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닐라향 마닐라 - 감성현
선입견.
그것은 수 많은 것들을 제대로 느껴보지도 못하고 놓치게 만든다. 필요 이상의 긴장으로 자칫 마닐라의 첫인상은 엉망이 될 뻔했다. 이렇게 친절하고 따뜻한 곳인데 말이다.
열어 놓은 차창 사이로, 감미로운 바람이 들어왔다. 바람은 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넘겨주고 있었다. 난 누군가가 내 머리카락을 넘겨 주는 것을 좋아한다. 너무나 포근한 기분이 들어 그때마다 달콤한 잠에 빠져들고 싶어진다. 그건 아주 사랑스러운 기분이다.
거리에 나오니 방금 전까지 정말 그렇게 많은 비가 내렸나 싶을 정도로 거리엔 물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마닐라의 햇살은 그만큼 강렬했다. 직접 피부에 닿으면 얇은 면도날로 살결을 도려내는 듯이 따가웠다. 이 강렬한 햇살 때문에 마닐라는 눈부실 정도로 밝았다. 희미한 백열등 하나뿐인 작은 골방 안을 연상케 했던 어젯밤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었다.
마닐라가 좋아졌다. 소소한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행복이 좋았고, 지금껏 살아온 삶과 다른 삶을 사는 것도 재미있었다. 조금의 틈이라도 있으면 낙오자가 되는 듯한 느낌을 받는 한국과 달리, 마닐라는 나에게 여유를 주었다. 처음엔 그 여유가 멍청해 보이기도 했고 견딜 수 없이 지루하기도 했지만, 이젠 제법 익숙해져서 나의 삶까지 변화시키고 있었다.
이미 난 세계에서 행복지수가 가장 높다는 필리피노가 되어가고 있는지도 몰랐다.
“생각보다 잘 해놨는데!”
“형, 지금 일부러 이렇게 해 놨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럼, 아니야?”
“마네킹 같은 걸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따로 있대요.”
사실인지 확인할 길은 없었지만, 이어지는 모리의 설명은 황당했다. 워낙 인건비가 싸서 마네킹 따위를 제작하는 것 보다 사람을 고용하는 편이 훨씬 저렴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았다. 박물관 내에 마네킹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기에 더욱 신뢰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가능할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여긴 필리핀이 아니던가.
지프니를 타기로 했다. 지프니는 좀도둑이 많다는 말 때문에 필리피노도 주의를 한다고 했다. 특히 밤이 되면 잘 앉아있던 옆 사람이 강도로 돌변해 옆구리에 칼을 들이대며 귀중품을 요구한다고 했다. 혹은 교통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누군가가 뛰어 들어와 귀중품을 낚아채간다는 말도 있었다. 그 바람에 귓불이 찢어지고 목에 날카로운 상처가 생겼다는 사람들도 종종 있었다. 물론 그런 위험은 지프니가 아니더라도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고, 스스로가 조심하는 수 밖에 없었다. 지프니도 주의만 하면 충분히 매력적인 교통수단이다. 지프니는 버스와 달라서 숫자가 아닌 글자로 노선이 적혀있다.
필리핀 단기선교를 떠나기전 필리핀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어서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 어학연수를 목적으로 장기간 마닐라에 머물며 그곳의 문화와 생활을 접하고 필리핀 구석구석을 여행하기도 한 저자의 이야기를 통해 필리핀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 책은 필리핀이나 마닐라를 소개하는 책이라기 보다는 마닐라에서의 삶의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책이다. 여러 사람들과 만나고 영어공부를 하며 벌어지는 많은 이야기들은 바닐라향이 물신 풍기는 마닐라를 배경으로 벌어진다. 하긴, 제목에서 말하는 바닐라향 이란거, 발음의 유사성에 근거한 언어유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것 같지만, 어찌되었건 안타깝게도 내가 경험한 마닐라는 바닐라향이 아니였다. 내 기억속에 남은 마닐라는 숨막힐 듯 지독한 매연과 교통체증 뿐이다. 필리핀애 대한 애정어린 관심이 아니였다면 절대 내 손에 들릴 기회를 잡지 못했을 책. 나는 나중에 '허브향 잠발레스' 뭐 요딴 책이나 써봐야 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