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주운 다이어리
"음... 봄은 봄인가 보네. 밤바람도 산들, 산들... 따뜻한 걸 보니..."
형민은 책가방을 등에 짊어진 채 야간 자율학습이 끝난 운동장을 천천
히 가로 질러 가고 있었다.
"그나저나... 나쁜 자식들... 지들끼리만 놀러가고..."
저녁나절에 야간 자율 학습 감독 선생님이 한눈 파는 틈을 타서 극장으
로 영화를 보러간 같은 반 친한 친구들의 얼굴을 하나씩 떠올리며 중얼
거렸다.
"짜식들... 고3이 되었으면 공부들이나 할 것이지..."
말로는 그렇게 했어도 자신을 빼놓고 극장 구경을 간 친구들이 야속하
기만 했다. 아무리 졸고 있는 자신을 깨우다가 어쩔 수 없어 자기들
끼리 갔다 하더라도...
"에휴~ 집에 같이 갈 놈들이 없으니 심심하고... 젠장..."
어두워진 교정은 한층 을씨년스러웠다. 궁시렁거리며 터덜터덜 교문으로
향하던 형민은 발끝에 뭔가가 '툭'하고 차이는 것이 느껴졌다.
"뭐지?"
형민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허리를 굽혀 그 물건을 천천히 집어 올렸
다.
"이게... 뭐야? 어? 다이어리네? 그런데... 산지 얼마 안됐나? 무척
새건데?"
다이어리를 뒤적거리던 형민은 잘됐다는 듯이 가방에 쑤셔 넣으며 중얼
거렸다.
"어차피 주인을 찾아 줄 수도 없으니... 내가 써야 겠다. 마침 다이어리
도 없던 참인데..."
책이 가득 들은 가방을 다시 어깨에 매고는 집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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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녀 왔어요."
형민은 피곤한 얼굴로 집에 들어서며 어머니에게 인사를 했다.
"응, 저녁은 먹었고?"
"예."
"그래. 공부하느라 힘들지? 어서 씻고 자라."
어머니는 언제나처럼 친근한 말투로 형민에게 얘기했다. 형민은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끄떡이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휴~ 내일 숙제가 뭐 있더라?"
형민은 의자에 앉아 책상 위에 가방을 올려 놓고 기지개를 한번 쭉 펴
고는 가방 속에서 책을 꺼냈다. 여러 책 중에 조금 전 자신이 주운 다이
어리가 함께 나오자 미소를 지으며 책상위에 그것을 펼쳐 놓았다.
"아, 맞다. 다이어리가 있었지? 우선... 여기에 일주일 계획이나 적어
놓자. 날짜별로 되어 있으니... 약속이랑... 또 할일하고... 음..."
형민은 날짜별로 된 빈칸에 자신이 할 일을 하나씩 적어 내려가기 시작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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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민아, 일어나. 학교 늦겠다."
어머니가 방밖에서 자신을 깨우는 소리를 듣고는 침대에서 부시시 일어
나 앉았다.
"우~ 졸려. 언제나 이 생활에서 벗어날지... 어서 대학교에 들어가야..."
한동안 멍하니 침대에 걸터 앉아 있던 형민은 습관적으로 주위를 둘러
보다가 어제 주운 다이어리가 책상 위에 덩그마니 펼쳐진 채로 놓여 있
는 것을 보았다.
"어? 이상하다. 어제 다이어리를 정리하고 가방에 넣은 것 같은데...
왜 다시 꺼내져 있지?"
형민은 어기적거리며 책상으로 다가가 펼쳐진 다이어리를 무심코 들여
다 보다가 소스라치게 놀라 뒤로 몇발자국 물러나며 중얼거렸다.
"이... 게 뭐야? 다이어리에... 내 글씨는 아닌데... 누가... 오늘 날짜
에다가... 글을 써놨지? 그것도 붉은 펜으로..."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것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다이어리의 내용을 읽었
다.
[1999년 3월 20일
오늘 해야할 일 : 진한의 장례식 참가.]
"무... 슨 소리야? 진한의 장례식이라니... 진한이는 어제 다른 친구 놈
들이랑 영화보러 갔는데..."
멍하니 다이어리를 보고 있는데 마루에서 요란하게 전화벨이 울리더니
연이어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형민아, 전화 받아라. 상규인 것 같은데..."
형민은 이상한 예감에 재빨리 마루로 달려나가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응, 상규구나. 왠일이야? 조금 있으면 학교에서 볼 놈이..."
전화 속에서 잠시 침묵이 흐르다가 상규의 작지만 떨리는 목소리가 들
려왔다.
"죽었어... 어제... 죽었다고... 흑흑흑..."
"누... 누가...?"
"진... 한이가... 어제... 영화관에서..."
"뭐...? 자... 세히 얘기해봐... 어서..."
"어제... 애들이랑 영화보러 극장에 갔었잖아? 그런데... 진한이가
영화를 보던 중에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화장실에 가더라고. 나는 영화가
너무 재미있어서 별 신경을 안 썼는데... 영화가 끝나고 곁을 보니..
진한이가 그때까지도 돌아 오지 않은 거야. 그래서 친구 놈들이랑 화장실
을 다 뒤졌는데..."
형민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애써 진정시키며 힘겹게 물었다.
"뒤... 졌는데?"
"마지막 프로여서 사람들이 다 빠져 나가고 우리밖에 없었거든? 그런데
이상하게 화장실의 맨 끝칸이 안으로 잠겨 있는 거야. 문을 아무리 두들
겨도 안에서는 인기척이 없고... 이상해서 애들이랑 한참을 그 앞에 서서
바라보는데... 잠시후 화장실 문 밑으로 뻘건 피가 조금씩 흘러 나오는
거야. 우리들은 기겁을 하며 있는 힘껏 화장실의 문을 부수고 안으로 들
어가 보니..."
상규는 거의 울먹이며 어렵사리 말을 잇고 있었다.
"들어갔더니..?"
"변기 위에 진한이가 쭈그려 앉아 있는 채로 죽어 있었어. 온 몸은 칼같
은 걸로 난도질이 되어 있었고... 두 눈은 공포로 가득 차서 천장을 응시
하고 있었는데... 목과 가슴 부위에서는 질척이는 피가 계속해서 흘러 내
리고 있는 거야..."
형민은 그만 수화기를 떨어뜨리고 '털썩' 무릎을 꿇고 말았다.
"세... 상에... 이럴 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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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한의 장례식 장에는 비통에 잠긴 친구들이 고개를 떨구고 흐느끼고
있었다. 형민은 진한의 영정 앞에서 밤을 새우다가 새벽녘이 되어서야
자신의 곁에서 아무말 없이 졸고 있던 상규를 흔들어 깨웠다.
"상규야. 일어나봐. 할 얘기가 있어."
"으... 응? 뭔데?"
"하여간 잠깐 나 좀 따라와봐."
형민은 상규를 장례식 장 뒤쪽으로 데리고 갔다. 아무말 없이 그를
따라오던 상규가 형민의 안색을 살피더니 의아한 듯 물었다.
"왜 그래? 네 표정이 좀..."
형민은 아무말 없이 고개를 떨구더니 가방에서 다이어리를 꺼내 상규의
얼굴에 들이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분이 찝찝해서... 자, 여기를 읽어봐봐. 어제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이 다이어리에 이런 글이 써 있더라고... 분명히 내가 쓴
건 아닌데..."
상규는 다이어리를 받아 들더니 잠시 읽다가 깜짝 놀라 형민을 쳐다 보
았다.
"진짜로 희한하네? 정말 네 글씨는 아닌데... 여자 글씨잖아? 어... 그런
데... 오늘 날짜에..."
"뭔... 데?"
형민은 상규의 눈이 휘둥그래지는 것을 보며 나꿔채 듯 다이어리를 뺏어
읽어 보았다.
[1999년 3월 21일
오늘 해야할 일 : 상규 문병가기.]
"아... 아니...?"
다이어리에는 어제와 똑같은 글씨와 색깔로 적혀있었다. 형민은 등골이
오싹해 짐을 느끼며 멍하니 자신을 쳐다보는 상규를 바라 보았다.
"이... 이번에는... 네 이름이..."
상규는 의아한 눈초리로 형민을 응시하다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얘기했
다.
"에이... 나 처럼 멀쩡한 애가 무슨... 병원에 입원 하겠니? 혹시 네가...
장난 치는 거 아냐?"
"무슨 소리야? 지금 같은 때에 내가 장난을 칠 거 같아? 아무튼 조심해.
예감이 좋지 않아."
진지한 형민의 말에 다소 얼굴이 상기된 상규가 말없이 고개만 끄떡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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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들아 나와봐. 교실 밖에 상규가... 쓰러져 있어. 어서..."
야간 자율 학습 시간에 형민의 반 반장이 뛰어 들어오며 소리쳤다. 조용
히 공부를 하던 반 친구들은 깜짝 놀라 우르르 밖으로 뛰어 나갔다. 형
민도 엉겁결에 그들을 따라 나서며 새벽에 본 다이어리의 내용이 언뜻
떠올라 몸소리가 쳐졌다.
'결... 국 상규도 다치고 말았어. 세상에...'
교실 밖 잔디 밭에 상규가 거친 숨을 몰아 쉬며 엎어져서 부들부들 몸
을 떨고 있었다. 주위에 둘러싼 급우들은 어쩔줄 몰라 하며 한마디씩 던
졌다.
"선생님께 알렸어? 어떻게 좀 해봐. 구급차도 부르고..."
"어찌 된 일이야? 화장실 간다고 나간 놈이..."
"아이고... 머리 주위에 피가 흥건해... 어... 어서 얼굴을 좀 들어봐."
형민은 다급히 상규의 얼굴을 들었다. 상규의 얼굴은 만신창이가 된 채
찌끄러진 코로 간신히 숨을 몰아 쉬고 있었는데 그럴때마다 피거품이
조금씩 흘러 나왔다. 또한 오른쪽 뺨은 살가죽이 벗겨져 하얀 뼈가 내비
쳐지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건지 누구... 본 사람 없어?"
멀리서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어느새 왔는지 형민의
담임 선생님이 걱정에 가득찬 얼굴로 급우들에게 물었다. 영문을 모르겠
다는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고 있던 학생들 중에 한 학생이 쭈삣거리며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 선생님... 제가 운동장에 있다가 봤는데요... 상규가 3층 화장실
창문으로 무엇에 떠밀린 듯 튕겨져 나오더니... 그냥 바닥으로 '풀썩'
떨어 졌어요."
"뭐라고? 아니 그러면 누가 화장실에서 상규를 밖으로 밀어버렸다는 거
야?"
형민은 다이어리에 대한 생각에 정신이 멍해져 그들의 대화는 그저 귓
전으로만 울려 퍼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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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민은 상규가 수술을 받고 있는 병원 복도 의자에 멀거니 앉아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다이어리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복도에 걸린 벽
시계의 바늘은 어느새 새벽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분명히... 이 다이어리에 뭔가 사연이 있어. 내가 모르는 어떤...
사연이...'
이때 누군가가 형민의 어깨를 살며시 건드렸다. 형민은 다른 생각에 잠
겨 있던 터라 다소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다. 형민의 앞에는 여학생 한명
이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저... 기억 나세요?"
"글... 쎄요. 누구... 시더라?"
"훗. 역시 기억을 못하시네요? 저는 확실히 기억하는데... 몇달전에
학교 앞에 있는 커피숍에서 미팅 했잖아요? 제 친구랑... 또 형민 오빠
친구분들..."
"아... 맞다. 윤미... 구나."
형민은 몇달전 진한이가 통신에서 채팅을 하다가 여학생을 꼬셨다며 자
신과 상규를 억지로 끌고 나가다시피 하여 미팅을 한 것이 생각났다. 그
때 여학생은 진한이와 채팅을 한 혜경이와 윤미, 둘 밖에 나오지 않아
형민은 자신이 빠지겠다며 그저 인사만 하고 몇마디 나누다가 그 자리
에서 나왔는데...
다음날 형민은 상규에게서 그 후의 얘기를 들었다. 둘은, 뚱뚱하고 얼굴
이 못생긴 혜경이보다는 예쁘장하게 생긴 윤미에게만 말을 걸고 관심을
가지다가 결국 분위기 좋던 미팅은 끝장이 났다고 했다. 연이어 혜경이
의 외모를 가지고 짓궂은 농담을 몇마디 한 것이 화근이라고 진한이와
상규가 얘기를 한 것도 생각이 났다.
"참, 혜경이는 잘 지내? 진한이나 상규는 미팅한 날 이후에는 서로들 만
나지 않던 것 같던데..."
형민은 갑자기 진한의 얼굴이 생각이 나서 서글픈 심정으로 물었다. 그
런데 윤미 또한 한동안 머뭇거리다가 울상이 되어 조그마한 소리로 말
했다.
"사실... 혜경이는 몇달 전에 자살을... 했어요. 그 아이... 참 착한
애였는데... 평소 자신의 외모때문에 살기 싫다고 하더니만... 결국
바보같이... 세상이 밉고 자신이 밉다는 유서만 한장 달랑 써놓고...
자기 방에서 목을 매달았는데..."
"세... 상에..."
형민은 온 몸에 한기를 느끼며 침을 한번 꿀꺽 삼키더니 윤미의 입을
주시했다. 윤미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을 이었다.
"다음날 가서 본... 혜경이의 죽어있는 모습은 정말로 끔찍했어요.
자기가 뽑아 버렸는 지 머리칼이 없는 성성한 맨둥 머리에...
머리칼은 혜경이의 발밑, 바닥에 마구 흩어져 있었고... 혓바닥은
가슴까지 늘어진 채로... 두 눈을 부릅뜨고 죽어 있었는데...
더군다나... 목이 조여 숨이 막힐 때 몹시 괴로웠는지... 온 몸은
손톱자국으로 피멍이 들어 있었고... 한쪽 눈은 반쯤 밖으로 튀어나와
있더군요."
윤미는 간혹 말을 끝으며 힘겹게 얘기했다. 형민은 입을 벌린 채로 멍하
니 윤미의 얘기를 들을 뿐이었다.
"흑흑흑... 불쌍한... 혜경이는... 맨날 통신에 매달려 살다시피 했어요.
채팅할 때는 얼굴이 서로 보이지 않으니... 자기가 원하는 대로 남자친구
들을 사귈 수 있고... 또, 한껏 공주처럼 부풀려 얘기할 수도 있으니...
그런데... 오빠들을 만난 이후로 자신의 외모에 더욱 충격을 받은 것 같았
어요. 역시 자신은 살 가치가 없다고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렸는데...
결국..."
윤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어떤 생각이 형민의 뇌리에 스치며 등골이
오싹해졌다.
"자... 잠깐... 저... 있잖아..."
"예?"
형민은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다이어리를 천천히 들어 윤미 앞에 보이
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호... 혹시... 이... 다이어리... 본 적 없어?"
"어? 이건... 혜경이가 죽기 전날 산 다이어리랑 똑같은 건데요? 모양이
특이해서 기억하고 있는데..."
윤미가 이상하다는 듯이 다이어리를 들고 뒤적거리다가 얼굴이 창백해
지며 더듬거렸다.
"형민 오빠. 이거 혜경이거 맞는 데요? 여기 씌여진 글씨가... 혜경이
글씨체랑 같고... 어? 그런데... 왜 이런 내용이 써있죠?
형민은 이마에 흐르는 식은 땀을 닦으며 다이어리를 뺏다시피 나꿔채고
는 윤미가 보던 다이어리의 페이지를 읽어 보았다.
"이... 이럴수가... 이런... 아... 안돼..."
[1999년 3월 22일
오늘 해야할 일 : 혜경이 만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