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첫 눈
‘메세지가 도착 했습니다’
신은준이 보낸 문자였다
‘선물 줄게 창밖을 봐’
“눈이다..”
창 밖을 보니 눈이 내리고 있었다
올해 내가 본 첫눈 이었다
뛰어 나가 눈을 맞고 싶었지만 지금은 회사에서 일을 하는 중이라서 그럴 수가 없었다
난 눈을 참 좋아 한다
항상 거짓 없이 진실만 보여주는 눈이 난 좋다
그리고 이렇게 소리 없이 문득 다가와 기분 좋게 해주는 것도 좋다
난 눈이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며 손을 모아 소원을 빌었다
습관이 무섭다고 느낄 때가 바로 이럴 때이다
어린 시절부터 첫눈을 보면 소원을 빌던 것이 습관이 되어 매번 겨울이 되면 이렇게
소원을 빌게 된다
누구한테 소원을 빌고 있는 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하느님? 천사? 눈의 신? 부처님은 아닐테고..
아마도 자기의 다짐이 아닐까
자신이 희망하는 일들이 일어날 수 있도록 머릿속에 세뇌시키는 자기주문.
어차피 자신의 일은 남이 해결해주지 않으니깐 말이다
사랑이든 일이든 시간이 지나면서 처음의 마음가짐이 사라지게 되더라
내 마음속에 꺼지지 않는 열정이 남아 있길 기도하며 난 소원을 빌었다
‘나의 열정을 뺏어 가지 말아주세요 내 열정을 지켜주세요’
내가 26살 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소원을 빌었다
“한기자님 저번에 mu스튜디오에 가서 모델들 사진 찍으신 거 있잖아요”
“네 그게 왜요?”
“그거 필름이 다 타버려서 재촬영해야 한다고 지금 전화 왔던데요..”
“에? 누가 그래요?”
“스튜디오에서 방금 전화 왔어요...한기자님이 스튜디오에 가서 재촬영 날짜 잡고 컨셉
다시 회의 하고 그랬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내가 미쳐 미쳐”
“왜 그래?”
“주연아 나 지금 스튜디오 가야해”
“지금? 거기까지 가는 교통수단 없잖아”
“괜찮아 지하철 내려서 20분정도만 걸어가면되”
“20분이 말이 쉽지 이 추운 날씨에 힘들 텐데”
“걱정마셔 나 튼튼한 두 다리를 가졌다”
“그러게 운전면허 좀 따지 니가 원시인이니 이게 무슨 고생이야 조금 있으면 해도 질껀데”
“그렇게 걱정되면 니가 대신 다녀 와 줄래?”
“잘 다녀와”
면허라도 있으면 좋았을걸, 잠시 후회를 하였다
힘들게 추위와 싸워가며 스튜디오에서 일을 끝낼 수 있었다
“눈 그쳤네”
일을 마치고 나오니 하얀 눈이 사라진 어두컴컴한 밤 이었다
“으.. 이 머나먼 길을 다시 어떻게 걸어가야 할지 깜깜하구만”
주변엔 상점 하나 없었고 불빛 이라고는 가로등과 도로가에 지나다니는 차들 뿐 이었다
“낮엔 몰랐는데 저녁이 되니 으슥하네”
‘빵빵빵’
차가 울리는 쪽을 보니 검은 차 한 대가 서 있었다
주위를 살피니 나 밖에 없었다
설마 날 부르는 건가?
난 차 쪽으로 가지 않고 더 피해서 벽 쪽 으로 갔다
하지만 그 차는 나를 따라왔다
‘혹시.. 변태 아니야?’
뒤에서 누군가가 날 지켜봤다면 배를 잡고 웃을 정도로 흉하게 엉덩이를 흔들어가며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한지유씨”
검은 차 창문이 내려지자 강민한의 모습이 보였다
난 조용히 차 쪽으로 걸어갔다
변태가 아니란 생각에 반가운 마음도 들었다
“어디를 그렇게 급하게 가십니까”
“어? 강민한씨”
“타세요”
“아니요 괜찮아요”
“여기에서 지하철역까지 한참 걸립니다”
“조금만 걸으면 되요”
“한번만 더 팅기면 진짜 갈 겁니다”
내심 그가 두 번 물어 봐주길 바랬다
지금 춥고 배고프고 몸이 지쳐 있었기 때문이다
“아 따뜻하다”
강민한의 차안은 차가운 나의 마음을 녹여 줄 만큼 따뜻하였다
“그런데 한지유씨 경보하십니까?”
“네?”
“조금 전에 보니까 경보하면서 가는 것 같던데”
차안에서 나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나보다
“그럼요 경보가 얼마나 몸에 좋은데요 강민한씨도 언제 한번 해보세요.. 건강에 최고예요..”
“그냥 걷는 게 건강에 더 좋다고 하던데요”
“그럼 강민한씨는 그냥 걷기 운동해서 벽에 똥칠할 때 까지 오래 사세요”
‘꼬르르르륵’
나의 배에서 난 소리였다
그 소리는 너무나 민망할 정도로 큰 소리였으며 듣기 흉한 소리였다
점심도 먹는 둥 마는 둥 했었는데 저녁까지 먹지 않아 배가 엄청 고팠던 참 이었다
강민한씨가 이 소리를 들었을까..
“방금 무슨 소리입니까”
“네? 무슨 소리요”
곤란할 땐 모른 척 하는 게 최고이다
“한지유씨 배에서 나는 소리 아닙니까?”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요 하하.. 전 지금 배가 엄청 불러서 글쎄요.. 전 아닌데..
강민한씨 배에서 난 소리 아니예요? 아니면 .. 차 안에 귀신이 있는가”
강민한은 나의 변명 따위는 필요 없다는 듯 혼자서 얉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특유의 비웃는 웃음이었다
“어어? 강민한씨 여기서 우회전 해야지 우리 집인데?”
“알고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리로 가요”
“배고파서 운전을 못 하겠습니다 뭐라도 먹고 가죠”
그가 차를 세운 곳 주변에는 마땅히 음식을 먹을 곳이 없었다
학교주변이라 분식점이 대다수였다
“한지유씨 떡볶이 좋아 합니까”
“사랑합니다”
처음 강민한과 식사를 하였던 고급레스토랑과는 아주 다른 소박한 분식 점 안으로 들어갔다
“주문할테요?”
분식집 아주머니가 주문을 받으러 오셨다
“떡볶이 말고 뭐가 맛있습니까”
당장이라도 숟가락을 그의 입에 넣어 말을 멈추게 하고 싶었다
분식점에 와서 떡볶이 말고 뭐가 맛있냐고 묻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순대, 튀김, 김밥, 만두 얼마나 많은가..
이 인간 떡볶이도 못 먹어 봤다 그러는 거 아니야?
“다 맛있지 순대도 맛있고 김밥, 튀김, 만두, 꼬지,오뎅 다 맛있어”
“그럼 다 주세요”
결국 쓸데없이 인심을 쓰는 구나
“배 터질 일 있어요? 아니요 아주머니 그냥 김떡순으로 주세요”
“알았어 잠시만 기다려봐”
아주머니에게 ‘어떤 음식이 맛있냐’고 물어 보던 강민한의 모습은 마치 레스토랑에 가서
‘오늘은 어떤 요리가 좋지?‘ 이 모습 같았다
“한지유씨”
“왜요”
“김떡순은 어떤 음식입니까”
난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김떡순을 묻는 그의 표정이 매우 진지하여 우스웠다
“왜 그렇게 웃습니까”
“잘 들으세요 김떡순이란, 김밥, 떡볶이, 순대! 분식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음식을 합친 말이죠”
마치 어린학생을 가르치는 선생님 같은 모습으로 매우 자신 있게 대답하였다
반면 자신이 궁금해 하던 김떡순의 정체가 실망스러운지 강민한은 대꾸 없이 물을 마셨다
“자 여기 김떡순이 나왔으니깐 맛있게 먹어요”
“잘 먹겠습니다”
빨간 떡볶이와 오동통통한 순대, 뽀얀 김밥을 보고 군침을 삼켰다
이미 이성을 잃은 난 허겁지겁 먹기 시작하였다
강민한은 팔짱을 낀 채 나를 바라보았다
“뭐해요 강민한씨도 빨리 먹어요 식으면 맛 없어요 아 뜨거”
“배 안 고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난 그의 말을 못 들었다는 듯이 먹는 데만 열중하였다
“코로 먹습니까? 고개 좀 들고 먹으시죠”
“거참 시끄럽네 강민한씨는 코로 먹어요? 눈으로 먹어요?제발 입은 먹는 데만 사용 합시다”
그제 서야 그는 내가 먹는 모습을 보지않고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사장님”
갑자기 강민한이 분식집 아주머니, 그러니까 분식점의 대표인 사장님을 불렀다
“머 필요한 거 있어? 잘생긴 총각”
“그게 아니라.. 여기 요리사가 사장님이십니까?”
“그렇치 내가 사장이고 주방장이지”
“이 떡볶이.. 참 맛있습니다”
“아이고? 그래? 다행이네 그럼 자주 먹으러 와야해”
참 어처구니 없는 그의 행동이었다
떡볶이 맛에 감탄하여 떡볶이 집 아주머니에게 칭찬하는 사람은 살다 살다 처음봤다
“강민한씨 이제 사실대로 말 합시다”
“뭘 말입니까”
“강민한씨 인간아니죠? 외계인이죠? 어느 별에서 온 거예요?”
그는 날 한번 쳐다보더니 떡볶이를 다시 먹기 시작했다
“정말 볼 때 마다 이상하단 말이야.. 이상해 이상해”
“이상하면 치과 가세요”
“강민한씨 잼있어요?”
“잼 있습니다, 딸기잼”
“어쩜 그렇게 얼굴표정 하나 안 바뀌고 그런 개그를 하니.. 정말 양심 없으시다”
“한지유씨 한테 배운 겁니다”
“어머 웃기네.. 내가 언제 그런 저질개그를 했어요”
“늘, 항상 만날 때 마다요”
난 괜한 헛기침을 했다
사실 저런 개그는 내가 좋아하는 개그이다
하지만 남이 하는 걸 들으니 어이가 없는 유치한 개그로 보였다
“강민한씨 생각해서 말 해 주는 건데요 다른 사람 앞에 가서 그런 개그 하지 마세요,
멀쩡하게 생겨서 실없는 소리 한다고 사람들이 욕해요”
그는 말없이 웃었다
“강민한씨 떡볶이 맛있죠?”
“네 맛있네요”
“설마 떡볶이 처음 먹어 보는 건 아니죠?”
“장난 합니까”
“나 장난 아닌데.. 진지하게 묻는 거예요”
“먹어 봤습니다”
“그럼 왜 처음 먹어 본다 듯이 먹는 거예요”
“내가 언제 그랬습니까, 단지 오랜만에 먹는 거라서 맛있게 먹은 거 뿐 입니다”
“언제 마지막으로 먹었는데요?”
“몇 년 전예요”
“난 또 못 먹어 봤는 줄 알았네.. 놀이공원에 대한 휴유증이 너무 컷거든요”
“도대체 언제까지 놀이공원을 들먹일 생각입니까”
“제가 원래 녹차파 일원이거든요”
“그건 또 뭡니까”
“한번 꼬투리 잡힌 일은 녹차처럼 우려먹고 또 우려먹기”
난 그를 향해 웃어 주었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필살기인 귀여운 웃음을 보였다
하지만 그는 담담하였다
“다 먹었으면 그만 나가죠”
이 사람에게는 나의 필살기도 통하지 않나 보군..
분식집에 나오니 눈이 다시 내리고 있었다
“와 눈 다시 내리네, 강민한씨 눈 와요 눈, 우리 눈 구경 좀 하다가 가요”
분식점 바로 앞에 있는 초등학교 안 운동장으로 가서 눈을 맞을 준비를 하였다
양 팔을 벌리고 얼굴은 하늘을 쳐다보며 눈을 감았다
“한지유씨 지금 뭐하는 겁니까”
“느껴봐요”
눈을 감고 있었지만 그는 분명 날 또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쳐다 보지말고 강민한씨도 눈 오는 걸 느껴 봐요 이 눈을 보려면 다시 1년을 기다려야해요”
“한지유씨 이럴 때 보면 어린 애 같습니다”
“제가 베이비페이스 라서 그러는 거예요, 아 강민한씨 오늘 소원 빌었어요?”
“소원을 왜 빕니까”
“강민한씨가 본 첫 눈 아니예요?”
“맞습니다”
“그럼 소원을 빌어야죠, 원래 처음으로 눈 봤을 때 소원을 비는 거예요 지금이라도 빨리 빌어요”
“됐습니다”
“또 무게 잡으시네 그러지 말고 날 따라 해보세요 손을 이렇게 모으고 눈을 지긋이 감는 거예요
자 그리고 소원을 비는 거예요”
강민한은 날 따라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이..이렇게 말입니까”
“은근히 시키는 대로 잘 한단 말이야? 이제 소원을 비세요”
그는 소원을 빌고 난 뒤 눈을 떴다
“그런데 이거 누구한테 비는 겁니까”
“저도 몰라요”
“누구한테 비는 지도 모르면서 왜 소원을 빌어라고 한겁니까”
“음.. 그럼 강민한씨는 나 한테 비세요 소원”
“내가 이루어 줄 수는 없겠지만 그냥 근본도 모르는 신 한테 비는 소원이 찝찝하시다니 그냥
내 이름을 갖다 붙여서 비세요 에이 내가 특별히 인심섰다”
"한지유씨 머리에 눈이..“
내 머리에 떨어 진 눈을 털어주려고 내밀던 그의 손이 내 머리에 닿지도 않은 채 끝이났다
“추운데 그만 가죠”
강민한이 먼저 발길을 돌렸다
넓은 운동장에 쌓인 흰 눈 위로 그의 큰 발자국과 그 뒤를 따라가고 있는 작은 나의 발자국이
생겼다
‘강민한씨 나 잠깐 이런 생각을 했어요 내 발자국이 강민한씨 발자국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우리가 나란히 걸어가면서 생긴 발자국이 되고 싶다고.. 그래도 오늘 하루는 내가 좋아하는 당신과 내가 좋아하는 눈을 함께 맞아서 난 기분이 좋아요 ’
그는 첫눈 처럼 나에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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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주말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