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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의용군 참모중장 안중근 의사 전기』11. 순국 (3)

대모달 |2011.05.25 09:49
조회 190 |추천 0

○ 두 동생 만나 유서 여섯 통 전하고



여러 가지 기록과 자료로 보아 그날은 온종일 비가 내리고 세찬 바람이 불었던 것 같다. “비는 마치 관 뚜겅에 못질을 하듯이 맹렬하게 곧바로 내리퍼부었다”는 그린(Graham Greene)의《권력과 영광》에 나오는 시구처럼 그렇게 비가 내렸다.



사이토 다이켄[齊藤泰彦]의《내 마음의 안중근》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



‘비는 하루 종일 그치지 않았다. 안중근의 처형을 거부하는 듯이 또 애도하는 듯이 때때로 바람까지 강하게 불었다. 어느덧 저녁이 되자 여순의 거리는 싸늘하게 식어갔다. 형무소로 돌아온 지바는 한동안 혼이 나간 시체를 대하듯 안중근이 사라진 독방을 보고 있었다. 표현할 수 없는 전율을 느끼며 언제까지나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얼어붙은 듯한 감방의 공기는 내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아버리는 것 같았다"고 그는 그때의 심경을 일지에 남겼다.’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뒤 일제는 조선의 마지막 숨통을 더욱 심하게 조이기 시작했다. 6월 24일 경찰권 위탁각서가 조인되어 일본 헌병대가 한국의 치안을 도맡게 되고, 6월 30일에는 경찰관서 관제를 공포하여, 헌병경찰제가 실시되었다. 헌병경찰이 조선인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모든 권리와 재물이 그들의 손아귀로 넘어갔다. 마침내 8월 22일 경술병탄늑약(庚戌倂呑勒約)이 조인되고 8월 29일 공표되었다. 이로써 대한제국의 국호는 사라지고 주권을 잃었으며, 조선은 일제의 식민지 종살이로 전락했다.



안중근 의사의 순국일에 내리던 궂은 비는 일제강점기 35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국민의 가슴에 피멍으로 퍼부었다. 햇살을 잃은 세월, 그래서 해방의 빛을 되찾은 광복(光復)이라 했을 것이다.



안중근은 순국 전날 여순감옥에서 마지막으로 두 동생을 만났을때 ‘최후의 유언’을 남겼다. 자신이 죽은 뒤 유해를 하얼빈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조국 광복이 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찾지 못하고 있다.



〈최후의 유언〉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여,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폴란드의 저항시인 롤러는 침략자들과 싸우다가 사형선고를 받고 ‘산 자들에게’라는 시를 지었다. 안중근의 심사도 이러하지 않았을까?



〈산 자들에게〉



‘그대들에게는 슬퍼할 것이 없도다
그대들에게는 쉴 것도 없도다
계승은 그대의 것
그대들 형제의 가슴으로부터
흘린 피에 젖어 있도다.

왜냐하면

그대는 미래를 창조하는
활동이니까.

세월은 깊은데서
그대를 밀고 나가도다
널리 열어저치라
더욱 즐거운 아침으로 문들을!’



안중근이 처형되던 날, 정근과 공근 두 형제는 감옥 밖에서 형의 시신을 넘겨줄 줄 알고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없었다. 너무 늦어져서 형무소장을 찾아가 시신을 달라고 했더니 이미 사형이 끝나고 묘지에 묻었다는 것이었다.” 두 동생은 통곡했다. “우리 형에게 두 번 사형을 하는 것이냐”라며 두 동생이 항의했지만 시신은 찾아갈 수 없었다. 일제는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유족에게 돌려주면 안중근 의사가 묻힌 곳이 곧 한국 민족해방운동의 성지가 될까 두려워했다. 그래서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공동묘지에 묻고 유족에게는 그 위치도 알려주지 않았다.



백암(白巖) 박은식(朴殷植)은《안중근전(安重根傳)》에서 안중근 의사의 사형집행 뒤 두 동생이 시신을 찾고자 일본 관헌들과 싸운 정경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형님은 두 동생에게 여러 번 국가독립 전에는 반장(返葬) 하지 말라고 부탁하였으나 두 동생은 유해를 두고 돌아갈 수가 없어 감옥에 갔다. 순사는 그들의 몸을 검사하고 들여보냈다. 일본변호사는 "일본 법률에는 유해를 내 보내주는 법이 있으니 법원에서 비준하면 가져 갈 수 있다. 그러나 정부의 명령이 있어서 줄 수 없다."고 하며 그곳에 매장하였으니 들어가 보라고 하였다. 두 동생은 유해를 줄 수 있는가 없는가는 전옥의 직이고 변호사와는 관계없다고 하며 감옥으로 들어갔다.

감옥에는 전옥, 미소부치, 통역, 간수 수십 명이 있었다. 두 동생은 정부의 무슨 명령이며 법관이 어째서 제 맘대로 하는가를 똑똑히 말하라고 물었다. 전옥은 "당신들은 혈육의 정으로 유골을 가져가려고 하지만 정부의 명령이 있으니 어떻게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두 동생은 "일본 법률에 유해를 내보내는 규정은 법관이 비준하여 실시하면 되는 데 어째서 정부명령에 미루고 법률규정을 위반하는가? 법관은 법률의 규정만 지키고 정부의 조종(操縱)을 받지 말아야 한다. 정부는 법률을 적용할 따름이지 어떻게 명령을 하는가?" 하니 전옥은 "정부의 명령이 있어도 자기의 직권으로 처리한다."고 하였다.

두 동생은 "전옥의 직권으로 법률규정대로 처리하지 무슨 정부명령인가? 어째서 4~5분 사이에 식언하는가?" 하였다. 전옥은 소리치며 이미 공식으로 확정하였기에 천언만어(千言萬語) 하여도 들어줄 수 없다고 하였다. 두 동생은 분을 참을 수 없어 큰 소리로 "법관이 법리(法理)를 불고하고 위력으로 압제하니 이런 만행이 있는가. 우리는 지금 그것을 대항하지 못하지만 이 생명이 남아 있으니 분풀이 할 그날이 꼭 있으리라." 하였다. 그들은 그냥 욕을 퍼부었다. 순사와 간수들이 그들을 감옥 밖으로 밀어내었다. 그들은 문밖에서 몇 시간 통곡하고 다시 들어가 전옥을 만나려 하였으나 끝내 거절당하였다.

그들은 대련에서 귀국하였다. 그 후 일본인의 두 동생에 대한 기탄(忌憚)은 더욱 심해지고 경찰도 날로 엄해졌으며 사건을 만들어 그들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해외로 나가서 해(害)를 면하였다.’



○ 청나라의 원세개(袁世凱) 등 만사 보내 조의(弔意)



이것은 어디까지나 가정이지만, 안중근 묘소가 ‘한국 민족해방운동의 성지’가 되는 것을 두려워한 일본인들이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일단 여순감옥 공동묘지에 묻었다가 다시 파묘하여 은밀하게 일본으로 가져갔거나, 화장하여 분산시켜버렸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일제는 죽은 안중근 의사의 시신도 두려웠던 것이다. 안중근이 유언을 통해 “내가 죽거든 하얼빈 국제공원 옆에 묻었다가 한국이 독립되는 날 고국으로 반장해 다오”라는 내용이 얼마나 엄청난 폭발력을 갖고 있는 것인가를 일제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안중근 의사의 순국 소식이 전해지면서 국내외에서는 수많은 만사(輓詞)와 조사(弔辭)가 나왔다. 시문(詩文)도 씌였다. 대표적인 것은 청나라의 실력자 원세개(袁世凱)의 만사이다.



‘평생에 벼르던 일 이제야 끝났구려[平生營事只今畢]

죽을 땅에서 살려는 건 장부 아니고[死地圖生非丈夫]

몸은 한국에 있어도 만방에 이를 떨쳤소[身在三韓名萬國]

살아선 백살이 없는건데 죽어 천년을 가오리다[生垂百歲死千秋]’



○ 고결한 생애, 고결한 죽음



안중근 의사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동양평화를 위해, 한국의 주권을 짓밟고 동양평화를 유린하는 수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승에서 생을 접기에는 아직 너무 이른 32세의 나이였다. 일본인들로만 구성된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는 “안중근의 날을 외칠 날이 꼭 올 것”이라고 당당하게 밝힐 수 있었던 것은 돈독한 신앙심과 애국혼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의 예술가 바사리(Giorgio Vasari)는 “때로 하늘은 인성뿐만 아니라 신성도 갖춘 인간을 우리에게 내려 보낸다”라고 말했다. 안중근 의사의 고결한 삶과 순결한 인성은 눈물겹게 우리의 가슴을 저며오고, 고매한 죽음의 신성에는 오롯이 숙연해진다. 그의 삶과 죽음은 인성과 신성의 복합가치라 할 수 있다.



프랑스의 음악인 르 죈(Claude Le Jeune)은 “자서전이란 자신을 드러내면서 자신을 위장하는 텍스트”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사형집행을 앞두고 안중근이 쓴 자서전《안응칠역사(安應七歷史)》는 일체의 가식이 들어 있지 않은 담담한 삶의 기록이다. 또 미완의《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은 한 세기를 뛰어넘는 시간과 동북아의 공간을 담아내는 현재형 미래의 가치를 담고 있다. 안중근 의사가 형장에서 죽음을 앞두고 외치고자 했던 “동양평화만세”라는 말에서 우리는 천고의 풍상에도 녹슬지 않는 평화사상과, 산부동(山不動) 해무량(海無量)의 인격을 발견할 수 있다. 또 100년에 한번 만날까 말까한 세기난우(世紀難遇)의 기개도 보인다.



안중근의 생애는 “나라가 위급한 상태임을 보면 목숨을 바친다”는 견위수명(見危授命)의 길(공자)이고, “삶을 버리고 의로움을 취한다”는 십생취의(拾生取義)의 길(맹자)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파수꾼이 칼의 임함을 보고도 나팔을 불지 아니하여 백성에게 경고치 아니함으로 그 중에 한 사람이 그 임하는 칼에 제함을 당하면 그는 자기 죄악 중에서 제한 바 되려니와 그 죄를 내가 파수꾼의 손에서 찾으리라."(에스겔 33:6)라는 선지자의 모습을 보게 된다.



필자의 둔탁한 붓으로는 안중근 의사의 거룩한 삶과 죽음을 갈무리할 단어를 찾기 어렵다. 그래서 로렌 아이슬리 미국 펜실베니아대학 인류학과 교수의 시「시간의 창」으로 대신하련다.



‘시간의 창공에 빛나는 광휘는
가려질 수는 있어도 꺼지지는 않으리
별처럼 자기가 속한 자리까지 올라가리니
죽음은 낮게 드리운 안개와 같아
광휘의 베일을 드리울 수는 있어도
소멸시킬 수는 없으리라.’



안중근은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 국적 제1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고, 1910년 3월 26일 오전 꿋꿋한 기상으로 처형대에 올랐다. 추호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의 행동을 자랑스러워하면서, 마치 예수처럼 뚜벅뚜벅 계단으로 걸러 올라가 밧줄에 목을 걸었다. 예수보다 한 살이 적은 32세였다. 우리는 그기 태어난 날은 잘 기억하지 못해도 그의 의거일과 순국 날짜는 기억한다.



“그가 출생한 날짜는 모르지만 그의 죽은 날짜는 우리가 기억한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우리는 모든 성인들에 대해서도 그 죽은 날짜를 기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날이 바로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새로 태어난 날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루스(Clare Boothe Luce)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 언급한 내용이다.



▶ 출처; 김삼웅(金三雄) 前 독립기념관장 著《안중근평전(安重根評傳)》시대의창編(2009년版)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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