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 홍상수의 저력이 무엇인지를 재확인시킨다. 전작 가 드라마와 인물을 맹목적으로 쫓아가야 하는 영화 내러티브 관습을 통렬히 무너뜨렸다면 은 드라마와 현실을 의도적으로 겹치며 그 유사성과 차이를 교묘하게 배치한다. 홍상수에게 있어 현실과 드라마의 간극은 영화 속 상황의 미끄러짐만큼이나 얇다. 자신의 영화를 연상시키는 요소들을 군데군데 흘려놓은 이 영화에서 홍상수는 현실의 소여를 자유자재로 요리하는 경탄할 만한 화술을 구사한다. 서울 시내에서 가장 평범한 장소들을 오가는 인물들은 픽션과 현실 사이를 자유롭게 오간다. '오간다'는 건 구분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전작들에서 다소 거리를 두고 인물들을 관찰했던 홍상수는 에서 인물과의 거리를 조금 좁혔고, 영화와 연극이라는 직접적인 소재를 택하여 픽션과 현실을 미스터리한 방식으로 연결해 놓았다. 은 '홍상수의 프로덕션 시스템'을 실험한 것으로도 남다른 의미가 있다. 가 와이드 릴리즈를 통해 자신의 영화 중 최고인 3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뒤, 홍상수는 자신의 영화사 '전원사'를 차리고 저예산 작가 영화의 생존 방식을 실험했다. 많은 관객과 함께하지 못했음에도 은 그가 축적해 왔던 영화적 패턴의 결정판이라 부를 만하다. 인간의 말과 행동에 숨겨진 기이한 패턴들, 반복과 전염, 의도적인 모방과 그 실패담은 홍상수의 영화를 즐기는 하나의 '도식'을 형성한 듯하다.
유머러스한 제목과 ‘정말이지 착하게 살고 싶었답니다’라는 카피만으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던 는 2005년 ‘올해의 히트 상품’이었다. 감독의 명성이 티켓 파워와 연결돼 하나의 '브랜드'를 형성할 수 있음을 보여 준 이 영화를 두고 설왕설래가 많았던 건 사실이다. '로 시효가 다한 복수 시리즈를 무리하게 연장한 동어 반복'이라는 게 비판자들의 요지였다. 엄청났던 사전 관심도와 공개 후 분분했던 평가, 전작 가 불러일으킨 비평적, 대중적 상찬, 그리고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이라는 막강한 프리미엄 때문에 는 되려 역차별을 받은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는 마냥 극적이고 대중적인 호소력을 갖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차라리 이 영화는 박찬욱에 대한 모종의 오해, 즉 그가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소재를 영화광적 취향으로 요리하는 '대중 작가'라는, 오해를 불식시킬 만한 성취를 보여 준다. 박찬욱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는 과격하고 괴이한 문법에 따라 움직이고, 무엇보다 구조적이다. 한국영화 관객들이 그의 영화에 호응하는 이유는 이러한 이미지의 수사학이 대중적 소통 방식을 개척해왔기 때문이다. 충격의 몽타주와 클로즈업, '복수'의 테마를 요약하는 쉴 새 없는 카메라 움직임으로 박찬욱은 '정석적이지 않은' 영화 이미지의 마력을 증명해낸다. 배급의 힘을 업었다고 하더라도 이런 불친절한 영화가 30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다는 건 정말 이상한 사건이다. 그러므로 는 복수 3부작의 완결인 동시에 다양한 이미지의 정보를 데이터화한 박찬욱 형식 미학의 완성이기도 하다.
자신의 행복추구권을 지키려는 한 여성의 열정적인 몸부림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는 정지우의 전작 와도 맥락이 닿아 있다. 가 반여성주의로 매몰찬 비난을 받았던 것에 비해 는 주체적 여성을 그렸다는 긍정적 평가를 끌어낸 것도 흥미롭다. 첫사랑의 추억이나 아련함을 머리에 그리고 극장을 찾은 관객들에게 의 생경한 이야기는 배신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 영화에 대해 드라마가 빈약하다느니, 내러티브가 없다느니 하는 비판은 어울리지 않는다. 오인과 그릇된 믿음으로 헛다리를 짚는 관객의 영화 보기는 결정적 순간 거대한 혼란을 야기한다. 극중 인물이 느끼는 열정과 혼란을 전이시키는 이 같은 화술은 대단히 급진적이다. 는 이렇듯 과격한 방식으로 한국영화 내러티브 관습에 파열구를 냈다. 내러티브 영화를 주관하고 있던 오랜 믿음, 그럴듯한 인과율과 캐릭터, 반전 따위의 법칙을 희롱하는 는 구조와 감정을 통한 대안적 이야기체 영화의 어떤 경지를 보여 준다. 그런 이유로 의 흥행 참패는 곱씹을 만한 사건이다. 이 영화에 대한 저주에 가까운 냉대는 어디서 기원하는 것일까? 올해 한국영화 중 가장 야심차고 실험적인 시도 중 하나였던 이 영화가 철저하게 대중의 외면을 받았다는 사실로부터 한국의 영화 관객들이 얼마나 이야기체 영화의 관습에 물들어 있는가를 역설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영화로 이야기하는 영화'. 이명세의 (이하 )는 단순하기 짝이 없는 줄거리를 휘황찬란한 비주얼의 향연으로 장식한다. 이명세 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과잉의 영화였던 는 영화 언어의 표현력이 어디까지 확장할 수 있는가를 눈치보지 않고 실험한다. 색채와 사운드, 액션, 운동, 편집, 스타 아이콘까지 활동사진적 이미지의 매력을 되찾기 위한 이명세의 투지는 아무도 못말릴 결과를 초래했다. 작가주의 미명 하에 산업 논리를 무시한 '제2의 '이라고 분개하는 사람도 있었고 '장인정신이 빚어낸 형식 미학의 최고봉'이라는 찬사도 있었다. 시대의 유행 트렌드와 은밀한 상업적 고려를 앞세운 기획 상품들 틈새에서 '순수 영화의 쾌락'을 추출할 수 있다고 믿는 이 과대망상적 영화감독은 타협하지 않는 장인적 수공 정신으로 보고 듣고 감각하는 진짜 영화를 만들어냈다. 이명세 미학의 진화라는 관점에서도 는 으로부터의 퇴보가 아니다. 에서 거의 대사를 사용하지 않고 무성영화에 가까운 화면과 액션을 선보였던 이명세는 에서 시청각적인 감각을 극대화하기 위해 모든 걸 희생시킨다. 여기서는 장르도 드라마도 캐릭터도 모두 소멸하고 만다. 이명세에게 그들은 취사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영화의 유토피아를 형상화한 는 부유하는 한국의 영화 미학에 일종의 질문을 던졌다.
진부하지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진부하지만 시침 뚝 떼고 '신파'를 예찬할 수 있는 영화가 많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신파는 여전히 유의미한 사랑의 시학일 수 있는가? 은 이런 질문에 답한다. 그 영화는 무엇이 정통이고 무엇이 사이비인가를 극명하게 보여 준다. 신파의 핵심은 감정의 전시와 과잉이다. 과잉은 신파의 전제 조건이지만 보다 중요한 건 그 맥락이 '삶의 본질'과 맞닿아 있느냐에 있다. 극적인 상황 만으로 눈물을 구걸한다면 신파의 본질과 거리가 멀 것이요, 우리가 사는 세계의 정수에 가까이 간다면 그 존재 가치는 충분하다. 은 우직한 농촌 총각 석중의 심성처럼 잔재주 부리지 않는 정공법으로 신파 멜로드라마가 줄 수 있는 최대치의 감동을 끌어낸다. 죽음이라는 장벽을 극복한 지순한 사랑은 쉰내가 풀풀 나는 멜로드라마의 단골 메뉴지만 애써 세련을 가장하지 않는 이 영화의 직설화법은 울음의 카타르시스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 감독의 것이다. 욕망이 거세됐다고 간주되는 70대 노인들의 로맨스에 초점을 맞춘 박진표의 전작이 그랬듯이, 은 속화된 사랑의 성립 과정을 넋 놓고 따라가게 만든다. '쿨함'의 미덕이 휩쓰는 시대에 이 같은 순정주의의 위력을 재확인케 만들었다는 점만으로도 이 영화의 가치는 충분하다. 죽어도 좋은 로맨스를 설파하는 석중과 은하는 우리 시대의 불멸의 연인이다.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