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라는 건 꽤나 힘든 일이다. 주변정리부터 시작해서 짐정리까지 손이 안 가는 일이 하나 없는 대형 일거리다. 하지만 그 어떤 이사라도, 가는길에 가족들을 죽이려는 것들과 마주치게 되는 이사는 없다. 우리는 그런 일에 착수했고, 다행히도 아무 희생자도 없이 해내었다.
재복이가 죽을 뻔 했다가 살아난 싸움 이후 녹초가 된 우리는 지친 발걸음을 이끌고 겨우 편의점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골목은 예전과 다를 바 없이 깨끗했지만, 방심했던 채 건물에 들어섰다가 좀비견과 맞딱트렸던 경험을 살려 나는 최대한 긴장하며 편의점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후아아.. 덥다."
원채 돌로 된 건물인데다 바닥까지 타일로 덮혀있어 안은 제법 시원했다. 놈들에게 물리지 않기 위해 코트나 긴팔 웃도리를 입고 있던 일행들은 다들 옷을 벗어던지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나도 당장에 옷을 벗어던지고 냉장고에 등을 붙이고 싶었지만 나라를 업고 있는 처지라 그럴 수가 없었다. 내신 난 신발을 벗은 채 시원한 타일 위에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으음.. 시원하군.
"도와줄게."
태완이가 내게 다가오며 말했다. 나는 계산대 안쪽으로 들어간 뒤 태완이의 도움을 받아 나라를 내려놓았다. 녀석은 우리가 팔을 잡고 내려놓을 때 잠깐 눈을 뜨고 끙끙거렸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을 규칙적으로 내쉬며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팔자도 좋지.
나는 내 코트를 녀석에게 덮어줄까 했으나, 내 손에 들린 겉옷의 꼴이 눈에 들어오자 그런 생각을 접을 수 밖에 없었다. 코트가 피로 떡칠이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업혀있었을 때야 몰랐겠지만 뭐, 굳이 누워있을 때 까지 이런 꼬질꼬질한 코트의 덕을 보긴 싫을 것이다. 냄새도 나고.
가만, 냄새라..
나는 카운터에 몸을 기댄 채 모두를 돌아보았다. 일행들은 각자 짐을 정리하고 목마름을 해결하느라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예상한대로, 모두의 몰골은 정말이지 꼬질꼬질 그 자체였다. 후방에 있었던 여자들의 옷조차 핏자국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래, 식량은 문제없다. 하지만 세탁이 문제다.
세탁이라 함은 비단 옷 뿐만의 문제가 아니다. 몸도 닦아야 하고, 그 이외에 불가피하게 청결함이 요구될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다. 씻는거야 뭐 한달만 버티면 되니까 세면대에서 나오는 것으로 어떻게 할 수 있겠지만 그 이상이 요구될 때엔 어떻게 해야 할지.
나는 이런저런 고민을 하면서 내 시야에 들어오는 타일의 수를 세고 있다가 문득 고개를 올려 물건들이 올려져있는 선반을 보았다. 순간 내 눈에 익숙치 않은 물건이 들어왔다. 저게 뭐지? 기저귀같은..
"..아!"
나는 다음 순간 그것이 무엇인지를 떠올리고 짧게 탄성을 지르다가 입을 가렸다. 그래, 생리! 여자들은 한 달에 한번씩 그걸 하지! 그렇게 된다면 다시 한 번 몸을 씻어야 한다는 문제가 부각되는데..
생리라는 단어가 떠오르자 순간 나는 온갖 야리꾸리한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래, 이 며칠동안 정말 너무도 어이없는 일들이 일어나서 까먹고 있었지만, 나는 이제 스물이 되는 건강한 청년이다. 그건 다른 남자들 역시 마찬가지고.. 이런 극한상황에서, 밀실에서, 여자들과 갇혀있는데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 누가 장담하지?
거기다 흥분. 피를 볼 때의 그 흥분. 그리고, 이런 상태에서니 벌어질 법한 될 대로 되라의 상황. 누가 누구를 덮친다던가, 혹은 죽인다던가.
나는 냉장고를 손으로 지탱하며 반쯤 일어나 일행을 둘러보았다. 지친 듯한 모습으로 가방 옆에 쪼그려앉아있는 아름이와 나영누님의 가슴께가 유난히 눈에 밟혔다. 그리고 먼지와 피로 더러워진 엉덩이 부근, 찢어진 교복 사이로 보이는 속살.. 나는 순간 몸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하기만 동시에 머리를 흔들며 자리에 주저앉아 불미스러운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우려고 노력했다.
뭐 하는 거야 지금!!
나는 선천적으로 앞에 나서거나 책임을 지는 일을 싫어한다. 때문에 학창시절, 사소한 놀이에서도 리더라는 자리엔 앉아 본 기억이 매우 드물다. 하지만 이번만은 다르다. 지금은, 적어도 지금은, 내가 이 그룹의 중심이다. 한 순간만 정신을 차리지 않아도 저 밖에 들끓는 괴물들에게 목덜미를 물어뜯길텐데, 앞서서 여자랑 허리나 흔들어댈 생각을 하는 거냐 지금!
나는 손바닥을 냉장고의 차가운 유리문에 갖다댄 뒤 힘을 주어 손가락을 천천히 오므렸다. 삐빅거리는 소리가 편의점 안에 울려퍼졌지만 나는 아랑곳않고 주먹이 만들어질 때 까지 손가락을 오므린 뒤, 그 손을 얼굴에 갖다대고 천천히 쓸어내렸다.
차갑다.
"야."
가만히 타일을 내려다보고 있던 나는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윤호였다. 녀석은 아이스크림을 하나 입에 물고 있었다. 녀석은 내게도 하나를 내밀었다.
"혼자 왜 청승떨고 있어."
"으응."
나는 의미없는 대답을 하며 아이스크림의 껍질을 까서 입에 물었다. 뭐지 이거. 이름도 확인 안 했네..
윤호는 내가 멍한 얼굴로 아이스크림을 쪽쪽 빠는 걸 바라보고 있더니, 내 옆으로 와서 나와 나란히 쭈그려 앉았다.
"뭔 생각했어?"
"별로."
"별로라니? 뭔 소리야 그게."
윤호는 내 대답을 듣고 눈을 찌푸리더니, 아이스크림을 한 입 크게 베어물고 와구와구 씹어 삼킨 뒤에 그 나머지 조각을 입에 털어넣었다.
"짜식. 솔직히 말해. 야한 생각 하고 있었지? 응? 응?"
윤호는 키득거리면서 나를 팔꿈치로 찔렀다. 나는 녀석의 팔을 잡아서 꺾어버린 뒤에, 나영누님과 아름이를 한 번 다시 바라보고는 혼잣말을 하듯 말했다.
"응."
"뭐?"
나에게 팔이 꺾여서 등을 돌린 채 아야야거리고 있던 윤호는 내 대답을 듣고 어이없다는 듯 나를 돌아보았다. 내가 녀석을 풀어주고 아이스크림을 끝장내고 있는데 태완이가 다가와 앉았다. 평소에 군것질을 즐기지 않는 태완이지만 지금만큼은 허기가 진 모양이다. 녀석은 육포를 입에 문 채 나에게 말했다.
"어때, 생각해봤어?"
지금까지 생각하고 있던 건 이 문제밖에 없다. 뜬금없이 내게 다시 물음을 던진 태완이었지만 나는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을 했다.
"..응. 아직 확실히 결정하지는 않았지만 가능하다면 올라가는 것이 나을 거라고 봐."
"뭐? 뭔 소리야?"
"이유는?"
수색조가 아니었던 윤호는, 비록 우리가 집에 돌아간 이후 정보를 전해주었지만 아직 잘 모를 것이다. 태완이가 윤호의 물음을 무시한 채 내게 재차 묻자 나는 금방까지 생각했던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첫번째, 식량 이외의 보급품에 대한 문제. 계속 구하러다니기엔 위험부담이 너무 커. 차라리 박차고 떠나느니만 못하지."
박차고 떠났다가 죽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나는 다시 한 번 진열되어 있는 생리대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두번째, 여자들과의 관계. 이런 데 안에 멀쩡한 남녀가 몇 명이나 있는데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곤 장담할 수 없어."
"에잉? 뭔 소리냐니까?"
윤호가 내 어깨를 잡아채며 물었지만 나는 윤호의 말을 무시하며 태완이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세 번째.. 우리 그룹의 가족들 생사유무 확인과 다른 친구들을 확인하기 위해."
내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태완이는, 세 번째 이유를 듣자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는 얼굴을 하며 나를 마주보았다.
물론 우리가 살아남는 것이 최우선 과제인 것은 변함이 없다. 일행의 가족들도 그것을 바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일단 살아남은 뒤에 가족들을 찾아나서면 돼.. 라는 식의 생각을 할 정도로 우리들은 융통성있지 않다. 아니, 않을 것이다.
지금 여기에 있는 그 누구도 가족들의 안전을 백 퍼센트 장담하지 못한다. 지금까지야 바빠서 생각할 겨를이 없었겠지만 이렇게 숨어지내는 공백기간이 길어질 경우 반드시 지인에 대한 걱정에 의해 패닉에 빠지는 사람이 나올 것이다. 그것을 예방하기도 해야 하거니와, 그 전에 모두의 가족을 진심으로 걱정하기에 내건 이유이기도 하다.
이쯤 되자 윤호도 우리가 하는 말을 알아들었는지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래, 윤호는 부모님과 여자친구 모두 연락이 되지 않는다. 사실 이 과제에 제일 집착이 있는 건 윤호일 것이다.
"..휴전선으로 올라간다는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윤호는 나와 태완이를 번갈아 보며 쳐다보더니 말했다.
"미쳤어.. 여기서 가만 있으면 살 것을 왜?"
"넌 여친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지도 않냐?"
내가 정곡을 찌르자 윤호는 눈을 크게 뜨며 나를 쳐다보았다. 물론 궁금할 것이다. 그것도 죽을 정도로. 녀석은 아이스크림의 겉껍질을 힘껏 구기면서 이를 악물었다. 나는 다 먹은 아이스크림 막대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확실히, 박혀 있으면 살게 될 보금자리를 얻었으면서 굳이 밖으로 나간다는 건 미친 짓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그런 짓을 하기 위해 그저 핑계를 대는 것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만약 내 가족이 한국에 있고, 나와 떨어져 있다면, 나는 밖으로 나갈 것이다. 그리고 여기 있는 다른 이들 역시, 밖으로 나갈 용기는 없을 지는 몰라도 가족에 대한 걱정만큼은 누구나 대단히 클 것이다. 그들을 위해 손을 빌려주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무모해도 상관없다.
윤호의 전에없이 심각한 표정을 보며 나는 녀석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반드시 찾아낸다. 염려마. 물론 너도 같이지만."
윤호는 가만히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가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서 어쩌겠다고? 차라도 있어?"
"찾으러 가야지."
태완이가 당연하단 듯이 말했다. 그래, 그것이 우리의 지상과제다. 이동수단을 찾는 것. 단순히 좀비에게서 빨리 도망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요전에 나라를 구했을 때 처럼 생존자를 만난다던가, 쓸만한 물자를 얻는다던가 할 때 차가 없다면 정말 불편할 것이기 때문이다.
태완이가 뭔가를 더 말하려는데 녀석이 등지고 있던 선반 너머에서 수정형이 머리를 내밀며 말했다.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하고 있어?"
큭, 키 큰 자의 특권이군.
형이 과자를 한아름 들고 와 우리 옆에 걸터앉자 나와 태완이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수색조가 먼저 편의점에 들렀을 때 수정형은 태완이와 같은 의견을 피력했었던지라 우리가 하는 말에 불만이 있을 리 없었다. 다만 내가 내건 마지막 이유에는 수정형도 생각해보지 못한 듯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진환아, 내가 저번에도 말했지만, 나는.."
"알아요. 찾으러 나간다는 거는 모두한테 물어보고 시작할 거니까 안심해요."
수정형은 그래도 조금 안 내킨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형도 말은 저렇게 하고 있지만 가족이 보고 싶을 것이다. 나는 과자를 하나 집어먹으면서 다시 한번 일행을 둘러보았다. 모두 간식을 먹거나 곤한 잠에 빠져잇는 등 오랜만에 찾아온 달콤한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젠장, 박혀있을 곳 하나 찾았나 했더니 결국은 다시 나가야 할 것 같군.
알아 볼 것인가, 알아보지 않을 것인가.
알아본다면 죽을 위험이 크고, 알아보지 않는다면 그 위험이 줄어든다.
하지만 위험이 있다는 것은 변함이 없다.
그렇다면..
가야지.
그게 나고, 우리다.
최후의 생존까지, 28일-
혹은, 사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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