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호님이 힘드실까봐^^
편집(?)장난아니게 힘드네..
근데 요런데가 막 올려두 되는건가요?
오늘 어느날 갑자기 시리즈 D-DAY?고가 새벽에 방송한다던데..ㅋㅋ
고거보고 출근할람 짱나겠다 ㅠ
즐독 하세요~
다 볼 수 있는 아이
어린이의 눈에는 어른들이 볼 수
없는 것이 보인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이 꼭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상상할 수 없는 것도 있다.
-은희와의 만남 중에서-
그날은 수업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집으로
향했다. 중간고사를 치르고 나서 사흘 내내 술
을 마셨더니 몸도 으실으실 떨리고 몸에 기운
이 하나도 없었다. 잠을 한숨 푹 자고 나면 기
분도 한결 나아질 것 같았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향하는데 놀이
터에서 어린 여자애가 혼자서 멍하니 앉아 있
는 게 보였다. 낯이 익은 걸로 봐서 우리 아파
트에 사는 애 같았다. 평상시 같았으면 왜 혼
자 나와 있느냐고 말을 붙였겠지만 그날은 몸
상태도 안 좋고 해서 그냥 지나쳤다. 아파트
입구로 걸음을 옮기는데 여자애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저기 또 한 명 지나가네. 오늘은 많이 보이
는구나.”
뭐가 지나간다는 건지 궁금하기도 해서 뒤
를 돌아보았다. 아파트 광장에는 아무 것도 보
이지 않았다. 시월의 나른한 햇살만이 여기저
기 서 있는 자동차 위에서 미끄러지고 있었다.
소녀를 보았지만 그 아이는 그 자리에서 꼼
짝도 안 하고 앉아 있었다. 나는 그 아이가 무
료해서 혼잣말을 한 거라고 생각하고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나는 침대 위로 쓰러졌
다.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눈을 떠 보니 사방
이 어둑컴컴했다.
불을 켜고 시계를 보았다. 저녁 여덟시였다.
세시쯤에 들어왔으니 거진 다섯 시간 가량을
잔 셈이었다.
저녁을 먹고 나서 프린터 용지를 사러 밖으
로 나갔다. 문방구에서 용지를 사 가지고 돌아
오다 보니 놀이터에 시꺼먼 물체가 보였다. 누
군가 해서 보았더니 집에 들어갈 때 보았던 바
로 그 꼬마였다. 꼬마는 처음에 보았던 그 자
리에 똑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나는 꼬마에
게 다가갔다.
“집에 안 들어가고 여기서 뭐하니? 엄마가
걱정하겠다.”
“엄마요? 아직 안 들어왔어요. 우리 엄마는
제 걱정은 조금도 안 해요, 그러니 아저씨도
신경쓰지 마세요!”
고개를 옆으로 휙 돌리면서 앙칼진 목소리
로 대답했다. 나는 그 애를 자세히 뜯어보았
다. 국민하교 1학년쯤 됐을까. 상당히 예쁘고
귀여운 애였다. 하지만 얼굴에는 그 나이 또래
의 아이들에게서는 찾아 보기 힘든 어두운 그
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나는 아이의 옆에
앉아 말을 걸었다.
“너 엄마한테 혼났구나? 그래서 여기 나와
있는 거지?”
“……”
“엄마에게 꾸중들었다고 집에 안 들어가면
어떡해. 혼자 들어가기 무서워서 그러니? 이
오빠가 같이 가 줄까?”
“정말로 엄마는 집에 없다니까요! 그런데 아
저씨는 누구예요?”
“아저씨?”
나는 손바닥으로 볼을 쓸어 보았다. 며칠째
폭음으로 상한 꺼칠꺼칠한 피부가 만져졌다.
“난 말이지 아저씨 아니라 여기 사는 오빠야.
난 그냥 지나가다가 네가 심심한 것 같아서.”
“몇동 몇호에 사시는데요? 우리 엄마가 신
원이 불분명한 사람과는 말도 하지 말랬어요.”
“나 38동 906호. 너 참 똑똑하구나. 이름이
뭐니?”
“나 은희예요. 서은희. 아저씨는 이름은 뭐
예요?”
아저씨?
난 이제부터는 오빠라고 부르라고 한 뒤에
이름을 말해 주려는데 은희가 벌떡 일어났다.
“야, 엄마 아빠다! 아저씨 나중에 봐요.”
아이는 주차장 쪽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검은 차 한 대가 주차할 공간을 찾아서 천천히
움직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실내등이 켜진
차 안에는 젊은 남녀가 앉아 있었다.
나는 달려가는 소녀의 뒷모습을 보다가 어
깨를 으쓱하고는 집으로 들어갔다. 맞벌이 부
부를 둔 아이의 하루를 훔쳐본 것만 같아 기분
이 울적했다.
그 뒤로 한동안 은희와 마주칠 기회가 없었
다. 나는 다시 분주한 학교 생활로 빠져 들어
갔고 은희와의 만남은 쉽게 잊혀졌다.
10월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별다른 약
속도 없고 해서 일찍 집으로 향했다. 놀이터를
지나서 집으로 들어가려는데 멍하니 앉아 있
는 은희가 보였다. 눈길을 돌릴 때를 기다렸다
가 나는 손을 들어 아는 체를 했다. 그리곤 지
나쳐 가려는데 은희가 나를 손짓으로 불렀다.
“아저씨, 이리 와 보세요.”
“아니 왜?”
집에 들어가도 마땅히 할 일도 없던 차라 나
는 은희 곁으로 다가갔다.
“아저씨 뭐 물어 봐도 돼요?”
“마, 아저씨가 뭐냐. 오빠라고 불러.”
은희의 머리를 가볍게 어루만져 주며 옆에
주저앉았다.
“알았어요, 아저씨. 근데, 아저씨, 저기 그네
에 기대고 있는 사람 보여요?”
손을 들어 은혜가 그네를 가리켰다. 그네에
는 아무도 없었다. 그네뿐 아니라 아이들이 놀
이터에서 뛰어놀기에는 제법 쌀쌀한 날씨여서
인지 놀이터 그 어디에도 아이는 고사하고 강
아지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그네에 뭐가 있다고 그래?”
“아저씨, 진짜 저 사람 안 보여요? 지금 우
리 쪽을 보고 있잖아요. 막 일어났어요. 이쪽
으로 걸어오고 있어요.”
“마, 뭐가 보인다고 그래? 너 오빠 놀리는
거지?”
나는 은희가 심심해서 장난을 치는 거라고
판단하고 은희의 두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런
데 예상외로 은희의 두 눈은 진지했다.
“정말인데. 안경도 썼잖아요.”
은희가 풀 죽은 목소리로 말랬다. 내가 잘못
봤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고개를 들었지만 역
시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은희가 나를
놀리려고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한순간 머릿속에 혼란이 왔다. 내가 제대로
본 것이 맞고 은희가 진실을 이야기한 거라면,
은희의 정신 상태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나
는 표정을 바꿔 진지하게 말했다.
“은희야, 여기에는 너하고 나밖엔 없어. 네
가 뭘 잘못 본 모양인데 여기서 이러고 있지
말고 집으로 들어가거라. 매일 이렇게 멍하니
앉아 있으니 눈에 헛것이 보이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은희를 일으켜 세
웠다. 은희는 나의 말에 삐졌는지 입술을 쭈삣
쭈삣 내밀었다.
“진짜라니까요! 나는 거짓말 안 해요. 아저
씨도 우리 엄마랑 똑같구나! 자기가 안 보인다
고 날 거짓말장이로 취급하고. 난 정말로 봤다
니까요!”
은희는 금세라도 울음을 터뜨릴 기세였다.
나는 적이 당황스러워서 재빨리 은희를 구스
르기 시작했다.
“은희야, 오빠는 말이지 네가 거짓말했다는
것이 아니고 그러니까 그래그래, 이 오빠가 잘
못 볼 수도 있다는 거야.”
“그래요! 아저씨가 못 본 거예요!”
“그래, 누가 뭐래니?”
난 다시 주저앉았다. 은희를 남겨 놓고 집으
로 들어가 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웬지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아이의 정신 상태
가 더 나빠지기 전에 뭔가 조치를 취해야만 했
다. 나는 간단하게 아이의 정신 상태를 체크해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은희야, 지금도 그 안경 쓴 사람이 보이니?”
“아니요! 저쪽으로 들어갔어요.”
은희가 내가 사는 아파트 입구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 그런데 아까 그 사람에게도 그림자
가 있었니?”
“그림자요? 없어요! 난 그래서 알 수 있어
요. 그림자가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도 볼
수 있지만 그림자 없는 사람은 내 눈에만 보인
다는 걸요.”
문득, 은희가 정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었다. 나는 은희를 정상아라는 전제하에서 질
문을 던져 볼 필요가 있음을 느꼈다.
“그럼, 그림자 없는 사람들은 자주 보이니?”
“네! 요즘은 하루에도 몇 명씩 봐요. 집에서
도 보이고요.”
“네가 언제 그런 사람들을 처음으로 봤니?”
“음 몇 달 전이에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였어요. 아빠랑 엄마랑 병원에 갔어요. 큰아
빠랑 사촌오빠들도 모두 왔어요. 할아버지는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나도 못 알아 보고, 숨
만 헉헉거렸어요. 그러다가 할아버지의 헉헉
거리는 숨소리가 커지자, 엄마가 나를 복도로
내 보냈어요.
나는 혼자 복도 의자에 앉아 있었어요. 그때
복도 저편에서 검은 옷을 입은 아저씨가 걸어
왔어요. 얼굴이 너무도 무섭게 생겨서 겁이 덜
컥 났어요. 그래서 엄마를 부르려고 병실로 들
어가려는, 그 사람은 나보다 한 발 앞서서 병
실로 들어갔어요. 문이 닫혀 있었는데 그리고
쑤욱 들어갔어요.
저는 그 순간 눈을 의심했어요. 내가 잘못
본 건가 보다고 생각하고 그대로 앉아 있었어
요. 무서웠지만 병실로 들어가서는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한참 있으니 이번에는 여러 사람이 다시 복
도 저편에서 걸어왔어요. 그들은 모두 할아버
지나 할머니처럼 늙은 사람들이었어요.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데 발자국 소리가 하나도 안
나는 거예요. 그런데 이들은 처음에 보았던 사
람처럼 무섭지 않았어요. 낯익다는 느낌이 드
는 사람들이었죠.
그들은 나를 힐끗 돌아보더니 아까 그 사람
처럼 닫혀진 병실 안으로 스르르 들어갔어요.
그러고 나서 얼마 있다가 병실 안에서 슬피 우
는 울음소리가 들렸어요.
나는 왜 우나 궁금해서 병실로 들어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병실 안에서 아까 들어
갔던 사람들이 스윽하고 나오는 것이었어요.
저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어요. 그런데 그들
사이에는 아까까지만 해도 헉헉대던 할아버지
가 끼어 있는 것이었어요.
할아버지는 병이 다 나았는지 멀쩡해 보였
어요. 할아버지는 웬 할머니의 손을 잡고서 검
은 옷을 입은 사람의 뒤를 따라갔어요. 그 기
분 나쁘게 생긴,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은 한참
걸어가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저를 뚫어지
게 쳐다보는 거였어요. 저는 겁이 나서 얼른
시선을 돌렸어요.
그러다 한참 뒤에 다시 보았더니 아무도 없
었어요. 나는 울음소리가 더 커져서 병실로 들
어갔어요. 그런데 거기 신기하게도 할아버지
가 누워 있더라고요. 내가 깜짝 놀라 입을 쩍
벌리고 있으니 엄마가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며 나를 부둥켜안고 우는 거였어요.
나는 그래서 아니라고 했죠. 할아버지가 저
쪽으로 걸어가는 걸 내가 봤다고 말예요. 내가
목소리를 높이자 사람들이 나를 빤히 쳐다봤
어요. 결국 저는 복도로 끌려나가 엄마에게 혼
났어요. 쓸데 없는 소리 한다고 진짠데.”
“그래?”
믿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무시해 버릴
수도 없는 이야기였다. 나는 은희가 이상한 만
화책을 많이 봐서 그런 거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아저씨! 나 얼마 전에 큰집에 놀러
갔다가 놀라운 사진을 봤어요.”
“놀라운 사진?”
나는 은희의 이야기에 자꾸 말려들고 있다
는 찜찜함을 저버리지 못한 채 물었다.
“할아버지 사진 옆에 할머니 사진이 있는데,
그 할머니는 내가 병원에서 본 할머니였어요.
아버지는 내가 어렸을 때 할머니가 돌아가셨
다고 했는데 그 할머니가 분명해요.”
“네가 몸이 약해서 헛것을 본 모양이구나.”
나는 어린 소녀의 거짓말치고는 너무도 완
벽하다는 생각을 하며 자신없는 어투로 중얼
거렸다.
“아네요! 내가 본 건 헛것이 아니라 귀신이
에요. 전 귀신을 볼 수 있는 아이인가 봐요.”
“귀신은 아무도 못 보는 거야. 네가 볼 수 있
다고 생각하니까 자꾸 헛것이 보이는 것 뿐이
야.”
“난 정말로 그런 게 안 보였으면 좋겠어요.
귀신이 얼마나 무서운데요. 요즘은 집에서 자
려고 누우면 천장 귀퉁이에 움크리고 있는 사
람들이 보여요. 그들은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
기도 하고 웃시고 해요. 내가 무섭다고 울어도
소용없어요. 엄마가 달려와야지만 그제서야
그들은 쓰윽하고 사라지곤 해요.”
나는 은희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예쁘장하게 생긴 아인데 어쩌다 이 지경에 이
르렀는지 참으로 안타까웠다.
“정말이에요! 한번은 이런 적이 있었어요.
그날은 큰집에서 제사 지내는 날인데 저는 그
날 마루 소파에서 잠이 들었어요. 그러다가 잠
에서 깨어나 보니 마루 가득 수많은 사람들이
와 있는 거예요. 어떤 사람들은 마룻바닥에 누
워 있고, 어떤 사람은 허공에 둥둥 떠 있고, 어
떤 사람은 텔레비전을 재미있게 보고 있더라
고요.
그런데 더 신기한 것은 부엌에 있던 큰어머
니가 그 사람들을 통과해서 안방으로 들어가
는 거였어요. 내가 그래서 엄마에게 마루에 이
상한 사람들이 많다고 했더니 엄마는 내 말을
믿으려 들지 않았어요. 난 그날 저녁에 집에
와서 엄마에게 되게 혼났어요. 앞으로 한번만
더 그딴 소리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면서요.”
머릿속이 혼란스럽기만 했다. 은희의 정신
상태는 내가 예상한 것 이상으로 심각했다. 은
희는 자신이 본 것이 실제한다고 확고히 믿는
눈치였다.
“전 그때부터 아무한테도 이런 얘기 안 했어
요. 아저씨도 제가 거짓말한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전 거짓말 안 해요. 유치원 다닐 때는
착한 어린이 상도 탄 적 있어요.
아저씨도 오늘 한번 방에 들어가서 자기 전
에 불을 끄고 자세히 살펴봐요. 입고 있는 옷
을 옷걸이에 걸어놓고 그 옷을 살펴보세요. 그
사람들은 사람들이 입던 옷을 좋아해요. 아마
자세히 보면 옷 안에 사람이 들어가 있는 게
보일 거예요. 진짜라니까요.”
나는 은희의 말대로 상상을 해 봤다. 방으로
들어간다. 웃옷과 바지를 벗어 옷걸이에 걸어
놓는다. 불을 끈다. 침대에 눕는다. 벽을 보니
이상한 사람들이 내가 벗어놓은 스웨터와 바
지를 걸치고 있다. 그들은 벽에 선 채로 나를
빤히 내려다 본다?
갑자기 전신이 오싹해 왔다. 어쩌면 오늘 저
녁에 잠을 설치게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
었다.
“그런데 오빠, 그 사람들은 내가 자기들을
볼 수 있다는 걸 모르는 것 같더라고요. 한번
은 학교에서 그런 아이를 봤어요. 쉬는 시간에
애들하고 막 떠들고 있는데, 천장으로 한 여자
아이가‘휙’하고 지나가는 것이 보였어요. 무표
정한 얼굴로요. 나는 순간 소름이 쫙 끼쳤어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시끄럽게 떠들던 애들
도 뭔가를 눈치챘는지, 일제히 얘기를 멈추는
거였어요. 한동안 잠잠한 상태에서 서로 보고
있다가‘와아!’하고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어
요. 그래서 나는 애들에게 물어봤어요.. 너희
들도 그 여자아일 봤냐고. 그랬더니 무슨 얘기
를 하는 거냐면서 나를 상대도 안 하는 거 있죠?”
나는 은희가 이상한 세계 그것이 은희의 정
신 착란에 의한 것이든 정말로 은희의 눈에 보
이는 것이 사실이든 간에 에 빠져들었다고 짐
작했다. 은희의 얘기를 단순한 거짓말로 여기
기엔 너무 이상한 점이 많았다.
은희가 말하는 혼령의 이미지와 심령학 공
부를 하는 친구 윤석이 나에게 들려 준 혼령의
이미지와 너무도 일치한다는 것이었다. 윤석
도 나에게 혼령들이 방의 구석진 곳과 입던 옷
을 좋아한다는 얘기를 했었다.
윤석은 은희가 말한 것처럼, 우스갯소리를
하고 있는 교실로 귀신이 지나가면 갑자기 아
이들이 조용해진다는 사실을, 일본에서 심령
학자와 통계학자가 과학적으로 증명한 적도
있다는 것이었다.
60명이 이야기하다가 동시에 소리가 그칠
확률은 100만 분의 1도 안된다는 것이었다. 언
어의 음절수, 말의 평균 길이 등을 감안한 계
산 결과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100
만 분의 1의 희박한 확률과 종종 마주친다는
것이었다.
윤석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우리
는 인정하고 있지 않지만 또다른 세계가 분명
존재하고 있으며, 드물기는 하지만 간혹 그런
세계를 눈으로 보는 사람이 있다고 덧붙였었다.
하지만 나는 일단 은희의 말을 덮어두기로
작정했다. 거짓말이라는 것은 오래 지속될 수
없다는 약점이 있기에 시간을 두고 지켜보는
게 현명할 것 같았다. 나는 은희와 계속 이런
이야기를 하다가는 나까지도 이상해질 것 같
아 일단 화제를 바꿨다.
“은희야, 너는 왜 매일 밖에 나와 있니? 집
에 아무도 없니?”
“네. 파출부 아줌마가 제 저녁밥을 차려 주
러 오긴 하지만 혼자 있는 거나 매한가지예요.
집에 혼자서 있는데 귀신이 나타나면 무서워
요. 그래도 여기 이러고 앉아 있으면 지나가는
사람이 있으니까 괜찮은데.”
난 은희가 애정을 충분히 받지 못하고 자라
서 부모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치밀한 거짓말
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넌 친구도 없니?”
“내 친구들은 모두 학원에 다녀요. 피아노
학원, 속셈학원, 영어학원, 글짓기 학원, 그림
학원, 태권도 도장, 바이올린 교습.”
“너도 엄마한테 보내 달라면 되잖아?”
“나도 전에 다녔는데 재미없어서 그만뒀어
요. 친구들이 이상한 애라고 놀리고 그래서.”
은희의 처지를 알 것도 같았다. 부모형제는
물론이고 놀아 줄 친구도 없는 은희가 측은하
게 느껴졌다. 나는 오늘 하루만이라도 은희와
함께 놀아 주기로 작정했다. 그것이 내가 은희
에게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인 것 같았다.
“은희야, 너 이 우리 집에 가서 비디오 보지
않을래? 오빠가 재미있는 비디오테이프가 있
는데.”
“엄마가 낯선 사람 따라가지 말라고 했는데.”
“내가 왜 낯설어? 우리 얼마 전에도 만났었
잖아.”
“그게 다 작전일 수도 있잖아요.”
은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갈등하는 눈치
였다.
“그럼 나를 따라와 봐. 저기 관리인 아저씨
에게 내가 여기 사는 사람인지 아닌지 물어보
면 되잖아.”
“좋아요!”
은희는 기다렸다는 듯이 벌떡 일어났다. 나
는 관리인으로 하여금 나의 신분을 밝히게 하
는 소정의 절차를 거친 뒤에 은희를 집으로 데
리고 갔다.
내 방으로 데리고는 왔지만 마땅히 같이 놀
놀이기구도 없고 해서 곧바로 내가 소장하고
있는 비디오 테이프 가운데서 은희가 볼 만한
것을 골랐다.
<천공의 성 라퓨타>나 <이웃의 토토로>같은
일본 만화는 자막이 없어서 은희가 보기에는
좀 지루할 것 같았다. 그래서 좀 교훈적이지만
따뜻한 이미지를 담고 있는 자인 프레데릭 백
의 <나무를 심는 노인>을 보여 주었다.
더빙도 아주 잘되어 있고 내용도 아름다워
서 은희가 보기에는 적합할 것 같다는 나의 예
상은 맞아떨어졌다. 처음에는 시시하다는 듯
이 화면을 쳐다보고 있던 은희는 이내 부드럽
고 따스한 그림과 줄거리에 빨려들어갔다.
만화 영화를 보는 은희의 얼굴에는 간간이
천진난만한 미소가 떠올랐다. 놀이터에서 보
여 주던 불안과 두려움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비디오가 끝났고 나서도 은희는 어린이다운
맑고 티없는 모습을 유지했다. 컴퓨터로 게임
도 하고 옛날 이야기도 해 주고 하다 보니 밤
이 깊었다. 은희는 이제 그만 집으로 가라고
해도 조금만 더 있다 가겠다며 일어서려 하지
않았다.
결국 아파트 관리인에게 인터폰으로 연락해
은희 엄마에게 연락을 취해 달라고 부탁했다.
은희 엄마는 은희를 한참 찾았는지 아주 불쾌
한 표정으로 은희를 데려갔다.
어머니도 은희가 안스럽게 느껴졌는지‘쯧
쯧!’하고 혀를 찼다.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
왔고 은희도, 귀신도 까많게 잊어버렸다.
그로부터 일주일쯤 지난 십일월 초였다. 학
교를 가려고 아침에 집을 나서는데 놀이터 앞
에서 은희와 마주쳤다. 은희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나에게 계속 따라붙었다.
“너 학교 안 가니?”
나는 졸졸 따라오는 은희에게 물었다.
“네! 오늘 개교 기념일이거든요.”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에 다시 걸음을 옮겼
다. 한참 걷다가 돌아보니 은희는 여전히 뒤에
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쫄래쫄래 따라오고 있
었다.
“은희야, 오빠 지금 학교 가는 길이야. 수업
받으러? 알아?”
“아저씨네 학교 무지 크지요?”
은희가 동문서답을 했다.
“조금 크지. 그런데 왜?”
“아, 대학교는 어떻게 생겼을까? 무지무지
궁금하다!”
한마디로 학교에 따라오겠다는 거였다. 나
는 걸음을 멈추고 은희를 빤히 쳐다보았다. 초
롱초롱한 두 눈을 빛내며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은희를 보고 있으니 마음이 약해졌다. 내
가 거절하면 온종일 풀이 죽어 놀이터에 혼자
앉아 있으리라.
나는 잠시 갈등하다가 은희에게 학교 구경
을 시켜 주기로 작정했다. 내가 허락을 하자
은희는 폴짝거리며 좋아했다. 마치 소풍을 가
는 기분이 드는지 동요를 흥얼거리도 했다.
좌석버스를 타고 학교 앞에 내렸다. 등교하
던 수많은 사람들이 은희와 나를 이상한 눈으
로 바라보았다. 마주치는 사람들마다 은희와
어떤 사이냐고 한마디씩 던졌다.
“오빠, 언제 저렇게 귀여운 애를 숨겨서 키
웠어요. 능력도 좋수.”
“넌 자식아 아무리 여자친구가 없다기로서
니 이렇게 어린 아이하고 사귀냐? 마, 네가 레
옹이냐?”
“애가 어째 아빠는 하나도 안 닮았네.”
나는 진입로를 따라 올라가면서 별 말을 다
들어야 했다. 나는 일단 은희를 맡기고 수업을
들어가기 위해 서클 룸으로 갔다.
마침 지영이가 잡지를 뒤적이고 있었다. 지
영이는 내 뒤에 따라들어오는 은희를 보더니
눈이 동그래졌다. 나는 지영에게 간략하게‘레
옹이 된 사연’을 설명했다. 그리고 은희에게는
언니 말 잘 들으라고 당부했다.
“이 언니가 아저씨 애인이야?”
서클룸을 나서려는데 은희가 재빨리 말했다.
돌발적인 은희의 물음에 지영의 얼굴이 붉
어졌다. 나는 당황해서 재빨리 대답했다.
“애인은 무슨. 그냥 후배야, 후배.”
그러자 은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지영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곤 혼잣말처럼 중얼거
렸다.
“그때 그 언니랑 비슷하게 생겼서 난 애인인
줄 알았지, 뭐.”
“그때 그 언니?”
이번에는 지영이 나서며 물었다.
“응. 보름쯤 전에 이 아저씨가 비틀거리며
놀이터 벤치에 누워 있던 적이 있었어요. 한
손에 술병 같은 것 들고…… 뭐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리면서. 그때 벤치에 앉아 아저씨 머리
를 쓰다듬어 주던 언니와 닮았어요.”
“오빠, 그 여잔 누구야?”
지영이 나에게 물었다. 뭐라고 설명해야 될
지 난감했다.
나는 그 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은영의 묘에
갔다가 이상한 경험을 하고 난 그 이튿날이었
다. 은영에 대한 그리움을 견딜 수 없어 그 날
은 초저녁부터 방안에서 술을 마셨었다. 그러
다 답답해 술병을 들고 놀이터로 나갔던 적이
있었었다.
사실 은영과 지영은 놀랄 만큼 닮아 있었다.
처음 지영을 봤을 때 은영이 다시 되살아 온
듯한 착각을 했을 정도였다.
나는 다시금 은희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유
령이나 혼령을 볼 수 있다는 은희의 말이 정말
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 수업 늦었다.”
빤히 쳐다보는 지영의 시선을 외면하며 시
계를 보았다. 은희와 지영에게 할 말은 많았지
만 길게 얘기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난
다시 한 번 지영이에게 은희를 부탁한다는 말
을 남겨 놓고 서클 룸을 나섰다. 어디선가 은
영의 혼령이 나를 지켜볼 것만 같았다.
2시간짜리 수업이었지만, 교수의 말은 하
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은영에 대한 생각
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은희의 말이 사실이라면 은영이 아직도 내
주변에 있다는 건데. 은영을 한 번도 못 본 은
희가 어떻게.
난 오랫 동안 생각하다가 은희가 거짓말을
한 거라고 일단 결론을 내렸다.
수업을 마치고 서클 룸으로 들어가니 많은
후배들이 은희 주변에 몰려 있었다. 그들은 나
를 발견하자마자 막 웃어댔다.
나는 쑥쓰러워 은희를 데리고 일단 밖으로
나갔다. 지영이 따라나왔다. 시계를 보니 점심
시간이었다. 은희가 스파게티가 먹고 싶다고
해서 학교를 나서는데 지영이 옆구리를 찌르
며 한마디 했다.
“오빠, 능력 있어요?”
“걱정 마! 내가 아무렴 점심값도 없겠어?”
“그게 아니고 나이 차를 극복할 자신 있냐
는 거야.”
“나이 차 그게 무슨 말이야?”
점심 먹으러 가는데 웬 나이 차가 나오나 싶
어 의아했다. 지영은 은희가 듣지 못하게 귓속
말로 속삭였다.
“아까 은희가 뭐랬는 줄 알아. 글쎄 오빠와
결혼하고 싶대는 거야.”
“뭐?”
나는 웃으며서 지영을 보았다. 비로소 내가
서클 룸에 들어섰을 때 왜들 그렇게 웃었는지
이해가 갔다. 나는 서너 걸음 처져서 걸어오는
은희를 돌아보았다. 은희는 사방을 두리번거
리면서 걸어오는 은희가 더없이 귀엽게 느껴
졌다.
“스파게티 맛있게 하는 집이 어디 있지?”
“글쎄?”
지영과 학교 앞 신호등 앞에서 걸음을 멈추
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은희가 내 옷소매
를 다급하게 잡아끌었다.
“아저씨, 저기요 저 할아버지 옆에 서 있는
검은 옷 입은 사람 안 보여요?”
나는 은희가 손가락이 가리키는 쪽을 돌아
보았다. 우리 학교에서 경영학을 가르치는 노
교수 한 분이 막 바뀐 신호등을 건너오고 있었
다. 아무리 봐도 교수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은희야! 뭐가 보인다고.”
나는 은희가 헛것을 봤거나 거짓말을 한 거
라고 판단하고 꾸짖으려는 순간, 빠른 속도로
달려 오던 승용차가‘끼이익’하고 미끄러지며
교수님을 치었다. 교수님은 허공으로 일 미터
가량 치솟았다가 본네트 위로 떨어졌다. 차는
이 미터 가량 더 가서 멈춰 섰고 교수님은 큰
크리트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멍히 보고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사고 현장으로 몰려 갔다. 나
도 다급히 뛰어가 보았다. 교수님 주변에는 피
가 흥건했다. 이마에서 꾸역꾸역 피가 흘러나
오고 있었다. 즉사한 모양이었다.
피범벅이 된 교수님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구역질이 나려 했다. 은희가 옆에서 빤히 쳐다
보고 있는 걸 발견하곤 재빨리 은희의 눈을 가
렸다. 순간적으로 은희가 한 말이 떠올랐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라.
은희도 교수님의 갑작스런 죽음에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은희가 봐서 좋을 것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사고 현장을 떠났다.
아무래도 제대로 된 식사를 하기는 그른 것
같았다. 간단하게 점심을 떼우기 위해서 햄버
거 집으로 들어갔다. 은희는 좀전의 일을 잊어
버렸는지 금세 쾌활함을 되찾았다.
지영과 은희는 서클 룸에 있으면서 상당히
친해진 모양이었다. 은희는 햄버거를 먹다가
지영의 것이 맛있어 보인다면서 바꿔 먹자고
제안했다. 지영이 바꿔 주자 은희는 싱긋 미소
를 띄웠다.
나는 창 밖으로 무심하게 지나가는 사람들
을 바라보면서 은희가 말한 검은 옷을 입은 사
람에 대해서 생각했다. 은희의 말이 사실이아
면 검은 옷을 입은 사내는 저승사자임이 분명
했다.
저승 사자가 정말로 존재한단 말인가? 그렇
다면 은영의 영혼도 정말로 내 곁에서 맴돌고
있다는 건가?
믿을 수도 없고 부정할 수도 없는 묘한 상황
이었다. 머리가 지끈지끈거렸다. 한동안 생각
에 골몰하다가 지영과 은희가 이상스레 쳐다
보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는 혼자만의 생각에
서 벗어났다.
“은희는 몇 학년이야? 일학년?”
“아니, 삼학년!”
지영의 말에 은희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뭐? 정말 삼학년이야?”
이번에는 내가 물었다. 나 역시 지영처럼 은
희를 일학년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몸집도
작은 데다 그만큼 천진난만한 표정을 짓고 있
었기 때문이었다.
“응. 난 빨리 어른이 됐으면 좋겠어.”
“왜?”
“아저씨하고 결혼하게.”
당돌한 은희의 말에 지영이 까르르 웃었다.
나는 웃고 있는 지영을 기분 나쁘다는 듯이 바
라보고 있는 은희를 보았다. 사랑을 제대로 받
지 못하고 자랐기 때문에 조금 정을 준 나를
따르는 거라고 생각하니 안쓰러웠다.
지영이도 오후에 수업이 있었지만 나 역시
수업이 있었다. 은희를 더 이상 학교에 데리고
있는다는 것이 무리인 것 같았다. 나는 수업을
빠지고 은희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작정했다.
“은희야, 잘 가!”
“언니도.”
햄버거 집 앞에서 지영과 헤어지며 은희는
섭섭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발길을 돌
리지 못한 채 지영의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는
은희의 손을 잡아끌었다.
나는 집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은희에게
궁금한 것들을 하나씩 물어 보았다.
“은희야, 너 정말 놀이터에서 내 머릴 쓰다
듬어 주던 언니 봤니?”
“응, 그 언니 지영이 언니와 너무 닮았어. 그
언닌 누구야?”
“ …… ”
“그 언니가 너무 정성껏 아저씨 머리를 쓰다
듬어줘서 나는 아저씨 애인인 줄 알았는데. 정
말 누구예요?”
“그냥 좋아했던 사람이야.”
난 은희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진실성이
은희의 억양 속에 느껴졌다.
“그건 그렇고 말야. 너 아까 보았다는 검은
옷 입은 사람이 너희 할아버지 돌아가셨 때 보
았다는 검은 옷 입은 사람과 같은 사람이었니?”
“아니, 다른 사람이었어요. 근데, 둘다 무서
운 사람이에요.”
“얼굴은 어떻게 생겼는데? 괴물처럼 흉칙하니?”
“아니요. 그렇지는 않지만 하여튼 무시무시
아저씨, 저기 봐요! 저기 검은 옷 입은 사람이
서 있잖아요!”
창문 바깥 쪽에 앉은 은희가 다급하게 창밖
을 가리켰다. 재빨리 돌아보았다. 교통사고가
났는지 오토바이 한 대가 무참히 찌그러져 있
었다. 가로등을 들이받은 모양이었다. 바닥에
는 피가 흥건했다. 사이렌 소리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사건 현장을 살피며 검은 옷을 입은 사
람을 찾아보았다. 하지만 어디에도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아저씨, 저기 가잖아요. 잠바를 입은 형과
함께 어, 사라졌네?”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은희의 표정을 보며
난 엉뚱한 생각을 했다. 이 애가 진짜로 혼령
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뛰어난 연기력
을 지닌 영악한 배우라고.
버스에서 내려 아파트를 향해 걸어가면서
나는 은희의 말을 사실로 받아들이기로 작정
했다. 은희의 말이 사실인데, 나마저 은희를
믿어 주지 않는다면 은희가 너무 외로울 것 같
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희야, 난 지금부터 네 편이 되기로 했어.
앞으로 무서운 일이 있으면, 이 오빠에게 연락
해. 그럼 내가 금방 달려가 지켜 줄게. 이건 내
전화번호야.”
나는 놀이터 앞에서 은희와 헤어졌다. 은희
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난 친밀한 미소를
띄우는 은희를 보며 내가 한 판단이 현명했다
고 자평했다.
은희를 집으로 들여보내고 나는 은영이 늘
앉아 있던 자리에 앉았다.
남들이 다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
결코 행복한 일은 아닐 것이다. 눈이 하나만
달린 사람들이 사는 곳에선 정상인이 병신 취
급 받아야 하듯이, 이런 능력은 다수에 의해
소외받을 수밖에 없다.
나는 빈 놀이터에서 은희가 느꼈을 외로움
과 허전함을 깊이를 재 봤다. 그늘진 얼굴을
할 수밖에 없는 은희의 가혹한 운명이 나의 가
슴을 한없이 무겁게 만들었다.
그날 저녁이었다. 저녁을 먹고 나서 전에 사
두었으나 미처 시간이 없어 읽지 못했던 책들
을 찾아 뒤적이고 있는데 인터폰이 울렸다.
얼마 뒤에 어머니가 들어와서 은희 어머니
가 찾으니 나가보라는 것이었다. 무슨 일인가
해서 거실로 나가니 은희 어머니가 초조히 서
성이고 있었다.
“저 저희 집에 좀 와 주셨으면 해서 이렇게
우리 은희가 몹시 찾아서요.”
은희가요? 왜요?
입안에서는 여러 가지 물음이 맴돌았지만
나는 군말 않고 은희 어머니의 뒤를 따라갔다.
“갑자기 은희가 미친 듯이 울면서, 학생을
찾는 거예요. 아무리 달래도 듣지 않고 무작정
아저씨를 데려오라고만 하니.”
엘리베이터 안에서 은희 어머니가 변명을
하듯이 중얼거렸다.
은희네 집으로 들어가니 은희 아버지가 은
희를 달래고 있었다. 은희는 나를 발견하곤 쏜
살같이 달려와 품에 안겼다. 은희 아버지가 머
쓱한 표정을 지었다.
눈물을 글썽이는 은희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겁에 질린 모양이었다.
“왜, 그래, 은희야?”
나는 등을 다독거려 주며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으흑 아저씨 그 사람이 보였어요.”
“그 사람이라니?”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요.”
“어디서?”
나는 깜짝 놀라 물었다. 지금까지 은희가 한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은
저승사자였다. 저승사자가 은희 앞에 나타났
다는 것은 은희네 식구 중의 한 명이 생명이
위험하다는 거였다.
은희 부모들은 무슨 얘기인지 전혀 감을 못
잡는 것 같았다. 그들은 서로 눈길을 마주치다
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화장실에 이 닦으러 들어갔을 때예요. 갑자
기 거울에 그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보이는
거였어요. 내 어깨를 슬며시 잡아서 전 너무
무서워 엄마를 부르며 울었어요. 그러다 엄마
가 오고 그러니까 사라졌어요. 아저씨, 너무
무서워요. 나 죽을까요?”
은희의 마지막 말에 나는 잠시 멍해졌다. 은
희는 저승사자가 자신을 데리러 왔다고 믿는
눈치였다. 난 일단 은희를 달랠 필요가 있음을
느꼈다. 은희의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가 생
생하게 느껴졌다.
“은희야, 걱정하지 마. 아무도 너를 데려가
지 못할 거야. 엄마, 아빠도 있고, 여기 오빠도
있잖아.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넌 푹 자.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게 다 해결될 테니까.”
“혼자 자기 무서워.”
몸을 잔뜩 움크리며 은희가 말했다. 나는 은
희의 부모님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내 의도를 눈
치챘는지 은희를 달래며 안방으로 데려갔다.
“엄마, 아빠랑 자면 되잖아. 그럼 안 무섭지?”
은희 어머니가 은희를 안방에다 눕혔다. 은
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은희가 잠들 때까
지 은희 머리맡에 앉아 있었다.
은희는 우느라고 지쳤는지 20분쯤 다독거려
주자 잠이들었다. 나는 은희 어머니와 거실에
서 은희에 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아무래도 내가 직장을 그만둬야 할까 봐요.
애가 혼자서 놀다 보니 이상한 상상만 하고.”
“제가 보기에도 은희가 외로움을 타는 것 같
습니다. 부모님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은희가
자꾸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나는 은희 어머니에게 은희가 보는 세계에
대해 설명할 자신이 없어서 좀더 관심을 가지
고 은희를 지켜봐 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나
의 주제넘는 참견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밤이 늦어서 나는 그만 집으로 돌아가려고
일어섰다. 은희 어미니와 작별 인사를 하는데
갑자기 안방에서‘아아악!’하는 비명소리가
들려 왔다.
방으로 뛰어들어나가니 은희 아버지가 은희
의 어깨를 흔들고 있었다. 은희는 이불을 붙잡
고 구석진 곳으로 뒷걸음질 쳤다. 이마에서 식
은 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은희 어머니가 가
서 달래자 한참 뒤에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우리 은희가 무서운 꿈을 꾼 모양이구나.”
은희 어머니가 수건으로 땀을 닦아 주며 말
하자 은희가 고개를 저었다.
“꿈이, 아니었어요. 분명히, 난 들었어요. 잠
이 들었다가 아빠가 화장실에서 물 내리는 소
리에 잠에서 깨어났어요. 아저씨와 엄마가 나
누는 이야기 소리가 들려 왔어요. 그래서 마음
놓고 다시 자려는데 음침한 목소리가 들려 왔
어요. ‘잘 자는구나, 꼬마야! 계속 자렴.’하고
요. 난 너무 무서웠어요. 눈을 뜰 수가 없었어
요. 분명히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나를 보고
있었을 거예요.”
은희가 겁에 질려 빠른 목소리로 말했다. 도
저히 혼자선 잠을 이룰 것 같지 않았다. 나는
나란히 은희와 은희 어머니가 눕는 것을 보고
방을 나왔다.
“애가 기가 허해서. 내일은 병원에 데려가
봐야겠어요.”
현관을 나서려는데 은희 아빠가 따라나오며
변명하듯이 말했다.
다음날 나는 학교에서 내내 은희 생각만을
했다. 은희가 무슨 변이라도 당할까봐 걱정이
됐다. 무슨 일이 벌어질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방지책이 있으면 마련해야겠
는데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것이 윤석이 다니는 심
령학회였다. 윤석에게 도움을 청할 생각으로
전화를 했다. 그런데 아쉽게도 윤석은 없었다.
부산으로 출장갔다는 것이었다.
“아, 예 그렇군요.”
나는 크게 낙담해서 수화기를 내려놓으려는
데 저쪽에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는지 재빨
리 말을 붙여 왔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죠? 혹시 윤석 씨의
도움이 필요한 거라면 저에게 말씀해 보세요.
힘 닿는 대로 도와 드릴 테니까요.”
나는 달리 방법이 없다고 판단하고 그 사람
에게 은희 얘기를 대충 했다. 그는 내 이야기
에 깊은 관시을 표시하며 오늘 당장 만나자는
것이었다. 은희와 함께라면 더 좋다면서.
“그건 좀 곤란한데요.”
“그럼 둘이서 만납시다. 제가 신촌을 나갈게
요. 몇시에 만날까요?”
그가 적극적으로 달라붙었다. 나는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약속 장소를 정했다.
약속한 커피 전문점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그가 들어왔다. 귀띔해 준 대로 은테 안경에 검
은 가방을 들고 있어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저는 홍석만이라고 합니다.”
그는 자리에 앉으면서 악수를 청했다. 홍석
만 씨는 기분 나쁠 정도가 눈동자가 번뜩였다.
파르스름한 안광 같은 것이 눈에서 뿜어져 나
왔다.
“제가 심령학회에서 일을 본 지는 5년째입
니다. 그 전에는 무역업에 종사했었지요.”
그는 간략하게 자신의 소개를 했다. 나는 주
문한 커피가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곧바로 본
론에 들어가, 은희에 대한 못 다한 이야기를
들려 줬다.
“그랬군요. 지금도 은희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뇨. 하지만 솔직히 믿기지 않는군요.”
“그렇게죠. 우리는 그런 세계가 상상 속에서
나 존재한다고 배워 왔으니까요. 하지만 영들
의 세계는 실재하고 있어요. 제가 볼 때 은희
는 아주 특수한 경우군요. 전생을 기억하는 아
이는 몇 번 만나봤지만 영들을 보는 아이는 처
음입니다.”
“은희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위험해요. 이대로 방치했다가는 분명 은희
는 죽게 될 겁니다. 은희가 본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은 저승사자임이 분명합니다. 많은 사람
들은 저승사자나 사후 세계를 부인하고 있는
데 그건 잘못입니다. 그들은 이미 존재하고 있
습니다. 그러기에 인간의 상상 속에서 존재할
수 있었던 겁니다. 우리는 오랜 역사를 통해서
인상의 상상이 현실 속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보아 보아 왔습니다. 여전히 상상으로 남
은 것들은 그것이 단순한 상상이어서가 아니
라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상상하는 모든 것들은 존재한다
는 말씀입니까?”
“대체적으로 그렇습니다. 그 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상상하는 것들은 분명
존재합니다. 인류는 오래 전부터 인간이 죽을
때가 되면 인간의 혼령을 인도하기 위해 무언
가가 나타난다고 믿어 왔습니다.
그것이 악마라고 믿는 종족도 있고, 천사라
고 믿는 종족도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그들
을 저승사자라고 불렀죠. 서로 다른 문화를 지
니고 살아가면서 이들은 비슷한 생각을 지녔
던 겁니다.
이것을 단순한 우연의 일치라고 봐야 할까
요? 아닙니다. 인류는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는 것을 지켜 보면서 무의식 중에 이들의 존
재를 캐치한 겁니다. 그들은 무의식이 캐치한
것을 그림이나 글 속에 남겼습니다. 아시겠습
니까?”
나는 홍석만 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은희
를 생각했다. 저승사자가 존재하느냐, 아니냐
하는 것보다는 은희의 목숨을 어떻게 하면 살릴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나의 주된 관심사였다.
“그래요, 저승사자는 존재한다고 치죠. 그렇
다면 저승사자는 왜 어린 은희를 노리고 있는
걸까요?”
“그건 은희가 순리를 어겼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짜여진 법칙에
의해서 흘러갑니다. 은희는 짜여진 법칙, 곧
금계를 깬 겁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살아 있는 자는 죽은 자를 볼 수가 없게끔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은희는 신의 실수에 의
한 것이든 신의 의도에 의한 것이든 간에 그
법칙을 깬 겁니다. 은희가 혼령을 볼 수 있다
는 것을 저쪽 세계에서 눈치챈 것 같습니다.
그들은 은희를 데려가 어긋난 법칙을 바로잡
으려는 거죠.”
“어떻게 은희를 구할 방법은 없는지요?”
“글쎄요? 현재로서는 달리 어떻게 해 볼 도리
가 없습니다. 수호령이 지켜 준다면 몰라도.”
“수호령이요?”
“쉽게 이야기하면 은희의 조상신이죠. 모든
사람에게는 조상신이 따라다니죠. 그런데 어
떤 조상신은 힘이 강력한가 하면 어떤 조상신
은 아주 무력해요. 우린 은희의 조상신이 강력
한 힘을 지녔기만을 바래야 할 것 같군요.”
홍석만 씨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갑자기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은희가 죽을지
도 모르는데 눈에 보이지도 않는, 아니 실제할
지 안 할지도 모르는 조상신이 은희를 지켜 주
기만을 바래야 하다니.
“죽음은 창조주의 섭리입니다. 은희의 곁을
서성이는 죽음도 그렇게 받아들이시면 한결
마음이 편할 겁니다.”
내 기분을 눈치챘는지 홍석만 씨가 덧붙였
다.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얘기를
듣고 나니 만나기 전보다 더 암담했다. 그 어
린 것이 저승사자에게 끌려 가기만을 기다려
야 하다니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홍석만 씨가 뭔가
할 말이 있다는 듯이 머뭇거렸다. 내가 다시
앉자 용기를 얻었는지 입을 열었다.
“이런 이야기를 하기는 뭐하지만 은희를 우
리 연구소에 맡기는 건 어떻겠어요? 장담은
할 수 없지만 연구소 직원들이 힘을 하나로
모아 최선을 다한다면 은희의 목숨을 지킬 수
있을지도 몰라요. 저희는 은희를 통해 사후 세
계 연구를 해 나갈 수 있고 은희는 목숨을 부
지할 수 있고.”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홍석만 씨가 왜 그
렇게 은희에 대해 깊은 관심을 표명했는지 비
로소 이해가 갔다. 그는 은희에 대한 걱정보다
도 은희를 통해 사후 세계에 대한 연구를 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들떠 있었다.
“일단 은희 부모님과 상의를 해 보죠. 하지
만 그들은 은희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려 드는
정상적인 사람들이니 기대는 하지 마세요.”
친절하게 여러 가지 조언까지 해 줬는데 냉
정하게 거절할 수도 없어 최대한 정중하게 거
절했다.
“주의하셔야 해요. 아마 이제부터 그 애 주
변에 위험한 일이 많이 날 거예요. 사람의 힘
으로만은 막기 힘든.”
홍석만 씨는 뭔가 더 이야기를 하려다가 그
만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와 헤어져 거리를 걷다가 문득, 홍석만 씨
의 말을 아무런 거부감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깜짝 놀랐다.
아무 일 없을 거야. 은희는 애정이 부족한
거야. 그래서 주위 사람들의 관심을 끌려고 거
짓말을 한 거고 그 중에 몇 개의 거짓말들이
우연히 맞아떨어졌을 뿐이야. 그래, 내가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거야.
나는 어지러운 머릿속을 대충 정리했다. 한
결 기분이 나아졌다. 아파트에 닿으니 땅거리
가 짙게 깔려 있었다. 습관처럼 놀이터를 보았
다. 놀이터에 혼자 앉아 있는 은희의 모습이
보였다. 신발 끝으로 땅을 파고 은희가 고개를
들었다.
“아저씨!”
반가움이 가득 담긴 음성이었다. 은희는 벤
치에서 벌떡 일어나 내가 있는 쪽으로 뛰어왔
다. 그 순간, 가만히 있던 미끄럼틀이‘끼기기
기기’하는 소리를 내며 기우뚱거렸다. 은희가
놀라 걸음을 멈췄다. 미끄럼틀이 서서히 넘어
지기 시작했다.
“피해, 은희야!”
나는 재빨리 몸을 날렸다. 은희의 몸을 멀리
밀치고 나서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바로 옆
에서‘쿠쿵!’하는 소리와 함께 흙먼지가 일었
다.
관리인과 퇴근길의 남자 몇 사람이 뛰어왔다.
“괜찮아요?”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나는 일어나서 재빨
리 은희에게 다가갔다.
“은희야, 괜찮니?”
아아앙!
창백한 표정으로 멍히 앉아 있던 은희가 갑
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울지 마, 잘 끝났으니까.”
난 은희를 다독거려 주고 나서 둘러선 사람
들과 함께 쓰러진 미끄럼틀을 살펴보았다.
“거 이상하네? 어떻게 미끄럼틀이 넘어지
지? 귀신에 홀린 것도 아니고.”
관리인은 미끄럼틀을 살피는 동안 내내 고
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나는 미끄럼틀 밑을 유심히 살펴 보았다. 흙
속으로 기둥이 파묻혀 있고, 기둥 끝에는 콘크
리트로 단단히 포장까지 해 놓았는데 기둥째
뽑혀 있었다.
아무리 살펴도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
았다. 다른 사람들은 관리 사무소의 관리 소홀
탓으로 돌렸지만 내가 보기엔 그런 단순한 문
제로 빚어진 사고는 아닌 것 같았다.
나는 벤치에 앉아서 훌쩍이는 은희를 데리
고 은희 집으로 향했다.
“뭐하러 나와 있었어? 집에 가만히 있지?”
“아저씨, 만나려고 흐흑!”
승강장으로 가는데 은희 부모가 소식을 들
었는지 허겁지겁 달려나왔다. 은희를 구해 줘
서 고맙다면서 자기네 집에 가서 저녁이나 먹
고 가라고 잡아끌었다. 은희도 같이 가자고 재
촉해서 나는 마지못해 은희네 집으로 갔다.
은희 어머니는 이것저것 사 와서 새로 저녁
상을 차렸다. 배는 고파 대충 먹자고 했지만
잠시면 된다며 분주히 손을 놀렸다.
기다린 지 거진 한시간 반이 지나서야 나는
식탁에 앉을 수가 있었다. 허기가 질 대로 져
있던 때라 음식이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 허겁
지겁 저녁을 먹는데 은희 어머니는 오늘 병원
에 갔던 일을 들려 주었다.
“의사 선생님은 애가 몸이 허약해서 그렇대
요. 크게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고 하시더군요.”
나는 건성으로 들으며 배가 터지도록 밥을
먹었다. 과일에다 커피까지 한 잔 먹고서 집으
로 돌아오니 만사가 귀찮았다.
침대에 누워 잠을 자려는데 갑자기 검은 옷
을 입은 사람이 내 앞에 나타난다면 어떤 기분
이 들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나를 정
말로 지켜보고 있는 것만 갔았다. 눈을 뜨기가
겁이 났다.
가까스로 눈을 떴다. 다행히도 아무것도 없
었다. 이마에 손을 대 보니 식은땀이 흘러내리
고 있었다. 나는 창문을 꼭 닫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하지만 쉽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잡념에 시달리다가 새벽녁에 가까스로 잠이
들었다. 눈을 떠 보니 방안이 환했다. 시계를
보니 12시 10분이었다. 토요일이라서 수업이
없었다. 나는 느긋하게 화장실로 가서 양치질
을 하는데 갑자기 서클 사람들과 1시에 만나기
로 한 약속이 떠올랐다.
후다닥 세수를 하고 아파트를 나섰다. 식사
를 포기 하고 나니 그런 대로 약속 시간에는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정류장 쪽으로 바
삐 걸음을 옮기는데 맞은편에서 앙증맞은 가
방을 메고 걸어오는 은희의 모습이 보였다. 걸
음이 무척이나 경쾌해 보였다.
나는 은희에게 손을 흔들어 아는 체를 했다.
은희도 싱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은희와의
거리가 십여 미터 정도로 좁혀졌을 때였다. 한
편에 서 있던 생수 배달 트럭이 후진하기 시작
했다.
은희가 빠른 걸음으로 뛰어왔지만 트럭이
후진하는 속도가 은희가 뛰는 속도보다 훨씬
빨랐다. 경사는 그리 심하지 않은데도 차의 속
도가 이상할 정도로 빨랐다. 후진할 때 켜는
등도 켜 있지 않았다. 나는 섬칫한 예감이 들
어 은희에게 뛰어갔다.
은희는 아무것도 모르고 웃으면서 뛰어왔
다. 나는 필경 운전사가 은희를 못 건 거라고
생각하고 재빨리 달력가 은희를 안고 옆으로
굴렀다. 간발의 차이로 트럭이 옆으로 비켜갔다.
트럭은 한쪽에 서 있는 소나타 승용차 위로
덮쳤다. 요란한 굉음과 함께 소나타의 본네트
가 휴지처럼 심하게 밀렸다. 트럭은 소나타를
완전히 깔아뭉갠 뒤에야 멈춰 섰다.
“어떤 자식인데 운전을 이따위 해!”
화가 치솟을 대로 치솟은 나는 벌떡 일어나
멈춰 서 있는 트럭 쪽으로 다가갔다. 트럭 안
을 살펴 보았지만 놀랍게도 운전사가 없었다.
“어? 내 차“
저 편에서 한 사내가 허겁지겁 뛰어왔다. 소
나타 주인도 나타나서 트럭 바퀴를 걷어차며
온갖 욕설을 내뱉었다.
“이상하네? 분명히 사이드 브레이크를 잡아
놓았는데. 그러고서도 웬지 불안해서 돌까지
괴어 놓았는데.”
운전사는 풀 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소
나타 주인이 당장 차값을 물어내라며 삿대질
을 했다. 트럭 운전사는 속상해 죽겠으니까 가
만히 있으라고 도리어 호통을 쳤다. 구경꾼들
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난 은희와 함께 일단 아수라장에서 벗어나
아파트로 되돌아갔다. 약속도 약속이지만 무
릎과 팔꿈치가 까진 은희부터 치료해 줘야겠
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난 은희를 집으로 데
리고 가서 약을 발라준 뒤에 붕대를 감아 줬다.
“흐흑! 아저씨도 치료해야지.”
은희가 바닥에 긁혀 상처 난 내 오른손을 잡
아끌었다.
“난 괜찮아.”
난 휴지로 흐르는 피를 닦으며 말했다.
“흐흑! 치료해, 아저씨.”
“알았어, 치료할 테니까 울지 마.”
은희는 내 손에 약을 바른 뒤 붕대로 정성껏
감아 줬다. 은희는 자기에게 심상치 않은 사건
이 연이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파르르 떨면서 울음을 삼켰다. 나는 은희와 함
께 집을 나섰다.
“은희야, 집에 꼼짝 않고 있으면 아무 일 없
을 거야. 내가 곧 돌아와서 놀아 줄 테니까 집
에서 문 꼭 닫고 있어, 알았지?”
은희는 입술을 꽉 깨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은희네 아파트까지 데려다 준 뒤에 약속
장소로 향했다.
우연일까? 아니면 홍석만 씨가 말한 대로
저승사자들이 은희를 데려가기 위해서?
서클 사람들과 만나 모임을 갖는 도중에도
연이은 사고가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둘다 우
발적인 사고라고 하기에는 심상치 않았다. 사
이드 브레이크가 풀려서 경사진 길을 밀려 내
려오는 트럭치고는 속도가 너무 빨랐다. 누군
가 트럭 안에서 후진 기어를 넣고 악셀러레이
터를 힘껏 밟지 않았다면 그렇게 빨리 달려올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모임이 끝나자 서클 사람들은 술집으로 갔
지만 나는 은희가 걱정돼 집으로 향했다. 차에
서 내려 걷다 보니 사고 현장이 나타났다. 트
럭도, 짓뭉개진 소나타도 보이지 않았지만 여
기저기 흩어져 있는 깨어진 유리조각이 사고
현장임을 짐작케 했다.
놀이터에는 미끄럼틀이 여전히 쓰러진 채로
놓여 있었다. 도저히 쓰러질 수 없는 것이 쓰
러졌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나는 미끄럼
틀을 바라보다가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곤 다시 미끄럼틀을 보는데 이상한 기
분이 들었다. 다급히 시선을 들어 허공을 올려
다보았다.
누군가 베란다에 아슬아슬 매달려 것이었
다. 높이로 보니 11층쯤 되어 보였다. 퍼뜩 은
희가 떠올랐다. 자세히 올려다보니 정말로 은
희였다. 나는 재빨리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승장장에서 다급히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
이터는 9층에 서 있었다. 내려오기를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계단을 타고 뛰어올라갔다. 서너 계단씩 한
번에 밟고 올라가면서 나는 신께 기도했다. 제
발 아무 일도 없게 해 달라고.
허파가 터질 것만 같았다. 담배를 끊어야겠
다는 생각이 퍼뜩 스쳐 갔다. 열어놓은 창문이
보였다. 밖을 내다보기가 겁이 났다. 떨어져
내리는 은희의 모습이 보일 것만 같아서였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으나 11층까지 단숨에
뒤어올라갔다. 현관문을 열었다. 문이 잠겨 있
었다.
“은희야, 문 열어!”
“아저씨, 살려 줘요!”
다급하게 문을 두들지만 은희의 외침이 들
려 왔다. 문을 부수기 위해서 사방을 둘러보았
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은희야, 기다려! 잠깐이면 돼!”
나는 승장장으로 달려갔다. 엘리베이터는
일층에 멎어 있었다. 다시 계단으로 허겁지겁
뛰어올라갔다. 두 번이나 발을 헛딛어 구를 뻔
하다가 가까스로 일층으로 내려갔다.
“아저씨, 1136호, 열쇠 주세요! 빨리요!”
“왜, 왜 그러세요?”
관리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했다. 내
가 다시 한 번 재촉하자 그는 서랍을 열고 열
쇠꾸러미를 만지작거리다가 비상 열쇠를 내밀
었다.
은희야, 조금만 참아!
입안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승강장으로
갔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 했다.
“잠깐만요!”
내가 다급히 외쳤지만 엘리베이터 문이 닫
혔다.
젠장할!
주먹으로 굳게 닫히 문을 힘껏 치고 돌아서
려는데 거짓말처럼 문이 열렸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스물두셋 정도 되어 보이는 아가씨가
서 있었다. 예쁘장한 얼굴이었다. 나는 안으로
타자마자‘닫힘 버튼’을 누르고 11층을 눌렀다.
엘리베이터는 천천히 상승하기 시작했다.
아주 느린 속도로.
“저 어디 아프세요?”
여자가 핸드백에서 손수건을 꺼내 내밀었
다. 난 그제서야 내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됐수다!”
나는 소매로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닦았다. 그녀가 머쓱한 표정으로 수건을 다시
핸드백에 집어넣었다.
11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멎자마자 나는 1136
호로 뛰어갔다. 그리곤 허겁지겁 현관문을 열
었다. 보조키가 잠겨 있으면 어떡하나 내심 걱
정했는데 천만다행으로 보조키는 잠겨 있지
않았다.
신발을 신는 채 베란다로 달려갔다. 은희는
여전히 베란다에 매달려 처절한 사투를 벌이
고 있었다. 손을 내밀어 은희의 팔목을 낚아챘
다. 그 순간, 내 손목에 엄청난 통증이 왔다.
마치 망치 같은 걸로 손목을 내리친 둣한. 나
는 하마터면 은희를 놓칠 뻔했다. 왼손으로 재
빨리 은희를 잡아서 끌어올렸다. 천천히 위로
올리는데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어떤 강
력한 힘이 내 손가락을 풀었다. 나는 은희를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역부족이었
다. 엄지, 검지, 중지, 약지, 새끼 손가락이 차
례 대로 풀어졌다.
“아악!”
거진 올라왔던 은희가 주루룩 미끌어졌다.
나는 재빨리 허리를 숙여 미끌어지는 은희의
오른손을 잡았다.
베란다에 오랫동안 매달려 사투을 벌인 때
문인지 은희의 손은 땀으로 젖어 미끈거렸다.
게다가 나의 상체는 베란다 밖으로 반은 넘어
가 있는 상태여서 힘을 쓰기가 곤란했다. 끌어올
리는 건 고사하고 손을 잡고 있기도 힘들었다.
아파트 밑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들
은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발을 동동 구르고 있
었다. 은희를 잡은 손아귀에 힘이 점점 빠져
갔다. 낮에 다친 상처가 다시 터져 손목에서
핏방울이 흘러내렸다. 핏방울은 은희를 잡은
살과 살 사이로 비집고 들었다. 땀과 엉긴 핏
방울 때문에 은희를 잡고 있기가 한층 더 어려
웠다.
나는 은희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손아귀에
전신의 힘을 모았다. 만약 이대로 은희를 떨어
뜨려 버린다면 나는 평생을 죄책감에 시달리
며 고통받으리라.
은희는 남은 한 손으로 마저 내 손을 잡기
위해서 버둥거렸다. 하지만 오랫동안 난간에
매달려 있느라고 힘이 빠졌는지 연신 한 손으
로 허공만 휘저을 뿐이었다.
안 돼! 저 어린 것을 포기할 순 없어.
나는 입술을 꽉 깨물고 전신의 힘을 모아 은
희를 당겨 보았다. 팔목이 빠져 버릴 것처럼
고통스러웠으나 조금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그 순간, 누군가 내 손가락을 다시 푸는 것처
럼 느껴졌다.
“아, 안 돼!”
흩어지려는 의식을 다시 하나로 모으면서
마비된 듯한 손가락에 힘을 주었지만 아무 소
용이 없었다. 손가락이 다시 하나씩 벌어지고
있었다. 엄지 검지 중지.
“오, 신이시여!”
참담한 절망감에 휩싸여 내뱉었다. 그때였
다. 누군가 나를 쑤욱 위로 끌어올리는 것이었
다. 은희의 몸이 가볍게 들려졌다. 난 재빨리
왼손으로 은희의 몸을 끌어안아 베란다 안쪽
에 내려놓았다. 은희의 몸무게가 하나도 느껴
지지 않았다.
나로서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순식간에 일
어난 일이었다. 밑에서 박수와 환호성이 아련
하게 들려 왔다. 바닥에 주저앉아서 우는 은희
를 내려다보다가 나는 베란다에 털썩 주저앉
고 말았다.
“은희야. 이젠 괜찮아.”
울고 있는 은희를 꼭 안았다. 살아 있음을
알리는 환희의 소리, 심장의 고동소리가 느껴
졌다.
나는 땀으로 범범이 된 채 역시 땀으로 흠뻑
젖어 있는 은희를 안고 있었다. 등 뒤에서 요
란한 발소리가 들려 돌아보았다. 관리인과 아
파트 주민들이 허겁지겁 들어서고 있었다.
그들이 다가와서 부축해 줬다. 나는 은희의
손을 꼭 잡고 거실로 들어갔다. 관리인과 주민
들은 큰일 날 뻔했다며 저마다 한마디씩 떠들
다가 돌아갔다.
“베란다에는 왜 나갔어?”
나는 아찔했던 순간을 되새기며 베란다 쪽
을 힐끗 돌아보며 물었다.
“내가 나간 거 아냐, 아저씨.”
은희가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네가 나간 게 아니라니?”
“난 아저씨 말대로 방 안에서 꼼짝 안 하고
있었어. 그러다가 잠이 들었는데 꼬마야 같이
가자 하고 허공에서 무서운 목소리가 들려 왔
어. 나는 겁이 나서 잔뜩 움크리고 있는데 갑
자기 바람이 불어오더니 방문이 덜컹 열렸어.
내가 정신을 차려 보니 검은 옷 입은 사람이
내 손목을 잡아끌고 있었어. 끌려가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지만 소용없었어. 그가 베란다 문
앞에 서자 문이‘드르륵’열리는 거야. 그는 나
를 베란다로 끌고 갔어.
그리곤 베란다 밖으로 떠밀었어. 난‘아저
씨’를 부르며 필사적으로 베란다에 매달렸어.
그런데 검은 옷을 입은 사내는 아저씨를 기다
리는지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나를 바라보고
만 있었어.
나는 너무도 무서웠어. 엉엉 울고 있는데 아
저씨가 허겁지겁 뛰어왔어. 검은 옷을 입은 사
람은 아저씨가 나를 끌어올리는 걸 차갑게 지
켜보고 있다가 갑자기 달려들어 아저씨 손가
락을 풀었어.
난 다시 베란다에 매달리고. 그 무서운 아저
씨가 히죽히죽거리다가 다시 아저씨 손가락을
풀르기 시작하는 거였어. 내가 막 울자, 그때
죽은 할아버지하고 또다른 할아버지가 나타났
어. 수염이 무성한 할아버지가 아저씨와 함께
내 손을 잡고 번쩍 들어올렸어. 그리곤 손식간
에 사라지셨어.”
“또 다른 할아버지? 그분은 어떻게 생기셨
는데?”
“할아버지하고 많이 닮으신 분인데 나이는
훨씬 더 많이 먹어 보였어.”
“그래?”
나는 순간적으로 홍석만 씨가 말한‘수호령’
이 나타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죽은
할아버지가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조상신
을 데리고 와서 은희를 구해 준 모양이었다.
은희의 베란다 소동으로 인해 은희 어머니는
직장을 그만뒀다. 나는 그 이후로 어머니의
손을 잡고 인형극이나 문방구를 가는 은희
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은희 어머니가 늘 함께 있기 때문인지 그 뒤
로 은희에게 이상한 사건을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보름쯤 지난 날이었다.
집에 있는데 은희 어머니가 은희와 함께 이사
가게 됐다며 인사를 왔다.
아버지 직장이 갑자기 부산으로 발령이 나
서 이사를 가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모처럼 정
든 이웃이 생겼는데 떠난다고 하니 몹시 서운
했다.
은희 어머니는 그 동안 여러모로 고마웠다
며 나에게 봉투를 하나 내밀었다. 극구 사양했
지만 은희 어머니의 재촉에 마지 못해 받았다.
은희 어머니가 가고 나서 꺼내 보니 구두 티켓
이었다.
난 괜히 빚진 기분이 들어서 다음날 아침 일
찍 은희네 집으로 가서 이사짐 내리는 걸 도와
줬다. 이사짐 센터에서 두 사람이 나와서 짐
내리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트럭에 짐을 모조리 실고 나서 난 은희와 작
별 인사를 했다.
“은희야, 부산 가서 잘 지내. 이제 아무 일도
없을 테니 공부 열심히 하고, 놀기도 열심히
하고.”
은희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내 이야기가 끝나
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편지봉투를 불쑥 내밀
었다. 그리곤 후다닥 뛰어서 차에 올라탔다.
트럭은 금세 떠나갔다. 나는 편지봉투를 들
고 떠나는 차의 뒷모습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은희는 눈물을 글썽이며 열심히 작은 손을 흔
들어 댔다.
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난 뒤에 편
지봉투를 뜯어 보았다. 정성스럽게 쓴 은희의
글씨가 보였다.
오빠에게.
너무너무 고맙습니다.
저를 잘 보살펴 주셔서
저는 오빠 덕분에 무척 행복합니다.
부산에 가서도 오빠 생각 많이 할 거예요.
저도 금방 자라서 예쁜 언니처럼 될 테니까
그때는 꼭 저랑 데이트해 주세요.
약속할 수 있죠?
오빠 다시 만날 때까지
몸 건강하세요.
은희 올림.
나는 읽고 또 읽었다. 내가 지금까지 받아
본 연애 편지 중에서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마음이 담긴 편지를.
그토록 듣고 싶어 했던‘오빠’라는 말을 편
지에다 처음으로 사용한 은희가 무척 깜찍하
게 느껴졌다.
은희와는 이제 다시는 만나기 힘들 거라는
아쉬움과 함께 편지를 고이 접어서 주머니에
넣었다. 사실 그때는 전혀 몰랐었다. 은희와
나는 다시 기구하게 만날 운명으로 묶여져 있
다는 걸.
은희를 떠나 보내고 아파트로 돌아가기 위
해서 엘리베이터를 탔다. 문이 닫히려는 순간,
나는 검은 그림자를 보았다.
놀랍게도 검은 옷을 입는 사내였다. 그는 아
파트 광장에 서서 은희네 트럭이 떠난 저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이 닫혀 나는 다급히 버튼을 눌렀다. 그리
곤 아파트 광장으로 달려나갔다. 그 어디에도
검은 옷을 입은 사내는 보이지 않았다. 쇠잔한
가을 햇살만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나는 텅 빈 광장에 우두커니 서서 은희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전
신을 부르르 떨어야만 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