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다니던 시절. 동아리 방 앞에 있던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후배가 담배는 왜 피우는 거냐고 물었습니다.
입학한 지 얼마 안 돼 아직 고등학생 티가 나는
후배에게 뭐라고 설명을 해줘야 하나 잠깐 생각하다 입을 뗐습니다.
“시간이 좋아서 피우는 거야. 담배 피우면서 아무 생각이나 할 수 있는 그 시간.”
나중에 보니 그 후배는 군대 가기 전 친구들에게 담배를 배웠다고 하더군요.
군대에 가서 고참들과 어울리려면 담배를 피워야 한다면서 말이죠.
후배는 그렇게 사회 생활을 위해 담배를 배웠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저마다 담배를 피우는 사연이 있겠죠?
지난해 서점에서 우연히 ‘담배 피우는 사연’이라는 책을 본 순간,
동아리 방 앞 그 벤치에서 후배와 나눴던 대화가 생각났습니다.
‘담배 피우는 사연’은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전민조가 사진 기자로 활동하던 시절
찍었던 사진 가운데 담배 피우는 사진만 골라 엮은 포토 에세이 형식의 책입니다.
두꺼운 양장본의 겉 표지를 들추자 마치 봉인이 풀리듯
허연 연기 속에서 담배를 집어 든 낯익은 인물들이 나타났습니다.
얼마나 현실적인지 그들이 바로 앞에서 담배 연기를 내뿜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사진에서 전해져 오는 진한 담배 냄새에 취해 저는 책을 집어 들고 계산대로 향했습니다.
집에 돌아가 책을 펴기 전, 다비도프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였습니다.
사진 속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인물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는
저도 함께 담배를 피워야만 할 것 같았기 때문이죠.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 후배가 담배를 배웠듯 말입니다.
스탠드 불빛 속으로 담배 연기가 퍼져나갔습니다.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담배를 들고 골똘히 생각에 잠긴 최종철 동아일보 편집국 사회부장 사진에서는
당시 언론사 ‘사회부장’이 갖는 고뇌와 책임감이 느껴집니다.
지금처럼 인터넷에 발달하지 않은 그때에는 기자들이 일일이
편집국에 전화해 기사를 불러줘야 했습니다.
그렇게 쓰여진 기사를 정리하다 잠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최 부장을 옆에 있던 전민조 작가가 포착한 것입니다.
1983.2.23 동아일보 편집국에서 찍은 최종철 사회부장
당시는 독자들의 뉴스 제보, 기자들의 취재에 앞서
사회부장이 관심을 갖는 현장이 뉴스가 되는 시절이었습니다.
그만큼 사회 부장으로서 갖는 책임감은 막중했죠.
이 사진 아래 전 작가는 “기자들의 폭로나 비판만 가지고는 세상이 금방 변하지는 않았다.
기자들이 변해야 하는 것이었다”라고 적어 넣었습니다.
이 사진은 전 작가가 판문점 취재를 나갈 때마다 마주쳤던 북측 기자의 모습입니다.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와 표정, 그리고 뒤편에서
왼쪽을 응시하고 있는 사람이 어우러져 묘한 긴장감을 자아냅니다.
이 남자는 노동신문기자로, 1975년 판문점에서 일어난
미군장교 해드슨 구타사건 때 원인을 제공한 주인공입니다.
1987.7.2 판문점에서 찍은 북한 노동신문기자
다음 사진에서는 임권택 감독이 비교적 젊었을 때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짧은 담배를 물고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모습에는 17살이라는 어린 나이부터
거친 영화 판에서 고생해야 했던 세월이 담겨 있습니다.
이제 그는 ‘만다라’(1981), ‘서편제’(1993), ‘태백산맥’(1994), ‘천년학’(2006)’부터
올해 개봉한 ‘달빛 길어 올리기’까지 100편이 훌쩍 넘는 영화를 찍은 거장으로 한국 영화계에 큰 획을 그었습니다.
방송작가 김수현의 사진은 유난히 제 시선을 끌었습니다.
김수현 작가는 밤 12시부터 새벽7까지 집필하는 동안 보리차 한 주전자와 담배로 버틴다고 합니다.
커다란 뿔떼 안경 사이로 보이는 눈은 아마도 원고를 응시하고 있겠죠.
골몰하고 있는 그녀에겐 카메라 렌즈 따위는 안중에 없는 듯합니다.
우리는 무심한 듯 손에 들려 있는 담배를 통해 집필 작업이 쉽지 않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뿐입니다.
전 작가는 이 사진에 “나는 처음으로 여성이 담배 피우는 모습을 보면서
남성들 앞에서 가장 거침없이 담배를 피우는 여성으로 생각했다”고 적었습니다.
1974.1.7 수유리 자택에서 찍은 김수현 작가
1973.8.24 안국동에서 찍은 배우 신성일
김수현 작가의 담배가 작가의 고뇌를 보여줬다면, 배우 신성일의 담배는 타는 듯한 그의 열정을 보여줍니다.
“무슨 일이든지 노력하기에 달렸다. 영화 하나만을 위해서 전력투구 하다 보면
어떤 형태로든지 결실이 있다”고 말하는 그의 눈은 흑백 사진 속에서도 빛납니다.
마지막 사진은 동아일보 편집국 사진부에서 함께 일하던 오강석 기자의 모습입니다.
뉴스가 없는 무료한 시간 사진기자들의 장난스런 모습을 읽을 수 있습니다.
전 작가는 “얼굴은 인간의 풍경이며 한 권의 책”이라는 발자크의 말을 사진과 함께 적어뒀습니다.
1982.6.15 동아일보 편집국 사진부에서 찍은 오강석 기자
책 마지막 장을 덮고 난 뒤 책상 위 재떨이에는 어느 새 담배 꽁초들이 쌓여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또 다시 마지막 남은 다비도프를 꺼내 물었습니다.
이제 저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죠.
사람들은 저마다 담배 피우는 사연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도 담배를 피울 때면 여러 가지 상념들에 휩싸이곤 하는데요.
지금 생각해보니 알싸한 향이 가득 묻어나는 담배에는 항상 첫 담배와 마지막 담배가 존재했던 것 같습니다.
대학교 첫 등교를 하며 피웠던 첫 담배와 졸업식 날 친구와 나누었던 마지막 담배
군대입소하기 전의 마지막 담배와 전역하고 나서는 길에 빼어 물었던 첫 담배
첫 직장에 출근을 앞두고 피웠던 아침의 첫 담배와 그 직장을 떠나오면서 동료들과 나눴던 마지막 담배
그리고 헤어졌던 여자친구를 기다리며 피웠던 마지막 담배의 여운…
당시의 기억들은 아련하지만 당시 피웠던 첫 담배와 마지막 담배의 향은 아직도 생생한데요.
뭔가 찡하면서도 가슴속에서 올라오는 듯한 그 향은 깊이가 있었습니다.
오리엔탈 우디 계열처럼 좋은 나무가 타는 듯한 향으로 가슴을 천천히 고동치게 하다가도,
매캐한 연기로 눈시울이 붉어지는 스파이스향의 톡톡 쏘는 듯한 맵고 싸한 향기랄까요.
굳이 향수로 표현해 본다면 불가리 블랙이라고 할 수 있겠죠.
같은 향이지만 기분이나 처한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그런 향 말입니다.
여러분은 유난히 알싸했던 담배향기의 추억에는 어떤 것들이 있나요?
출처 : Life Travelogue 블로그 (http://blog.naver.com/classictas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