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클린턴 전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 모두 승자입니다. 둘 다 잃은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주변국들이 혹시 잃을 게 없나 하는 묘한 상황을 맞았습니다.
우선 클린턴은 타고 왔던 전세기에 가볍게 몸을 실었습니다. 5일 유나리(36)와 로라링(32) 두 여기자와 함께 유유히 평양을 벗어났습니다. 북한 측에서도 미련 없이 보냈습니다.
클린턴은 1차적인 임무 완료를 했습니다. 김 위원장의 사면을 받은 두 여기자를 데리고 갔으니 왜 방북했느냐는 미 강경파 여론을 잠재울 지렛대를 확보했습니다. 클린턴의 능력을 새삼 다시 확인하게 되고 더불어 부인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도 좋은 선물을 안겼습니다.
물론 클린턴이 방북하기 전 북한 측과 사전조율을 거쳤겠지만 여론은 클린턴과 두 여기자가 동행했다는데 더 주목합니다. 미국인들은 벌써 열광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존 볼턴 전 유엔대사 같은 강경파가 클린턴 방북에 대해 북한에게 다시 보상의 메시지를 줬다는 비판을 하더라도 그 목소리는 한층 작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클린턴의 방북 목적이 두 여기자만의 석방 문제가 아니었음은 모두가 인식하고 있습니다. 과연 북핵 문제에서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뒀는지 관심입니다. 클린턴과 김정일 두 사람 간 오간 이야기를 알 수 없지만 김 위원장과 클린턴 전 대통령이 진지하고 폭넓은 의견을 교환했고, 대화로 풀자고 했다고 하는 북한 측의 언론 보도가 단초가 되고 있습니다.
몇 주 전만 하더라도 북한은 힐러리 클린턴을 장마당 할머니, 에티켓을 모르는 소학교 여학생 수준으로 매도하고 또 이에 앞서 힐러리 클린턴은 북한을 주목받고 싶어 하는 어린아이 같다는 막말을 했지만 남편 클린턴은 북한의 최고지도자를 만나 대화의 물꼬를 트고 떠났습니다.
애초 인격모독의 설전이 이번 클린턴 방북을 가리기 위한 고난도의 전술이란 설도 있지만 여하튼 유엔 대북제재 등으로 벼랑에 몰린 북한이 대화로 풀자는 얘기를 했다는 점에서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클린턴은 두 여기자를 자신이 타고 온 항공기에 동승시키고 북핵 협상의 계기를 남기고 떠난 점은 성과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얻은 것이 이 뿐이 아닙니다. 그는 평양을 방문한 미국 내 최고위 인사로 1박2일이지만 직접 북한을 보고 판단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는 점입니다.
또 각종 건강악화 설로 말 많은 김 위원장을 지척에서 지켜봤다는 점은 매우 큰 소득입니다. 최근 김 위원장의 병세 악화로 얼마 살지 못하리란 주장이 나오고 있는 시점에서 클린턴과 그의 일행이 그를 직접 본 것입니다. 중앙정보국(CIA)의 어떤 자료보다 정확한 판단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클린턴의 방북은 이처럼 잃을 게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념할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북핵 6자회담 참가국 중 북미를 제외한 4개 국가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기껏 6자회담 재개를 주장해놓고 뒤에 가서 클린턴을 북한에 보낼 수 있느냐, 가서 뭘 논의했느냐 하며 불만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또 대북 제재에 동참했던 유엔 안보리 이사국들의 반발도 고려해야 합니다. 그래서 백악관이나 국무부는 클린턴 방북에 대해 공식적인 언급을 일절 삼가고 나중에 말하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북한이 대화에 나서겠다고 하는 바에야 나머지 6자회담 참가국이나 여타 국제사회는 드러내놓고 클린턴 방북에 대한 항의를 하지 못할 것입니다. 특히 일본은 자국의 납치문제가 소홀히 다뤄질까 우려하고 있으나 대북 강경론에서 대북 대화론으로 바뀌는 상황이라면 좋으나 싫으나 결국 여기에 묻힐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김 위원장도 이번 클린턴 방북으로 잃은 게 없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유나리와 로라링 두 여기자는 북한 체제에 직접적인 이익을 주는 존재가 아니었고 풀어 줄 시기만 타진하다가 어제 핵급 인사인 클린턴 방북으로 연결됐습니다. 김 위원장의 위신을 한껏 세워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조선중앙통신 등 북한 언론들이 이를 신속히 보도한 것도 이 때문일 것입니다. 미국의 전직 대통령이 북한에 들어와 두 여기자 문제로 사과를 하고 오바마의 메시지를 정중히 전달했다고 분위기를 띄웠습니다. 핵, 탄도미사일 개발 등이 헛되지 않았음을 선전할 수 있고 내부 결속을 꾀할 절호의 기회입니다.
[XINHUA/NEWSIS] 출발하기 전 두 여기자를 맞고 있는 클린턴 전 대통령
또 대북 제재와 국제사회의 규탄으로 코너에 몰린 북한을 클린턴이 방문해 줘 협상 테이블에 나갈 수 있는 명분을 마련해 줬습니다. 그동안 불바다 등 보복공격을 외치다가 갑자기 협상 테이블에 앉을 수는 없는 처지인데다 어차피 종국적으로 핵을 지렛대로 미국과 협상을 해야 하는 만큼 이번 클린턴 방북이 그 계기를 제공한 것입니다.
게다가 두 여기자를 사면해 보냄으로써 국제사회에 악의 축이 아님을 선보일 수 있었으며 클린턴에게 머리가 빠진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반대로 직접 핵 협상을 챙기고 건재함을 과시해 끊이지 않은 건강악화설을 잠재울 수 있는 시간도 됐습니다.
한편으론 클린턴 전 대통령은 북한 핵문제를 잘 이끌 경우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노벨 평화상도 거머쥘 수 있는 가능성을 얻게 됐으며 이에 못지않게 김 위원장도 여기자를 사면한 건전한 모습으로 지구촌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됐습니다.
북한 핵문제는 언젠가는 끝을 봐야 하는 문제이지만 최소한 그 장기전의 과정에 미국은 북한을 압박하며 핵 개발까지는 아니더라도 유출을 막을 기회를 계속 갖고 있는 셈이며 북한은 핵을 통해 체제 결속을 다지면서 끊임없이 양보를 요구하는 메카니즘을 작동시키고 있는 셈입니다.
이번 클린턴 방북이 핵 문제의 결론을 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는 퇴임한 대통령이기 때문에 직접 권한을 행사하지도 못합니다. 허나 두 여기자 석방과 함께 꺼져가던 핵 협상을 다시 소생시키는 엄청난 외교 행보를 한 것으로 기록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