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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업주부男 3년차... 청춘의 열정이 그립습니다.

배사랑 |2011.02.19 23:56
조회 26,207 |추천 177

안녕하세요. 서울에 살고있는 34살 전업주부男입니다.
 
제게는 눈에 넣기엔 곤란하지만 사랑하는 아내와
 
미친 존재감을 자랑하는 사랑스런 두딸이 있습니다.
 
전 인서울 모대학의 조선해양공학과를 전공하고
 
조선소에 취직을 했습니다.
 
그때가 25살 즈음이었죠.
 
어릴 적 부터 세상에서 가장 멋진 배를 만들고 싶었던 소년의 꿈을
 
마침내 이루어낸 저에게

 

조선소에서의 하루하루는 정말 행복했습니다.

일 끝나면 저보다 나이 훨씬 많은,
 
우리나라(+ 전세계) 상위 1%의 기술자 선배님들과
 
맥주마시고 축구보고 사는게 제 인생의 낙이었습니다.
 
(* 조선소에서 일한다 하면
다들 무슨 납땜질밖에 할줄 모르는 막노동자들로 아시는데,
거기서 근무하는 분들 다 대한민국 상위클래스 기술자들에
학사는 물론 석박사 출신들도 많습니다.)
 
그러던중 부산 사람이던 지금의 아내를 만나
 
7년 전에 결혼을 했습니다.
 
그 사이에 예쁜 공주님 둘을 낳았고요 ^_^
 
그러다가 4년 전 쯤
 
아내가 일하던 회사에서 아내의 능력을 높이사서
 
서울 본사에 좋은 자리로 승진시켜줬습니다.
 
승진의 기쁨도 잠시,
 
아내의 직장은 서울, 제 직장은 부산이 되버렸으니
 
어디로 집을 옮기느냐 같은 무시무시한 걱정거리들이
 
저희 가정을 괴롭혔습니다.
 
저나 아내나 며칠간 그 문제를 얘기하기를 꺼려하다가
 
결국 여러가지 상황을 고려한 끝에
 
제가 먼저 직장을 그만 둠으로서 아내와 저는
 
심한 갈등없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꿈도 꿈이지만 그때는 결혼한지 얼마 안된 나이였고
 
가정을 위해서라면 희생을 감수할 것이라는게
 
제 나름대로의 각오였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아직 젊은 나이라

 

아내한테 멋져보이고 싶은 생각도

 

없잖아 있었고요 ^^;
 
무엇보다도 아내가 자기가 승진했다는 걸 너무나도 기뻐했기에,
 
또 만약 반대의 상황이라면
 
아내도 내게 이렇게 해줄것이라고 믿었기에,
 
아쉽지만 용기를 내서 제 꿈을 포기할수 있었습니다.
 
사실 이런 제 사정을 알고 저희 상무님께서
 
저희 회사의 서울 본사에 힘을 써주셔서
 
저도 회사 업무쪽으로 이직할 수 있게 도와주셨습니다.
(다시 한번 더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러나 얼마 안되는 인생을 배만 쫓으며 살아왔고
 
경영은 커녕 하루하루 우리집 가계부 쓰기도 바쁜 제게
 
저희 회사같이 큰회사의 경영에 관여(라기보다 관여하는 사람들 시다바리 역할...;;)하기엔
 
제가 그런 쪽으로 아는 게 전혀없고,
 
설계쪽이나 연구, 기획쪽같은 경우는 석사학위도 부족하고
 
박사학위급만 참여할 수 있다는 데
 
저는 겨우 학사학위 따고 바로 현장에 투입된 몸이라...
 
결국 아쉬움을 뒤로한 채
 
대한민국 1%의 남자들만 누릴 수 있는 특권(?),
 
전업주부男으로 변신하게됬습니다.
 
처음엔 내 가족을 위한 거라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매일매일 청소에 빨래에 육아며 장보기를 하는데
 
제가 혼자사는 것도 아니고 3식구,
 
나중에 둘째이쁜이를 낳고 나서는 4식구를 위한 집안일을 하다보니
 
여간 쉬운게 아니고 실수도 잦아서
 
아내한테 욕 드럽게 쳐먹고 제대로 犬망신 당하기 일쑤였죠.
 
그런데 이 집안일이라는 게 하다보니 또 어떻게 되더랍니다.
 
살림살이로만 치면 대한민국 (남자들 중에서) 상위 1등급에 들정도로
 
실력도 늘고 능숙해졌습니다.
 
또 중간에 짬짬이 개인 시간이 생기면
 
조조할인으로 아침에 영화도 보고
 
아이들 데리고 점심도 사주고 공원도 산책하고
 
운동도 해서 몸도 만들고,
 
이래저래 전업주부男으로 사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살았습니다.
 
그러다 얼마전 친구 경조사때문에 부산에 내려갔다가
 
시간이 남아서 제 옛 일터에 가봤는데,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에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리운 내 동료들은 지금 중국이 바싹 쫓아온다고 해서
 
연락했더니 바빠서 같이 만나기 힘들다 그러는데
 
그게 얼마나 부럽던지...
 
많은 분들 오해하시는 게 있는데,
 
중국이 따라잡는다고 해서
 
조선업계가 막 긴장하거나 그러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좋은 적수를 만났다고 생각하고
 
일터에는 경쟁심리로 인한 혈기와 열정이 가득차죠.
 
저도 그 열정이 그립습니다.
 
정말 배하나 만들려고 밤새 그 배와 씨름하고
 
밤에도 손전등 입에 물고 작업하고 해서
 
겨우겨우 한 척 만들면 그 뿌듯함이 어찌나 크던지,
 
취항할때 내는 그 우렁찬 소리는
 
마치 갓태어난 아기 울음소리처럼
 
시끄럽지만 사랑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이런 것들이 너무나도 그립습니다.
 
이제 다시는 느끼지 못할 내 청춘의 열정,
 
가족을 위한 어쩔 수 없는 희생이었지만,
 
그래도 그 시절 푸른 바다를 끼고
 
세상에서 가장 멋진 배를 만들려고 하루하루 땀흘리던
 
그 시절을 잊을 수 없을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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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일 그만두면서 딱히 어울릴 친구도 없고 그러니
 
이런걸 말할데가 없어서 여기 적어봤습니다.
 
악플같은 거 너무 심하게 달지 말아주세요.
 
(근데 이런거 쓰면 누가 진짜 읽기는 할까?
 
길게 쓰면 다 뒤로가기 누른다는데..;;)
 
 

추천수177
반대수4
베플FEB|2011.02.23 10:02
토끼같은 아이들 유치원 들어가고 하면 주말부부 생각해보심이 어떨지 조심스레 제의견 투척 그러다 우울증 오세요..
베플시시남|2011.02.23 08:56
하 눈물났어요 저는 어린나이지만 열정이란걸 잊고지낸지 한참되었는데 글쓴이님덕분에 다시 자그만한 촛불이라도 키게됐습니다 이 불이 장작불이되어 온몸이 뜨꺼워질때까지,힘들때마다 이글을 읽으며 매번 결심하고 다짐하렵니다
베플김초롱|2011.02.23 12:58
멋지네요.... 내가 희생한게 억울하다.. 집안일이 짜증나고 힘들고 아내가 밉다..라는 말은 없고 지금 전업주부의 역할도 맘에 들고,가족을 위한 희생이 싫은게아니라.. 꿈이 그립다고 하시니.. 얼마나 가족을 위한 배려가 깊으시고 맘 좋으신 분인지 느껴지네요.. 힘내세요... 아내분께 솔직하게 이야기 해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아내분이 정말 고마워 하시고 잘해주셨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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