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란 무엇인가? 아와 비아와의 투쟁의 기록이다. 아는 나를 말하고 비아는 나 아닌 다른 사람을 말한다. 역사는 곧 나와 다른사람의 투쟁의 기록인 것이다.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나라를 일제에 빼앗겼던 암울했던 시절, 어떤 기대도 희망도 가질수 없었던 그때, 역사만이 희망임을 이야기했다. 그는 왜 역사 속에서 희망을 찾으려고 했던 것일까?
그가 우리에게 친숙하게 다가오는 일화가 있다. 보통 세수를 하면 허리와 고개를 숙이는게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단재는 달랐다. 그는 세수를 할때면 허리와 고개를 숙이지 않고 꼿꼿이 서서 했다고 한다. 옷 합벌을 다 적셔가면서도 오히려 "옷 한벌 버리는게 뭐 그리 대수인가?"라고 얘기했던 단재. 그것은 일제의 침략자들과 친일파 매국노들 앞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어느 방향으로도 고개를 숙이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단재는 평생을 이런 마음으로 살았다.
나라를 잃은 어두운 시대에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고자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단재. 그는 독립이란 절대절명의 과제 앞에서 역사학을 선택하였다.
그는 신문 논설에서 단군조선이 건국될 때부터 우리민족의 주 활동무대를 만주 땅이라 했다. 만주가 우리 땅이라 하는 주장은 고구려와 부여족을 우리 민족으로 보는 데서 출발한다.
이만열 교수 "우리 민족 역사의 체계상으로 볼때 상고사로 올라가서 단군조선으로부터 그 다음에 부여, 고구려, 발해를 중시하는 이런 역사 체계상으로 볼때 만주가 나올수 있다. 왜냐하면 단군조선과 고구려 발해의 중심지역이 바로 만주이기 때문이다."
단재는 당시까지만 해도 한반도에 국한되어 있던 우리 역사의 무대를 만주까지 넓혀놓았던 것이다.
1914년 단재는 만주의 집안시에 1년간 머물렀다. 집안은 1300여년전만 해도 고구려의 주요 활동무대였다. 그때 그는 이곳에 흩어져 있던 고구려의 유적지들을 접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 훈적비(勳積碑)에서 고구려 전성기의 웅장했던 힘을 느끼기도 한다. 단재는 고대사를 실증적인 방법으로 고증해 정리한다. 그가 선택한 방법은 직접 발로 뛰어다니는 것이다. 그 결과 우리 고대사의 많은 부분이 왜곡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김부식 등 중세사학자들이 우리 역사의 무대를 압록강 이남으로 축소시키고 일본식민통치자들은 그것을 중국과 일본의 지배에서 비롯되었다고 왜곡을 하자 만주가 큰 무대로 떠오른 것이다.
대륙을 호령하던 고구려는 668년에 당과 신라의 연합공격으로 멸망하고 만다.고구려 멸망 후 만주가 우리민족의 역사에서 사라졌다는 것이 일반적인 통설이었다. 그러나 단재는 이 주장에 정면으로 반박한다. 고구려의 후예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하여 우리 민족은 약 300여년간 만주를 지배하게 된 것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단재는 중국에 가서 고적답사와 선진문헌독파를 이룬 지식인으로 국내에서 우리나라 책만 가지고 연구한 역사학자들과는 우선 독서량 자체가 다르고 그가 해석하는 범위도 비유가사학, 유학사학을 아울렀다고 하니 해석 또한 널리 열린 해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 누구보다 우리 민족의 역사를 정확히 알고 있었던 단재. 그는 만주에서 우리 민족의 웅장했던 역사를 찾아냈고 독립운동을 하는 애국자들에게도 우리의 옛 땅에서 나라를 되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당시의 만주는 항일독립운동의 근거지였다.)
역사 속에서 희망을 찾으려는 단재의 노력은 그의 저서 조선상고사를 통해 결실을 맺는다.
우리 민족의 역사는 한반도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 문화도 매우 찬란했다.
중국의 지배를 받는 못난 민족이라는 오명을 씻어낸 단재의 노력. 잃었던 나라를 되찾기 위해 찾아간 만주 땅. 그곳에서 역사 뒤편에 가려져 있던 강대한 우리의 역사를 확인했던 것이다. 단재의 이런 역사연구는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항일투사들에게 큰 자긍심을 심어주게 했다.
황성신문의 주필로 언론인 생활을 시작한 단재는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으로 황성신문이 폐간되자 대한매일신보로 이적한다. 그는 우리나라의 위대한 영웅으로 고구려의 을지문덕, 고려의 최영, 조선왕조의 충무공 이순신 3대 영웅전을 발표한다. 단재는 자신의 권리를 보호하고 찾아야 할 때 오직 칼과 피로써만 가능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일제의 침략을 물리치고 국권을 되찾으려면 일제늬 군사력에 대항하는 실력이 있어야 하고 무장투쟁으로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것이 단재의 생각이었다.
단재가 역사를 주목한 이유는 바로 일제에 의해 우리의 역사가 왜곡되고 있다는 데서 출발한다. 그리고 우리 역사 속의 영웅들에게서 희망을 보았다. 강한 나라 힘있는 민족만이 살아남을수 있다는 진리. 그러기 위해서는 힘을 길러야 하고 곧 무력으로만 이길수 있다고 보았다. 이것은 그가 역사를 철저히 공부했기 때문에 우리의 역사적 사건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결론이었다.
단재는 우리 역사의 제1대 사건으로 묘청의 난을 지목한다. 12세기 금나라가 세력이 강대해져서 고려에 군신관계를 요구하자 이때 묘청이 등장하여 수도를 개경에서 서경으로 옮기고 금나라를 정벌하여 칭제건원을 하자고 주장한다. 통치자를 황제로 호칭하고 연호를 정하자는 것은 중국과 대등한 관계를 의미한다. 즉 독립성을 상징한다. 이에 김부식 등 문벌귀족이 서경 천도를 반대하였다. 금나라와 전쟁을 벌이는 것은 현실적이지 못하다고 주장한다. 이에 고려 제17대 국왕 인종은 문벌귀족의 주장에 따르게 된다. 그러자 묘청은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금과의 전쟁보다는 화친을 주장했던 김부식은 묘청의 난을 중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인다.
이로써 김부식에 의해 묘청의 난은 진압된다. 당재는 묘청을 자주적인 정치인, 김부식을 사대주의자이며 중국의존적인 정치인으로 각각 평가한다. 묘청이 자주적인 힘을 길러서 궁극적으로 만주 회복의 꿈을 가지고 있었는데 김부식이 군사를 이끌고 묘청을 쳐서 패배시킨 것, 그리고 삼국사기로 우리의 역사무대를 압록강 이남으로 만족하도록 정신교육을 시킨 것. 이것이 결국 우리 민족을 힘이 없는 작은 나라로 만든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단재는 또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의 내용을 비판한다. 우리의 역사를 우리의 관점에서 해석하거나 판단하지 않고 중국의 시각에서 유교적인 관점에서 우리 역사를 해석했다는 것이다.
사대주의를 비판하고 북벌과 개혁을 내세웠던 묘청. 따라서 묘청의 난이 역사의 흐름을 바꿀수 있는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그가 독립운동을 할 때의 일화가 있다. 단재는 생계를 위해 중국 신문에 논설을 연재한 적이 있었다. 단재의 논설이 실리면서 신문의 발행부수도 점점 늘어났다. 하루는 신문사에서 단재가 쓴 논설 가운데 조사에 불과한 의(義)자를 마음대로 고치는 일이 있었다. 단재는 이에 분노하여 논설을 중단한다. 독자들이 줄어들고 신문사 사장이 매일같이 찾아와 사과하려 했지만 단재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당장 생계가 끊길 지경에 이르렀어도 단재는 그보다 한국인을 무시하는 중국인들의 태도가 참을수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생계를 위해서 글을 쓴 자신을 질책한다. 단재가 민족적 자존심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알수있는 단적인 사건이었다.
단재는 독립을 갈구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조선혁명선언을 발표한다. 조선혁명선언은 다음과 같은 글로 시작된다.
'강도와 같은 일본의 猿놈들이 우리 국호를 없이하여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의 생존적 필요조건을 모두 박탈하였다.'
당시 수많은 젊은이들의 피를 뜨겁게 했던 조선혁명선언. 그 선언문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까.
김영범 교수 "조선혁명선언의 요지는 일본의 식민통치로 인해 모든 생존조건이 압박받고 있기에 조선 민족을 주체로 한 혁명이 필요하다는 주장이었다. 단재는 그 혁명의 진로와 구체적인 내용을 다섯가지로 간추려 제시한다."
첫째, 다른 민족의 지배에서 벗어나 조선 고유의 것을 찾는다.
둘째, 특권계급을 없애고 인간 본연의 자유로운 모습을 찾는다.
셋째, 경제약탈제도를 없애고 다같이 잘사는 제도를 만든다.
넷째, 사회적 불평등을 없애고 다같이 잘사는 사회를 만든다.
다섯째, 문화적 차원에서도 모두가 공유할수 있는 사회를 만든다.
조선혁명선언은 혁명을 하기위해 제거할 대상까지 밝히고 있는데, 그 대상은 조선총독부의 고관들과 친일파 매국노, 일본군 수뇌와 반민족적 토호 등이었고 이런 자들은 모두 죽여없애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럼 어떻게 싸워야 할 것인가? 일본의 식민지 지배 아래서 독립을 위한 유일한 방법은 모든 사람들이 폭력으로 맞서 싸우는 길밖에는 없다고 생각했다.
1920년 북경은 당시 외교활동에 치중하던 임시정부와 독립의 방법을 달리하던 항일세력의 활동무대였다. 단재는 이곳에서 의열단장 김원봉과 가까워진다. 두 사람은 무력투쟁 노선을 같이했던 동지로써 뜻을 같이하고 있었다. 의열단은 암살과 폭력, 파괴를 독립운동의 한 방편으로 삼았덤 비밀 항일 결사단체였다.
조선혁명선언은 이러한 의열단의 의식을 한껏 교양시켰고 김상옥의 종로경찰서 폭탄투척의거와 김지섭의 동경2중교 폭탄투척의거 등 의열단의 활동을 활성화시키는 데에 기여한다.
단재는 이 선언문을 이렇게 끝맺고 있다.
'민족은 우리 혁명의 근본체이다. 강도 일본의 침략을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하지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수탈하지 못하게 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 것이다.'
단재가 지향했던 무종부주의운동은 나라를 빼앗긴 국민 모두 힘을 모아 일제에 대항하자는 것이다.
단재는 1928년 천진항으로 가서 무정부주의자들의 집회에 참석, 무정부주의 동방연맹을 결성한다.
'짐승같은 자본주의 강도 제국들이 식민지 국민들의 온갖 물건들을 다 빼앗아서 그들은 배가 터지려 한다. 그런고로 식민지 국민들은 무력으로 싸워서 자신들의 권리를 되찾아야 한다.'
단재는 독립운동 자금을 벌기 위해 고베를 거쳐 대만으로 향한다. 그러나 대만에서 기다리고 있던 일본 경찰관들에게 체포되고 만다. 중국 대련으로 이송되어 여순감옥에 갇힌 단재는 유가증권 위조와 치안유지법 위반 등의 죄목으로 10년형을 선고받는다.
결국 옥중에서 병을 얻은 단재는 1936년 2월 18일 뇌일혈로 사망하게 된다.
완전 절대 독립이란 희망을 바라보았던 단재는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56세로 눈을 감았다. 단재 신채호에게 역사는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한 유일한 희망이었고 우리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고대사 연구를 통해 좌절에 빠져있는 일반 민중에게 민족적 자긍심을 심어주고 그것이 바탕이 되어서 독립이 가능하리란 희망에서였다. 역사만이 희망이다라는 명제를 가슴에 안고 실천적인 독립운동을 했던 단재 신채호.그는 갔지만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들 가슴속에 깊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