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믿을 수가 없다.
아무것도 믿을 수가 없다. 얼마 전 타블로의 학력위조 사건을 보며 무엇을 보여주던 본인이 믿는 것 외에는 모두 거짓으로 믿는 사람들을 보았다. ‘이건 이런 것입니다.’라 설명해줘도 그럴 리 없다 부정한다. 그 속엔 조작된 뭔가가 있을 것이란 의심이 앞선다. 예전엔 인간을 믿었기에 그 진심을 신뢰했다. 그 사람이 한 이야기에 생명이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이젠 다르다 이젠 우리가 우습게 만든 이야기가 생명을 얻고, 언론을 통해 공론화 된다. 근거 없는 낭설도 모두 정설로 만들어버리는 세상. 이것이 부당한 세상인가.
영화 <부당거래>를 보고 나오며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은 진실은 행해지지 않고, 생성된다는 것이다. 요즘 한국사회가 그렇고, 한국 영화들은 어김없이 그 부분을 건드리고 있다. <방자전>, <시라노 연애조작단> 이 두 영화는 영화 속에서 만들어진 영화(설정, 각본)가 엄연한 진실이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데서 그 재미를 찾는다. <방자전>은 우리가 알던 <춘향전>이 결국엔 방자의 손에 의해 조작된 소설이었다는 설정이고, <시라노 연애 조작단>의 경우 사랑 역시 하나의 조작된 시나리오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다는 어찌 보면 섬뜩한 내용이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진심이 아닌, 만들어진 공식에 의해 생성된다는 사실은 따듯한 웃음이 아닌 그저 만들어진 웃음으로 느껴진다. 한국의 관객이 가장 사랑했던 이 두 영화의 공통점은 우리가 믿던 것들이 결국엔 조작에 의해 만들어진 거짓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 자체가 우리 사회의 분위기를 말해주는 것이다.
<영화는 영화다>는 영화와 현실의 모호함 그 경계에 대해 절묘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이 영화에서 ‘강패’는 깡패지만 영화에서 깡패역할을 연기하고, 수타는 스타연기자지만 영화에서 사람을 진짜 때리는 깡패 짓을 한다. 영화는 이 두사람의 혼돈되는 역할놀이에 관심을 기울인다. 두 사람은 서로의 역할에 대해 우습게 보고, 비난하지만 어느새 그 역할을 따라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리고 영화가 현실이 되고, 현실이 영화가 되는 영화의 클라이막스는 이상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마치 꿈 좀 깨라는 듯 강패는 수타의 앞에서 깡패로서 본연의 자신을 보여준다. 영화는 다시 흑과 백의 차이처럼 두 사람을 구분하고, 강패는 의미심장하게 웃어 보인다. 허구와 진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꿈만 꾸는 이 시대의 삶. 그것이 영화는 영화다라고 꼭 말해주어야 하는 이유다.
TV속 요즘 유행하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허구와 진실을 더욱 흙탕물 속으로 범벅 해 놓는데 열중이다. <우리 결혼 했어요>, <패밀리가 떴다>과 같은 리얼을 강조하는 프로그램은 마치 실제인 냥 연기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진실일 수도 있다고 애써 믿는다. 아니 그러고 싶다. 실제는 짜진 각본대로 연기하는 허구의 세계라는 것을 알면서도 혹시 진짜 사귀는 것은 아닐까? 혹시 진짜 리얼한 상태에서 하는 거 아닐까? 믿고 싶어지는 것이다. 도무지 믿고 싶지 않은 참혹한 세상에 대한 부정의 태도로 TV에 의지하는 것이다, 도무지 현실의 밑바닥을 받아들일 용기가 나지 않는 현 시대의 아이들에게 도망칠 수 있는 장을 마련한다. 그래서 현실과 쇼비지니스의 세계를 지속적으로 비교하고, 그것을 참고해서 살아간다. 그리고 그 중심엔 허구의 진실화가 언론의 기사에 빈번하게 스며들며 우리의 눈과 귀를 어지럽힌다. 이슈가 될 만한 내용이라면 인터넷에 수 십 개씩 뜨는 찌라시 기사들은 진실을 담보하지 않는다. 추측하고, 과장하고, 왜곡된 정보들이 기사라는 진실의 장을 통해 제공되니 우리는 허구와 진실 사이에서 갈피를 잡을 수 없다. 거짓된 정보를 진실로 믿고, 그것을 통해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내길 원하는 심리가 영화, TV를 넘어 언론까지 스며드는 것이다.
영화 <부당거래>에선 잡히지 않는 살인마를 거짓으로 만들고, 검사가 그 시나리오를 쓰고, 형사는 그것을 감독하며, 기업은 그것을 직접 행한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부당한 것은 이 모든 사실들을 왜곡해서 작성해 국민들에게 알려주는 기자에게 있다. 쉽게 펜을 갈기는 기자들은 잉크가 마르기 무섭게 기사를 지우고, 새로운 허구를 진실의 장에 전달해 대중을 흐린다. 대중 역시 살기 바빠 도통 그것을 따지지 못하고 무조건적으로 수용한다. 허구를 수용한 대중은 분노하고, 새로운 이슈거리를 재생산한다. 그것이 다시 언론을 통해 과장되어 새로운 펙트로 전송된다. 이 사회의 시스템을 이 영화는 정확히 관통하는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위기에 빠진 검사는 언론을 통해 거짓을 흘려 자신에게 집중된 이목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한다. 언론의 정보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대중을 조롱하는 장면이다.
아무것도 진실이라고 생가할 수 없으니 우리는 세상에 일어나는 그 무엇도 믿을 수가 없다. 아무리 진실이라고 말해봤자 TV프로그램과 거짓을 쓰는 기자의 말처럼 거짓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결국엔 믿을 건 내가 믿는 전제 그 하나고, 그것을 통해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한다. 마치 자신이 아는 것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인 냥 생각하는데 익숙하다.
소설가 트루먼 카포티는 한 마을의 살인사건을 취재하며 그 취재내용을 소재삼아 논픽션 소설을 쓰게 된다. 사실을 소설화하는 모순적인 작업. 소설은 허구를 작성하는 것인데 그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소설로 작성하게 되며 심한 내적갈등을 얻게 된다. 그 이유는 범인에게 동정심과 애정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사실을 사실로 작성하지 못했다. 그의 치우친 입장은 사실을 왜곡시켜 소설에 새겨 넣었고, 그 결과 ‘트루먼 카포티’의 <인 콜드 블러드>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논픽션 소설이 되었다. 작품에 느껴지는 트루먼 카포티의 고단한 고뇌의 흔적이 그것을 읽는 자의 마음을 움직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실을 기초한 허구는 명확히 허구라고 전제할 때 아름답게 탄생될 수 있는 소재가 된다. 하지만 요즘엔 펙트와 허구는 구분되지 않는다. 그 어떤 이도 진실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세상에 탄생되지 않는다. 그래서 수군수군 대는 소셜네트워킹을 또 다른 진실의 장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프로슈머로서 내가 정보를 만들고, 직접 소통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 잊고 있는 것이 있다. 정말 진실을 원한다면 서로의 눈을 보고, 사람을 믿는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건 송신과 수신의 반복이 아니라, 대화와 소통의 핏줄이다. 그걸 잊고있기 때문에 항상 우리는 우리에게 놓여진 사실들 앞에서 주저하고, 거짓투성이의 컨텐츠에 진실성을 부과하려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