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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 진짜 생얼을 볼 수가 없다

EAST-TIGER |2010.12.20 02:19
조회 40 |추천 0

 

학기가 끝나니 밀린 영화들과 책들이 과제처럼 쌓여있다.

안 본 것이 아니라 내가 게을러서 못 본 것들이다.

일단 영화는 남은 2010년 동안 하루에 2편씩 보기로 했다.

수치상으로 그렇게만 본다면 충분히 다 볼 수 있을 듯 한데,

항상 계획보다 실천이 어렵다.

 

이 영화는 원래 2009년에 제작되었지만, 개봉은 2010년에 했다.

그래서 2010년 신작이라는 칭호는 <옥희의 영화>가 받아야 하나,

일단 2010년에 개봉했으니 신작은 신작이다.

내가 본 홍상수 감독의 영화들 중 극장에서 본 것은 <잘 알지도 못 하면서>뿐이다.

나머지 영화들은 전부 안락한 자세를 취하며 집에서 보았다.

이 영화도 편한 자세로 한 손에는 악기 핑거링 연습을 하고,

가끔 하품도 하면서 즐겁게 보았다.

 

 

"여자 몸이 주는 힘은 정말 대단한 거 같애."

 

중식과 문경은 여름의 끝자락에 서로 만나 막걸리를 마시며,

지난 여름에 있었던 여행이야기를 꺼낸다.

알고 보니 서로 통영을 갔다 온 것을 알게 되었고,

좋았던 일들만 말하자며 교대로 이야기를 한다.

한 이야기가 끝날 때마다 술 잔을 나누는 둘의 통영 여행은,

미묘하게 엇갈린 상황 속에서 자신들이 만난 인간 군상들을 만담처럼 묘사한다. 

 

 

"어둡고 슬픈 것을 조심해라. 그 속에 제일 나쁜 것이 있단다."

 

<살인의 추억>, <화려한 휴가>의 김상경의 오랜만의 스크린 복귀였다.

<생활의 발견>, <극장전> 등 홍상수 감독 영화에 인연이 깊다.

특별한 연기 재능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자연스러움과 친근감이 느껴지는 연기는 홍상수 영화철학과 잘 맞는 것 같다.

 

<잘 알지도 못 하면서>, <이끼>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 유준상.

어떤 역을 맡겨도 잘 소화하는 것 같고,

이 영화에서 가장 좋은 연기를 보여준 배우라고 생각한다.

TV드라마와 영화 둘 다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드문 배우이다.

개인적으로 영화에서 보는 그의 모습이 가장 좋다.

 

<오아시스>, <바람난 가족> 등 다양한 배역을 소화한 문소리.

문소리의 연기는 짧든 길든 집중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꼭 영화 속의 배역과 같은 인물은 아니더라도,

실제 그런 삶을 살 것 같다는 느낌을 들게 하는 배우 중 한 사람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생활의 발견>의 예지원은 항상 개성 있는 연기를 보여준다.

아마 예지원처럼 다양한 장르와 배역을 맡으며

영화, TV드라마에 출연한 배우도 드물 것이다. 

이제는 그것들이 그녀를 보증하는 큰 자산이다.

이 영화에서는 내면 연기가 돋보였다.

다만 그녀가 가장 나이 들어보여 아쉬웠다(비슷한 나이의 출연진들 중에서).

 

<해안선>, <실미도>, <꽃 피는 봄이 오면>의 김강우는 만년 유망주 같은 느낌이다.

주연으로는 뭔가 아쉽고, 조연으로는 괜찮은 배우라 생각한다.

이 영화에서는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었다.

 

<미인도>의 김민선(김규리로 개명했지만 본명이 더 좋다)은 평범한 연기를 보여주었다.

그럴 수 밖에 없던 것이 평범한 배역이었고,

평소에 알던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그녀의 분위기와는 좀 달랐다.

 

<하녀>의 윤여정은 이제 어디서든 맡은 배역들이 거의 똑같고,

똑같은 연기만 할 뿐이다.

 

명품 조연 기주봉과 <미인도>의 김영호가 출연했다.

특히 김영호는 이순신 역을 맡았는데,

내게 큰 웃음을 주었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이제 비슷한 흐름으로 가는 것일까?

예전처럼 뭔가 파격적이면서 독특한 내용이 많이 사라진 것 같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분명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는 유쾌함이 있다.

상상했던 것들을 현실로 바꿔주는 짓궂음이 아직까진 매력이다.

 

  

"하나도 안 힘들어. 그래, 저 사람도 사람이지. 그걸 왜 몰라."

 

"그런 싸구려 인간애 같은 걸로 우린 똑같아요, 그런 얘기를 하는 게 아니잖아!

  정말 저 사람이 보이냐고 정말 저 사람!"

 

홍상수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

"사람 그 자체에 대해서 진실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를 논하는 것 같다.

뭔가 부담스럽게 다가오는 질문이지만,

그의 전작들을 보았다면 답을 어렵게 풀어 나가는 감독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좋은 것만을 기억하며 말하자는 전제는 그저 인사치레였다.

통영에 대한 두 사람의 기억은 좋은 기억만 말하지 않았다.

둘은 웃으며 말했지만 즐거운 웃음보다는 어이없는 웃음과 허탈한 웃음이 더 많다.

그리고 진짜 즐거운 웃음으로 느껴지는 것은 중식의 마지막 웃음이었다.

지나간 과거니까 웃을 수 있는 것이지, 그 당시였다면 웃음은 나오기 힘들다.

흑백사진과 칼라영상의 부자연스러운 조합은 이 의미를 담은 듯 하다.

 

또한 중식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을 속물이라고 비난하며 떠드는 시인은,

전형적인 우리 시대의 논리 없는 허풍쟁이들을 상징하는 것 같다. 

뭔가 스스로 심오한 듯 말하고 고상한 척을 하지만,

여성 편력과 뜻 밖의 아파트 한 채에 행복해 한다.

문제는 이런 허풍쟁이들의 말에 사람들이 잘 속아 넘어간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말하는 진짜 속물이 눈 앞에 있는데도..

  

 

"자기는 그럴 필요 없는 사람이야! 자기 정말 착해요!

 내 사랑만 받으면 돼, 내가 욕심 안 내면 우리 잘 될 거야."

 

어떤 사람은 아파트 한 채가 동굴처럼 보이고,

어떤 사람은 아파트 한 채가 굴러들어 온 행운처럼 보인다.

어떤 사람은 거지를 보면서 거지이자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보이고,

어떤 사람은 거지와 인간을 뛰어넘은 새로운 의미를 가진 존재이다.

어떤 사람은 연인에게 물심(物心)으로 무엇인가 해주어야 사랑이고,

어떤 사람은 그저 함께 있어주거나 서로 안을 수 있는 것이 사랑이다.

 

내가 알고 보고 생각하는 것들을 똑같이 상대방이 알고 보고 생각할 수 없으며,

똑같이 전달하거나 가르칠 수도 없다.

이것은 엄연한 사실이고 상대주의 철학의 근본 전제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서로 무엇을 알고 보고 생각하는 것일까?

정말 본질적으로 사람 그 자체는 무엇일까?

이 질문들에 대한 명확한 답은 과거나 현재나 미래를 놓고 볼 때, 없었고 없고 없을 것이다.

답은 그냥 우리가 알고 보고 생각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말할 뿐이다.

그리고 사람들의 반응을 듣거나 보면서 이해하거나 다양한 방법으로 소통하면 된다. 

 

아쉽게도 인간은 여러 개의 가면들을 쓰고 있기 때문에,

진짜 생얼을 볼 수가 없다.

그래서 사소한 일에 실망하고 큰 일에는 도리어 무감각 할 때도 있다.

그리고 혈액형, 적성검사, 운세, 궁합 등으로 인간을 알아가려는 얕은 시도를 한다.  

더 심각한 경우에는 새로운 만남의 대상들을

자신이 그동안 만나왔던 사람들을 유형별로 나누어 맞춰보기도 한다.

만약 남들의 진짜 생얼을 보고 싶다면 먼저 자신의 생얼부터 보아야 한다.

이 힘들고 고된 자기성찰 속에서 인정과 겸손의 의미를 깨달을 때,

우리는 다른 인간의 생얼을 볼 수는 작은 실마리를 갖게 된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받아 들일 때 소통은 시작된다.

정말 친해지고 싶거나 사랑하는 대상이 있다면,

솔직한 자기 이야기를 꺼내면서 먼저 자신을 그 앞에 풀어내야 한다.

이것은 자존심과 수치 때문에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

진정한 용기가 없거나 친해지고 싶은 척, 사랑하는 척을 하는 것에 불과하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그런 점에서는 솔직하다.

사람들이 그의 영화를 공감하기 어렵다고 느끼는 것은,

이미 영화에서 본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다만 잘 알지 못 할 뿐..

 

개인적으로 홍상수 감독의 영화들에서 나오는 연애작업은 한번 시도해 보고 싶긴 하다.

그러나 그런 말과 행동을 상대방의 눈을 바라보며 쉽게 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러고 보면 나도 참 아직 속물의 티를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하지만 내 안에는 운명을 믿으며 순수함을 간직하려는 의지는 분명 있다.

유효기간이 길었으면 좋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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