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스위스, 독일 / 다큐멘터리 / 168분 / 감독: 필립 그로닝
(★★★★★)
2006년 제22회 선댄스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 월드다큐멘터리
2006년 제19회 유럽영화상 유럽영화아카데미 다큐멘터리상
의학도였던 '필립 그로닝'이 영화로 돌아선 건 1980년대 초반이었다. 의학과 심리학을 전공하고서도 도저히 풀 수 없는 문제에 직면해서일까, 영화를 배운 그는 침묵을 다룬 구름 같은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가 자신의 의도에 딱 어울린다고 판단한 곳은 ‘그랑드 샤르트뢰즈 수도원’이었다. 1688년, 로마 가톨릭 소속 카르투지오 수도회가 알프스의 1,300미터 고지에 세운 수도원은 그로닝의 영화엔 적격인지 모르겠으나, 안타깝게도 설립 이래 몇 세기 동안 외부인의 접근을 제한해왔던 수도원이 그의 요청을 쉽게 허락할 리 만무했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1999년, 그로닝은 수도원으로부터 기적 같은 연락을 받는다. ‘아직 그 프로젝트를 염두에 두고 있느냐’는 수도원의 물음으로 영화는 드디어 발을 내딛는다.
먼저 수도원은 여러 까다로운 조건들을 제시했다. ‘인공조명을 사용할 수 없고, 자연의 소리 외에 음악과 인공적인 사운드를 추가할 수 없고, 수도원의 삶에 대해 해설과 논평을 금해야 하고, 다른 스태프 없이 혼자 촬영을 진행할 것’ 등의 조건에 맞춰, 그로닝은 직접 수도원에서 수사들과 생활하고 노동하며 2년에 걸친 촬영에 돌입했다(물론 2년 내내 촬영만 한 건 아니었고, 실제 촬영기간은 6개월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2005년에 영화가 완성돼 세상에 선보이기까지 다시 몇 년이 흘렀다. 20년의 기다림이 녹아있는 <위대한 침묵>의 간략한 연대기는 이러하다.
성경의 한 구절에서 제목을 따온 <위대한 침묵>은 분명 종교적 색채가 짙은 작품이다. 가톨릭 신자라면 말씀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자들을 보고, 스크린 상에서 성경의 말씀을 듣고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정신이 정화되는 시간을 보낼 것이다. 그러나 가톨릭 신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지레 발길을 돌릴 필요는 없다. <위대한 침묵>은 종교를 강요하는 유의 영화가 아니며,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구도의 길을 걷는 자들을 보편적인 시선으로 대한다면 <위대한 침묵>과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을 연결해 읽을 수 있을 것이고, 수사들이 밤새 기도할 때에는 <노스탤지아>의 촛불 염원 장면을 떠올릴 법하다. 아니, 그런 게 아니어도 좋다. <위대한 침묵>은 혼탁한 마음을 맑게 씻어내 주는 치료제로 활용해도 되는 작품이다.
또 하나, 잘못 알려진 것처럼 <위대한 침묵>은 상영 내내 침묵으로 일관하진 않는다. 어떤 소리도 없는 가운데 스크린만 뚫어져라 봐야한다면 세 시간에 가까운 상영시간을 버티기란 괴로운 일일 테지만, <위대한 침묵>은 ‘침묵에 관한 영화’이지, 결코 ‘침묵의 영화’가 아니다. 어떤 기자는 옆 사람의 침 삼키는 소리가 신경 쓰일 거라고 써놨던데, 그는 리뷰용 DVD로 영화를 보았음이 분명하다. 다시 말하거니와, 극장에서 <위대한 침묵>을 보면서 침묵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수사는 자연 속에 사는 사람이지, 고요한 동굴 안에서 도를 닦는 자가 아니다. 실제로 나는 이보다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영화를 보지 못했다. 영원의 시간과 이미지를 통과하는 데 160여분은 오히려 짧게 느껴졌다. 완전히 홀리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경험이었다.
프랑스의 영화감독 '로베르 브레송'은 ‘(영화에) 음악은 전혀 필요 없기까지 하다. 소음들이 음악이 되어야 한다.’고 쓴 바 있다. <위대한 침묵>은 브레송의 말을 그대로 실천한 듯 보이는 작품이다. 침묵은 언어, 기호, 잡생각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며, 침묵을 맹세한 자들은 자연의 소리 한가운데로 침잠한다. 들리나 듣지 못했던 소리를 듣는 것. 그것은 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과 같으며, 자연의 소리는 ‘영원한 존재’의 현현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영화는 고요에 빠지는 대신, 자연과 그 속에서 호흡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온갖 소리에 귀를 연다.
그것에 더해, 수사들이 일상생활에서 내는 소리들을 구태여 제거하거나 줄이지도 않았다. 장작을 패거나 수레를 끌 때 나오는 커다란 소리, 복도를 쿵쾅거리며 걷는 소리, (침묵서원을 발한 수사를 제외한) 수사들의 대화, 책장을 넘기는 소리, 가위질 소리, 산에서 눈썰매를 타며 내는 환호소리 등이 그대로 담겨 있다. <위대한 침묵>을 보는 건 그야말로 소리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시간이다. 눈과 비가 오가며 계절이 변화하는 소리, 수도사들이 작업하며 내는 소리, 물체의 작은 움직임이 빚은 소리는 불멸의 존재에게 다가가려는 열망과 하나가 되어 관객을 숭고한 상태로 이끈다. 그 곳에 기도의 염원, 불꽃의 따스함, 눈(雪)의 가벼움, 구름의 침묵이 나란히 자리한다.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는 자는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자막이 영화 내내 자주 나온다. 그 말씀이 은유하는 종교적 의미와 별개로, 수도원의 생활은 청빈 자체다. 자족하는 공동체의 미덕을 따라 수도사들은 각자 맡은 노동을 기꺼이 행하는데, 최소한의 조건으로 유지되는 삶의 검소함은 ‘버림과 노동의 가치’를 깨닫도록 만든다. 눈이 멀거나 병석에 있는 수사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노동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마친다. 나이 든 수사들이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도랑작업을 하거나 고양이 밥을 주거나 씨앗을 뿌리거나 옷을 만드는 장면 하나하나가 지혜이고, 자연에서 주어진 것과 기도를 위한 것 외엔 아무 것도 자리를 차지한 게 없는 공간 전체가 교훈이다. 지금 수도원의 풍경과 소리는 몇 백 년 전의 그것과 다름없으며, 그것은 또한 앞으로 길고 긴 시간이 흘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영원’이란 말은 그런 때 쓰는 거다.
그러한 삶을 영위하면서 구도의 길을 멈추지 않는 수도사들을 때때로 정면으로 바라보는 <위대한 침묵>은 아름다운 얼굴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그들은 모두 ‘맑은’ 눈을 가진 자들이다. 그들의 꼭 다문 입에서 어떤 말씀을 들을지는 관객 각자의 몫이다. 그들 중 눈이 먼 노수사는 잊지 못할 인물이다. 길게 자란 눈썹만으로도 나이를 쉬 짐작할 수 있는 사람인데, 그의 피부는 소년처럼 부드럽고 그의 표정은 아기처럼 천진난만하다. 믿고 따르는 것에 평생을 헌신한 자의 얼굴은 그토록 경이로운 것이어서, 매일 거울을 보지만 아름다운 얼굴을 지니지 못한 우리에게 작은 미소만으로도 깊은 울림을 안겨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