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 테이프
"한잔 더 하고 가자. 오랜만에 만났는데..."
"으... 짜식... 너만 오랜만이냐? 나도 너 본 지가 몇년째인데... 음...
취한다.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지? 어쨌든... 딸꾹..."
형민은 흐릿한 눈으로 2년만에 만난 상규를 쳐다 보다가 굳이 붙잡는
자신의 팔을 허우적거리며 뿌리치고는 비틀거리는 몸짓으로 걸음을 옮
겼다.
"임마... 며칠 후에 또 외국 간다며? 훗... 가기전에 한번 더 연락해서
그때는 밤새도록 마시자. 오늘은 내가 너무 취해서..."
상규 역시 몽롱한 눈빛으로 형민의 말을 듣다가 알겠다는 듯이 고개만
끄떡이며 어두운 거리로 사라져 가는 형민의 뒷모습을 쳐다 볼 뿐이었
다.
"으... 아직도 속이 울렁거리네. 그나저나 여기가 어디야?"
언제 잠이 들었는지, 형민은 스산한 밤바람이 느껴져 살며시 눈을 떠보
니 허름한 빌딩 앞 계단이었다. 천천히 일어나 앉아 습관처럼 담배를 물
고는 여전히 '띵'한 머리를 애써 추스리며 정신을 차리려 안간힘을 썼다.
"젠장... 아까 상규와 헤어지고... 맞아. 집에 갈려고 택시를 잡다가
여기까지 온 거군."
형민은 억지로 몸을 일으켜 몇 발자국 앞으로 걸어갔다. 취기로 약간
머리가 어질어질했으나 걸을만은 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현란한 네온이
거의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한밤중인 것 같았다.
"쓰벌... 이제부터 술을 좀 적당히 마셔야지."
비척이며 후미진 거리를 막 벗어나려는 찰나 누군가가 다가와 형민의
소매를 움켜 잡았다. 형민은 소스라치게 놀라 움찔거리며 그를 쳐다보
았다.
"누... 누구야?"
"헤헤헤. 하나 사시죠. 좋은 거 있습니다."
깜짝 놀라 자세히 바라보니 20살이 갓넘은 듯한 젊은 남자 한명이 머리
를 무쓰로 떡칠을 한 채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 다니. 뭘?"
"재미있는 비디오 테이프요. 하나 장만하시죠. 값도 저렴하게 드릴테
니..."
"재미있는... 비디오 테이프?"
형민의 머리 속에 문득 스쳐가는 생각이 있었다. 재미있다는 말과 비디
오 테이프란 말 그리고 이 남자의 행색을 보아하니...
"포... 르노 말이야? 싫어. 안 사."
다소 안심을 하며 심드렁히 대꾸하자 젊은 남자는 아예 형민의 길을 막
아서며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요즘... 한창 잘 나가는 포르노도 있어요. 그 왜 있죠? 인기 여배우
O양의 셀프 비디오..."
"O양... 거?"
그러고 보니 며칠 전 친구들이 얘기하는 것을 얼핏 들은 것 같기도 했
다. 인기 여배우겸 모델인 O양의 무명시절 포르노 테이프가 나돈다는
얘기를... 형민은 침을 꿀떡 삼키며 아직도 조금은 혀꼬부라진 발음으로
되물었다.
"구미가 당기기는 한데... 얼마야? 그리고 그거 진짜 그 아가씨야?"
"흐흐흐. 싸게 해드릴께요. 일단 한번 보시면 아시잖아요? 복사판이라
화질은 좀 그렇지만... 그런대로 괜찮으니까..."
"그래? 그러면 조금만 보고 마음에 들면..."
취한 중이라 객기가 동해 그랬는지 평소라면 그런 종류의 테이프를 잘
보지도 않던 형민이가 뭔가에 이끌리듯 동의를 하고 말았다. 젊은 남자
는 형민을 이끌고 조금전 자신이 졸고 있던 빌딩 곁의 한적한 골목으로
안내를 했다.
형민이 머뭇거리며 그를 따라가니 조그마한 점포가 있었고 그 안으로
비집고 들어가자 낡은 텔레비젼과 비디오 테이프들이 눈에 띄었다. 원래
는 외국 잡지와 뮤직 비디오 등을 주로 파는 곳인 것 같았는데 밤이면
가외 수입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호객해 이상 야릇한 테이프들을 파는
곳 같았다.
"빨리 보여줘 봐. 나, 바쁜 사람이라고."
"예. 사장님."
어느새 호칭이 사장으로 바뀌어 있었고 젊은 남자는 능숙한 솜씨로 텔
레비젼과 비디오를 켜더니 라벨도 붙어 있지 않은 비디오 테이프를 넣
었다.
형민은 눈을 크게 뜨고는 파란 화면을 잠시 지켜보았다. 이윽고 한 여자
가 온돌방에 누워 교태로운 얼굴을 하며 뒹구는 모습이 흘러나왔다. 잠
시후 한 남자가 나타나 인기 여배우 O양으로 짐작되는 아가씨의 검은
스타킹을 벗기기 시작하고...
아무튼 호기심과 흥미가 잔뜩 담긴 테이프가 형민의 눈앞에서 돌아가고
있었다. 형민은 엄청나게 화질이 떨어지는 그 테이프를 보고 만족한 듯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어... 얼마야? 화질이 너무 안 좋은데 싸게 해주라."
"헤헤헤. 알았어요. 가격은..."
젊은 남자와 가격 문제로 잠시 실랑이를 벌이던 형민은 지갑에서 돈을
꺼내 건내 주었다. 그때였다. 점포의 문이 갑자기 열리며 나이가 쉰은
된 듯한 여인이 다급히 뛰어 들어오며 소리쳤다.
"경찰... 떴어. 빨리 가게 문닫아!"
이 소리를 듣자 젊은 남자는 사색이 되어 공이 튀듯 문으로 달려가 셔
터를 내렸다. 형민은 당황해 어쩔줄 몰라 하며 여인에게 물었다.
"아니... 내 테이프는...?"
"예? 아, 손님이 계셨구나. 어떤 건데요?"
"그... 뭐야. O양의... 그러니까... 그..."
여인은 알겠다는 듯이 그녀 가까이에 놓인 종이 박스에서 비디오 테이
프를 하나 꺼내 황급히 건네 주었다.
"아니... 내꺼는 저 비디오에 꽂혀 있는데.. 이왕이면 확인한 걸로..."
"같은 거예요. 이 상자에 있는게 전부 그 비디오 테이프라구요. 그러니
이걸 가지고 어서 뒷문으로..."
동시에 점포 밖에서 경찰차 싸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형민은 얼떨결에
여인이 안내하는 뒷문으로 빠져 나왔다.
형민이 터벅거리며 자신의 자취방으로 들어와 털썩 바닥에 주저 앉았다.
"아이고... 힘들어라. 왠 놈의 택시가 그리도 안 잡히는지... 그나저나...
헤헤헤... 어디... 이제부터 슬슬 감상이나 해볼까?"
만면에 미소를 머금으며 방 한쪽 구석에 놓인 비디오로 다가가 테이프
를 넣고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잠시후 화면에는 조금 전 자신이 봤던
것과 같은 내용의 화면이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형민은 방안에 불을 끄고는 편하게 누워 그 포르노 테이프를 감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0분쯤 지켜보자 처음의 흥분과는 달리 점점 지겨워지
기 시작했다.
"저게 뭐야? 사람들 목소리도 안나오고... 저 자식은 왜 자꾸 음악을 틀
고 난리야? 얼래? O양인지 누군지 알아 보기도 힘들게 자꾸 남자 놈이
가리잖아? 에이... 속은 기분인걸?"
편안한 자세 때문인지, 호기심이 사그라 들어 그런지 잠시후 깜박깜박
졸기 시작했다. 간혹 눈을 떴을 때는 아까 그 장면과 크게 달라보이지
않는 장면만이 계속될 뿐이었고...
"음... 마돈나 같기는... 무슨... 음냐... 저... 남자 놈 좋겠구만...
이쁜 여자랑... 어쨌든... 돈만 아깝고... 음냐... 음..."
이윽고 형민은 잠이 얼픗 들고 말았다.
한시간이 지났을까? 감은 눈을 통해 온통 피빛의 색채가 어른거리기 시
작했다. 더불어 조금 전까지 들리던 음악 소리와는 달리 여자의 절규하
는 듯한 비명소리와 남자의 음흉하고 기괴한 웃음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형민은 억지로 눈을 떠 텔레비젼 화면을 쳐다보았다.
"엇... 아... 악~~"
화면 가득 온통 빨갛게 피빛이었고 그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도
조금전 형민이 졸기 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인물들이었다.
"세... 상에..."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화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찍을 때 비디오
카메라에 튀었는지 어른거리는 핏방울이 카메라 렌즈를 따라 흘러 내리
고 있었다. 또한 그 렌즈를 통해 보이는 광경은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만큼 끔찍한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다.
하얀 방안에 한 여자가 나체가 된 채 의자에 꽁꽁 묶여 있었는데 이미
양팔은 그녀 앞에 서서 히죽거리며 전기톱을 들은 남자가 잘라냈는지
하얀 뼈가 보일 만큼 찢어져 너덜거리고 있었다.
그 부위에서 쉴새 없이 검붉은 피가 흘러 내리고 있었지만 그 남자는
오히려 그것을 즐기는지 다시 전기톱에 전원을 넣고는 한발자욱씩
묶여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
의자에 묶인 여자는 쉴새 없이 고개를 가로 저으며 절규를 하고 있었지
만 입에는 어느새 뻘겋게 색이 변한 천으로 재갈이 묶여져 있어, 그저
공포로 가득찬 눈망울만 이리저리 굴릴 뿐이었다.
"저... 저런..."
'끼이잉'하고 요란하게 톱질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화면을 가렸던 남자
가 잠시 옆으로 비켜나며 카메라 가까이로 무언가를 들고와 들이 밀었다.
"욱~~ 저... 저건..."
그 남자의 손에는 아직도 선혈이 낭자한 여자의 오른쪽 다리가 덩그마
니 들려 있었다. 뒤쪽에 언뜻 언뜻 보이는 여자는 이미 실신을 한 듯
뽀얀 살에 너덜 너덜한 살점이 튀긴 채 고개를 뒤로 떨구고 있었다.
형민은 그 자리에 앉아 토물을 쏟고 말았다.
"우웩... 으... 이건... 이건... 영화가 아냐... 실제로... 실제로..."
언제부터 이런 이상한 내용의 비디오가 흘러나왔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형민은 아마도 다른 내용의 비디오가 녹화된 테이프에 포르노 비디오
테이프를 덮어 녹화했다가 그것이 끝나고 미처 지워지지 않았던 부분이
지금 화면에 흘러 나왔으리라고 추측할 뿐이었다.
"부... 북유럽인가에서는 실제로 강간을 하고 사람을 죽이는 걸 찍어서
판다고 하더니만... 저... 비디오가 혹시... 그런 종류의... 그...
그런데... 화면에 나오는 저들은 우리나라 말을 하는데... 그... 그렇다
면..."
여전히 이죽거리는 남자와 거의 죽어가는 여자의 처절한 광경을 보다
못한 형민은 곁에 있는 리모콘을 더듬거리고 찾아 텔레비젼의 전원을
꺼버렸다. 갑자기 조용해진 캄캄한 방안에는 형민의 중얼거림만이 울릴
뿐이었다.
"휴우... 도대체 저런 걸 보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야? 우~ 메스꺼
워..."
형민은 아직도 숨이 차 오르는 지 헐떡거리며 마루로 나가 냉수를 '벌
컥, 벌컥' 들이키고는 방안으로 다시 들어왔다.
"억? 아... 니 이럴 수가..."
캄캄했던 방안은, 어느새 켜졌는지 텔레비젼 화면이 푸르스름한 빛을
발하며 '지지직' 거리고 있었다. 등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조심
스럽게 화면 앞으로 다가가 바라보던 형민은 뒷쪽에 이상한 느낌이
들어 천천히 돌아 보았다.
"엇? 너... 넌... 아~~ 안돼..."
"흐흐흐... 이번에는 너구나... 잠깐이면... 돼... 잠깐이면...
흐흐흐..."
언제부터 형민의 뒤에 서있었는지 방안 한구석에 안광을 발하며, 조금
전 화면 속에서 무참하게 여자를 죽였던 그 남자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
며 멀거니 서서는 전기톱을 든 채로 형민을 싸늘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 그 남자는 떨고 있는 형민의 목에 '그르렁' 거리는 전기톱을
들이밀며 천천히 텔레비젼 화면쪽으로 형민을 위협하듯 밀어넣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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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줌마, 그 비디오 테이프 어디 갔어요?"
젊은 남자는 비디오 테이프가 가득찬 종이 상자를 뒤적거리다가 여인에
게 물었다. 여인은 머리를 갸우뚱하며 되물었다.
"어떤... 테이프?"
"그 왜 있잖아요? 얼마전에 실종된 그 살인마가 찍은..."
"아, 그 재수없는 비디오 테이프? 자기 지하방에 사람들을 끌어 들여 놓
고 재미로 그들을 죽이며 그 모습을 찍어 놓고 팔던... 그놈꺼? 아니,
그거 재수 없다고 다 버리라고 했잖아?"
젊은 남자는 여인에게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헤... 나중에 볼려고 제가 하나 숨겨 놨죠. 아줌마한테 걸리면 혼날까봐
앞부분에는 다른 거 녹화해 놓고... 그런데... 없어졌네요?"
"어이구... 너도 참 희한한 취미를 가졌구나. 그 미친 놈이 찍은 비디오
테이프를 보고 성한 사람이 없다니까? 자살을 하던가... 실종되던가...
아무튼 너도 그 꼴나기 싫으면 그거 보지마. 하긴 나도 처음에는 영화인
줄 알고 그놈 것을 팔았는데... 실제 상황이라는 걸 알고 나니 너무 끔직
해서..."
여인이 몸을 부르르 떨자 젊은 남자는 재미있다는 듯 종이상자를 뒤적
이며 얘기했다.
"아깝다. 그게 그 살인마가 실종되기 전에 찍은 마지막 테이프였는데...
음... 앗? 여기 있네? 거참 이상하다. 조금 전까지는 분명히 없었는데...
잉? 그... 그런데... 테이프에 왠 피같은게... 이렇게... 묻어 있지?
흠... 어쨌든... 오늘밤에는 집에 가서 이걸 꼭 봐야지. 후후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