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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의용군 참모중장 안중근 의사 전기』10. 일제의 회유를 거부하다 (1)

대모달 |2011.05.19 01:05
조회 232 |추천 0

 

 

○ 국내외에서 쏟아진 시문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의거[哈爾濱義擧] 소식이 전해지면서 국내외에서는 이 거사를 찬양하고 격려하는 수많은 시문(詩文)이 발표되었다. 더러는 신문이나 잡지에 게재되기도 했지만 일제(日帝)의 보도 통제로 사장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얼마 뒤 박은식(朴殷植)·현채(玄采) 등이《안중근전(安重根傳)》을 집필해 발표하자 이 전기를 읽고 안중근을 찬양하는 시문도 나타났다.



하얼빈의거는 동북아 정세의 지각변동을 일으키는 큰 사건이었다. 따라서 각국의 반응이 다양하게 나타났고 정치 지도자들은 물론 지식인들의 관심도 많았다. 이들 중에도 시문을 남긴 경우가 적지 않았다. 게다가 안중근 의사가 사형선고를 받게 되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시문이 또 다시 발표되었다. 유지를 잇겠다는 애국충혼의 글도 이어졌다.



중국 요령성(遼寧省) 출신의 시인(詩人) 황계강(黃季剛)은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소감을 이렇게 읊었다.



‘진왕(秦王)을 찌르려던 형가(荊軻)의 뜻은
연(燕)의 종사를 지키려던 것이리라
그 종사 끝내 폐허가 됐건만
그의 혼백은 만민을 감동시켰다.

세월은 흘러 천년이 지났건만
진번(眞蕃) 땅에 그의 계승자 나타났다
그는 나라의 원수를 처단했으니
그 위훈(威勳) 해와 달처럼 길이 빛나리.

손가락 자르며 맹세하던 그가
변복하고 역내에 잠입했었다
총 끝에서 붉은 불이 번쩍이더니
원수의 복부를 뚫어버렸다.

그가 죽음을 각오할 때에
그 어떤 보답을 바랐었던가
아니다, 그는 오직
나라의 원한을 풀기 위해서였다.

도적들은 남의 나라 멸망시키는 것도
어렵지 않다고 떠벌였지만
이 나라의 호걸을 소멸하기란
손쉽게 될 일이 아니었다.

잔혹한 강도들에게 경고하노니
제멋대로 권세를 부리지 말라.’



중국에 망명해 있던 당시 조선의 대표적인 한문학자인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은 하얼빈의거를 이렇게 찬양했다.



‘평안도 장사, 두 눈 부릅뜨고
염소새기 죽이듯 나라원수 죽였다네
안죽고 이 기쁜소식 들었으니
국화철에 덩실덩실 춤노래 즐기네.

해삼위 상공에 소리개 나래치더니
하얼빈역두에 벼락이 치네
육대주에 많고 많은 영웅호걸들
세찬 가을바람에 수저를 떨어뜨렸다네.

예로부터 망하지 않은 나라 없건만
언제나 나라 망치는건 못된 벼슬아치들
하늘을 떠받들 듯 거인이 나타났으니
나라는 망할 때이건만 빛이 나더라.’



중국 동삼성(東三省)의 관리 주증금(周曾錦)은《안중근전》을 읽고 독후감을 시로 표현했다.



‘사마천(司馬遷)의 자객열전(刺客列傳)을 읽은 뒤부터
나는 천하호걸을 사랑했노라
이제 옛 사람이 될 수는 없지만
북받치는 의로운 마음 진정 못했네
뜻밖에도 안 의사(安義士)가 나타났기에
호걸의 모습을 나는 보았네
일격에 나라의 원수 쏘아 죽이던
그 총성은 세인을 놀라게 했네
온 누리를 떨친 그 호걸
자기도 눈물을 금치 못했네
그의 업적은 천지를 흔들었고
그의 모습은 산보다 높네
하느님이 이 세상에 복을 주실 때
하물며 그 땅은 기자(箕子)의 봉토임에랴
신의 은덕으로 한 핏줄이었네
예의범절 은주(殷周)를 방불하고
관제의식 한경(漢京)과 흡사하다
아름다운 산천에 영기 서리어
과감하고 억센 전투정신 키웠다
예로부터 망하지 않는 나라 없건만
인재가 나타났으니 망해도 영예롭다
그 나라 유로(遺老)에게 여쭈노니
비감에 잠겨 울지만 말라고
장하도다, 창해로방(滄海老紡)의 문필은
사마천의 뜻을 이었나니
원한이 사무치는 이 전기
책장에서 우레소리 들리네
그의 피는 마를 때가 있어도
그의 영혼은 사라지지 않으니
마치 요동의 강물처럼
천만년을 흐르며 흐느껴 울리라.’



이 밖에도 안중근 의사를 칭송하는 시문은 셀수도 없이 많았지만 지면 관계상 다 소개하지 못함을 아쉽게 생각한다.



○ 집요한 회유와 완강한 배척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기로 결심했을 때 이미 생사를 초월한 심경이었다. 하얼빈 역두에서 도주하지 않고 붙잡힌 것이나 공소권을 포기한 데서도 드러난다. 그러나 여순감옥에 갇혀 재판을 받을 때 일본 측의 집요한 ‘유혹’이 있었다. 일본인들은 한국인 청년이 메이지유신의 원훈 이토를 총살한 사실에 크게 분해했고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 그래서 검사와 판사, 일본인 변호사들은 집요하게 안중근이 이토를 죽인 것이 오해에서 빚어진 일이라고 한마디만 하면 사형을 면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 그때마다 안중근은 단호하게 이를 물리치며 오히려 당당하게 ‘이토를 죽인 이유’를 설명하곤 했다.



이들의 ‘설득’이 먹혀들지 않자 한국통감부(韓國統監府)가 직접 나섰다. 오랫동안 한국에서 경찰업무에 종사하며 한국인과 한국 사정을 잘 아는 그리고 한국어에 능통한 민완수사관 2명을 여순으로 파견했다. 경부 사카이와 기지로가 그들이다. 이들은 ‘안중근 회유’라는 밀명을 띠고 여순감옥에서 안중근을 만났다.



1993년에 세계일보사(世界日報社)에서 출간한《대한국인(大韓國人) 안중근(安重根)》이란 책에는 통감부의 민완수사관들이 안중근을 회유하는 모습을 이렇게 묘사한다.



‘이들은 여순감옥으로 안중근을 찾아가 공손하고 정중한 태도로 말을 걸었다.


"안공(安公)이 지닌 재주로 보면 전도가 무한한데 그냥 이대로 감옥에서 썩는다면, 혹은 여기서 생을 마감한다면 너무 원망스럽지 않겠소? 어째서 이번 사건을 저질렀는가는 묻지 않을 테니 오해를 해서 죄를 범했다고만 자복해 주시오. 그렇게 하면 우리 일본 제국의 정부는 안공의 소망과 재주를 중히 여겨 반드시 특사해 줄 것이오. 그러면 다시 세상에 나가 공업을 달성하게 될 것 아니겠소? 고집 세울 때가 아니오."


안중근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호생호사(好生好死)는 인간의 상식이지만 내가 억지로 살려고만 했다면 어찌 이번 일을 해낼 수 있었겠소? 하얼빈에서 이토를 총살하려고 작심했을 때 나는 이미 죽기를 각오한 바요. 이 감옥에 와서 오늘날까지 연명하고 있는 것도 사실은 내 생각 밖의 일이오. 나는 목숨 같은 것은 생각하고 있지 않으니 유혹하려 들지 마시오."


그들은 낙담하여 도리 없이 발길을 돌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음날도 그들은 안중근을 찾아왔다.


"세계의 신문들은 지금 모두 안공의 행동이 무식에서 나온 무지막지한 것이었다고 심하게 꾸짖고 있소. 한국의 이천만 국민도 나라의 은인인 이토 공작을 살해한 사람은 일본의 적일 뿐만 아니라 한국의 적이라고 난리요. '이토 같은 위대한 지도자를 어디서 또 찾을 수 있는가? 이제는 나라의 전도가 무망하게 되었다'고 공을 책망하고 있는 것이오. 안으로는 한국인, 밖으로는 외국인 모두가 안공의 행동을 그처럼 비난하고 있소. 그런데 안공은 왜 이처럼 그런 엄연한 현실을 인정치 않고 불복으로 일관하는가? 고집을 피운다고 천하의 공론을 이길 수 있다는 말이오?"


그들은 윽박지르기도 하고 타이르기도 했다.


안중근은 안색을 가다듬고 침착하게 대꾸했다.


"나의 행동은 정의를 위함이지 절대로 사적 명예를 탐해서 나온 것이 아니오. 나는 정의로 나라에 보답하고 정의를 위해 내 생명 기꺼이 바칠 것이오. 따라서 명예는 나와는 하등 관계가 없소. 나는 몇 달 며칠 갇혀 있다 보니 밖의 여론을 듣지 못했고 신문도 보지 못했소. 그렇지만 우리 한국 동포들은 누구 하나 나를 책망하지 않을 것을 확신하오. 서방신문을 보지는 못했으나 그들이 나를 비방했다면 아마도 우리 동양을 자신들의 손아귀에 넣으려는 야욕 때문에 그랬을 것이오. 이토를 제멋대로 행동하게 놓아두면 결국 동양평화는 깨어지게 되고, 그리되면 동양 침략에 절호의 기회가 되는 것이오. 이번 나의 이토 제거는 말하자면 그들에겐 동양침략의 기회상실을 의미하는 것이니 그들이 나에게 욕질했다고 해서 하등 관심둘 바 아니오. 그렇지만 한국인도 서양사람들도 나를 욕한다는 그대들의 말은 요언(妖言)이니 나는 믿지 않소."


그들은 이번엔 말을 둘러댔다.


"안공이 한국의 태황제(太皇帝)로부터 금 4만냥을 받고 이토 공작을 살해했다는 정보를 우리는 탐지하고 있소."


안중근의 얼굴엔 노기가 역력했다.


"그대들은 음흉하고 교활하기 짝이 없소. 나를 모욕하다 못해 한국의 황제 폐하에게까지 누를 끼치기로 작심했는가? 나는 이토 제거를 결심할 당시 생명을 포기한 사람인데, 죽은 다음에 금전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 통감부, 민완경찰 보내 회유



안중근에 대한 일제의 회유 공작이 얼마나 집요하게 전개되었는지《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는 당시의 정황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안중근씨 공판 전에 여순법원에서 일본인 가운데 한국어에 능통한 사람을 5일간이나 매일 안씨에게 보내 좋은 낯으로 권유하되 "이토 살해는 그의 정책을 오해했기 때문이라고 공판정에서 한 마디만 하면 무사히 방면되리라."하매 안씨가 정색하고 대답하되 "내가 이토를 살해함에 실로 3대 목적이 있거늘 어찌 정책을 오해하였다 하리오"했고, 급기야 공판이 종결되어 사형을 선고하는 때에 안씨는 태연히 웃으며 말하기를 "이보다 더 극심한 형벌은 없느냐."고 하였다더라.

일제는 동학혁명을 주도하다 피체된 전봉준을 이용하기 위해 간교한 음모를 꾸몄다. 살려서 이용하고자 하는 속셈이었다. 극우 계열 천우협 관계자들이 하수인들이다. 다나카 지로(田中待郞)란 자가 일본 영사관의 동의 아래 죄인으로 가장하고 전봉준이 갇힌 감옥으로 들어갔다.

다나카는 전봉준에게 청일전쟁을 비롯하여 동양의 정세를 자세히 설명하고, 일본으로 탈출할 것을 권고했다. 전봉준이 살 길을 찾아 이에 동의했다면 생명을 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당시 서울은 이미 일본군이 장악하다시피 하고 있어서 얼마든지 일본으로 탈출이 가능했던 정황이었다. 전봉준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결연하게 죽음의 길을 선택하였다.

그로부터 정확히 5년 뒤, 이번에는 안중근이 그와 유사한 선택의 기로에서 생명을 유혹받고 있었다. 전봉준은 말했었다. "구구한 생명을 위하여 활로를 구함은 내 본의가 아니다.", 활로(活路 ) ― '사는 길'이 아니던가. 사는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택한 것은 혁명가만이 가는 길이다.

사마천이 죽음과 중형의 갈림길에서 "비사자난야(非死者難也) 처사지난(處死者難)", 가로되 "죽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죽음에 처하는 것이 어렵다."라고, 감연히 사는 길을 택하고 결국 불후의《사기(史記)》를 썼다. 사마천은 사가(史家)이지 혁명가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전봉준과 안중근은 혁명가이고 의사(義士)이고 열사이다. 혁명가와 의열사(義烈士)는 생명보다 대의(大義)를 더 소중하게 여긴다. 교수대에 선 전봉준은 "나를 죽일진대, 종로 네거리에서 나의 목을 베어 오가는 사람에게 내 피를 뿌려주는 것이 옳거늘 어찌 컴컴한 적굴 속에서 암연히 죽이려 하느냐!"라고 호통을 치며 목을 내밀었다. 5년 뒤 안중근은 사형을 선고한 판사에게 태연히 웃으며 "이보다 더 극심한 형벌은 없느냐?"라고 일갈하며 적도들을 조롱했다.

부끄럽기 그지없는 우리 근대 망국사에서 이런 절세의 영웅들이 있어서 민족사는 이어지고 역사의 맥은 유지되는 것 같다.’



안중근이 인간 누구나 갖게 되는 본성인 생명을 저버리고 대의를 택한 데는 어머니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는 것은 앞에서도 말했다. 어머니는 아들의 사형선고 소식을 듣고 수의(壽衣)를 만들면서 “우리 모자의 상면은 이승에서는 없기로 하자. 네가 혹시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이 불효하다고 생각한다면 이 어미를 욕되게 하는 것”이라는 뜻을 전했다. 어머니는 또 “살아서 나라와 민족의 욕이 될 때는 오히려 죽음을 택하라는 뜻을 아들에게 전함으로써 안중근의 마지막 결심에 흔들림이 없도록 권고했다.”



▶ 출처; 김삼웅(金三雄) 前 독립기념관장 著《안중근평전(安重根評傳)》시대의창編(2009년版)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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