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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살인의 추억'을 보고

 

어느새 추억이 되어버린 연쇄살인, 사라진 진실

별점 10.0★★★★★

 

 

1986년부터 1991년까지 작은 마을에서 6년동안 6차례의 같은 잔인한 수법으로 6명의 여자가 살해당했다. 살인 동기도 알 수 없고 아무나 죽이는 묻지마 살인이다. 6명이나 살해되는 동안에도 범인을 잡지 못했으며 잡지 못했다. 몇 년 후 살인자의 검은 그림자만이 비칠

뿐이다.

박두만과 서태윤은 서로 정반대의 수사 방법을 가졌다. 박두만은 경력에서 우러나오는 자신의 직감에 의존하는 반면 서태윤은 서울에서 온 엘리트 형사답게 서류를 토대로 꼼꼼히 분석한다. 둘의 수사 방법이 다른 덕에 서로의 단점을 보완해가며 수사망을 좁혀갔다. 박두만은 직감에만 의존하고 충동적이기 때문에 ‘이 사람이 용의자다’라고 생각하면 용의자에게 폭력을 행사해서라도 자신이 원하는 답을 얻어낸다. 하지만 서태윤은 용의자의 행동, 그 당시의 상황 등 여러 가지를 종합해 두만이 잡아온 용의자가 범인이 아님을 명철하게 증명해내고 다른 단서를 찾아낸다. 서태윤이 다른 단서를 토대로 새로운 용의자를 지목하면 이번엔 두만이 뛰어난 직감으로 그 용의자를 찾아낸다. 이렇게 다른 성격과 수사 방법이 서로의 단점을 보완했기에 그나마 점점 진실에 다가가는 듯이 보였을 것이다.

 

정신박약아인 첫 번째 용의자 백광호를 시작으로 성 도착증이 있는 두 번째 용의자 조병순, 마지막 용의자 박현규를 거치면서 그들은 점점 진실에 다가가는 듯 했다. 백광호는 그저 피해자 이향숙을 따라갔다는 이유로 박두만의 직감으로 잡아들였을 뿐이다. 그것도 박두만은 백광호의 운동화로 발자국을 찍어 증거를 위조했고 폭력으로 억지 자백을 받아냈을 뿐이다. 나 역시 정신박약아인 백광호가 치밀한 계획과 증거 없는 깔끔한 범죄를 벌이기엔 어려울 것 같다는 태윤의 말에 동감했다. 증거가 없는 범죄를 하기엔 정신 질환이 있는 그의 머리로는 무리였다.

 

조병순은 살인현장에 나타나고 그가 성 도착증이 있다는 이유로 잡히지만 그 사이 또 새로운 범죄가 일어나 그는 풀려난다. 마지막으로 형사들은 비오는 밤마다 라디오에 ‘우울한 편지’라는 노래를 띄워달라고 신청하는 한 남자가 있고 그 노래가 나오는 날마다 살인이 일어나는 것을 알아낸다. 또한 피해자 중 유일한 생존자인 여인이 범인은 뽀얗고 보드라운 손을 가졌다는 진술을 토대로 박현규를 잡아낸다. 그러나 반전이 숨겨져 있었다. 유일하게 발견된 증거가 박현규의 DNA와 일치하지 않는 것이었다.

 

박현규가 범인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자 나 역시 두만과 태윤처럼 충격에 휩싸였다. 보는 동안 답답했다. 왜 범인을 찾아내지 못했을까. 직감과 서류에 의존해서 수색망을 좁혀가는 것이 답답했다. 하지만 80년대라는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보니 과학적인 수사는 힘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DNA를 비교하는 기술조차도 개발되지 않아 미국으로 보내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 살인사건이 2000년대에 일어났더라면 범인은 잡혔을지도 모른다. 이 사건이 80년도에 일어났기 때문에 범인을 잡지 못했던 것이다.

 

6명의 피해자를 낳고도 범인을 잡지 못한 경찰들은 어마어마한 죄책감에 휩싸였을 것이다. 자신의 무능함 때문에 그들을 죽음에서부터 지켜내지 못했고 그들이 살해당한 것이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죄책감은 결국 형사라는 직업을 포기하게 했다. 그래도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섬뜩한 검은 그림자가 보일 뿐이다. 끝부분에서 살인자의 뒷모습을 등장시킨 까닭은 무엇일까. 아마도 사람들을 지켜내지 못한 형사들의 죄책감 때문에 검은 그림자가 형사들에게 보인 것 같다. 이 이유도 있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살인자가 대도시 속에서 유유히 걷는 뒷모습을 그린 이유는 지금도 이 살인자는 우리 주위에 있을 수도, 우리가 한번쯤은 지나쳤을 수도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싶어하는 작가의 의도인 것 같다. 실제로 이 시나리오의 모티브가 된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살인자도 이런 모습으로 살아갈 가능성이 크다.

 

대체 범인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진실에 다가간다 싶으면 안타깝고 어처구니없게 증거들이 사라져버린다. 트랙터를 탄 할아버지가 범인의 발자국을 실수로 뭉개버린 것도 그렇고 유일한 현장 목격자인 백광호가 기찻길에 뛰어드는 일도 그렇다. 범인을 거의 다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다. 진실을 밝힐 모든 증거가 사라져버렸다. 더 이상 범인을 잡는 것은 불가능하다. 살인자의 승리이다. 결국 진실은 우리가 찾지 못하는 먼 곳으로 사라져 버렸다. 살인자가 자백하지 않는 이상 말이다.

 

진실을 찾을 길이 사라져버려 어느새 연쇄살인사건은 추억으로 남게 되었다. 어떻게 연쇄살인사건과 같은 끔찍한 일이 추억이 될 수 있느냐고 물어볼 수도 있다. 하지만 추억의 의미는 지난 일을 돌이켜 생각하는 것이다. 꼭 좋은 일만이 추억이 되는 것은 아니다. 끔찍한 일도 충분히 추억이 될 수 있다. 끔찍한 추억일 뿐이다. 이영화의 제작 의도 중 하나는 잊혀져가는 사건을 잊지 말아달라는 의미도 포함되어있지 않을까.

추천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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