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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안보현장을 되돌아 보며

눈사람 |2010.06.24 17:12
조회 131 |추천 0

너무 무심했습니다.

그동안 북한의 테러를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솔직히 그렇게 많은 도발과 테러가 있었는지 잘 몰랐습니다. 지난주 미국 국무부가 외교비밀문서를 해제하면서 밝힌 내용이 이런 사실을 다시 한번 일깨워줬습니다. 1969년 4월 북한 미그 21기가 공대공 미사일을 발사해 미 해군 정찰기를 동해상에서 격추시켰습니다. 승무원 전원이 사망한 일입니다. 그것은 그저 수많은 사건의 하나일 뿐입니다. 비무장지대와 서해 해상에서 숱한 도발이 있었고 대한민국 대통령을 암살하려는 기도도 네 번 있었습니다.

 

북한이 대남혁명투쟁을 본격화하면서 소위 베트남식 게릴라 전술을 구사한 1966~1972년 기간 중 한국은 무려 326명의 군인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군사적으로 열세에 있었던 우리는 변변한 대응조차 못했지요. 미국 역시 한반도에서 다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기피했고요.

 

너무 안이했습니다.

북한의 군사행동은 늘 기습적이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습니다. 굵직한 도발들을 열거하면 그 유형은 한결같지 않습니다. 버마에서 폭탄테러를 자행하고, 비행기를 폭파하고, 경비정에 해안포를 발사하고, 도끼로 군인을 찍고, 은밀하게 무장공비를 침투시켰습니다. 모두 허를 찌르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리고 북한의 비열함도 잊고 있었습니다. 1986년 9월 한국에서 아시안게임이 열리기 6일 전 북한은 김포국제공항 쓰레기통에 시한폭탄을 설치했습니다. 35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1983년 10월, 북한은 중국을 통해 미국과 힘을 합쳐 한반도 긴장완화에 노력하자는 평화 제스처를 보냅니다. 바로 그 다음날 아웅산 사건이 터졌습니다. 그렇게 뒤통수를 쳤습니다.

 

너무 자만했습니다.

훌쩍 커진 경제력, 상대적으로 우위를 점한 군사력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전쟁에서의 승리는 숫자로 이뤄지는 것이 아닙니다. 조선 광해군 때의 일입니다만 후금의 누루하치는 2만의 군사로 푸순 근처 사르흐에서 명나라 군사 10만을 격파했습니다. 그걸로 명은 멸망하고 청의 시대가 열립니다. 그렇게 멀리 볼 것도, 그렇게 큰 전쟁을 들먹일 필요도 없습니다. 1978년 11월 충남 홍성에 무장공비 3명이 침투했습니다. 부녀자 2명을 살해하고 도주했습니다. 이를 잡기 위해 군경 20만명이 동원됐습니다. 그러나 단 한 명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유유히 북한으로 복귀했습니다. 100명의 경찰이 한 명의 도둑을 못 잡는다는 건 고금의 진리입니다.

 

만약에, 정말로 만약에 천안함이 북한의 잠수정이 쏜 어뢰에 의해 침몰했다고 가정해봅시다. 나는 감히 지금의 군으로는 이를 사전에 예방할 수 없었다고 봅니다. 우리 군의 사고체계에는 북한이 그렇게 비열하고 은밀하게 어뢰를 쏜다는 가정은 없었으니까요. 음파탐지기를 탓할 일이 아닙니다. 그런 건 100개, 1000개가 있어도 소용없습니다.

너무 기본을 무시했습니다.

 

군은 모름지기 전쟁을 위해 존재합니다. 전쟁을 하거나, 전쟁을 막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일반 국민들은 다르게 생각할 수 있어도, 적어도 군은 `유화정책은 위장된 평화`로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전쟁을 방지하는 것은 우리가 기꺼이 전쟁을 각오할 때 가능하다는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을 다시 되새겨야 합니다. 우주로 나가자는 공군이나 대양해군을 외치는 해군. 그런 허황된 구호로 우리 군은 승리할 수도, 평화를 지킬 수도 없습니다.

천안함은 한국 사회 전체에 울린 경고등(wake-up call)입니다. 그런 면에서 46명 젊은 용사들의 희생은 그 자체로 헛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오해가 있을 것 같아 한마디만 더합니다. 천안함 침몰이 설사 북한의 소행이 아니라고 판명나더라도 나는 이 반성문을 거둘 생각이 없습니다. 지금 이순간도 우리는 현존하는 위협에 둔감합니다.

 

[매일경제 손현덕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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