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아 멈춰라. 간이역 여행
가끔 이런 상상을 할 때가 있어요.
깨끗하고 반듯반듯한 도심속에서 살다가 어느 날 답답함을 느끼고 물 맑고 조용한 시골에 가면 영화와 소설같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느낌. 기차역이야말로 가장 많은 사연을 가지고 있는 곳이라고 생각해요. 유리와 대리석으로 번쩍번쩍한 도심속 기차역보다 하루에 한 두대 밖에 정차하지 않는 기차역이나 간이역 정도가 소설같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장소로 심장을 울렁거리게 합니다.
바쁘고 숨이 턱턱 막히는 올 여름, 시간이 멈춰진 듯 한 간이역을 소개해 볼까 합니다.
우리나라 간이역 지도
▶ 사릉역
*사릉 : 조선 단종의 비 정순왕후 송씨의 능으로, 1457년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되면서 그녀 역시 부인으로 강봉되었다가 1698년 단종이 복위되면서 이곳도 사릉으로 격이 높아졌다.
사릉역은 사릉이라는 묘에서 유래했다. 행정구역상 남양주시 진건읍에 속하는 이곳은 주위에 아파트가 들어서고 마을의 크기도 점점 커져가고 있지만, 사릉역은 꽤 오래 전부터 그 모습 그대로 있다. 역 내부는 의자에 10명 정도가 앉으면 꽉찰 것 같은 작은 크기의 맞이방, 대문보다 큰 역명판이 있고, 녹색지붕은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적인 간이역으로서의 모습을 이루고 있다.
주변에 사릉 말고는 볼거리도 없고 동네 자체도 그리 여행지로서 특징있는 곳은 아니지만, 사릉역은 그 자체만으로 많은 사진가와 여행자들의 발길을 그러모아왔다. 경춘선 복선전철화가 완료되고 나면 사릉역 앞으로는 더는 기차가 다니지 않게 될 것이다. 사릉이든 사릉역이든 한 번 방문해보고 잠시 역 맞이방에 앉아 기차를 기다리며 느그네 된 기분을 즐겨보자.
▶ 경강역
경춘선은 청량리역을 출발해 약 50분 정도 지나면 대성리역 부근에서 북한강을 만난다. 북한강을 건너 강원도에서 처음 만나는 역이 경강역이다. 경강역은 한적한 강변 마을의 자연 풍광과 경춘선의 역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오래된 빨간 벽돌의 역사와 그보다 더 오래된 고목나무들이 역을 지키고 있다.
경강역은 영화 [편지]의 촬영 장소로 유명하다. 통일호가 드나들고 개찰구 앞에 화분들이 예쁘게 놓여 있던 영화 속 역 풍경이 아직도 생생하다. 대합실에는 영화 속 장면을 담은 빛바랜 사진들이 걸려 있다.
경춘선 가평-경강-백양리-강촌-김유정 구간은 선로가 새롭게 놓이고 있다. 이 선로는 백양리역 부근에서 잠시 강변으로 나올 뿐 나머지 구간은 계속 산속을 달리게 된다. 경강역도 마찬가지로 강을 떠나 산으로 이설될 운명이다.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전형적인 경춘선 역으로 마지막까지 살아남았지만 이제 사라질 날이 머지않았다.
Tip. 강촌역이 약 8Km 떨어져 있어서 강촌에서 자전거를 대여해 기찻길과 북한강을 따라 경강까지 달려보는 것도 좋다.
▶ 백양리역
강촌역에서 청량리역 방향으로 한 정거장을 더 가면 백양리역이 있다. 강촌에서 약 2km거리로 걸어서는 30분, 자전거를 빌려 타면 10분 이내에 충분히 닿는다. 백양리역에는 강촌역에서 찾아볼 수 없는 또 다른 강변 역의 정취가 있다. 70년이 넘은 옛 역사는 거의 변화를 겪지 않아 시간마저 멈춘 듯하다. 시간을 가둔 간이역, 백양리역이야말로 경춘선에서 가장 간이역답다.
▶ 김유정역
김유정역. 원래 이름은 '신남역'이었는데 2004년에 '김유정역'으로 바뀌었다. 김유정역. 아담하고 오래된 역사인데다가 이름도 예쁘다. 작은 마을이라 정차하지 않는 열차가 많지만 창밖의 스치는 풍경만으로도 범상치 않은 역이다. 역 앞 실레마을은 유명한 소설가 김유정의 고향으로, 김유정의 소설 대부분이 이 지역을 무대로 하고 있다. 역 앞 도로를 건너면 '김유정문학촌'에 들어서게 된다. 정갈하고 아담한 정원을 중심으로 선생의 생가와 기념관, 디딜방앗간을 둘러 볼 수 있다. 주변 마을 전체가 [봄봄] , [동백꽃] 등의 무대이기 때문에 발 디디는 곳 모두가 한국 대표 근대문학의 현장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지명을 따라 마을을 돌아볼 수 있는 문학 산책로는 요즘 인기인 '걷기여행' 코스로도 손색이 없다.
▶ 정동진역
정동진역은 우리나라에서 바다와 가장 가까이 있는 역이자 해돋이 명소로 각광받고 있다. 불과 십수 년 전만 해도 동해안의 알려지지 않은 간이역에 불과했지만, 정동진역은 이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역 중에 하나가 되었다. 국민드라마라는애칭이 붙을 만큼 인기가 있었던 [모래시계]에 나온 이후 지금은 엄청난 인파를 끌어 모으는 동해안의 대표적인 관광지가 되었다.
▶ 도계역
도계역은 우리나라 거대한 탄광지대로 최고의 석탄 산지인 도계광업소가 자리 잡고 있다. 석탄산업이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고장이다. 도계역에는 급수탑이 있어서 증기기관차에 석탄과 물을 보충해주었다. 하지만 더 이상 증기기관차가 다니지 않기 때문에 도계역의 급수탑은 등록문화재로서만 그 명맥을 유지할 뿐이다.
오십천 건너 국도변에 서면 특이한 시설이 눈에 들어온다. 도계에서만 볼 수 있는 장면인데, 기찻길이 산꼭대기까지 수직으로 뻗어 있다. 선탄장에서 갱도까지 이어지는 광차용 인클라인이다. 하늘로 솟구쳐 오를 듯한 철도의 아득한 풍경을 보기 위해 도계역을 찾는 사람도 많다.
▶ 하고사리역
도계를 벗어나 10분정도 달리면 허름한 간이역이 눈에 들어온다. 하고사리는 고사리 아래에 위치한다고 해서 '하고사리'라고 불리운다. 예전 하고사리역은 팻말이 없었다면 선로 보수용품 창고로, 옆에 철길이 없었다면 농기구 창고로 비치기 딱 좋은 건물이었다. 하지만 2007년에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대대적인 보수작업이 진행되어 이제는 완전히 새로운 모습이 되었다.
▶ 나한정-흥전-심포리역
한국의 유일한 스위치백 구간인 심포리~나한정 구간은 한반도 남부의 등줄기를 이루는 거친태백산맥을 기차로 넘기 위해 1962년 완성되었다. 통리협곡을 따라 높이의 차이를 줄이기 위해 연속한 많은 터널과 급경사를 이루는 철길로 이루어져 있어 잠에 빠진 승객이라도 이곳에서는 한 번 쯤 눈을 뜨게 된다. 높은 경사를 극복하기 위해 기차가 뒤로 가기도 하고, 터널을 11개나 지나야만 했던 이 구간은 우리나라에서도 가장 험준한 철도 구간일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난코스였다.
▶ 곡성역
우리나라에 폐선, 폐역을 활용한 '기차마을'로 부를 만한 곳이 3곳 있는데, 바로 정선, 문경 그리고 곡성이다. 각각의 기차마을은 그 특징과 운영 주체가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철도를 즐기려는 여행객들에게 각각 색다른 경험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정선의 경우 7km가 넘는 멋진 경관을 갖춘 국내 최장의 레일바이크가 있고, 문경에는 가은선~문경선 일대에 2곳이나 되는 레일바이크 운행 구간과 석탄박물관, 문경새재를 포함한 관광지가 있다. 그에 비해 곡성은 공원 전체가 기차를 테마로 하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다.
▶ 명봉역
기차가 거의 보성역에 도착할 무렵 그냥 지나치거나 잠시 멈춰 서는 역이 있는데, 바로 명봉역이다. 명봉역은 충분히 가볼 만한 간이역으로, 우선 역이 참 예쁘다. 1950년대 중반에 지어진 붉은 벽돌 건물과 파란 지붕이 묘한 조화를 이루고, 봄이면 역 앞마당에는 벚꽃을 비롯한 여러 가지 종류의 꽃들이 시기를 달리 하며 교대로 꽃을 피운다. 드라마 [여름향기]에서 주인공 송승헌과 손예진의 이별이 이루어진 곳으로, 역 맞이방에는 주인공의 사진이 남아있다.
▶ 북천역
북천역을 지나는 경전선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영호남을 연결하는 철도 노선이다. 삼랑진역에서 갈라져서 호남선의 광주송정역까지 이어지며 창원, 마산, 진주, 순천, 보성 등 남해안의 주요도시를 지나는 300.6km의 매우 긴 노선이다.
북천역은 2007년부터 '북천 코스모스 메밀꽃 축제'에 참여하고 있다. 역 전체를 코스모스 테마 역으로 가꿔 축제 행사장으로 만들었다. 코스모스를 재배하고, 역명판과 건물 도색도 코스모스 문양으로 했다. 역명판에도 '코스모스 역'이라는 문구가 있어 누가 봐도 명실상부한 코스모스의 대표역이라 하겠다.
▶ 원북역
원북역은 승강장 하나와 간이 대합실만 갖추었다. 다솔사역이 하나하나 덜어내었다면 원북역은 처음부터 간이역으로 시작하여 현재까지 한결같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평온한 농촌 분위기면서 기찻길이 그리는 곡선이 아름다워 철도 동호인들에게도 인기가 좋다.
▶ 다솔사역
다솔사역은 2번 국도 옆에 자리 잡고 있다. 역은 제법 넓은 공터에 있는데 과거에 역사와 측선을 갖추고 있던 곳이라는 것을 짐작케 한다. 다솔사역은 승강장 하나, 역명판 하나뿐인 전형적인 간이역이다. 깊은 산속에 자리를 잡아 특별한 운치가 있다.
다솔사는 역에서 좀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 잡은 천년 고찰이다. 절이 위치한 주산이 마치 대장군이 앉아있는 형상 같아 '많이 거느린다'는 뜻의 '다솔사'라고 이름 지어졌다. 그러나 정작 다솔사 간이역은 거느리고 있는 것들을 하나하나 떼어내고 있다.
간이역
[명사] 일반 역과는 달리 역무원이 없고 정차만 하는 역.
간이역의 사전적 정의다. 단지 역무원이 없고 정차만 하는 역이 간이역이 아니라 오랜 세월의 사연을 담고 묵묵히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는 간이역은 그 곳에 가는 것 만으로도 위안을 받고 보듬어줄 것만 같은 곳이다.
*자료출처
간이역 오감도 / 신명식 , 이지북 2010
간이역 여행 / 임병국 , 팜파스 2009
네이버 철도동호회 http:nr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