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기사를 준비하면서 3.1운동과 관련된 자료와 정보를 수집하며 문득든 생각이 있다. '왜 우리에게 알려진 독립운동에 대한 내용들은 한 사람의 영웅의 일대기 같을까?'라는 생각이다.
도시락 폭탄을 던진 윤봉길의사, 히데요시를 권총으로 쏜 안중근의사... 그 분들 혼자만의 힘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한 것은 아니다. 그분들이 큰 일을 할 수 있도록 곁에서 또는 뒤에서 도와준 많은 분들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왜 어느 역사책이나 역사교과서에는 큼직큼직한 사건만 나열되어 있을 뿐, 가장 암담하고 칠흙같았던 일제강점기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들은 없는지에 대한 생각이 덮어진 독립운동사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냈다.
짧지만 내가 찾은 자료와 정보를 통해 그 동안 잘못 알았던 몇 가지 독립운동에서 있었던 역사적 사실에 대해 객관적으로 조금이나마 알아보려고 한다.
안중근의사는 1908년 6월, 연해주 지역에서 300여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경흥과 종성, 회령에 주둔하고 있었던 군경을 쳤다.
바라건데 동포들아
피흘리기를 맹세하라
이 세상에서 대의를 모르는 귀신은 되지마라
시를 지어 의병들을 격려했으나, 워낙 급속히 모집한 오합지졸인지라 처절하게 참패했다. 그러나 안중근의사는 죽는 순간까지도 자신이 대한의 의병 참모중장임을 자처하고, 선포하였다. 안중근의사는 '나 개인 안중근이 개인 이토를 살해한 것이 아니라, 조선의 의병대장으로서 일본이라는 나라와 전쟁을 한 것이고, 전범 이토를 처단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일본의 법정은 그를 재판할 권리가 없으며, 오직 만국공법만이 판결할 수 있다.'라고 주장하였다. 이토록 논리정연하고 죽음 앞에 당당한 안중근... 과연 그는 누구일까?
안중근(1879~1910)의사는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 수양산 아래에서 안태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안중근의사는 법정에서 자신을 포수일 뿐이라고 소개했지만, 기실 그의 아버지 안태훈 진사는 황해도의 거유였다. 독립운동가 노백련선생, 백암 박은식선생, 백범 김구선생이 모두 이 지역 사람들인데 안중근의사의 부친과 교류가 자주 있었다고 한다.
저 대지의 풀을 보라.
들불이 저 불을 다 사르지 못한다.
봄바람이 불면 꼭 다시 살아난다.
이것이 내가, 우리나라가 반드시 광복하는 날이 있다고 믿는 이유이다.
- 백암 박은식(1859~1925)
김구선생은 안중근의사가 16세 때, 안중근의사의 집에 기거하며 신세를 진적이 있었다. 안중근의사의 학문과 기계는 이러한 고매한 가풍에서 일찍이 형성된 것이었다. 1905년 그는 상해로 갔다. 그 곳에서 민영익선생을 만나 인생의 진로에 대한 자문을 구하려 했으나 상면을 거절당하였고, 그곳에서 안면이 있는 프랑스인 곽신부를 만나 애국계몽에 대한 신념을 얻게 된다. 그리고 곧 부친사망소식을 듣는다. 1906년 3월 진남포로 이사하여 가재를 털어 돈의학교와 삼흥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사업에 전념하였다.
그런데 1907년 봄, 작고하신 아버지의 친구 김진사라는 분이 찾아와 긴급한 시국에 촌구석에서 교육사업에 전념하는 것이야말로 허망한 일이라고 그에게 훈계한다. 큰 세상으로 나가 보다 현실적인 투쟁을 할 때라고 역설한 것이었다.
그 후, 그는 처음 북간도로 갔다. 김진사의 충고는 결정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이 애국계몽에서 무장투쟁으로 전환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는 북간도에서 유숙하며 연해주 주변의 상황을 돌아보고, 3개월 후 연해주와 블라디보스톡 등에서 마음이 맞는 사람을 모아 의병을 일으켜 조선으로 넘어가 활동을 하다가 죽을 고비를 넘긴 후, 오합지졸, 중구난방이 아닌 효율적인 방법을 찾은 것이 단독으로 결행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었다.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이토저격이라는 대사건이 벌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안중근의사는 의병전쟁에서 참패의 고배를 마신 뒤 하바로프스크로 갔다. 이곳에서 흑룡강 상류를 둘러보고 1909년 정월 연추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 곳에서 12명의 동지와 왼손 약지를 끊어 피로서 태극기에 대한독립이라 쓰고 투쟁을 맹세한 '단지동맹'을 한다.
안중근의사의 거사는 일개인의 주관적 의사로만 이루어질 수는 없다. 그 의거를 뒷받침해주는 조직과 자금, 이러한 하부구조가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독립운동의 역사는 이러한 하부구조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의 영웅적 사건들만을 기술하고 있다.
그래서 이제 안중근의사가 대의를 도모할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들을 찾아보려고 한다.
안중근의사는 공판석상에서 이범윤선생과의 관계를 공식적으로 거부했지만, 안중근의사는 이범윤(1863~?)선생을 만난 사실이 있다. 이범윤선생은 간도지역 조선총영사관으로 활약을 하다가 1905년 을사늑약 후 정부로부터의 소환명령을 거부하고, 연해주로 왔다. 그리고 이 지역의 독립투쟁의 실제적 중심이 되었다.
그는 전주이씨로서 황실과 특별한 관계가 있었지만 투철한 독립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구한말 우리나라의 가장 유능한 외교관이었으며, 주러시아공사로서 경술국치를 당한 후 통분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한 이범진(1852~1910)선생이 이범윤선생의 친형이었다. 그리고 고종이 파견한 헤이그 밀사로서 이상설선생, 이준선생과 함께 통역 등 실제적 업무를 도맡아 했던 이위종(1887~?)선생도 이범진선생의 아들이었다.
이범윤선생의 배후에는 항상 연해주 지역에서 한국사람으로서 가장 돈이 많았던 최재형(1860~1920)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최재형은 함경북도 경원 사람이었는데, 1860년대 이미 러시아로 이주하여 러시아인으로서 확고한 기반을 닦은 상태였다. 그는 군납업을 통해 거상이 되었고, 두차례나 러시아 황제를 알현할 정도의 사람이었다. 바로 최재형의 집이 안중근의사와 그의 동지들이 대의를 도모하며 은거하고 있던 연추에 있었다. 그는 대한의 독립을 위해 자신이 벌어 놓은 돈을 흔쾌히 독립운동에 군자금으로 바쳤다. 안중근선생이 이범윤선생과 의병을 일으켜 두만강을 건넜을 때도 그 군자금을 최재형이 줬다고 한다. 또한 이토를 죽이는 안중근선생의 거사에도 최재형이 관여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안응칠 역사(안중근의사가 죽기 전에 감옥에서 쓴 자서전)'나 안중근의사 관련 자료 어디에도 최재형이라는 인물이 없지만 그를 보호하고자 하는 차원에서 언급하지 않은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에 나온 추측이다. 대한국민의회나 해조신문 등 연해주 지역의 정치, 언론, 교육사업은 최재형의 헌신없이 이루어진 것이 없을 정도였다. 초기 상해임시정부에도 상당한 자금을 보냈고, 임시정부의 초대 재무총장의 직위는 사양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1920년 4월 연해주 경신참변, 3.1운동 1주년 만세사건을 빌미로 대거 민간 소탕작전을 벌였던 일본 군경에 의하여 무참히 살해되었다.
丈夫歌(장부가)
장부가 세상을 살아감이여, 그 뜻이 크도다.
시대가 영웅을 만듦이여, 영웅 또한 시대를 만들리니.
우뚝 천하가를 노려봄이여, 어느 날에 큰 일을 이루리오.
동풍은 갈수록 차가운데, 장사의 의기 오히려 뜨겁도다.
분개하여 한 번 떠남이여, 반드시 그 뜻을 이루리로다.
쥐 같은 도적 이등이여, 어찌 살기를 바랄 수 있으리.
이리될 줄 알았으랴만, 일은 이미 돌이킬 수 없노라.
동포여, 동포여, 하루 빨리 대업을 이룰지어다.
만세, 만세를 외침이여, 대한독립을 위함이로다.
만년 또 만만년을 이어가라. 우리 대한동포여.
안중근의사 본인의 기술에 의하면 블라디보스톡에 이르러 우연히 이토가 올 것이라는 소문을 듣게 되었고, 대동공보 등 여러 신문을 보고 비로소 이토가 몇 일 사이에 하얼빈에 도착할 것이라는걸 확인했다고 했다. 보다 치밀한 거사계획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전체적 정황을 정밀히 검토해보면 안중근의사의 거사는 단독적인 의지로 추진되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그에게는 이미 검은색의 7연발 블로닝 권총이 있었다. 약실에 한발을 더 채워넣으면 8발이 나갈 수 있었고, 총알은 덤덤탄으로 관통력은 약하지만 탄두에 십자홈을 내어 관통 후 납성분이 장기로 퍼져 치명적 타격을 줄 수 있는 총알이었다. 안중근의사는 거사 전 여관방에 앉아 자신의 비운의 심정을 장부가로 남겼다.
안중근의사와 마지막을 함께한 동지들이 있었다. 포브라니치나야에서 한의사를 하던 유경집의 아들로 러시아어 통역으로 가담한 유동하와 자발적 동기로 참여하여 끝까지 의리를 지킨 우덕순, 조도순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안중근의사의 거사에 큰 도움을 주지는 못했다. 유동하는 당시 17세의 어린 나이에 사건전말에 대해 모른 채 어리둥절하기만 했던 것 같고, 우덕순과 조도순은 하얼빈역 84km 지점의 채가구역 부근에서 곤히 자고 있었으며, 열차는 거사당일 새벽 채가구역을 그냥 지나쳤다고 한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의사는 하얼빈에서 산 외투를 걸치고 일본인으로 보이게 만드는 챙이 있는 편한 운동모를 썼다. 그리고 8발의 총알이 채워진 블로닝 권총을 오른쪽 주머니에 넣었다.
이토는 기차가 도착한 후에도 기차에서 내리지 않고 20분동안 러시아 재무장관 코코프쵸프와 러일전쟁에 이후에 북만주이권문제에 관한 최후의 단판을 지었다. 본적이 없는 이토를 안중근의사는 키가 작고 흰 수염이 난 노인이 나타나자 그가 이토라는 생각에 러시아 병사들의 벌어진 틈을 타 가지고 있던 블로닝 권총으로 세 발을 이토의 어깨부터 명중시키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주변에 수행원 하야시,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만철이사 다나카까지 명중시키고 안중근의사는 러시아 병사들에게 잡히고만다. 안중근의사는 그 후 러시아 철도국에 한나절 잡혀있다가 일본 총영사관으로 후송되었다.
안중근의사는 바로 이곳 지하 취조실에서 그 유명한 이토의 15죄목을 설파한다.
이토의 15가지 죄목
조선의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조선의 황제를 폐위시킨 죄
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
무고한 한국인을 학살한 죄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철도, 광산, 산림, 천택을 강제로 빼앗은 죄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
군대를 해산시킨 죄
교육을 방해한 죄
한국인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시킨 죄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 버린 죄
한국인은 일본인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
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경쟁이 쉬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한국이 태평 무사한 것처럼 위로 일본 천황을 속인 죄
동양의 평화를 깨뜨린 죄
일본 천황의 아버지 태황제를 죽인 죄
11차 심문, 6회 공판을 거친 후 안중근의사에게 사형이 언도되었다. 안중근의사는 판결이 부당하다고 생각하고 항소하려고 했다. 5일이 남아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항소를 포기하고 죽음을 선택하게 만든 것은 그의 생존을 가장 원했을 어머니였다.
어머니가 다녀간 후 안중근의사는 진실로 생사를 초월한 사람처럼 보였다고 일본인 간수장 치바는 기술했다. 어머니는 그 후 안중근의사를 더이상 찾지 않았고, 사형집행 당일 아침, 어머니는 하얀 비단으로 손수 지으신 한복을 보냈다고 한다.
그 때 안중근의사의 나이는 32살이었다.
참고자료
- 소설 안중근 불멸(이문열)
- 뮤지컬 '영웅'
- 평화를 위해 쏘다(이준희)
- EBS다큐 : 도올이 본 한국독립운동사 3부 - 두만강을 넘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