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디의 위대한 교감은 말 그대로 동물들과 교감을 나누는 이야기다. 주인에게 버림을 받아 낯선 이의 집 앞에 홀로 놓여진 늙은 강아지의 상처, 자식을 잃고 더 이상 멀리 달리지 못하는 말 등 여러 동물들의 상처를 다루고 어루만진다. 인간, 주인의 일방적인 입장에서의 소통이 아닌 보다 상대방, 동물들의 입장에서 그 상처를 어루만지는 과정이다. 하이디가 동물들의 눈을 쳐다보고, 등을 어루만질 때, 급기야 서로가 눈을 마주보고 함께 깜빡이는 순간은 언어, 종의 장벽이 사라진 것 같은 느낌마저 준다.
동물들과의 교감을 다루려는 다큐는 이전에도 있었다. 워낭소리, 워낭소리는 동물과의 커뮤니케이션이 주제였지만, 실로 영화는 그를 내세웠지만, 겉으로는 양방의 좋은 커뮤니케이션 같아 보여 많은 사람들의 눈을 적셨지만, 실체는 비극에 가까웠다.
한겨레 칼럼니스트 김규항의 말을 빌리자면 이렇다. "도무지 대화도 소통도 모르는 남자와 혼인하여, 그의 아이들을 낳아 키우고 먹이고 논으로 밭으로 소처럼 노동하며 인생을 다 보내야했던 여성의 한 맺힌 푸념은, 그리 보조적이고 경박하게만 배치되어도 되는 건지. 자신과 소의 늙고 병든 몸을, 꿈쩍도 못하는 순간까지 부리고 또 부리는 사람에게서, 노동의 신성함과 우정을 느낀다는 사람들의 잔혹한 노동관과 우정이 끔찍하다."
워낭소리의 커뮤니케이션은 일방적인 뺨치기였다. 마치 강자의 입장에서 내가 좋으니까 너도 좋지라고 말하는 느낌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워낭소리를 보다가 중간에 꺼버렸다. 하이디의 위대한 교감에서는 자식을 잃은 사연으로 더 이상 달리지 못하는 말을 노동시키지 않는다. 주인은 말이 그 새끼를 잃어 하루 동안 그 새끼를 핥아가며 깨우려 했던 순간에 함께 있어주지 못한 사연을 알고는 미안해하며 그녀를 오래 쉬게 해줄 것을 약속한다. 죽는 날까지 소 등 뒤에 타서 가자라고 외치던 남자와는 다른 모습이다.
하이디의 위대한 교감은 좀 더 동물과의 대등한, 발전된 커뮤니케이션을 다룬다. 자신의 입장에서 동물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억지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화면 속 마치 그 장면처럼 동물의 눈을 들여다보고는, 그 사연을 읽고 아픔을 어루만진다. 소통의 문을 닫고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던 동물들이 얼굴을 사람에게로 돌리고, 더 이상 짖지 않고, 주인에게 기대 몸을 비비는 장면은 감동적이다. 그리고 각 동물이 겪은 상처들은 인간들이 자신들만 겪는 고통인 양 생각하는 것들을 그 작은 동물들도 아프게 느끼고 있다는 걸 여실하게 보여준다.
동물과의 교감을 다룬 좋은 다큐멘터리는 워낭소리가 아니라 ‘하이디의 위대한 교감’이 되어야 하는 게 보다 마땅할 것이다. 실로 이 다큐를 보고 나서 더 채식에 가깝게 먹어야겠다고 결심까지 하게 했으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