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멕시코 월드컵 때였다.
덴마크와 스페인전...덴마크는 당시 덴마크 역사상 최고의 슈퍼스타였던 올센이 공격라인을 주도 했었다. 뿐이랴 덴마크는 이전 경기에서 엘카에르가 해트트릭을 기록하는 등 분위기가 최고조였던 다크호스였는데...
스페인과 덴마크전에서 스페인은 완벽한 케이오승을 거두었다. 어찌 잊겠는가? 레알 마드리드 출신의 "에밀리아노 부트라게뇨"가 가진 그 "타겟맨의 본능"을...양팔을 좍 벌려 비행기 날개짓을 하며 골뒤풀이를 펼치던 부트라게뇨의 화려한 골폭풍...덴마크는 이런 표현은 좀 그렇지만 "실신 후 강간"당한다는 표현이 딱 맞았다. 5-1의 대승...부트라게뇨는 이 경기에서 4번의 골폭죽을 터뜨렸다.
나는 아직까지 스페인 역대 최고의 타겟맨이라고 하면 자연스럽게 부트라게뇨를 떠올린다.
스페인의 경기를 분석하면 재밌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와 맞붙어도, 그리고 경기에 지는 것 이기는 것 상관없이 항상 볼점유율에서 만큼은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주도율의 축구를 하는 팀...썰어먹기 축구...중원을 꼭 거치는 포지션 플레이...이런 점들을 모두 통합한 개념으로 스페인의 축구는 "패싱게임"이라는 말로 집약된다.
흔히 스페인이 가진 축구의 약점은 패싱게임만을 고수하는 일관성이 가지는 한계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하지만 나는 예전 제라드 스토리에서 이것과 반대되는 나의 의견을 피력한 바 있다. 축구는 일관적인 패싱게임을 하는 팀도 월드컵에서 우승할 수 있고 세밀한 테크닉 축구를 하는 팀도 월드컵에서 우승할 수 있고 다이나믹한 역동성과 피지컬을 주무기로 삼는 팀도 우승할 수 있다고...그것이 축구의 매력이며 그것이 축구가 이렇게나 보편화된 스포츠일 수 있는 이유라고...
유로 2008의 스페인 우승은 그래서 값지다.
사람들은 유로 2008에서 스페인이 우승을 하면 MVP로 누가 선정될 것인지 궁금해했다. 대개의 하마평들은 골키퍼 카시야스나 최다 득점자 비야를 이야기했고 인터넷 게시판에서도 이들과 더불어 실바에 대해 이야기를 했는데 정작 "사비"를 추천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그러나 나는 스페인의 경기를 보면서 사비야말로 이 상을 받을 가장 적격자라는 생각을 늘 해 왔었다. "숙고"된 눈으로 유로 2008을 보면 MVP를 수상하는 데에 사비 이외 다른 뽑을 선수가 없다는 것을 알 것이다.
스페인의 최전방 원톱 요원을 보면 정말로 부럽다. 비야와 토레스와 구이사...다른 팀에 가면 무조건 포스트 초이스 원톱일 수 밖에 없는 그들이 한 팀으로 엮여 있다. 프리미어 리그를 자주 본 사람은 토레스의 득점본능이 얼마나 파괴적인지를 보아왔을 것이다. 그리고 이번 시즌 라리가 득점왕 구이사의 경우는 어떤가? 이들이 벤치를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그 황당한 일이 스페인 국대에서는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이 말도 안 되는 황당함은 "라울 곤잘레스"라는 거인을 엔트리에서부터 제외시키는 일어나기 힘든 일조차 가능하게 했다.
이니에스타와 파브레가스 둘 중 하나의 선택이라면 나는 파브레가스를 선택할 거란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아스날의 파브레가스가 보유한 창의력은 이 땅에서 축구를 보는 사람치고 인정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스페인 국대 스쿼드의 짱짱함이란 바로 이 점이다. 우리에게 낯익은 파브레가스나 토레스가 선발보다는 조커로 나온 경기가 더 많았다는 것...도저히 서브일 것 같은 느낌조차 가질 수 없는 이들을 서브로 만들어 버리는 이 무서운 멤버들의 화려함...
이 멤버들 속에서 사비는 "소금"으로 존재한다.
사비 에르난데스는 결코 화려한 스타일의 축구를 하는 건 아니다. 그는 실바나 이니에스타처럼 현란한 몸놀림 흔들기로 상대 적진을 교란하는 식의 중원 플레이를 하는 선수는 아니다. 보는 이에게 있어서 패스의 "창조력이라는 측면만을 따졌을 때 파브레가스보다 창조적인 패스를 할 수 있는 선수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패스의 창의성을 놓고 보았을 때 나는 사비의 창의성은 파브레가스에 못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파브레가스나 또는 이탈리아의 피를로를 "패싱귀재"로 인정하는 사람들은 정작 사비에 대해서라면 무덤덤하다. 그 이유는?
그 이유는 사비 자신에게 있다. 사비는 평상시 패스의 정확성이 무척 높은 선수이다. 그리고 자신이 패스를 하는 횟수가 상당히 많다. 그러니까 원래 패스의 평균 점수가 90점인 선수이고 90점 패스를 한 경기에서 많은 횟수로 실행하는 선수는 그 90점 플레이를 자꾸 사람들이 경험하다 보면 이 90점 플레이가 마치 평범한 플레이처럼 보이게 된다. 그러다 100점짜리 킬패스를 한 번 했다고 하면 그건 "놀랍고 경이적인 패스"가 되는 것이 아니라 평소보다 약간만 더 "업그레이된 패스"으로 사람들을 시각적으로 착각을 시킨다.
평상시 80점 짜리 패스를 적은 횟수로 시행하는 선수가 갑자기 만점짜리 킬패스를 하면 우리는 사비가 주는 것과는 다른 느낌의 "경이적인 패스"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인상의 선명도"에서 사비는 그 선수에게 뒤떨어져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인상의 선명도"라는 건 그저 "느낌"일 뿐이다. 다른 이들의 만점패스나 사비의 만점패스는 그 효과와 날카로움에서는 실전적으로 "동등"하다. 요는 "느낌"이 아니라 "실전"이라는 게 중요하다.
물론 평상시 60점 이하의 패스를 하다가 갑자기 만점짜리 패스를 하는 선수를 보면 시각적으로야 무척 유쾌하지만 대개 이럴 때 우리들이 쓰는 재미있는 표현이 있다. "소 발에 쥐잡았다."
그렇다고 파브레가스나 피를로가 80점짜리 패스를 평상시에 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저 비유적인 표현이니 부디 이런 사소한 메타포 하나로 쓸데없는 오해를 안했으면 한다.
사비는 현역 플레이어 아니 내가 본 어떤 역대 플레이어보다 "유사시"까지를 포함한 "평상시 패스 정확도"라는 면에서 완성도가 높은 선수이다. 이 측면만을 놓고 보았을 때는 피를로도 파브레가스도 사비를 능가하지 못한다고 판단한다.
바르셀로나의 경기를 유심히 보고 있으면 선수들이 뭔가가 잘 안 될 때에는 사비에게 공을 주는 것이 "체질화"가 되어 있다. 호나우지뉴나 메시, 이니에스타 등이 축구재능이 사비보다 떨어져셔여서 그런가? 천만의 말씀이다. 그러나 그들도 공의 소유권을 명백하게 동료에게 연결해주는 "안전성의 확률"이라는 면에서 만큼은 자기 자신보다 사비를 더 신뢰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사비의 가장 큰 강점은 "원터치 다이렉트 패스"이다. 사비는 그 누구보다도 공을 오래 끄는 스타일의 선수가 아니다. 이 점에서 그는 로마의 프란체스코 토티와 쌍벽을 이룬다. 원터치로 주는 패스를 주무기로 하는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토티와 사비는 보는 사람들에게 많은 차이를 준다. 그 이유는 첫번째로 두 선수가 위치한 포지션이 높낮이 편차 때문이다. 아무래도 토티가 사비보다는 보직의 위치가 높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토티와 사비가 속한 소속팀의 구성원들 때문이리라. 로마의 스쿼드와 바르셀로나의 스쿼드는 사실 좀 손색이 있다. 올망졸망한 멤버들 속에서 팬들에게 보여지는 토티의 예술같은 패싱력은 누가 보아도 "군계일학"이지만 사비의 패싱력 이외에도 보여줄 "꺼리"가 많은 바르샤 멤버들의 개인기량들이 서로 겹치면서 사비의 장점을 순간적으로 잊게 만드는 것이다.
국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원래 이탈리아는 많은 횟수의 공격을 선호하는 팀이 아니다. 단 한번의 공격을 하더라도 치명적인 공격을 해야 하고 그 이외의 공격은 체력소모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그들의 축구 스타일은 적은 횟수의 공격 속에서 토티의 감각이 유난히 두드러지지만...스페인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그들은 공격의 다산성이 경기를 이길 수 있는 가장 좋은 통로라는 "전통적인 득점에 관한 마인드"를 지니고 있는 팀이다. 다원화된 공격루트와 경기 내내 지속되는 유리한 볼점유율의 공격 축구 속에서 사비의 장점은 다른 공격재능을 가진 선수들의 활동력과 통합된 스펙트럼을 형성하며 사비만의 장점이 그 스펙트럼의 전면부로 부각되지는 않는 것이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사비의 공격 패스는 항상 패스를 받는 이의 전진공간으로 그 타케트가 정해져 있다. 이 점은 어떤 어시스트맨도 염두에 두는 일이지만 그 정확성에서 사비는 특출함을 보여준다. 원터치 패스를 하면서 동료의 진행방향을 읽고 있는 능력에서 그의 감각은 그래서 토티와 닮았다.
사비는 스무살 초반의 나이부터 스페인 국대에서 또 바르셀로나라는 거인구단에서 언제나 베스트 멤버로 활동해 왔다.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2002년 한일 월드컵 스페인과의 승부차기에서 그 어린 나이의 사비는 기라성같은 선배들을 제치고 승부차기 키커로 나서고 있다. 사비의 국대 중용은 패싱게임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규정하고 있는 스페인에서 반드시 선택해야할 필연조건이다.
패싱달인 사비는 이번 유로 2008에서 더 성숙한 보습을 보였다. 스페인이 조별리그의 파죽지세와 러시아와의 4강전에서 처럼 컨디션이 좋을 때 약팀을 상대로 하는 "대량살상 능력"이라는 스페인 고유의 특징을 그대로 유지시키면서 라이벌팀에게 한골차 내지는 승부차기로 밀어떨구고 다음 라운드로 진출하는 예전에 보지 못하는 끈끈함을 보여 주었다.
더구나 이런 승부의 "상대"들이 다름 아니라 아주리와 전차군단이라고 하는 토너먼트의 최강자들이었다니 그 의미는 더욱 깊었다.
이들 두 나라는 "이 한판" 밀어떨구기의 승부를 하는 방식을 전통의 노하우로 가지는 팀이었고 한 쪽은 2년전의 월드챔프이고 한 쪽은 유로대회 역대 최다 우승국이었다.
사비는 필드의 지휘관으로 군림했다. 그는 패싱게임을 하는 팀에서 다산성과 정확성 모두를 갖춘 조직력의 원천이자 시발 역할을 했고 나이 어린 후배들을 팀원으로 규합하여 심리적으로 냉정한 합리성을 경기 끝까지 유지시키는 정신적인 리더이기도 했다
외형적으로 보자면 부폰과의 승부차기 맞대결에서 승리한 카시야스나 득점왕 비야가 더 돋보일 지 모른다. 그리고 촌철살인의 창의력과 득점본능으로 우리를 즐겁게 해 준 파브레가스나 토레스가 더 돋보일 지 모른다. 예단할 수 없는 움직임을 가진 실바나 스페인산 흔들기 중원 유린의 상징 이니에스타가 더 돋보일 지 모른다. 묵묵히 압박의 마지노선을 형성해 주며 때때로 경기에 활력을 불어넣는 세나가 어쩌면 사비보다 외형적으로 더 돋보일 지 모른다.
하지만 MVP 가 사비에게 돌아가는 건 정당하다. 2006년 칸나바로의 수상은 칸나바로가 경기를 잘 한 것도 있지만 칸나바로라는 수비수가 가진 상징적 의미란 점도 컸다. 수비의 명가 이탈리아의 축구정체성에 맞는 바로 그 선수이고 이런 맥락에서 패싱게임과 포지션 플레이를 표방하는 스페인적인 축구에 가장 스페인적인 플레이를 하는 사비에게 나도 한표를 던지고 싶었다.
사비의 포지션은 팀의 무게중심이다. 그는 딱히 수미나 공미 어느 쪽의 선수도 아니며 동시에 둘다 일 수도 있는 보직의 선수이다. 나는 진보된 유형의 "앵커맨"이라는 개념을 사비에게 주고 싶다.
스물 여덟의 사비는 아직도 앞날이 창창하다.
그리고 바르샤와 무적함대의 무게중심 사비가 이 두팀의 팬들에게 "무게중심 미드필더"의 롤모델이랄 수 있는 펩을 능가하려면 아직 하나의 숙제가 더 필요하다.
그건 다름 아닌 2년 뒤의 월드컵 대관이다.
가능성은 충분하며(왜냐하면 이번대회 스페인의 모든 플레이어 특히 미드필드 진영 자체가 MVP이기 때문이다. 중원축구를 하는 현 시대에 이렇게나 강한 중원진영이라면 가능성이 충분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어쩌면 2년 뒤에 "드디어 과르디올라를 넘어선" 위대한 스페인산 "무게중심 미드필더"의 탄생을 보게 될런지도 모른다.
by 네이버 블로그 비타주리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