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朝鮮帝國 第3世 檀君 嘉勒壬儉)
개천(開天) 1716년: 가륵단제(嘉勒檀帝) 1년(기해년) B.C 2182, 쥬신제국의 제3세 단군에 즉위한 가륵임검은 즉각 맏아들을 황태자로 세우고, 아우 가록(嘉綠)을 사달(斯達:阿斯達)의 왕으로 임명하여 구월산(九月山)의 장당경(藏唐京) 임지로 떠나게 하였다.
5월에 임검이 삼랑(三郞) 을보륵(乙普勒) 박사를 불러 신왕종전(神王倧佺)의 도를 물었다. 을보륵이 아뢰기를,
‘종(倧-上古神人)은 나라에서 뽑는 것이며 전(佺-神仙)은 백성들이 천거하는 것으로 7일마다 삼신에게 제를 올립니다.
삼홀(三忽)은 전(佺)이 되고 구한[九桓]은 종(倧)이 되는 것입니다. 신시(神市) 개천의도(開天之道) 역시 신의 가르침을 베푸는 것으로 나를 알고 내 마음을 비워 공(空)이 되면 사물은 인간세상의 복으로 존재하게 됩니다. 임검은 하늘을 대신하는 천하의 지존으로 백성들을 위하여 병을 다스리고 생명을 보호해주며 사람들이 올바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스무하루(3x7일)마다 사람들에게 계(戒-반복하여 주의를 줌)를 행하고 이로부터 전계(佺戒)를 얻게 됩니다. 이로서 하늘의 정기가 삼광(三光)오정(五精)으로 화합하고 이로서 있게 된 현묘(玄妙)한 광명은 사람 등을 서로 돕게 됩니다. 커밝한[居發桓] 한웅님은 이렇게 구한[九桓]을 하나로 감화시켰습니다.’
가륵 2년, 경자년(B.C 2181): 임검이 수두[蘇塗]를 많이 세워 삼륜구서(三倫九誓)①를 가르쳤다. 이 해 봄, 을보륵박사가 임검의 특명으로 신치[神誌]의 글②을 좀더 개량시킨 국문정음(國文正音) 38자를 만들어 바쳤는데 이를 가림토③라고 한다.
가륵 3년, 신축년(B.C 2180) 가을: 태수관(太修官) 고설(高契)이 국사(國史) 배달유기(倍達留記)를 편찬하였다. 이것은 동양사학의 원조로서 하늘의 계명과 교훈, 임검의 가르침, 도덕과 정치, 법률, 풍속 등을 다룬 책이었다.
가륵 6년, 갑진년(B.C 2177): 열양(列陽:遼東)의 욕살(褥薩: 太守) 색정(索靖)이 백성들의 신임을 잃음으로 약수(弱水-合黎山근처)로 유배시켰다가 잘못을 뉘우침으로 죄를 용서하고 그곳 흉노(匈奴)의 땅에 봉하였다. 또 애묘(愛苗)씨가 무도(無道)하여 군사를 파견하여 실단(悉段)에서 그를 토벌하였다.
가륵 8년, 병오년(B.C 2175): 강거(康居)가 반란을 일으키자 정부는
토벌군을 파견하였다. 강거가 이길 수 없음을 알고 멀리 도망가자
토벌군은 지백특(支伯特-티베트)까지 추격하여 기어코 토멸하였다.
여름 4월: 임검이 불함산(不咸山) 일대를 돌아보고 백성들의 살림살이가 넉넉하지 못함을 깨닫고 세금을 살림수준에 맞게 차등조정 하였다.
가륵 10년, 무신년(B.C 2173): 두지주(豆只州)의 예읍(濊邑)이 반란을 일으키므로 여수기(餘守己)를 파견하여 그 수괴, 소시모리(素尸毛犁)의 목을 베었다. 소시모리의 후손인 협야노(陜野奴)는 바다로 도망하여 삼도(三島:日本)를 점령하고 그곳에서 천황(天皇)노릇을 하였다.
가륵 13년, 신해년(B.C 2170): 중화지역으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귀화하여 들어왔다.
가륵 20년, 무오년(B.C 2163): 임검이 천하를 순시하며 창해(滄海)까지 다녀왔다.
가륵 45년, 계미년(B.C 2138): 가륵임검이 45년 동안 나라를 안정시키고 잘 다스리다가 마침내 세상을 떠나셨다.
① 삼륜구서: 삼륜(三倫)은 애(愛), 예(禮), 도(道)를 말하고 구서(九誓)는 효(孝), 우(友), 신(信), 충(忠), 손(遜), 렴(廉), 의(義), 지(知), 용(勇)이다.
② 신치의 글: 한웅천황때 신치[神誌-글의 창조와 사관을 담당하는 벼슬] 혁덕(赫德)이 만든 녹도문(鹿圖文)을 쥬신제국때 이 벼슬을 존속시켜 글을 일차 개량시켰으나 아직도 글이 불완전하여 나라에서는 지속적인 개발을 시켰다.
③ 가림토: 가림다문(加臨多文)이라고도 한다. 일반적으로 세종대왕이 창조했다고 알려진 한글의 원형이다. 가림토는 이후에도 몇 차례에 걸쳐서 더 개량되고 재창조되고 나서야 오늘날 인간이 창조한 글 중 가장 훌륭하다는 위대한 한글이 완성되게 된다.
신치[神誌]글자와 창힐(倉)글자
우리 민족의 조상들은 역사를 창조하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벌써 우리의 소리말을 기록할 수 있는 문자를 만들어내기 위하여 부단한 노력을 계속해왔다.
신시(神市)배달국 커밝한[居發桓] 천황의 명령을 받고 만든 신치 혁덕의 녹도문을 시작으로 하여 을보륵박사의 가림토 등 수차례에 걸쳐 개량과 재창조를 거듭하며 현대 한글로 완성되어갔다. 그러면 신치글자란 무엇이고 신치란 또 무엇일까?
먼저 신치를 살펴보면 삼국유사(三國遺事) 권1(卷一)에는 신시(神市), 삼국유사 권3에는 신지(神誌), 후한서-동이전(後漢書-東夷傳)에는 신지(臣智), 진서-동이전(晋書)에는 신지(臣芝), 그리고 삼국지(三國志), 위서-동이전(魏書-東夷傳)에는 신지(臣智)로 하여 기록자마다 신치에 관한 한문자의 표기를 달리하고 있다.
그러면 神市, 神誌, 臣智, 臣芝는 각각 다른 의미를 갖는 벼슬들인가? 바로 이점이 소리글로만 표현되어야할 소리말을 엉뚱하게 뜻글인 한문자로 기록할 때 발생할 수밖에 없는 비극인 것이다.
이제 한자의 뜻은 전부 무시하고 우리의 옛말을 찾아 그 본래의 뜻을 알아보기로 하자. “신”은 “큰”이라는 뜻이고, “시, 지”의 원래 발음은 “치”로서 왕이나 통치자, 혹은 장관 등의 지배자를 말하는 것이다. 결국 이두(吏讀)④식 발음의 “신지”는 우리말 “신치”를 표현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④ 이두: 한자의 음과 뜻을 이용하여 우리말을 적는 방법으로 관리들의 글이다.
그러면 신치의 녹도문이나 가림토는 어떻게 생겼을까? 우리나라 옛글의 흔적은 뜻밖에도 여러 경로를 통하여 찾아낼 수 있다. 우선 해동죽지(海東竹枝)나 해동역대명가필보(海東歷代名家筆譜)에 신치글자들이 4면에 걸쳐서 16자가 소개되어있는데, 이것이 영변지의 신치전에 “고조선신지자(古朝鮮神誌字)”라면서 기록해 놓은 것들이다.
소개된 창힐글자들은 만주의 요령성 여대시 백람자 윤가촌의 무덤들에서 나온 유물들에 의하여 다시 확인되었다. 그럼 창힐(倉?)글과 신치글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창힐의 한자 의미를 풀어보면 “창(倉-푸를 창)”과 “힐(?-곧은목 힐)”의 두자로 “푸른 나라” 혹은 “푸른 고장”이 되어 푸른 언덕이라는 뜻을 가진 치우천황의 옛땅 청구(靑丘-푸른언덕)를 가리키고 있음을 알게 한다.
지금까지 본문을 정독한 독자들이라면 헌원황제가 청구땅을 방문하여 자부선생(紫膚先生)으로부터 삼황내문경(三皇內文經)을 받아간 사실을 알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중국의 고기(古記)인 포박자(抱朴子)에도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므로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중국의 옛기록들은 창힐을 황제의 사관(史官-기록관, 서기관)이라고 하니 황제가 우리의 옛글로 쓰여진 삼황내문을 가져가며 옛글(신치문자)도 중국에 전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이것이 소위 창힐의 새 발자국 글(倉?鳥迹書)⑤이라 하여 여러 곳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⑤ 중국의 섬서성(陝西省) 백수현(白水縣) 사관향(史官鄕)에 “창성묘(倉聖廟)”라는 창힐의 사당이 있는데 그 안에 창힐 새발자국 글자비(倉?鳥迹書碑)가 있고, 서안시비림(西安市碑林)에도 28자의 옛 글자(창힐글자-녹도문)를 새겨놓은 비(碑)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