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1학년 때니.. 벌써 7년전 일이 되었네요 ;
저는 당시 방송반이라 아침.점심.방과 후를 대충 방송반에서 보내는 일이 많았습니다. 사실 할 일은 별로 없었지요. 사소한 일로 무서운(당시엔 무서웠답니다) 선배들한테 혼나는 것만 빼면, 아침에야 교내 방송 있는 날이나 테이프 넣고 점심엔 음악 방송만 하면 되니까요. 그러나 스튜디오의 조용하고 아늑하고 외부와 차단된 공간(!)을 저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ㅋㅋ 아침 일찍 오면 저 밖에 없으니 스튜디오에 매일 처박혀서 아침먹기, 아침잠 더자기, 학교 숙제, 심지어 모의고사 시험지도 거기서 맞춰볼 정도였으니...
그러던 어느 날이었지요
아침 일찍 학교에 도착해서 방송반 스튜디오에 처박혀서 못 다 잔 아침잠을 마저 자고 있을 때(학교가 좀 멀고 교통량이 많아서 늦게 일어나면 불안하니까요ㅎ) 그놈이 왔습니다. 대장에서 물기 적당히 빼낸 그놈이, 빨리 가서 아침똥으로 자길 해방시켜 달라면서 항문에 노크했어요.
그래서 갔습니다. 화장실. 사람이 잘 안 와서 방해받을 염려가 없는 고요한 1층 화장실로.(가깝기도 했고, 1층엔 교실이 없어서 일찍 오면 다니는 사람들이 없었음)
앉아서 그놈을 빼내고 있는데 번쩍 생각이 들었지요. 원체 집 밖에서는 일을 잘 보지 않다보니 학교 화장실엔 휴지가 비치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까먹은 겁니다. 여러분은 어떠실 지 모르겠지만 저는 곱게 자라서 그런건지, 허리가 길어서 그런지, 종아리랑 허벅지 길이가 비슷해서 그런지 좌변기에선 오래 버티지 못하는 신체 구조를 타고났습니다. 그렇게 앉아서 버티는 것만으로도 힘들 정도였으니까요.
나중에 확인해보니 5분 정도 밖에 흐르지 않았지만, 안에선 별 생각을 다 했습니다. 이걸 어쩌나, 일단 물을 내리고 깨끗한(...) 흐르는 물로 뒷처리를 하고 나갈까? 아니면 그냥 쪽팔림을 무릎쓰고 친구한테 전화해서 휴지 좀... 가져다 달라고 할까? 양말로 닦을까? 팬티로 닦고 오늘 하루 노팬티로 지낼까 라는 생각까지.. 들 무렵.
밖에서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그 사람은 문을 박차고 들어와 2사로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당시 저는 3사로 였음) 그러나 기세가 좋았던 그는 기세와는 다르게 직장 속 그놈이 문만 두드리고 있는 듯, 한참을 고생하는 듯 했지요. 힘 주는 소리는 계속되나 한놈두시기석삼너시기 찔끔찔끔 떨어지는 소리에 제가 답답할 정도였으니까요
저는 이 분께 정중히 부탁드렸습니다. '혹시 휴지가 남으시면 좀' 혹시나 아는 사람일까 두려워 목소리도 바꾼 채로 말씀드렸더니, 이분은 자기가 오래걸릴 거라며 자신이 가져온 여행용 휴지 전부를 제게 건네주었습니다.
여러분은 그 기분을 모르실겁니다. 아는 분들은 아시지요. 이 상황이라면 하늘에서 썩은 동앗줄이 내려오건, 굵은 동앗줄이 내려오건 일단 잡고 보는 상황이지요. 저는 내심 심봤다를 외치며 그놈이 나온 흔적을 지워냈고 마음 편히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방송반에 와보니 그 휴지 아직도 제 손에 있네요?;;; 닦은 휴지로 생각하는 분은 안 계실 거라고 믿습니다. 그래요. 그분께 받은 휴지를 아무생각없이 뒷처리하고 들고 나온 것이지요.
지금 생각하면 고민할 필요도 없는 일이지만 그땐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다시 가서 이 휴지를 돌려줄 것인가, 아니면 비상용으로 내가 그냥 쓸 것인가. 어차피 목소리도 다르게 냈지 않은가 라는 생각을 하면서 고민하고 있을 때, 악마가 속삭였습니다. 어차피 지금 가면 욕은 욕대로 처먹고 휴지는 휴지대로 잃을 거라고.
그래서 안 갔지요.
그때 방송방 문을 힘차게 열어젖히신 당시 고3 선배의 분노의 함성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아 XX 너 올 때 화장실에서 나온 XX 못봤냐? XX X나 XXX가'
네. 2사로의 그사람은 그분이었습니다. 당시 하늘같던 고3 선배님. 왜 목소리로 알아차리지 못했을까요. 저는 속으로 'X됐다'를 외치며 방송반 기기에 올려두었던 휴지에 선배의 눈길이 미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랬습니다.
그러나...
'한 두어 사람 지나갔는데 화장실에서 나왔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라고 대답했지만, 범인을 잡을 수 없음에 화가 난 듯한 선배는 사소한 것이라도 꼬투리를 잡아 저에게 기분을 풀려는 듯 샅샅이 주변을 훑기 시작했고, 곧 그 휴지는 그분의 눈에 띄었습니다.
인간적으로 속으로 'X됐다'만 50여번 외친 것 같습니다. 의경 생활할 때 소대장 지휘 하에 생활관 청소 중, 에어컨 뒤에서 빈 소주병 10여 병이 나왔을 때 만큼이나 긴장된 순간이었죠. 선배는 그 휴지를 집어들고 제 앞에 다가와 그 것을 들이밀며 제게 얘기합니다.
'그 XX들 중에 이거 들고 있던 XX가 누구야'
정말 다행스럽게도 선배는 저를 의심하지 않고 제가 본 사람들 중에 범인이 있다고 굳게 믿은 것 같았습니다. 그 휴지가 교문 앞에서 나눠주던 휴지인 탓도 있는 것 같았지만, 상황에 맞지 않게 그 때 든 생각은 '병신도 이런 상병신이 없구나' 라는 생각. 범인을 눈앞에 두고도 알지 못하는 선배를 두고 내색하지 않은 채 대답했습니다.
'명찰 초록색이었는데... 1학년 인 것 같습니다.'
범인 앞 그 상병신은 이른 시각 몇 명 오지 않은 때를 노려 범인을 잡아내겠다는 듯 2층 1학년 교실로 뛰어올라가더니만 후련한 얼굴로 내려와 'XXX가 끝까지 아니래' 라고 외치며 영어 듣기 평가 모의고사를 듣기 시작했습니다.
이름도 기억 안 나는 고3 선배님아. 그거 나였어... 근데 어떻게 2사로를 나올 수 있었니? 너설마...
그리고 죄없이 족쳐진 학우야. 미안해. 나도 살아야지... 아무나 족치고 올줄은 몰랐어. 미안 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