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 지도자들, 時代마다 오욕과 굴종의 기록 남겨
일제에 굴복해 ‘가미나다’ 向해 예배, 해방 후엔 매 정권마다 권력층과 하나 되니…
일제 폭압에 굴복 ‘신사참배’ 가담
지난 2006년 6월 젊은 소장파 목회자들이 모여 결성한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한목협)는 “일제 강점기에 신사참배한 일과 독재정권 시절에 권력층과 야합해 정의를 뒤엎기도 한 죄악에 대해 마음을 찢으며 참회한다”는 반성문을 내놨다. 한국 개신교가 행한 신사참배를 스스로 인정한 것이었다. 신사참배에 대한 개인적인 참회와 사죄는 있었지만 아직도 이 문제에 대해 공식적인 참회를 하지 않고 있다.

1943년 4월3일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일본 나라신궁을 참배하고 찍은 기념사진(사진=민족문제연구소 제공)물론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시작된 평양대부흥의 결과 기독교인이 급속도로 증가하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기도 했다. 또 민족의 독립에 앞장섰고 모진 탄압에도 꿋꿋하게 신앙의 절개를 지켰다. 특히, 1919년 3·1 운동 때 발표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기독교는 가장 많은 16명을 차지했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서도 친일 행위로 인해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오르는 등 친일파로 분류되는 오점을 남겼다.
일제의 폭압이 거세지자 한국 기독교는 결국 만행에 굴복하고 말았다. 1938년 초부터 교회에 대한 일본의 신사참배가 강요되기 시작했다. 교회 대표들, 총회원, 노회원들이 열을 지어 신사(神社)에 가서 신도교의 예배 대상인 일본의 신을 참배했다. ‘가미나다’라고 하는 이동식 신사를 교회당 안 동편에 두고 신도들은 그것을 향해 예배했다.
이들은 일본 신을 위해 기도했으며, 이 예배는 찬양과 손뼉, 예물 바치기, 황국신민서사낭독 등의 순서로 진행됐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는 십계명의 첫 계명을 버린 것이었다.
부일협력 “양심과 신앙 결핍”
시기상의 차이만 있을 뿐 천주교와 감리교, 성공회 등 대부분의 교파는 타협적 입장에서 일찍부터 신사참배를 인정했다. 장로교도 1938년 9월 제27회 총회에서 총독부의 강압에 못 이겨 결국 신사참배를 인정하는 결의를 하기에 이르렀다.
장로교가 1939년 제28회 총회에서 결성하기로 의결한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은 각 노회별로 지부 연맹을 만들어 부일 협력에 나섰다. 이 외에도 1942년 조선에 징병제 실시가 공포되자 중소 교파들이 ‘징병제 실시 축하 강연회’ ‘징병제도 실시 감사 강연회’ 등을 개최하기도 했다. 일제의 민족말살정책과 침략전쟁에 적극적으로 찬양하고 앞장섰던 목사들은 해방 후 참회하지 않았다.
현재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으로 참여중인 김승태(기장 세움교회) 목사는 “성경은 다윗과 바세바의 동침, 솔로몬의 우상숭배 등을 기록하며 반면교사로 삼고 있다”며 “당시 교회를 유지하려면 일제에 협력 안할 수 없었고 교세만큼 부일협력을 했다고 생각하면 맞다”고 설명했다. 그는 개신교 지도자들이 친일을 한 것에 대해 “양심과 신앙심 결핍”을 원인으로 꼽으며 “일제의 강압정책과 자신의 기득권 유지 욕망, 개인의 위기위식과 나약성, 역사의식과 민족의식 결핍이 결합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독재와 부정 지지
일제에 굴복당한 한국 기독교의 수치는 권력과의 야합으로 이어진다. 해방 이후 이승만 시대에 많은 목사와 장로들은 자유당 독재정권에 동원돼 국부 이승만을 추앙하고 영구집권을 위한 개헌과 3·15 부정선거에 앞장섰다. 교회는 또한 이승만 대통령이 1960년 4·19 혁명으로 물러나기 전까지 독재와 부정으로 얼룩진 이 대통령을 옹호하는 성명을 발표하며 지지를 보냈다.
이후 5·16 군사 쿠데타 당시인 1961년 5월29일 한국기독연합회는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한다. “금반 5·16 군사혁명은 조국을 공산 침략에서 구출하고 부정과 부패로 기울어져 가는 조국을 재건하기 위한 부득이한 처지였다고 생각하며 그 애국정신을 높이 평가하는 동시에 발표된 혁명 공약 실천에 있어서 과감하고도 신속한 모든 시책을 환영하는 바입니다…” 교회는 “우리는 자유를 희생하더라도 방종한 무리들이 숙정되는 것을 보고 싶다” 는 표현까지 사용했다.
기회주의에 편승해 권력을 찬양하고 반민주적인 군사반란을 지지했던 교회에 도덕적 분별력을 요구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1969년 연임만 가능했던 대통령 자리를 세 번 하겠다던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을 ‘대한기독교연합회’란 단체는 “개헌에 대한 박 대통령의 용단을 환영하며, 오늘과 같은 국제정세와 국내시국에서는 강력한 영도력을 지닌 지도체제가 필요하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권력과의 밀애 ‘국가조찬기도회’
이렇게 정권 친화적인 성향을 보였던 한국 기독교는 이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국가조찬기도회란 통로를 이용했다. 제31회 국가 조찬기도회 준비위원회 자료집에는 국가조찬기도회는 1965년 2월 미국 국회 조찬기도회 담당목사 하버슨 박사 등의 방한 시 이들의 제안과 김준곤 목사의 권유로 ‘국회조찬기도회’가 조직돼 매주 모임을 시작하게 됐다고 밝히고 있다.
1965년 2월27일 김종필 당시 공화당 의장과 김영삼 당시 민중당 원내총무, 정일권 국무총 리 등 20명 정도가

왜곡된 정교유착의 온상이란 비난을 받고 있는 국가조찬기도회 구 조선호텔에서 기도회를 가졌다. 이후 1966년 3월8일 구 조선호텔에서 최초의 국가조찬기도회가 ‘대통령조찬기도회’란 이름으로 열렸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의 불참으로 공식적으로 1968년 5월1일 ‘제1회 대통령조찬기도회’가 열렸다.
제1회 기도회 설교는 ‘박 대통령이 이룩하려는 나라가 속히 임하길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제2회 때는 ‘우리나라의 군사혁명이 성공한 이유는 하나님이 혁명을 성공시킨 것이다’란 설교가 이어졌다. 제6회 때는 “10월 유신은 실로 세계 정신사적 새 물결을 만들고 신명기 28장에 약속된 성서적 축복을 받을 것이다”라는 내용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변질시키는 역할을 했다. 또 신앙 없는 지도자에게 ‘모세와 같은 영도력’‘솔로몬과 같은 지혜’란 표현을 사용했던 부끄러운 역사가 있었다.
국가조찬기도회가 가장 비판의 도마에 오른 것은 1980년 8월6일 서울 롯데호텔에서는 ‘국가와 민족을 위한 조찬기도회’였다. 당시 경향신문은 이 조찬기도회는 전 위원장을 비롯한 상임위 13개 분과 위원장과 한국 기독교 교파 지도자 24명이 참석했다고 보도했다. 이날 한경직 목사가 설교하고 조향록, 김지길, 정진경 목사가 기도했다.
정진경 목사는 ‘국보위상임위의 전(두환) 위원장을 위한 기도’에서 “전두환 사령관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지도자가 되어 모세처럼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국민의 존경을 받는 지도자가 되게 해주소서”라고 기도했다. 당시 실황은 녹화돼 KBS와 MBC를 통해 생중계하는 것은 물론 점심과 저녁 두 차례에 걸쳐 녹화 중계됐다.
1980년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장을 지낸 정진경(신촌성결교회 원로) 목사는 최근 ‘목적이 분명하면 길은 열린다’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그날의 조찬기도회는 전두환 정권 홍보용 기도회였습니다.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이렇게라도 고백하니 마음이 편하고 이제는 여한이 없습니다”라는 심정을 밝혔다.
8월27일 전두환이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에 당선되자, 교회 지도자들은 9월30일 아침 신라호텔에서 다시 한 번 전 대통령 취임 축하 조찬기도회를 가졌다. 광주민주화운동 다음해인 1981년 5월14일에는 제13차 연례국가조찬기도회가 3부요인과 국회의원, 군 대표, 외교사절 등 1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불의한 정권 나팔수로 전락
장규식(중앙대학과 사학과) 교수는 ‘군사정권기 한국교회와 국가 권력’이란 제목의 논문을 통해 “국가조찬기도회는 왜곡된 정교유착의 온상이었다. 이 자리에서 그들은 인권유린의 상징이라 할 유신체제와 신군부독재의 등장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불의한 정권의 나팔수로서 한국교회사에 지울 수 없는 오욕과 굴종의 기록을 남겼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국가조찬기도회는 유신체제와 신군부 독재의 정당성을 알리는 선전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국가조찬기도회에 대해 김삼웅(성균관대) 겸임교수는 이렇게 평가한다. “교계 거물들의 권력지향성은 일제시대 이래의 악습이었다. 신사참배로 이미 신앙심을 잃어버린 그들은 일제의 침략전쟁에 거침없이 앞장섰다. 1937년부터 1939년까지 일제의 승전을 위한 기독교인들의 ‘무운장구기도회’가 8천953회나 열렸다. 이런 수치는 대상 시기와 교단을 넓히면 훨씬 많을 것이라 한다.”
이광수(부산외국어대) 교수는 “전두환이 교회를 위해 엄청난 특혜를 주고 기득권을 인정하였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다. 그를 기반으로 교회는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면서 오늘날에는 거대한 권력이 되었다”고 평가했다. 한국 기독교는 시대마다 권력과 함께 했으며 협력자를 자처해왔다.
솔로몬 우상숭배 거울 삼아야
최근 한명수(창훈대교회) 원로목사는 “일부 목사들이 위험천만하고 불안한 쇠고기 협상을 이룬 정권을 옹호하고 있다”며 “삼선개헌과 유신헌법에 찬성하고 대통령을 축복하던 그 성직자들이 오늘날 쇠고기 파동을 앞장서서 막으려고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목사들은 하나님의 뜻을 대변하는 자들로서, 권력의 압박이나 요구에 흔들리지 않는 초연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호소했다.
한국 기독교는 지난날 권력과 정권 앞에 진리와 정의를 지키지 못했던 과오를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이방신을 섬겨 심판을 받았던 솔로몬을 거울과 경계로 삼아야 한다. 또 오늘날 권력이란 ‘우상’ 앞에서 자신의 신앙과 양심을 지켜 하나님과의 관계를 하루 속히 회복하길 기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