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세기에 가까운 시간동안 월트 디즈니는 안데르센, 그림 형제 등으로 유명한 유럽의 고전들을 각색해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했고,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 <잠 자는 숲 속의 공주>, <인어 공주> 등의 히트작들을 남기며 전 세계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선물하는 제작사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이와 함께 실제 원작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나 줄거리들을 지나치게 미화했다는 비판 또한 적지 않게 받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논란이 많은 작품 중 하나가 바로 1951년 제작된 루이스 캐럴 원작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이다. 디즈니 특유의 사랑스럽고 부드러운 그림체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원작은, 마치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을 보는 것과 같은 초현실주의적 이미지에 인과성이나 논리성 따위는 가뿐하게 무시해버리는 그로테스크한 역설들로 뒤엉켜 있는 소설이다(캐럴의 직업이 수학자이자 논리학자였던 것을 감안하면 소설의 이러한 특징은 상당히 이채롭다).
캐럴의 원작은 리메이크하기에 충분히 매력적인 개성을 가지고 있음과 동시에, 리메이크하기에는 너무도 종잡을 수 없는 내러티브로 후대에 여러 번 리메이크 됐음에도 대중들에게 어필될 만큼의 이렇다 할 작품은 나오지 못했다.
출처: [네이트 영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이런 와중에 디즈니에서 자신들의 60년 전 애니메이션에 대한 미련을 못버렸는지 도무지 영상화해내기 어려울 것 같은 이 작품에 재도전을 했으니, 결코 쉽지 않아 보이는 이 프로젝트의 책임자로서는 팀 버튼이 낙점되었다. 사실 이 정도의 '괴작'을 필름에 담을 수 있을 정도의 '괴팍한' 감독으로서는 필자도 팀 버튼 말고는 길예르모 델 토로, 테리 길리엄 정도 밖에 떠오르지 않는데, 뒤의 두 인물이 각각 <판의 미로 -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와 <타이드랜드>로 그들만의 '앨리스'를 선보인 마당에 새로운 '앨리스'를 연출할 적임자는 역시 팀 버튼 밖에 없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이미 많은 전작들에서 환상적인 미장센을 선보인 세계 최고의 비쥬얼리스트 팀 버튼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니, 정말 기가 막힌 조합이 아닐 수 없는데, 거기다 '팀 버튼의 페르소나' 조니 뎁과 그의 연인 헬레나 본햄 카터,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이후로 상종가를 치루고 있는 앤 해서웨이까지 더해져 그야말로 전 세계의 팀 버튼 팬들로부터 '팀 버튼 최고의 마스터피스'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면서 -사실 제작사가 디즈니라는 것이, 그리고 3D 병행 개봉이라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영화는 2010년 3월 화려하게 개봉했다(어쩌면 우리는 팀 버튼이 다시 한 번 <배트맨>과 같은 성공적인 리메이크를 해낼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출처: [네이트 영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하지만 모습을 드러낸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많은 사람들을 -특히나 그냥 볼 만한 헐리웃 판타지가 아닌 '팀 버튼'의 특별한 그것을 기대했던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물론 영화를 원작과의 비교나 팀 버튼에 대한 기대와 같은 영화 외적인 요인들을 다 차치하고서 본다면, 사실 그다지 나쁘지 않다. 오히려 특별한 흠을 찾기 힘든 잘 만들어진 판타지 영화이다. 장면 장면의 도처에 널려 있는 흥미로운 장치들과 <나니아 연대기>를 연상시키는 전형적인 영웅담 구조는, 헐리웃 판타지 영화에서 기대할 수 있는 엑스터시와 스펙터클을 그럭저럭 잘 만들어내고 있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무엇이 문제인가. 결정적으로 이 영화는 앞서 차치했던 두 부분, 그러니까 루이스 캐럴의 원작과의 비교와 팀 버튼 영화라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는 게 (영화가 실패작이라면) 패인이다.
출처: [네이트 영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우선 원작을 어느정도 수준까지 차용할 것인가의 문제에 대해서는 팀 버튼 역시 고심을 많이 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유명한 고전을 리메이크하는 것은 ('익숙함'과 '진부함'의) 양날의 검과 같은데, 원작 앨리스는 그 특성상 검의 날을 어느 방향으로 쓰든 검사가 다치게 될 우려가 큰 작품이다(익숙함이든 진부함이든 앨리스 이야기 본연의 개성을 깎아먹는 건 마찬가지니까). 팀 버튼도 원작을 그대로 리메이크하기엔 부담을 느꼈는지, 몇 가지 새로운 요소를 가미했는데, 앨리스의 배경 설정과 나이, 원더랜드 모험에서의 예언적 영웅담 등이 그것이다. 팀 버튼의 앨리스는 어린 소녀가 아니라 개척가인 아버지의 이른 죽음으로 꿈을 잃은 채 억지로 결혼을 강요당하는 19살의 숙녀이며, 그녀의 원더랜드는 무한한 동심을 표현하는 상상의 장이 아니라 자신의 어릴 적 꿈을 찾게 해주는 모티브이다. 심지어 그녀는 원더랜드에서의 모험을 통해 자신의 꿈을 깨달은 후 강요된 결혼을 거부하고 유럽 열강의 일원이 되어 아시아를 진출하려는 제국주의 페미니스트의 면모까지 보여준는데, 이 부분은 굳이 이 영화가 팀 버튼의 영화임을 생각지 않더라도 그저 실소가 나올 수밖에 없다.
출처: [네이트 영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영화는 원작이 원더랜드를 통해 은연 중에 풍겨내는 아나키즘적인 뉘앙스나 인과와 논리에 어긋나는 내러티브로 인한 페이소스는 거의 배제해 버리고, 오로지 이 종잡을 수 없는 미친 클리셰들을 어떻게 제단하면 '말이 되는 이야기'가 될 수 있을까에만 골똘해 있는 듯하다. 그 결과 앨리스는 현실 세계에서 어엿한 자신의 신분와 위치를 얻어냈고 원더랜드에서는 붉은 여왕과 재버워키를 물리치고 세상을 구하는 영웅이 될 수 있었다(이는 <나니아 연대기>와 거의 같은 구조의 전형적인 헐리웃의 판타지 히어로이다). 하지만 그래서?
출처: [네이트 영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인과를 가장 중요시하는 수학이나 논리학을 전공한 작가를 생각한다면 매우 아이러니컬하지만) 앨리스 이야기의 가장 큰 매력은 한 마디로 '말이 안된다'라는 것이다. 누구나, 팀 버튼이 프로덕션 디자이너로서 뛰어난 역량을 가지고 있고 <가위손>, <찰리와 초콜릿 공장>, <빅 피쉬> 등의 전작들에게서 보여진 그 특유의 환상적인 이미지들 때문에 앨리스 이야기와 매우 잘 어울릴 것이라 생각했지만 사실 기본적으로 팀 버튼은 내러티브를 소홀히 하는 감독이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그는 '환상동화 작가'이지 '몽상가'가 아니란 말이다(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오히려 앨리스 이야기와 잘 어울릴 법한 감독으로 한국의 이명세가 떠오르기도 한다).
출처: [네이트 영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조니 뎁이 연기한 모자 장수는 배우가 지니고 있는 특출난 개성의 아우라를 품기엔 오히려 실망스러울 정도로 턱없이 정상적(?)이었고, 원더랜드 속 인물들의 19세기 유럽식 말장난들과 원작에서 발췌한 독특한 어휘들은 비영어권 국가에서의 번역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며 '즐마운(아마도 즐거운+고마운)'이니 '날뜩한(아마도 날카로운+섬뜩한)'이니 하는 황망한 결과를 낳아버렸다(필자의 형은 처음 보고 오타였나 싶었단다). 그래도 의외의 성과라면, 붉은 여왕(헬레나 본햄 카터 분)의 동생에 대한 히스테릭한 컴플렉스가 제법 그럴싸한 메타포를 남겼고, 적은 분량에도 오히려 영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하얀 여왕(앤 해서웨이 분)의 능청스러운 캐릭터 정도랄까.
출처: [네이트 영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또한 <아바타> 이후로 전세계 영화계의 한 대세가 되어버린 3D 병행 상영은, 본 사람들은 느꼈겠지만 '안하니만 못한' 수준이므로 팀 버튼의 수려한 디테일과 색채감을 제대로 느끼려면 2D로 보는 것이 나을 듯하다. 더군다나 이 영화는 촬영 때부터 2D 카메라와 3D 카메라를 병행하여 찍은 <아바타>와는 달리 2D 카메라로 다 촬영한 후 별도의 3D 변환 작업을 거쳐 3D 버전을 만들었기 때문에 3D 효과의 수준은 더욱 미비하다. 팀 버튼은 "3D로 찍는 것이 시간적, 경제적으로 지나치게 많은 낭비인데 반해 2D를 3D로 변환한 것에 비해 크게 다를 게 없다"는 이유였다지만, 필자가 보기엔 그저 기술과 역량, 자본의 부족에 따른 자기합리화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제임스 캐머런이 <아바타>를 완벽한 3D로 구현하기 위해 엄청난 시간과 자본과 노력을 투자했으며, 그로 인해 헐리웃에서조차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기술을 자체 개발해내게 되었음은 이미 유명하다.
출처: [네이트 영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물론 팀 버튼에게도 변명의 여지는 충분하다. 2억 달러에 달하는 엄청난 제작비를 디즈니로부터 공수받은 이상 그들의 '영화적 정의'에 어긋나는 자신만의 전위적인 영화를 만들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그렇다고 <에드 우드>나 <가위손>, <스위니 토드 - 어느 잔혹한 이발사 이야기>처럼 만들기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너무 '비싼' 영화이기도 하다. 어찌 됐든 이 작품도 팀 버튼이기에 이 정도의 퀄리티와 이 정도의 논란, 그리고 이 정도의 티켓 파워(3월 21일 현재 전세계 5억 6500만 달러)를 보여줄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누구도 이견을 달기 힘들 것이다.
출처: [네이트 영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팀 버튼은 이 '거대하고 유려한 실패작(?)'의 다음 영화로 <프랑켄위니>를 준비하고 있다. 데뷔작 <빈센트>(1982) 이후 두 번째로 연출한 동명의 단편영화 <프랑켄위니>(1984)를 장편영화화해서 선보인다는 것인데, 그가 자신의 작품을 처음으로 리메이크하고자 하는 것에서만 봐도 알 수 있듯 차기작은 아마 팀 버튼이 작정하고 만드는 전형적인 팀 버튼 스타일의 영화가 될 공산이 크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 이후로 잠시 주춤했던 그의 흥행력을 이번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통해 시원하게 해갈한 이 시점에서 그가 '자신의 세계'로 다시 눈을 돌리는 건 오히려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출처: [네이트 영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어찌 됐든 팀 버튼은 팀 버튼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관객들에게 그만의 스타일을 제시해왔던 그이기에, 이번 영화가 비록 혹자들에게는 성에 안차는 영화일지언정 소위 말하는 '비호감' 영화는 아닐 것이라는 것(이것이 얄미운 디즈니를 끝내는 미워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항상 그래왔듯 팀 버튼의 다음 영화는 또 다시 새로운 기대를 만들어 준다는 것, 그 정도까지만 해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 할 수 있겠다.
출처: [네이트 영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