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을 잔뜩 마시고, 아주 엉뚱한 생각을 해 봤습니다.........
현명한 사람들은 복잡한 수학공식과 난해한 한자나 영어의 단어를 외우고 있는 사람들이 결코 아니다. 진정으로 현명한 사람들은, 단 한 번뿐인 자신의 인생에 주인공이 ‘나’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는 사람이다. 더욱 현명한 사람들은 그 인생에 ‘나’를 실천하고 있는 사람이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해도, 자신이 사랑해야 될 대상이 없는 것은 불행한 인생이다. 여기에서 사랑해야 될 대상이란 자신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도 포함될 수도 있지만, 반드시 사람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오늘도 나는 내가 사랑해야 될 대상을 찾기 위해 눈을 뜬다. 직장에 가서 일을 하고,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기 위해서 눈을 떴던 것은 아니다. 만약 내가 직장에서 일을 하고, 학교에서 공부하기 위해 눈을 떴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착각이었고 눈부신 속임수에 넘어갔던 것뿐이다. 내가 누구보다도 사랑했던 것은 부모님이나 연인이 아니었다. 내가 사랑했던 것은 오로지 ‘나’였다. 하지만 나는 ‘나’를 잊고 다른 사람이나 음악, 미술, 시, 소설, 조각, 여행, 낚시, 요리, 옷 등을 사랑했다.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은 존재의 의미가 없다. 하지만, 모든 것들 속에서 내가 존재하기 때문에, 비로소 나의 의미를 찾는다. 그래서 나는 부모와 형제 그리고 친구와 연인을 비롯해 음악, 미술, 시, 소설, 조각, 여행, 낚시, 요리, 옷을 찾았던 것뿐이었다. 나는 스스로 내가 이기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깨닫는다. 내가 사랑이라고 착각했던 모든 것들은 ‘나’를 위한 것이었고, 나의 사랑으로 그것들은 생명을 지니고 있었다. 나의 관심이 사라지면 그것들은 생명력을 잃었다.
반대로, 나 역시도 그것들의 무관심을 받게 되면 존재의 의미를 상실 당하기도 한다. 그래서 나의 존재를 상실 당하지 않기 위해서, 나와 세상이 타협될 수 있도록 안간힘을 썼다. 타협이 없이는 세상과 ‘나’는 함께 공존할 수 없다. 하지만 ‘나’를 상실시키는 타협이란 성립될 수 없다. 세상만 존재하고 ‘나’를 상실시키는 타협이 말이 되는가? 하지만, 어느새 우리들은 ‘나’를 상실시키고 세상과 타협해 버렸다. 생존이 없으면 실존할 수 없다는 논리를 내세워, 실존을 지워버리고 생존만 선택했다.
송충이는 솔잎만 먹는다. 그러나 인간은 생존뿐만 아니라 실존도 먹고 살아야 된다. 배고픈 돼지보다 소크라테스가 되겠다는 외침은 단순한 구호가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돼지가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이다. 돼지가 되려는 사람들과 어울려 직장에 가고, 학교에 가고, 식사를 하고, 나이트클럽에서 음악을 듣고 몸을 흔들며 춤을 추고, TV를 보고 배꼽잡고 웃으며 앤돌핀의 수치를 높이려고 애쓰고 싶지 않다. 나는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 우선 ‘나’를 만나야 된다고 생각한다.
이 세상에서 ‘나’가 없는 상황에서 아무리 많은 다른 사람들을 만난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선, 나는 ‘나’를 만나서 대화하고 싶다. 과연 내가 누구인가? 나는 어떤 존재인가? 나는 어떤 삶의 목표와 삶의 방식을 지니고 있는가? 내가 ‘나’를 만나서 묻는 질문들이다. 다른 현명한 사람들이 이미 던졌던 질문을 이제야 찾는다. 참으로, 나는 어리석고 바보같은 존재이다. 하지만, 나의 질문은 끝나지 않았다. ‘나’는 누구인가? 과연 어떠한 존재인가? 그 질문은 끝나지 않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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