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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를 사랑한다면 길지만 꼭 읽어봐야 할 글

카스타 |2011.05.12 04:31
조회 206 |추천 2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부는 경험을 토대로 점 점 대담해졌으며 더욱 끔직한 만행들을 자행한다.

 

그리고 1980년 5월 = 김일성은 6.25때 사용했던 전쟁 암호를 하달한다.

 

[특명] 폭풍

 

평양시 룡성구 룡추 2동 대남 사적관에는 광주 침투 증거들이 전시 되어 있다.

 

 

한편 김일성은 표면상으로는 1980년 초(2월6일)에 남북한 총리회담개최. 남북 간의 직통전화 개설 등의 평화제스처를 취하는 한편 남한 내의 혼란스런 정세를 이용하여 내부 교란작전을 구상하였다.

 

북한군 정찰국 소속의 황해북도 신천군 주둔 제1321부대(일명 신천복수대대)의 인원 300명이 폭풍명령을 받고 남포시 와우도 인근 지역에 집결하였다.

 

신천보구여단 300명을 포함하여 남파된 특수부대인원 총600명이 남포에서 출발하였다고 부분적으로 기록이 있으나 광주에 침투되었던 증인들의 자료에 따르면 신천복수연단 외 타 여단들에서 차출된 300명의 인원은 동해안의 루트를 이용했으며 함경남도 신포시 마양도 잠수함기지에서 출발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남포에 집결한 전투인원들을 환송하는 연회장에 김정일을 배동하여 김중린. 이하일이 참가했으며 김정일은 당시 전투원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그들을 고무하였다.

 

김정일은 군인들과 기념사진을 찍었으며 그 자료는 현재 평양시 룡성구 룡추2동 대남 사적관 지하전시실 2관에 보관되어있다

 

광주 사태에 참여한 사람들 중 62명이 영웅으로 추대됐다.

 

이것이 518광주사태의 서막이었다  


광주시민으로 위장하고 유혈폭동 선동하기 위해 침투하다가 붙잡힌 간첩 이창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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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것을 북한군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광주사태 주동자들 중에 북한으로 월북한 이들도 있거니와 <<북한에서는 매년 5.18기념행사>>를 성대하게 한다.

 

  ▲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의 5.18 기념 집회

 

 

북한이 남한의 민주화운동을 위해서 5.18을 기념하는가?

아니다. 북한이 바라보는 5.18은 민주화운동이 아니라, 반미운동이고 공산화운동이다.


그러면, 북한이 5.18에 이토록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이것을 당시 김일성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1980년 5월 18일 당시 북한군 총병력이 휴전선에 집결하여 남침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서 김일성의 작전이 무엇이었을까? 한국전쟁 중에 김일성이 남로당 지도자 박헌영을 사형에 처한 일이 있었다.

 

그것은 북한이 남침하면 남로당에서 유격대를 조직하여 전국적으로 폭동을 일으켜야 하는데, 남로당 유격대의 활동이 미미했던 것으로 보아 박헌영은 미국 스파이라는 죄목 때문이었다.

김일성은 한국전쟁 때 미국의 참전으로 적화통일에 실패한 쓰라린 경험이 있다. 그럼에도 1980년 5월에 남침하려 하였을 때는 분명 전략이 있었을 것이다.

 

그 전략이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월맹의 호지명이 월남을 적화통일하는데 성공한 작전이었다.

 

지금의 한국과 흡사한 상황에서 반미 시위 때문에 주월미군을 철수시키던 미국은 만일 월맹이 남침하면 공군과 해군 지원을 하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그러나 호지명에게 미국의 참전을 방해하는 작전이 있었다. 그것은 월남 중부지방에서 시민군을 조직하여 민중봉기를 일으키는 것이었다.

1980년 5월에 김일성도 분명 똑같은 작전을 쓰려 하였을 것이며, 또 광주사태 때 광주에 북한군 병력들이 들어와 있었다는 탈북자들의 증언이 있다.

 

게다가 당시 광주에서 전개되었던 일들이 우리 언론보다 북한 뉴스에서 먼저 보도되었다고 하지 않는가.


1975년 3월 호지명은 월맹군을 민간인 복장으로 위장하여 월남 중부 지방에서 무장 폭동을 일으키게 하였지만 시위 선봉에는 월남인을 세웠다. 즉, 자생 간첩단 조직을 이용하여 그들을 이용하였던 것이다.

만일, 김일성이 똑같은 작전을 사용하려고 하였다면, 김대중의 민중봉기 때 군경과 시민군을 충돌시키고, 시민군의 군중심리를 자극하여 내전을 일으키려 하였을 것이다.

 

한국이 내전 상태가 되면 주한미군은 무력해지기 때문이다. 만일 김일성에게 이런 계획이 있었다면 5월 22일로 예정된 김대중의 민중봉기 때 남한의 자생 간첩단 조직들을 동원하여 한국을 내전 상태로 만들려 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518광주사태가 결코 돌발적인 사태만은 아니었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당시 자생 남파 간첩단 조직 중에 어떤 인물이 있었을까?

 

만일 광주사태 주동자가 남한의 자생 간첩이었다는 사실이 입증된다면 광주사태에 얽힌 수수께끼는 풀릴 것이다. 그런데, 아직 명확한 입증은 아니더라도 그가 자생 간첩이었다는 징후는 수없이 많이 있다.

 

국내에서는 구할 수 없는 북한 서적들을 소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며 광주에 해방구를 설치한 사실 등이다. 해방구는 내전시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통치지역을 의미한다.

 

그리고 만일 그가 북한에서 남한에 해방구를 설치하라는 지령을 받지 않았더라면 해방구를 설치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윤상원의 경력에도 이상한 점들이 있다. 대학졸업자인 그가 노동을 하면서 노동자들을 포섭하여 의식화 작업을 시키는가 하면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들불야학을 운영하면서 반정부, 반국가 이념을 넣어주고 있었다.

 

바로 이것이 5월 27일 새벽 항복을 요구하는 군인들에게 사격하다가 반격 실탄에 희생되었던 시민군들 중에 전남대생은 없고 청소년들과 노동자들이 많았던 이유였다.

만일 소를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소 꼬랑지만 보여주고 이것이 소라고 말하면 그것은 분명 거짓말이다. 그리고 이런 거짓말을 그간 5.18단체들이 해왔다.

 

광주사태가 공수부대와의 충돌로 시작되었는가? 아니다.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광주사태는 폭도들이 광주시내의 모든 파출서들을 파괴하고 경찰들을 묶어놓고 때리며, 달아난 경찰은 집까지 찾아가 폭행하였기 때문에 시작되었다.

 

이것은 5.18 단체들도 아는 사실이다. 그러면, 만일 털끝만한 양심이라도 있다면 왜 이 사실을 숨기고 꼬랑지만 보여주고 이것이 광주사태라고 말하는가?

 



1980년 5월 18일 오후 3시에 광주사람이며, 광주 예비사 사단장 정웅 소장이 광주 예비사 소속 공수부대원들에게 폭동 진압 명령을 내린 것은 사실이다. 그가 단독으로 그 지시를 하였겠는가. 아니다. 광주시장과 전남도지사와 내무부장관의 요청이 있었다.

 

아니, 어느 나라에서 폭도들이 시내의 모든 파출서들을 화염병으로 때려 부수고 경찰들을 잡아다가 묶어놓고 때리는데 가만히 보고만 있어야 한단 말인가.

 

1980년 5월 18일 오후 3시에 광주사람이며, 광주 예비사 사단장 정웅 소장이 광주 예비사 소속 공수부대원들에게 폭동 진압 명령을 내린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설사 정웅 장군이 자기 고향 사람들에게 과잉 진압을 한 것이 사실이라도, 그 당시 부드럽게 타일러서 폭동을 진압하는 대안이 있었단 말인가?

 

그리고 폭도들에게 끌려가 매를 맞고 있는 경찰들도 분명 광주 시민일진대 경찰이 경찰을 구해낼 수단이 없었던 폭동 상황에서 광주시장과 전남도지사가 정웅 장군에게 SOS 를 요청한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만일 그런 상황에서도 광주시장과 전남도지사가 내무부장관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지 않으면 직무유기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만일 광주시장과 전남도지사와 정부로부터 폭동 진압 요청을 받고도 정웅 장군이 모른척하고 있었다면 그것은 직무유기가 아니겠는가.


에게 SOS 를 요청한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1980년 5월 18일 오후 3시에 광주사람이며, 광주 예비사 사단장 정웅 소장이 광주 예비사 소속 공수부대원들에게 폭동 진압 명령을 내린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왜 광주 사람 정웅 소장이 공수부대를 광주 시내에 출동시켰느냐를 따지기 전에 과연 북한의 배후 조정이 없이 광주시를 내전 상태로 만드는 폭동이 일어날 수 있었겠느냐를 물어야 한다.

 

 

 

 

신원 불상자에 대해서는

북한에서 파견한 공작원이었다는 탈북자들의 증언들이 많이 있다.

 

 지문 미상 13명에 대해서는 가족도 없고, 신원도 불명한 사람이었다.

 

며칠 전에 만난 탈북자는 이렇게 증언했다.

“그 친구의 남동생이 특수부대에 있댔는데 1980년 광주사태 때 광주에 가서 죽었댑니다. 시체는 찾지 못했지만, 남동생의 소지품을 가지고 열사 능을 만들어 주었댑니다. 당시 광주사태 때, 북에서는 대남사업부, 3호 청사, 무력부, 정찰부 사람들이 많이 내려갔다 들었습니다. 왜 지문이 없어서 신원이 미상이라는 사람들 있지요? 그 사람들이 모두 북에서 갔던 사람들이라 합데다. 광주에 가서 장갑차를 몰았다는 사람도 있다 합데다. 북에서는 다 아는 상식이지요”

민간 사망자 162명중 72,2%에 해당하는 117명은 폭동군이 탈취한 M-1과 칼빈 소총에 의한 것이었다. 군인들은 모두 M-16을 소지했다. 이는 대부분의 죽은 시민들이 폭동군의 총에 죽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발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72.2%가 오발일 수는 없다. 이는 폭동군 속에 불순분자들이 들어 있으면서 국민을 흥분시키기 위해 조직적으로 시민을 쏘았을 확률을 높이고 있다.

민간 사망자 162명 중 M-1 및 칼빈 소총에 의해 사망한 사람 117명을 빼면 45명이 남는다. 이들 중 상당수가 수류탄, 화상, 타박상, 자상 등으로 죽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

13명의 사망자가 신원불상자들이 북한 공작원이라면 죽지 않고 살아간 공작원들은 얼마나 될까?

중상자는 총 391명, 이중 군인이 82명, 경찰이 27명, 민간이 282명이었다. 북한공작원이 조직적으로 개입됐다면, 이들 민간인이 당한 부상 역시 대부분 M-1 및 칼빈에 의한 것일 가능성도 높다.
북한공작원들이 개입했다는 강력한 정황증거들은 작전의 조직성에 잘 나타나 있다.

죽은 북한 공작원이 13명이라면은 살아서 돌아간 북한 공작원을 얼마나 되며 남아 있는 공작원을 얼마나 될까 ?

추천수2
반대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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