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내가 강의실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비는 좀처럼 멈출 생각을 않는데우산도 없이. 그래서 우산을 들고 내가 시험이
끝나고 나오기를 강의실 밖에서 기다렸다는것이었다.
수줍은 미소를 띄우던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빗줄기가 멈추었다.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하얀 옷을 입은 젊은여자가 등 뒤에 서 있었다.
“아까부터 봤는데 비가 내리는데 꼼짝않고앉아 있어서. 제가 방해가 된 것은 아닌지요.”
그녀의 출현이 반갑지는 않았지만 그녀의호의를 매정하게 뿌리칠 수는 없었다.
“일어나세요. 빗방울이찬데감기드시겠어요.”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는 망설이다가 일어났다. 바지가 젖어서 다리에 짝 달라붙
어 있었다.
“몹시 사랑하셨던 분이신가 보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찬찬히 살폈다. 나이는 스물서넛이나 됐을까? 켤코 미인
은 아니었지만 웬지 푸근한 느낌이 들었다. 어디선가 만난 적이 있는 것만 같았다. 특히 따
뜻한 눈길이 그런 느낌을 강하게 줬다.
“사랑하시는 분이 걱정하시겠어요. 그만 내려가시죠?”
그녀가 다시 얼굴에 근심을 담고 말했다. 나는 웬지 그녀의 말을 뿌리칠 수 없었다.
은영아, 안녕!
나는 마음속으로 은영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그녀가 우산을 받치고 나란히 걸
었다. 그녀는 내 쪽으로 우산을 기울였지만 나의 전신은 이미 흠뻑 젖어 있었다.
“부러워요. 이토록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다니.”
“네, 그랬었죠. 하지만 지금은.”
마땅히 설명할 말이 없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저쪽 끝에 정자가 보였다. 나는 걸음을 빨
리 하며 화제를 돌렸다.
“어느 분 찾아오셨어요?”
“저는 이 곳에 살아요.”
그녀가 하늘을 힐끗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리곤 정자에 도착할 때까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정자에 올라가 있으니 잊고 있었던 추위가느껴졌다. 담배 생각이 나서 담배를 담배를 꺼
냈다. 담배는 다행히 필터만 젖어 있었는데 라이터에 물이 스며들었는지 불이 켜지지 않았
다.
“아까 그 분 언제 돌아가셨어요? 봉분을 보니 돌아가신 지 오래 된 것 같던데.”
불을 켜기 위해 연신 라이터돌을 튕기는데그녀가 물었다. 나는 담배 피우는 걸 포기하고
라이터를 주머니에 넣었다.
“오래 되기는요. 겨우 3년밖에 안 됐는 걸요. 하지만 어떤 때는 3년이 아니라 3만 년이
흐른 것 같기도 해요.”
“그만큼 고통스러웠던 세월이라는 건가요?”
“고통이요? 모르겠어요. 어쩌면 아픔을 느낄 수 있는 건 진짜 고통이 아닌지도 몰라요.”
돌아보면 도저히 견딜 수 없었기에, 마치 식물인간처럼 마비된 상태에서 살기 위해 몸부림
쳐야 했던 지난날들이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병이었나요?”
“아뇨! 그 날은 은영이의 스무번째 생일이었어요.”
나는 멀찍이 보이는 은영의 봉분을 바라보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은영이 죽고 나서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이야기였지만 그녀에게는웬지 들려 주고 싶었다. 아니, 이제는 가슴속
에만 묻어 두지 말고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해버려야 할 것만 같았다.
“그녀의 스무번째 생일만큼은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로 만들어 주고 싶었죠.
전 그래서 두 달 전부터 준비를 했어요. 내 손으로 마련한 선물을 사 주고 싶어서 세차장에
서 새벽부터 아르바이트를 했죠.“
“선물로 뭘 준비하셨는데요?”
“장미꽃이요. 그녀는 하얀 장미를 무척 좋아했어요. 거리를 거닐다 하얀 장미를 보면 사달
라고 조르곤 했죠. 전 그런데 돈이 없어 늘 한송이밖에 못 사 주었어요. 장미꽃을 받아 들고
좋아하는 그녀를 보면서 늘 많이 사 주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 했거든요.”
“그래서 스무 송이를 준비했겠군요.”
“아녜요. 그 정도는 그녀도 예상하고 있을지모르잖아요. 전 그녀를 깜짝 놀라게 하기 위해
서 이백 송이를 준비했어요. 꽃 가게 주인에게며칠 전에 미리 싱싱한 장미로 부탁을 해 두었
죠.”
“굉장했겠네요!”
“네, 저 혼자 들기 버거울 정도로. 저는 카페로 먼저 가서 그 집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친구
와 함께 그녀를 깜짝 놀라게 해 줄 작전을 짰어요. 만반의 준비를 해 놓고 그녀가 들어서기
만을 기다렸죠.
그녀는 언제나 약속을 하면 삼십 분 전부터나와서 기다리곤 했는데 자기는 튕길 줄도 모
르는 바보라고 귀여운 투정을 부리곤 했는데그날 따라 유난히 늦더군요. 집에 전화를 해
봤더니 아무도 받질 않더군요.
저는 하염없이 기다렸어요. 그녀의 신변에그런 일이 일어났으리라곤 생각도 못 하고.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장미는 점점 시들어 가고, 그녀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이
가슴을 옥죄어 왔지만, 그런 생각을 떨쳐 버리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혹시나 해서 우리 집에 전화를 해 봤죠. 그랬더니 어머니가 사고 소식과 함께 병원을 가
르쳐 주더군요.
갑자기 지구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죠.
저는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거의 실성하다시피 해서 병원으로 뛰어갔어요. 중환자실 복도
에 은영의 아버님이 울고 계시더군요.
내가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보조원이 카트를밀고 나오더군요. 은영의 어머님이 카트를 잡
고 몸부림 치고 있고. 예감이 이상해서 하얀가운을 벗겨 봤어요.
은영이 하얀 장미를 받고 좋아서 어쩔 줄몰라해야 할 은영이 잠들어 있더군요. 난 그
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내가 깨울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잠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았죠. 나
는 순간, 내 영혼이 모조리 빠져 나간 듯한 기분을 느꼈어요. 한 마디 말도 못하고 울지도
못하고 속으로 눈물만 하염없이 삼켰죠.
나는 그녀를 보내지 않았는데 그녀는 그렇게 떠나가고 말았죠. 집앞 횡단보도에서 신호
를 무시하고 달리던 차에 치여서. 별다른 외상도 발견할 수 없는 그런 사고였는데 그만 쓰러
질 때 머리가 경계석에 부딪히는 바람에. 스무번쩨 생일에. 그 좋아하던 하얀 장미도 못 받
아 보고.”
그녀는 슬그머니 내 손을 잡았다. 만난 지얼마 안 된 사이였지만 그녀의 동작은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안타까워하지 마세요. 은영 씨는 일한 씨가수시로 갖다 주는 장미를 받았으니까 행복해
할 거예요. 일한 씨 이런 거 생각해 본 적 있어요? 은영 씨는 사고 순간에 무슨 생각을 했을
까, 하는.”
나는 머리를 저으며 슬그머니 손을 빼냈다.
“아마 이런 마음이었을 거예요. 내가 못 가면 일한 씨가 많이 기다릴 텐데. 일한 씨를 기
다리게 하면 안 되는데. 꼭 가야 하는데.”
그녀는 마치 나와 은영 사이를 잘 알고 있다는 듯이 은영의 마음을 이야기했다. 사실 은영
이라면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그런 생각을 하고도 남을 애였다.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로 은영씨를 찾아왔죠? 무슨 특별한 날인가요?”
나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그녀가 물었다.
아무리 봐도 낯익은 눈길이었다. 부드러운 눈길을 받으니 나도 모르게 입이 열렸다.
“아니에요. 사실 은영이가 떠난 뒤 저는 삶이 끝났다고 생각했어요. 정말로 은영의 체취
가 그리워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죠.
학교 다니는 건 물론이고 숨쉬는 것조차 힘들었으니까요.
이 세상 어디에도 그녀는 없었지만 이세상 어디를 가도 그녀가 있었죠.
살아 있다는 것이 그때처럼 괴로웠던 적은없었어요.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군대를 갔어
요. 일종의 도피였죠. 군 복무를 마치는 동안저는 제 내면 속에 살아 있는 감각을 죽이기
위해서 무진 안간힘을 썼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