핌 베어벡 감독이 이끄는 축구국가대표팀이 출범 4개월 만에 몹시 흔들리고 있다. 마치 망망대해에서 방향을 잃은 채 표류하는 난파선 같다.
베어벡호는 지난 6월 2006년 독일월드컵 직후 출범했다. 사실 베어벡 감독 선임과정에서 협회는 베어벡 감독이 감독으로서 실패한 이유, 독일월드컵에서 드러난 이해할 수 없는 경기운용의 원인 등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그를 감독자리에 앉혔다. 이유는 간단했다. 잘 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란다. 그리고 베어벡 감독을 선택하는 것이 협회 입장에서는 가장 손쉬운 카드였다. 게다가 팬들의 반응까지 좋았으니 협회로서는 다른 카드를 굳이 찾을 필요성이 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예감보다는 면밀한 분석과 치밀한 조사에 의해 인사를 해야하는 협회의 변명치고는 군색하기 이를 데 없다.
감독 선임 과정의 문제를 안고 베어벡호는 지난 8월16일 아시안컵 예선 대만 원정을 시작으로 지난 11일 시리아전까지 총 5경기를 치렀다. 성적은 2승2무1패다. 겉으로는 괜찮은 것 같지만 속은 형편없다. 2승은 FIFA 랭킹 154위 대만을 상대로 거둔 것일 뿐이다. 원정에서 3-0으로 이겼고 홈에서는 8-0으로 승리했다. 어떻게 보면 승리가 당연한 경기였다.
그리고 대표팀은 가나에게 완패했다. 가나는 세계 정상급 미드필더를 갖춘 팀이다. 독일월드컵에서도 16강에 올랐고 브라질에 패해 8강 진출에 실패했지만 경기 내용은 브라질보다 좋았다. 그런 팀이 고스란히 아시아로 왔고 일본에서 한차례 평가전을 치르면서 시차와 환경에 적응한 뒤 한국으로 건너와 경기를 치렀다. 그리고 우리 선수들은 23세 이하의 어린 선수들이 대부분이었다. 독일월드컵 직전 박지성 이영표가 뛰고도 1-3으로 완패했던 가나를 어린 선수들이 막기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가나전 패배는 결과면에서 만큼은 논외로 치자.
하지만 홈에서 열린 이란·시리아(FIFA랭킹 116위)전 무승부는 용납하기 힘들다. 이란은 한국 일본 사우디아라비아 등과 아시아 4룡으로 꼽히는 만큼 무승부가 그럴 수 있다고 치더라도 시리아전 1-1 무승부는 정말 어이없는 결과였다.
베어벡호가 치른 경기는 내용에서도 문제가 많았다.
대만원정에서는 후반 초반 2-0으로 이기자 안정환을 빼고 김두현을 투입했다. 공격수를 빼고 미드필더를 넣은 것은 무슨 뜻인가. 이대로 굳히겠다는 의미가 아닌가. 이런 선수교체는 결국 이을용이 난생 처음 스리톱의 왼쪽 윙포워드로 이동하는 상황을 초래했다.
가나전은 어떤가. 가나전을 설기현·이영표·김남일·조재진 등을 빼고 23세 이하 선수들을 중심으로 치른 것은 칭찬할 만한 결정이었다. 아시안게임을 2개월 앞둔 베어벡 감독으로서는 23세 이하 선수들을 테스트해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시안게임 멤버가 아닌 차두리는 왜 투입했는가. 아시안게임 멤버 오범석을 넣어야 옳지 않았는가. 가나전이 평가전이기 때문에 선수들을 테스트해보고 싶었다는 게 베어벡 감독의 말이었다. 가나전이 진짜 승리에 연연하지 않은 테스트였다면 왜 후반은 뻥축구로 일관했는가. 혹자는 "가나가 워낙 강해 어떻게 할 도리가 없기 때문에 뻥축구를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베어벡 감독을 옹호한다. 물론 한편으로는 일리 있는 소리처럼 들린다.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것이 뻥축구가 아닌 짧고 빠른 패스에 의한 플레이라면 되든 안되든 우리가 원하는 플레이를 끝까지 시도해야하지 않은가. 앞으로 가나와 같은 팀을 만나면 계속 뻥축구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가나전에서 한번 더 짚고 싶은 부분은 박주성이다. 박주성은 이날 두번째로 A매치를 치렀다. 포백의 왼쪽 수비수였다. 그런데 박주성은 전반 극도로 부진했다. 가나에게 골을 허용하기 직전 헛발질을 하면서 실점의 빌미가 됐고 지역 방어가 근간인 포백의 개념을 잊고 중앙으로 지나치게 이동하면서 측면 공간을 많이 내줬다. 전반이 끝날 무렵 이미 그는 에너지가 다 닳았기 때문에 하프타임 때 교체가 예상됐다. 하지만 베어벡 감독은 하프타임 때 꺼내든 교체카드는 김동진 아웃, 김영철 인이었다. 결국 박주성은 후반 23분 부상을 당하면서 아웃됐고 그 자리를 김치우로 메웠다. 김동진을 시리아전에 뛰게 하고 싶었다면 박주성 대신 김치우를 투입하고 김동진 대신 김영철을 넣는 게 더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시리아전에서는 극도의 수비축구가 또다시 재현됐다. 1-1로 비긴 가운데 추가골이 터지지 않자 김남일 김정우 2명의 수비형 미드필더들에게 역습을 막기 위해 수비에 치중하라고 한 것이다. 베어벡 감독은 시리아의 역습으로 인한 패배가 두려웠던 모양이다. 한국이 홈에서 시리아를 상대로 수비축구를 한다? 베어벡 감독의 입장에서는 무척 실리적인 선택이었지만 팬들의 일반적인 관점에서 보면 어이없는 전술이었다. 경기 막판 우리선수들이 공을 돌릴 때, 경기가 무승부로 끝나는 순간 붉은악마석에서 나온 야유는 베어벡 감독의 전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뜻이 아닌가.
경기 후 인터뷰에서 베어벡 감독은 "원톱 공격수 조재진을 지원해줄 미드필더가 없어서 고립됐다"고 했다. 하지만 이런 현상은 베어벡 감독 스스로가 초래한 것이다. 베어벡 감독이 김남일 김정우에게 수비를 하라고 지시한 만큼 조재진의 뒤를 받칠 선수는 김두현 뿐이었기 때문이다. 김두현도 혼자서 중원을 지키고 뒤에서 받쳐주는 선수가 없다보니 힘들었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상대가 워낙 수비적으로 나와 수적으로 부족해 골을 넣지 못했다면 우리 공격수의 숫자를 1명이라도 늘리는 게 상식적인 선택이 아닌가.
시리아전에 출전한 우리 선수들의 의욕 상실과 정신적 해이도 지적하고 싶다. 일부 선수들은 열심히 뛰었지만 그렇지 않는 선수도 많았다. 의욕이 없고 정신적으로 느슨해졌다는 것은 연이은 실수로 나타난다. 쉬운 볼을 컨트롤하지 못해 아웃시킨 것, 슈팅이 번번이 빗나간 것, 패스 미스가 많이 나온 것이 얼마나 많았는가. 이 모두가 선수들이 정신적으로 무장을 잘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선수 개개인적으로 아주 조금씩 느슨해진 정신상태는 전체적인 플레이의 수준 저하, 집중력 부족 등으로 이어지면서 어이없는 실수로 이어지게 마련이다(성남처럼 플레이오프 진출권을 따낸 강팀들이 후반기 초반 경기 주도권을 갖고도 골포스트만 맞힌 채골을 넣지 못하고 패하는 것도 이 같은 이유다)
일부 선수는 이런 점을 인정했다. 김남일은 "좀더 공격적으로 뛰어야했다. 본선에 가면 더 열심히 하는 의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영표도 "시리아가 우리를 두려워하게 만들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해 죄송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어떤선수들은 "컨디션 조절을 못했다" "훈련기간이 부족했다" "공이 자꾸 이상하게 튀었다"는 변명을 하기도 했다. 프로선수가 일주일 동안 쉬면서 컨디션 조절을 하지 못했다는 것은 결국 스스로 잘못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시리아와 싸우면서 얼마나 오랫 동안 소집훈련을 해야하는가. 시리아선수들은 잘 컨트롤하는 공을 왜 우리 선수는 못한다고 하는 것인가. 결국 시리아전 졸전의 원인은 기량이 아니라 정신이었다.
프리미어리그에서 뛰는 선수들, 월드컵을 몇번씩 경험한 선수들이 시리아같은 팀을 상대로 최고 경기력을 발휘하기는 힘들다. 내가 설기현 이영표라고 해도 아마 그럴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중요한 것은 선수들이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동기부여를 하는 것도 감독의 몫이다.
세계적인 명장들은 뭔가 특별한 게 있다. 전술능력이 탁월하다든지, 용병술이 뛰어나다든지, 선수를 휘어잡는 카리스마가 강하다든지, 선수들의 심리를 잘 이용한다든지 하는 것을 말이다. 베어벡 감독이 경기를 앞두고 만반의 준비를 하는 것은 어느 감독 못지 않게 치밀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그가 명장이 될 수 없다. 결정적인 상황에서 승부수를 던질 수 있는 게 바로 명장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