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구어린이 납치살해 올해도 ‘미궁 속’
미흡한 초동수사탓 DNA채취 실패, 유일한 목격자 할아버지마저 숨져
마을 개발에 현장 흔적 사라질 판…“관심 갖고 재수사” 엄마 간절 호소
또 한 해가 저무는 이 즈음에 더욱 가슴 시려하는 이들이 있다. 납치·살인 등으로 소중한 가족을 잃고 범인마저 잡히지 않아 ‘미제’라는 꼬리표가 붙은 사건의 피해자들이다. 사건 발생 당시 ‘반짝’했던 세간의 관심은 어느새 흔적없이 사라졌다. 하루하루를 힘겹게 버텨가는 미제사건 피해자의 고통스런 삶을 들여다봤다.
2009년 12월28일 오후. 대구 달성군 유가면의 은정이네 집은 을씨년스럽기만 했다. 흉물스럽게 버려진 집 위로 검푸른 산그림자가 드리웠다. 한 무리의 새들이 은정이의 주검이 발견된 비슬산 기슭을 넘어 날아갔다.
“아저씨 그만 때려요.”
지난해 5월30일 새벽, 11살 소녀 은정이는 이렇게 외치고 사라졌다. 그날 괴한 2명이 느닷없이 들이닥쳐 할아버지를 폭행했다. 괴한들은 두려움에 떠는 은정이를 끌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했다. 그리고 약 보름 뒤 은정이는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끔찍히 훼손된 주검에서는 제대로 된 유전자정보(DNA)도 나오지 않았다. 유일한 목격자인 할아버지마저 뚜렷한 이유없이 진술을 외면하다 사건 발생 80여일 만에 지병으로 숨졌다. 이후 경찰은 2만명에 가까운 병력을 동원했다. 1천만원의 포상금을 내걸고 수배전단지 2만5천부를 전국에 뿌렸다. 그러나 용의자의 윤곽조차 찾지 못했다. 은정이는 이렇게 ‘영구 미제사건 목록’에 이름을 올려야 하는 것일까.
■ 촛불…개발…그리고 무관심 그로부터 1년7개월이 흘렀다. 시간이 흐를수록 은정이의 어머니 김아무개(36)씨의 상처는 깊어만 갔다.
“믿을 수가 없어요. 제대로 꽃도 피워보지 못한 11살짜리 애를 누가….”
어머니는 말을 잇지 못한 채 굵은 눈물 방울만 떨궜다. 그는 달성을 떠나 부산에 살고 있다. 어머니의 설움은 깊어졌지만 주변의 관심은 거꾸로 사그라들었다. 은정이가 납치 살해된 당시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촛불집회로 온 나라가 들끓었다. 김씨는 “은정이가 사라지고 난 뒤 경찰에 좀 더 많은 인원을 동원해 수색을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경찰은 ‘촛불시위 진압에 나서느라 인력이 부족하다’고만 했다”고 말했다. 당시 수사본부에 참여했던 한 경찰관은 “지구대 직원 등을 총동원해 수색에 나섰지만, 현실적으로 인원이 부족했다”고 말했다.
동네 주민들의 관심도 차츰 식어갔다. 마을 곳곳에 내걸린 ‘제보 포상금’ 현수막은 지난가을 철거됐다. 대신 마을은 이곳에 곧 들어설 테크노폴리스 첨단산업단지 조성 문제로 들썩였다. 마을 전체가 사업지구로 포함된 탓에 곧 은정이네 집도 철거될 운명이다. 사건 현장과 혹시 남아 있을지 모를 증거물이 모두 사라지는 셈이다.
■ 말뿐인 실종수사 전담팀 은정이 사건이 발생하기 한 달 전인 지난해 4월 경기 안양의 혜진·예슬이 납치 살해사건에 이어 일산 초등학생 납치 미수사건이 터졌다. 이명박 대통령이 직접 경찰서로 달려가 어린이 대상 범죄에 대한 적극적인 수사를 지시했을 정도로 사회적 관심이 높았다. 그 직후 전국의 경찰서에 ‘실종수사 전담팀’이 꾸려졌다.
그러나 은정이 사건은 이 모든 것들이 ‘생색내기’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품게 했다. 대통령의 지시가 내려진 뒤 발생한 첫 어린이 납치살해 사건인데도, 지금은 영구 미제사건이 될 상황이다.
특히나 관할인 대구 달성경찰서는 인력부족 탓에 실종수사 전담팀조차 꾸리지 못했다. 이는 곧 초동수사 미흡으로 이어졌다. 수사본부를 지휘하고 있는 배영춘 달성서 수사과장은 “주검을 며칠 만 일찍 발견했더라면 디엔에이를 검출할 수 있었을 텐데 그렇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쉽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직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경찰은 은정이의 청바지에서 나온 3명의 혼합 디엔에이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있다. 수사본부는 지난 9월 주변 인물 30명의 구강시료를 채취해 국립과학수사연구소로 보냈다. 지난달 19일 회신이 왔으나 모두 ‘관련 없음’으로 확인됐다. 배 수사과장은 “실낱 같은 단서지만 디엔에이를 토대로 주변 인물들을 상대로 끊임없이 탐문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밝혔다.
■ 절규가 멈추는 날은… 어머니 김씨는 요즘 부산의 한 사찰에서 하루가 멀다하고 기도를 한다. 반드시 범인이 잡힐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처음부터 원점에서 재수사를 해주세요. 은정이 같은 피해자가 다시 생기지 않기 위해서도 미제사건으로 남아서는 절대 안 됩니다.”
수사본부가 차려진 달성서는 그 동안 서장이 2번 바뀌었다. 이제 이 겨울이 지나면 은정이의 집도 사라지고 동네 모습도 바뀐다. 어머니는 딸이 차디찬 겨울에 쉴 곳을 찾지 못하고 있을 것 같아 마음이 시렵다.
“제가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그래서 더 가슴이 아프고 설움이 북받쳐 올라요.”
지금도 어딘가에서 희미하게 웃고 있을 범인. 그의 미소가 사라지고 어머니의 절규가 멈추는 날이 올 수 있을까.
달성·부산/김연기 기자
ykkim@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