄청난 슬픔이었다. 미국에 유학 중이던 남동생이 식료품을 사기 위해 교포가 운영하는 슈퍼마켓에 들어갔다가 때마침 들이닥친 흑인 강도들이 쏜 총에 맞고 그 자리에서 즉사한 것이다.

  양선아는 강한 여자였다. 그렇다고 동생의 죽음 앞에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만큼 강한 여자는 아니었다.

  남동생을 한강에 뿌리고 집으로 돌아온 양선아는 심한 우울증과 좌절감 때문에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전화선도 빼놓고, 불도 켜지 않은 채 어두운 구석에 숨어 그 누구와도 접촉을 끊고 있었다.

  처음으로 양선아는 커다란 절망을 느꼈다. 어머니의 가게가 불이 났을 때도, 룸살롱에 나갈 때도, 원하지 않은 결혼을 하고 이혼을 했었을 때도,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그녀는 이렇게까지 절망은 하지 않았었다. 그녀는 한 번 절망하면 끝내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아 이를 악물고 견뎌 왔었다. 그러나 이번 동생의 죽음 앞에서는 그녀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남동생의 못 다한 나머지 생을 대신해서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생길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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