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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를 위해서라면

엽호부활 |2007.08.09 23:38
조회 1,080 |추천 0

아내를 위해서라면

 

감은 눈에 벌겋게 햇살이 비치는 걸 보니 벌써 아침인 것 같았다. 나는 잘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비벼 뜨고는 흐린 시선으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역시나 같은 모양의 벽지가 내눈에 가득 들어왔다. 누렇고 때에 쪄든 빛
바랜 낡은 벽지가...

애써 몸을 일으켰다. 요즈음은 몸이 더욱 약해진 것 같았다. 벌써 반년
째, 내 오래된 친구인 '암'이라는 질병은 어제 밤에도 어김없이 내 오른
쪽 폐를 갉아 먹고 있었을 것이다.

목이 말랐다. 아니 더 정확히 얘기하면 갈증의 욕구보다 입이 심심하다
는... 나는... 담배가 피고 싶은 것이었다.

"여보... 여보..."

걸걸한 내 목소리를 나자신이 들은 지가 무척이나 오래된 듯 느껴졌다.
하기야 요즈음 같이 집에서 혼자 있을 때가 많은 나로서는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사치일지도 몰랐다.

"여보... 벌써 나간 거야?"

언제나처럼 아내는 직장에 나가고 없는 듯했다. 왠지 모를 안타까움이
가슴에 저며들었다. 아내는 내가 병석에 누운 이후로 생활을 꾸려나가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늦은 밤까지 일을 해야 했다.

항상 웃는 낯으로 나를 대했지만 그녀의 심정은 찢어질 듯 고통으로 바
래져 있다는 걸 나는 잘 알 수 있었다.

나는 손을 뻗어 머리 맡에 있는 담배를 찾아 한 대 꺼내 입에 물었다.
요즈음 보기 힘든 팔각성냥에서 동강이 난 성냥개피를 한개 꺼내 갈색
몸통에 그어댔다.

잠시후 병든 나를 조롱하듯이 '피식'하는 소리와 함께 성냥에 푸르스름
한 불이 붙었다.

"후~~"

담배에 불을 붙이고 망가져 가고 있는 폐속으로 깊숙이 집어 넣었다가
내뱉었다. 통증이 왔다. 그러나 이 통증이 오히려 내게는 쾌감이 된 지
오래다.

얼마전만 해도 아내는 내게 담배를 피지 못하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내 병에 담배는 휘발유에 불을 붙이는 것과 같으니까... 그러나 언제 인
가부터 아내는 하루에 한갑씩 꼬박꼬박 담배를 사서 내 머리맡에 놓아
주었다.

어차피 죽을 사람, 하고 싶은 일... 마음껏 하라는 뜻에서 였을까...
아무튼 나는 그런 아내가... 우습게도, 감사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따르릉, 따르릉-

방구석에 놓인 전화기에서 요란하게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나는 한
모금에 지친 담배를 손에 멍하니 들고 앉아 전화기를 그저 바라만 보았
다. 열번이 울리고 나서야 엉금엉금 기다시피 전화기로 다가가 수화기를
들었다.

"여... 보세요?"
"여보, 괜찮아요? 오늘 당신이 일어나기 전에... 일 때문에 나와서...
미안해요."
"아냐... 당신이 고생이지 뭐..."
"오늘은 좀 늦을 것 같은데... 어쨌든 끼니 거르지 마시고요..."

나는 매일같이 비슷한 내용의 아내 전화에 몇마디 대꾸를 하고는 전화
를 끊었다. 아내는 혹시나 집을 비운 사이 내가 잘못될 까봐 항상 하루
에도 몇번씩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아내의 그런 전화가 나의 생명이 점점 사그러가고 있
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지옥의 전화처럼 들리고는 했다.

나는 천천히 일어나 거울을 바라보았다. 야윈 얼굴에 쾡해진 두눈...
그리고 검어진 피부색까지... 영락없는 내 모습이다. 익숙한 내 몰골이다.

'내가 어서 죽어야 되는데... 어서... 하루라도 빨리...'

이런 생각을 하니 울컥 서글픔이 밀려 왔다. 바로 반년 전 까지만 해도
그렇게도 다정스러운 부부였는데...  따쓰하고 사랑이 넘치는 가정이었는
데... 반년전 그날이 언뜻 머리에 스쳐갔다.


"여보... 나... 암이래... 폐암... 그것도 말기..."

병원을 몇군데나 다녀봐도 같은 대답에... 지칠대로 지친 내가 어느날
집에 들어오며 중얼거렸다. 아내도 각오를 하고 있었던 듯 고개를 끄떡이
며 나를 바라 볼 뿐이었다.

"여보... 미안해... 호강한번 제대로 시켜주지 못하고..."

모든 것을 체념한 내 말투에 그녀는 허탈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나는 세
상이 무너져라 한숨을 쉬었고 그녀는 아무말 없이 방을 나갔다. 내 앞에
서 우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은 듯 그녀는 한참동안 들어오지 않았다.

이윽고 방문을 열고 들어온 그녀의 표정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나를 위해 억지 웃음을 짓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내 어깨를 살며시 껴안으며 말했다.

"어차피... 고치지 못할 병이라면 당신이 죽는 그날 저도 함께 따라갈 거
예요. 전... 당신 밖에 없어요. 당신 밖에는..."


반년전 그날 그녀의 그 말 한마디에 나는 삶의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내 인생이 헛되지는 않았구나. 내가 죽는다고 해도...  그렇게 서글프고
쓸쓸하지만은 않겠구나... 하는...

지난 반년동안 나는 아내를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병을 고치려고 애썼다.
좋다는 것은 전부 찾아 먹어보고 병원은 물론 희한한 민간요법까지 다
해보았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한 실망감만 안겨줄 뿐이었다.

결국... 죽음을 기다리는 공포가 나의 정신을 흐리게 하기 시작했고 내
아내는 그런 나를 안타까운 눈빛으로 지켜볼 뿐이었다. 불쌍한 아내...
결혼 한지 2년도 되지 않았는데...

나는 며칠 전부터 하나의 계획이 떠올라 그것을 실행하려고 마음을 다
잡고 있는 중이다. 그 계획이란... 하루라도 빨리 내가 죽어 버려야 한
다는 것이다. 많은 고민과 갈등이 있었지만 더 이상 아내를 고생시킬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차피 죽을 목숨, 내게 다가 올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내가 먼저 죽음을 찾아 가기로 한 것이었다. 그 편이... 나를 너무도 사랑
하는 아내를 위한 길이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정작 자살을 하려고 하니 어떤 방법이 가장 적당할까 하는 것에
서 내 행동이 머뭇거리게 되었다. 막상 나처럼 죽을 날을 받아 놓은 사
람이 죽음에 대한 공포가 건강한 사람보다 더 진하게 생각하게 되는 법
이다.

흔한 방법으로 목을 매달기에는 그 숨막히는 시간이 너무나 몸서리 쳐지
고 칼로 내 배를 주욱 긋는다는 건 내 소심한 성격상 도저히 말도 안돼
는 짓이었다.

또 빌딩 옥상 같은 높은 곳에서 떨어져 버리는 건 사랑하는 아내가 처
참하게 짓이겨져 버린 내 시신을 보고 오열을 할게 뻔하니 안되고...

그렇다면 결국 약인 셈인데... 사람들한테 들은 얘기로는 어설피 약을
먹었다가는 목적도 이루지 못하고 죽지 않는다면 하루하루를 고통 속에서
산다고 했다.

그래서 며칠을 고심한 끝에 내린 결론은... 두가지 이상의 방법을 병용하
는 것이었다.

다만 모진 목숨에 쉽게 실행하지 못하고 질질 끌어왔던 것인데... 오늘은
아내가 늦는다고 하니 실행에 옮기기로 마음 먹었다. 내가 생각한 방법
은 죽기까지 시간이 꽤 걸리기 때문에 아내가 늦는다고 한 오늘이 적당
할 것 같았다.

나는 장농을 열고 서랍에서 종이에 꼬깃꼬깃 싸 놓은 수면제를 꺼냈다.
며칠 전부터 동네 약국을 다 돌며 한, 두알씩 사서 모아 놓은 것인데...
양이 제법 되었다.

머리맡에 놓인 주전자의 물을 한모금씩 들이키며 한알씩 두알씩 삼키기
시작했다. 왠지 모를 눈물이 내 눈에서 흘러나왔다. 그러나 나는 아내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녀를 위해서라면... 하는 심정으로 한주먹이나 되는
수면제를 다먹고 말았다.

그리고 천천히 일어나 목욕탕으로 가서 세수대야에 따뜻한 물을 가득
받아 돌아왔다. 내 이부자리 옆에 세수대야를 살며시 놓고 커터칼을 찾
아 오른손에 쥐었다.

약기운이 벌써 퍼지는 지 눈앞이 희미해졌다. 어서 서두르지 않으면 안
돼겠다 싶어 왼쪽 손목에 커터칼을 갖다 대었다. 그리고는... 심호흡을
크게 하고 단숨에 그어 버렸다.

시뻘건 핏줄기가 내 얼굴에 튀었다. 그러나 생각처럼 아프지는 않았다.
나는 다시한번 심호흡을 크게 하고 피가 흘러 내리는 팔목 아래쪽을 다
시한번 그어 버렸다.

두번째가 더 깊이 베었는지 조금 전보다 더 많은 양의 피가 샘솟아 흘
러 나왔다. 나는 이불에 반듯이 누워 따뜻한 물이 담긴 세수대야에 왼쪽
팔목을 담갔다.

금새 물은 선홍색으로 번져갔고 나의 의식은 빠져나가는 혈액과 수면제
의 효과로 가물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분만은 한없이 뿌듯하고 즐거
웠다.

내가 죽은 것을 발견하면 아내는 놀랄테지만 이 일은 전부 아내를 위한
것이라 생각하니... 나는 품속에서 아내에게 전하는 짧은 편지를 힘겹게
꺼내 펼쳐보았다.


[윤미에게...

이 편지를 볼때 쯤에는 내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겠구나. 많이 놀
랐겠지? 그러나 나로서는 이 방법이 최선이었단다. 너를  위하고...
이기적이지만 나를 위해서도...

내가 없더라도...  꿋꿋이 살아야 한다.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말이야.
만일 쓸데없는 생각으로 내뒤를 따르거려나 하는... 그런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고... 내가 못다 살은 몫까지 살아주기를 바래. 할말은 많지만...
이만 줄일께... 늘...행복하고...

저 세상에 가서도 변치 않을 내 사랑아... 그러면... 안녕... 히.
형민이가... 씀...]


편지를 다시 고이 접어 머리 맡에 살며시 놓고 두 눈을 감았다. 심연 속
으로 빠져드는 야릇한 기분과 함께 온 몸이 새털처럼 가볍게 느껴졌다.

                      *************

아득하게 아내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이어 내 몸을 세차게 흔
드는 느낌이 들었다. 곰곰히 생각해 보니 아직 내가 죽지 않은 것 같았
다. 아니면 죽어가고 있는 도중일지도...

어쨌든... 아내의 분주한 몸짓이 느껴져 왔고 어쩔줄 몰라 하는 목소리가
내 귓전에 울려왔다. 아내가 전화 수화기 드는 소리가 들리고 '삑삑'하고
버튼을 누르는 소리도 함께 들렸다.

아무래도 구급차를 부르려는 것 같았다. 나는 손을 들어 말리려고 했지
만 몸이 말을 窪?않았다. 거의 죽은 것은 확실한데...  어차피 이제
구급차가 온다해도 돌이킬 수는 없을 듯 보였다.

어서 목숨이 끊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데 아내가 전화기로 얘기하는 것
이 얼풋이 귓전에 울려퍼졌다.

"아, 상규씨? 이거 어쩌지? 내 남편이 자살을 했어. 바보같은 놈... 
어차피 죽을 텐데... 조금만 더 견디지 않고. 응, 그것 때문에 물어 보려
고 전화를 한 거야. 내가 자기한테 작년에 들은, 남편 생명보험 있잖아?
그거 본인이 자살하면 보험금 못타는 거지? 맞지? 그렇구나... 이런...
젠장... 기껏 잘해줬더니... 덜컥 자살해 버리다니... 돈만 날렸잖아? 
휴~ 혹시라도 헛짓 할까봐 매일 확인 전화했는데... 응, 응, 그건 잘됐지
뭐... 일찍 죽어버렸으니... 남의 눈치 안 보고 상규씨와 함께 살 날이
앞당겨진 셈이야... 하하하. 그래... 나?.. 사랑해. 상규씨..."

아내의 그런 엄청난 얘기를 듣고 있자니 내가 지금껏 아내에게 속아왔
다는 울분보다는 오히려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정으로 나만을 위했
던 착한 아내였다면 죽어가는 지금 이렇게 편안히 눈을 감지 못했을 것
이기에...

더불어 죽어서도 아내와 그녀의 정부를 복수할 수 있다는 생각에... 입가
에는 오히려 야릇한 미소까지 피어 올랐다. 왜냐하면...

'에이즈의 합병증으로 인한 폐질환'이라는 나의 간접적인 사인(死因)은
그녀와 그녀의 남자를 경악하게 만들 것이 분명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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