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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영 백서 음모사건

천하포무 |2007.11.23 11:29
조회 493 |추천 0

1801년 당시 조선 천주교회가  辛酉史獄과 그에 대한 대책으로 서양의 군사력을 요청하는 내용을 중국 베이징의 가톨릭 주교에게 보내려다 사전에 발각돼 압수당한 비밀문서로서, 흰 비단(가로 62㎝×세로 38㎝)에 썼기 때문에 "백서(帛書)"라고 부릅니다.

 

이 글을 쓴 천주교 신자 황사영이 능지처참 당한 것을 비롯해 1 백 여명의 천주교도들이 처형되고, 4 백 여명이 유배당한 사건을 기독교가 이 땅에 전해지고 최초로 진실을 왜곡한 역사라할 것 입니다.

황사영은 조선 최고의 지식인으로 꼽히는 다산 정약용의 조카사위이기도 한데, 다산도 이 사건 때문에 전남 강진으로 유배 당하였습니다.

지금부터 2백년 전의 국가음모사건이지만 개독교에서는 이것을 신앙의 자유을 찿기 위한 과정에서 순교한 사건이라하여 이들의 역적 행위를 정당화 하기 위해 끝임없이 역사 왜곡을 하고자 하는 것 입니다. 교회의 입장에서 교리에 쇄뇌 된자들이 자신을 낳아주고 길러주신 부모들도 사탄이라하여 죽음으로 몰아 가는 경우가 허다한 사례를 미루어 보면, "황사영 백서"에 연루 된 6인의 처형은 오늘 날 신앙의 자유가 넘처나는 현실에서도, 황사영 백서 사건 같은 국가 반란 음모 죄을 지은 사람은 사형을 집행하는 것이 국가의 법 입니다. "네가 20세가 되거든 나를 만나러 오너라. 내가 어떻게 해서든 네게 일을 시키고 싶다. 16세에 진사가 된 신동의 손목을 잡고 정조(正祖)가 한 말입니다. 임금의 옥수(玉手)가 닿았던손목에 붉은 천을 감고 다녔던, 장래가 촉망되고 영민한 청년 황사영. 그는 17세 되던 해에 개독교에 쇄뇌 되면서 양반 관료로서의 길을 포기하고, 기독교에  입교해, 신유(辛酉)박해(?) 무렵에는 교계의 핵심 지도자로 떠 올랐습니다.

황사영을 비롯한 외국 선교사 2인과 내국인 합하여 육인이 밀서를 작성하여 베이징(北京)  주교에게 보내기 위해 밀사를 보냈다가 국경 수비대에게 발각 되여 황사영 백서 사건이 조정에서 알게 되어 내용을 검토 한즉 그것은 반국가 음모의 내용이였든 것 입니다. 이 서한에서 황사영이 중국 북경 주교에게 보내려다 적발 된 내용은

▶개독교의 나라 서양제국은 조선 선교을

   위한 재정 원조해 달라

▶베이징 교회와의 긴밀한 연락하여 선교사

  들의 조선 입국 허용을 쉽도록 로마 교황의

  중국천자에 대한 압력 행사 요청을 위한

  서신을 보내달라

▶조선이 계속 신앙의 자유를 불허하면

  청나라의 한 지방으로 편입시켜 감독하게

  해야 하며,

▶서양의 군함 수 백 척과 5만 ∼ 6만명의

  군사 및 병력을 조선 파견 해달라  

이와 같은 내용은 200년 전의 사건이 아니라 현제에 이르러서도 한 종교의 선교를 위해 훈련된 군사와 군함 수 백척을 비롯한 병력을 보네여 조선을 중국의 변방으로 만들어 중국에서 통치하고 여호와를 신봉하는 국가를 만들자고 하면,  반역자로서 교수형을 시켜야하는 범죄 행위인 것 입니다. (우리나라 군사보다 많은 병력을 파병 해줄 것을 청원 한 것임)

이 같은 행위에 대하여 황사영의 장인이었던 다산 정약용(1762~1836)마저 황사영을 역적으로 매도하였으나  어느 얼빠진 교수란 자가 그 당시에는 황사영 등 박해받는 조선의 기독교 교도들이 끌어들일 만한 외세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선언적인 것을 뿐이다라고했듯이 교회는 이것을 미화하기 위해. 지금도 혈안이 되고 있습니다. 비록 선언적인 것이라 해도, 이것은 국가 존립을 흔들고자 하는 민중 봉기의 근원이고(우리교민이 단결하면 십자군이 우리를 도와 새 세상이 열릴 것이다) 라는 유언비어가 난무하는 것을 어느나라에서든 이것은 단속 할 것 입니다.

 

당시로서는 경천동지(驚天動地)할 반 국가음모 사건으로서, 황사영을 비롯한 가담자 육인을처행 하고 그에 연루되었거나 그의 가족 친치들은 당시의 국법에 따라 처벌을 받았을 뿐 기독교을 믿은다고 탄압하여 처벌 한 것은 아닙니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교회에서는 사실을 왜곡하여 교회를 박해하여 이들이 처형되었다는 유언비어를 유포하니 오늘날처럼 정보의 다원화가 아닌 시대에 살았든 무지한 백성들은 선교사나 먹회자들의 이야기를 믿지 않을 수 없어을 것 입니다.

황사영 백서 사건의 전말

백서 사건이 일어난 시기의 조선은 유교를 국교로 하면서 계급 사회가 국가 기반을 이루고있어습니다, 그러면서도 천민이거나 양반이거나 유교 사상에 무장 되여 있으면서도 한울님 하느님 같은 천신 사상이 뿌리 깊음을 알고 선교사들이 저들의 신 여호와만이 신 가운데 왕이며 왕중에 왕은 여호와이며, 여호와는 오직 한분이라는 뜻으로 하나 님이라 개명하여 부르게 된것입니다. 더욱이 이들 선교사들은 황사영과 같은 지식층의 사람들에게는 조선의 반대편 로마에서는 조선의 형제보다 더 많은 고통과 박해를 받았으면서도 형제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여호와를 믿었기 때문에 강대국이 되었으며, 그곳에 하나넘의 본부 교황청이 있으며 교황은 각 국의 임금을 파면 시키기도하고 임명 할 수도  있으며, 각 국에서 지원한 강대한 십자군도 있다는 이야기와 1059년

교황 <그레고리 7세>은 교칙으로 성직자 임명권을 발표하니 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4세는 교회의 힁포에 대항하여 사교회(社交會)를 개최하여 교황의 폐위를 결의 하였으나, 교황은 이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권위의 배경으로 1077년로마제국의 황제를 파문하여 자신의 권위를 과시한

이야기며, 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는 이탈리아 카노사에 있는 교황청 밖에서 눈이 내리는데도 눈 속에 무릎을 끓고 교황에게 용서를 빌어야 했든 이야기와 바이블에 기록된 바울은, 형제을 잡으로 다니든 포졸이였는데, 여호와를 믿고 전도한 놈이라고이야기 하면서, 오늘의 고통은 여러 형제들이 여호와를 진심으로 믿은지  아닌지를 가리기 위한 시험 단계이며 다음 단계에 이르면

여러 형제(?)들이 살아 있을 때 양반도 상것도 없는 하나넘의 나라가 도래 할 것이니 신심을 굳건히 하고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는 이들 먹회자들의 감언이설에, 유식한 사람이거나 글자도 모르는 무식한 천민 출신들거나 쇄뇌되지 않을 수가없는 것입니다. 교황이 권능은 이웃의 중국의 천자도 좌지우지 하는터에, 조선과 같이 적은 나라쯤은 생각만으로도 결정 될 수 있는 쉬운 일이라 생각하여 집회를 금하고 참석하는 것을 감시하는 조정과임금을 폐위시키기 위해, 군함 수 백 척과 군사와 병력을 보내 달라고 하는 것을 황사영만 그러한 것이 아니였다는 것은, 그들이 외국 선교사들의 감언이설에 쇠놰 되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조정은 백성들이 본래의 직분을 버리고 교회 생활에 빠져들어 유언비어을 유포하니 이를 단속하기에 이른 것이지 종교를 탄압한 것은 결코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이 때 처행 된 일백여명은, 조정에서 종교 탄압으로 이들을 처형 한것이 아니고, 대역 죄인을처형 한것임에도, 이를 왜곡하여, 이들의 죽음이 여호 전도하다가 조정의 탄압으로 순교 하였다면서 몇년 전에는 교황청으로 부터 성인으로 추대 된 헤프닝이 있어음을 기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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