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집 밖으로 나가고 싶어졌다. 답답했다. 그게 다였다. 일요일 오후 1시.
그 때의 그 돌발행동의 이유는 그게 전부였다.
일주일도 채 되기 전에 받은 몇푼 안되는 월급은 어디다 뭘 하는데 흘리고 다녔는지 주머니엔 달랑 8000원. 그리 적은 돈은 아니지만, 체납되어버린 다른 월급과, 아직 월급날이 한참 남아있다는것을 생각하면, 앞으로는 쫄쫄 굶고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 잠시 고민하다 결국엔 옷을 대충 챙겨입고 집을 나섰다. 이러다 내가 어쩌려고 이러는지.... 이 따위 생각.
버스정류장은 집에서 그리 멀지 않다. 걸어서 3,4분정도. 다만 4월이라는 날짜에 맞지 않게, 방정맞게 내리쬐는 햇살이 짜증을 더하고 있을뿐. 분명 티비에서는 날씨가 더워지기 시작한다고 말하는건 들어보지도 못했다. 얼어죽을 일기예보. 이래서 믿을게 못된다. 항상 반대다. 그렇다고 다시 집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오기에는, 지금 가는 이 길이 대통령이나 되는 대단한 사람을 만나러 가는것도 아닌 할 일 없이 설렁설렁 걸어나온 백수이고픈 어린 녀석이 미우나 고우나 평생 보고 살아야 하는 맑은 하늘을 마주하러 가는 것이기에. 잠자코 버스를 기다렸다.
아주 멀리까진 아니더라도, 적어도 싸고 편한 대중교통을 이용해 집에서 가장 멀리 떠날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저렴한 여행 방법. 더불어 아직 적응하지 못한 외지의 구석 구석을 파악할수도 있는 일석이조의 방법. 언제였던가, 종종 집을 떠나 일을 하러 다닐때 알게 된 방법이었다. 날씨가 덥지만 않으면, 적당히 사색에 잠겨 경쾌하게 반나절의 산책을 즐기는 일이 가능하다. 에어컨까지는 기대하지도 않지만 적어도 바람은 만들어 낼 수 있으니 그것만으로 만족이다. 천원. 반나절짜리 대중교통을 이용한 여행의 경비. 싸다. 아주 싸다.
눈을 감는다. 가장 중요한 포인트다. 시내버스의 반도 안되는 자그마한 마을버스가 다녀봤자 얼마나 멀리가겠는가. 게다가 이미 소싯적부터 타고 다녔던 버스였던지라, 타고 있는 버스가 가는 길 만큼은 눈을 감고도 어디쯤인지 대충 알아맞출수 있을 정도가 될 정도다. 이래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 외딴곳에 떨어저 적당히 헤메다 적당히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찾아내야 하는 목적을 겸하는 이 여행은 지나온 길을 기억하고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다. 시원스럽게 지나가는 가로수. 한번 지나갈때마다 낡은 마을버스가 다 부서질듯이 끼익끼익 대는 과속방지턱. 기억해서는 안 될 것들이다. 나는 지금은 이 녀석들을 내 기억속에서 밀어낼 준비를 하여야 한다.
버스는 줄곧 달려나간다. 눈을 감은 내 앞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스쳐지나가는 지난 날의 기억들. 1초 1분 1시간 새로운 기억들을 아로새기는 대신 나는 오늘이 다가오기 전 나에게 다가왔던 크고 작은 일들을 곱씹는다. 지난주의 악몽같았던 일들, 그리고 한 달여의 시간을 거슬러가 이제 막 대학에 입학했을때의 그 날. 대학에 입학하기전 주위의 압박감들에 짓눌렸던 스트레스가 부모님에게 터져버려 한참을 싸웠던 어느 날 오후. 그리고... 기억하기도 싫은 그때의 기억은 한참전이구나. 갑자기 또 외롭다는 생각에 몸이 떨렸다. 하지만 이제와서 어쩔 수 없다. 겨우 그런 일 때문에 인생을 걸고 선택한 이 길을 되돌릴 수는 없다. 나는 또 다시 스스로에게 그리고 나를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 앞에 부끄러워지는 것이다. 그것만은 죽어도 싫었따. 어차피 극복해야 하는것이고 그러지 못한다 하더라도 어쨌든 평생 안고 가야하는 숙제와 같이 귀찮은 녀석인것이다. 나만이 그렇다면 세상이 불공평하다며 허공에 욕지거리라도 질러보겠건만 세상에 그렇지 않게 살아온 사람이 누가 있을까. 어느 누구도 자기 욕심만 차리면서 살아온 이가 없는데. 다만 부족한 만큼의 그 무언가를 다른 행복으로 채워나가는게지. 피할 수 없다면 즐긴다. 나는 며칠전에서야 겨우 지겹게 나를 괴롭히던 외로움이라는 악동과 악수를 나눴다.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
버스가 얼마나 달려왔는지 시간조차 계산하지 않는다. 걸린 시간만으로도 집까지 가는 길에 대한 거리를 추측 할 수 있기 때문에. 말 그대로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여야 했다. 복잡한 미로를 풀어나가는 느낌이 든다. 즐겁다. 알지 못하는 것을 인지해 나간다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꼭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아주 드문일이다.
종착역답게 꽤나 한산한 곳. 나는 일단 버스가 달려온 반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한다. 어디론가 향하는 내 옆을 지나가는 길가의 행인들. 어디로 가고 있을까. 혹시 나와 같은 짓을 하고 있는 사람은 없을까. 저 아저씨는 지팡이를 참아슬아슬하게 짚고 다니는구나. 엄마 손을 꼭 잡고 빽빽 울어대며 지나가는 저 꼬맹이는 이제 몇 년만 지나면 지금보다 배로 지 어미의 속을 썩일 것이고, 내가 저런 꼬마의 애비가 되어 있을 때에는 제법 머리도 커서 부모에게 싫은 소리를 듣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들을 바라보며 내 멋대로 각각의 개성넘치는 삶을 상상한다. 누그는 희극, 누구는 비극. 내 상상이 맞아들어가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어차피 정답이 필요없는 물음 아닌가. 그다지 집착할 필요도 없다. 이 모든 물음과 상상은 천원짜리 여행을 즐기기 위한 하나의 코스일 뿐이다.
도심에서 꽤나 벗어난 곳에 살고 있어서 그런지, 좌우로 보이는것은 다 갈아 엎어놓은 밭들 뿐이다.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이 맞는지는 모르겠다. 한 번에 가장 짧은 거리의 귀향로따위는 이미 머릿속에 다 들어 있으니, 천천히 즐기기로 했다. 어차피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인생도, 시작점부터 목적지까지의 단순한 길은 모두에게 다 있는것 아닌가. 어차피 내가 살고 있는 이 인생도 그 단순한 길 옆으로 뻗어, 결국 그 길로 언젠가 돌아오는 완행선이지 않는가. 오늘 이 하루의 길이 틀리다면 어쩔텐가. 결국 그 길을 걷다보면, 그 크고 단순한 길로 돌아오게 되어있는것을. 너무 메달려봤자 피곤할 뿐이다.
얻은 것이 없어 잃을 것도 없었던 어린 날들. 하나 하나 더해가는 소중한 보물들을 챙기는 일이 즐거웠던 19살의 철없는 시간. 멍청하게 세월만 보내다 하늘로 꿈을 날려보낸 20살의 어리석은 과거. 그리고 지금. 예전으로 돌아간다면. 나는 내가 얻지 못했던 것을 얻고 잃어버렸던 것들을 지켜낼 수 있을까. 그렇게 다시 산다면 그런 나는 지금 이런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정답 없는 삶이라는 부분은 이럴 때 좀 야속하다. 엉뚱한 상상에 대한 답은 좀 얻고 싶었는데. 상상으로 시작한 질문의 답은 결국 상상일뿐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나를 지켜주는 가장 큰 벽이 아직 건실하다는 것. 이 정도라면. 나는 아직 아무것도 잃지 않았다.
얼마나 걸었을까. 여행은 슬슬 끝을 보이고 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주변의 건물들이 서서히 보인다. 말끔한 페인트칠이 눈에 띄는 새 건물과 여기 저기 낡아 시커먼 시멘트벽이 보이는 낡은 그것들. 그 안에 무슨 가게들이 입주해 있는지. 어떤 사람이 그것을 운영해 나가는지. 그것보다는 그 건물들이 늙어온 시간들이 궁금했다. 어떤 목적으로 누가 언제 세운 건물인가. 눈 앞의 그네들은 왜 태어났을까. 그리고 어떻게 늙어왔을까.
나는 어떻게 늙어갈까.
모두 내가 하기 나름에 달려있지만. 그런 뻔한 대답보다는 좀 더 구체적인 답을 듣고 싶었다. 너는 앞으로 어떻게 되고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을게다. 흰 수염으로 얼굴을 뒤덮고 있을듯한 신선노름을 즐기는 노인에라도 내 앞에 다가와 그렇게 말해주길 바란다. 미리 알고 사는 인생 따위 재밌을 리가 없지만.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믿어버리고 다시 살면 그만이다. 노력에 따라 삶이 변한다는 명제에 대해선 반기를 들 생각이 없으나. 그래도 알고 싶은게 솔직한 마음이다. 미래에 대한 불안은 비록 10원짜리 개똥철학일지 모를 노인네의 말이라고 할지라도 조금은 사그러들지도 모른다. 슬슬 눈 앞에 보이는 새로 나타나기 시작한 적수. 나는 아직 이 녀석에 대적할 무기를 갖고 있지 않다. 그래서 불안하다. 어서 그 날을 세워야 하는데. 이 놈은 풀먹인 종이 마냥 축 늘어져 빳빳히 세워질 줄 모른다. 마치 어릴 적 내 모습마냥. 그럴때면 예전과 하나도 달라진 바가 없는 것인가 하고 또 불안해지는 것이다. 나름대로 꽤 괜찮은 방향으로 커왔다고 생각했는데. 부디 지나간 시간에 대한 내 믿음만은 깨트리지 않고 당신을 마주하고 있는 나의 현재만을 상대해줬으면 하는 희망이 있다. 당신은. 적어도 그렇게 비겁한 존재는 아니라고 믿는다.
집으로 돌아와 땀으로 젖은 몸을 상쾌하게 씻어내고 바짝 마른 목을 시원한 물로 채우고 살살 감겨오는 눈을 달래려 이불에 몸을 뉘운다. 이것으로 짧지만 나름대로 알찬 1천원의 경비를 소요한 반나절짜리 여행이 끝이 난 것이다. 끝은 달콤한 잠으로 마무리 하는 이 매력적이고 경제적인 여행. 비단 1천원이라는 돈을 소비하지 않고도 여행이야 얼마든지 떠날 수 있는 일이다. 억지스럽긴 하지만 잠시 왔다 가는 인생이라는 어른들의 웃는 소리는 그런 식으로 나온게 아닐까 싶다.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내일 하루를 시작하고 싶다. 이 하루가 내 고된 인생이 아니라. 곤히 잘 수 있는 끝을 약속받는 즐겁지만은 않은 조금 이색적인 여행이 되길. 경비는 물론 지불하겠다. 내가 흘리는 피와 땀으로 말이다. 결코 싸진 않을 것이다. 나는 지금 죽을 듯이 살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