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하, 항우(項羽)를 무너뜨리고 천하를 통일한 한(漢) 고조(高祖)도 문무백관의 배례(拜禮)를 받고서야 비로소 황제가 된 것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천하의 주인이 되셨지만 아직도 사람들 중에는 폐하를 알지도 못하는 자가 즐비하다고 합니다. 폐하께서는 백성을 생각하고 나라의 살림을 염려하는 뜻에서 즉위식을 검소하게 치르셨지만, 지금 와서 보면 이는 백성으로 하여금 황실의 위엄을 느끼지 못하도록 한 바 있어 후회되는 일입니다. 이제 강토는 평정되었고 백성은 안정되었으니 마땅히 천하에 폐하의 위명(威名)을 알리는 제례(祭禮)를 올려야 할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제례라?"
"그러하옵니다. 이제껏 유례가 없었던 대규모 제례를 올려 하늘에 천자(天子)로서의 할 도리를 다하시고 만천하에 폐하의 자애를 베푸셔야 할 줄로 생각되옵니다."
"듣고 보니 그럴듯하도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라. 기왕 할 바엔 이제껏 유례가 없었던 규모로 하라."
관인(官人)들은 황제의 명에 따라 이제껏 유례가 없었던 대규모 행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제례에는 무엇보다 선례가 중요하다. 과거 삼황오제(三皇五帝)는 하늘에 어찌 제를 올렸는지 철저히 검증하여 비록 사소한 것이라도 예를 어기는 일이 없도록 하라!"
예부상서(禮府尙書) 사마순의(司馬巡意)의 지시를 받은 사관(史官)들이 제례에 관한 과거의 기록들을 면밀히 검토하기 시작했다. 문제의 발단이 된 것은 한 사관이 찾아낸 상서(尙書)라는 문서였다.
'요(堯) 임금을 이은 순(舜) 임금은 즉위에 즈음해 먼저 예를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겨 동방(東方)의 군자국(君子國)에 사신을 보내 인사를 올렸다.'
사관은 별 뜻 없이 자신이 찾아낸 이 기록을 위에 올렸고 예부에서도 과거의 선례를 존중한다는 뜻에서 이 문서의 기록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예부의 계획은 양견의 분노를 폭발시키고 말았다.
"동방의 군자국이라고? 동방의 군자국이란 어디를 말함이냐?"
양견의 심상치 않은 기색에 놀란 예부상서 사마순의는 입을 꾹 닫고 말았다.
"왜 대답이 없느냐? 동방의 군자국이 어디를 말하는 건지 묻고 있다."
황제가 재차 묻는 바람에 사마순의는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아마도 옛 조선(朝鮮)을 말하는 듯싶습니다."
"조선? 짐은 그런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는데..."
"오래전 동방에 있던 나라입니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나라란 말이냐?"
"예. 현재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신라(新羅)가 바로 옛 조선에서 파생된 나라들입니다."
"그럼 그들 세 나라가 동방의 군자국이란 말이냐?"
"그 삼국 가운데 옛 조선의 적통을 이었다고 자부하는 국가는 바로 고구려입니다."
"푸하하하!"
신하들은 모두 양견의 광소에 겁을 집어먹었다. 양견은 사마순의를 노려보며 잔혹한 명령을 내렸다.
"여봐라! 저 예부상서 딱지를 달고 다니는 사기꾼 녀석의 혓바닥을 잘라라."
양견의 명령을 받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친위병들이 달려들어 사마순의의 멱살을 우악스럽게 나꿔챘다. 예부상서 사마순의는 안색이 파랗게 질려 울부짖었다.
"폐하! 이건 제가 지어낸 게 아니라 역사서에 분명 있는 사실이옵니다. 제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사옵니다."
"분명히 보았다구? 그럼 저놈의 눈알까지 뽑아버려라!"
양견의 분노는 엄청났다. 그는 한참이나 혼자 광소를 터뜨리다 문무백관을 향해 무시무시한 음성을 내뱉었다.
"내가, 이 양견이 한평생을 바쳐 중원을 통일한 이유를 아는 사람이 있는가?"
양견의 물음에 아무도 대답하는 자가 없자, 그는 다시 한번 광소를 터뜨렸다.
"천자! 바로 천자가 됨이 아니더냐? 하늘의 아들 말이다."
"폐하! 폐하께서는 누가 뭐래도 천자이십니다."
"그러하옵니다!"
"그렇다면 순 임금이 동방의 군자국에 사신을 보내 예의를 차렸다는 것은 무엇이냐? 그것이 상서의 기록에 있다는 것 아니냐? 게다가 고구려가 그 군자국을 이었다고? 그렇다면 이제 대수(大隨)의 황제인 나도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천제(天祭)를 지낸다고 인사를 올려야 한다는 얘기냐!"
신하들은 쥐죽은 듯 잠잠했다.
"그 상서라는 문서의 해괴한 기록을 찾아낸 사관을 당장 내 앞으로 끌고 오너라!"
곧바로 사관이 끌려오자 양견은 평소의 표정을 회복하고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겁먹지 말고 아는 대로 대답하라!"
그러나 사관의 목소리는 떨릴 수밖에 없었다.
"화, 황공하옵니다."
"과연 과거의 기록에 그런 것이 있더냐?"
"그러하옵니다. 틀림없이 있사옵니다."
"그렇다면 그 군자국의 이름은 무엇이냐?"
"조선이라 하옵니다."
"조선이라? 그 나라가 그리도 오래되었단 말이냐?"
"그러하옵니다. 요순시대부터 중원과 교류가 있었다 합니다."
"그 조선이란 나라가 정말 실재했던 거냐? 중원을 제외한 모든 지역에 야만인들만 득시글거릴 당시, 순 임금이 사신을 보내 인사를 차렸을 정도로 나라꼴을 갖추고 있었다는 얘기냐?"
"그러하옵니다."
"한심한 녀석, 어디 세상에 믿을 수 없는 종이쪽지가 한둘이더냐! 그 상서인지 뭔지 하는 것에서 동방의 군자국 운운하는 구절을 찢어내 없애 버려라. 어디 동이족(東夷族)의 소국 따위가 아득한 옛날부터 내려왔단 말이냐!"
사관은 몸을 떨면서도 용기를 내어 양견에게 불복했다.
"폐하! 사서(史書)를 찢어낼 수는 없는 일입니다."
"뭐라구! 이 발칙한 놈. 여봐라. 저놈의 혀를 뽑아라!"
양견의 명령에 따라 군졸들이 달려들어 사관을 끌고 나가려 하자, 사관은 발버둥을 치며 외쳤다.
"폐하, 저 하나는 죽여 입을 막을 수 있고 상서는 찢어버릴 수 있겠지만, 역사는 손바닥으로 가린다고 묻어버릴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조선이란 나라는 분명 실존한 나라이고 고구려는 조선의 뒤를 이은 동방의 대국입니다."
"저 놈이 실성하여 미친 소리를 늘어놓는구나. 아무래도 저 놈은 우리 수나라의 사관이 아니라 고구려에서 보낸 첩자일지도 모르겠구나. 그 상서인지 뭔지 하는 정체불명의 종이쪽지 하나에 의지해 그런 주장을 하다니..."
"다른 기록에도 조선이 실재했다는 근거가 있사옵니다."
사관은 죽음이 임박했음에도 불구하고 양견 앞에서 자신의 주장을 굽히려 들지 않았다.
"다른 기록이라? 듣기 싫다. 모두 다 그런 정체가 불분명한 종이쪽지 아니더냐? 공자님이 인정한 전적이라면 몰라도..."
"그렇다면 바로 그 공자님이 인정한 전적으로 증명해 보일 수 있사옵니다."
"무슨 헛소리냐? 조선인지 뭔지 하는 나라가 중원의 비중 있는 서책에 언급되었단 말이냐?"
"그러하옵니다."
"만약 지어낸 말이라면 네 가족을 모두 사지 절단한 후 몸의 모든 구멍에 불에 달군 쇠꼬챙이를 꽂아 죽이리라!"
"무방하옵니다."
"네놈은 공자님이 인정한 어떤 서책에 그 조선이 언급되어 있다고 할 것이냐?"
"유학의 경전으로 증명하면 되겠사옵니까?"
"유학의 경전이라면 물론 믿을 만하다. 그러나 쓸데없는 경전도 더러 있을 터. 따라서 나는 천하가 인정하는 사서오경(四書五經) 중 하나라야 받아들이겠다."
"그러겠사옵니다."
양견이 사서오경 중 하나라는 무거운 조건을 달았음에도 사관은 조금도 굴하지 않고 꼿꼿하게 맞섰다.
"여보게. 시경(詩經)을 좀 갖다주게."
사관이 뒤를 돌아보며 자신의 수행원에게 부탁하는 소리를 듣고 조정의 많은 신하들이 크게 놀랐다. 사관이 말한 시경이란 서경(書經), 주역(周易)과 더불어 유학의 가장 중요한 3대 경전 중 하나가 아닌가! 여기에 춘추(春秋)와 예기(禮記)를 넣으면 오경이 되는 것이었다. 중원의 가장 훌륭한 고전으로 꼽히는 시경에 이 사관이 얘기하는 조선이라는 나라에 관한 언급이 있을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것은 양견도 마찬가지였다.
"시경이라면 서주에서부터 춘추시대까지의 시들을 모은 책이 아니더냐?"
"그러하옵니다. 공자님께서는 시경을 가장 중요한 고전으로 꼽았고 틈날 때마다 시경을 가르치는 걸 즐기셨습니다."
"그래, 그 시경에 네놈이 말하는 그 조선이라는 나라가 있다는 말이냐?"
"그러하옵니다."
사관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흘러넘쳤다. 잠시 후 동료가 가지고 온 시경을 손에 쥔 사관이 힘 있는 손길로 책장을 넘겨나갔다.
"폐하! 여기를 보시옵소서."
"이리 가져오너라."
양견은 시경을 건네받아 한참 살폈다. 사관이 지목한 것은 시경의 한혁편(韓奕篇)이었다.
"여기 나오는 한후(韓侯)라는 인물이 네가 얘기한 조선 사람이냐?"
"그러하옵니다. 조선에서는 그들의 지도자를 한(桓)이라고도 하고 단군(檀君)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한후가 조선의 통치자란 얘기냐?"
"그러하옵니다. 시경의 한혁편은 한후라는 인물이 서주(西周) 왕실을 방문했을 때 서주 왕실에서 그를 환대한 내용입니다."
"허면. 네놈은 이 한혁편을 가지고 한후가 조선의 통치자라고 단정하는 것이냐?"
"아니옵니다. 한(漢)대 사람인 왕부(王符)가 지은 잠부론(潛夫論)에 한혁편의 한후가 누구인지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있사옵니다. 한후는 기자조선(箕子朝鮮)과 위만조선(衛滿朝鮮)의 동쪽에 있던 나라의 통치자라 기록되어 있사옵니다."
"그 나라가 조선이라는 말이냐?"
"그렇사옵니다."
"시경에 기록된 이 내용들이 모두 사실이라는 말이냐?"
"그렇사옵니다."
양견은 이상할 만큼 조선이라는 나라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그것은 바로 고구려 대문이었다. 그는 중원을 통일한 후 중원의 각 지역은 물론 주변의 이민족들이나 번국(蕃國)들이 보내오는 조공에 매우 흐뭇해하고 있었는데, 유독 동북쪽의 고구려만 조공을 보내오지 않았다. 게다가 고구려 국왕은 일개 소국의 군주인 주제에 중원 대제국의 황제인 자신과 대등한 위치로 자리를 매기고 있었으므로 분통을 터뜨리고 있던 참이었다. 애써 고구려를 폄하하는 태도로 지내오던 그는 고구려가 조선이라는 오래된 나라의 후예라는 이야기를 듣자 미칠 것만 같았다.
"이것도 사실이냐? 서주의 국왕이 자신의 질녀를 한후에게 주었다는 이 망할 놈의 기록도?"
"그렇사옵니다."
"푸하하하! 이따위 쓰레기 같은 책은 불질러 버려라!"
양견은 극도로 자존심이 상했다. 학사 벼슬에 있는 도순국(陶純菊)이 아뢰었다.
"폐하, 방금 내린 명령을 거두어주옵소서. 시경은 고전 중의 고전이옵니다."
"으음..."
양견은 분노에 미쳐 자신이 실언했음을 깨달았다. 시경을 태운다면 자신은 천하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었다.
"시경을 제외한 나머지 종이 쪼가리들 중에서 조선 어쩌구 하는 내용이 나오는 것들은 모두 찢어버리거나 태워버려라. 그리고 앞으로는 내 눈에 그런 글자가 보이지 않도록 할 것이며, 내 귀에 그런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하라!"
"명심하겠사옵니다."
"그리고 저놈은 해가 지기 전에 죽여야 할 것이다!"
사관은 발버둥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두 눈을 부릅뜨고 양견을 노려보면서 당당한 태도로 끌려나갔다.
"고구려! 이 괘씸한 놈들. 너희가 감히 요순과 대(代)를 같이하는 놈들이라구? 내 이놈들을 가만두지 않고는 절대 천자라 일컫지 않으리."
編作對象原書
유현종 著「대제국 고구려」아침나라編(2001년版)
정수인 著「우리 민족의 자부심 고구려의 역사」새움編(2005년版)
김진명 著「살수대첩」랜덤하우스중앙編(2005년版)
정호일 著「천손왕국 대고구려」우리겨레編(2001년版)
이일우 著「영광, 대고구려」정신문화사編(2004년版)
이언호 著「연개소문」큰방編(2006년版)
서길수 著「동아시아 문명의 중심 고구려」사계절출판사編(1999년版)
한종호 著「마지막 영웅」지문사編(1999년版)
오재성 著「만주는 과거 우리의 역사 무대였다!」국사광복국민운동본부編(2002년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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