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제가 하려는 얘기는 벌써 10년이 지난 얘기네요.
고등학교 3학년 여름, 곧 다가오는 수능 때문에 전국의 모든 고3이 치열하게 더위와 싸우며 머리를 싸매던 그 때, 바로 그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다른 학생들 보다 성적이 좋았던 저는 간간히 여름 방학 동안 친구들과 여행을 하기도, 작은 취미 생활을 하기도 하며 지내고 있었지요.
8월 어느 날, 친구랑 함께 수다와 팥빙수가 그리워 작은..그리고 좀 조용한 까페를 찾았습니다.
한참을 수다를 떨다가 화장실이 가고 싶어서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거기에서 일하던 아르바이트 생과 부딪쳤습니다. 그런데 그 아르바이트 생이 제가 일어나는 걸 보고 피한다고 나름 피했는데도 저랑 부딛치고 거기다 옆에 있던 인테리어 소품에 머리를 부딪히면서 이마가 찢어지는 엄청난 일이 벌어진 것이지요..
그게 시작이었습니다.
같이 병원 가주고, 미안하다 인사하고 그러는 와 중에 자연스럽게 전화 번호를 교환하고 첫 만남은 소동이 었지만, 첫인상이 싫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우리는 금새 연인이 되었습니다. 사실 제가 고3이라 일주일에 한 번 주말에 만나는게 다 였지만 그래도 행복하고 드디어 수능이 끝나던 날 이후로는 매일 같이 붙어다녔습니다.
그런데...
사귀어 가면서 알게 된 놀라운 일은..
그 남자친구는 워낙에 생긴게 귀티가 나는데다 유머가 넘치는 스타일이다 보니 주변에 여자들이 늘 붙는 다는 거지요.
정말 가만히 있어도 꼭 한 두 여자들은 대쉬를 하고 전화번호를 따내고..
시간이 지날 수록 직접 만나는 여자도 생기는 것 같았습니다.
자존심이 상하고 마음이 상하기가 말로 표현 할 수 없을 만큼이었지요.
그래도 이미 너무 좋아져 버려서 그냥 참고 또 참았습니다.
내가 더 잘 하고, 내가 더 많이 사랑하면 된다고 믿고 그저 첫 정인지라 정성을 다 했습니다.
그러길 몇 달, 결국 우리는 잠자리도 같이 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무섭고 떨리고 겨우 20살이 되었는데 벌 써 이러면 마치 싹수 없고 발랑 까졌다는 얘기 들을 까봐 무서웠는데... 당시 저 보다 나이가 많았던 남친이 다른 여자들을 만나거나 연락을 하는게 불안한 나머지 그렇게 라도 하면 완전히 내 사람이 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그 사람의 기질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가끔 핸드폰을 보면 줄줄이 저장된 여자들의 이름이 절 미치게 하는 것 같았지만, 어린 나이에 맘대로 따지고 들며 이럴 수 있느냐고 말도 못하고 혼자 끙끙 앓았습니다.
저의 경우는 또 정말 여러가지로 첫 정이니 꼭 이런 힘든 시기를 넘겨서 결혼을 할꺼라는 다소 허왕된 꿈에 있었던 것입니다.
금새 딴 여자랑 통화하고 나서는 난 너만 사랑한다. 봐라 내가 잠자리 하는 건 너 하나 밖에 없지 않느냐.. 그냥 친구들일 뿐이다...라고 말하면서 눈웃음으로 절 녹여 버리곤 했지요.
저라고 고민 안 해 본 것 아니지만 정말 저만 잘 참으면 된다고 생각 했습니다.
그러던 눈이 오던 어느날..
같이 커피 숍에 앉아서 얘기 하고 있는데 남친의 전화가 울렸습니다.
발신자 이름을 확인 하더니 웃으며 잠깐만, 이라고 하더니 곧 만날 약속을 잡는 것 같았습니다.
분노라고도 딱히 말 할 수 없는 이상한 기분..먹먹한 가슴이 숨통을 조여 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더니, 한 술 더 떠.. 잠시 앉아 있어, 나갔다 금방 올게..라며 제 대답도 듣지 않고 나가는 겁니다.
정말 어이가 없어서... 눈물도 안나오고...
그렇게 30분, 40분... 결국 한 시간을 기다렸는데 남친에게 전화가 오는 겁니다.
아직도 까페냐며.. 이 정도면 기다리다가 남친집이나 저희집으로 갔을 거라고 생각해서 집에 와봤다고...
그냥 눈물이 주루루 흘렀습니다.
그런데도 태연하게 아직 까페면 자기 집으로 오라고 하더군요.
집으로 가보니 편안 옷차림으로 벌써 갈아 입고는 어서 오라며 손짓을 하더라구요.
무표정한 얼굴로 방으로 들어가니,
"화났어? 에이~ 미안, 전화 미리 할껄. 넌 원래 화 안내잖아~"
라면서 절 안더니 그 자리에서 잠자리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다 끝이 나고 절 안으며 또 한번 화 풀어~ 넌 화 안내지,, 라고 묻고는 화장실로 들어가버리더라구요.
이젠 정말 이건 아니다 싶어 옷을 입는데 식탁에 웬 종이백이 있는게 눈에 띄었습니다.
종이 백 안에는 집에서 직접 만든 것 처럼 생긴 유자차 병이 들어 있었는데 거기엔 가지런한 손 글씨로 씌여진 안부를 묻는 메모가 함께 있더군요.
남친이 화장실에서 나오더니 친구가 준 거라면서 저에게 유자차를 마쳐보라고 ...
전 진짜 현기증이 났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 정말 아니다...
저녁이 되서 남친은 절 바래다 준다며 함께 집을 나섰고, 저의 집으로 가는 지하철을 함께 떴습니다.
지하철을 타고가는 내내 제가 말 한마디를 안하니 뭔가 좀 심각하다고 느끼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지하철에서 내려 플랫폼에서 잠시 서 있다가 말을 꺼냈습니다.
"난 오빠가 날 사랑한다는 말 의심하지 않아. 그렇지만 오빠가 다른 여자들도 가볍게 만나고 다니는 것도 다 알고.. 난 자존심도 없는 줄 알아요? 어떻게 내 앞에서도 태연하게 전화를 하고 그 여자를 만나고 나서도..나한테..."
그러자 남친의 얼굴의 사색이 되고는.. 아무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지하철역부터 저의 집 아파트 단지까지 걸어가는 동안 한 마디를 안하고..
전 앞에서 남자친구는 뒤에서 따라 오고 있었습니다.
아파트 입구까지 왔을 때 남친은 제 이름을 부르면서..
"오빠랑 좀 더 있다 들어갈래..? 우리 좀 더 같이 있을까..?"
라고 조심스레 물었습니다.. 화가 날 때로 난 전 뒤도 안 돌아 보고...
"오늘은 늦었어요. 저 들어가요."
라는 말 만 남기고 그냥 집으로 들어 왔습니다.
집에 와 곰곰히 생각해 보니, 내가 혹시 너무 민감하게 군건 아닌가.. 잘 한걸까.. 별 생각이 다 들었지만
속 복잡한 마음에 얼른 잠이나 자야 겠다고.. 내일이면 좀 나아질 게 아닌가 싶었더랬지요.
그러다가 남친으로 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이미 취할 때로 취한 목소리였습니다.
"어, 오빤데! 한잔 했다 친구들이랑! 내일은 오빠가 병원에 못 데려다 주니까 알아서 꼭 챙겨가라"
당시 전 몸이 좀 안조아서 병원을 정기적으로 잠깐 다녔는데, 본인이 취해서 내일은 못 데려가겠다며 걸죽하게 취한 목소리.. 한 껏 고조된 목소리라 혼자 할 말만 하고는 끊어버렸습니다.
그럼 그렇지.. 라는 마음에 핸드폰을 휙 던져 버리고는 곧 잠들었지요..
그 날 새벽. 배가 사르르 아프면서 새벽 5시에 눈이 벌떡 떠졌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생리가 시작되면서 생리통이 온 거죠.
그런데 웬지 섬뜩한 기분이 들면서 뭔가 막막 불안해 졌습니다. 처음엔 생리통떄문에 그런가부다.. 했는데.. 점점 갈 수록 불길한 기분에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결국 아침 8시가 되서 부랴부랴 남친에게 전화를 했는데 신호만 가고 받질 않는 겁니다.
제 불안했던 마음은 더 떨렸고 뭐에 홀린 마냥 대충 씻고 나와서 택시를 잡아탔습니다.
남친은 주로 술을 마시면 회사 사무실 한켠에서 자는 버릇이 있었기에 전 바로 사무실로 갔습니다.
당시 친구 몇몇 끼리 하던 작은 사업체였기 때문에 제가 가끔 키를 가지고 들어가 사무실에서 놀기도 하고 했던 터라 얼른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테이블에는 어제 저녁 먹은 소주병과 안주들이 마구 굴러다녔고, 아무리 찾아도 남친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전 대충대충 치우면서 남친이 어딜 갔을까 불안한 마음으로 걱정을 했지요.
그러다가 남친의 책상에 앉았는데 책상에 급하게 떨린 글씨로 쓰여진 메모가 있었는데..
"ㅇㅇ야. 이거 보면 얼른 XX병원으로 와"
라고 써 있는 것입니다. 그 때부터 제 심장은 타 들어가는 듯 했고 무조건 병원으로 뛰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9시 전이라 문도 열지 않은 병원 입구 옆에 영안실, 장례식으로 가는 문만 열려 있었습니다.
불안한 마음으로 문을 나서는데...
남친이랑 함께 일하던 분의 아내가 엉엉 울고 있는 겁니다..
전 달려가 '언니, 왜 울어요? 무슨 일이에요? 왜 그래요?'라고 물으니..
"갔다... 둘다 갔다...."
라면서 오열을 하더군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곧 9시가 되고 시신 확인을 해야 한다며 영안실로 들어오라고 했습니다.
원래 친족이 하지만, 제 남친은 고향이 경남쪽이라 윗 지방까지 올라오려면 시간이 좀 걸려서 제가 여자친구라고 하고 들어갔지요...
곧 냉동실의 문 2개가 열리고.. 제 남친과 남친의 친구의 시신이 나란히 나왔습니다...
음주 운전으로 인한 사고가 나서 둘다 그 자리에서 즉사를 했다는 것입니다.
차갑게 굳어버린... 남친을 보고 있자니..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 앉고 말았습니다..
사실 차 안에는 다른 친구까지 3명이 타고 있었는데 너무 취해 뒷 자리에 누워 잇던 친구분만 살았고 앞에 탔던 두 사람은 즉사했던 것입니다.
겨우 의식이 돌아온 친구분은 왜 사고가 났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고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넋을 놓고 있었습니다.
좀 시간이 지나자 말하길, 제 남친이 평소에는 마지시도 않는 소주를 3병이나 사와서는 둘다 마시는데 그 동안 절 너무 힘들게 한게 미안하다고... 아무말 않고 화를 내지 않아서 괜찮은 줄 알았다고...너무 미안하다며 울며 술을 마시더랍니다.
그러다 거하게 취하자 집에 들어갔던 다른 친구까지 불러내서 셋이 2차를 가서 술을 마시다가 운전까지 한게 된거죠..
집에 있던 친구는 좀 이른 나이에 결혼해서 어린 아들까지 있었는데, 그 날 따라 유난히 울며 불며 아빠 가지마..아빠 가지마.. 붙잡았답니다. 그래서 아내분도 오늘은 집에 있는게 어떻겠느냐고 하자, 대충 우리 두 사람 얘기를 들려주고는 제가 처음 화를 내고 그 간 참아온 얘기에 너무 괴로워 하니 위로해주고 얘기나 들어줘야 겠다며 나갔는데 그게 마지막이 되었던 겁니다..
장례식장에 나란히 차려진 빈소에서 그 아내분은 엉엉 울고 있다가 저에게 와서 그러더군요..
"왜 그랬니... 하루만 더 참지... 계속 참았으니 어제 참았으면 둘다 안 죽었을 꺼잖아...."
원망의 말 조차 울며 불며 하느라 저에게 화도 못내고 그저 목 놓아 울었습니다...
나이가 젊어 묻지 않겠다고 결론을 내린 남친의 부모님의 뜻에 따라 화장을 하기로 했습니다.
저도 장례식 장에서 미친듯이 울었지만.. 결국 화장터에서... 불 속으로 들어가는 오빠의 마지막에 저도 정신을 잃었습니다...
이 일이 있은지 벌써 10년이 넘었습니다.
이제는 시간이 지날 만큼 지나다 보니, 문득문득 .. 가끔씩 떠오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가슴 아픈 첫 사랑에 그 다음에 좋은 사람을 만나는데 한참이 걸렸고 어렵게 시작했지만,
결국 혼자가 편해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먼저 간 사람에 대한 미안함인지. 그리움인지. 알길이 없을 만큼 옛이야기가 되어 버렸지만...
요즘 톡톡을 읽으면서 슬픈 사랑의 얘기를 접하다 보니..
저도 옛 생각에 잠겨 이렇게 제 얘기를 써 봤습니다.
모두들 후회 없는 사랑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