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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in 시베리아 횡단열차

TJStorM` |2011.01.11 09:24
조회 62 |추천 0

 

2010년 6월 14일 월요일 13:58(모스크바 기준 시각)

  와, 이제 살았구나. 하마터면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놓칠 뻔했다.

  나에겐 몇 가지 문제가 있는데 그 중 한 가지는 시간약속을 잘 안 지킨다는 것이다. 이것은 치명적인 문제점이다.

  난 완벽주의자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어떤 일을 시작하면 무조건 끝장을 본다. 현재 하고 있는 일이 마무리 되기 전에는 뒤에 약속이 있든 약속 할아버지가 있든 신경을 쓰지 않는다.

  오늘도 Irkutsk에서의 숙박을 구하기 위해 Couch Surfing과 Hospitality Club을 뒤지고 있었다. 좋은 Host를 만나기 위해 계속 검색했고 결국 찾았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버렸다.

  시베리아 횡단열차 출발시간이 한 시간 정도 남았을 때, 숙소에서 떠났다. 지하철을 타고 기차역으로 향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지하철을 환승하려는데 갈아타야하는 노선이 없었다. 역무원에게 물었지만 영어를 못해서 말이 안 통했다. 그 사람이 노선도를 가리키며 다시 되돌아가라고 하는 거보니 아무래도 공사 중인 노선이거나 지하철이 아닌 트램 또는 기타 다른 노선인 것 같았다. 그때 시계를 보았을 때, 열차 출발까지 35분이 남아 있었다. 6정거장 그리고 두 번 갈아타야 하는 상황. 택시를 탈까도 생각했지만 총알이 넉넉지 않았다.

  긴박한 시간이 전개됐고 기차 출발 10분전 가까스로 기차역에 도착했다. 살았다. 휴.

예전부터 고치기 위해 노력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정말 고쳐야겠다. 나의 이런 치명적인 습성.

  기차에 들어가 자리를 확인하고 짐을 풀었다.

이 기차는 6월 14일 13:10에 출발했고 경유지인 Irkutsk에 17일 22:00에 도착한다. 시간으로 따지면 80시간 50분.

  흠, 걱정이군. 그 동안 뭘하지.

  초장부터 많은 이야기를 하면 나중에 할 이야기가 없으니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대한 첫 인상과 앞으로의 예상되는 일들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써야겠다.

  그럼 이만두. 헐. 뭥미.

 

2010년 6월 14일 월요일 16:25(모스크바 기준 시각)

  아, 젠장. 도시락(컵라면) 먹다가 입천장 다 데었다.

  하여간 도시락은 참 맛있다. 어렸을 때, 많이 먹었는데 왜 요즘 한국에서는 팔지 않는 것일까? 흠,

  시베리아 횡단열차. 그 이름만으로도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설레게 하는 세계 최장거리의 열차. 누구나 그렇듯이 나도 이 열차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뭔가 특별하고 재밌을 것이라는 상상.

  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건 그냥 러시아 사람들이 타고 다니는 보통 기차였다. 여행자들을 위한 특별한 기차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형태의 기차를 Lithuania의 Vilnius에서 Belarus의 Minsk에 갈 때, Russia의 Saint Petersburg에서 Moscow에 갈 때 탔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도 그것들과 똑같았다. 그냥 열차.

  지금 내 주변에는 5명의 Russia 사람들이 있다. 꼬마 여자애 한 명, 고등학생쯤으로 보이는 남자애 한 명. 아줌마 둘, 아저씨 하나. 우리가 특별하게 생각하는 열차가 이들에게는 그냥 교통수단이었다.

  특별한 건 없지만 어쨌든 이렇게 오랜 시간, 기차 안에서 생활하는 것은 색다른 경험인 것 같다.

  그나저나 뭔가 새로운 것을 찾지 않으면 3일 동안 지루할 것 같다. 빨리 친구를 만들어야겠다. 보아하니 이 칸에는 여행자가 나를 제외하고 두, 세 명 정도 있는 것 같다. 빨리 말을 걸어봐야겠다.

 

2010년 6월 14일 월요일 18:51(모스크바 기준 시각)

  자다가 일어났다. 시계를 봤다. 18:51. 기차 탄 지 5시간 41분이 지났다. 이제 지금까지 탄 시간의 15배만 더 타면 된다.^^

  기차표를 살 때 하단좌석이 상단좌석보다 항상 적게 남아있었다. 이는 하단좌석이 좋다는 소리이다. 그래서 나도 하단좌석으로 샀다. 사람들이 선호하는 데에는 적합한 이유가 있겠거니 생각하였다.

  하지만 실제로 타보니 상단좌석이 훨씬 나은 것 같다.

  첫째로 상단좌석은 잘 때 편하다. 낮 시간 동안에는 사람들이 앉아 있기 때문에 하단좌석을 공유하게 된다. 따라서 자고 싶을 때, 누워 잘 수가 없다. 졸리다고 앉아있는 사람을 상단좌석으로 올려 보내 재울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둘째로 안전하다. 상단좌석은 물건을 높고 구석진 자리에 보관할 수 있기 때문에 하단좌석에 비해 절도의 위험이 줄어든다.

  다행히 Irkutsk에서 Vladivostok에 갈 때는 상단좌석이다.

  이제 뭐할까. 교환학생 후기나 써야겠다.

 

2010년 6월 15일 화요일 07:44(모스크바 기준 시각)

  실컷 자다가 일어났는데 겨우 7:30이다. 기차 탄 지 18시간 정도 지났으니 이제 60시간만 더 타면 된다.^^ 헐. OTL

  복도 밖으로 나가면 화장실 앞에 콘센트가 있는데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다. 다른 건 몰라도 노트북을 충전해야 하는데 흠, 큰일이다. 근데 어제 밤에 누가 핸드폰 충전하는 것을 봤단 말이지. 이상해이상해.

  노트북 배터리 아껴야겠다. 그럼 이만.

 

2010년 6월 15일 화요일 11:34(모스크바 기준 시각)

  계속 기차 안에서 자고 먹고 싸고 씻고 노래 듣고 컴퓨터하고 음악 듣고만 있으니 신체활동이 극도로 축소됐다. 축소된 신체활동은 몸과 마음을 처지게 만들고 음식물 섭취를 줄인다.

  그냥 피곤하다. 자도자도 계속 졸리군. Zzz

 

2010년 6월 15일 화요일 13:10(모스크바 기준 시각)

  의도적으로 맞춘 것은 아니지만 정확히 이 기차가 출발한 지 24시간이 됐다. 이제 55시간 정도 남았음.^^

  방금 도시락(컵라면) 하나를 먹었는데 정말 맛있다. 우리나라에서도 팔면 좋겠다.

  방금 라면에 뜨거운 물을 부으러 가면서 기차 안의 사람들의 살펴봤는데 최악의 멤버 구성이다. 내 또래가 한 명도 없다. 아가나 아줌마, 아저씨, 할머니 또는 할아버지들만 있다. 여행객으로 보이는 사람도 하나 없다. 공부나 열심히 하라는 신의 계시인가 보다. CFA공부나 하자.

 

2010년 6월 15일 화요일 19:32(모스크바 기준 시각)

  드디어 기차 안에서 친구를 찾았다. 바로 내 앞에 앉은 꼬마, 아니 아가? 국적은 러시아인 것 같고 나이는 3살 정도? 귀엽게 생겼다.

  하도 심심해서 얘네 엄마가 안 볼 때, 이상한 표정 좀 지었더니 자꾸 메롱한다. 몰래 내 발도 밟고 아주 신이 났다. 덩달아 나도 신이 났다.

  얘가 언제 이 기차를 떠날지 모르겠지만 그 전까지 재미있을 것 같다.

  저녁 시간이 되어 날씨가 선선하다. 이어폰을 통해 흘러나오는 John Denver의 노래가 좋다. CFA공부도 잘된다. 이제 기차 탄 지 30시간 정도 흘렀다. 특별한 재미는 없지만 소소한 재미는 있다. 그리고 나름의 낭만이 있다.

 

2010년 6월 15일 화요일 21:20(모스크바 기준 시각)

  CFA공부를 하고 싶은데 날이 어두워져서 글자가 잘 안 보인다. 조명도 침침한 게 공부를 할 수 있는 여건이 안 된다.

  CFA LV. 1 Schweser Notes는 총 6권. 이번 달이 가기 전에 Economics를 끝내고 7월 달부터 한 달에 두 권씩 공부해서 9월이 가기 전에 한 번의 정리를 끝내야겠다. 남은 시간 동안 한 번 더 정리하고 시험 보면 붙을 수 있겠지? 좀 빡센 계획이긴 하지만 다른 Option은 없다. 무조건 GO.

  세계일주 만큼이나 CFA의 획득은 중요하다. 핵심역량이 없이 세계 곳곳만 떠돌다 졸업한 늙은 대학생으로 남고 싶지 않다.

  주변에 하나, 둘 자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나도 음악이나 듣다 좀 자야겠다.

  기차 탄 지 32시간 정도 지났다.

 

2010년 6월 16일 수요일 08:07(모스크바 기준 시각)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기차가 달리고 있었다. Oh, My God! 이 기차는 지치지도 않나 보다. 쉬지 않고 달린다.

  계속 달리기만 하니까 좀 지겹다. 때로는 기어가기도 하고 날아가기도 했으면 좋겠다.-_-

 

2010년 6월 16일 수요일 10:00(모스크바 기준 시각)

  가끔가다 콘센트에 전기가 들어온다.

  화장실에 가는데 누가 핸드폰을 충전기를 꽂아 놨다. 이때다 싶어 노트북을 충전했는데...이건 뭥미. 지나가는 승무원이 핸드폰 충전은 되고 노트북 충전은 안 된단다. 그래도 30분 동안 12% 충전해서 지금은 배터리가 39%. 이거 가지고 내일 밤까지 버틸 수 있을라나 모르겠다.

  기차 탄 지 45시간. 헐.

 

2010년 6월 16일 수요일 10:46(모스크바 기준 시각)

  꼬마랑 노는 재미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얘가 나를 보고 있을 때, 창문을 보다가 갑자기 놀란 표정을 짓는다. 그러면 얘도 따라서 창문을 쳐다본다. 무한 반복.

  이 안에 있으니 별 게 다 재밌다.

 

2010년 6월 16일 수요일 11:07(모스크바 기준 시각)

  기차가 멈췄다. 사람들이 내린다. 먹을 것을 산다.

  기차를 탈 때, 도시락 6개, 미린다 2L, 펩시 2L, 빵 두 봉지를 들고 탔다. 이것이 내 80시간 동안의 식량. 돈을 아끼기 위해 기차 안에 있는 동안은 어떤 것도 사먹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모두들 사 먹는다. 견딜 수 없다. 기차 밖으로 나갔다. 지나가는 아줌마에게 다가가서 아이스크림을 하나 집었다. 50 Ruble을 내고 20 Ruble을 거슬러 받았다. 봉지를 뜯어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었다. 맛있다. 시원하다.

  주변에 아이스크림 파는 아줌마들이 많은데 모두들 ‘마루쉬네’라고 외친다. 러시아어로 아이스크림은 ‘마루쉬네’인가 보다.

 

2010년 6월 16일 수요일 13:40(모스크바 기준 시각)

  실컷 자다가 일어났다. 시간을 보니 13:24. 드디어 48시간 돌파. 띠용.

  세면도구를 들고 화장실에 가서 양치를 했다. Tallinn에서 Lucia가 어린이용 딸기 맛 치약을 줬는데 좀 별로인 것 같다. 딸기 맛이라서 맛은 있지만 확실히 소금 맛이 덜 강하다. 양치 후에 끝 맛이 상쾌하지 않음.

  반면 화장실에 비치되어 있는 딸기색의 비누는 강도가 장난 아니다. 세수를 하는데 이건 거의 빨래 비누다. 기차 안에서 빨래를 할 사람은 없으니 분명히 사람의 몸을 위한 비누임은 분명한데 왜 이렇게 강하지? 역시 Soviet의 비누는 달라도 뭔가 다르다. 어쩌면 군인용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헐. 갑자기 앞에 있는 꼬마와 그의 마마가 짐을 챙긴다. 아무래도 곧 내리려나 보다. 꼬마야, 내리지 마. 형이랑 놀자. 정, 가고 싶으면 네 자리에 쭉쭉빵빵 러시아 미녀 한 명 데리고 오렴. 영어 잘하는 아가씨로 말이야. 오킹?

  과연 다음 승객은 누가 될까. 한번 보자.

 

2010년 6월 16일 수요일 14:21(모스크바 기준 시각)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

  첫째, 한국문화의 우수성.

  내 앞에 있던 꼬마의 바지에 한글이 써져있는 것을 발견했다. 알게 모르게 한국문화는 세계 곳곳에 널리 퍼져 있었다.

  교환학생 생활하는 동안, 여행하는 동안 한국문화에 관심이 있는 많은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번에 Irkutsk에서 Host를 할 친구도 한국 문화에 관심이 있다. 약간은 섣부른 생각일 수도 있는데 (음식을 제외하면) 미국문화 다음으로 인기 있는 문화가 한국문화가 아닐까 생각한다.

  둘째, 한식.

  음식에 있어서는 중국과 일본이 우리보다 단연 앞선다. 우리나라도 얼마 전부터 ‘한식의 세계화’ 추진 어쩌고저쩌고해서 이런저런 사업을 하는 것 같은데 제발 잘 되었으면 한다.

  음식 이야기를 하기 전에 내가 생각하는 우리문화의 특성에 대해서 한 가지 이야기하겠다.

  우리나라 문화의 특징은 ‘정교하다’, ‘다양하다’이다.

  우선 언어를 예로 들어 설명하겠다. 영어에 있어서 ‘Sorry’라는 표현을 우리는 ‘미안하다’, ‘아쉽다’, ‘서럽다’, ‘서운하다’, 안타깝다‘ 등 여러 가지로 표현한다.

  소고기를 예로 들어 설명하면, 1인당 세계 제 1의 소고기 소비 국가는 아르헨티나이다. 이런 아르헨티나에서는 소고기 부위를 약 40개 정도로 구분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그것의 배가 넘는 부위로 나누어 구분한다. (오래 전에 다큐멘터리에서 본 것이라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 차이가 상당했음.)

  (단 두 가지를 예로 든 것이지만) 우리나라의 문화는 상당히 정교하고 그로 인해 다양하다고 생각한다.

  한식도 마찬가지이다. 외국에서 일본음식하면 ‘스시’ 말고는 없다. 하지만 한식을 이야기하면 ‘불고기’, ‘김치’, ‘ 비빔밥’ 등 다양하다.

  물론 다양하다는 것은 복잡하다는 것이고 복잡한 것은 받아들여지기 어려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대표음식을 선정하여 시장을 파고 든 다음에 장점인 다양성을 잘 이용하면 많은 수요를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에 문화관광부에서 한식의 대표 상품으로 ‘떡볶이’를 선정했다. 다른 사람들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난 회의적이다.

  떡볶이의 장점은 Fusion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소스를 Cream으로 만들면 서양의 향기가 나는, 떡볶이를 칠리로 만들면 중미의 향기가 나는 떡볶이를 만들 수 있다.

하지만 많은 단점이 있다.

  우선 질감이 좋지 않다. 끈적끈적한 게 외국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불러올 수 있다.

  둘째, 떡이라는 재료가 외국에서는 구하기가 쉽지 않다.

  셋째, 장시간 보관하기 힘들다. 식으면 먹을 수 없다는 소리이다. 찬 떡볶이를 개발할 수도 있겠지만, 글쎄.

  이런 면에서 스시는 많은 장점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교환학생 생활하는 동안 한국음식을 최소 10차례 이상 친구들에게 대접했다. 그리고 어떤 음식이 외국에서 먹힐지 생각해냈다. 그 음식은 XX이다.

  이것은 내가 말한 떡볶이의 단점을 다 커버할 수 있고 그만큼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단순하다. 조리가 어렵지 않다. 장시간 보관이 가능하다. 맛있다. Fusion이 가능하다.

  나중에 증권사 때려치우면 할 사업 Item이 두 개 있다. H양만 아는 국내용 Item과 이번에 생각해 낸 해외용 Item. 둘 다 음식에 관한 것이다. 이참에 진로를 음식으로 바꿔볼까? 유능한 요리사 한 명 구해서 동업 GOGO.

  만약 진로가 이렇게 바뀐다면 난 한식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힘쓸 것이다. 이런 인생도 재미있을 듯.

  셋째, 인생에서 단 한 번.

  조금 전에 ‘이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내 인생의 마지막’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계일주할 때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안 탈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나이가 든 다음에 이것을 탈 지 안 탈 지는 잘 모르겠다. 따라서 지금 이 기회가 마지막이 될 수 있다.

갑자기 이 순간이 소중해졌다.

  꼭 이것뿐만이 아니다. 앞으로 내가 할 모든 일들이 인생에서 단 한 번이 될 수 있다.

지금까지 그래왔지만 앞으로는 더 전력투구해야겠다.

  넷째, 꼬마 다음의 승객.

  역시 신은 나를 선택하지 않았다. 내 나이 또래로 보이는 러시아 남자의 탑승. 오티엘.

 

2010년 6월 16일 수요일 21:25(모스크바 기준 시각)

  가끔 가다 노트북을 충전할 기회가 생긴다. 바로 지금. 조금 있으면 열차가 출발하고 곧 승무원이 화장실 문을 열러 올 것이다. 그때까지 충전할 수 있다.

  콘센트는 화장실 문 앞에 있다. 여기서는 정차하기 전에 화장실 문을 잠그고 발차한 후에 화장실 문을 연다. 열차가 역에 멈추어 있는 동안 승무원은 출입구에서 사람들의 표를 감시한다. 그 외의 시간에 승무원은 계속 열차 안을 오간다.

  따라서 화장실 문을 닫고 열 때까지의 시간이 노트북을 충전할 유일한 기회이다.

현재 배터리는 28%. 내일 22:00까지 쓰려면 최소 40% 정도는 있어야 된다. 흠, 이렇게까지 컴퓨터를 해야 하나? 응, 해야 한다. 글을 쓰려면 어쩔 수 없지.

 

2010년 6월 16일 수요일 22:32(모스크바 기준 시각)

  과도한 욕심이 화를 불렀다. 충전하다 걸렸다. 젠장. 두 번째다. 러시아 말로 뭐라뭐라하는데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다. Gesture로 봐서는 한 번만 더 걸리면 노트북을 창밖으로 던져버리겠다는 의미인 것 같다.

  어디 한번 던져 보시라지. 그럼 난 너를 창밖으로 던져버릴 거야.

  승무원과의 전쟁이 시작됐다.

 

2010년 6월 17일 목요일 08:48(모스크바 기준 시각)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일어나지 않았다. 다시 분주하게 움직인다. 역시 일어나지 않았다. 이러길 수십 번. 드디어 일어났다. 그때 시각은 06:52. 도대체 이 사람들은 몇 시에 일어난 거지?

  다시 잤다. 그리고 방금 일어났다. 08:42. 이 정도면 만족할 수 있는 시각이다.

  드디어 Irkutsk에 도착하는 날! 오늘 풀어야 할 숙제가 많다. 흠, 어떻게든 되겠지.

 

2010년 6월 17일 목요일 10:16(모스크바 기준 시각)

  왜 여기서는 정차하기 30분 전에 화장실 문을 잠그고 발차하고 30분 후에 화장실 문을 여는지 알아냈다.

  바로 똥과 오줌을 도시 한 가운데 뿌리면 안 되니까.

  여기 화장실에서 물을 내리면 기차 밑, 지상으로 바로 떨어진다. 물 내릴 때, 땅이 보임.^^

 

2010년 6월 17일 목요일 12:02(모스크바 기준 시각)

  다섯 번째 도시락을 깠다. 여전히 맛있다. 질리지 않는 이 맛.

  그나저나 좀 3시간 반 후면 아르헨티나와 경기가 있는데 난 볼 수가 없다. 으헝헝. 제발 우리나라가 아르헨티나를 이겼으면 좋겠다.

 

2010년 6월 17일 목요일 12:16(모스크바 기준 시각)

  기차를 타기 전, 모스크바에 있을 때, Hostel에 머물렀다. 그때 미국으로 국적을 바꾼 중국인 아저씨랑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주된 이야깃거리는 ‘한국’이었다.

  그 아저씨는 나에게 ‘한국은 크기도 작고 인구도 얼마 안 되는데 못 하는 거 없이 다 잘하냐?’고 물었다. 그러면서 미국에는 성공한 한인 사업가가 많단다. (반면 일본인은 없다고 했다.) 또 요즘 축구를 봐도, 얼마 전 동계 올림픽을 봐도, 하계 올림픽을 봐도 그렇단다.

  비단 스포츠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뻗어나가는 한류, 세계에 우뚝 선 대기업들, 최근 한국의 국제적 위상 및 역할 등, 여러 분야에서 우수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한국전쟁으로 나라가 초토화된 지 불과 50년 만이다. 대단하다.

  한국인의 DNA에는 지기 싫어하는, 최고가 아니면 안 되는 그런 성질이 포함되어 있는 것 같다. 실력이 안 되면 정신력으로 메운다. 뭘 하나 시작하면 끝장을 본다. 상당한 경쟁력이다. 사회 시스템 자체도 경쟁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경쟁국가인 일본은 잃어버린 10년에 이어, 20년째 잃어버리고 있는 듯하다. 도요타 사태가 단적인 예.

  과연 우리나라의 승승장구는 언제까지 갈까? 궁금하다. IMF가 예상한대로 2014년의 1인당 GNI는 지금의 135% 수준으로 상승할까?

  이것을 위해 고쳐져야 할 것들이 있다. 사람마다 견해는 다르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두 가지는 정치와 교육이다.

  이야기가 길어지겠군. 배터리도 없는데 여기서 종료.

  월드컵 보고 싶다. 엉엉.

 

2010년 6월 17일 목요일 15:35(모스크바 기준 시각)

  방금 전, 경기 시작을 알리는 휘슬이 울렸다. 그리고 내 응원도 시작됐다. 이겨라, 대한민국.

 

2010년 6월 17일 목요일 17:04(모스크바 기준 시각)

  기차가 멈췄다. 모든 전원이 나갔다. 고장이 났나.

  아시아 대륙으로 넘어오면서 해가 빨리 지기 시작했다. 밖은 이미 어둡다.

 

2010년 6월 17일 목요일 17:21(모스크바 기준 시각)

  어둠 속에서 여섯 번째 도시락을 깠다. 역시 맛있다.

  기차는 다시 움직인다.

  지금쯤 아르헨티나와의 경기가 끝났을 것이다. 과연 그 결과는?

 

2010년 6월 17일 목요일 18:08(모스크바 기준 시각)

  치약을 짜서 칫솔에 바른다. 입에 물고 양치를 시작한다. 입을 헹구기 위해 화장실에 간다. 문은 잠겨 있다. 헐.

  곧 역에 도착할 시간이다. 승강장에 도착하기 전에 무조건 처리해야 한다. 어떡하지. 할 수 없다. 좁은 창문 틈에 입을 조준하고 치약을 창밖으로 뿌렸다. 30%는 실내로 떨어졌다. 이러길 여러 번, 입에 있는 치약이 거의 없어졌다. 미린다 한 모금을 물고 마지막으로 입을 헹군다. 그리고 발사.

  아직까지 치약이 입에 남아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괜찮다. 어린이용 딸기 맛 치약이니까.

 

2010년 6월 17일 목요일 19:06(모스크바 기준 시각)

  이제 3시간 뒤면 경유지인 Irkutsk에 도착한다. 벌써 80시간이 다 갔나? 역시 시간은 앞을 보면 느리지만 뒤를 보면 빠르다.

  모스크바 기준 시각으로는 22:00 도착이지만 Irkutsk 기준 시각으로 봤을 때는 03:00. Couch Surfing에서 연락한 사람들이 그 시간에 마중을 나올지 모르겠다. 사실 연락이라기보다는 거의 통보에 가까웠다. 시간이 없어서 대화도 못하고 메일 하나 남기고 왔으니까.

  결국 기차역에서 자는 건가?

 

2010년 6월 17일 목요일 20:15(모스크바 기준 시각)

  밖에는 칠흑 같은 어둠이 깔려 있다. 그 동안 에스토니아, 핀란드, 서부 러시아 등 백야Zone에 있느라 제대로 된 밤을 보지 못했다. 그 동안 밤의 개념을 잊어 먹고 있었던 것 같다.

  희미한 백열등만 어슴푸레 빛을 내고 있는 기차 안에서 잔잔한 음악을 들으며 오만 가지 생각을 하고 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내 자신과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

  상념의 시간.

 

2010년 6월 20일 일요일 16:31(블라디보스톡 기준 시각)

  기차를 타자마자 잠이 들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6시간 정도가 지나 있었다.

  Irkutsk에서의 3일이 후딱 지나갔다. 정말 대박이었던 시간들. 다시 한 번 Couch Surfing의 기적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Irkutsk에 도착했을 때, 현지 시각 기준으로 새벽 3시 20분. 이 시간에 마중 나올 일은 없겠거니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게 웬일.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나에게 말을 거는 사람이 있었다.

  ‘Are you from Korea?'

  Oh, My God!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그녀의 이름은 Nastya. 그녀의 친구인 Lera도 마중 나와 있었다. 우리는 Taxi를 타고 또 다른 친구인 Julia의 집으로 갔다. 도착 후 간식을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난 그 집에서 3일 밤을 묵었다.

  이들은 시험기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극정성(?)으로 나를 보살폈다. 덕분에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이것은 다 Couch Surfing 덕분이다. Couch Surfing은 기적의 site다. 아직 두 번밖에 이용하지 않았지만 두 번 다 아주 놀라운 경험을 했다.

  여행을 좋아하고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서로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생각을 교류한다. 인터넷을 통해 쪽지 몇 번 주고받았을 뿐인데 만나면 금세 친한 친구가 되고 헤어질 때는 진심으로 아쉬워하며 후에 만날 날을 고대한다.

  형용할 수 없는 즐거움과 감동이 있는 Couch Surfing. 좋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 더욱 활성화되고 이를 악용해 나쁜 일을 꾸미는 사람들이 없길 바란다. 그리고 이 글을 보는 사람들은 꼭 한 번쯤은 이용해 봤으면 한다.

 

2010년 6월 20일 일요일 20:31(블라디보스톡 기준 시각)

  잠을 자다 일어났다. 공기가 탁하다. 답답하다. 아무래도 이번엔 자리를 잘못 잡은 것 같다.

  밑에 자리의 할머니가 하루 종일 잠을 자서 앉을 기회가 없다. 잠을 자든 깨어 있든 계속 누워있어야 한다.

  창문이 열리지가 않는다. 공기가 탁하다. 어쩔 때는 숨이 막힌다는 생각이 들 정도. 다른 자리는 다 열리는데 왜 여기만 안 열리지. 참 이상하다.

  밖의 공기는 꽤 덥다. 창문이 열리는 자리에 가서 바람을 맡아 보면 불어오는 바람이 따뜻하다. 최소 25도 이상은 될 것 같다. 이러고 보면 지금 내가 탄 것이 시베리아 횡단열차인지 적도기니 횡단열차인지 모르겠다. 시베리아에도 여름은 있고 아프리카에도 겨울은 있다.

  화제를 바꾸자.

  지금 내가 탄 기차 칸의 70%는 군인들에게 점령당해 있다. 무슨 입영열차 같다.

  군인 중 한 놈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러시아 말로 뭐라고 하는데 이거 뭐 알 수가 있나.

  'I can't speak russian, do you speak English?'

  '#%$&*%^(%(%'

  이렇게 대답하더니 마구 웃는다.

  뭐가 그렇게 신나니? Idiot!

 

2010년 6월 20일 일요일 23:39(블라디보스톡 기준 시각)

  밤이 되니 바람이 시원하다. 이제 좀 살 것 같다.

  지난 두 시간 동안 아주 정신이 없었다. Russia 군인 대, 여섯 명이랑 놀았기 때문이다. 처음에 나에게 말을 걸 때는 적대적인 것처럼 보였는데 내가 잘못 판단했나 보다.

그 많은 군인 중에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서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재밌었다. 지루한 기차 안에서 나도, 군인들도 즐거웠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기차 안에서 누구와 이렇게 오래 이야기한 것이 처음이었다. 흠, 내가 생각한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이런 것이 아닌데, 사람 아니 친구를 너무 적게 만났다.

  내 여행 최고의 목적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고 그 다음 문화를 체험하고 자연을 느끼고 동물은 보는 것이다.

  앞으로 한국까지 3일이 남았다. 새로운 무엇을 얻길 바란다.

 

2010년 6월 21일 월요일 01:45(블라디보스톡 기준 시각)

  기차 안 사람들이 모두 친구가 되었다. 10살짜리 꼬마부터 할머니까지. 되지도 않는 영어와 러시아어를 가지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덕분에 내 카메라, 컴퓨터, MP3는 모두 러시아인의 손에 넘어갔다. 중딩애는 내 컴퓨터로 마다가스카를 보고 한 군인은 내 MP3로 음악을 듣고 10살짜리 꼬마는 내 사진기로 사진을 찍는다.

  배터리가 별로 없는데 걱정이다. 충전도 못 할 터인데.

  그래도 덕분에 10살짜리 애한테 아이스크림 하나 얻어먹었다.

  전반전보다 즐거운 후반전의 기차여행. 이제 50시간 정도 남았다!

 

2010년 6월 21일 월요일 13:46(블라디보스톡 기준 시각)

  누군가 툭툭 친다. 옆 칸의 꼬마. 일어나란다.

  'Wake up and Good Morning'.

  눈을 뜨니 12:10이다.

  이번에 맞은편의 꼬마가 몽쉘통통 비슷한 것을 건넨다. 이걸로 아침 해결.

  잠시 후, 나를 깨운 애가 요거트 하나를 건넨다.

  그리고 하는 말이,

  ‘마다가스카’

  영화 보여 달라는 소리이다. 허허.

 

2010년 6월 21일 월요일 15:28(블라디보스톡 기준 시각)

  자다 일어나서 도시락 하나를 깠다.

  후반전에는 잠만 자는 것 같네. 흠.

  공부 좀 해야겠다.

 

2010년 6월 21일 월요일 17:48(블라디보스톡 기준 시각)

  아, 속이 안 좋다. 먹고 자고 먹고 자고하니 소화가 잘 될 리가 있나. 쯧쯧.

  덩달아 기분도 안 좋다. 그나마 날씨는 어제보다 덜 덥지만 땀이 나기는 마찬가지. 만약 한 여름에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탄다면 생지옥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 이것은 처음으로 노트에 쓰는 글이다. (물론 나중에 컴퓨터로 옮겨지겠지만...) 아이들의 무분별한 컴퓨터 사용으로 배터리 방전. 흑, 앞으로 36시간이나 남았는데 걱정이다.

 

2010년 6월 21일 월요일 19:48(블라디보스톡 기준 시각)

  기차가 멈추었을 때 밖에서 쉬다가 피를 빨아먹는 파리에게 피를 빨렸다. (이름이 뭐였더라, 예전에 시골 할머니 댁에 갔을 때 많이 들었는데...) 기분이 엄청 나쁘다. 모기에게 물린 것보다 100배는 더.

  여기서 친해진 10살짜리 꼬마는 나에게 모든 것을 갖다 바친다. 빵, 과자, 아이스크림, 요거트, 껌, 사탕, 과일까지. 허허.

 

2010년 6월 22일 화요일 19:26(블라디보스톡 기준 시각)

  만 하루 만에 쓰는 일기.

  내 앞자리의 할머니와 손자를 제외하고는 기차 안의 모든 사람들이 바뀌었다. 기차 안을 가득 메웠던 군인들이 떠났기 때문이다.

  어제부터 오늘, 군인들이 떠나기 직전까지 우리는 정말 재미있게 놀았다. 30명이 넘는 군인들이 아는 영어 단어를 다 합쳐도 20개가 되지 않았지만 손짓, 발짓, 몸짓 다 써가며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내가 여행했던 이야기, 한국에서 일할 때 받는 월급, 러시아의 역사 이야기, 스포츠 이야기, Street Fighting 등등.

  예전에는 모국어가 다르면 의사전달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나의 생각은 언제부터인가 바뀌었다. 대화는 언어가 아닌 마음으로 하는 것. 이번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군인들이 열차를 떠날 때, 나에게 Russia 군인용 비상식량과 간식을 줬다. 나는 마땅히 줄 게 없어서 가장 친하게 지냈던 둘에게 내 증명사진을 주었다. 얘들은 고맙다면서 내년에 전역하면 한국에 놀러가겠다고 했다. 가능성은 그리 높아 보이지 않지만 꼭 왔으면 좋겠다.

  러시아 군대는 상당히 빡세다는데 부디 몸 조심히 전역하길 빈다.

  고마운 러시아 군인들. 내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가장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줬다.

 

2010년 6월 23일 수요일 14:51 (블라디보스톡 기준 시각)

  난 지금 Zarubino International Passenger Terminal의 화장실 콘센트에 노트북을 꽂아놓고 글을 쓰고 있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John Denver의 ‘Back Home Again’. 아주 평화로운 분위기이다. 하지만 난 오늘 아침 폭풍 같은 시간을 보냈다. 그때를 생각하면 아찔하다.

  06:30, 종착역인 Vladivostok에 도착했다. 사진 몇 방을 찍고 택시를 잡았다. 기사에게 Vladivostok Bus Station에 가자고 하니 400 Ruble을 부른다. 그때 내 지갑에는 660 Ruble이 있었는데 300 Ruble은 버스 요금으로 지불해야 했기 때문에 360 Ruble로 깎고 택시에 탔다.

  터미널에 도착한 시각은 07:00. 매표소에 가서 행선지를 확인하고 요금을 확인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인터넷으로 확인한 요금과 달랐다. 인터넷에 나왔던 요금은 300 Ruble, 이곳에 써진 요금은 348 Ruble. 지갑에는 300 Ruble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카드결제도 불가능. 이러는 사이에 10분이 흘렀고 버스 출발까지는 20분이 남았다.

  내 러시아 비자는 오늘 만료된다. 그리고 출국하기 위해서는 07:30 버스를 무조건 타야했다. 다른 방법은 없었다. 굳이 방법이 있다면 엄청난 돈을 지불하고 5시간 동안 Taxi를 타고 가는 것뿐.

  허름한 버스터미널에 ATM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때 갑자기 눈에 들어온 Hotel. 무작정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호텔에서 2년 간 일을 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 정도 규모의 호텔이라면 환전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안에 들어갔을 때, 직원은 'NO'를 외쳤다. 다시 10분이 흘러 이제 버스 출발까지 10분이 남았다.

  어찌해야 되나 애간장만 탔다. 러시아는 비자에 관해서 매우 엄격하기 때문에 기간이 만료된 상태에서 남게 되면 큰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환전을 요구하기로 했다. 하지만 영어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것조차 어려운 러시아에서 이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첫 번째, 대학생쯤으로 보이는 젊은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Do you speak English?', 'No'. 예상된 시나리오였다.

  거의 체념한 상태로 두 번째 시도를 했다. 3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형. 'Do you speak English?', 'Little'. 와우. Little이라도 고맙다.

  그 사람에게 내가 처한 상황을 설명하고 환전을 해줄 수 있냐고 물었다. 해주겠단다. Oh, my god! 게다가 그 사람은 환율까지 알고 있었다. 일은 아주 순조로웠다. 정말 x 3 천만다행이다.

  50 Dollar를 건네고 1,500 Ruble을 받았다. 표를 사고 재빨리 버스에 올랐다. 출발 2분 전이었다.

  그 사람을 만난 것은 정말 행운이었다. 영어를 하고 외국인에게 환전을 해주고 환율까지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서울 시내 한 가운데서라도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렇게 단 번에 만나다니. 눈물이 날 지경이다.

  지금 노트북으로 글을 도중에 그때의 상황이 생각나서 가슴이 벌렁거린다. 그때가 정말 긴박하긴 했나 보다.

  다시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서.

  버스를 타고 잠이 들었다. 그리고 5시간 뒤, Zarubino에 도착. 세관에 간단한 신고를 하고 항구로 들어갔다.

  항구에 들어가니 두 명의 한국인이 있다. 인사를 주고받았는데 한국어가 왜 얼마나 반갑게 들리던지. 이제 정말 한국에 돌아갈 시간이 온 것인가.

  그 분들에게 한국과 나이지리아의 축구경기 결과에 대해 물었다. 결과는 2:2 동점, 16강 진출. 기분이 좋다.

  아침에 택시 아저씨에게 한국이 나이지리아에 0:1로 지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이 때문에 버스 안에서 계속 불안했는데 결국 16강 진출! 이제 처음으로 한국에서 친구들과 월드컵을 볼 수 있게 됐다. 하하.

  갑자기 출국심사대의 문이 열린다. 승선을 해야겠다. 나머지 글은 배 안에서.

 

2010년 6월 23일 수요일 18:51 (블라디보스톡 기준 시각)

  한 시간 전쯤에 배가 출발했다. 닻이 올라가고 배가 육지에서 점점 멀어진다. 빠까(Bye in Russian), Russia. 기분이 이상하다. 마치 정든 고향을 떠나는 것 같은 느낌이다. 지난 15일 동안 정이 많이 들었나보다. 생각해 보니 한 국가에서 이렇게 오래 여행한 것이 처음이었다.

  이제 무슨 말을 써야하지. 갑자기 말문이 막힌다. 아직 도착하지는 않았지만 지난 5개월간의 길고 긴 여행이 끝난 느낌. 힘이 쫙 빠진다. 안도감이 들어서일까.

 

2010년 6월 24일 목요일 03:07 (블라디보스톡 기준 시각)

  날짜가 바뀌고 마침내 입국의 그날이 왔다.

  방금 잉글랜드와 슬로베니아의 축구를 봤다. 이번 월드컵에서 처음으로 보는 Live경기인데 나름 재밌었다. 역시 잉글랜드는 출구를 잘한다.

  반면 오후에 본 우리나라와 나이지리아의 재방송 경기는 실망스러웠다. 수비 불안. 16강에서는 제발 잘해서 우루과이를 이기고 8강에 갔으면 좋겠다.

  잠시 예전에 적지 못한 두 가지 이야기를 하겠다.

  우선 Nastya 이야기.

  Nastya는 Irkutsk에서 나를 Hosting한 Russian. 한국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한국 음악과 드라마 그리고 영화를 좋아하고 한국어를 사랑한다. (비록 알아듣지는 못 했지만) 내가 한국어로 말하고 한국어에 대해 가르쳐주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

새내기 여대생의 한국에 대한 순수하고 깨끗한 열망이 느껴졌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으면 하나라도 더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샘솟았다.

  알프스 소녀 Heidi같은 Nastya는 내년 하반기부터 1년 동안 한국에서 공부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난 그때 세계일주를 할 것이란 말이지. 으아앙. 어떡하지.

  두 번째, 하태츌. 러시아 군인들 그리고 러시아 꼬맹이들은 나를 ‘하태츌’이라고 불렀다. ‘하태준’ 발음이 안 되나 보다.

 

2010년 6월 24일 목요일 01:44 (한국 기준 시각)

  한국 기준 시각으로 넘어왔다.

  이제 마지막 단락을 쓸 시간. 글이 끝나고 내 여행도 끝난다. 단순히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여정(버스 22시간, 기차 164시간, 배 23시간)뿐 아니라 5개월간의 교환학생 생활도 종지부를 찍게 된다. 참 슬프다. 섭섭하다.

  정들었던 뭔가를 끝마치는 것. 누군가와 작별을 하는 것. 언제나 슬프다.

더 슬픈 것이 있다면 그 감정의 강도가 나이를 먹어가면서 작아진다는 것. 초등학교 때, 이사를 가서 친구들과 헤어져야 했을 때는 미친 듯이 슬펐다. 막 엉엉 울었다. 하지만 얼마 전에 리투아니아를 떠날 때는 그저 많이 슬펐다. 미친 듯이 슬프지 않았다. 그리고 10년 뒤에 이런 일을 겪게 될 때는 조금 슬플 것이다. 이것은 예전의 친구들보다 덜 친했기 때문이 아니다. 나이가 들수록 감정이 무뎌지고 있는 것이다.

  어린 시절 순수한 감성의 간직, 꼭 하고 싶은 일 중 한 가지이다. 지금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생생한 기억의 흔적들이 순수한 감성을 간직할 수 있게 도와줄 것으로 믿는다.

 

Addition

  글을 마지막으로 훑어보는데 baikal호에 대한 이야기가 하나도 없어서 추가한다.

  Baikal호. 세계에서 가장 큰 호수. 전 세계 담수량의 20%를 차지한다. 실제로 보면 호수라는 생각보다는 작은 바다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크기보다 놀라운 것은 그 깨끗함. 정말 깨끗하다.

  Baikal호에 가기 전에 내 목표는 야생Nerpa를 보는 것이었다. (Nerpa는 Baikal호에 사는 물범.) 하지만 하루의 일정 가지고는 턱도 없는 일이었다. 그 넓은 Baikal에서 하루 만에 야생Nerpa를 볼 생각을 하다니. 미쳤지.

  죽기 전에 다시 한 번 Baikal을 찾아야겠다. Nerpa를 보기 위해서. 그리고 그때는 Russia 친구들과 더 많은 시간을 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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