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시간의 환영 [라시안]
-zero-
*환영(幻影)
환상. 감각 따위의 착오로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보는 것.
*환청(幻聽)
주변에 소리나는 물체나 사람이 없음에도 소리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환각(幻覺)
실제로는 자극 대상이 없는데도 마치 실제하는 듯 감각으로 느끼거나 느꼈다고 생각하는 것.
-168 시간의 환영- *라시안*
"입을 옷과 속옷..이 정도면 되려나?"
"얼마나 오래 있으려고 그래요? 이렇게 많이 안사도 되는데.."
"오랜만에 백화점 들른김에 겸사겸사 샀지. 일을 시작하기 전에 조금 긴 여행이었으면 좋겠는데?"
"자금 가는 곳 잘 아세요?"
"지역 이름만 알아."
"형.. 우리 너무 대책 없는거 아니에요?"
"괜찮아. 이야기로만 들었는데 근처에 좋은 온천이 많데."
"사람 많은 건 싫은데.."
"아직 어두워지려면 시간이 좀 있으니까 천천히 둘러보고 한적한 곳을 고르자. 그럼 되지?"
"떨려요. 꼭 소풍 가는것 같아요."
"승현아. 머리 많이 자랐네. 예쁘다."
"원래 머리 하나는 빨리 자라요. 그러고 보니 벌써 턱까지 오네요. 좀 잘라야겠어요."
"자르지마."
"그렇게 말하신다면.. 생각 좀 해볼께요."
"꼭 생각해 봐야 하는거야?"
"네. 꼭 생각해 봐야 하는거에요."
"못살아.."
"지용 형! 계란이랑 오징어 사주세요!"
밀월 여행이라고 해봤자 단순히 기차를 타고 떠나는 온천 여행이었지만 승현와 지용은
소풍 가는 아이들처럼 무척 들떠 있었다.
처음 만난 장소가 공포와 피로 물든 산장이었기에 변변한 데이트조차 해본적이 없는 그들이었다.
더군다나 두 사람은 대회 종료 이후 3개월이나 떨어져 있다가 기적적으로 만나게 된지라
첫사랑을 하는 소년들처럼 애뜻하고 간절했다.
기차가 출발하고도 시종일관 지용의 팔짱을 끼고 창 밖을 바라보던 승현은 과자나 음료를 파는
상인이 카트를 밀고 지나가자 오징어와 계란이 먹고 싶다며 지용를 졸라댔다.
"까주는거야?"
"그럴리가 있겠어요? 제가 먹으려고 하는 거에요."
"너무한거 아냐? 형.. 어제 저녁부터 내내 굶었어."
"왜요! 왜 굶고 살아요!"
"그야.. 혼자사니까 챙겨먹기도 귀찮고 챙겨줄 사람도 없잖아."
"형 혼자 살아요?"
"그러니까 네게 같이 살자고 했지."
"아.. 그럼 앞으로 내가 꼬박꼬박 챙겨줘야겠다."
"음식 잘해?"
"제가 요리왕 승현이거든요. 한식 중식 일식 말만 하세요. 원하는건 뭐든지 해드릴께요."
"대단한데?"
"단.. 맛은 보장 못해요. 그게 단점이에요."
지용과 재중 두 사람 모두 끼니를 걸러 허기가 진 상태였다.
승현은 계란을 들어 창문 모서리에 톡톡 두드려 깬 다음 껍질이 남지 않게 정성껏 깠다.
소금까지 찍어 지용의 입에 넣어주고 보니 자신이 생각해도 영락없는 여인내의 모습이었다.
두 사람은 오징어와 계란으로 간단히 배를 채운다음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집중했다.
지용는 승현의 자리가 바깥쪽이다보니 아 사람 저사람 왔다갔다 하는게 신경쓰여 안으로 들여보내고
자신이 바깥쪽 자리에 앉았다.
사실 지용에게 찰싹 달라붙어 연신 웃음을 흘리는 승현을 힐끗거리며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거슬렸기 때문이었다. 우선은 자신의 눈 안에만 가두고 싶었다.
승현은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눈을 굴리며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지용는 창에 바짝 붙어있는 승현의 어깨를 안고 그의 머리로 고개를 파 묻었다.
"여전히 좋은 냄새가 난다."
"저는 모르겠는데 정말 냄새가 나요?"
"머리가 길어져서 그런가? 전보다 더 강한 향이 풍겨. 뒷 머리는 목까지 오네?"
"머리 묶여요. 하도 더워서 시도 해봤는데 정말 묶이는거 있죠?"
"보고싶다. 궁금해."
"형.. 그런데요. 조금 이상해요."
"뭐가?"
"기차 엔진 소리가 불규칙해요. 뭐랄까.. 바퀴에 뭔가가 끼어있는 느낌이랄까?"
"그러니? 여전히 예민하구나?"
"도착하려면 얼마나 남았죠?"
"이번역 말고 두개만 더 지나면 되. 어짜피 종점이라 신경쓰지 않아도 되고 이제부터는 구간사이가
짧기 때문에 오래 걸리진 않을꺼야. 화장실 다녀올테니 잠시만 기다려."
지용는 웃으며 승현의 볼을 살짝 꼬집고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향했다.
평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꽤 많은 사람들이 탑승해 있었다.
그는 잠시 후 정차하겠다는 안내원의 방송을 들으며 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급히 계획한 여행이라 아무 기차나 골라탔더니 화장실의 위생상태가 좋지 못했다.
그는 불쾌한듯 인상을 찌푸리며 암모니아 냄새로 가득한 내부로 들어섰다.
"한 구간당 10분이라고 쳐도 30분안에 충분히 도착하겠구나."
서울에서부터 4시간 이상 기차를 타고 오다보니 답답했던지 지용는 볼일을 보고 손을 씻으면서
도착할 시간을 예상하고 있었다. 거울을 보며 혼자 미소지어 보았지만 우스워서 그만 두고 말았다.
젖은 손을 닦고 성재에게 전화를 해줄 생각으로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는데 동시에 차와 집 등의
열쇠가 달려있는 열쇠고리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져버렸다.
"깨졌잖아?"
지용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닥에 떨어져있는 열쇠고리를 집어들었다.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해서 백화점을 들렀다가 구입한 네잎 클로버 열쇠고리가 바닥에 부딧혀
두 조각으로 깨지고 말았다. 잎을 말려 유리 사이에 압축시키고 주변을 스와로브스키로 장식한
것이라지만 시멘트 바닥도 아니고 약간의 쿠선이 있는 기차 바닥에서 깨졌다는것은 조금 이상했다.
그때.. 문득 승현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기차 엔진 소리가 불규칙해요. 뭐랄까.. 바퀴에 뭔가가 끼어있는 느낌이랄까?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온 몸을 엄습했다.
산장에서도 경험한 바 있지만 승현의 느낌은 무섭도록 정확한 구석이 있었다.
지용는 기분이 나빠져 급히 자리로 돌아가 승현의 손을 잡아끌었다.
방송에서는 기차의 정차를 알리는 방송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승현아. 이번 역에서 내리자. 짐 챙겨 어서!"
"왜요? 아직 두 정거장 남았다면서요?"
"마음이 바뀌었어. 우선 내리자."
승현은 지용이가 서두르자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따라 내리긴 했지만 영문을 몰라 계속 그를 쳐다보았다.
그들이 플렛폼 벤치에 앉고 나자 열차는 다시 종점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도 지용는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듯 허공을 바라보며 침묵하고 있었다.
"아! 어떻게 해!"
"왜 그래?"
"형.. 기차안에 핸드폰 두고 내린것 같아요.. 어쩌죠?"
"급히 연락 올곳 있니?"
"그런건 아니지만.."
"그럼 괜찮아. 내 핸드폰으로 발신 정지만 시켜. 서울가면 새 핸드폰 사줄게."
"그래도 아깝다.."
"어짜피 새로 사야해. 꽤 오래쓴것 같던데?"
"그럼 형 핸드폰 번호 뒷자리와 같은걸로 부탁해요~"
승현은 걱정하던 것도 잠시. 지용의 핸드폰을 사용해 발신정지를 하면서도 연신 싱글거리고 있었다.
지용은 승현이 전화 끊는것을 확인하자 손을 잡아 끌어 역 밖으로 이동했다.
역 이름이야 종착역을 검색할때 봤지만 낯선곳이라 그런지 식당 하나 변변하지 않은 시골이었다.
그는 식사를 할곳이 없나 이리저리 둘러보다 해물탕 전문점으로 보이는 곳을 발견해 승현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주변에서 괜찮아보이는 곳은 이곳 뿐인듯 했다.
승현이 탕은 싫다고 해서 해물찜을 주문하고 빈 컵 두개에 물을 따랐다.
지용가 물컵을 놓고 위생수건을 챙기는 동안 승현은 버릇적인듯 휴지를 한장 깔고 그 위에 수저를
가지런히 올려 놓았다. 생긴것과 다르지 않게 꼼꼼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몇가지의 반찬이 나오자 승현은 턱을 괴고 앉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질문했다.
"형. 왜 내리자고 했어요? 제가 아까 엔진 소리가 이상하다고 했던것 때문에?"
"그렇다고 볼수 있지."
"에이.. 그거 그냥 해본 소리에요. 소리에 민감하다 보니 외부에서 들려오는 여러가지 소리를 착각해서
섞어 듣기도 해요. 그냥 느낌이 그렇다는 건데.."
"넌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네 느낌이 이상할 정도로 잘 맞아. 이미 여러번 경험한 바 있고."
"그런가?"
승현은 싱겁게 웃으며 숫가락을 집어들어 동치미 국물을 떠 먹었다.
시원하고 시큼하니 잘 익은게 더운 날씨에 그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물찜과 공기밥이 나오자 배고팠던 두 사람은 기분 좋은듯 정신없이 먹어대기 시작했다.
타지의 음식은 지역에 따라 입에 맞지 않을 경우도 종종 있는데 배가 고파서 그런지. 아니면 식당
주인 음식솜씨가 뛰어나서 그런지 간도 적당하고 부드럽게 넘어가는게 꿀맛이 따로 없었다.
지용는 밥 한공기를 비우고 해물을 집어먹으며 포만감에 배를 문지르고 있었는데 승현은 공기밥을
추가로 시켜 정신없이 밥의 세계로 빠져들고 있었다.
말리지 않으면 밥 공기 속으로 빠져 들어갈것 같았다.
지용은 그의 식성에 감탄하며 물을 챙겨 주었다. 동치미를 좋아하는것 같아 추가로 주문을 했다.
"무리하는거 아냐? 밥을 왜 이렇게 많이 먹어?"
"저 원래 밥 많이 먹어요."
"전에는 안 그랬잖아?"
"그야.. 절대 입에 담아서는 안될 '그곳' 의 밥이 맛 없었기 때문이죠. 밥이라고도 할것없이 그냥 빵이나
인스턴트 음식들 뿐이었지만.. 전 쌀밥에 찌게나 반찬이 좋아요."
"평소때도 이렇게 많이 먹어?"
"이변이 없는 한 두공기는 먹어요."
"그 밥 다 어디로 가는거야? 살로 안보내고 전부 소모해 버리는거야?"
"체질상 아무리 먹어도 살이 안쪄요. 나 왜 살이 안찌는거야.."
"그 소리 다이어트 하는 사람들한테 하면 바로 맞아 죽는다. 꼭꼭 씹어 드시기나 하세요. 승현양."
"푸흡!!!!"
"왜 밥을 뱉어내고 그래? 농부 아저씨들한테 걸리면 너 혼난다."
"승현양이라니요!"
"하는 행동을 유심히 보니까 그렇게 부르고 싶어지더라구. 신경 끄고 밥이나 드세요."
"쳇.."
승현은 승현양이라는 말이 삐졌는지 밥을 우겨 넣으며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지용는 그런 승현의 모습이 귀여워 턱을 괴고 바라보다가 주인이 TV를 틀자 그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생각해보니 산장 마스터의 자리에 오르고 나서 컴퓨터만 잡고 있느라 제대로 된 TV시청을 못해봤었다.
오락 프로그램인지 연예인들이 나와 이리저리 뒹굴며 떠들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유치하다고 채널을 돌렸겠지만 편한 마음이어서 그런지 나름대로 재미있었다.
얼마나 보고 있었을까.
연예인들의 커플게임이 결승전으로 접어 들었을때 갑자기 화면이 바뀌며 뉴스 앵커가 등장했다.
나름대로 어느 커플이 이길것 같다. 라고 예상하고 있던 그였기에 바뀐 화면은 썩 기분좋지 않았다.
그때 주인 여자가 놀라며 TV 의 음량을 높였다.
-긴급 속보입니다. XX 발 XX 행 열차가 앞서가던 XX 행 특급열차를 추돌하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XX행 특급열차가 건널목의 신호를 무시하고 달려든 승용차를 들이받고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후진하던 도중 신호를 무시하고 과속으로 달리던 XX발 XX행 열차가 XX 행 특급열차를 들이받았습니다.
지금 시각 밝혀진 사망자는 43명이 이르며 130명 가량이 중경상을 입어 인근 병원으로 호송되어지고
있습니다. 실종자 또한 100명 이상인것으로 추정됩니다.
XX발 XX 열차는 과속 이외에도 엔진과열의 결함이 발견되었으며 충돌당시 폭발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잔해를 치우고 나면 사망자가 더욱 크게 늘어날것으로 예상합니다.
현재 열차사고를 규명하기 위한 과학수사팀이 준비중에 있으며 기관사의 과실점을.....
쨍그랑 -
밥을 먹던 승현은 뉴스속보에 놀라 그만 들고있던 숟가락을 떨구고 말았다.
쇠로 만든 숟가락은 유리로 된 식기와 부딧혀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진동했다.
지용과 승현은 서로 말없이 바라보았다.
얼굴에 핏기가 가시고 온몸에 소름이 돋아나는듯 했다.
"형.. 사고 난 열차.. 우리가 내린 열차..맞죠?"
"아마도..."
"기차 엔진은 동력으로 가는것이 아니라 발전기로 발전을 한 다음 전기모터로 구동하는 방식이라고
들었어요. 엔진의 출력이 액압을 통해 곧바로 바퀴에 전달된다구.. 그래서 그 소리가 엔진 소리구나..
라고만 예상했는데.. 결함이 있었다니.."
"기차는 철도청과 계속 교신하기 때문에 엔진에 이상이 생기면 멈추기만 할뿐 큰 문제는 일어나지 않아.
이번 사고가 난 이유는 기관사의 과속운전 때문이야."
"무서워요.. 형 덕분에 다행이 목숨을 건졌네요."
"화장실 갔을때 유리로 된 열쇠고리가 깨졌어. 깨질만한 것이 아니었는데 깨지길래 네 말이 떠올랐어.
결과적으로는 너의 느낌이 무서울정도로 잘 맞는다는거야."
"컥.. 콜록...."
"승현아? 왜그래?"
"밥 먹은거 체할것 같아요. 우리 빨리 나가요."
승현이 계속된 뉴스 속보에 답답한 듯 가슴을 치며 물을 들이키자 지용은 재빨리 계산을 한뒤
그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가을 바람이 오싹할 정도로 차게 느껴지는 것이 이번 여행도 평범하지 않을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용은 옷이 담긴 가방을 짊어지고 승현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묵을만한 장소를 찾아 나섰다.
-168 시간의 환영- *라시안*
"계십니까?"
마을로 접어드니 생각보다 인적이 드물었다.
이곳 저곳을 돌아다녀 보았지만 숙박할 곳은 마땅치 않았고 마을 사람들은 그들을 외지 사람이라는
이유로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며 피하려는 행동 마저 보였다.
한참을 걸어들어간 끝에 오래되어 보이는 집 한채를 발견했다.
[숙박 가능] 이라는 글이 씌여 있는것으로 보아 여행객들이 묵고 가는 민박이리라.
사람이 많은것이 싫다던 승현의 걱정과는 달리 너무나도 한적했고 밖에서 보기에도 집 규모가
상당해 보였다. 이토록 외지 사람들이 찾기 어려운 곳에 큰 민박집이 있다는것이 의외었지만
날이 저물고 있는 터라 그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지용는 굳게 닫힌 대문을 두드려가며 큰 소리로 주인을 불렀다.
한참을 기다리자 외진곳에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기막히게 아름다운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보통 민박이라면 손님을 보고 반갑게 맞아줄법도 한데 차가운 인상을 풍기는 여인은 지용과 승현을
훑어보며 말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시선속에는 의아함이 가득 담겨있었다.
"실례지만 묵을 곳을 찾기 위해 왔습니다. 이곳에서 숙박이 가능합니까?"
"원래는 가능 하지만 당분간은 손님을 받지 않아요."
"네?"
꽤나 난감한 대답이 돌아왔다.
날은 저물고 기온은 점점 떨어지는데 잘 알지도 못하는 곳으로 흘러 들어와버린 두 사람에게는
당분간 손님을 받지 않는다는 말이 청천벽력처럼 들려왔다.
마을을 전부 돌아봤지만 숙박이 가능하다는 곳은 한군데도 없었다.
승현이가 난감한 표정으로 지용을 바라보고 있을때 여인 사이로 건장한 남자가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키가 얼마나 큰지 지용조차 올려다 봐야할 정도였다.
"무슨 일이시죠?"
"아.. 저희는 숙박을 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불가능하다고 하네요."
"이 마을에는 처음이세요?"
"네. 원래의 목적지는 이곳이 아니었으나 낮에 있던 사고로 발이 묶여 버렸습니다."
"아.. 기차 사고 말이군요? 우선 들어오세요."
"괜찮습니까?"
"이 마을에는 이곳 외엔 묵을수 있는곳이 없어요. 원래는 당분간 손님을 받지 않는데 사정이
딱해보이니 우선 이곳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날이 밝으면 떠나세요."
"감사합니다."
지용이가 밝은 얼굴로 승현을 재촉하자 추웠던 승현은 그의 팔에 바싹 붙어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밖에서 보기보다 훨씬 규모가 있고 고풍스러운 한옥이었다.
그들이 두리번거리며 마당으로 들어서자 키가 훤칠하고 건장한 남자가 큰 소리로 여인을 불렀다.
"하루야! 내가 방 치울테니 우선 이분들께 내부 안내좀 부탁해."
"싫어."
"우리 하루씨께서 뭔가 마음에 안드셨나보네.. 하하.."
하루라는 사람이 키 큰 남자를 흘겨보며 어디론가 들어가버리자 그는 머쓱한 표정으로 웃으며
지용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하룻동안이지만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저는 여 랑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권 지용 입니다."
"이름 좋네요. 얼굴도 무지 미남인걸요?"
"저보다야 랑씨가 훨씬 멋지십니다."
"지용씨라고 했나요? 저를 부르실때는 성과 함께 불러주세요. 이름이 요상스러워서 성을 빼고 부르면
어감이 좋지 않거든요. 이해하시죠?"
"하하.. 알겠습니다. 여랑씨."
"우선 방을 치워야 하니 짐을 내려놓으시고 목욕부터 하세요. 겉은 낡았지만 이래뵈도 끝내주는
노천 온천이 있다구요. 온천 괜찮으세요?"
"좋습니다. 저희도 사실 온천을 찾아 여행 온것입니다. 일이 꼬여 포기하고 있었지만요."
"잘 됬네요. 그럼 이쪽으로 따라오세요."
여랑은 지용와 승현에게 상냥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어디론가 안내했다.
문을 기준으로 왼쪽에는 잠을 잘수 있는 방이 늘어서 있었고 오른쪽은 그 밖에 식당이나 욕실등
여러가지 용도의 방으로 채워져 있었다.
사방이 넓직한 대청마루로 짜여져 있었으며 손님이 드나드는 민박이 맞는 모양인지 방 문마다
친절하게 호수나 이름이 적혀져 있어 따로 설명을 듣지 않아도 대충 구조가 짐작이 갔다.
그를 따라 대문 맞은편에 위치한 폭 좁고 어두운 복도를 걸어 들어가니 밖에서는 상상조차 못할
멋진 온천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방이 나무와 풀로 막혀있는 원형의 공간이었으며 올려다보이는
초 저녁의 하늘과 김이 모락모락 나는 녹색빛의 온천은 실로 감탄을 자아냈다.
"정말 멋진 곳이네요."
"하하. 그렇습니까? 이게 저희 집 자랑입니다."
"아.. 정신이 없어 숙박료를 지불하는것을 깜박했네요. 지금 드리면 되겠습니까?"
"아니에요. 어짜피 돈을 벌고자 하는 일도 아니고 오늘은 특별한 날이기 때문에 숙박비는 안 받아요."
"그러지 마세요. 그럼 저희가 불편해집니다. 하룻밤이라고 해도 숙박은 숙박이잖습니까?"
"정말 괜찮아요. 온천을 칭찬해 주신걸로 숙박비를 대신하죠."
"그럼 제가 곤란합니다만.."
"지용씨. 정 미안하시면 저녁식사에 참석해주세요. 사실 이곳에 와 있는 사람이 몇명 더 있거든요.
옆에 있는 귀엽게 생긴 분 이름이?"
"안녕하세요? 저는 이 승현이에요."
"지용씨과 승현씨만 괜찮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시켜주고 싶네요. 저녁을 같이한 후에 여러가지
게임을 하며 놀 생각인데 사람은 많을수록 재미있으니 같이 즐겨주세요. 어때요?"
"그것뿐이라면 당연히 참석 해야지요. 여랑씨. 여러모로 감사드립니다."
"별 말씀을 다하세요. 두 분 왠지 마음에 들어서 그러니 푹 쉬다 가세요. 참.. 지금이 7시니까 9시까지
식당으로 모여주세요. 저희는 저녁식사가 조금 늦답니다. 방은 제가 지금 치울테니 목욕이 끝나시면
5번이라고 쓰여있는 방으로 들어가시면 되요. 저쪽에 간의 커튼이 보이시죠? 욕의가 걸려있으니
옷을 갈아 입으시면 되요. 그럼 9시에 뵙겠습니다."
여랑은 그들에게 간단한 설명을 해주고는 급히 돌아서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승현은 지용의 팔을 잡아 끌고 옷을 갈아 입자며 보챘다.
간만에 느껴보는 여유였다.
"여랑 형 진짜 친절한 분인것 같아요."
"그러게. 처음보는 사람에게 저토록 친절한 모습을 보일수 있는 사람이 흔하지 않으니까...
눈을 보면 행동이 가식인지 진심인지를 알수 있는데 여랑씨는 친절이 몸에 배어있는것 같았어."
"키도 무지 크고 잘생겼더라구요. 처음에는 운동 선수인줄 알았어요."
"멋진 사람이더라."
"그것보다 아까 문 열어주던 분 있죠? 예쁘게 생긴분."
"응. 그 사람이 왜?"
"처음에는 여자인줄 알았는데 목소리를 들어보니 남자더라구요. 남자가 어쩜 그래요? 키도 큰 편이고
몸매도 잘 빠졌고.. 긴 머리에.. 여자 모델인줄 알았다니까요?"
"난 딱 봐도 남자로 보이던데?"
"그런가요? 아무튼 부럽다.. 나도 저렇게 생겼으면 좋았을텐데.."
"무슨 소리야? 네 얼굴 정도면 감사하고 살아야지."
"전 원래 욕심이 많아요. 남에게 밀리는건 참을수가 없다구요!"
"저러니까 승현양인거야.."
승현이 두 팔을 벌리고 신나게 온천 안으로 들어가자 지용는 중얼거린채 피식 웃으며 그를 따라
온천 안으로 들어갔다.
외진 곳인만큼 물도 깨끗하고 맑았으며 향긋한 풀 내음마져 풍겼다.
쌀쌀한 날씨에 따뜻한 물 속에 몸을 담그고 있자니 그 동안의 피로가 말끔히 가시는듯 했다.
그들은 짐을 풀기 위해 간단히 씻고 방으로 돌아왔다.
낡긴 했지만 방 안의 규모도 꽤 컸고 일제시대에 지어졌는지 내부가 한국이라기 보다는 일본같다는
느낌을 강하게 풍겼다. 잽싸게 간단한 옷으로 갈아입은 두 사람은 저녁 시간까지 잠시 쉴 생각으로
방 중앙에 펼쳐져 있는 이불에 몸을 뉘였다.
쭉 침대 생활을 해와서 딱딱한 느낌은 있었지만 훈훈한 온기와 푹신한 이불도 나름대로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계를 보니 약속 시간까지는 한 시간 반이나 남아있었다.
승현은 따뜻한지 눈을 감고 지용의 가슴에 손을 올린 채 바짝 붙어 누웠다.
"좋다.. 숙박이 가능했다면 며칠 더 묵어가고 싶을 정도로 마음에 드네.. 이곳."
"........................."
"승현아. 자니?"
"........................."
"자나보네.. 이렇게 웅크리고 자면 나중에 허리 아플텐데.."
"자는거 아니에요.."
"대답을 안하길래 자는줄 알았지."
"형이 옆에 있으니까.. 뭐랄까.. 가슴이 두근거리잖아요.. 그래서 그랬죠 뭐.."
"하하.."
승현은 자신이 말해놓고도 민망했던지 그의 가슴으로 얼굴을 깊게 파묻어 버렸다.
하지만 지용이라고 그를 옆에 두고 마음 편할리 없지 않은가.
천장을 바라보며 한가함을 즐기고 있던 지용는 팔꿈치를 바닥에 대고 상반신을 일으켜 세웠다.
그의 몸이 들려지자 얼굴이 드러난 승현은 시선을 맞추며 멀뚱멀뚱 눈을 껌벅였다.
"나라고.. 태연할리 없잖아..."
"앗...."
지용의 손이 상의 안으로 들어가자 승현은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지용이가 입술을 포개며 돌아간 고개를 다시 자신의 쪽으로 향하게 했다.
승현의 숨소리가 제법 거칠어졌다.
"밖에.. 들릴지도.. 모르는데..."
"아무도 신경 안써.. 그러니 너도 신경쓰지 마.."
그의 손에 의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 된 승현은 지용의 입술이 옮겨가는대로
몸을 떨며 작은 신음소리를 냈다.
새삼 부끄럽게 느껴져 이를 악 물고 소리를 참아보았지만 생각과는 달리 터져나오는 신음성은
전혀 컨트롤 되지 않은채 조용하고 넓은 방을 웅웅거리며 맴돌았다.
지용의 입이 점점 아래로 내려가자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승현은 그의 머리를 밀쳐내고 몸을 웅크렸다.
"형.. 불 좀.."
"불은 왜?"
"창피하니까 그렇죠.. 불 좀 꺼주시면 안될까요?"
"눈으로 보고 싶은데 왜 끄라는거야?"
"안 꺼주면 이 자세에서 움직이지 않겠어요."
"못살아.."
승현이 불을 끄지 않으면 파업체제로 돌입할것을 선언하자 지용는 피식 웃으며 몸을 일으켜 불을 껐다.
이미 해가 저문데다 시골이라 더욱 짙게 느껴지는 어둠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그는 손을 더듬어
방 한구석 탁자에 놓여 있는 스탠드 불을 켰다.
방이 넓어 그 불로는 택도 없었지만 승현이 딱 좋다고 우김에 어쩔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여전히 웅크려 있는 승현의 등을 쓸어내리며 옷을 벗고 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승현의 허리를 번쩍 안아 자신의 배 위로 올라 타게 만들었다.
당황한 승현은 팔을 버둥거리며 내려 앉으려고 했지만 지용은 한팔로 어깨를 꽉 누르고
다른 손을 들어 중지 손가락을 그의 입에 물렸다.
"이 자세는 왠지.. 싫어요.."
"싫다는거.. 거짓말이지?"
"어찌나 예리하신지..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민망해요."
"고개숙이고 나에게 기대봐.."
지용은 잡고 있던 어깨를 잡아 당겨 품에 안고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그의 입에 물려놨던 손가락에 적당한 타액이 묻어나오자 그 상태로 조심스럽게 그의 뒤로 밀어넣었다.
키스 하나만으로도 정신없는 상태에서 움직임까지 느껴지니 혼란스러운건 승현 하나인듯 싶다.
"읍.. 형.. 저번.. 그러니까.. 욕실 이후로.. 처음..인데.."
"아프지 않게 해줄게. 긴장 풀어.."
"아플것 같은데.. 하.. 거긴 왠지 싫어요!"
"조용이해 승현양"
"승현양 아니라니까요!"
승현이 발끈하여 대들던 말던 지용는 부드럽게 손가락을 움직여 정성스럽게 어루만졌다.
한참동안 공을 들여서야 겨우 자신의 것을 받아들일 정도로 풀어지자 그는 자세를 바로 한 다음
승현의 허리를 들어 천천히 자신의 위로 앉혔다.
역시.. 살짝 무리인듯 승현이 강한 힘으로 조여왔다.
"아파?"
"이..자세.. 처음이란.. 말이에요..."
"조금만 참아. 여기서는 나도 그만둘 수 없어.."
"아윽..."
저릿한 통증이 온 몸으로 퍼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승현은 이불을 쥔 두 먹에 힘을 주고 다리를 살짝 들어 올렸지만 여전히 아픔은 계속되었다.
마치 첫 경험처럼 오랫동안 닫혀있던 곳이 엄청나게 무리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을만큼 여유가 생기자 그는 다시 손을 지용의 가슴 위로 올렸다.
어둠속에서도 느껴지는 울퉁불퉁한 상처... 료가 찔러넣은 촛대의 상처..
문득 눈물이 나올것 같았다.
-나를 위해 이런 고통도 참아냈던 형인데.. 이 정도로 아프다고 할수는 없지..
손 끝으로 상처의 촉감을 느낀 이후 승현은 허리를 똑바로 세워 손으로 그의 배를 짚어 몸을 지탱하고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최대한 아픔을 억누르고 움직이는 것이 빨리 익숙해지는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몇회를 반복하자 아픔이 사그라들면서 익숙한 동작으로 움직일 정도가 되었다.
기분이 고조되어서 인지 고통과 쾌락의 변환이 무척이나 빨랐다.
승현이 익숙하지 않은 움직임으로 애쓰자 지용은 두 손으로 그의 허리를 살짝 들어올린 뒤
자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용형.. 하아.."
"만나서 반갑다..."
"......"
"다시 만나게 되어서 기뻐..."
"형..."
"다시 날 받아줘서 고맙다.."
"좋아.. 지용..형..."
"사랑한다.. 승현아.."
등 줄기를 타고 흐르는 땀은 가슴을 녹이는 사랑의 증거.
공기중에 녹아드는 거친 호흡은 애틋한 심장의 울부짖음.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행위는 영원을 다짐하는 간절한 약속.
"랑씨.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을 이곳에 들이시면 어떻게 합니까?"
"여랑이라고 부르라니까요?"
"하하.. 예민하시기는."
"만나보면 알겠지만 괜찮은 사람들이었어요. 그리고 두 사람.. 연인이것 같던데요?"
"그렇습니까? 기막힌 우연입니다."
지용이가 승현과 같이 식당으로 들어서자 카레 냄새가 군침이 넘어갈 정도로 진동했다.
그들이 들어서자 여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반갑게 맞으며 안내했다.
지용는 승현을 앉힌후 자신도 자리에 앉아 음식이 담긴 접시를 받았다.
음식은 하루라는 사람이 하는듯했다. 차가운 얼굴이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모두들 인사하세요. 이쪽은 권 지용씨고 이쪽은 이 승현씨입니다."
"안녕하세요. 하루 신세지게 되었습니다. 권 지용입니다."
"저도 하루 신세 부탁해요. 이 승현이에요."
그들이 이름을 밝히고 모두에게 인사하자 여랑은 웃으며 질문했다.
"두 분. 역시 연인 사이시죠?"
"네?"
"놀라실것 없습니다. 이곳은 모두가 같은 사람들끼리 모인 자리니까요."
"아 그렇습니까?"
"우선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선사하는 저의 연인에 대해 소개합니다."
"소개는 무슨.."
"원래 말이 없고 차갑지만 알고 보면 나름대로 괜찮은 사람이에요. 이름은 단 하루 입니다."
"하루씨 감사합니다. 맛있게 잘 먹겠습니다."
지용가 하루를 보며 고개숙여 인사하자 그는 살짝 민망한지 얼떨결에 같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그 밖의 사람들은 낯선 두 사람에게 별 다른 경계심 없이 자신들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지용씨 하고 승현씨라고 하셨죠? 저는 오 대양이라고 하며 제 옆에 있는 이 아이는 저의 연인인
진 영원이라고 합니다. 제가 24살이고 영원이가 20살이죠."
"저희와 나이가 같군요? 제가 24이고 승현이가 20살이니 친구로 지내면 좋을것 같네요."
"잘됬네요. 반가워요."
"오 대양이라면 오 대양 육 대주의 오 대양인거죠? 와우... 멋진 이름이네요."
"그러니? 고맙다. 하하.."
오 대양이라는 사람은 이름답게 활기찬 성격의 소유자였고 그의 애인이라는 영원 역시 쌍커플이
짙은 동그란 눈에 귀여운 인상이었다.
영원은 자신이 제일 막내라고 생각했는데 승현이 동갑이라는 사실을 알고나자 눈짓을 보내며 웃었다.
목소리를 내지 않은 채 '친하게 지내자' 라고 입으로 벙긋거리기에 승현도 그와 마찬가지로 입만
벙긋거리며 '그래' 라고 대답하며 웃었다.
생각보다 수월하고 분위기 좋은 대면이었다.
"이번엔 저희 차례죠? 저는 이 해일이라고 해요. 별명은 쓰나미라고나 할까요?"
"쓰나미.. 쿡쿡..."
"이 쪽은 저의 애인인 신 여호수아 라고 해요."
"쓰나미! 남들 앞에서 그 이름으로 부르면 맞는다?"
"성격 한번 까칠하다니까?"
"빨리 다시 소개해. 모든걸 생략하고 간단하게 설명해주라."
"이름이 무척 싫은가보네요. 이 녀석의 부모님이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기 때문에 이름이 성서에 나오는
인물라고나 할까? 아무튼 소원대로 모든걸 생략하고 호수 라고 불러주시면 되겠습니다."
"그렇지! 바로 그거거든~"
"보니까 저희가 제일 나이가 많은것 같네요. 호수와 저는 26살이거든요. 아직은 대학원생이구요.
저에게는 이름을 불러도 좋지만 호수에게는 형이라고 불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성격이 까칠해서
이름을 부르면 화낼지도 몰라요."
"못살아.. 너 애인 맞아? 남들 앞에서 날 나쁜 사람 취급하는거야 지금?"
"네. 이렇게 욕 먹습니다."
"하하.."
해일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사람은 부드러운 인상에 자상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호수는
일본 인형처럼 새침한 인상이었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상당한 미인형이었다.
성격이 까칠한듯 했지만 해일의 옆에서 애교를 부리는 모습으로 보면 꼭 그런것 같지도 않았다.
지용과 승현은 처음보는 세 커플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음식도 맛이 좋았고 사정만 되면 며칠 더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승현은 카레가 마음에 들었는지 접시속으로 빠져 들어갈것 같은 폼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버릇적으로 식당 내부 구조와 식기. 반찬등을 살피며 정보를 머릿속에 입력하고 있었다.
평소 모습으로는 전혀 알수 없지만 생각보다 관찰력과 집중력이 뛰어난 아이었다.
일상적인 대화와 농담 섞인 말을 주고 받던 유쾌한 식사가 끝나고 후식으로 따뜻한 커피와 코코아가
나오자 여랑은 손바닥을 세게 부딧히며 모두를 주목 시켰다.
"오늘은 재미있는 게임이 시작되는 전날이니 전야제라고 생각하시고 맘껏 즐겨주세요."
"이곳에서 무슨 게임이 진행 되나보죠?"
코코아를 선택한 승현에게 티스푼을 쥐어주던 지용이 게임이라는 말에 관심 가득한 눈으로
여랑을 바라보았다. 그는 커피잔을 딸그락 거리며 손잡이를 돌려놓고는 친절하게 대답했다.
"지용씨와 승현이의 방문은 예상할수 없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고민을 많이 했어요.
하지만 모두와 잘 맞는것을 보니 같이 어울릴수 있겠다고 판단했어요. 그렇죠? "
"뭐.. 우리와 생각이 맞으면 안될건 없다고 봅니다 저는."
대양이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고 나머지 사람들도 별 다른 말이 없자 여랑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지용씨. 저희는 작은 동호회에서 알게 된 사람들이에요. 그곳에는 모두와 같이 남자커플들로 구성되어
있죠. 우선 표면적으로는 커플들의 모임이고 그 중 특별회원들끼리는 따로 친목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특별회원이요?"
"네. 시샵인 저와 부 시샵인 하루가 여러가지 조건을 보고 특별회원을 선발하게 되는데 조건이라고
해봐야 신체 건강하고 마음이 통하면 장땡이지만요.. 하하.. 아무튼 특별회원끼리는 친목을 도모하는
차원에서 한 계절에 한번. 일년에 네 차례로 재미있는 게임을 진행하고 있어요."
"게임이라면.. 어떤?"
"특별 회원은 현재 20커플이구요. 제가 내는 문제를 맞춘 최종 두 커플이 이곳으로 초대받게 되죠.
기간은 일주일이고 커플전으로 진행되요."
"꽤 흥미있는데요?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 겁니까?"
"간단해요. 커플끼리 상의해서 문제를 내면 나머지 커플이 맞추는거에요. 제비뽑기로 순서를 정하고
하루에 세번씩 순서대로 돌아가면서 문제를 내는거에요. 일주일간 가장 많은 문제를 맞춘 커플이
우승하게 되는것이죠.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곤란하지만 대충 내용은 그렇습니다."
"그럼 모두가 원래 알던 분들은 아니라는 말씀이군요?"
"그렇죠. 하지만 한정된 범위 안에서 진행되는 게임이기 때문에 그 중 뛰어난 커플은 일년에도 몇번씩
보게되요. 저와 하루는 5년째 이 게임을 진행하고 있지만 매번 보는 커플은 고만고만 하더라구요.
특히 대양씨와 영원 커플은 벌써 2년째 보고 있는걸요? 무서운 두뇌의 소유자들입니다. 하하..
그리고 해일씨와 호수씨는 이번에 처음 만난 커플이지만 예선 문제중 아무도 풀지 못한 문제를
풀고 들어온 분들이에요. 문제를 냈을때 그 문제만은 아무도 풀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저의 예상을 무참하게 깨 버린 사람이 저 두분이니까요."
게임이라면 지용와 승현 두 사람이라고 다른 사람에게 밀릴리 없었다.
하지만 산장에서의 끔찍한 기억으로 인해 게임이 별로 달갑게 느껴지지 않는건 사실이었다.
승현은 굴러가는 머리를 감당하지 못하고 이야기에 빠져들고 있었고 사실은 지용도 약간의 흥미를
가지고 있는지라 계속되는 여랑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지용씨와 승현이가 괜찮다면 이번 게임에 참가하셔도 좋아요. 모두가 반대하지 않는군요."
"글쎄요.. 생각 좀 해봐야 할것 같습니다. 우선은 승현이가 원해야.."
그가 승현을 바라보며 망설이자 승현은 귀에 입술을 바짝 붙이고 속삭였다.
"형.. 해보는게 어때요? 별로 위험한것 같지 않아요."
"나도 궁금하긴 하지만 산장처럼 함정이 있으면 곤란하잖아."
"주최자가 확실한 게임은 그다지 위험하지 않을거에요.. 이곳이 마음에 들어요. 돌아가긴 왠지
아쉬운데요? 사람들도 마음에 들구요."
"사실은.. 나도 너와 같은 생각이야.. 우리 누가 말려?"
"못 말려요.."
승현과 확실하게 결정하자 지용은 여랑을 향해 긍정의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여랑은 그들이 궁금해 할 다음 설명을 시작했다.
"마음을 정하신것 같네요. 하지만 두분의 실력이 저희와 비슷해야 게임 진행이 재미있지 않겠어요?
실례가 안된다면 테스트를 해봐도 될까요?"
"어떤 테스트 말입니까?"
지용이가 테스트라는 말에 궁금한 듯 손가락을 모으며 턱을 괴자 그때까지 아무말 없이 여랑의 옆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시던 하루가 입을 열었다.
살짝 허스키한 목소리가 얼굴과 어울려 설명하지 못할 색기가 흐르는 사람이었다.
"오늘 밤은 모두가 즐길수 있는 간단한 게임을 하겠지만 우선 두분을 위해서 테스트 게임을 할께요.
게임의 이름은 '마피아' 혹시 이 게임을 아시는지요?"
"잘 모르겠습니다만."
"마피아 게임이라는 것은 복잡하면서도 간단해요. 두 분이 쪽지를 만들어 1장에 표시를 해주세요.
쪽지는 세장. 두 분을 제외한 저희 6명이 진행합니다. 커플 게임이니 이것 역시 커플전으로 진행되며
표시가 되어 있는 쪽지를 집은 커플이 마피아. 나머지 두 커플은 시민이 되는거죠."
"저희는 마피아 커플을 잡아내면 되는 것이로군요?"
"네. 정확합니다. 시민들은 마피아가 누군지 모르지만 마피아들은 시민이 누군지 알고 있습니다.
자신들을 제외한 전원이 시민일테니까요. 마피아와 시민이 서로 자신이 시민이라고 주장을 시작하면
두분께서는 진짜 마피아 커플을 잡아내면 되는 것입니다. 어떠세요? 해보시겠어요?"
"해보겠습니다."
"하지만 긴장하는 것이 좋을거에요. 모두 마피아 게임이라면 수준급이니까요. 마피아 게임을 무사히
통과하면 내일부터는 본 게임이 시작될 것입니다. 우승 커플에게는 온천이 딸려있는 이 민박집이
상금으로 주어집니다. 게임 치고는 괜찮은 보상이니 즐거우실거에요."
"이 집이 우승 커플의 상금이라구요?"
"사실은 저와 여랑도 게임에 참가하여 이곳을 얻어낸거에요. 벌써 5년이 흘렀으니 5년째 우승했다는
말이 되겠지요? 이제 대충 설명 드렸으니 별채로 옮겨 게임을 시작할까요?"
하루가 말을 마치자 여랑이 일어서서 그의 어깨를 품에 안고 식당 밖으로 나갔다.
나머지 사람들도 서둘러 그들을 따라 별채로 모여들었다.
지용은 하얀 종이 세장을 받아 하나에 'Hallucination' 이라는 글귀를 적어넣은 뒤 작게 접어
방 중앙에 높이 던졌다.
이것으로 그들의 첫 게임이 시작되었다.
-one-
*환영(幻影)
환상. 감각 따위의 착오로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보는 것.
*환청(幻聽)
주변에 소리나는 물체나 사람이 없음에도 소리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환각(幻覺)
실제로는 자극 대상이 없는데도 마치 실제하는 듯 감각으로 느끼거나 느꼈다고 생각하는 것.
-168 시간의 환영- *라시안*
"시작하세요."
지용이가 종이를 높이 던지자 사람들은 각자 집어든 종이를 조심스레 펼쳐들었다.
게임은 시작되었고 그들은 저마다 표정관리를 하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처음 말을 꺼낸건 종이를 접어 주머니에 찔러 넣던 대양이었다.
"전 마피아가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다."
"밝히겠습니까? 아니면 조금 더 지켜 보시겠습니까?"
"밝히겠습니다. 마피아는 여랑과 하루 커플입니다."
"이유는요?"
"저희 부모님의 살인장면을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저와 영원이는 마트에 다녀오던 길이었고
대문이 열려있는걸 이상하게 생각해 발소리를 죽이고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때 여랑씨가
하루씨와 함께 창문으로 빠져 나가고 있었습니다."
"대양씨. 저와 하루의 뒷 모습만으로 단정짓는건 무리가 있지 않습니까? 저희는 결백합니다."
"여랑씨의 큰 키와 하루씨의 머릿카락.. 그것은 한번 보고 잊을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하.. 졸지에 살인자로 몰리게 생겼군요."
대양의 말에 여랑이 큰 소리로 웃자 호수가 다음 말을 이어갔다.
"저 역시 여랑 하루 커플이 마피아라고 생각합니다."
"호수씨까지 저희를 의심할 작정인가요?"
"저는 당시 해일과 함께 시체를 검시했던 사람입니다. 살인 현장을 목격한 사람이기도 하죠."
"그래서요?"
"대양씨. 아버님이 어떤 모습으로 살해 당했는지 설명 해주시겠어요?"
"네. 제가 들어갔을때 아버지는 이미 숨져있는 상태였습니다. 얼굴에 랩이 칭칭 감겨져 있었고
두 손은 괴로운 듯 목을 움켜잡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온 몸이 칼에 찔려 쓰러져 있었습니다."
"맞습니다. 대양씨 말대로 아버님은 질식사. 어머님은 급소를 여러군데 찔려 과다출혈로 사망
하셨습니다. 여랑씨와 하루씨는 바로 이웃에 살고 계시죠?"
"맞습니다."
"그 날 두분이 뭐 하셨는지 말씀 해주시겠어요?"
호수의 질문이 쏟아지자 황당한 표정으로 일관하면 하루가 입을 열었다.
"옆집에 산다는 이유로 범인으로 몰린다면 함부로 이사도 못가겠군요? 그날 여랑과 저는 집에 있지
않았습니다. 마침 주말이라 가까운 곳으로 여행을 다녀 왔으니까요."
"여행을 갔다는 증거가 있습니까? 예를 들어 기차표의 영수증이라던가.."
"차를 끌고 갔기 때문에 기차표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날 날짜가 찍힌 고속도로의 통행료 영수증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묵었던 호텔의 숙박기록을 조사하면 확실히 알수 있을 것입니다. 그나저나
저는 이유도 없이 저희를 범인으로 모는 호수씨와 해일씨가 의심이 되는군요. 대양씨야 부모님을 잃은
충격으로 저희를 의심할 수 있다지만 호수씨와 해일씨는 무슨 근거로 저희를 의심하는거죠? 저는
이것이 자신에게 쏟아질지도 모르는 의심을 미리 돌려보겠다는 행동으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저희는 범인이 아닙니다."
"그건 저희도 마찬가지 입니다."
보통 마피아 게임은 무작정 표정이나 행동을 보고 서로를 의심하기 마련인데 이들은 하나의
살인사건까지 만들어 마피아 게임을 진행하고 있었다. 지용는 그들의 연기력에 감탄하며 조심히
말을 시작했다. 승현은 그 순간에도 사람들의 표정을 놓치지 않고 지켜보았다.
"마피아 게임을 이런 식으로도 진행할 수 있군요. 대단해요."
"이제 질문을 하셔도 되요. 지용씨"
"아니에요. 마피아가 누군지 알것 같습니다."
"벌써요?"
지용가 한번의 질문도 없이 바로 마피아를 알아 냈다고 말하자 놀란 사람들은 그와 승현에게로
시선을 모으며 집중했다. 지용은 승현에게 귓말로 소근거리더니 두 사람이 생각한 답이 일치
했는지 살며시 미소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마피아는 호수씨와 해일씨입니다."
"네? 저희는 마피아가 아닙니다."
"그건 설명이 끝난 후 종이를 펼쳐보면 알겠지요. 우선 살인 현장을 검시했다고 했는데 랩을 사용하여
사람을 죽이는 방법.. 나름대로 훌륭했습니다. 하지만 랩으로는 사람을 죽일 수 없습니다."
"어째서죠?"
"질식사로 죽이려면 랩을 얼굴에 단단히 밀착시킨 채 감아야 합니다. 조금의 틈도 없어야 질식시킬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저항하는 사람을 상대로 결박하지도 않은 채 꼼꼼히 랩으로 얼굴을 감싼다는건
쉬운일이 아닙니다. 대양씨 말로는 아버님이 괴로운듯 목을 움켜쥐고 있었다고 했죠?"
"그렇습니다."
"그 말은 아버님의 양 손이 자유로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손이 자유로웠다면 얼굴에 감싸진 랩을
뜯을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범인이 2인조니 한 사람이 양 손을 목으로 가져가 잡고 눌렀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래도 죽일 수 없습니다. 사람의 입이 빨아들이는 힘이 얼마나
강한줄 아십니까? 숨을 쉴수 없을만큼 랩을 감았다면 코 뿐만 아니라 입도 밀착이 되어있었을 겁니다.
그 상태로 위협을 느낀 피해자가 랩을 빨아들이면 금새 구멍이 뚫이고 맙니다."
"하지만 랩이 여러겹으로 단단히 감싸져 있었습니다."
"아무리 랩이 여러겹으로 감싸져 있었다고 해도 사람이 빨아들이는 힘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특히 죽음을 직감한 사람은 살기위해 엄청난 괴력을 발휘하게 되죠. 그럼으로 두꺼운 랩은 입의
힘으로 쉽게 뚫수 있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목을 졸라 죽였다면 훨씬 그럴듯 할 뻔 했지만 랩을
사용해 죽였다는건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건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살인 방법이죠. 또한 호수씨는
어머님의 사인이 과다출혈이라고 했습니다. 칼로 여러군데를 찔렸다면.. 그것도 급소를 여러군데
찔렸다면 과다출혈이 아니라 즉사입니다. 피가 빠져 나가기도 전에 목숨을 잃게 된다는 말이죠."
지용가 숨도 쉬지않고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 하자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던 승현이 말을 이었다.
"저도 호수 형이라고 생각 했는데요. 그 이유는 손 버릇 때문이에요~"
"손 버릇이라니?"
"저는 한번 본 사람의 버릇이나 행동은 잘 잊지 않거든요? 어제 저녁 식당에서 호수 형이 해일 형에게
쓰나미라고 부르며 화를 냈을때 형이 왼손으로 오른쪽 검지 손가락을 만지작 거린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그 이후로도 당황하거나 화를 낼때 계속 그러더라구요. 지금도 여전히 만지고 있구요."
"아.."
"솔직히 말하세요. 사실은 저희 몰래 여섯분이 짰죠? 이야기나 범인 등을 말이에요."
"무슨 소리니?"
"표시 되어 있는 종이를 누가 뽑든 마피아는 호수 형과 해일 형이 맡기로 말이에요. 그리고 조금 전
진짜 마피아로 뽑힌 사람은 대양 형과 영원이었어요. 제가 지켜본 바에 의하면 영원이는 표정을 잘
감추지 못해요. 기쁨이나 놀람. 당황함 등이 얼굴에 고스란히 나타나더라구요. 아마 그 쪽지는 저희
모르게 이미 호수형네 쪽지와 바뀌어져 있겠죠? 어떤가요?"
"대단하다!"
생각보다 쉽게 마피아가 밝혀지자 모두들 혀를 내두르며 지용과 승현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승현은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 해보였고 지용은 그런 그를 내려다보며 머리를 살짝
쓰다듬어 주었다. 여랑은 큰 소리로 웃으며 그들에게 박수를 쳐주었다.
"생각보다 대단하신데요? 충분히 저희와 게임을 즐길 수 있겠어요. 멋졌습니다."
"고맙습니다. 여랑씨."
"이제부터 모두 긴장하세요. 만만치 않은 커플이 들어 왔으니까요~"
여랑이 농담 섞인 말투로 지용을 지목하자 모두들 한바탕 웃으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예정보다 일찍 마피아 게임이 끝나자 해일의 제안으로 그들은 왕과 나 게임에 돌입했다.
왕과 나는 말 그대로 왕이 적혀진 쪽지 한장과 숫자가 적힌 나머지 쪽지를 바닥에 뿌리고 하나씩
집어 왕이 된 사람이 나머지 사람들에게 원하는 것을 한가지 시키는 게임이었다.
"이번 왕은 제가 됬네요. 음.. 그럼 2번을 뽑은 커플 나와서 키스하세요~"
영원이 왕의 쪽지를 들어올리며 갑자기 2번 커플에게 키스를 하라고 명령했다.
게임 중 왕의 명령은 절대적인 것. 걸린 커플은 군말없이 왕의 요구에 따라야 한다.
모두가 자신의 쪽지를 바라보며 안도하고 있을때 지용이가 그들의 앞으로 쪽지를 내밀며 천천히 일어섰다
"지용씨 커플! 오~ 좋아요!"
"진하게 한번 보여주세요!"
여랑과 해일이 그를 향해 큰 소리를 내며 손을 흔들자 지용이가 미소로 답하더니 어쩔줄 몰라하며
자리에 앉아 있던 승현을 번쩍 들어 올려 그대로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그의 적극적인 행동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휘파람을 불며 열렬히 환호했고 승현은 그의 손에 잡혀
빼도박도 못하고 그의 키스를 받아야만 했다. 생각보다 길고 진한 키스였다.
"뭐야? 권 지용이 살아있어?"
"제가 알아본 바로는 그렇습니다. 더구나 6기 마스터를 포기한 이 승현 이라는 아이와 같이 있습니다.
뒤를 밟아 알아낸것이니 확실합니다. 그들이 있는 장소를 말해드릴까요?"
"이런! 어서 이사를 불러!"
송 회장은 소름끼치는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갈며 분개했다.
카미아의 씨를 말리기 위해 노력했는데도 지용이 살아있다는 것은 그의 앞날에 큰 위협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지용이 완전히 포기했다고 해도 그의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그의 비서가 나가고 잠시 후. 이사라고 불리우는 사람이 회장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형제지간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어떻게 된거냐.. 권 지용이 살아있다고 들었다."
"결국.. 아셨군요."
"결국 아셨군요? 네가 제 정신이야? 그토록 당부했건만 그 녀석을 살려두면 어떻게 해!"
"카미아는 이미 무너졌습니다. 그 어린 아이가 더 이상 뭘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제 그만
하십시오. 아무리 형님이지만 저도 참아 드리는덴 한계가 있습니다."
"뭐가 어째?"
"그 아이는 모든것을 알고 있습니다. 자수하겠다는 걸 그의 목숨을 담보로 거래했습니다."
"그럼 더 위험하지 않느냐! 너에게 일을 맡기는게 아니었어.."
"아직도 감정적으로 사람을 판단하십니까? 제가 보기에 그 아이는 분명 총명하고 무서울 만큼
현실적이지만 거짓말을 할 사람은 아닙니다. 이 일은 제가 책임질테니 걱정 마십시오."
"6기 마스터를 포기한 아이와 같이 있다질 않느냐! 분명 그 아이도 모든 사실을 알고 있을텐데 적을
늘려서 어쩔 셈이냐! "
"두 사람은 깊은 인연으로 얽혀져 있습니다. 생각보다 똑똑한 아이들이니 섣부른 행동은 절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절 믿고 그 아이들을 놔주십시오.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송 회장의 동생이라는 사람은 평범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매서운 눈매를 가지고 있었다.
장남이라는 이유로 송 회장이 회사를 거머쥐고는 있지만 실질적으로 회사를 굴리는 것은 그의 동생인
송 이사였다. 타고난 화술과 거래 능력이 뛰어난 그는 송아에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존재였다.
여지껏 그는 말도 안되는 산장 이벤트의 집사 자리까지 병행하며 군말없이 송 회장을 도왔지만
더 이상은 그의 삐뚤어진 생각을 묵인하고 있어서는 안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가 책임을 지겠다는 말. 그것은 그의 자리를 걸고 지켜 내겠다는 말과도 일치했다.
송 회장 역시 그것을 잘 알고 있기에 더더욱 분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깊은 인연이라.. 그곳에서 새로운 인연을 찾았다는 건가?
"아스카를 불러. 지금 당장."
"네. 회장님."
"사람들 앞에서 너무 심한거 아니에요?"
"뭐 어때? 모든걸 이해하는 사람들인데 고민하는 네가 더 이상한거 아냐?"
"저는 이런거 처음이란 말이에요. 그리고 입술에만 살짝 하지 그렇게 진하게 하면 어째요.."
"다시 한번 할까? 승현양?"
"승현양 아니라니.."
게임 도중 키스를 한것 때문에 승현이 약간 토라진 모습을 보이자 지용은 심술맞게 그보다 더 진한
키스를 하며 그를 강제로 눕혔다. 사실 승현이 불만인 것은 그가 키스를 했다는 사실보다 모두가
보고 있음에도 그의 입술이 너무 달콤해 스스로가 작은 소리를 냈다는 점이다.
그 소리는 사실 지용에게 밖에 들리지 않을만큼 작은 소리였고 모두들 환호성을 지르느라 정신이
없어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는데도 도둑이 제발 저리는 듯 혼자 신경쓰고 있는 것이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길고 긴 키스가 끝나자 승현은 손을 들어 지용의 머리카락을 빙빙 돌리며 장난을
쳤다. 나름대로 어색한 분위기를 수습해보고자 하는 행동이었다.
그러자 지용은 그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옆으로 누웠다. 자연스레 승현도 그를 따라 몸을 틀었다.
"우리 뭐하는건지 모르겠어요. 산장에서 머리 아플만큼 고생해놓고 또 이런 게임에 참가하다니.."
"승현이 네가 하지 말자면 안할 작정이었어."
"그럼 모든게 제 탓이란 말인가요?"
"맞아. 네 탓이야."
"그런 비겁한 말이 어디있어요? 사실 형도 하고 싶었잖아요."
"난 무조건 너의 의견에 따랐을 뿐이야."
"계속 그렇게 나온다 이거죠? 실토할때까지 한번 당해봐요!"
"잠시만..!! 간지러워! 그만.. "
"말해요 형도 하고 싶었다고 말해요.. 빨리 말해요~"
"하하... 알았어...다 내가 꾸민 일이니까 간지럼은 그만..."
"저에게 모든걸 뒤집어 씌운 벌이에요."
"계속 간지럽히면 나도 최후의 수단을 쓴다!"
"나진아. 내일 아침 아스카와 함께 다녀올 곳이 있다."
"싫어요.."
"과연 네가 이 이야기를 듣고도 싫다고 할까?"
침대 한 구석에 앉아 멍하니 창문을 바라보던 나진이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힘없이 대답했다.
머리는 한번도 자르지 않았는지 길게 자라 어느새 등을 덮고 있었고 빛에 노출된지 오래인듯
창백하게 질린 피부는 처음부터 색이 없었던 것처럼 빛이 바래 회색빛이 돌기까지 했다.
건강에 별 다른 이상은 없어 보였지만 마른 몸은 한 눈에 보기에도 무척 안쓰러웠다.
송 회장은 자신의 얼굴 조차 바라보지 않는 그에게 구미 당기는 제안을 한가지 했다.
"그냥 다녀오라고는 하지 않겠다. 지용을 만나고 오너라."
"네?"
그의 입에서 지용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초점을 잃은 눈동자가 2년만에 처음으로 빛을 내며 반짝였다.
나진은 한참 동안이나 송 회장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용이는 외국으로 나갔다고 하셨잖아요? 한국에 돌아온거에요?"
"그래. 돌아왔다."
"어떻게 아셨어요? 지용가 돌아온걸 어떻게 아셨어요?
"네가 죽은 사람처럼 살고 있는데 더 이상 방해해서 뭐하겠느냐. 수소문을 해놨으니 이제 만나거라."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버지."
"아버지라는 말을 그 녀석 때문에 듣게 되다니.. 자식 키워봤자 소용 없다는 말이 맞는가? 거참.."
"지금 가면 안되나요? 기사를 불러주시면 지금 다녀올께요."
"시간이 너무 늦었다. 내일 아침 일찍 아스카와 함께 떠나거라."
"아스카는 왜요?"
"네가 밖에 나가지 않은지 벌써 2년이 넘었다. 그 몸으로 혼자 먼 지방까지 보낼 수는 없어.
아스카를 붙여줄테니 함께 떠나거라. 그가 알아서 잘 챙겨줄꺼야."
"혼자 가고 싶은데.."
"시키는대로 해."
"네..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잠자리에 들거라. 아침 일찍 깨울테니 푹 자둬."
송 회장은 그를 향해 의미있는 웃음을 지어보이며 방을 나섰다. 계단을 돌아 내려가자 다시금
자신을 보며 미소지었던 나진의 얼굴이 떠올라 피식 웃으며 미간을 좁혔다.
그리고는 얼음 가득 담긴 잔에 위스키를 반쯤 따르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지용에게서 널 떼어놓는 것보다 승현이라는 아이와 떼어놓는 것이 더 중요하겠지?"
"멈추지말고 계속해.."
"배 아프다며? 그만 하자."
"싫어! 계속 해줘."
"저 고집을 누가 말려."
"빨리.."
호수는 방 한켠에 마련 되어있는 흔들의자에 앉아 해일의 머릿카락을 움켜쥐고 있었다.
아픔을 못 참고 질색하는 호수 덕에 사귄지 반년이 넘도록 제대로 된 관계를 가져보지 못한 해일은
언제나 이런식으로 욕구를 해소할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호수가 스스로 해일에게 무언가를 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저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앉아 있으면 모든건 해일이 다 알아서 하기 때문이다.
"기분 좋아.."
"이젠 거부감 들지 않아?"
"괜찮아. 해일이 너니까.."
"오늘은 어떤걸 원해?"
"계속 입으로 해줘.. 손은 싫어.."
해일을 만나기 전 길가던 남자에게 잘못걸려 억지로 범해진 후 호수는 한동안 그 기억을 떨쳐내지
못하고 사람의 손길을 거부했었다. 그러다 3년을 넘게 한결같이 자신을 바라봐준 해일과 사귀게
되었지만 쉽게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해 한참을 고생한 적이 있다.
해일의 지극정성 덕분에 지금은 상태가 많이 호전되어 그에게는 몸을 허락하지만 여전히 마지막까지는
가지 못한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해일은 불만 없이 호수의 요구대로 잘 따라주었다.
"아.. 해일아.."
"응?"
"네가 그랬지.. 해일과 호수는 둘 다 물의... 기운이라구.."
"그랬지.."
"물과 물은 섞여도.. 충돌 없이.. 잘 섞여.. 들어간다구.."
"그래.. 우린 물이야.. 처음부터 함께 공존했던 물.."
"하..아...그동안 괴로웠지..이젠 들어와도 되.."
"무리하지마..아직은 참을만 해..
"넌 물이니까.. 날 다치게 하지 않을거야...아니야?"
"난 널 위해서는 뭐든지 해.. 하지만 아직은 널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그럼.. 내가 해줄까?"
"너는 이대로 가만히 있어.. 내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충분히 느껴봐."
"이미 충분히 느끼고 있어.."
"그리고 너는 명령하는 쪽이 더 어울려.. 내 앞에서 무릎 꿇는것 따윈 절대 하지마..알겠니?"
"나.. 못 참겠어.."
"목소리를 들려줘.. 같이 느끼고 싶어.."
"해일아.."
물과 기름은 서로 반발하는 상극.. 물과 얼음은 동일성분을 지녔지만 다른 형태..
태풍처럼 몰아닥치는 해일과 고요함 속에 잔잔히 파동하는 호수는 같지만 다르고..
다르지만 같은.. 깨끗하고 순수한 물과 물의 결합.
-168 시간의 환영- *라시안*
"많이 여위셨습니다. 그동안 잘 계셨는지요."
"아스카. 잘 있었어?"
"회장님의 분부를 받고 모시러 왔습니다. 저와 함께 가시면 됩니다."
이른 아침 짧고 검은 머리를 가진 훤칠한 사내가 나진을 데리러 그의 집을 방문했다.
밤새 지용을 만날 수 있다는 들뜬 마음으로 잠을 설친 나진은 그의 부름에 서둘러 챙겨놓은 짐을 들고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지용을 만나게 되면 며칠 정도는 같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가방에
몇벌의 옷과 그동안 써두었던 추리노트를 챙겨놓은 상태였다.
그는 송 회장이 준비한 차에 올라 기쁘게 웃으며 시계가 채워져 있는 손목을 들여다보았다.
8시도 안된 이른 시각이니 적어도 점심 나절에는 그를 만날 수 있겠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 혼자 가도 되는데 아스카가 괜히 수고가 많네."
"괜찮습니다. 그것보다 식사 먼저 하셔야지요. 어디에 차를 세울까요?"
"배고파?"
"저는 아침을 먹었습니다. 나진씨가 걱정 되어서 그렇습니다."
"아냐. 나도 생각없으니 이대로 멈추지 말고 계속 가자."
"네. 알겠습니다."
모두에게 아스카라고 불리우는 청년은 25세로 명문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였다.
두 집안의 각별한 친분 관계로 아스카를 어린시절부터 쭉 눈여겨보던 송 회장이 그를 직접 송아로
데려다 곁에 두고 여러가지 경영 교육을 시키고 있었다.
훗날 나진이 송아를 물려받게 될 때를 대비한 밑거름이며 버팀목인 셈이다.
아스카라는 이름만으로 그를 일본인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 그는 순수 한국사람이다.
원래 이름은 따로 있으나 어렸을때부터 부모님이 그를 아스카라고 불렀고 그것에 익숙한 송 회장이나
나진 또한 그를 그렇게 부르고 있는 것이다.
"아스카. 잠깐 어깨 좀 빌려줘."
"졸리십니까?"
"잠을 거의 못 잤거든.. 지금 자둬야 할 것 같아."
"어깨에 기대면 목이 아픕니다. 무릎을 내어 드릴테니 편히 주무세요."
"고마워. 아스카"
나진은 아스카에게 도착하기 전에 깨워 달라고 신신당부를 하고는 그의 무릎에 누워 잠을 청했다.
정말 한잠도 못잤는지 나진은 아스카의 무릎에 눕자마자 금새 잠이 들고 말았다.
뭐가 그리 좋은지 행복한 얼굴로 잠든 나진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아스카는 그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주고는 창 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모두들 안녕히 주무셨어요?"
"여랑씨와 하루씨도 좋은 꿈 꾸셨나요?"
지용과 승현이 간단히 씻고 식당으로 들어서자 아침준비로 바쁜 여랑이 그들을 향해 밝게 인사했다.
아직 아무도 일어난 것 같지 않은데 벌써 식사준비가 다 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두 사람은 선천적으로
매우 부지런한것 같았다.. 정말로 민박집에 강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승현이 재빨리 팔을 걷어 붙이고 하루에게 다가가 도울것이 없냐며 말을 걸자 여랑은 지용에게
시원한 물 한잔을 건내주더니 승현에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이미 식사준비는 다 되었으니 승현이 네가 다른 사람들을 깨워줄래?"
"네. 제가 가서 깨우고 올께요~"
승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식당을 빠져나가자 여랑은 뒤돌아서서 접시를 꺼내고 있는 하루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지용에게 말을 걸었다. 하루는 여전히 말 없이 조용한 모습이었다.
"지용씨는 참 귀여운 애인을 두셨네요."
"하하.. 그렇습니까?"
"승현군은 싹싹하고 총명한것 같아요. 그리고 무엇보다 지용씨를 바라보는 시선이 굉장하죠."
"어때 보이는데요?"
"잠시라도 떨어져서는 살수 없을듯한 표정이랄까? 말로 설명하긴 힘들지만 아무튼 진지하고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지용씨를 항해 시선을 고정 하더라구요. 두분 참 잘 어울립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희보다 여랑씨와 하루씨가 훨씬 더 잘 어울립니다. 멋진 커플이에요."
"저 말고 우리 하루만.. 하하.."
지용과 여랑이 이러저러한 대화를 나누는 사이 승현은 해일과 호수의 방 문앞에 서 있었다.
살짝 헛기침을 하고 방문을 두드렸는데도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두 사람은 깊게 잠이 든것 같았다.
잠은 나중에 자더라도 아침밥은 꼭 먹어야한다고 생각한 승현은 방해가 되더라도 깨워야겠다는 생각에
조금 더 힘을 주어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마침 그때 누군가의 손이 기척도 없이 다가와 승현의 어깨를
꽉 잡고 흔들었다. 무방비 상태에서 소스라치게 놀란 승현은 재빨리 몸을 숙이고 주저 앉아버렸다.
"승현아?"
"깜짝이야.."
"그렇게 질색하니까 오히려 내가 더 놀랐잖아?"
"그러길래 이런 장난은 치지 말라고 했지? 심장 약한 사람은 심장마비 걸린다구."
"그러세요? 호수씨?"
"그럼!"
"정말 놀랬어요.. 해일 형.."
"미안해~ 그나저나 우리 방 앞에서 뭐하고 있었어?"
"아.. 여랑형이 아침준비 다 되었다고 전해 달라셔서요."
"그렇구나~우린 벌써 일어나 씻고 왔지. 이른 아침 온천욕이 아주 끝내주거든."
"승현이라고 했지? 내 손 잡고 일어나."
호수가 손을 내밀자 승현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보이는것과 달리 호수의 팔 힘이 굉장히 세다고 느꼈다.
"같이 밥 먹으러 가자."
"두분 먼저 가세요. 저는 대양 형과 영원이를 깨우고 뒤따라 갈께요."
"그 커플이라면 깨울 필요 없을텐데? 알아서 잘 일어나더라구."
"하지만 아직 식당으로 나오지 않았어요. 늦잠을 잘지도 모르니 제가 가보고 올께요."
"걔네들은 한참 바쁠텐데.. 뭐.. 깨우고 싶으면 마음대로 해. 해일아 밥 먹으러 가자~"
"너 옷이 젖었잖아. 다른걸로 갈아입고."
"입혀줄꺼지?"
"그럼. 어서 들어와"
호수가 해일의 손을 잡아끌고 방 안으로 들어가자 승현은 씨익 웃으며 제일 끝방으로 걸어갔다.
은근히 호수가 부러운 마음에 자신도 두 눈 딱 감고 지용에게 이것저것 부탁해볼까..곰곰히 생각했다.
그러다 괜시리 부끄러운 마음에 웃음이 난 승현은 남은 두 사람을 깨우기 위해 서둘러 방 앞으로
다가가 주먹을 쥐었다.
"영원아. 안 아파?"
"아픈데 좋아요.. 계속.."
"그럼 조금 더 세게 한다?"
"아..."
-헉.. 이게 뭔 일이래?
승현은 얼굴이 빨개져 들었던 주먹을 등 뒤로 감추고 잽싸게 뒤 돌아섰다.
아무래도 들어서는 안될 무언가를 들어버린것 같아 괜히 민망해져 후다닥 식당으로 뛰어갔다.
"대양씨가 스포츠 맛사지를 배웠다며? 아침마다 영원이 근육 풀어주더라."
"왜 꼭 아침에 하는걸까?"
"그야 모르지.. 해일아. 너도 배워!"
"호수씨? 제발 그것만은.. 나는 음표와 씨름하기도 바쁜 사람이라구.. 바이올린 곡도 써달라면서?"
"그건 그거구! 나도 안마 받고 싶단 밀이야~"
"신이시여.."
뭔가 이상한 쪽으로 단단히 오해한 승현이 그들의 이야기가 끝난 다음에야 식당으로 황급히 들어섰다.
지용은 자신의 옆 의자를 빼주며 앉으라고 손짓했고 승현은 그의 곁으로 다가가 앉아 붉어진 얼굴에
양손을 올리고 고개를 푹 숙였다.
"대양씨와 영원이는 왜 안 데려오고 혼자 왔어?"
"좀 바빠 보이더라구요.. 하하.."
"그래? 어쨋든 깨어 있으니 금방 오겠네."
잠시 후 상이 차려지고 대양과 영원이 웃는 모습으로 식당으로 들어섰다.
영원은 승현의 옆 자리에 앉아 옆구리를 쿡 찌르며 인사했다.
승현은 영원을 향해 최대한 밝은 미소로 손을 흔들어 보이며 속으로 다짐했다.
-생각보다 방음이 안되네.. 앞으로 나도 자제 해야겠다..
아침 메뉴는 얼큰한 김치 전골에 도미구이었다. 요리사라고 해도 믿을만한 하루의 음식솜씨에 감탄한
사람들은 너도나도 정신없이 밥그릇을 비웠고 만족할 만큼 배를 채우고 난 뒤 후식으로 사과쥬스를
마시며 본격적인 게임 일정에 대해 의논하기 시작했다.
게임 이야기가 나오자 계속 입을 다물고 있던 하루가 여랑을 대신해 모두에게 말을 꺼냈다.
"이번에는 룰이 조금 바뀌었어요. 원래는 하루에 세번씩 약간의 시간을 두고 문제를 돌아가며 냈는데
이번에는 한 커플이 늘었으므로 한번에 문제를 교환하는 방식으로 진행할게요. 오늘처럼 아침식사를
끝내면 오후 3시까지 자유시간을 드립니다. 제가 민박에서 사용하는 도장이 찍힌 종이를 나눠드릴께요.
하루 세장씩 21장이니까 잃어버리지 않도록 주의해주세요. 여러분들이 할일은 오후 3시가 되기전까지
문제를 하나 내서 세장의 종이에 똑같이 적는거에요. 종이 상단에는 커플 이름을 꼭 써 넣으시구요.
문제는 자신있는 어느 분야든 상관없어요. 상대방이 맞추지 못할수록 자신에게 유리하니까요 대신
답은 딱 맞아 떨어지는 단어여야 합니다. 문장은 답으로 사용할 수 없어요."
"하루씨. 그럼 문제 자체를 영어나 한자로 써도 되는건가요?"
"안되요. 문제는 무조건 한글이어야 해요.하지만 답은 영어나 한자가 될수 있어요. 아셨죠? 해일씨?"
"네. 잘 알겠습니다."
"문제를 만들면 반으로 접어 잘 가지고 계시다가 3시가 되어 모두가 모였을때 세 커플에게 한장씩
돌리면 됩니다. 그럼 모두가 세 문제씩 풀수 있는 기회가 생기죠. 종료시간은 오후 10시입니다.
그 전에 문제가 적힌 쪽지에 답을 써 넣으시면 되요. 일주일 통계로 가장 많이 맞춘 커플이 우승하게
되지만 그날 그날 따로 통계를 내어 가장 많이 맞춘 커플은 다음 날 문제에서 사용할수 있는 찬스를
얻게 됩니다. 찬스는 모르는 문제가 생길시 답 대신 사용할 수 있습니다. 아주 유용하게 쓰이죠."
"찬스를 모아 뒀다가 다음에 써도 되는건가요?"
"지용씨. 그것 역시 안됩니다. 찬스는 하룻동안만 쓸수 있는 일회용입니다. 그러니 찬스를 획득했다면
다음날 모르는 문제가 하나정도는 나와주길 빌어야겠죠? 아니면 무용지물이 되니까요."
"그렇군요."
"그리고 반대로 가장 성적이 저조한 팀은 벌칙을 받게 됩니다. 대문을 나서서 뒤로 돌아 들어가면
작은 오솔길이 나옵니다. 그 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면 어떤곳에 다다르게 되는데 그것은 비밀입니다.
직접 가보시면 알테니까요. 다음 날 분발하라는 담력훈련 정도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물론 다녀오신 분들도 그곳에 대해 말하면 안되구요. 설명은 이정도 입니다. 다들 아시겠죠?
"네!"
"그럼 3시에 다시 뵙겠습니다."
식사를 마친 지용은 승현을 데리고 방으로 향했다.
승현은 방으로 들어가자 마자 이불 위로 벌렁 누웠고 지용은 하루가 나누어준 종이를 들여다보며
그의 옆에 가만히 앉았다. 종이는 A4 용지 반만한 크기였다.
"문제 어떤걸로 내야 할까요?"
"글쎄.. 특별히 생각해 놓은것은 없는데."
"그냥 산장에서 형이 냈던 문제를 내버릴까요? 그거 무지 어렵던데.."
"그럴수는 없지."
"헤헤.. 그럼 오늘 문제는 제가 낼께요. 한가지 떠오르는게 있어요."
"그럴래? 우선 다른 종이에 적어봐. 옮겨적는건 형이 할테니까."
지용은 탁자위에 있던 메모지를 여러장 가지고 와서 승현에게 건내줬다.
보통은 글을 쓸때 의자에 앉아서 써야 허리도 안 아프고 편한데 승현은 누운 자세로 한팔을 베고
순식간에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지용으로써는 그런 자세가 신기할 뿐이었다.
"그렇게 엎드려서 쓰면 졸립지 않아? 난 못하겠던데"
"전 이게 더 편해요. 학교 다닐때도 책상에서 공부 안하고 늘 이렇게 누워서 했어요."
"공부 잘했을꺼 아냐?"
"못했어요. 반에서 중간도 못했으니까요"
"뭐? 그 좋은 머리로 공부를 못했다구?"
"관심이 없었어요. 공부보다는 다른것에 관심이 더 많았다고나 할까요?"
"다른것 뭐?"
"비밀! 자 다 되었어요. 한번 보세요."
생각보다 빠르게 문제를 낸 승현이 메모지를 들어 지용에게 보여주자 그는 꼼꼼히 읽으며 턱을
만지작거렸다. 그 사이 승현은 그의 무릎을 베고 누워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어때요?"
"문제가 좀 쉬운것 같지 않아? 힌트가 너무 직접적이야."
"첫날이니까요. 내일부터는 조금 더 어려운 문제를 내는거에요. 그리고 이것도 생각보다 모르는
사람들 많아요. 쉬워 보이지만 은근히 까다롭다구요."
"그래. 우선은 가벼운 문제로 시작하자. 네 말대로 답이 까다롭긴 하니까."
"형 냄새 난다."
승현이 그의 허리를 잡고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자 지용은 길게 자란 승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음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다. 생각보다 날이 추워 난방이 되어 있음에도 한기가 느껴졌다.
그는 이불을 가져와 승현에게 덮어주었고 온기가 느끼지자 승현은 금새 새근거리며 잠이 들어버렸다
그렇게 두 시간 남짓.
한참을 잘 자던 승현이 눈을 비비며 정신을 차렸을 때 방 안은 텅 비어있었다.
놀란 그가 급하게 몸을 일으켜 문을 열고 뛰어나가자 문 밖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지용이 고개를
돌리고 가슴 가득 들이마신 연기를 내뱉었다. 허공으로 뿌연 담배연기가 어지럽게 흩날렸다.
"형!"
"벌써 일어났어? 아직 시간 있는데 더 자지?"
"놀랬잖아요. 없어져서."
"내가 없어져 봤자 여기 말고 어디있겠어? 벌써 점심때가 다 되었는데 온천이나 갈까?"
"온천요?"
"어제 저녁에는 급히 씻느라 얼마 못 있었잖아. 지금 가자."
반쯤 타버린 담배를 바닥에 비벼 끈 지용은 아직도 잠에 취해 정신 못 차리는 승현의 손을 이끌고
온천으로 향했다. 차가운 날씨 탓인지 모락모락 김이 나는 온천물은 보기만 해도 얼어붙은 몸이
녹아 내릴것 같은 환상을 가져다주었다.
그들이 느긋한 기분으로 온천욕을 즐기고 있는 사이 문 밖에서는 꽤 요란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누구시죠?"
"이곳에 권 지용이라는 사람 있죠?"
"그렇습니다만.. 어떻게 알고 오셨는지 먼저 말씀해주세요."
"그건 나중에 말씀 드릴께요. 지용이 어디 있나요?"
"이봐요!"
정 회장의 비서가 알아낸 주소를 들고 아스카와 함께 찾아온 나진은 하루의 만류에도 막무가내로
문 안으로 뛰어 들어오더니 지용의 이름을 큰 소리로 부르며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기가막힌 하루는 재빨리 여랑을 불러 나진을 내보내려고 했으나 뒤따라 들어온 아스카에게 간단한
설명을 듣고는 놀란 눈으로 나진을 바라보았다.
"지용아! 있으면 대답해!"
나진이 계속해서 지용을 부르며 이방 저방을 기웃거리자 하루의 부름에 모습을 드러낸 여랑이
온천을 가리키며 가보라고 손짓했다. 나진은 서둘러 여랑이 알려준 온천을 향해 뛰어갔다.
"권 지용!"
조약돌로 길게 이어진 폭 좁은 통로를 지나자 넓은 노천 온천이 나타났다.
나진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서둘러 그곳으로 달려갔지만 지용으로 보이는 사람의 무릎에
걸터앉아 그의 입술에 키스를 하는 작은 아이를 보고 다리에 힘이 풀러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그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란건 승현도 마찬가지였다.
지용은 입구쪽을 등지고 있었기에 금방 알아채지 못했으나 그의 무릎에 앉아 입구쪽을 바라보고
있었던 승현은 나진의 등장에 화들짝 놀라 그에게서 급히 떨어졌다.
"지용.. 아.."
나진은 뒷 모습만으로도 그가 지용임을 짐작했다.
그리고는 눈 앞에 벌어진 믿을 수 없는 사실에 절망하고 주저앉아 나지막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
그의 작은 음성이 들려오자 지용은 심장이 멎는듯한 전율을 느끼며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섬광과 같이 짧은 시간에도 설마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지만 뒤를 돌아볼 자신은 없었다.
온 몸의 신경이 머리로 집중된 듯 피어오르는 온천의 짙은 열기에 시각을 봉쇄당했다.
"지용 형? 왜 그래요?"
승현이 팔을 잡고 흔들며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눈으로 확인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지용은 재빨리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와 동시에 힘겹게 몸을 일으킨 나진이 몸을 돌려 정신없이 입구로 뛰어나갔다.
"뛰지마! 또 다치고 싶어?"
원형의 공간을 쩌렁쩌렁 맴돌 정도의 큰 소리가 울려 퍼지자 나진은 걸음을 멈춰버렸다.
지용 역시 상상하지 못했던 말이 자신의 입을 통해 튀어나오자 두 손으로 입을 틀어 막아버렸다.
-뭐야? 정말..인거야?
지용은 머리를 흔드는 혼란에서 벗어나려 애쓰며 천천히 온천 밖으로 걸어나왔다.
그의 움직임을 따라 중력장에 결박당한 물방울들이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지며 차갑게 식어갔다.
한 겨울 황량한 대지 위에 서 있는 것처럼 온 몸이 극심하게 떨렸다.
"나진.. 나진이야?"
"......................"
"대답해! 맞으면 맞다고 대답하라구!"
지용이 자신에게 등을 보인 채 말 없이 서 있는 사람을 향해 윽박지르자 그 사내는 고개를 숙이며
숨을 가다듬더니 천천히 고개를 돌려 지용을 바라보았다.
그 사람은 분명 지용이 몇년 동안이나 애타게 찾던 그의 연인.. 나진..
"지용아!"
튀어나올 정도로 눈을 부릅뜨고 있는 지용의 눈과 정면으로 마주하자 나진은 긴 머리를 한번
쓸어 올리더니 급히 뛰어와 그의 목을 끌어 안으며 품에 안겼다.
그리고는 물기 가득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정신없이 입술을 찾아 자신의 입을 맞췄다.
나진의 행동에 놀란건 지용뿐만 아니라 모든것을 지켜보고 있었던 승현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형이 어떻게.."
"지용아.. 보고 싶었어.."
"형은 분명 죽었다고.."
"보고 싶었어.. 너무 보고 싶었어.. 지용아.."
그제서야 지용은 모든것이 자신과 나진을 떼어놓기 위한 송 회장의 계략임을 알아챘다.
나진은 터져나오는 눈물을 꾹꾹 눌러담으며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지만 현실로 받아들이기엔 아직
무리가 있었던 지용은 예전처럼 그를 따뜻하게 안아주지 않았다.
그때 그들을 지켜보던 승현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입술을 꼭 깨물어보았지만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상황에 화가 난 그는 재빨리 다가가 지용의 손을 잡아 입구 쪽으로 끌어당겼다.
"형! 지금 뭐하는거에요! 빨리 돌아가요."
"승현아?"
"뭐하는 거냐구요! 이 사람은 누구에요!"
나진의 행동에 단단히 화가 난 승현은 인상을 쓰며 지용를 억지로 잡아끌었다.
그러자 나진이 그들의 앞을 가로 막고 승현을 똑바로 쳐다보며 지용의 나머지 팔을 잡았다.
"그 손 놔."
"누구세요? 누군데 갑자기 쳐들어와서 이런 행동을 하는거죠?"
"지용이의 애인."
"뭐라구요?"
그들의 관계는 실로 엄청나게 꼬여있어 간단한 말로는 설명이 불가능했다.
나진이 지용의 옛 연인이었는데 그들의 관계를 못마땅하게 여긴 나진의 아버지가 둘을 떼어놓기 위해
그가 죽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래서 한참동안 힘들어 하던 지용이 겨우 승현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런데 갑자기 죽은줄로만 알았던 나진이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나진에게나 승현에게나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었다.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요.. 지용 형의 애인은 저에요. 비켜요."
"그럴리가 없어!"
"믿기 싫으면 믿지 않아도 되요. 하지만 길을 막지는 말아주세요."
"권 지용! 이게 무슨 말이야? 네가 직접 설명해봐!"
승현의 독기 어린 눈에 당황한 나진은 지용의 팔을 흔들어 대며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하지만 이미 충격을 받아버린 지용은 입을 꽉 다문채 멍하게 허공을 응시할 뿐이었다.
그때 나진을 찾아 뛰어온 아스카가 흥분하며 소리지르는 나진을 붙잡고 억지로 잡아끌기 시작했다.
"아스카! 이 손 놔!"
"날씨가 차갑습니다. 진정하고 우선 방으로 돌아가세요. 이곳 주인과 이야기를 해서 방을 하나
빌려 두었습니다."
"싫어! 이거 놔! 아스카!"
나진이 심하게 저항하고 버티자 아스카는 그의 몸을 번쩍 들어 올리더니 억지로 데리고 온천을
빠져나갔다. 승현은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때까지 지용의 팔을 꽉 붙들고 서 있다가 한참이 지나
방으로 되돌아갔다. 지용은 여전히 관자놀이를 양 손으로 꽉 누르며 침묵하고 있었다.
"진정하세요."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아무리 오랜 시간동안 떨어져 있었지만 지용이가 나에게 이럴줄은 몰랐어.
우린 아직 헤어진게 아닌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만나 저렇게 행복할수 있어!"
"이제야 말씀드리지만.. 송 회장님께서 나진씨가 죽었다고 말한 것 같습니다.."
"뭐?"
"예전 나진씨의 사촌동생 장례식을 회장님이 맡아 하신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곳에 돌아가신
정 회장님과 권 지용씨가 함께 참석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때 오해가 있지 않았나..싶습니다."
"그런데 왜 진작 말해주지 않았어! 난 모르고 있었잖아.. 바보같이 아무것도 모르고 지용이가
유학을 떠난줄로만 알고 있었잖아.. 아버지가 어떻게 나에게 이럴수가 있어!"
"울지 마십시오.."
"죽을것 같아.. 지용이가 나 아닌 다른 사람과 함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죽을것 같아..
아스카.. 나 어떻게 해? 모르고 살았으면 좋았을텐데.. 이제 나 어떻게 해... 아스카.."
나진이 아스카의 옷을 부여잡고 울음을 터트리자 그는 말 없이 나진의 등을 토닥여주며 위로했다.
절망에 빠져버린 사람을 지켜본다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아스카는 나진만 보면 터져나오는 한숨을 애써 목구멍으로 집어 삼키며 그를 살며시 안아주었다.
"그게 정말이에요?"
"네. 찾아온 사람 중에 긴 머리에 마른 남자 있죠? 그 사람이 지용씨의 옛 애인인 모양이에요.
사정이 있어서 몇년간 헤어져 있다가 다시 나타났는데 지용씨에겐 이미 새로운 애인이 있었던거죠."
"와..무슨 영화같은 이야기네요. 그런데 여랑씨. 어떻게 이곳을 찾아왔을까요?"
"자세한건 모르겠어요. 아무튼 그 두 사람도 당분간 이곳에 머무르게 하기로 했으니 아무말 마세요."
"올해는 일이 좀 꼬이네요. 자꾸 모르는 사람이 찾아오니..원.."
"그러게요.. 대양씨.."
여랑과 하루. 대양과 영원. 해일과 호수는 갑자기 벌어진 알수 없는 사건을 이야기 하며 저마다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송 회장의 부하가 지용이 있는곳을 알아내 나진이 이곳까지 올수 있었지만
그 사실을 알 턱이 없는 그들은 그저 고개만 내저을 뿐이었다.
승현의 집요한 질문에도 지용이 아무말 없이 침묵하고 있는 사이 나진이 그들의 방으로 찾아와 승현을
밖으로 불러냈다. 이렇게 된 이상 영문이라도 알아야겠다고 생각한 승현은 윗 옷을 걸쳐입고 말없이
나진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나는 송 나진이라고 해요. 그쪽을 뭐라고 불러야 하죠?"
"저는 이 승현 입니다."
"승현씨. 어짜피 일이 이렇게 된거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께요. 지용이와 정말 연인 사이인가요?"
"네.."
"저는 4년전부터 지용이와 사귀어온 사람이에요. 비록 만나지 못한지 2년이 넘었지만 우린 아직 헤어진
사이가 아니에요. 승현씨는 이해할 수 없겠지만 지용이는 제가 죽었다고 알고 있었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승현씨를 만났겠죠. 하지만 우리는 아직 헤어지지 않았어요."
"그래서요?"
"미안하지만 지용이는 아직 제꺼에요. 돌려주세요."
"그럴순 없어요. 2년동안 무슨일 때문에 모습을 감췄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에 와서 형을
돌려 달라는건 너무 뻔뻔하고 비겁한 행동 아닌가요?"
"그래요.. 승현씨에겐 황당하고 뻔뻔한 이야기겠죠.. 하지만 지용이가 없으면 전 살아갈 수가 없어요..
그러니 제발 날 이해해주세요.. 그리고.."
"그건 저 역시 마찬가지에요. 목숨을 걸고 겨우 얻은 사람이에요.. 절대 아무에게도 줄 수 없어요.
더 이상은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지 말아주세요. 먼저 가볼께요.."
"잠깐만요! 그럼 이렇게 해요. 지금 이곳에서 게임이 벌어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 게임에
저도 참가할께요. 만약 승현씨가 이기면 제가 조용히 물러나겠어요. 하지만 제가 이기면 지용이를
말 없이 포기해주세요."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가 어디 있어요!"
"지용이에게는 누구보다도 현명한 사람이 필요해요.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은 사람이에요. 저는 그에게
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저에게 지용이를 포기할만한 구실을 만들어주세요."
"당신..!"
"주인에게는 제가 부탁하겠어요. 저는 승현씨를 이길 자신이 있어요. 어때요? "
나진의 제안에 승현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누르고 가만히 생각했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두 사람이 이별을 하지 않았다면 앞으로 자신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걸림돌이
될 것이 뻔했다. 사람을 게임으로 차지한다는 것 자체가 어이없는 제안이었지만 자신이 지용에게
쓸모없는 존재라는 듯 말하는 나진의 언행에 적지 않게 화가 난 것도 사실이었다.
승현은 자신의 머리를 믿었다. 절대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좋아요. 그렇게 하죠. 하지만 너무 자만하지 말아요. 나 역시 당신에게 지지 않을 자신이 있으니까.."
승현이 차가운 말을 성의없이 툭 내뱉고 돌아서자 태연한 표정으로 서 있었던 나진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한번도 의심해본적 없는 자신의 자리에 새로운 사람이 들어와있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너무나도 큰 충격이었다.
"저는 아스카라고 합니다. 불쑥 찾아와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여랑씨의 이야기를 듣자하니 이곳에서 친목을 도모한 게임이 벌어진다고 하더군요. 그렇죠?"
"네. 그렇습니다."
"그 게임에 저와 송 나진씨가 참가를 원합니다."
"그건 안됩니다. 당분간은 손님을 받지 않는 이유에 대해 설명을 하느라 게임에 대해 말씀드렸지만
이 민박집이 상금으로 걸려있는 게임이기 때문에 더 이상의 맴버는 곤란합니다.."
"저희는 상금은 필요 없습니다. 단지 복잡하게 얽혀있는 관계만 바로 잡으면 됩니다."
"관계라니요? 우리 모두가 이해할 수 있게끔 설명 해주시겠어요?"
"송 나진씨와 권 지용씨는 연인 사이었습니다. 서로의 오해가 있어 잠시 떨어져 있었는데 그 동안
지용씨가 이 승현씨를 만나게 된것 같습니다. 그걸 안 제가 지용씨의 뒤를 밟아 이곳을 알게 되었으니
너무 기분 나빠하지는 말아주십시오."
"하지만 몇년동안 떨어져 연락조차 안했다면 그건 이미 헤어진거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사정이 있었습니다. 그것까지는 자세히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이미 정 나진씨와 이 승현씨가
동의한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저희를 게임에 참가 시켜주십시오."
"아무리 복잡한 관계라지만 사람의 인연을 어떻게 게임으로 정할 수 있단 말입니까?"
"부탁드립니다. 이것은 저에게도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폐가 되는 일은 없을테니 관용을 배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죄송하지만 우선 돌아가 계시겠어요? 지용씨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좀 더 상의해야 할것 같습니다."
여랑은 정중히 부탁하는 아스카의 의견을 듣고 우선 그를 방으로 돌려보냈다.
남의 애정사를 자신이 이래라 저래라 할수는 없지만 뭔가 복잡한 사연이 있는것 같아 그는 나머지
사람들을 데리고 별채로 들어가 지용를 기다렸다.
"형! 아직도 말 안할꺼에요?"
"미안하다.. 승현아.."
"뭐가 미안한데요? 예전 애인이 왔으니 절 버리려구요?"
"아냐! 오해하지마!"
"그럼 뭐에요? 왜 아무말도 안해주고 사람을 이토록 불안하게 만드는거에요..."
"울지마.."
"나진씨와 내기 했어요. 이번 게임에서 지는 사람이 말 없이 물러나기로 말이에요."
"그런 말이 어디있어? 내가 알아서 해결해.. 넌 잠자코 있어."
"형이 어떻게 해결할껀데요? 그분이 나타났다는것 하나만으로도 이렇게 괴로운 표정을 지으면서
무슨수로 해결할껀데요! 말해봐요!"
"승현아.."
"그분이 그랬어요. 형은 아직 할 일이 많은 사람이라 자신이 곁에 있어야 한다고 했어요.
전 꼭 이길꺼에요. 그분이 얼마나 똑똑한지는 모르겠지만 꼭 이겨서 형에게 필요한 사람이 저임을
증명 해보일꺼에요. 그러니 이번일은 잠자코 계세요!"
처음으로 승현이 감정적으로 나오며 화를 내고는 밖으로 뛰어나갔다.
지용은 문 틈으로 들어오는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었다.
죽은줄만 알았던 옛 연인의 등장.. 지금의 애인과 옛 애인이 자신을 두고 벌인 내기..
언제나 침착하고 냉정한 지용도 나진의 등장은 큰 충격이었으며 인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상황을 해결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자 그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좌절했다.
-지금 사랑하고 있는 사람.. 과거에 사랑했던 사람.. 앞으로 사랑해야 할 사람..
산장에서보다 몇 배는 더 복잡하고 고통스러운 현실이었다.
-two-
*환영(幻影)
환상. 감각 따위의 착오로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보는 것.
*환청(幻聽)
주변에 소리나는 물체나 사람이 없음에도 소리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환각(幻覺)
실제로는 자극 대상이 없는데도 마치 실제하는 듯 감각으로 느끼거나 느꼈다고 생각하는 것.
-168 시간의 환영- *라시안*
"안녕하십니까. 아스카라고 합니다."
"권 지용 입니다."
"불쑥 찾아와 죄송합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앉으십시오."
승현이 화를 내며 나가버린 후 벽에 기대어 멍하니 있던 지용에게 아스카가 찾아왔다.
아스카는 지용과 약간 거리를 두고 앉아 허리를 곧게 세우고 표정없는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적의감이 느껴지는 날카로운 눈이었다.
"송 회장님의 명령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럼 제가 어떤 상황해 처했는지 설명하지 않아도 대충 아시겠군요."
"잘 알고 있습니다."
"잘 알고 있다면 돌아가십시오. 아스카씨가 나설 문제가 아닙니다."
"저는 당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지든 관심 없습니다. 하지만 나진씨는 힘들게 하지 마십시오."
"나와 승현이를 떼어놓기 위한 방법으로 나진을 보냈다.. 하나같이 비열한 사람들이군요.
제가 나진을 선택한 다음에는요? 그 다음엔 또 다시 비겁한 방법으로 우리 둘을 떼어놓겠죠?"
"그렇겠지요. 그래서 제가 따라온 것입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 역시 회장님의 다음 행동을 예상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걱정 마십시오. 두분이 헤어지지
않도록 제가 도와 드리겠습니다. 지용씨는 나진씨가 상처 입지 않게만 해주십시오."
"대단한 힘을 가지셨군요?"
"승현군은 포기하십시오. 두 사람은 이루어 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아스카! 여기서 뭐하는 거야!"
"나진씨?"
"내 일은 내가 해결해! 넌 참견하지마!
"네. 알겠습니다."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 사이의 답답한 침묵을 깨고 숨을 헐떡이며 뛰어 들어온 나진은 아스카를 향해
명령하듯 방에서 나가줄 것을 요구했다. 인상을 찌푸릴 만큼 기분 나쁜 나진의 말에도 아스카는 별 다른
저항 없이 몸을 일으키더니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방을 나섰다.
나진의 등장에 지용은 잠시 진정되었던 머리가 다시 복잡해짐을 느꼈다.
"아직도 그대로네.. 변한게 없어.. 네 얼굴.."
"너는 아파보여. 그 동안 어떻게 지냈길래 얼굴이 이 모양이야? 아팠어?"
"지용아.."
"응."
"우리 아버지를 대신해서 사과할께. 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어.."
"너가 사과 할 필요 없어. 괜찮아."
"아냐. 나도 이버지가 이토록 잔인한 사람인줄 모르고 있었어. 정말 미안해.."
"왜 울어? 고개 들어봐."
"하하.. 아냐.."
"나진아?"
"나에게 와줄 생각이 없는거지? 하긴.. 내가 생각해도 염치 없다..모르고 있었다고 해도 원인은
우리 아버지 때문인데 다시 돌아와달라고 하다니.."
"....................."
"이럴줄 알았으면 오지 말걸.. 나만 바보가 된 느낌이잖아..."
나진은 그에게 미안하다고 거듭 사과하며 고개를 숙였다.
지용는 당황한 얼굴로 나진의 턱을 잡고 얼굴을 들어올렸다. 가슴이 저릴 만큼 밀려드는 그리움..
"미안해.. 조금만 일찍 알았다면 좋았을 것을.."
"....................."
"널 진심으로 사랑했어. 하지만 난 저 아이를 포기할 수 없어.. 용서해줘.."
"절망적인 말이다.. 죽고 싶을 만큼.."
"나진ㅇ.."
"더 이상 말하지 마. 대신 부탁을 들어줘."
"말해봐."
"우리 전부터 이런 게임 좋아했잖아. 마지막으로 너와 대결을 하고 싶어. 대신.. 내기 대결이야."
"내기라니?"
"네가 이긴다면 너의 소원 한가지를 들어줄게. 내가 이긴다면 나의 소원 한가지를 들어줘."
"그만 둬. 그런 내기는 소용 없어."
"거절하지마. 나의 대한 추억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부탁을 들어주길 바래."
나진은 조용히 지용의 뺨에 입을 맞추고 힘 없이 일어나 밖으로 나가버렸다.
지용은 지끈지끈 쑤시는 머리를 붙잡고 멍하니 그의 뒷 모습을 바라보다가 밖으로 나가버린
승현이 떠올라 재빨리 옷을 챙겨 입고 일어섰다.
아무리 둘러봐도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온천이 있는 어두운 복도로 이동했다.
좁은 길을 빠져나가니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온천 한 구석에 승현이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었다.
지용은 그의 모습을 발견 하자마자 정신 없이 뛰어가 차갑게 식은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쥐었다.
"이 승현! 여기서 뭐해?"
"........................"
"이렇게 쌀쌀한 날씨에 옷도 안 입고.. 제 정신이야?"
"제 정신일리 없잖아요..."
"우선 들어가자. 몸이 얼음장이야."
화를 내며 얇은 티셔츠 하나만 입고 뛰어나간 승현은 온천 옆 바위에 쪼그리고 앉아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지용은 재빨리 그에게 다가가 입고 있던 자신의 점퍼를 어깨에 둘러주고 일으켜 세우기 위해
양 어깨를 꽉 움켜 잡았다. 하지만 승현은 말 없이 저항하며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
"승현아. 우선 들어가자.. 들어가서 이야기 해."
"언제나 저는 버려지는 역활인가요?"
"무슨 소리야?"
"저주 만큼이나 지독해요.. 늘 원하는 사람을 얻은 다음 모르는 사람에게 빼앗기기만 했어요.
저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을 머물게 할 만한 매력이 조금도 없는 건가요?"
"이상한 소리 하지마."
"싫어! 다른 사람에게 수 백번 버려져도 좋으니까 형에게만은 버려지고 싶지 않아.. 그럼 나는..."
"승현양..생각보다 멍청하네"
승현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처럼 인상을 찌푸리고 고개를 돌리자 지용은 그의 앞으로 바짝
다가가 허리를 숙이고 머리를 살며시 끌어 안았다. 따뜻한 체온이 얼어버린 몸을 포근히 감싸자
긴장이 풀린 승현은 눈을 감고 그의 옷자락을 꽉 움켜 잡았다.
"너의 저주는 이걸로 끝이야. 절대 널 배신하지 않아."
"......................."
"미리 말해주지 않아서 미안해. 하지만 과거를 들춰내면서까지 말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
"......................."
"넌 나에게 남겨진 마지막 희망이야. 제발 믿어.."
"......................."
"승현아!"
"다행이다.. 머릿속으로 끝 없이 되풀이했던 말이 아니어서 정말.. 다행이다.."
마음으로 전해지는 지용의 진지한 고백을 들은 승현은 그제서야 안심하며 자력으로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추운 날씨에 너무 오랫동안 앉아 있었던 탓에 다리에 쥐가 나 다시 바닥으로 주저 앉고 말았다.
그러자 지용은 무릎을 꿇고 급히 앉아 그의 다리를 이리저리 주물렀다.
"아악! 하지 마세요!"
"괜찮아?"
"다리 저려요.. 손으로 주무르면 죽을것 같단 말이에요.."
"그러길래 쪼그려 앉아 있는것도 적당히 했어야지."
"불쌍해 보이면 형이 업고 방까지 데려다 줘요. 백만 볼트에 감전된 것 같아"
"아. 승현아.."
"역시 불편한 건가요?"
"한국 말은 끝까지 들어. 방으로 데려다 줄테니까 한숨 자. 훌쩍거리는 폼이 감기 걸린 것 같다."
"형은요?"
"사람들이 날 기다리고 있을거야. 어짜피 게임은 하기로 했으니 해야겠지."
"해서 꼭 이길거에요!'
"내기 같은건 없으니 그렇게 알아."
지용는 다리를 붙잡고 울상을 짓는 승현을 번쩍 들어올리더니 어깨에 짊어진 묘한 자세로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승현은 어깨에 배가 눌린다며 발버둥을 쳤지만 결국 그 자세로 푸근한 이불 속으로
옮겨졌다. 갑자기 몸의 기온이 높아지자 딸꾹질이 밀려 올라왔다.
지용은 그의 이마를 짚어보더니 물을 한 잔 먹이고 목 끝까지 이불을 덮어주었다.
피곤에 지친 승현이 금새 잠들자 지용은 눈 감은 그의 얼굴에 살며시 입맞춤을 하고는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을 별채로 발걸음을 돌렸다.
"이만 돌아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스카.. 도와줘. 꼭 지용이를 이겨줘."
"제가 이기면 무엇이 달라집니까?"
"난 절대 지용이 포기 안해. 너무 오랜만에 만나서 나의 대한 마음을 자각 못하는거야.. 오래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지금은 나에게 와줄 수 없다고 말하지만 계속 얼굴을 마주하면 생각이 달라질거야.
그렇지? 아스카. 그렇겠지?"
"..........................."
"첫사랑이야. 지용이는 나의 모든것을 가져간 처음이자 마지막 사람이야. 우리 아버지가 한 일을
사죄하기 위해서는 꼭 그의 곁에 내가 있어야 해. 평생 옆에서 도와줄거야.."
"..........................."
"지용이는 머리가 좋아. 하지만 아스카도 그에게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해. 문제는 이 승현이라는 아이야
느낌이 별로 좋지 않아.. 눈빛이 엄청나다고나 할까.."
"걱정 마십시오. 제가 알고 있는 나진씨는 최고입니다. 절대 지지 않을 것입니다."
"아스카. 너도 내가 남자를 사랑한다는 것이 황당하지? 이런 일로 너에게 도움을 청한다는 것도
거부감이 들거야. 하지만 도와줘. 한번만 도와주면 평생 잊지 않을게."
"사람을 사랑하는데 성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진실하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스카도 나 같이 절실한 적이 있었어?"
"저.. 역시 같은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부담 느끼지 마십시오. 무슨 일이 있어도 나진씨를
지켜 드리겠습니다. 방해가 되는 사람은 반드시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내가 나쁜거겠지.. 알아.. 자의든 타의든 뒤늦게 나타나서 욕심낸다는게 얼마나 나쁜 행동인지 알아..
하지만 아스카.. 난 지용일를 꼭 갖고 싶어.. 만약 그게 안된다 하더라도 승현이란 아이에게만은 절대
빼앗기고 싶지 않아.. 내 마음 이해하지?"
"이해합니다. 어서 옷 입으십시오. 이곳 주인이 별채로 모여달라고 했습니다. 옷 입혀 드릴까요?"
"그래주면 고맙겠어."
(이해를 돕기위해~여러분 나진은 남자입니다^^)
아스카는 가지고 온 짐 사이에서 따뜻해 보이는 스웨터를 꺼내 갈아 입혀준 다음 그의 어깨를 감싸
안고 별채로 이동했다. 이미 그들과 승현을 제외한 전원이 모여 열심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스카가 방으로 들어서며 인사하자 여랑이 환하게 웃으며 두 사람을 맞아주었다.
"기다렸습니다. 자리에 앉으세요."
"감사합니다."
"지용씨. 승현군이 없는 상태로 게임을 진행해도 되겠습니까?"
"네. 감기에 걸린 것 같아 재웠으니 우선 시작하십시오."
승현의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나진의 뚫어지는 시선을 느낀 지용는 미안한 마음에 고개를 돌렸다.
많이 야윈 모습이었지만 그 어느때보다도 강해보이는 나진의 시선이 그에게는 실로 큰 부담이었다.
"원래는 매년 세 커플로 진행되는 게임이지만 올해는 다섯 커플이 되었습니다. 물론 해일씨와 여랑씨
대양씨와 영원씨. 그리고 저희가 의논 끝에 동의한 것입니다. 대신 지용씨나 아스카씨가 우승할
경우에는 민박을 내어드리지 않겠습니다. 괜찮겠죠? 지용씨?"
"상관 없습니다."
"아스카씨도 이해하시죠?"
"당연한 말씀입니다. 저희도 상금은 바라지 않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시간도 되었고 하니 각자 가지고 온 문제 쪽지를 저에게 주시기 바랍니다."
여랑이 게임의 시작을 알리자 모두들 챙겨온 쪽지를 앞으로 꺼내놓았다.
하지만 해일은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자 호수가 그의 옆구리를
찔러 대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또 깜박한거야? 넌 어째 그래?"
"방에 두고 왔나본데?"
"이 3초 기억력아.. 금붕어 기억력 어쩔껀데? 빨리 가서 가지고 와!"
"알겠어. 조금만 기다려."
호수의 재촉에 해일은 바람 같이 자신의 방으로 뛰어가서 적어놓은 쪽지를 들고 돌아왔다.
쪽지가 모두 모이자 여랑은 쪽지를 펼쳐 이름을 확인하고 빠짐없이 나누어주었다.
"종료 시간은 오후 10시입니다. 전에 말씀 드린대로 일등팀은 찬스를 획득할 기회가 생기고 꼴등 팀은
담력 훈련을 빙자한 벌칙을 받게되니 모두 긴장해주세요~"
"식사 시간은 저녁 7시 입니다. 늦지 않게 식당으로 모여주세요."
하루가 식사 시간을 알리며 몸을 일으키자 여랑은 손을 들어 그의 어깨를 품에 안고 사라졌다.
나머지 사람들도 쪽지의 내용을 눈으로 읽어 내리며 각자 제 방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스카는 그때까지도 자리에 앉아 물끄러미 쪽지를 바라보고 있는 지용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나진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눈짓했다. 방으로 돌아가자는 의미였다.
지용이 일부러 문제를 푸는 척 자신의 시선을 피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챈 나진은 입술을 꽉 깨물며
아스카의 손에 이끌려 방 문을 나섰다. 가슴 언저리에 작은 가시가 박혀 이리저리 움직이는 기분이었다.
-여랑 + 단 하루-
*아시아 - 유럽 (12시간) *아시아 - 오세아니아 (8시간) *아시아 - 아메리카 (22시간)
*아시아 - 아프리카 (15시간) *유럽 - 아메리카 (10시간) *유럽 - 오세아니아 (25시간)
*유럽 - 아프리카 (7시간)
이상 7가지의 항공기가 있다. 실제 시간과는 관계가 없다.
보기에 있는 대륙의 어느 곳에서나 항공기를 이용할 수 있다. 같은 지역권에 있는 나라로의 이동은
무조건 1시간으로 정한다. 예를 들면 한국에서 동남 아시아로 이동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한 시간.
미국에서 케나다로 이동하는데도 한 시간이 걸린다. 참고하길 바란다.
1. 진 : 초베 국립공원 - 퀘백 - 케이프 타운
2. 카울 : 아마존 강 - 에어스록 - 빅토리아 폭포
3. 메이 : 디즈니 랜드 - 아부심벨 - 베네치아
세 사람은 동시에 한국에서 출발. 각각 다른 관광지를 거쳐 한 곳으로 모이게 된다
관광지들을 순서대로 이동해야 하며 도착지는 남 아프리카 공화국이다. 항공편이 있는 곳이라면
어떤 경로를 통해 이동하던지 상관 없다.
세 사람 중 가장 빨리 남 아프리카 공화국에 도착하게 되는 사람은 누구인가.
-아스카 + 송 나진-
몸에 달라 붙는것 같이 짙고 끈적이는 안개를 벗어났을 때 눈 앞으로 펼쳐진 광경은 비탄과 절규로
가득 찬 피의 전장이었다.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한 나는 기쁨으로 충만한 마음을 안고
아침 이슬을 맞으며 단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눈을 떴을때는 몽마와 같이 지독했던 안개는 거짓말
처럼 사라지고 5월의 태양이 머리 위로부터 차례로 온 몸을 뜨겁게 감싸돌았다. 나는 다시 눈을 감고
느껴지는 열기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렇게 최후의 승리를 거둔 날. 하늘은 개이고 태양이 상냥하게
축복을 보내주었다.
-이 해일 + 신 호수-
콜로라투라. 복수심에 불타는 어머니. 오페라. 고대 이집트 오시리스 신전. 음악의 신동. 조수미.
-권 지용 + 이 승현-
1.잡식성의 포유류 영장목. 입체시. 손톱의 발달로 인한 체축 직립화. 집단 생활.
2.육식성의 파충류. 좌우가 아닌 앞 뒤 형태의 내장. 복판에 의한 사행 운동. 턱뼈 분리 기능.
3.포식성의 곤충류. 삼각형의 머리와 큰 겹눈 1쌍과 3개의 홑눈. 저작형의 구기. 장시형의 날개.
*문제 =육식성의 맹금류. 늪 지대나 초습지 서식. 5000m/1000ha. 넓은 세력권 형성.
*hint = 상형권. (힌트 참조)
-오 대양 + 진 영원-
이것은 흰색이며 변이종은 보라색을 띄기도 한다.
열이나 빛에 약하며 고산성으로 해발 1000M 이상에서만 발견된다.
각시와 신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우리 나라의 금강산, 태백산, 설악산 등지에서만 자라는 진귀한 것으로 세계에 1속, 1종, 1변종이 있다.
-168 시간의 환영- *라시안*
"문제 정말 어렵다. 똑똑한 사람들이 모인게 맞긴 한가봐. 그렇지?"
"그러게.. 여랑씨네 문제야 관광지만 알면 쉽게 계산할 수 있으니까 괜찮고 대양씨네 문제는
이미 풀었지만 지용씨와 아스카씨네 것이 문제야. 특히 아스카씨네 문제는 짐작조차 안가."
"해일아. 우선 시간 많으니까 두 문제는 천천히 생각하기로 하고 대양씨네 문제부터 보자.
각시와 신랑이란 뜻이라면 역시 꽃이겠지?"
"맞아. 의외로 쉬운 문제야. 물론 꽃 이름을 아는 사람에 한해서겠지만."
"아직 답 말하지마. 내가 맞춰볼께."
"네 성격을 아는데 미리 답을 말했다가 무슨 화를 당하려구?"
"너 한대 맞을래!"
호수는 주먹을 높게 들어 해일의 어깨를 살짝 내리치고는 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버렸다.
몸에 달라붙는 니트가 눈을 자극하자 해일은 씨익 웃더니 호수의 허리를 쓸어내리며 몸을 바짝 붙였다.
물론 문제 푸는데 방해가 된다고 한대 맞았지만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만 자란단 말이지? 금강산이나 태백산.. 설악산.. 열과 빛에 약한 고산성 식물.."
"한마디로 기온이 낮은 곳에서 자란다는 말이지."
"그건 나도 알아. 하지만 흰색이라고 했잖아? 내가 생각하고 있는 꽃은 보라색인데 말이야."
"모양은?"
"크리스마스 종."
"그럼 맞아. 원래 그 꽃의 색은 흰색이야. 어쩌다 보니 변이종의 사진이 더 널리 알려진 것 뿐이지."
"그럼 맞구나! 문제가 생각보다 쉽네?"
"첫날이라 쉬운 문제를 냈나? 실력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조금 더 어려운 문제가 좋을텐데."
"뭐.. 우리 문제도 그다지 어려운건 아니잖아."
"그건 그래."
호수는 대양의 문제를 맞추고 답을 적어넣은 다음 쪽지를 접어서 멀찌감치 밀어놓은 뒤 다음 문제에
집중했다. 그가 여랑의 문제를 잡고 고민하자 해일은 메모지를 가져와 문제를 옮겨적고 머리를
맞대기 시작했다. 역시 그들의 문제는 관광지의 위치를 알아내는 것이 중요했다.
"초베 국립공원이 어디야? 처음 들어보는데.."
"초베 국립공원은 보츠와나에 있는 사파리야. 너 에버랜드 사파리 가봤지?"
"가봤지. 얼마나 좋아했는데"
"그것과 같아. 지프로 이동하면서 여러 종류의 동물들을 볼수 있는 곳이지."
"케냐 국립공원처럼?"
"맞아. 하지만 케냐 국립공원은 가뭄이 심각해서 폐장 위기에 몰렸데."
"동물들 불쌍하다. 어쩜 좋아.."
"약한 척 하지말고 다음 문제 풀지?"
"알아챈거야? 넌 너무 많은것을 알고 있어.. 죽어줘야겠다!"
그들의 문제 푸는 속도가 느린 이유는 역시 중간중간 계속되는 딴 짓 때문일 것이다.
호수가 목을 조르며 덤벼들자 해일은 간지럼을 태우며 그를 꽉 감싸안았다.
매일 티격태격 하면서도 여전히 사이가 좋은 커플이다.
"아스카. 문제가 쉽지?"
"네. 지용씨가 만든 문제만 풀면 될 것 같습니다."
"다른건 다 푼거야?"
"네. 나진씨는 어떻습니까?"
"대양씨네 문제는 너무 쉬워서 볼 것도 없고 하루씨네 문제도 보자마자 답이 떠올랐어. 이제
여랑씨네 문제를 풀 차례야. 빅토리아 폭포가 정확히 어디에 있는 거지?"
"아프리카 남부 입니다. 잠베지 강 상류로 부터 약 80km쯤 떨어져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구나. 빅토리아라는 이름은 역시 영국 여왕의 이름이겠지?"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또한 규모가 웅장하여 현지인들은 '천둥소리가 나는 연기'라고 부른다더군요."
"그럼 두번째 문제도 통과. 디즈니 랜드는 물어볼 것도 없고 베네치아도 알겠고.. 아부심벨은 뭐야?"
"이집트의 암굴 신전입니다. 람세스 2세때 만들어진 종교적 성향이 강한 건축물입니다."
"그럼 아프리카란 말이네? 좋아! 이 문제도 해결."
나진은 여랑의 문제에 답을 써넣고 펜 끝을 입으로 잘근잘근 물며 씨익 웃었다.
아스카는 자신의 무릎에 얼굴을 기대고 누워있는 나진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말했다.
"머리가 많이 자랐네요. 처음 봤을때는 짧았는데.."
"무작정 길렀더니 벌써 등까지 자란거있지? 남자가 머리 긴 것이 이상한가?"
"아닙니다. 잘 어울립니다."
"하루씨 말야. 정말 예쁘게 생겼더라. 어떻게 남자가 그렇게 예쁠 수 있어?"
"제가 보기엔 별로.."
"아냐. 키도 크고 스타일도 좋아서 처음 보고 여자인 줄 알았어. 부럽더라.. 나도 그렇게 아름다운
얼굴을 가졌으면 좋았을텐데.."
"자신을 가지십시오. 나진씨도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나에게는 솔직히 말해도 되. 내 얼굴은 너무 평범해서 학창시절 사진을 찍으면 쉽게 찾을 수가 없었어.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 금방 묻혀버리거든. 그래서 더 화나.. 그 동안은 외모에 대해 불만을 가진적이
없었는데 이곳에 있는 사람들을 보니 새삼 그런 생각이 드는거 있지? 하나같이 뛰어난 얼굴이잖아.
하루씨도 하루씨지만 승현이란 애도 꽤 귀엽게 생겼더라.."
승현을 떠올리던 나진은 금새 시무룩해진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가만히 나진을 내려다보던 아스카가 그의 뺨을 조심히 어루만지며 웃었다.
평소에 웃는 모습을 보이지 않던 아스카가 미소짓자 나진은 신기한듯 똑바로 누워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짧은 머리가 마음에 들었는지 손을 위로 들어 그의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아스카도 정말 잘 생겼어. 인상이 날카로워서 처음 보면 호감가는 얼굴이 아닌데 계속 보면 볼수록
괜찮은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어. 애인 없어?"
"없습니다."
"참..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었지? 그 사람도 굉장한 미인이겠다. 아스카가 좋아하는걸 보면 말야"
"네. 아름다운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본인은 잘 모르더군요."
"그런 사람들 보면 이해가 안가. 복 받은줄 모른다니까?"
"하하..이제 그만 쳐다보고 문제 풀어야지요. 이기고 싶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그래야지.. 내가 잘하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힘 내십시오.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반드시 이기게 해드리겠습니다."
"넌 참 좋은 사람이야.. 먼저 만났으면 아마 좋아했을거야."
나진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아스카의 배를 한번 툭 치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쪽지를 바라보았다.
아스카는 문제에 집중하는 나진을 보면서 다시금 온 몸으로 퍼지는 저릿한 통증을 느꼈다.
손에 잡히지 않는 무엇.. 잡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커져가는 욕심.
"영장목이라면 원숭이를 말하는거지? 집단 생활을 하는 것도 그렇고 체축 직립화라고 하는 것도
그렇고.. 이건 영락없는 원숭이잖아?"
"원숭이가 입체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머지 설명으로 봐서 저 역시 원숭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아. 첫번째는 원숭이라고 치고.. 두번째는 파충류네?"
"사행 운동과 턱뼈 분리기능.. 이것은 뱀입니다."
"뱀은 내장이 좌우가 아니라 앞 뒤에 있다고 들었어. 나도 같은 생각이야."
"세번째는 곤충에 대한 설명이군요. 저작형의 구기와 장시형의 날개라.. 설명이 복잡하네요."
"나도 곤충 박사가 아니라 잘은 모르겠지만 이건 사마귀라고 생각해. 삼각형의 머리를 가지고 있고
겹눈 한쌍과 홑눈 세쌍이라면 사마귀 밖에 없잖아. 아닌가?"
"제가 곤충에 대해서는 영.."
"그냥 사마귀라고 치자."
"지금 세가지는 보기이고 진짜 문제는 맹금류에 대한 것이네요."
"이건 보나마나 독수리야. 상공 5000m 를 날수 있는 새가 독수리 말고 또 어디 있겠어?"
"문제가 이상하네요. 육식성의 맹금류라는 것은 마치 독수리임을 맞춰달라고 낸 문제인것 같습니다만."
"그건 그래. 문제나 보기를 봐서는 너무 직접적으로 답을 알려주고 있어."
"힌트에 뭔가 다른 뜻이 담겨져 있는것 같습니다."
"상형권? 이게 뭐지? 상형은 알겠는데 뒤에 붙은 권은 뭐야?"
"아!"
아스카는 무엇인가 떠오른 듯 허리를 바로 세우고 엄지와 중지 손가락을 부딪혔다.
그의 행동에 놀란 나진은 재빨리 몸을 일으키고 손가락으로 긴 머리를 빗어 높이 들어올렸다.
"상형권이란 각종 동물이나 사람의 특정한 동작을 형상화한 권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권술?"
"중국 무술 말입니다. 우슈에서 쓰는 태극권 같은 것."
"아! 그러니까 취권이나 호권 같은거 말이지?"
"그렇습니다. 그럼으로 답은 동물이 아니라 동물을 형상화한 권술의 이름이 되는 것입니다."
"둘 중 누가 낸 문제지.. 이런 문제를 내다니.."
"쉬운것 처럼 보이지만 굉장히 꼬인 문제로군요."
"흠..."
"형.. 지금 몇시에요?"
"벌써 일어났어? 조금 더 자."
승현이 눈을 떴을때는 이미 날이 저물어 어둑어둑해진 다음이었다.
자는 동안에도 기침을 하느라 잠겨버린 목이 아팠는지 승현은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으며 몸을
일으켰다. 지용은 미간을 좁히며 괴로워 하는 승현에게 따뜻한 물을 한잔 가져다주었다.
땀을 흘리고 잔 탓에 머리와 얼굴이 흥건히 젖어 있었고 눈이 약간 부어 시야가 흐렸다.
"형.. 뭐해요?"
"문제 풀어. 게임 하고 싶다면서?"
"아! 맞다!"
"넌 조금 더 자. 문제는 내가 풀면 되니까."
"싫어요!"
"목소리도 잘 안나오면서 왜 소리를 질러? 시키는 대로 해."
"내 힘으로 풀거에요. 그래야 형을.."
"다시 한번 말하지만 너와 나진이 한 말도 안되는 거래는 없던 걸로 한다. 어떤 경우에도
나의 선택은 변함이 없어."
"그럼 왜 하는 거에요? 게임?"
"더 이상 숨기지 않으려고 하는 말이니 기분 나빠하지마. 사실은 나진의 부탁이야. 그가 추리게임을
좋아하거든.. 마지막 추억을 만들고 싶다며 게임 참가를 부탁했으니 너도 이해해줬으면 좋겠어..
너에게는 정말 미안하지만 내가 그에게 못할짓을 한건 사실이잖아.."
"이해는 해요. 하지만 그 정도로 쉽게 물러설 것 같지 않아 불안할 뿐이에요."
"이왕 이렇게 된거 끝맺음을 좋게 했으면 좋겠어.. 그리고.."
-사실 아직도 가슴 한 구석이 아파..
"말하지 마세요. 형의 말 충분히 이해 했으니까요."
"미안하다. 승현아.."
"하지만 꼭 이겨야겠어요. 그래서 내가 쓸모없는 사람이 아님을 증명해 보이겠어요. 문제 줘보세요."
승현은 지용이 들고 있는 쪽지를 나꿔채어 두 손으로 펼쳐들었다.
심하게 기침하며 앓아 누웠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을 만큼 빛나고 진지한 눈이었다.
"문제 쉽네요."
"여랑씨의 문제가 잘 풀리지 않아. 관광지의 정확한 위치를 모르겠어."
"저는 해일형네 문제가 헷갈리네요. 콜로라투라가 뭐죠?"
"콜로라투라 소프라노.. 기악적인 고난도의 기교를 구사하는 소프라노를 의미해. 다른 예로
리리코 소프라노 하면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소프라노를...레지에로 소프라노 하면 경쾌하고 우아한
소프라노를 의미하지. 성악곡 중에서도 음이 높고 기교가 많은 곡들이 있지? 그런 곡들을 소화해내는
소프라노들을 보통 콜로라투라라고 해."
"그렇구나.. 콜록.."
"기침이 점점 심해지네. 약이라도 얻어와야겠다."
"저 약 잘 못 먹어요. 그리고 감기는 스스로 낫게 두는 것이 제일 좋아요."
"고집하고는.."
"문제가 음악 문제네요? 두 분 다 음대생이라더니 문제도 그쪽인가 봐요."
"두 사람이 음대생이었어?"
"네. 어제 식사때 말해줬잖아요. 기억 안나요?"
"난 관심 없는것은 기억하지 않는 편이라.. 너처럼 기억력도 좋지 않고 말이야."
"헤헤~ 아무튼 콜로라투라와 오페라. 그리고 음악의 신동.. 음악의 신동이라면 모차르트잖아요?"
"맞아. 문제의 답은 모차르트의 유일한 오페라 곡이지."
"말하지 말아요. 스스로 풀어볼래요."
"그렇게 해. 힌트정도는 줄게."
"조 수미씨가 이 곡을 불렀나보죠?"
"오페라 2막에 나오는 곡을 불렀어. 콜로라투라의 절대 기교를 보여주는 곡이라고 할수 있지."
"조 수미씨하면 예전 cf 에 나왔던 곡 밖에 떠오르지 않아요. 오렌지 쥬스 광고였는데.."
"맞아. 바로 그 곡이야."
"정말요?"
"조 수미씨를 세계적인 성악가로 만들어 준 곡이 바로 이것이거든."
"형은 음악에 대해서도 잘 아네요?"
"그야 산장 문제 출제할때 많이 공부했으니까."
"복수심에 불타는 어머니? 이집트 신전?"
음악쪽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승현은 답을 짐작할 수 없음에도 스스로 풀어보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지용은 그런 그가 기침을 하며 온 몸을 떨때마다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지만 끝까지 말을
듣지 않고 버티는 고집을 당해내지 못하고 턱을 괸채 그의 행동을 주시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알수 없자 승현은 눈짓으로 답을 알려달라며 씨익 웃었다.
"가까히 오지 말아요! 감기 옮는단 말이에요."
"어짜피 같은 방을 쓰고 있잖아. 옮을 감기라면 떨어져 있어도 옮아."
팔을 붙잡힌 채 자신에게서 떨어지려고 발버둥치는 승현을 힘껏 끌어당겨 품에 안은 지용은 귀에
입술을 바짝 붙이고 답을 말해주었다. 입김이 간지러웠는지 승현은 몸을 움찔하며 이불위로
쓰러져 손가락으로 귀를 이리저리 비벼댔다.
"그럼 이집트는 오페라의 배경이 되는거네요? 역시 예술에 관한 문제는 어려워."
"풀었으니 된거잖아. 다음으로 넘겨보자."
"나진씨의 문제가 어렵다는 거죠?"
"그래. 전부터 추리에 관심이 많았던 사람이라 그런지 문제 내는 실력도 보통이 아니야."
"비탄과 피로 가득 찬 전장이라."
"이 문장 안에 답이 있는거야. 문장 자체를 힌트라고 봐야지."
"별로 어렵지 않아요. 제가 이쪽 계통으로는 빠삭하잖아요."
"알것 같아?
"전체적인 내용은 독립운동이에요. 이 사람은 독립 운동에 참가한 사람이고 승리를 이루어 냈어요.
태양이 머리 위로부터 비췄다와 5월의 태양. 이것이 답이에요."
"두가지가 어떤 연관이 있다는 거야?"
"설명해 드릴께요. 잘 들으세요."
승현이 바닥에 엎드린 채 문제를 손으로 짚어가며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자 지용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불을 끌어 그의 몸을 덮어주었다. 땀 때문에 머리가 엉망이 되자 각 티슈를 가져다 땀을 닦고
바람이 잘 통하게 이마를 가리고 있던 앞머리를 위로 쓸어 올려주었다.
머리를 넘기자 티 하나 없는 하얀 이마가 드러났다. 나이보다 두 세살은 어려보였다.
"너 술집가도 신분증 검사하지? 학생인줄 알고."
"전 술을 잘 못해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별로 안좋아해서 술집 갈 일도 없었구요."
"머리 넘기니까 정말 어려보인다. 누구 닮았어?"
"얼굴은 어머니를 많이 닮았구요. 동안인건 집안 내력이에요. 아버지나 어머니 두분 다 동안인 덕분에
학부모 면담때 이모나 삼촌으로 오해 많이 받았거든요."
"보고 싶지? 부모님."
"많이요."
"나도 보고 싶다. 사실 나 양자였거든.. 낳아주신 부모님은 모르지만 키워주신 분들은 정말 좋은
분들이셨어. 돌아가셔서 다시는 볼 수 없지만 가끔 그리워."
"................."
"내가 괜한 말을 꺼냈다. 하지만 새로운 가족이 생겼잖아. 앞으로는 내가 너의 가족이야."
"고마워요.."
"뭐가?"
"날 버리지 않아서.. 끝까지 내 곁에 있어 주겠다고 해줘서.."
"네가 목숨을 걸고 날 지켜줬어. 이젠 내가 널 지켜줄게."
"사실 질투심에 불탔었어요. 나진씨를 보니 불안했어요.. 하지만 미안한 마음이 더 많이 들어요.
원해서 헤어진게 아니라면서요.."
"원해서 헤어진건 아냐. 하지만 이미 마음을 정리했고 나진 역시 나와는 평생 함께 할수 없어.
충격이었지만 그걸 잘 알고 있기에 널 택하는 것엔 망설임이 없었어. 그러니 날 믿어."
"너무 좋아해요.."
승현이 고개를 숙이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지용는 이불을 들어올리고 안으로 들어가 그를
힘껏 끌어안았다. 숨이 막힌 승현은 기침을 하며 끙끙거렸지만 지용은 팔에 힘을 더욱 강하게 주며
그를 끌어안고 말 없이 눈을 감았다.
미안해 해야 할 사람이 하나 더 늘었다는 생각에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10시를 알리는 자명종이 여상스럽게 울리자 사람들은 행동을 멈추고 일제히 별채로 모여들었다.
모두들 복잡한 심정이 진뜩 배어있는 얼굴이었다.
"다 모이셨죠? 그럼 해답편을 진행하겠습니다. 돌아가면서 자신의 답을 말하게 될텐데
그 전에 정답을 적은 문제 쪽지를 모두 저에게 주십시오."
부정 행위를 막기 위해 여랑은 모두의 쪽지를 한데 모아 작은 바구니에 넣었다.
영원과 대양은 왠일인지 밝은 표정으로 웃고 있었고 하루는 표정없이 인형처럼 여랑의 곁에
앉아있었다. 그 와중에도 호수는 해일을 때리며 장난을 치고 있었고 지용은 아스카와 나진을
번갈아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두 사람의 분위기가 낮과는 달라보였기 때문이다.
"그럼 순서대로 답을 공개하겠습니다. 우선 대양씨부터 진행하세요."
"네."
대양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영원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영원 역시 그의 미소에 고개를 끄덕이며
의미를 알 수 없는 시선을 보냈다. 그 시각 승현은 열이 심해 방에서 잠이 든 상태였다.
"제가 낸 문제는 간단합니다. 흰색이며 변이종은 보라색을 띄는 것. 고산성 식물로 우리나라에서만
자라는 진귀한 식물. 각시와 신랑이라는 꽃말을 가지고 있는 이 식물의 이름은 '금강초롱' 입니다."
"해일아. 답 맞았다!"
호수가 손뼉을 마주치며 웃자 해일이 그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자신의 문제지를 펼쳤다.
"저희 답 역시 간단합니다. 첫 문제는 어짜피 몸 풀이니까요."
"문제만 간단하지 답은 어렵던데요?"
"하하.. 그럼 설명 드리겠습니다. 콜로라투라는 기교있고 높은 성악곡을 소화해 내는 소프라노를
말합니다. 음악의 신동은 모차르트를 말하며 복수심에 불타는 어머니는 오페라에 등장하는
밤의 여왕을 의미합니다. 조 수미씨가 밤의 여왕으로 세계적인 스타덤에 올랐으니까요."
"그럼 답이 밤에 여왕인겁니까?"
"아닙니다. 모차르트가 작곡한 수 많은 곡 중에 유일한 오페라곡인 이것은 고대 이집트를 배경으로
시작됩니다. 타미노라는 왕자가 밤의 여왕의 딸이 자라스트로라는 악한 수도사에게 잡혀 있다는
소리를 듣고 그녀를 구하기 위해 적지에 잠입하게 됩니다. 하지만 사실을 알고보니 자라스트로라는
자는 덕이 높은 성직자였고 오히려 악의 화신인 밤의 여왕으로부터 그녀의 딸을 보호하고 있다는것을
알게 됩니다. 사실 밤의 여왕은 자신의 딸을 이용하여 자라스트로를 없에려는 계략을 품고 있었던거죠.
결국 복수를 계획하던 밤의 여왕은 지옥으로 떨어지고 그녀의 딸은 왕자와 결혼하게 됩니다.
밤의 여왕의 아리아로 널리 알려진 곡의 제목은 '지옥의 복수심이 내 맘에 불타오르고' 입니다.
이건 2막에 나오는 곡일 뿐이니 답은 아닙니다. 모든 조건을 충족하는 오페라의 제목인 '마술피리'
가 답이 되겠지요. '마적' 도 같은 뜻이니 마술피리 또는 마적이라고 써 넣으신 분이 정답입니다."
해일의 설명이 끝나자 아무 말 없이 앉아있던 하루가 입을 열었다.
그는 언제나 필요한 말만 간단히 하고 침묵하는 특이한 버릇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여랑의 앞에서까지 입을 다물고 있는건 아니었다. 낯을 심하게 가리는 성격이라고 할까.
"이번에는 저희가 낸 문제를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문제에도 적혀있다시피 각 대륙으로 이동하는
시간은 실제와는 다르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첫번째 진이라는 사람은 초베 국립공원과 퀘백. 케이프
타운을 차례로 거쳐 남.아.공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남 아프리카 공화국이 아프리카 대륙 최남단에
위치하고 있다는건 다들 알고 계시겠죠? 우선 진은 한국에서 초베 국립공원으로 향하게 됩니다.
초베 국립공원은 보츠와나에 있는 곳으로 위치는 아프리카 대륙 입니다. 퀘백은 케나다에 있는 프랑스
전통 마을입니다. 위치는 아메리카 대륙이 되겠죠. 케이프 타운은 남.아.공 가장 남쪽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이동 경로는 아시아를 출발로 아프리카 - 아메리카 - 아프리카 입니다.
두번째로 카울이라는 사람은 아마존 강과 에어스록. 빅토리아 폭포를 거치게 됩니다. 아마존 강은
별 다른 설명 없이도 남 아메리카라는 것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에어스록은 호주 남서쪽에 있는
사암질의 바위 언덕 입니다. 위치는 오세아니아죠. 빅토리아 폭포는 아프리카 남부입니다.
이동 경로는 아시아를 출발로 아메리카 - 오세아니아 - 아프리카가 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메이라는 사람은 디즈니 랜드와 아부심벨. 베네치아를 거치게 됩니다. 디즈니랜드야
당연히 아메리카이고 아부심벨은 이집트의 건축물이므로 아프리카입니다. 베네치아는 이탈리아에
있는 유명한 물의 도시입니다. 이동 경로는 아시아를 출발로 아메리카 - 아프리카 - 유럽입니다."
"문제가 너무 복잡했어요. 골치 아팠다니까요?"
호수가 뾰루뚱한 얼굴로 하루를 바라보며 불만을 털어놓자 하루는 희미하게 웃으며 그에게
눈짓을 한 뒤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처음 보는 웃는 모습이 오히려 낯설어보였다.
"진이 한국에서 쵸베 국립공원으로 이동하는데 15시간이 걸립니다. 다음 퀘백으로 이동할때는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 연결되는 항공편이 없으므로 다른 경로를 통해 이동해야만 합니다.
가능한 이동 경로는 두 가지. 아시아를 거쳐 아메리카로 가는 방법과 유럽을 거쳐 아메리카로 가는
방법입니다. 아프리카에서 아시아로 가는데 걸리는 시간은 15시간. 다시 아메리카로 가는 시간은
22시간. 반면에 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가는데 걸리는 시간은 7시간. 다시 아메리카로 가는 시간은
10시간입니다. 상대적으로 유럽을 통해 이동하는게 빠른 경로겠지요. 그런 식으로 아메리카로
이동한 다음 케이프 타운이 있는 아프리카로 되돌아올때도 같은 경로로 이동합니다. 케이프 타운은
도착지와 같은 남.아.공 이므로 더 이상의 이동시간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진이 이동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15시간 + 7시간 + 10시간 + 10시간 + 7시간 = 49 시간이 됩니다."
"역시 복잡해."
"카울은 아시아에서 아마존이 있는 아메리카로 이동합니다. 이때 걸리는 시간은 22시간입니다.
두번째로 에어스록이 있는 호주로 이동해야 하는데 아메리카와 오세아니아를 이어주는 항공편이
없으므로 가장 빠른 경로인 아시아를 경유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인 빅토리아 폭포가 있는
아프리카로 이동할때도 항공편이 없으므로 아시아를 경유해서 이동하면 됩니다. 폭포에서 남.아.공으로
이동할때는 같은 대륙이므로 한시간이 걸리겠지요. 저는 가장 빠른 경로로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카울의 이동 시간은 22시간 + 22시간 + 8시간 + 8시간 + 15시간 + 1시간 = 76시간 입니다.
메이는 디즈니 랜드가 있는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동한 다음 아부심벨이 있는 아프리카로 이동하게
됩니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아메리카에서 아프리카로의 이동 경로는 유럽을 경유하는 것이 가장
빠릅니다. 유럽을 통해 아프리카로 이동한 다음 베네치아가 있는 유럽으로 이동합니다. 그리고 다시
남.아.공 이 있는 아프리카로 되돌아오면 되죠. 메이의 이동 시간은 22시간 + 10시간 + 7시간 + 7시간
+7시간 = 53 시간이 됩니다. 그러므로 가장 빨리 남.아.공에 도착하는 사람은 진 입니다."
길고 복잡한 내용을 막힘 없이 설명하는 하루를 보던 호수가 큰 소리로 박수를 쳤다.
그러자 또 다시 하루가 호수를 보며 살며시 미소지었다.
여랑도 수고했다는 의미로 하루의 머리를 등 뒤로 넘겨주며 아스카에게 정답 설명을 요구했다.
하지만 아스카 대신 나진이 입을 열었다. 문제를 만든 사람이 나진이었기 때문이다.
윤호는 설명을 하고 있는 나진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정작 나진은 그 시선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지만 대신 그의 옆에 앉아 있던 아스카가 윤호를 향해 싸늘한 눈빛을 보냈다.
"글의 내용은 독립운동이며 5월의 태양이 곧 답입니다. 에스파냐로부터 독립에 성공한 사람들이
-최후의 승리를 거둔 날 하늘은 개이고 태양이 상냥하게 축복을 보내주었다- 라는 뜻의
5월의 태양을 국기에 그려넣고 독립을 기렸습니다. 답은 아르헨티나 입니다."
"우루과이 아닌가요?"
"여랑씨. 안타깝지만 문제를 조금 더 정확히 보셔야 합니다. 태양이 머리 위에서 비췄다는 것은
정오의 태양처럼 말 그대로 머리 위에 떠 있는 태양을 의미합니다. 아르헨티나와 밀첩한 관련이
있는 우루과이 역시 5월의 태양을 국기에 사용하고 있으나 위치가 조금 다릅니다. 아르헨티나는 국기
정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으며 우루과이는 왼쪽 상단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원하는 답은
우루과이가 아니라 아르헨티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군요. 아깝네요."
여랑이 오답을 적은 듯 안타까운 표정으로 무릎을 내리쳤다. 그러자 하루가 말 없이 그의 손을 자신의
가슴으로 잡아 끌어 꼭 감싸쥐었다. 쉽게 흥분하는 여랑을 진정시키는 그만의 방법이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답은 지용과 승현의 것이었다.
문제를 만든 사람이 승현이기에 설명도 그가 하는 편이 좋겠지만 감기에 걸려 앓아누은 까닭에 지용이
대신하여 문제지를 들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다들 아시겠지만 보기 1번의 답은 원숭이. 2번의 답은 뱀. 3번의 답은 사마귀입니다. 문제가 설명하고
있는 것은 독수리 입니다. 하지만 제가 힌트를 참조하라고 한 것인만큼 답은 독수리가 아닙니다.
상형권이란 우슈에서 사용하는 각종 동물이나 사람의 특정한 동작을 형상화한 권술입니다.
그러므로 보기의 답을 상형권에 대입하면 원숭이의 절묘한 앞발 사용법을 응용한 첫번째 권법은
'후권' 이 됩니다. 같은 방식으로 뱀의 몸놀림과 이빨 쓰는 법을 응용한 두번째 권법은 '사권' 이 되며
사마귀가 앞발로 곤충을 잡듯 손과 발을 교묘히 쓰는 기술을 응용한 세번째 권법은 '당랑권' 이 됩니다.
이것을 참조하여 독수리에 대입하면 답은 '응조권' 이 되는 것입니다."
지용이 마지막 답을 설명하자 여랑은 바구니에 모아 놓은 쪽지를 펼쳐 정답 표를 만들기 시작했다.
모두들 결과가 궁금해 그의 행동에 정신을 집중했다.
*여랑 + 단 하루 = 마적 . 금강 초롱 . 응조권 . 우루과이 (3문제)
*이 해일 + 신 호수 = 금강 초롱 . 독수리 . 이르헨티나 . 진 (3문제)
*아스카 + 송 나진 = 마술 피리 . 진 . 금강 초롱 . 응조권 (4문제)
*권 지용 + 이 승현 = 아르헨티나 . 마술 피리 . 진 . 금강 초롱 (4문제)
*오 대양 + 진 영원 = (0문제)
답을 확인하던 여랑은 대양과 영원이 답을 써 넣지 않은 것을 발견하고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자 그의 표정을 예상이라도 한 듯 대양은 웃으며 말했다.
"저희는 이번 게임에서 빠지겠습니다."
"왜요?"
"게임에 5커플씩이나 있을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복잡한 것도 싫고 문제의 수준도 높은 것 같아서요"
"대양씨. 저희 때문이라면.."
"아닙니다 아스카씨. 문제가 어렵다거나 복잡하다는 것은 변명이고 사실은 영원이가 포기를 바라고
있어서입니다. 돌아가고 싶다고 졸라대서 말입니다. 하하."
"영원아. 우리가 끼어들어서 복잡했구나?"
"지용형 그런 소리 말아요. 어차피 다음 대회도 있잖아요. 이번만 양보하는거에요. 그리고 갑자기
가보고 싶은 곳이 생겨서 제가 대양 형을 조른 것이니 마음 쓰지 마세요."
"하지만 어떻게 마음을 안써?"
"괜찮습니다 지용씨. 저희는 다음 게임에 참가하면 되니까요. 이미 짐도 싸두었고 이 길로 나가
시내로 이동할까 합니다. 좋은 분들을 많이 알게 되어 즐거웠습니다."
"대양씨.."
"연락처를 남겨둘테니 게임이 끝나거든 우승자가 누구인지 전화 한통 해주세요. 그리고 우리
영원이가 승현이를 아주 좋아합니다. 친구가 생겨 기쁜 모양이에요. 그러니 꼭 전화주세요~"
"벌써 11시인데 어떻게 가려고 하십니까? 잠을 자고 내일 아침에 떠나도록 하세요."
"시내로 걸어나가면 택시를 잡을 수 있을거에요. 택시를 타고 근처 친지분의 집으로 갈 생각입니다."
대양은 말을 마치자 마자 모두에게 차례로 악수를 청했다.
지용과 나진. 아스카는 자신 때문에 그들이 떠난다는 생각에 침울한 표정을 지었지만 대양은
안심하라는듯 웃으며 손을 잡고 흔들었다. 영원은 대양이 인사하는 사이 승현이 자고 있는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문 소리가 나자 놀란 승현은 몸을 벌떡 일으키고 어둠에 익숙해지려 눈을 찌푸렸지만
영원이 불을 켜는 바람에 고개를 숙이고 눈을 질끈 감았다.
"승현아. 나 지금 떠나."
"왜?"
"우리는 다음 게임에 참가하기로 했어."
"우리 때문에 그러는거지?"
"그래. 한 사람이라도 없어야 네가 이기기 편하잖아."
"그럴 필요 없어."
"만난지 하루 밖에 안되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네가 마음에 들어. 계속 친구로 지내자."
"당연하지. 나도 네가 좋아."
"이거 내 전화번호거든? 게임 끝나면 꼭 전화해. 알았지?"
"그래. 서울 올라가면 꼭 연락할게."
"난 네 편이니까 반드시 이겨. 못 이기면 혼난다! 그리고 아프지 마."
영원은 승현의 손을 잡고 건강할 것을 신신 당부하고 웃으며 밖으로 뛰어나갔다.
다들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그들을 배웅하자 영원은 대양의 팔짱을 끼고 손을 흔들었다.
예상하지 못한 갑작스러운 이별이었다.
-대양 형. 이번 게임은 포기했으면 좋겠어요.
-왜?
-느낌이 별로 안좋아요. 뭔가 충격적인 일이 일어날 것 같아요.
-또 무당같은 소리한다.
-헤헤~ 그것보다 승현이가 굉장히 난처한것 같아서.. 도와주고 싶어요.
-내가 봐도 세 사람.. 심각해 보이긴 하더라.
-친구가 생겨서 기뻐요. 그러니 그 친구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어요. 이번엔 빠지고
-다음 게임에 참가해요. 괜찮죠?
-게임을 포기하면 모처럼의 휴가는 뭐 하면서 보내지?
-둘이서 놀러 가요. 형하고 함께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좋아요.
-착한 것. 좋아! 오랜만에 내가 큰 맘먹고 선심쓴다!
"영원이 가니까 허전해요. 좋은 친구였는데.."
"게임 끝나고 전화하면 되잖아."
"그럴꺼에요~ 콜록...콜록.."
"아무래도 안되겠다. 열이 안 떨어지네.. 기다려봐 내가 물수건 만들어 올게."
승현의 상태가 점점 심각해지자 걱정이 된 지용은 물수건을 만들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땀을 많이 흘리며 괴로워하고 있기 때문에 열을 식혀줘야 했다. 방에는 개인적인 욕실이 딸려있지
않아서 물수건을 만들려면 방과 멀리 떨어진 공동 욕실로 가야 한다.
지용이 수건을 가지고 방을 나서자 밝은 빛에 눈이 부셨던 승현은 힘겹게 몸을 일으켜 방 문쪽으로
걸어가 형광등의 스위치를 내렸다. 순식간에 시커먼 어둠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하.. 아.."
"이 승현.."
"형? 읍...읍!!"
"얌전히 있어.."
"읍...누구..!!"
몽롱한 정신으로 불을 끄고 자리로 돌아가던 승현의 뒷쪽으로 한차례 차가운 바람이 불어닥치더니
누군가가 강한 힘으로 그의 입을 틀어막고 몸을 번쩍 들어올렸다.
승현은 단번에 지용이 아님을 알아채고 저항하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힘이 빠져버린 팔 다리는
그의 의지와는 달리 생각처럼 잘 움직여주지 않았다.
-이 향기.. 어디선가..
승현은 아득해져오는 머리속을 정리하며 체력소모를 줄이고 필사적으로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그리고 정체 모를 사람이 자신을 영원과 대양이 쓰던 맨 끝 방으로 데리고 왔다는 사실을 알았다.
칠흙같이 어두운 방 구석에 얌전히 내려진 승현은 또렷하지 않은 눈을 부릅뜨며 상대를 바라보았다.
물질 자체가 가지는 비열이 다르기 때문에 빛이 거의 없는 곳이라 하더라도 모든 사물은 미세하게나마
온도가 다르게 나타난다. 그건 사람도 마찬가지다.
한참을 노력한 끝에 어둠에 익숙해진 승현은 그제서야 자신을 데려온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three-
"놀랐잖..콜록..."
"이러다 지용씨한테 맞는거 아닌가 모르겠네."
"형도 참.. 납치극을 벌이려면 제대로 해야지 감기 걸린 애 옷도 안입혀서 데리고 오면 어떻게 해요?"
"어쭈? 다시 돌아가서 승현이를 만나보자고 조르던게 누구더라?"
어둠이 눈에 익자 승현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건 대양과 영원이었다.
영원이 재촉하자 대양은 다시 그를 안아올려 자리에 눕힌 다음 이불을 꼭 덮어주었다.
승현은 자신을 해치지 않을 사람들이라는 생각에 안도하고 긴장했던 눈에 힘을 풀었다.
영원은 그런 그의 땀을 닦아주며 손을 꼭 움켜쥐었다.
"대양 형.. 콜록.. 왔으면 방으로 들어오시지 왜 저를 이곳으로 데려 왔어요.. 지용 형도 없는데
기절할뻔 했잖아요.. 너무해요.."
"미안~ 우리가 다시 돌아온건 여랑씨 밖에 몰라. 사실 돌아올 생각 없었는데 영원이가 하도 졸라서
어쩔 수 없이 들른거야. 저 녀석 한번 고집 피우기 시작하면 끝을 보거든."
"승현아. 나랑 같이 여기서 나가자."
"무슨.. 소리야.."
"아무래도 널 두고 가는게 마음에 걸려."
"그런말은.. 지용 형에게 해야지.. 나야.. 형이 움직이는대로.. 따라갈뿐이니까.."
"지용 형은 내 말을 믿지 않을게 뻔하잖아."
"그래서 나만 이곳으로 데리고 온거야? 하지만 형이 찾을텐데.."
승현이 지용 생각에 급히 몸을 일으키자 대양은 조금 더 누워 있으라며 그를 자리에 눕혔다.
배를 톡톡 두드려주는 폼이 아버지의 손길처럼 부드럽게 느껴졌다.
"방으로 들어올때 언뜻 보니까 여랑씨와 이야기 하고 있더라. 아직은 찾지 않을테니 걱정마."
"하지만.."
지용이 말을 얼버무리며 머리를 움켜잡자 영원이 그의 머리를 손가락 끝으로 꾹꾹 주물러주며 말했다.
지압을 받은 머리는 날아갈듯이 시원해졌다.
"지용 형에게는 미안하지만 난 너를 꼭 데려가고 싶어."
"그건 안되.. 나는 나진씨와.. 볼 일이 남아있단 말야.."
"너 못느꼈니? 이 민박.. 조금 이상해.. 우리가 이 게임 오래 참가한거 너도 알지?"
"2년째 참가했다면서?"
"맞아. 일년에 네번 진행되는 게임이니까 벌써 일곱번째 참가하는거야."
"그런데 그게 왜?"
"여름에 찾아왔을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이번엔 조금 이상해.. 분위기가 전과는 다르다고나
할까? 특히 하루 형이 많이 변했어. 원래부터 말수가 적고 얌전한 사람이긴 했지만 저렇게 차갑지는
않았거든. 음식도 굉장히 잘했고 간식도 자주 챙겨줬었어."
"하루 형 지금도 음식 잘하잖아... 난 맛있던데.."
"맛이 많이 변했어.. 여전히 맛은 좋지만 혀끝에서 껄끄러운 느낌이 드는게 영 이상하거든.."
"잘 모르겠는데.."
"그리고 네가 말하는 나진씨도 조금 이상해.. 사람의 생기가 전혀 안느껴지잖아.. 그 형 옆에 바짝
붙은 채로 사람들을 경계하는 아스카씨도 눈빛이 예사롭지 않고.."
영원이 알 수 없는 말로 중얼거리자 승현은 복잡해지는 머리를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몇번을 들어도 그의 말은 쉽게 납득할 수 없는것 뿐이었다.
영원은 승현이 아무말없이 목을 문지르며 허공을 응시하자 그의 팔을 잡아 끌며 애원하듯 말했다.
승현은 갑자기 그가 자신에게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궁금해졌다.
"날도 추운데 두번 발걸음하게 해서 미안하지만.. 난 가지 않아.."
"승현아."
"걱정해줘서 고마워.. 하지만 난 아직 할 일이 남았어.."
"정말 가지 않을거야?"
영원이 재차 돌아갈것을 요구했지만 승현은 그의 말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마음을 돌릴 생각이 없어보이자 대양은 영원을 일으켜세우며 돌아가자고 재촉했다.
승현은 미안한 마음에 영원에게 거듭 미안하다고 사과했고 영원은 아쉬운 얼굴로 대양과 함께
방을 빠져나갔다. 문이 열리자 차가운 바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승현! 여기서 뭐하는거야? 한참 찾았잖아."
"형.. 나 좀 방으로 데려다줘요.."
지용이 승현을 발견 했을때는 이미 온 몸이 차갑게 식어버리고 난 후였다.
민박은 전체 난방을 하기 때문에 빈 방이라도 춥지 않았지만 감기에 걸린데다 대양과 영원이 나간 뒤
이불도 덮지 않고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던 탓에 몸을 추스리기 힘들었다.
땀이 식은 후 찾아오는 오한이였다.
지용은 재빨리 그를 안아올려 방으로 돌아갔다.
승현은 자리에 누워서도 그에게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왜 그 방에 갔었어?"
"영원이가 왔었어요."
"영원이는 아까 전에 대양씨와 함께 떠났잖아?"
"절 보기위해 잠시 들렸데요..."
"네가 보고 싶으면 이 방에서 보면 될 것을 왜 아픈 사람을 빈방으로 데리고 가?"
"형.. 우리가 실수하고 있는걸까요?"
"뭐가?"
"산장처럼 이 게임 역시 뭔가 있는걸까요?"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미안하지만 먼저 잘게요.. 빨리 나아서 도움이 되고 싶어요.."
"그래. 아무 걱정말고 푹 자."
"어디 안갈꺼죠?"
"네가 일어날때까지 꼼짝않고 지켜볼테니까 안심하고 자."
승현은 이마에 시원한 물수건이 올려지자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하지만 영원의 말이 자꾸 머릿속에 맴돌아 한참동안이나 잠들지 못하고 생각에 빠져있었다.
지용 모르게 자신만 데려가려고 한 이유가 무엇일까.
돌아가면서 지어보였던 안타까운 표정의 의미은 무엇일까.
아무리 고민해봐도 실타래는 풀리지 않고 정신없이 엉켜들기만 했다.
"아스카.."
"..................."
"아스카!"
"네. 나진씨."
"방금 날 만진 손.. 너였지?"
"네?"
"아냐?"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내 머릿카락을 쓸어내리며 피식 웃었잖아.."
"전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습니다만.."
깜박 잠이 든 나진은 누군가가 머리를 쓸어내리는 느낌에 몸을 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옆자리에 누워있던 아스카가 몸을 일으켜 꺼져있던 불을 환하게 밝혔다.
나진은 헝크러져 있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빗어내렸다.
아직도 머리를 만진 손의 느낌이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온 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왜 이렇게 떨고 계신겁니까? 안좋은 꿈이라도 꾸신겁니까?"
"아냐. 누가 분명 내 머리를 만졌어. 처음엔 네가 하는거라고 생각하고 아무말 없이 가만히 있었는데
이불이 부스럭거리지 않았어.. 한 이불을 덮고 있는 네가 내 머리를 만졌다면 당연히 이불이
부스럭거렸어야지.."
"진정하세요. 꿈을 꾸신걸겁니다."
"꿈이 아냐. 아직도 그 느낌이 생생해.. 머리카락이 잡아당겨지면서 두피에 느낌이 남아버렸어..
원래 머리를 만져주는걸 좋아하는데 이 느낌은 정말 이상해. 머릿카락이 쭈뼛 서는 것같아.."
나진이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감정에 들뜬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아스카는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살며시 감싸안았다. 놀란 나진은 팔로 그의 가슴을 밀어냈지만 다시 그의 손에 이끌려 품에 안기고
말았다. 어린시절부터 봐온 아스카지만 왠지 낯선 느낌이었다.
"아스카. 왜 이래?"
"어짜피 저에게는 아무런 감정이 없질 않습니까? 무서운 꿈을 꾸었을때 누군가 안아주면 떨림이
가라앉고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나진씨와 저는 꽤 절친한 형 동생 사이 아닙니까?"
"그야 그렇지만.."
"잠시 편하게 기대세요. 너무 거리를 두시면 섭섭해집니다."
"그런건 아냐. 오해하지 마."
아스카에 말대로 사람의 체온은 떨림을 가라앉혀주는 신비한 힘이 있었다.
나진은 그에게서 풍겨오는 스킨의 시원한 향을 느끼며 말없이 눈을 감고 몸을 기댔다.
하지만 이 품이 지용이었으면 좋았을거라는 생각이 들자 진정되어가던 심장이 다시 박동하며
슬픔이 울컥 치밀어올랐다. 예고도 없이 뜨거운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울지 마세요."
"미안.."
"제가 알던 나진씨는 이렇게 약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 누구보다 당당했고 현명했습니다.
늘 웃는 모습으로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사람이었습니다. 대체 왜 이렇게 변해버린 겁니까?"
"나도 몰라.. 미쳤나봐.."
"나진씨가 원하는건 뭐든 다 들어드리겠습니다. 지용씨가 정 필요하다면 납치라도 해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울지 마세요. 부탁입니다."
"아스카.. 나에게 왜 이렇게 잘 해주는거야?"
"이유는 없습니다."
"동정이야? 내가 불쌍해보여?"
"아닙니다."
"너보다 나이 많은 사람이 기대기만 하니까 바보같아 보여?"
"아닙니다."
"그럼..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야?"
"아닙니다."
"결론은 별 이유 없다는거네.. 그럼 너도 이렇게까지 신경쓸 필요 없어."
"나진씨."
"이제 기대지 않을게. 불편하다면 울지도 않을게. 하지만 당분간만 날 도와줘. 네 힘이 필요해"
"걱정마세요."
나진은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다시 자리에 누웠다.
머리가 당겨졌던 느낌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남아 신경이 쓰였다.
바람에 낙옆이 우수수 떨어져내리는 소리가 귓가를 스치고 음산하게 맴돌았다.
"좋은 아침입니다. 다들 안녕히 주무셨나요?"
아침 식사시간이 되자 사람들이 하나 둘씩 식당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하루가 음식을 준비하고 여랑이 옆에서 일을 거들었지만 오늘은 왠일인지 여랑 대신 호수가
하루와 같이 음식을 만드는 일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가끔 까탈을 부리기도 하지만 쾌활한 성격의 호수 덕분에 처음으로 하루의 웃는 모습을 볼수 있었다.
여랑은 식탁에 앉아 우유를 한잔 마시며 지용와 대화중이었다.
"지용씨. 승현이가 안보이네요? 감기가 심한가요?"
"밤새 기침하고 뒤척이다가 새벽이 되서야 겨우 잠들었습니다. 깨우기 싫어서 저 혼자 온거에요."
"그럼 따로 죽이라도 끓여야겠네요. 아플땐 입이 깔깔해서 음식이 안넘어가거든요."
"신경써주셔서 너무 고맙습니다."
"지용씨도 사람이 참 예의 바르다니까? 뭘 그런걸 가지고..하하.."
"참.. 여랑씨."
"네?"
"어젯밤에 제가 물수건을 만들러 나왔을때 말이에요. 대양씨가 왔었나요?"
"대양씨라니요?"
"승현이 말로는 대양씨가 영원이를 데리고 잠깐 들렀다고 하는데 여랑씨가 문 열어준거 아니에요?"
"아닌데요? 저는 지용씨와 잠시 이야기하고 바로 들어가 잤어요."
"그럼 하루씨가 열어준건가?"
"하루는 피곤하다고 게임이 끝나자마자 잠이 들었어요. 아침까지 깨지 않고 잠만 잤는걸요?"
"그래요?"
"승현이가 열이 심해 꿈을 꾼거 아니에요? 대양씨가 들렀다면 제가 모를리 없잖아요."
지용은 그의 말에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들고 있던 물컵을 만지작거렸다.
분명 승현이 말도 없이 대양의 방으로 들어갔던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정신을 놓을만큼 아팠던것도 아니고 발견 당시에도 기침만 심할뿐 이무 이상없이 멀쩡했다.
지용은 이상한 생각에 턱을 가만히 쓸어내렸다.
생각이 자꾸 깊어지다보니 승현이 던진 질문도 뭔가 석연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그는 식사가 끝난 후 정확히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스카씨. 어서오세요."
잠시 조용해진 가운데 식당문이 드르륵 열리며 간편한 차림을 한 아스카가 모습을 드러냈다.
첫 만남때부터 바르고 단정한 모습만을 보여왔던 터라 평범한 복장이 오히려 낯설어 보였다.
아스카는 지용을 향해 의미없는 눈짓을 하고는 여랑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는 왠일인지 나진을 동행하지 않고 혼자였다.
"나진씨가 안보이네요?"
"원래 아침을 먹지 않아요.."
지용은 여랑의 질문에 아무생각없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뒤이어 쏘아지는 아스카의 날카로운 눈빛에 자신이 말 실수를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과거야 어쨋건 현재 그가 선택한건 나진이 아니라 승현이었기 때문이다.
"잘 알고 계시는군요."
"모른척 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저는 모른척 해주셨으면 좋겠는데 말입니다."
두 사람 사이에 차가운 냉기가 흐르자 여랑은 온천욕을 제안하며 화재를 돌렸다.
관계가 불분명한 미묘한 관계. 확실한 미움도 증오도 없이 신뢰하지 못하는 관계.
지용과 아스카 사이에는 설명할 수 없는 것 이상의 감정이 실려 있었다.
그것은 나진 하나만의 이유는 분명 아니었다.
"호수. 이리와서 서방님 옆에 앉거라."
"저게 꼭두새벽부터 맞고 싶어서 저러나? 서방님이라니! 너 죽을래?"
"어허! 부르면 그냥 얌전히 앉으면 좋을것을!"
"아~ 네가 별로 살고 싶지 않구나? 진작 말을 하지~ 개쓰나미 오늘 죽었어!"
호수가 쓰나미 앞에 개자를 붙이면 정말 화났다는 소리다.
해일은 호수가 국자를 들고 거품을 물며 뛰어오자 손으로 머리를 방어하며 몸을 숙여 그의 허리를
파고들었다.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반격하자 스스로 바닥으로 주저앉으며 항복했다.
"그러길래 얌전히 앉으면 좋잖아."
"너.. 사람들 앞에서 날 쪽팔리게 했어? 밥 먹고 보자."
"밥 먹고 여랑씨랑 온천 들어가기로 했으니 나중에 보자."
"이 해일! 너 정말!"
호수가 국자로 식탁을 내리치며 분해하자 모두가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분노를 지켜보던 하루는 조용히 웃으며 국자를 빼앗아 들고 손을 잡아끌어 자신의 옆자리에
앉혔다. 평소엔 잘 웃지 않던 하루도 호수 앞에서는 제법 즐거워보였다.
식사 준비가 끝나고 모두가 자리에 앉자 여랑이 국에 밥을 떠 넣으며 말을 꺼냈다.
"식사 도중 게임에 대해 말하면 체할지도 모르지만 다들 편하게 들어주세요."
"재미로 하는 게임인데 체할게 뭐 있습니까? 말씀하세요."
"제가 말한 찬스와 벌칙에 대해선데요. 사실 어제 동점자도 나왔고 다시 순위를 가렸어야 하는데
대양씨가 갑자기 떠나는 바람에 정신이 없어 그냥 넘어가 버렸네요. 그래서 오늘부터는 확실히
할 생각입니다. 최고점수를 낸 팀이 한팀 이상일 경우나 최저점수를 낸 팀이 한팀 이상일 경우
제비뽑기를 해서 확실한 등수를 정하겠습니다. 순위를 가리는것마저 문제로 대신한다면 너무
머리가 아프겠죠? 실력도 중요하지만 운도 따라줘야 한다는 말입니다."
"제비뽑기같은 확률싸움에 약한데 걱정이네요."
"올해 봄 게임에서는 대양씨네와 저희가 동점으로 끝날 뻔했는데 하루가 운좋게 찬스를 획득하는
바람에 이겼었어요. 재미로 하는 게임이지만 걸려있는 상금이 커서 생각보다 치열하다니까요?
아주 무섭습니다. 하하.."
"여랑씨. 궁금한것이 있는데요.. 처음 게임을 시작한건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요? 동호회 회원들끼리
친목을 다지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일은 종종 있지만 이런 집을 걸고 내기 한다는건 솔직히 납득이
가질 않아요. 얼마나 돈이 많으면 이런 게임을 생각해냈을까요?"
해일이 식당안을 둘러보며 이해할수 없다는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사실 겉보기에는 낡은 민박집일 뿐이지만 평수도 엄청나게 크고 내부시설도 꽤 좋은 편인데다
훌륭한 노천온천까지 딸려있으니 가격으로 매겨도 적은 액수는 아닐듯 싶었다.
"사실 저희도 5년이나 이 집에서 생활했지만 처음 게임을 시작한 사람은 누구인지 몰라요.
민박을 가지고 있다가 게임에서 지면 집과 동호회 운영자 자리를 우승자에게 넘기고 물러나야하거든요.
아는 사람들끼리 농담삼아 미친 부자의 장난이라는 말을 하곤 하지만 그 누구도 정확한 내용을
알지 못해요. 수수께기로 가득찬 집이라고 할 수 있겠죠."
"솔직히 민박집을 손에 넣게 되면 장사를 하던 말던 탐이 나기 마련인데 게임을 모두 없었던것으로
하고 집을 꿀꺽 먹을수도 있는거잖아요. 여랑씨는 그런 생각 안해보셨어요? 저라면 했을것같아요."
"그런 생각이야 누구든 할 수 있죠. 저도 사람인데 왜 이 집이 탐나지 않겠어요? 하지만 특별회원란에
올라와 있는 공지를 보면 작성자가 다르다는 것을 알수 있을겁니다. 회원들을 관리하고 이벤트를
진행하는건 저와 하루지만 홈페이지의 운영자는 따로 있다는 뜻입니다. 가끔씩 바뀌는 메인화면도
제가 하는게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실질적인 시샵은 따로 있다는 소리죠."
"그럼 뒤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있다는 말인가요?"
"그런 셈입니다."
"에이.. 그럼 민박을 손에 넣어도 완전히 가질 수 없는거잖아요?"
"그렇죠. 재미로 하는 게임이니까요. 그래도 우승하면 기분은 좋습니다. 하하.."
여랑은 언제나 시원하고 밝게 웃었다.
5년째 민박을 운영하고 있지만 게임에서 진다고 해도 여전한 미소로 웃을것 같아보였다.
식사가 끝나자 하루 대신 여랑과 해일이 뒷정리를 도왔고 호수는 하루와 함께 온천으로 향했다.
지용은 여랑이 정성스럽게 만들어준 죽을 가지고 방으로 돌아갔다.
불도 켜지 않은 어두운 방으로 들어서니 승현은 이불속에서 잔뜩 웅크린자세로 곤히 잠들어있었다.
거칠던 숨소리가 안정되고 열도 많이 떨어져있었지만 여전히 땀은 흥건했다.
지용은 죽이 담긴 쟁반을 바닥에 내려놓고 조심스렇게 이불을 걷어올렸다.
"추워..."
"승현아. 눈떠 봐."
"싫어..."
"옷 갈아입고 밥먹어야지. 땀 너무 많이 흘렸어."
"형.. 이불..."
승현이 눈도 뜨지 않고 중얼거리자 지용은 그의 엉덩이를 한번 툭 치고 땀에 젖은 옷을 벗겼다.
송글송글 맺혀있는 땀을 닦아내리던 수건이 유두를 살짝 스치고 지나가자 승현은 바로 몸을 떨며
작은 탄성을 내질렀다. 열이 올라있는만큼 몸 또한 예민해져 있는 모양이었다.
지용은 그의 반응이 너무나 귀여워 고개를 숙여 가슴 언저리를 살짝 핥았다.
그러자 절대 일어날것 같지 않았던 승현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의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안았다.
"살만한가 보네? 승현양?"
"승현양 아니라니까요."
"역시 살만한가보구나. 기분 좋아?"
"기운 없어요.. 지금 이러시면.."
"안해. 깨우려고 일부러 그런거야. 일어나서 밥 먹자."
"밥이요?"
"눈 빛나는것 봐? 밥은 아니고 죽이야. 여랑씨가 끓여준건데 맛이 아주 좋아."
"먹여주세요."
밥을 좋아하는 승현은 죽이라는 말에 실실 웃으며 기지개를 켰다.
아직 지용의 손에 부축을 받으며 일어나야했지만 전날보다 많이 좋아진 상태였다.
지용은 그의 몸을 마저 닦고 옷을 갈아입힌 다음 자신의 무릎에 앉혀 죽을 떠먹어주었다.
승현은 맛을 못느끼겠다고 투덜거리면서도 그가 떠주는 대로 넙죽넙죽 잘 받아먹었다.
"이제 그만 먹을래요."
"아직 반도 안먹었어. 더 먹어."
"울렁거려요. 나중에 먹을게요. 그리고 죽은 식혀 먹어야 맛있다니까요?"
"너 좋을대로 하세요. 그나저나 승현아. 어제 저녁 대양씨 봤다고 했지?"
"네.."
"정말 왔었어?"
"그럼요.. 왜요?"
"여랑씨에게 물어봤더니 그럴리가 없다고 해서 말이야. 하루씨도 일찍 잠들어서 아무도 문을 열어준
사람이 없데. 네가 꿈꾸고 착각하는거 아냐?"
"그럴리 없어요. 분명 왔었다구요.."
"하지만 대문은 항상 잠겨있고 누군가 문을 두드리면 제일 근처에 있는 여랑씨가 모를 리 없잖아?"
"그건 그렇지만.. 분명 꿈이 아니었어요.."
승현은 간밤의 일을 떠올리며 손을 교차시켜 양 어깨를 부여잡았다.
다시금 그들과 했던 대화를 떠올렸지만 손에 잡힐만큼 생생하고 또렷한 기억이었다.
"만약 널 보러 왔었다면 왜 우리방에 들르지 않았겠어?"
"그건.."
"네가 대양씨를 따라 그 방으로 들어간거야?"
"아니요. 대양이 형이 안아서 옮겨준거에요."
"그럼 더 이상하잖아? 왜 하필 내가 나갔을때 널 데리고 간거지?"
"저 형.. 사실은요.."
"역시 나에게 숨기는게 있는거지? 말해봐."
"대양 형과 영원이가 저보고 이 집을 떠나자고 했어요. 자신들과 함께 가자고 말이에요."
"너만?"
"네.."
"내가 있는데 왜 너만 데리고 가겠다는 거야?"
"영원이 말로는 이곳의 느낌이 안좋데요. 그래서 떠나기로 결심한건데 형에게 말하면 이해못할까봐
저에게만 살짝 말한거래요. 어젯밤에는 정신이 없었기때문에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대충 그래요."
"이해할수가 없군.. 그게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면 정말 이해할 수 없어.."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간밤에 다녀간 영원과 대양은 분명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승현은 손을 땅에 짚으며 몸을 바로 세워 지용을 바라보았다.
마주친 두 눈동자에는 산장에서와 같은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똑똑 -
고조되어있는 정신의 균형이 흔들릴만큼 둔탁한 노크소리가 방 안을 크게 울렸다.
지용은 잡고 있던 승현의 손을 이불속으로 밀어 넣은 뒤 몸을 일으켜 문쪽으로 다가갔다.
차가워 별로 만지고 싶지 않은 문 손잡이에 손을 갖다댔다. 소름이 돋았다.
그의 촉각세포가 차가움을 느낌과 동시에 문이 열리더니 수건을 둘러 맨 여랑이 씨익 웃으며
고개를 삐죽 내밀었다. 지용은 생각지도 못한 그의 등장에 머리를 긁으며 멋적게 웃었다.
"여랑씨? 무슨일 있어요?"
"무슨일은요. 승현이는 좀 어떤가 해서요. 승현아. 좀 괜찮니?"
"끓여주신 죽 맛있게 잘 먹었어요. 덕분에 기운이 막 솟는것 같아요~"
"능청은.. 얼굴 보니 다 죽어가는구만 뭘."
"헤헤~"
여랑은 바람이 들어올까 재빨리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섰다.
지용은 바닥에 놓인 죽 그릇을 탁자위로 치우고 그가 앉을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추운 날씨임에도 반팔을 입고 돌아다니는 여랑의 팔뚝 위에는 어울리지 않게 소름이 돋아 있었다.
"형은 이렇게 추운 날씨에 반팔을 입고 다니세요? 감기걸리면 저처럼 고생해요."
"일부러 입고 다니는거야. 이렇게 하면 추위에 내성이 생겨서 겨울 나기 편하거든. 이곳은 눈이 많이
내려서 겨울에 엄청 추워. 나는 감기 같은거 안걸리니 너나 빨리 털고 일어나."
"이제 다 나았어요. 그런데 형.. 어제 밤에 대양 형 못보셨어요?"
"지용씨도 물어보더니 너도 그러네? 대양씨는 영원이랑 떠났잖아. 왜 다시 돌아왔겠어?"
"하지만 대양 형이 그랬거든요.. 자신들이 다시 돌아온걸 형이 알고 있다고.."
"꿈이겠지. 이 집에서 나를 거치지 않은 외부인은 들어올 수 없어."
"정말 꿈이었나..."
"아니면 귀신에 홀렸나보지~"
"형!"
초자연적인 현상에 강한 거부반응이 있는 승현은 여랑이 손톱을 세우고 몸을 숙이자 화들짝 놀라
그의 팔뚝을 힘껏 때렸다. 맨살에 손바닥이 부딧혀 찰싹 소리가 났다.
승현의 손이 생각보다 매워 그의 팔뚝에는 금새 뻘건 손자국이 났다.
하루가 알면 화낼것 같다는 생각에 승현은 재빨리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 숨어버렸다.
"지용씨. 승현이는 게임 전까지 좀 더 쉬게 하고 우리는 온천이나 들어갑시다. 시골동네라 특별히
할일도 없고 따분하네요. 여름이면 이것저것 심고 가꾸느라 바쁘지만 늦가을부터는 영 할일이
없으니 말입니다. 문제는 다 만드셨나요?"
"아직 못만들었어요."
"그럼 먼저 가 있을테니 만들고 오세요. 다들 온천으로 모이기로 했어요."
"네. 먼저 가세요. 뒤따라 가겠습니다."
여랑은 이불을 들춰내어 승현의 옆구리를 한번 간지럽히고 밖으로 나갔다.
승현이 간지러워 어쩔줄 몰라하자 장난기가 발동한 지용은 여랑이 간지럽힌 곳을 건드리며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간지러움을 잘 못참는 승현은 피하려고 발버둥치다 자지러지고 말았다.
"우하하~ 형.. 난 환자란 말이에요!"
"환자치고는 너무 쌩쌩해. 어때? 간지러운것보다 더 기분좋은 일을 할까?"
"안되요.. 대낮부터... 아무튼 안되요!"
"그럼 밤에는 된다는 말이네?"
"생각해보구요."
"열심히 생각해봐. 그나저나 오늘 문제는 어떤걸로 할까?"
"그러고 보니 문제를 만들어야 하는구나. 종이하고 팬 좀 주세요."
승현이 명령하듯 탁자를 가리켰다. 그의 손짓에 문득 당황스러워진 지용은 슬슬 건방져지고 있는
쿤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소름끼치게 맑아서 언제나 생각을 감출 수 없는 그 눈과 흡사한..
"승현양. 점점 건방져지는데? 이제 형에게 명령을 해?"
"난 환자잖아요."
언제부터인가 툭 하면 환자타령을 하며 위기를 넘기던 승현은 손을 뻗어 그의 옆구리를 집중공략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체급이 현저하게 다른 지용이 공격에 가만히 당할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이불에 누워 허우적거리는 승현의 입술에 재빨리 키스를 하고는 탁자로 걸어가 팬하고 종이를
들고 돌아왔다. 관계가 확실해지자 행동이 거리낌 없어진다.
"문제는 제가 만들테니 형은 가서 놀다오세요."
"너 심심하잖아. 같이 있어줄게."
"생각할때는 혼자 있는게 좋아요. 이참에 일주일치 문제 다 만들어볼테니까 형은 걱정말고 다녀오세요.
여랑 형이 기다리겠어요."
"혼자 있을 수 있겠어?"
"제가 어린애인가요? 졸려우면 잘테니 걱정 마세요."
"그럼 문 잠그고 있어. 내가 돌아오면 문을 두드릴테니까 내 목소리가 아니면 문 열지 말구."
"마치 떡 하나주면 안 잡아먹지~ 에 나오는 달님이 된 기분이에요."
"잘 아네. 그럼 이 달님씨. 다녀올테니까 쉬고 있어. 나 올때까지 밖으로 나오지 말고. 알겠지?"
"형 안녕~"
산장에서보다 확실히 애교가 많아진 승현이었다.
이불속을 뒹구는 모습이나 품에 매달려 이것저것 이야기 하는 모습. 때로는 아이큐가 의심될 정도로
멍청해보이면서도 빠져들정도로 진지한 눈을 가지고 있는 아이.
지용은 비스듬히 누워서 자신에게 손을 흔드는 승현이에게 같이 손을 흔들어주며 자신의 선택이 절대
잘못되지 않았다는 생각을 했다. 여전히 나진이 눈에 밟히긴 하지만 말이다.
"휴..."
지용이 밖으로 나가자 바닥에 납작하게 업드려버린 승현은 조금전과는 어울리지 않는 심각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더이상 열은 오르지 않았지만 여전히 머릿속은 이생각 저생각으로 복잡했다.
무엇보다 가장 신경쓰이는것이 나진의 존재. 두번째가 대양과 영원의 진실.
-영원이의 말이 진실이면 여랑 형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거고.. 여랑 형의 말이 진실이면 두 사람이
-거짓말을 했다는 소리인데.. 아무리 꿈이라고 생각하려 애써도 분명 꿈은 아니었어..
-두 사람 다 거짓을 말할 이유가 없는데.. 정말 내가 착각하는걸까?
-만약 여랑 형의 말이 진실이라면 두 사람은 어떻게 안으로 들어온거지?
지용은 좁은 조약돌 길을 지나 안으로 쭉 걸어들어갔다.
신비스러운 느낌의 온천이 모습을 드러내자 훈훈한 열기와 함께 향긋한 풀 냄새가 났다.
사람들이 이 민박을 탐내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 온천때문이 아닐까 라는 생각에 웃음이 났다.
아지랑이처럼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 사이로 언뜻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지용은 확인도 안해보고 손을 흔들며 여랑의 이름을 불렀다. 당연히 여랑과 하루라고 생각했다.
"여랑씨. 제가 좀 늦었죠? 승현이가..."
하지만 그는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그곳에 앉아있는 사람이 여랑과 하루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짧은 머리를 한 남자는 아스카였고 긴 머리를 묶어 올린건 하루가 아니라 나진이었다.
승현은 걸음을 멈추고 우두커니 서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지용의 등장을 모르는건지
아는데도 모르는척 하는건지 돌아볼 생각도 하지 않고 열심히 대화중이었다.
약간의 거리가 있어서 정확히는 보이지 않았지만 아스카의 무릎 위에 나진이 올라앉아있고 아스카가
뒤에서 그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머리를 쓸어내리고 있는 다정스러운 모습이었다.
지용은 가슴이 콕콕 쑤셔옴을 느꼈다.
온천의 열기 만큼이나 뜨거운 무언가가 위로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내가 승현을 선택했을때 나진 형의 기분도 이랬을까.. 아니.. 오히려 그 이상이었을테지..
마음을 다잡고 있었지만 예전의 애인이 다른 사람과 즐겁게 앉아있는 모습은 왠지 가슴 아팠다.
좋게 끝난 사이었으면 축하라도 해주련만 그렇지 못했기에 아픔은 심했다.
머리는 계속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는데도 발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들의 모습이 꼭 죄 많은 자신을 질책하는것 같아 저릿한 죄책감이 들었다.
"좋은 냄새가 나. 물 온도도 적당하고 깨끗해서 나른한 느낌이 들어."
"이곳을 떠난 뒤에도 생각나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고마워~"
재회 후 처음으로 나진의 밝은 목소리를 들은 지용은 쓰디쓴 입술을 축이며 고개를 숙였다.
그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그 상대가 아스카인 것은 영 내키지 않았다.
그때. 나진이 살짝 고개를 돌리더니 두 팔로 아스카의 목을 감싸안았다. 작은 핀으로 고정해놓은
긴 머리가 스르르 풀림과 동시에 두 사람의 얼굴이 밀착되었다.
그제서야 지용은 발걸음을 돌리고 급히 온천을 빠져나왔다. 못볼것을 본 기분이었다.
"안보입니다."
"잘 보라니까? 눈썹이 들어간게 분명해. 너무 따가워.. 어떻게 좀 해 봐."
"눈썹이 긴 사람은 이래서 고생이군요?"
"아프다.."
"머리가 풀어졌네요. 젖으면 감기걸리니 다시 묶으세요."
방으로 들어선 지용은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문도 잠그지 않고 엎드려서 무언가를 열심히 적던 승현은 그의 등장에 밝게 웃으며 바로 누워 두 팔을
벌렸다. 헤어진 사이라고 해도 감정이 정리가 안된 상태에서 마주한다는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
절실히 느낀 지용은 승현을 꼭 끌어안으며 머릿속을 비우려고 애썼다.
승현은 그의 머릿카락을 잡아당기며 장난을 쳤다. 오히려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물구경만 하다 왔어요? 젖은 흔적이 없네요?"
"여랑씨가 바쁜 모양이더라구. 그냥 왔어."
"그랬구나~ 형! 내가 문제 몇개 만들어봤는데 마음에 드는걸로 골라봐요."
승현은 그에게 까만 글씨가 빽빽히 적힌 메모지 몇장을 불쑥 내밀었다.
흥미가 당겨서인지 지용은 그가 건낸 메모지를 꼼꼼히 훑어보며 자리에 누웠다.
"승현아. 역시 넌 머리가 좋구나? 컴퓨터 없이도 이런 문제를 만들고 말이야."
"아하하.. 쑥스러워라.."
"그런데 글씨는 왜 이래? 천재는 악필이라는 소문이 맞는건가?"
"누워서 썼기 때문이에요! 책상에 앉아 제대로 쓰면... 콜록.. 콜록.."
솔직히 승현도 자신이 글씨를 못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용이 직접적으로 놀리듯 말하자
기분이 상했는지 흥분하며 소리질렀다. 덕분에 간질거리던 목에 무리가 생겨 마른 기침이 튀어나왔다.
지용은 흥분하는 승현을 보며 큰 소리로 웃더니 그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오늘 문제는 이것으로 하자. 마음에 들었어."
지용은 여러장의 메모지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한장을 뽑아 주머니에 찔러넣고 눈을 감았다.
게임 시간이 될때까지 잠시 눈을 붙이려는 생각이었다.
승현은 이불을 어깨에 뒤집어쓰고 턱을 괸채로 지용을 내려다보았다.
-아직 잊지 못한건 알아..하지만 그렇다 해도 날 선택하게 만들거야. 아무한테도 안 줘..
그렇게 정오가 훌쩍 지나가고 어느덧 오후 세시를 알리는 자명종이 울려퍼졌다.
"다 모인것 같으니 시작할게요. 어제 한번 해봤으니 다른 설명은 필요없겠죠?"
약속시간이 되자 다들 별채로 모여들었다.
첫날과 같이 여랑이 쪽지를 모아서 이름을 확인하고 모두에게 나누어주었다.
언제나처럼 밝은 모습의 해일과 하루는 종이를 서로 뺏기위해 안달을 하며 방으로 돌아갔고
여랑과 하루도 접혀져 있는 쪽지를 펼쳐들어 내용을 눈으로 훑어가며 방을 나섰다.
하지만 나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문제를 받으러 온 사람은 아스카 뿐이었다.
지용은 자리를 뜨지 않고 문제를 읽고 있는 아스카를 바라보며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그 역시 승현을 동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 말없이 조용히 방을 나서려던 참이었다.
그순간 고개도 돌리지 않고 자신을 향해 질문을 던지는 아스카의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생각보다 두분도 머리가 좋은가보군요? 문제 흥미있게 풀겠습니다."
지용은 아스카가 나진과 아무 사이도 아니라면 자신에게 필요 이상의 경계심을 가질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대꾸도 하지 않고 방문을 나섰다.
역시 같은 공간에 서 있기엔 무리가 있어보이는 두 사람이었다.
-여랑 + 단 하루-
이것은 행복을 부르고 재액을 쫓는 종교적 의미가 시초이며 문화가 발달하여 미적 감각이 증가하면서
감상의 목적으로 변화하였다. 고대 이집트나 그리스, 로마, 멕시코의 유타칸반도 등지에서는 이것을
어린아이 묘에 같이 묻는 풍습이 있었고 오스트리아에서는 예로부터 병이나 죽음을 기원하는 흑마술의
도구로 사용하였다. 이것을 제작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으며 다양한 재료가 사용된다.
나무를 깎아서 형태를 만들거나 종이나 양가죽, 솜, 헝겁, 흙 등을 사용하기도 한다.
-아스카 + 송 나진-
저는 4층짜리 빌라에서 살고 있습니다.
오래되고 낡았지만 손때가 가득 묻어있는 소중한 보금자리 입니다.
1층은 부모님과 저의 집입니다. 4개의 층 중 가장 쾌적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으며 특별히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덥거나 춥지 않아 생활하기에 가장 적절합니다.
습한 편이긴 하지만 지상과 가까워 눈이나 비를 쉽게 피할 수 있으며 안개가 자욱한 날에는 꿈속을
걷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 일으키기도 합니다.
2층은 결혼한지 3개월도 채 안된 신혼 부부의 집입니다. 1층과는 달리 후덥지근한 편이며 시끄러운
3층 아이들 덕분에 적지않은 방해를 받고 있습니다. 2층이 빈집이었을때는 3층의 소음이 1층까지
내려왔었는데 지금은 잘 들리지 않아 저희로썬 고마울 따름입니다.
3층은 개구쟁이 쌍둥이의 집입니다. 서늘한 편이어서 더운 여름날에도 에어컨이 필요없습니다.
이 집은 베란다에 두꺼운 커튼이 쳐져있습니다. 그래서 안에 있으면 비가 오는지 눈이 오는지 맑은지
알수가 없습니다. 쌍둥이 엄마 취향이 참 독특한것 같습니다. 집안은 건조한 편입니다.
4층은 몇년째 비어있습니다. 천장의 두깨가 얇아 한낮에는 찔듯이 덥고 밤에는 이가 떨릴정도로
춥기 때문입니다. 혼자있고 싶을때 올라가 잠을 자기도 하는데 가끔 도깨비불이 나타나 기절할뻔한
적도 있습니다. 다시 생각해보면 도깨비불 치고는 너무나 아름다운 오색빛이었지만요. 하하..
저는 오늘 하늘을 나는 비행기의 사진을 찍으려고 합니다. 몇층에서 찍어야 가장 선명하게 찍힐까요?
-이 해일 + 신 호수-
기원전부터 인류가 사용해온 이것은 로마제국을 멸망으로 몰고간 원인이기도 했다.
체광이나 정련, 성형이 용이하여 로마에서는 수도관을 비롯한 식기, 화장품, 가구, 화폐, 심지어는
관을 만드는데도 이것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 후 로마는 세대가 교체될때마다 인구수가 4분의 1로
감소하는 이상현상을 보이며 빠르게 쇠멸하였다. 오늘날에는 이것의 위험함을 잘 인식하고 사용을
제한하고 있지만 고대 중국에서는 5색금중 하나로 여길만큼 귀한것이었다.
5색금은 황금, 백금, 흑금, 적금, 청금의 5가지로 이것은 청금에 해당된다.
-권 지용 + 이 승현-
4명의 친구가 있었다.
*A - 남아프리카 출신. 템부족 족장 아들. 시위의 주동자 역활을 하다 대학에서 퇴학당함.
청년연맹 창설. 실용주의 사상 옹호. 종신형을 받고 27년간 복역
*B - 오스트리아 출신. 예술가와 건축가의 꿈이 있었지만 좌절. 채식주의자. 담배와 술을 전혀 못함
인종의 우열이 있다고 굳게 믿고 있음. 결혼한 다음날 자살.
*C - 독일 출신. 목사의 아들로 피아노에 재능이 있었음.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로 신학자, 철학가
음악가, 의사 등의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있음. 세계대전 당시 전쟁포로로 억류되기도 함.
*D - 유고슬라비아 출신. 인도에서 선교활동했으며 가톨릭신자로 흰두교인들과의 심한 대립.
심한 심장병을 앓고 있음. 사생아와 미혼모에 관심을 갖고 입양운동을 함.
네명의 친구 가운데 공통점이 없는 친구가 하나 있다. 이유는 다른 친구들이 모두 손에 넣은 무엇이
없기 때문이다. 한 사람을 제외한 전원이 손에 넣은 무엇의 이름을 맞추시오.
"역시 머리가 좋네. 이사람들.."
"처음부터 우리끼리 할 것을 내가 괜한 짓을 한건가?"
"아냐. 오히려 자극이 되고 좋아. 이런 기분.. 정말 오랜만이야.."
"단 하루. 무리하지마.. 우리는 이곳에 너무 오래 있었어. 더 이상 미련 둘 필요 없잖아."
"미련을 갖는게 아냐. 순수한 마음으로 좋아하는것 뿐이야."
"집안 일 하느라 힘들지? 이리와서 좀 쉬어."
"싫어. 문제 풀거야."
"표정을 보아하니 잘 안풀리는게 있나본데 네 얼굴은 인상쓰면 안 어울려. 너무 차가워 보이잖아"
"나진씨의 문제를 도저히 모르겠어. 아니.. 문제 뿐만 아니라 나진씨 자체를 알 수가 없어. 사람을
보면 대충 성격을 파악할 수 있는데 그건 타인에게 약간의 틈을 보였기 때문이야. 하지만 나진씨는 달라.
전혀 틈이 없어. 얌전하고 약해보이는데 사실은 굉장히 강한 사람인것 같아."
"그건 나도 동감이야. 처음 볼때는 아스카씨가 더 차가운줄 알았는데 보면 볼수록 반대인것 같아.
마치 차갑게 김이 서려 깨지기 쉬운 유리같다고나 할까? 위태위태한 느낌이야."
여랑은 고개를 끄덕이며 하루가 들고 있는 문제 쪽지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가 옆으로 다가오자 하루는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눈을 감았다.
피곤하거나 깊이 신경 쓸때 자주 하는 행동이었다.
긴 머리가 볼을 타고 스르르 미끌어져내렸다. 빛을 반사한 머릿결이 섬뜩할 만큼 짙은 흑빛이었다.
"지식이 점점 고갈되어가는 느낌이야."
"당연하지. 벌써 5년째야. 이만큼 버틴것도 대단한거야."
"모르겠어. 4층짜리 아파트 문제.. 정말 모르겠어.."
"왜 그래? 모르는 문제는 과감히 넘겨. 너답지 않게 조바심을 내고 그래?"
"전에는 막히는 문제가 없었는데.. 요즘은 바보가 된 기분이야.. 분명 날씨나 온도와 관련이 있는데
내용이 형상화되지 않고 머릿속에서 흩어져버려. 도저히 집중할 수가 없어.."
"시간 많으니까 천천히 생각해보자. 피곤해서 그런거야"
"짜증이 나.."
하루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문제에 집착하자 여랑은 그를 품에 안으며 등을 어루만졌다.
얌전한 외모와는 다르게 엄청난 승부욕을 가지고 있는 하루는 매년 게임때마다 잠도 못자고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래서 사실 여랑은 게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하루가 쓸때없는 오기를 부리기
때문이다. 사실 그가 원하지만 않았다면 벌써 민박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갔을것이다.
여랑은 억지로 정답 종이를 빼앗고 하루를 이불위로 눕히며 작게 속삭였다.
그러자 강하게 저항하던 하루도 그의 속삭임을 듣고는 표정을 바꾸고 곧 잠잠해졌다.
"식기에도 이걸 썼다구? 그러니 멸망했지."
"너무 옛날이라 위험성을 느끼지 못했던 모양이야. 지금이야 모두들 잘 알고 피하지만 자급자족하던
과거에는 얻기 쉽고 다루기 편한것이 귀했을테니까."
"역시 인류의 멸망은 작은것에서부터 비롯되는군요. 지금 태어난게 다행이라고 해야할까요?"
"글쎄.. 어디서 태어났느냐가 중요했겠지. 만약 고려나 조선에서 태어났다면 너와 내가 만날 수
없었을테니까. 만났다 하더라도 사랑을 나눌 수 없었겠지."
"그나저나 화장품에도 사용했다니.. 얼굴이 너무 불쌍하네요. 큭큭.."
승현은 문제를 풀면서 뭐가 그리 좋은지 혼자 배를 잡고 깔깔거렸다.
그는 감기가 걸렸다는 핑계로 절대 이불밖으로 나오지 않았다.지용이 상전이라고 놀렸음에도 끝까지
이불을 사수하며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것으로 보아 머리는 좋아도 아직 어린 애였다.
"나진씨 문제.. 정말 짜증이네요."
"왜?"
"답을 알아내긴 했는데 이걸 어떻게 풀라고 만든건지 모르겠어요."
"원래 그랬어. 문제를 하나 만들어도 엄청 신경을 쓰는 편이지."
"마음에 안들어.."
지용이 나진에 대해 이야기 하자 기분이 상한 승현은 입을 삐죽거리며 손톱을 물어뜯었다.
쉽게 잊을 수 없을거란걸 알면서도 은근슬쩍 치밀어오르는 질투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였다.
단번에 세문제를 모두 풀어버린 승현은 다음 문제를 수정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갑자기 손으로
바닥을 치며 몸을 일으켰다. 동시에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있던 지용이 놀라 들고있던 펜을 떨어뜨렸다.
"깜짝이야.. 그림 망쳤잖아.."
"형. 우리 문제 맞추지 말아요."
"다 풀었잖아?"
"답을 쓰지 말고 벌칙을 받아요."
"왜?"
"갑자기 궁금해졌어요. 벌칙을 받는 장소가..."
"단순한 담력 훈련이라잖아. 그냥 산길이겠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걸로 봐서 단순한 산은 아닌것 같아요. 한번 가보고 싶어요."
"이기고 싶다면서? 문제를 맞추지 않으면 우리가 불리해져."
"문제의 난이도를 봐서는 크게 차이 나지 않을거에요. 장담컨데 아무도 나진씨의 문제 못맞춰요.
많이 맞춰봤자 두개가 한계라는 뜻이죠. 그러니 나진씨가 3문제를 맞춘다고 해도 2문제밖에 차이나지
않아요. 그정도면 남은 기간동안 충분히 따라잡을수 있어요."
"문제를 맞추지 말자며? 그런데 어떻게 두문제 차이야? 세문제 차이지"
"나진씨의 문제는 맞춰야죠! 빈 답안지를 낸다는건 자존심이 허락하질 않아요. 그러니 가장 어려운
문제를 하나 맞춰서 점수를 적게 내는 거에요. 어때요?"
"감기 걸렸으면서 어떻게 가겠다는거야?"
"괜찮아요. 갈수 있어요."
"또 고집 피운다."
"사실 마음에 걸려서 그래요. 형도 들었잖아요. 대양 형과 영원이 오지 않았었다는말.. 하루종일
생각해봤지만 도저히 꿈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어요."
"네 말뜻은 알겠는데 대양씨와 벌칙이 무슨 관계가 있다는거지?"
"그냥 느낌이에요. 왠지 그곳에 가면 뭔가 있을것 같아요. 대양 형은 2년동안 게임에 참가했으니
한번쯤은 벌칙을 받아봤을거 아니에요? 이 집에서 안좋은 느낌이 난다고 했어요. 분명 이유가
있을거에요. 내 말대로 해요. 네?"
"내가 네 고집을 어떻게 당하겠어? 하지만 감기 더 심해지면 혼난다?"
"네!"
지용의 허락이 떨어지자 승현은 잽싸게 나진의 문제에 답을 써넣고 쪽지를 접어 구석에 아무렇게나
던져버렸다. 한번 마음을 먹으니 시간이 더디다고 생각될만큼 지루하게 느껴졌다.
그 시각 나진과 아스카는 문제를 다 풀고 다음 문제를 고민하고 있었으며 해일과 호수는 모르는 문제는
멀찌감치 밀어두고 신나게 장난을 치며 놀고 있었다.
그렇게 각자의 시간을 보내던 사람들은 저녁이 되어 식사를 하고 여랑과 하루를 거들어 집안일을
도운 다음 다시 별채로 모였다. 승현의 예상대로 다들 나진의 문제는 포기한 모양이었다.
하루가 쪽지를 모두 모아 바구니에 넣고 정답을 설명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언제나 첫번째는 하루였다. 그것은 매회를 거듭해도 변함이 없다.
"종교적인 의미를 담고 있으며 감상용으로 사용되는 것. 답은 인형입니다. 고대 이집트나 멕시코등
여러나라에서 인형을 놀이감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후 세계를 굳게 믿고 있었기에
어린 아이가 죽으면 길동무로 인형을 같이 묻어주었습니다. 또한 죽음을 기원하는 흑마술에도 인형이
쓰였는데 이것은 짚으로 만든 인형을 바늘로 찌르는 행위와 아주 흡사합니다. 이때 쓰인 인형을
부두 인형이라고 하죠. 인형의 종류는 여러가지가 있으며 쓰이는 재료도 아주 다양합니다. 나무를
깎아 관절을 만든 피노키오 같은 인형이나 몰드로 틀을 만들고 도자기처럼 구워내는 비스크 인형.
석고틀에 납을 녹여 붙고 유리눈을 끼워넣는 밀랍인형. 비가오기를 기원하며 헝겁과 솜으로 만든
기우제 인형 등이 있죠. 더 이상 설명 안해도 다들 아시겠죠?"
하루가 차분한 음성으로 문제 설명을 마치고 나진을 바라보았다.
다음 차례라는 뜻이었다.
나진은 하루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번 문제는 아파트에 관한 것입니다. 하지만 단순한 아파트의 설명이 아니라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우선 주인공이 사는 1층부터 설명드리겠습니다. 쾌적한 온도를 유지한다는것은 대류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차가운 공기가 아래로 내려가고 뜨거운 공기가 위로 올라가며 기온을
조절한다는 뜻이 되겠지요. 눈이나 비. 안개나 구름 등을 볼 수 있다는것은 기상현상이 일어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1층은 지상과 가장 가까운 지구의 대류권이 되겠습니다."
"아! 그런 뜻이었어요? 와.. 전혀 몰랐네요.."
"글을 자세히 보면 기온이나 기상현상에 대해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정답을 알려주는 가장 큰
힌트입니다. 2층은 1층에 비해 후덥지근하다고 했습니다. 높이가 올라감에 따라 기온이 상승하는
지구의 두번째 보호막. 성층권입니다. 3층의 소음은 자외선이고 2층은 오존층에 해당됩니다.
오존층이 자외선을 막아주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죠. 빈집이였을때는 1층까지 소음이 내려갔다라는
말은 오존층 파괴현상을 의미합니다. 3층은 대류권과 마찬가지로 높이 증가에 따라 기온이 감소하는
중간권입니다. 그래서 쌍둥이네집은 다른곳에 비해 서늘한 편이죠. 중간권은 대류현상이 일어나지만
수증기가 없기 때문에 기상현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쌍둥이네 엄마가 커튼으로 베란다를 가려놓았기
때문에 이 집에서는 눈이나 비 등의 기상현상을 볼 수 없습니다. 마지막 4층은 낮과 밤의 온도차가
매우 큰 열권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살고있지 않죠. 주인공이 도깨비불로 착각한 오색빛은 열권에서만
볼수 있는 오로라 입니다. 보기에 대해 다른 질문 있으신가요?"
"나진씨. 그럼 인공 위성은 4개의 층중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인공위성은 가장 바깥쪽인 열권에 있습니다. 대기가 안정되어있기 때문이죠."
"그렇군요."
"여랑씨 말고 질문 없으시면 답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주인공이 비행기 사진을 찍을때 가장 적절한
층을 물어보았죠? 사진은 가까히 있어야 선명하게 찍히는 법입니다. 비행기의 선로는 성층권입니다.
4개의 층 중에 대기가 안정되어 있는곳은 성층권과 열권입니다. 가끔 인공위성이 성층권에 있다고
착각하는 분들이 있는데 성층권은 비행기가 지나는 길이기 때문에 인공위성을 띄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선명한 비행기의 사진을 찍기에 가장 적합한 곳은 성층권에 해당하는 2층이 되겠습니다."
나진의 정답 설명이 끝나자 여랑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혀를 내둘렀다.
여지껏 수 많은 게임을 해왔지만 나진 같이 복잡한 문제를 내는 사람은 처음봤기 때문이다.
나진의 설명이 끝나자 머리를 긁적이던 해일이 말을 이어갔다.
"문제 수준차이가 너무 나는데요? 무섭습니다."
"나 슬슬 졸려운데 답 먼저 말하고 떠들지?"
"까탈스러운 호수씨의 요구로 빨리 답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 문제의 답은 납입니다.
고대 중국에서 귀하게 여기던 오색금은 황금, 백금, 흑금, 적금, 청금으로 황금은 말 그대로 금입니다.
백금은 은이고 흑금은 철, 적금은 구리이고 청금이 납입니다. 로마제국에서는 녹는점이 낮아 물건을
제작하기 좋은 납을 선호했는데 음식을 담아먹는 식기나 물이 흐르는 수도관에까지 납을 사용했기
때문에 납 중독이 되었던 겁니다. 그래서 결국 멸망하게 되었구요. 설명 간단하죠?"
"잘 했다. 쓰나미."
호수가 많이 피곤한지 하품을 하며 해일의 어깨를 두드렸다.
마지막은 간질거리는 목을 어루만지며 지용에게 기대어 앉아있던 승현이었다.
"4명의 친구가 있어요. 그들은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알수 있는 역사 속 인물들이죠. 친구 A 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태어난 세계인권운동의 상징 넬슨 만델라 대통령입니다. 그는 흑인인권운동을
하다 오랜세월동안 복역을 했음에도 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친구 B는 나치사상을 가지고 수 많은 유대인을 학살한 아돌프 히틀러입니다. 어릴적 예술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화가나 건축가의 꿈을 가지고 있었지만 좌절되었습니다. 인종의 우열이 있다고 믿어
열등종족들이 멸종해야한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매사에 우왕좌왕하고 고집이 있었으며 새벽녘에
잠들어 정오가 되어서야 일어나는 버릇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세계 2차대전을 일으킨 장본인이죠.
친구 C 는 인류를 위해 평생을 바친 슈바이처 박사입니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피아노에 재능이
있었으며 아프리카 구호활동을 하기 위해 의사의 길을 택했습니다. 자금을 모으기 위해 연주회를
할 정도로 음악적 감각이 뛰어났고 철학 박사 학위까지 가지고 있을 정도로 머리가 좋았다고 해요.
마지막 친구 D 는 빈자의 성녀로 추앙받아온 테레사 수녀입니다. 평생을 고통속에서 순결하게 살아오신
분이죠. 심장병이 있어서 많은 고통을 겪으셨다고 하네요."
"너도 나진씨랑 만만치 않다 야."
"호수형은 평범한 것처럼 말하기에요?"
"나는 그래도 너보단 나~ 빨리 답이나 말해봐"
"아.. 문제가 한사람만 손에 넣지 못한 무엇이였죠? 그 한사람은 말하지 않아도 히틀러인것을 다들
아실테고.. 답은 노벨 평화상입니다. 나머지 세분은 모두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셨어요."
정답이 모두 공개되자 하루는 쪽지를 모아 정답표를 만들었다.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는 자리는 언제나 긴장이 되기 마련이다.
*여랑 + 단 하루 = 납 . 노벨 평화상 (2문제)
*이 해일 + 신 호수 = 노벨 평화상 . 인형 (2문제)
*아스카 + 송 나진 = 인형 . 납 . 노벨 평화상 (3문제)
*권 지용 + 이 승현 = 2층(성층권) (1문제)
정답을 확인하던 하루는 지용과 승현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무도 맞추지 못한 성층권을 맞췄으면서 나머지 두 문제를 틀렸기 때문이다.
결과는 나진과 아스카가 일등으로 찬스를 획득하게 되었고 지용과 승현은 벌칙을 받게 되었다.
"두분 벌칙은 알고 계시죠?"
"네. 지금 다녀오면 됩니까?"
"승현이가 감기에 걸렸는데 괜찮겠어요?"
"괜찮아요. 이제 살만한걸요? 위치만 정확히 설명해주세요. 하루 형."
"아.. 그래.. 대문을 나서서 왼쪽으로 돌아 건물 뒤로 가세요. 그럼 오솔길이 하나 나오는데 그 길을
따라 올라가면 됩니다. 도착하면 제가 드리는 편지를 나무에 걸어두고 오시면 됩니다. 나무가 많지만
그 중 하나에만 종이가 많이 달려있으니 쉽게 찾을 수 있을거에요."
"그렇게만 하고 오면 됩니까?"
"네. 종이를 걸어두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면 됩니다. 출발하기 전에 편지 겉봉에 두분의 이름을
적어넣으세요. 내용은 절대 읽어선 안됩니다. 그건 나무에 걸려있는 다른 편지도 마찬가지에요."
"왜죠? 이유가 있나요?"
"게임의 룰이라고 해두죠. 아무튼 이것만 지켜주시면 됩니다. 별다른 어려움은 없어요."
"네. 알겠습니다. 지금 출발하죠."
지용은 챙겨온 점퍼를 승현이에게 입히고 함께 밖으로 걸어나갔다.
벌칙의 내용을 모르는 사람들은 다행반 걱정반인 심정으로 두사람을 배웅했다.
하지만 나진은 멀어지는 그들을 바라보며 엄지손톱을 깨물더니 아스카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지용이는 문제를 못푼게 아니야. 풀지 않은거지.."
"네?"
"나의 문제를 풀었다면 나머지 두문제를 절대 못풀리 없어. 그들은 일부러 문제를 맞추지 않은거야.
벌칙을 받기 위해서.. 점퍼를 챙겨왔지? 처음부터 문제를 맞출 생각이 없었던거야.."
"그게 사실이라면 이유가 뭘까요?"
"모르겠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건지.."
온 몸을 더듬는 바람의 칼날속에서 나진은 오로지 올곧게 원망하는 마음으로 잠시 멍한 눈이 되어
그들의 존재를 바라볼 뿐이었다.
-four-
"춥지?"
"안 추워요."
"이빨 부딪히는 소리가 나한테까지 들리는데 안 춥긴 뭐가 안추워?"
"심심해서 박자 맞추는거에요. 신경쓰지 마세요."
기침을 해가며 몸을 오들오들 떨고 있는게 눈에 훤히 보이는데도 승현은 끝까지 춥지 않다고 고집을
피웠다. 최근 들어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에게는 엄청난 고집이 있었다.
지용은 발걸음을 멈추고 무릎을 꿇고 앉아 등을 내보였다. 꽤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업혀."
"싫어요."
"셋 셀때까지 업히지 않으면 억지로 둘러매고 간다. 보쌈 당해볼래?"
"저 무거워요."
"네가 무거워봤자 얼마나 무겁다고 그래? 잔소리 말고 업혀라."
승현의 고집 못지 않게 지용의 고집 또한 만만치 않았다. 두 사람이 마음먹고 고집을 피운다면
틀림없이 박빙의 승부가 될 것이다. 승현은 기침을 억누르며 한참을 고민하다 못 이긴척 그의 등에
업혔다. 생각 이상으로 따뜻한 체온에 기분이 좋아지자 눈을 감고 그의 목에 얼굴을 부벼댔다.
"내일도 있고 모레도 있는데 하필 왜 오늘이야. 감기가 떨어질때까지는 방에서 얌전히 쉬면 좋잖아"
"왜 그런 느낌 있죠? 오늘 아니면 기회가 사라져버릴 것 같은.."
"기회?"
"사실 제가 약간의 신기가 있어요. 신내림을 대신 받는다는 말 아세요?"
"들어보긴 했어. 신을 대신 받을 사람이 있으면 가능하다구.."
"제가 그랬어요. 어릴때 신병을 앓았거든요. 음식도 못먹고 다 죽어가게 생겼는데도 어머니가 끝까지
신내림을 받을 수 없다고 버텼어요. 하나밖에 없는 아들 무당으로 만들 수 없다는게 이유였죠."
"신병이 왔는데 신 내림을 받지 않으면 몸이 아프다면서? 죽을 수도 있는거야?"
"절대 죽지 않아요. 자살을 해도 죽도록 두지 않는데요. 그저 죽을만큼 힘들게 하는거죠. 머리를
잡아당기는건 예사고 몸 여기저기 꼬집고 때리고 난리도 아니에요. 결국 보다못한 이모가 저 대신
신내림을 받으셨어요. 몸주가 있으면 모여든 신 중에 가장 힘이 센 주신이 자리를 잡게 되는데요
가끔 안 좋은 신이 들어오기도 한데요. 결국 이모 덕분에 신 내림을 피할 수는 있었지만 가끔
소름끼칠 정도로 앞날을 잘 맞출때가 있어요. 신기가 남아있는거죠. 그래서 이모가 정기적으로 산에
올라가 기도를 하세요. 그래야 제 신기를 누를 수 있다나봐요."
"그랬구나. 너도 참.."
"평범하진 않죠? 헤헤~"
"그래서 지금은 무슨 생각이 들어?"
"어제까지는 아무 생각이 없었어요. 오직 게임에서 이겨야겠다는 생각만 가득했죠. 하지만 대양형과
영원이를 만난 이후로 자꾸 이상한 느낌이 들어요. 그 느낌을 말로 표현하긴 힘들지만 막연하게
뒤끝이 남는 기분 있죠? 아무튼 이상해요. 이 민박집.. 뭔가 있어요."
자정이 가까워오는 시간임에도 하늘이 흐리고 달무리가 져 있었다. 겨울이 다가오는 시골의 밤 하늘은
맑지만 싸늘하고 깨끗하지만 음울했다. 오히려 너무 맑아서 섬뜩할 정도였다.
승현은 자신이 무거울까 계속 걱정하는 눈치였지만 지용에게 그는 그다지 무겁지 않았다.
여랑이 알려준대로 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온 것 같은데 좁은 오솔길은 끝이 없었다.
마치 목적지가 없는 일방통행길 같았다.
은근한 추위가 뼛속까지 파고들자 점점 몸이 떨려왔다. 바람에 귀가 빨갛게 얼어버리자 승현은
두 손으로 그의 귀를 감싸고 입김을 불어주었다. 그는 그마저도 못하게 업고 있는 승현을 이리저리
흔들어댔다. 의외로 즐기고 있는듯 했다.
"무서워요. 꼭 저승길 같잖아요. 끝이 보이지 않으니.."
"무섭긴 뭐가 무서워. 둘이 같이 있는데"
"사람들은 보통 산장처럼 막혀있는 공간에서 두려움을 느끼잖아요? 저는 조금 달라요. 오히려 산장에
있을때는 그렇게 무섭진 않았어요. 사람보다 귀신이 무서운건 저 뿐이겠죠?"
"어린 시절 그렇게 신병을 앓았으니 무서워하는게 당연하지. 걱정마.. 귀신이 나타나면 너의 전속
퇴마사가 되어줄테니까."
"그렇게 말하니까 소설 '퇴마록' 에 나오는 현암씨 같잖아요~ 사자후를 내지르고 탄자결을 사용해서
나를 지켜주는거에요? 현암씨.. 소설에서였지만 내 이상형이었는데"
"이상형은 뭐가 이상형이야!"
"와아악!"
승현이 현암을 떠올리며 히죽거리자 장난기가 발동한 지용은 그의 다리를 꽉 움켜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울퉁불퉁한 돌과 나뭇가지에 몸이 휘청거리자 기겁한 승현은 눈을 감고 비명을 질러댔다.
의외로 겁이 많은 모양이었다.
민박을 나와서 30분 넘게 비탈길을 오르자 담력훈련 장소로 추정되는 분지가 나타났다.
온통 나무로 둘러싸여 하나의 길로만 통하는 그곳은 민박집에 있는 노천온천과 다를 바 없는 구조였다.
보통 산 속의 분지라 하면 약초, 버섯재배를 하거나 녹차밭 같이 푸르고 아늑한 곳을 떠올리기 마련인데
역시 현실은 달랐다. 그들이 어느정도 예상한대로 그곳은 공동 묘(墓)였다.
지용은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고르며 승현을 조심히 바닥에 내려놓았다. 등 위에서 하도 발버둥을
쳐서 그런지 달려온 그보다 업혀있던 승현의 얼굴이 더 힘들어보였다.
"환자를 업고 산길을 질주하는 사람이 어디있어요!"
"여기 있잖아 승현양."
"한번만 더 승현양이라고 부르면.. 삐뚤어져버리겠어요.."
"그동안 너무 바른 모습만 보여줬어. 살짝 삐뚤어지는건 귀여울것 같으니 눈 감아줄게."
"헉.."
승현의 삐뚤어지겠다는 표현은 조금 의외였다. 역시 사람을 잘 만나야 한다더니 그 말이 맞는것 같다.
지용과 잠시 헤어져 있던 3개월의 공백동안에 그는 어릴때부터 친했던 형의 면회를 다녀온 적이
있다. 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친구와 엉뚱한 병사 하나에게 물들어 살짝 핀이 나가있는 상태었다.
그는 말로만 툴툴거렸지 몸은 지용에게 바짝 붙어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사방이 무성한 나무로 둘러싸여 있다보니 추위는 오히려 덜한 것 같았다.
지용은 눈을 가늘게 뜨고 한참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여랑이 일러준 나무를 발견했다.
그의 말처럼 그 나무에만 여러가지 색의 종이가 대롱대롱 메달려있었다.
"매달고 내려가기만 하면 되는건가?"
"여기 왠지 으스스한데요?"
"벌칙은 벌칙이네. 담력훈련이라기보다는 편지 하나 매달려고 산 길을 30분 이상 걸어온 노가다.
왕복 한시간이 넘는 거리잖아. 그나저나 몸은 어때? 어지럽거나 속이 메스껍진 않아?"
"괜찮아요. 추워서 코 끝이 찡한것 빼고는.. 와앗!"
혼잣말을 하듯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던 승현이 갑자기 몸의 중심을 잃더니 바닥으로 꼬꾸라지고
말았다. 바닥을 살피지 않고 계속 왔다갔다거리다 툭 튀어나와 있는 나무 뿌리에 걸린것이다.
"아으.. "
"조심 좀 하지. 내 손 잡고 일어나"
"어? 형! 저것 좀 봐요!"
팔꿈치를 잡고 인상을 찌푸리던 승현이 갑자기 흥분한 목소리로 지용을 불렀다.
주머니에서 편지를 꺼내 나무에 매달고 있던 지용은 들고 있던 편지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허공을 가리키는 손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약간 거리가 있는 곳에 희미한
빛을 내는 하얀 물체가 있었다. 둘 다 눈이 좋은 편이었지만 어둠으로 가득한 산에서는 그 시력을 제대로
활용할 수 없었다. 지용은 넘어진 채 일어날 생각을 안하는 승현을 강제로 번쩍 일으킨 다음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나갔다. 궁금한건 도저히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해골이잖아?"
"뭐야 정말.. 이런거 싫다.."
"형태가 흐트러짐이 없어. 마치 두 사람이 끌어안고 있는것 같아"
"인이 연소되고 있나보네요. 인광이 나는걸 보니."
"묘지에 해골이 있는게 당연하지만 이렇게 방치되어 있는건 조금 이상하지?"
"많이 이상하죠! 아무도 이들의 죽음을 몰랐거나 알고도 방치했다는 결론이 나오잖아요."
"흠.."
지용은 허리를 숙여 손가락으로 뼈를 만져보았다. 뼈는 단면적이 매끈하고 부드러울줄 알았는데
의외로 거칠고 울퉁불퉁했다. 승현은 그의 행동에 기겁하며 팔을 잡아끌었다.
말로 하지는 않았지만 빨리 돌아가자는 뜻인 것 같았다.
그들은 찝찝한 기분을 털어내지 못하고 다시 편지가 매달려있는 나무로 돌아왔다.
땅으로 떨어진 편지가 바람에 날려 보이지 않았다.
"편지 떨어뜨렸는데 날아갔나보다. 찾아보자"
얼어버린 손에 입김을 불어가며 어두운 바닥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을때였다.
한차례 싸늘한 바람이 불어오더니 웅웅거리는 기분 나쁜 소리가 들려왔다.
[나의 땅을 밟지 마라.. ]
"응?"
"형.. 들었어요?"
"네가 말했어?"
"전.. 입 다물고 아무말 안했어요.."
"들었어.. 사람 목소리.."
[나의 땅을 밟지 마라.. ]
"헉.."
"안되겠다. 빨리 편지를 매달고 내려가자"
환청이라고 여기기엔 너무나 또렷한 소리가 들려왔다. 바람이 멈추자 맴돌던 소리도 같이 멈췄다.
승현이 필요 이상으로 무서워하자 지용은 서둘러 편지를 찾기 시작했다.
귀신 따위를 믿지 않는 그였지만 안좋은 기분이 든건 사실이었다.
편지는 나무에서 한참 떨어진 풀숲으로 날아가있었다. 어렵사리 편지를 찾아든 지용은 서둘러 나무로
돌아가 뾰족한 나뭇가지에 아무렇게나 푹 꽂아버리고 승현을 재촉했다.
"내려가자."
"저 편지.. 읽어보고 싶어요."
"읽긴 뭘 읽어. 하지 말라는건 안하는게 좋아."
"읽어봐요. 그냥 몇개만 읽어봐요"
승현이 또 다시 고집을 피우기 시작했다. 지용은 그의 고집을 꺾지 못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꺾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승현이 목숨을 걸고 자신을 구해준 이후로 더욱 심해졌다.
그리고 그도 내심 편지의 내용이 궁금하던 참이었다. 못 이긴척 나무에 매달린 편지를 뽑아들고
개봉한 티가 나지않게 살짝 뜯었다. 열어볼 걸 예상이라도 한듯 밀봉되어있지 않았다.
"생사의 기로에 놓인 자들에게 숨 막히는 공포가 엄습해왔다. 라고 씌여있는데?"
"그것뿐이에요?"
"그래. 한줄뿐이야."
"어? 이것보세요. 여랑형과 하루형의 이름이 씌여진 편지가 있어요."
지용이 말릴 틈도 없이 승현은 나무에 매달린 편지 중 하나를 뽑아들고 안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의 말대로 편지봉투에는 살짝 번진 글씨로 -여 랑. 단 하루- 라고 씌여져 있었다.
글씨가 번진 이유는 아마도 비를 맞았기 때문이리라.
"옷의 가장자리에는 신부가 밤새워 수 놓은 금색의 문양들로 장식되어 있었고"
"그게 끝이야?"
"네."
"이왕 열어 본 김에 다른것도 살펴보자"
앞 뒤가 맞지 않는 편지의 내용이 궁금했던 그들은 어둠속에서 눈을 억지로 부릅떠가며 아는 사람의
이름을 찾기 시작했다. 많은 편지를 살펴본 결과 여랑과 하루의 편지 두개와 대양과 영원의 편지
두개를 더 찾아낼 수 있었다.
[여 랑 + 단 하루 - 거대한 파도의 입 속으로 휩쓸려 버릴 것만 같은 작은 배 한 척]
[오 대양 + 진 영원 - 향기 짙은 꽃으로 장식되어 있는 새하얀 비단길 위로 부케를 든 신부가]
[여 랑 + 단 하루 - 용서하겠다고 한 마디만 해줘. 네가 그렇게만 말해준다면]
[오 대양 + 진 영원 - 내가 말했잖아. 너의 머리조차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날거라고]
"일주일동안 벌칙을 받은 사람의 편지를 모두 합치면 하나의 글이 될 것 같은데요?"
"글?"
"겉봉에 날짜가 없어서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잘 보세요. 처음 발견한 여랑형의 편지에 신부가 옷에
수를 놓았다고 씌여있고 대양형의 편지에 부케를 든 신부의 입장이 씌여있잖아요. 두 팀은 2년동안이나
같이 게임을 했으니 한 게임당 한번쯤은 벌칙을 받으러 올라오지 않았겠어요?"
"듣고 보니 그렇네. 그럼 결혼식에 대해 쓴 편지가 같은 게임에서 나온 편지인가?"
"그런것 같아요. 편지를 읽지 말라면서 풀이나 테이프로 붙여 놓지 않은게 더 이상하잖아요.
사실 누가 안 읽었겠어요? 하지말라면 더 하고 싶은게 사람의 마음인데.."
그들은 편지를 들여다보며 잠시 대화하다 문득 모르는 이들의 편지가 궁금해졌다.
지용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다 제일 낮게 달려있는 편지 하나를 집어들었다.
[홍 태곤 + 김 주석 - 피워놓은 모닥불의 불꽃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밤 하늘은 빛의 날개를 가진
나비들의 축제였다.]
"역시 네 말이 맞나보다."
"그렇죠?"
"읽어보지 말라는걸 읽어봐서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별거 아님을 확인했으니 그만 내려가자. 이대로
있다가 감기 더 심해지겠다. 편지는 제자리에 걸어뒀으니 괜찮을거야."
"네. 이제 돌아가서 좀 쉬고 싶어요. 살짝 배도 고프네요"
"업혀"
"괜찮아요. 내리막이잖아요."
"다리 아플까봐 업히라는거 아냐. 추운데 불편하게 안고 내려갈순 없잖아. 잔소리 말고 업혀"
"업히는거 왠지 창피한데.."
바스락-
어둠안에서는 본능적으로 감각이 예민해진다.
멀찌감치 떨어진 풀숲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자 업히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우던 승현이 갑자기
입을 다물고 눈을 비벼댔다. 잠시 사방이 조용해졌다.
"형.."
"왜 그래?"
"미치겠어요.. 나 무서워요.."
"응?"
"방금 영원이를 본 것 같아요..이곳에서 영원이를 봤다는게 말이 안되잖아요.."
"잘못봤겠지."
"하지만 정말 봤단 말이에요.."
"어서 내려가자. 감기가 아직 안떨어졌나보다. 헛것을 보는걸 보니."
그의 말대로 평소의 승현답지 않았다. 열에 들떠 하얗게 질려 있었다.
지용은 계속해서 눈을 비비고 있는 승현을 강제로 등에 업고 빠른 걸음으로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중간쯤 내려왔을때 등 뒤로 어렴풋이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늘을 울렸다고 하는게 정확한 표현이었고 그것은 폭죽 또는 총성의 소리와 흡사했다.
빠르게 산을 내려온 그들은 민박으로 돌아가 여랑이 끓여주는 따뜻한 차를 마시고 긴장을 풀었다.
두 사람이 돌아올때까지 아무도 잠들지 않고 깨어있었다. 다들 결과가 궁금한 모양이었지만 규칙상
묻지 못하고 수고했다는 말을 남긴 채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옷을 갈아입고 따뜻한 이불속으로 들어가자 몸이 나른해졌다. 승현은 배고프다고 했던 것도 잊은 채
정신없이 잠으로 빠져들었다. 그의 상태를 지켜보던 지용도 잠시 천장을 바라보다 곧 잠이 들었다.
"나진씨는 오늘도 안보이네요? 정말 아침을 안먹나봐요?"
"원래 음식을 잘 안먹습니다."
"그러니 기운을 못차리는거에요. 밥은 꼬박꼬박 먹어야하는데.."
"식욕을 돋구는 약이라도 먹여야지 안되겠습니다"
아침 시간이 되자 모두들 식당으로 모여들었다. 늘 침묵을 지키던 아스카가 왠일인지 오늘따라
여랑이 묻는 말에 대답을 하며 대화에 동참하고 있었다.
식탁이 차려지고 모두가 수저를 들자 하루는 컵에 물을 따라 식탁 위로 올리며 신경질을 냈다.
그의 행동에 밥을 먹던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오늘 장 봐야하는데 안가겠다구?"
"미안. 지붕 보수를 해야한다길래 도와주겠다고 약속을.."
"네가 이 마을 해결사야? 왜 맨날 연장들고 이집 저집 방문하는건데?"
하루가 화를 내는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외진 시골에서는 장보는 일이 여간 힘든게 아니다.
그래서 날을 잡아 일주일에 한번씩 읍내로 나가는데 여랑이 보수를 핑계로 발뺌을 했기 때문이다.
그는 물건을 만들거나 고치는 일에 능하다. 그리고 천성이 남을 돕는것을 좋아한다.
몸을 움직이는 것을 즐기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과도 친분이 깊었다.
덕분에 하루가 심술을 부리는 일이 잦아졌다. 자신의 애인이 보수도 없는 일터로 나가는 것을
어느 누가 좋아하겠는가. 단단히 화가 난 하루가 젓가락을 들어 밥을 쿡쿡 찔러대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승현이 턱을 괴고 웃으며 말했다.
"하루 형. 장 보러갈때 걸어가나요?
"아니. 거리가 멀기 때문에 차를 타고 가. 걸어가는 건 무리야"
"그럼 저랑 같이가요. 바람이나 쐴겸"
"정말?"
"네. 제가 이래뵈도 졸졸 따라다니는거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해요"
"풉.. 지용씨. 승현이가 저와 같이 가겠다는데 허락해주실래요?"
"제가 허락하지 않아도 분명 따라갈겁니다. 다녀오세요"
"고마워요. 그럼 점심때까지 승현이 좀 빌릴께요"
지용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기분이 좋아진 하루는 젓가락을 입술에 붙인 채 씨익 웃어보였다.
무표정한 얼굴도 매력있지만 웃을때 보이는 가지런한 치아가 예쁜 사람이었다.
식사를 마치자 하루는 여랑에게 뒷 정리를 맡긴 채 외출준비를 했다.
승현은 여랑의 목도리를 빌려 칭칭 감아 무장 하고 하루를 따라나섰다.
늦은 가을이라지만 도시와는 추위의 차원이 달랐다. 더구나 비가 오려는지 태양 빛이 흐렸다.
차는 민박과 조금 떨어져 있는 공터에 주차 되어있었다.
마을 공동 주차장인지 하루의 차 말고도 여러대가 가지런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
경쾌한 시동소리와 함께 차가 출발하자 승현은 기쁜듯 창에 얼굴을 바짝 붙이고 눈을 굴렸다.
"형. 이곳에도 5일장이라는게 열리나요?"
"그렇지. 아무래도 촌이니까"
"신기하다. 아직도 5일장이 열리는구나~"
"추운 날에는 상인들이 잘 안나와. 읍내에 큰 마트가 있기 때문에 상관없지만"
"재미있겠다"
부푼 가슴을 안고 마트에 도착한 승현은 탄성을 지르며 앞으로 뛰어나갔다.
하루를 따라다니며 카트를 밀어도 모자랄 판에 그는 어마어마한 양의 음식과 생활용품을 보며
흥분하고 있었다. 기특하게도 하루를 걱정하며 따라나선 초기의 다짐은 망각한지 오래다.
반찬거리나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인스턴트조차도 그에 눈에서 외면당해 있었다.
목표는 오로지 과자.
"형 오늘 저녁밥으로 이걸 먹어요."
자꾸만 손이 가 결국은 손을 잘라버린다던 새우깡이였다.
"형 우리 내일 아침에는 이걸 먹어요. 우유랑 같이 드시면 더욱 맛이 좋습니다.. 라고 쓰여 있네요."
호랑이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던 전설의 콘 프로스트였다.
승현의 얌전하고 영리한 모습만을 봐왔던 하루는 그를 데리고 온 것을 절실히 후회하며 서둘러
필요한 물건들을 담기 시작했다. 과자를 끌어 안고 놓지 않는 승현을 달래서 겨우 계산을 한 다음
차의 시동을 걸고 다시 마을로 되돌아왔다.
도착해 주차를 하고 내릴때까지도 승현은 과자 뒷면에 적힌 설명서에 열중하고 있었다.
"형. 우리 슈퍼에 들러서 아이스크림 사가요."
"너 감기 걸렸잖아? 감기 걸렸을때 찬거 먹으면 안되"
"하나만 먹을께요. 금단현상이 일어날 것만 같아요."
"뭐?"
승현은 아이스크림을 아주 좋아했다. 산장에 있을때도 밥 대신 아이스크림으로 배를 채울 정도였다.
하루는 그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마을 어귀에 있는 작은 슈퍼로 향했다.
말이 좋아 슈퍼지 규모는 동네 구멍가게 수준이었다.
그는 사는 김에 민박에 있는 사람들의 몫까지 넉넉히 사서 계산대 위에 올려놓았다.
"얼마에요?"
"네?"
"이렇게 다 해서 얼마인가요?"
"..................."
처음부터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다. 주인이 바뀌어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인에게 별 관심이 없는 하루는 주인이 잠시 자리를 비워 대신 봐주는거겠지.. 라고 생각하며
가볍게 넘겼었다. 가격을 물어도 대답이 없자 승현이 들고 있던 비닐봉지를 내려놓고 가까히 다가섰다.
바로 그때였다. 역겨울만치 지독한 스킨향이 풍기는가 싶더니 낯선 남자 두명이 나타났다.
위험을 느낀 하루와 승현은 뒷걸음질치며 입구로 향했지만 어느샌가 계산대에 앉아있던
남자가 문을 가로막고 서있었다. 심장이 미친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왠 떡이야?"
"그러게. 오늘 운수 대통인데?"
"안으로 데리고 가"
입구를 가로막은 남자가 명령하자 뒤에 서 있던 두명이 하루와 승현을 입의 틀어막고 안으로 잡아끌기
시작했다. 당황한 승현이 몸을 숙여 발버둥쳤지만 남자의 강한 힘에는 역부족이었다.
하루는 팔꿈치를 들어 자신을 잡고 있는 남자의 복부를 힘껏 후려쳤지만 문 앞에 서 있던 남자에게
뺨을 맞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졸지에 납치극이 벌어졌다.
-밥 대신 우유 먹을게. 사다줄래?
아스카는 끼니를 거른 나진을 위해 우유를 사러가는 길이었다. 밥을 먹으려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차갑게 부는 바람을 고스란히 맞으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담배 냄새나네? 오래 살고 싶으면 끊어.
몇 모금 빨지도 않았는데 문득 나진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밤마다 담배를 한대씩 피우고 돌아오면
늘 그가 버릇적으로 하는 말이었다. 웃음이 나버린 아스카는 반도 타지 않은 담배를 손가락으로 튕겨
멀찌감치 던저버렸다.
-하루씨와 이 승현이네?
옷에 날린 재를 털고 있던 아스카의 눈에 멀찌감치 슈퍼로 향하는 두 사람이 보였다.
그들은 양 손에 짐을 가득 들고 있었다. 그는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에 발걸음을 재촉했다.
눈으로 짐작되는 거리는 그다지 멀지 않았으나 밭을 멀리 돌아가야하기에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다.
아스카는 가는 도중 그들이 먼저 나오지는 않을까 시선을 고정하고 부지런히 슈퍼를 향해 걸어갔다.
다행히 그들은 도착할때까지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살 물건이 많나? 왜 아직도 안나오지?
의문을 품던 아스카는 낮은 슈퍼의 문에 머리를 부딧히지 않도록 고개를 숙이며 안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그는 냉장고에서 우유를 하나 꺼내 계산대에 올려놓고 지갑을 꺼냈다.
"얼마에요?"
"1500원만 내슈"
"네?"
아스카가 고른건 분명 500ml짜리 우유였다. 동네마다 슈퍼마다 가격이 조금씩 다르지만 1500원은
억지였다. 그는 약간 당황한 얼굴로 다시 말을 걸었다.
"얼마라구요?"
"거 내말을 뭘로 들었수? 1500원만 내라니까"
"이봐요. 500ml 짜리 우유입니다. 1000ml 가격을 부르면 어쩝니까?"
솔직히 돈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문제는 기분을 상하게 하는 말투였다.
왠만해선 화를 내지 않는 아스카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질문했다.
"조금 전 일행이 이곳으로 들어왔는데 어디 있나요?"
"일행이라뇨?"
"두 사람이 들어오지 않았습니까? 뒤따라 온겁니다."
"아.. 그 사람들? 아이스크림 사가지고 돌아갔수다."
"그럴리가요. 계속 지켜보면서 왔는데 문 밖으로 나간 사람은 없었습니다."
"갔다면 갔는줄 알지 이 사람이 왜 이래!"
필요 이상으로 흥분하는 주인의 모습에 아스카는 직감했다. 분명 무언가를 숨기고 있구나.
거기에다 심증을 굳히는데 큰 역활을 할 남자가 큰 소리를 치며 들어왔다.
"야! 뭐해? 빨리 들어와. 물건이 참 싱싱한데~"
안으로 들어선 남자의 놀란 모습. 자신에게 화를 내던 주인의 당황한 모습.
짧은 순간에도 아스카는 그들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주인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지자 그는 들고있던
우유를 바닥에 집어던지고 급히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하루씨!"
안으로 들어서니 넓직한 마당이 나왔다. 마당 한켠에는 잘 패어진 장작이 높게 쌓여있었고 그 아래에서
젖은 머리를 말리는 남자 하나가 있었다. 아스카는 잠시 주위를 살피다 다짜고짜 그에게 다가가
고함을 질렀다.
"사람들 어디있어!"
"......................."
"대답 안해?"
그가 막무가내로 윽박지르자 일행 하나가 달려왔다.
"왜 이러는거요? 이 사람은 우리나라 말을 못해요. 다리도 불편한 사람한테 무슨 짓이요!"
대답을 피한 것이 아니라 못한다고 했다. 아스카는 자신을 말린 사람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사람의 눈을 보면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 있다. 그는 진실이 알고 싶었다.
그때 아무말 못하고 서 있던 남자가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털며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섰다.
한눈에 봐도 심하게 다리를 절고 있었다.
"어느 나라 분입니까?"
"누구 말이요?"
"저 분 말입니다. 어느나라 사람이기에 한국말을 못한다는 것입니까?"
"일본 사람입니다"
"그렇습니까? 제가 일본어를 할 줄 압니다만.. 잠시 말을 걸어도 되겠습니까?"
"......................"
"되겠습니까?"
"거참! 별 깡패 같은 놈을 다 보겠네. 당장 나가지 않으면 경찰을 부를테니 맘대로 하시오!"
남자는 아스카의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는 경찰을 부르겠다며 집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그와 동시에 슈퍼 주인이 우유를 들고 인상을 구기며 안으로 들어섰다.
-삐걱
"야! 조심해!"
그때였다. 우유를 들고있던 남자의 비명소리와 함께 쌓여있던 장작더미가 휘청 흔들렸다.
아스카는 본능적으로 몸을 날려 옆으로 피했다. 높이가 만만치 않아 그대로 깔리면 위험했을것이다.
그는 무너져내리는 장작을 보며 안도했다. 손등이 까져 피가 흘렀지만 무사한것 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아는사람이 없는 위험한곳에서 몸이라도 다치면 큰일이기 때문이다.
"야! 괜찮아?"
뽀얀 먼지 사이로 달려오는 슈퍼주인의 모습이 보였다.
아스카는 자신의 옆에 다리를 절던 사내가 서 있었음을 떠올렸다.
그는 멀리 떨어진 곳에 누워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제서야 비로소 상황이 정리되는듯 했다.
"하하.."
아스카는 옷을 툭툭 털어내며 큰 소리로 웃었다. 그리고 서로의 몸을 살피고 있는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그의 행동에 놀란 슈퍼주인이 인상을 쓰며 주먹을 들었지만 간단히 피해버린 그는 발을
높게 들어올려 복부를 걷어찼다. 기습을 당한 남자는 바닥에 힘없이 굴렀다.
아스카는 배를 부여잡고 기침을 하는 모습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다리를 저는 남자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조용히 속삭였다.
"내 말 다 알아듣지?"
"......................."
"대답해. 지금 대답 안하면 너도 내손에 죽어"
"........................"
"장작더미가 쓰러졌을때 너와 나. 둘다 사실을 모르고 있었어. 나야 조심하라는 말을 듣고 피했지만
넌 어떻게 피한거야? 우리 말을 못알아듣는다면서? 그냥 본능적으로 피한거야?"
"......................."
"그래.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했다 치자. 다리는 왜 불편한 척 하는거지? 장작더미는 담을 타고 꽤 넓게
자리잡고 있었어. 몰랐다면 꼼짝없이 깔려죽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어. 네가 정말 다리가 불편했다면
이렇게 짧은 시간에 무사히 피했을 리 없잖아?"
조용하지만 힘이 있는 목소리였다. 오히려 소름끼친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의 손에 붙잡혀 덜덜 떨던 남자는 아무 대꾸 못하고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것 역시 그의 말을
알아듣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들의 거짓말이 확실해지자 아스카는 바닥을 뒹굴던 슈퍼 주인의 옆구리를
힘껏 걷어찬 다음 방 안으로 들어갔다. 예상대로 그곳에 하루와 승현이 잡혀있었다.
경찰에 신고하겠다는 남자는 상황을 파악했는지 이미 도망치고 없었다.
"괜찮아요?"
"어떻게 알고 왔어요?"
"두 사람이 이곳에 들어오는걸 봤습니다"
아스카는 결박 당해있는 두 사람을 풀어주며 생각했다. 이들처럼 곱상하게 생긴 남자들은 아쉬울때
여자의 대용으로 쓰이기도 한다는 것을. 분명 지금도 같은 이유일거라고 짐작했다.
"고마워요. 아스카씨"
"별말씀을요. 하루씨 입가에 피."
"아.."
"여랑씨 많이 놀라겠네요. 일어설 수 있겠어요?"
"그럼요."
"자 그럼 어서 돌아갑시다."
아스카는 하루의 손을 잡아끌어 일으켜 세우더니 아무말 없이 앉아있던 승현을 번쩍 안아올렸다.
게다가 머리를 가슴으로 향하게 한 채 품에 꼭 안기까지 했다.
"저기요.. 저도 걸어갈 수 있어요."
"얌전히 있어"
승현은 그대로 품에 안긴 채 민박으로 돌아왔다.
아스카가 들어서자 놀란 여랑과 지용이가 달려왔다. 그들은 게임 시작 시간인 오후 세시가 넘도록
돌아오지 않는 하루와 승현이 걱정되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참이었다.
"단 하루! 너 얼굴이 왜 이래?"
"저 아래 슈퍼있지? 그곳에 장 본 물건들 있어. 가지고 와"
"얼굴 왜 이러냐니까?"
"우선 가지고 와서 이야기해."
하루는 여랑의 가슴에 손을 올려보이고 힘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한번도 당해 본 적 없는 납치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아스카는 지용이 보고 있음에도 승현을 내려놓지 않고 마루로 올라섰다. 승현은 지용을 보자마자
내려달라고 부탁했지만 아스카는 손에 힘을 주고 놔주지 않았다.
그때 마침 밖으로 나오던 나진과 정면으로 부딪혔다. 하필 그런 모습으로 마주친것이다.
나진은 두 사람을 보자마자 표정이 굳어 다시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그는 승현을 방 안으로 옮기고 머리를 한번 쓸어내리더니 뒤따라온 지용을 지나쳐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온기가 느껴지자 그제서야 안도한 승현은 쓰러지듯 이불 위로 누워버렸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어요? 게임 문제는요?"
"내가 만들었어. 하루씨와 네가 좀 늦어서 우선 우리끼리 문제 돌렸어"
"그랬구나. 형. 나 좀 안아줘요"
"무슨일이냐니까? 말해봐"
"싫으면 말아요. 문제 풀어볼래요. 쪽지 줘보세요."
지용이 안아주지 않고 계속 추궁하자 승현은 입을 다문 채 바닥에 흩어져있는 문제 쪽지를 집어들었다.
두근거림이 멈추지 않았다. 료에게 끌려갔던 그때를 다시 떠올렸다.
"우유사러 나갔으면서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일이 있었습니다. 우유는 다시 사다드리겠습니다."
"괜찮아"
"그것보다 식사를 하는것이.."
"기분 나빠.."
"네?"
나진은 허공을 바라보며 인상을 쓰더니 그대로 자리에 누워버렸다.
호흡이 약한 편이라 추워도 머리끝까지 이불을 덮지 않는 그가 두꺼운 겨울용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은 채 돌아누웠다. 아스카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행동를 이해할 수 없었다.
옷을 갈아입기 위해 이동한 그는 탁자위에 올려져있는 쪽지 세장을 발견했다.
그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 돌려진 문제 쪽지였다.
-여랑 + 단 하루-
1. 다프 - 목관악기 피콜로와 대부분의 퍼커션을 다룰 수 있다.
2. 크로로노스 - 금관악기 수자폰과 현악기인 거문고를 다룰 수 있다.
3. 레노 - 현악기 첼로와 금관악기 오보에를 다룰 수 있다.
4. 케인 - 타악기인 스네어 드럼과 현악기인 바이올린을 다룰 수 있다.
*네 명의 연주자가 Marching band 에 입부 신청서를 냈다. 그 결과 세명의 연주자는 밴드에
합류하게 되었지만 나머지 한 친구는 들어가지 못했다. 이유는 다루는 악기가 마땅치 않다는 점이다.
밴드에 합류하지 못한 친구의 이름을 맞추시오.
-아스카 + 송 나진-
*분비물이 왕성한 외투막의 소편과 인공핵을 ( )의 생식소와 장관 및 소화맹낭 부근에 삽입해준다.
그러면 외투막의 소편의 상피세포는 자력으로 분비, 증식해서 ( )주머니를 만들어 인공핵을 둘러싼다.
문제 - 괄호 안에 공통으로 들어가는 단어를 쓰시오
힌트 - 건강과 장수를 상징. 입에 넣었을때 아삭아삭한 것과 매끈매끈매끈한 것이 있다.
산성에 약하고 빛을 잘 반사한다. 100도 이상의 열을 받으면 변색되고 400도 이상이 되면 깨진다.
-이 해일 + 신 호수-
A - 땅과 불의 기운을 지님. 기계를 잘 다루며 이동수단의 제작이 가능함. 검을 사용한다
B - 바람의 기운을 지님. 예의범절이 뛰어나고 힘이 셈. 성실하지만 식탐이 있음. 활을 사용한다.
C - 물의 기운을 지님. 물을 다룸에도 물을 싫어하고 자존심이 매우강함. 창을 사용한다.
*세 명의 전사가 있다. 모두 하나의 전투기를 가지고 있다. 이들 중 마법사의 손자가 한명 있다.
그 손자가 다루는 전투기의 이름을 쓰시오.
-권 지용 + 이 승현-
A. 눈에 보이지 않지만 어느곳에나 존재한다. 해롭지만 때론 이롭기도 하다. 산소가 있어야 살지만
없어도 살 수 있다. 생물의 도움을 받아야하지만 딱히 도움받을 자에게 양해를 구하지 않는다.
가장 원시적이고 빠른 진화를 하지만 변이를 일으킬 확률은 적다. 식물에 가까운 생물로 um의
단위를 사용한다.
B. 혼자의 힘으로 살아 남을 수 없기에 반드시 숙주를 필요로 한다. 하나의 이름속에 여러개의 서브타입
이 존재하며 변이를 자주 일으킨다. 기본적으로 무생물 상태이며 숙주를 통해 비로소 생물로 전환한다.
눈으로 볼 수 없으며 이로운점 없이 해롭기만 하다. nm의 단위를 사용한다.
*두 자동차 기술자가 있다. 주워진 한달이라는 기간동안 A는 엔진, 동체, 좌석이 모두 갖춰진 자동차를
개발했다. 반면 B는 자동차의 핵심부의 엔진만 개발해놓은 상태다. 두 사람은 각각 자신이 만들
자동차에 이름을 붙여놓았다. 임금을 더 많이 받게 될 사람의 자동차 이름이 무엇인가?
"큭큭.. 해일형네 문제 좀 봐.."
"문제는 나중에 풀고 우선 말해봐.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던거야?"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서 하루형이랑 슈퍼에 들어갔는데 거기 주인이 우릴 끌고갔어요. 저야 원래
기운이 센 편이 아니라 벗어나지 못하고 끌려갔지만 하루형은 꽤 심하게 저항했는데도 체급차가 워낙
심하니까 어쩔 수 없더라구요. 아스카씨가 오지 않았다면 무슨일이 일어났을지 몰라요."
"왜 그런짓을 한거지?"
"뻔한거 아니겠어요? 작은 마을에서 그런짓을 서슴없이 하는 사람이 어디있어요? 분명 슈퍼의 주인은
따로 있을거에요. 아이스크림의 가격을 물었는데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리더라구요. 나쁜 짓을 하다가
사람이 들어오니까 거슬렸겠죠. 아니면 우리가 마음에 들었나?"
"경찰에 신고는 했어?"
"아스카씨가 휴대폰으로 신고하는것 같았어요. 잡혀있다가 나오니 벌써 맞고 쓰러져 있더라구요"
승현은 당시의 아스카를 떠올리며 펜을 잘근잘근 물었다. 하루도 있었는데 왜 하필 자신을 들어
올렸을까. 곰곰히 생각해봐도 딱히 떠오르는 답이 없었다.
지용이 보기에 승현은 납치사건임에도 별다른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는듯 했다.
산장사건으로 인해 감각이 많이 둔해진 모양이었다.
"역시 귀신만 무서워하는건가?"
"네?"
"아냐. 문제 풀어보자"
무사히 돌아온걸로 다행이라고 생각한 지용은 더 이상 캐묻지 않고 문제 쪽지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 히죽히죽 웃고 있는 승현이 가리키는 해일과 호수의 문제를 읽어내렸다.
곧 웃음이 터져나왔다.
"이 문제 끝내주는데?"
"그렇죠? 전투기의 이름을 맞추라니..하하"
"역시 호수씨답다니까? 너도 답을 알고 있지?"
"그럼요. 얼마나 좋아했는데요~ 그런데 답이 두개에요. 어느걸로 써야하죠?"
"둘다 같은 거잖아. 편한대로 쓰자. 두개 다 답으로 인정해줄거야"
해일과 호수의 문제를 가뿐히 풀어 넘긴 그들은 제일 민감한 아스카와 나진의 문제로 눈을 돌렸다.
오늘의 문제는 막힘없이 술술 풀리는게 출발이 좋았다.
"이걸 입에 넣으면 사각거리는 느낌이 나나보죠?"
"글쎄.. 입에 넣어 봤어야알지"
"전 만져본 적도 없어요. 아니다.. 자세히 본 적도 없구나"
"보통 그렇지. 나도 마찬가지야"
"매끈한 느낌은 몰라도 사각거리는 느낌은 상상이 안가네요"
두 사람은 한번도 접해 본 적 없는 물건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하고 있었다.
그렇게 토론해봤자 답이 변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지용은 바닥에 엎드려 두 다리를 버둥거리는 승현의 어깨를 꽉 누르며 심각하게 말했다.
요즘들어 승현이 너무 무방비해보여 내심 걱정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요즘 너무 긴장이 풀린거 아냐?"
"저도 알아요."
"알면서 왜 그래?"
"형이 곁에 있으면 저절로 마음을 놓게되요. 어린아이가 부모님 곁에서 용감한 것처럼 저도 형을 믿고
정신 못차리는 중이에요."
"그런게 어디있어?"
"그것보다 형. 자꾸 영원이가 눈에서 지워지질 않아요. 미치겠어요"
"또 영원이 타령이야? 네가 열에 들떠 헛것을 봤다니까?"
"꿈에도 나타났어요. 나무 아래에서 혼자 편지를 매달고 있는데 뒷골이 오싹해지는거에요. 숨도 쉬지
못하고 얼어있는데 하얀 팔이 쑥 나오더니 제 목을 졸랐어요. 놀라서 있는 힘껏 뿌리치고 뒤를
돌아보는데 영원이가 씨익 웃으며 입술을 달싹이고 있었어요. 무슨 말을 하는것 같았는데 들리지
않았어요. 이상한건 그 얼굴이 반갑지가 않고 무서웠다는 거에요"
"네가 왜 자꾸 신경을 쓰는지 모르겠다. 정 마음에 걸리면 남겨진 연락처로 전화해볼까?"
"아.. 그 방법이 있었군요?"
"오자마자 휴대폰을 꺼놨으니 아직 배터리가 남았을거야. 잠깐만 기다려봐."
"네. 그리고 연락되면 얼마 전 민박집에 들렀었냐고 물어봐주세요."
"그래"
승현이 계속 마음에 걸려하자 지용는 옷들과 함께 쇼핑백에 넣어둔 휴대폰을 꺼내 전원을 켰다.
지용이는 대양이 떠나면서 남긴 전화번호를 꾹꾹 누르고 발신이 되길 기다렸다.
하지만 자동응답 안내로 넘어갈때까지 전화연결이 되지 않았다.
번호가 잘못되지는 않았나 재확인을 하며 다시 통화를 시도했지만 마찬가지었다.
"안 받는데? 자고있나?"
"저에게 영원이 전화번호가 있어요. 이걸로 해보세요"
승현은 영원이 떠나기 전 손에 쥐어준 종이를 꺼내 지용에게 건냈다.
하지만 전화를 걸던 지용의 표정이 점점 굳어져갔다.
"없는 번호라는데?"
"네? 그럴리가요?"
"없는 번호래. 연결조차 안되"
"없는 번호를 적어줬을리가요. 아니면 잘못 적어줬나? 휴대폰 주세요. 제가 직접해볼게요."
승현은 벌떡 일어나 지용의 손에서 휴대폰을 가로채 종이에 적힌대로 번호를 누르기 시작했다.
맞게 눌렀는지 몇번이나 대조해보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다시 확인하시고..."
"내가 낸 문제 끝내주지 않냐?"
"끝내주긴 뭐가 끝내줘! 너무 쉬워서 사람들이 다 맞추게 생겼는데"
"딱히 낼 문제도 없었으면서 뭘 그래? 큰소리만 치면 다 되는줄 알아?"
"그래! 다 되는줄 안다! 이 화상아!"
오늘도 여전히 신나게 다투고 있는 해일과 호수.
그들은 아무도 없는 사막에 떨어뜨려놓아도 심심해하지 않을 정도로 궁합이 잘 맞았다.
"너 왜 자꾸 옷 벗고 돌아다녀? 승현이 감기 걸려서 고생하는거 못봤어?"
"방 안인데 뭐 어때? 왜? 너무 보기 좋아?"
"뭐라구?"
"군침 질질 흘리지말고 문제나 푸셔. 머리 좋은 사람들 틈에서 살아 남기 힘드니까"
"날 졸지에 군침이나 흘리는 변태로 몰다니.."
"맞으면서 아닌척은.."
"이리와!"
호수의 놀림에 발끈한 해일은 옷을 입기 위해 몸을 돌린 호수의 허리를 잡고 이불위로 강제로 눕혔다.
이에 지고만 있을 호수가 아니다. 졸지에 난대없는 육탄전이 벌어졌다.
문제를 풀라고 들여보내놓으면 매일 딴 짓만 하니 진도가 나갈 리 없다.
"어쭈? 한번 해보시겠다?"
"um이 뭔지 말해봐."
"악.. 왜 이래!"
"빨리 말해. 못 맞출때마다 강도를 높이겠어."
"으.. 망나니같은 놈!"
호수가 눈을 부릅뜨자 그의 가슴을 이리저리 핥아내리던 해일이 문제를 내며 몰아붙였다.
양 손을 잡힌 채 깔려있던 호수는 가슴으로 느껴지는 자극에 눈을 질끈 감으며 발로 해일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안 비켜?"
"빨리 말해. um이 뭐야"
"마..마이크로 미터.."
"그럼 nm은?"
"몰라.. 그만해!"
"못참겠지? 왜 이기지도 못하면서 까탈이야?"
"너.. 이 손만 자유로워지면 죽었어. 긴장해!"
"문제는 상관없어. 난 너와 같이 여행온것으로 만족하니까"
결국 힘으로 당해내지 못하고 해일에게 몸을 맡긴 호수는 양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볼을 세게 문질렀다.
쓸때없는 자존심으로 말대꾸를 해보지만 최후는 늘 이런식이다.
한참을 열중하던 해일은 갑자기 피식 웃으며 그의 배로 고개를 숙였다.
한번 터진 웃음은 좀처럼 멈출 생각을 않았다.
"왜 웃어? 미쳤어?"
"생각해보니 웃겨서. 여랑씨 문제말이야"
"뭐가?"
"우리에게 악기 문제를 내다니.. 고양이 앞에 생선을 덥썩 던져준 셈이잖아"
"그게 웃겨?"
"넌 안 웃겨?"
"별로 안웃기거든? 그리고 왜 내 배에 얼굴을 쳐 묻고 웃어! 뱃가죽이 진동하잖아!"
"우리 호수 바이올린 켜는 모습 죽이는데. 보고싶다 갑자기~"
"아부떨고 있네."
승현과 하루가 늦게 돌아오는 바람에 문제를 풀 수 있는 시간이 짧아져버린 사람들은 늦은 저녁을 먹고
서둘러 별채로 모여들었다.
나진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스카가 돌아온 뒤에도 계속 잠만 잤다.
아스카는 하루종일 굶은 나진이 걱정 되어 조심스럽게 깨워봤지만 건드리기만 해도 짜증을 냈다.
그는 문제를 풀 생각도 하지 않고 나진의 곁을 지키고 있었지만 정말 자는건지 아니면 자는척을
하는건지도 알 수 없었다. 10시를 알리는 자명종 소리가 들려오자 어둠속에 앉아 있던 그는 나진에게
방해가 되지 않게 문제 쪽지를 손에 쥐고 별채로 걸음을 옮겼다.
저녁나절부터 빗방울이 떨어진다 싶더니 이제는 제법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세상이 검푸른 비와 함께 빛이 바래져가고 있었다.
"다들 모이셨죠? 가만.. 나진씨가 안보이네요?"
"잠이 들었습니다. 오늘은 저 혼자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자~ 모두 정답 쪽지를 바구니에 넣어주세요"
그 자리엔 나진뿐 아니라 하루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승현이야 산장에서 단련이 되었기 때문에 목숨을 잃지 않고 무사한 것으로 위안을 삼았지만
하루는 처음 겪는 일이라 심기가 많이 불편했다.
모두가 쪽지를 꺼내 바구니 안으로 넣자 여랑이 빠른 진행을 위해 바로 정답을 설명했다.
그도 방에 혼자있을 하루가 걱정이 되는 모양이다.
"오늘은 안좋은 일도 있었고 하니 빠르게 진행하겠습니다. 제가 낸 문제는 마칭밴드에 관해서였습니다.
마칭밴드(Marching)는 말 그대로 행진 밴드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군악대나 놀이공원 행진악대를
들 수 있죠. 마칭밴드는 보통 세가지 파트로 나뉘어집니다. 금관파트, 목관파트, 타악파트죠. 금관파트는
트럼펫, 트럼본, 유포늄 등으로 이루어집니다. 목관파트는 플룻이나 클라리넷, 피콜로, 색소폰등이고
타악파트는 스네어, 큰북, 심벌즈, 봉고등의 퍼커션으로 이루어집니다. 영화 드럼라인을 보셨는지
모르겠네요. 거기에 나오는 드럼라인이 마칭밴드의 타악파트가 되겠습니다."
"마칭밴드 정말 멋있죠~"
"이 문제는 해일씨나 호수씨한테는 식은죽 먹기였겠죠?"
"예리하기도 하셔라~"
"하하.. 그래도 모르는분을 위해 설명 드리겠습니다. 다프는 피콜로와 대부분의 퍼커션을 다룰 수
있으니 목관파트나 타악파트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크로노스는 수자폰을 다룰 수 있으므로 금관파트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케인 역시 스네어 드럼을 다룰줄 아니 타악파트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레노가 다루는 첼로나 오보에는 마칭밴드에 별 필요없는 악기입니다. 하여 입부하지 못한
사람은 레노가 되겠습니다."
그의 설명이 끝나자 아스카가 머리를 쓸어내리며 질문했다. 뭔가 이상하다는 표정이었다.
"여랑씨. 오보에도 마칭밴드에 포함되지 않습니까? 제가 악기에 대해 잘 모르지만 어디선가 들은적이
있는것 같아서요. 아닌가요?"
"오보에를 넣는 밴드도 있습니다. 하지만 보통은 넣지 않아요. 오보에의 숫자가 많지 않은 이상 소리가
잘 들리지 않기 때문에 보통 클라리넷으로 대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반적인 밴드에서는 크게
중요하지 않은 악기죠."
"아.. 그렇군요"
"그것말고 다른 이유도 있어요."
아스카가 여랑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자 호수가 밝은 목소리로 부연설명을 했다.
악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니 흥미가 생긴 모양이다.
"오보에는 리드가 가늘고 약해서 마칭을 하다가 부러질 위험이 커요. 리드는 입을 대고 악기를 부는
부분인데요 소리는 아름답지만 리드가 약해서 전공자들의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에요. 악기보다
오히려 리드를 더 아끼는편이죠. 그래서 포함시키지 않는 이유도 있어요."
"악기의 모습이 떠오르질 않으니 설명해줘도 난감하군요."
악기와는 인연이 없던 아스카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지자 그때서야 자신의 차례라는것을 깨닿고 입을 열었다.
"오늘 문제는 나진씨가 만든거라 직접 설명해야하지만 사정상 제가 대신 설명 드리겠습니다. 인공핵을
삽입하여 만들어내는 보석. '진주' 입니다. 진주는 유일하게 가공하지 않은 원석 그대로를 사용하는
보석으로 어느옷에나 잘 어울려 여성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보석시장에서 천연진주를
보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조개에 인공핵을 삽입해 인공 진주를 양식하는 것입니다.
천연진주와 인공진주를 구분하는 방법은 입에 넣고 살짝 물어보는 것인데요. 물었을때 아삭한 느낌이
나면 천연진주고 매끈한 느낌이 나면 인공진주라고 합니다. 진주가 눈물을 의미한다고 싫어하는 분들이
계신데 진주는 6월의 탄생석으로 건강과 장수, 부를 상징합니다. 모래나 기생물이 침투했을때 조개는
몸을 보호하고자 체액을 분비해 그것을 감싸게 됩니다. 그 체액이 오랜시간 쌓여 이루어진 덩어리가
진주이며 긴 고통을 이겨낸 살아 숨쉬는 보석이라하여 건강과 장수의 뜻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답을 맞추긴 했지만 감별법이나 뜻 같은건 정말 새로워요. 남자라 보석을 접할 일은 없지만 말이에요"
하루종일 아삭아삭한 느낌에 대해 궁금해하던 승현이 혀를 쏙 내밀며 웃어보이자 왠일인지 아스카
역시 그를 바라보며 살짝 미소지었다. 지용의 눈에는 그의 미소가 영 달갑지 않았다.
지용이 진주조개를 사달라느니 자개 보석함을 사달라느니 말도 안되는 억지를 부리고 있던 호수의
옆구리를 쿡 찌르자 화들짝 놀란 그는 지용의 목을 잡아 흔들며 화를 냈다. 물론 장난이었지만 가끔
그는 과격한 행동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곤 한다.
"간 떨어질뻔했잖아요. 지용씨!"
"그렇다고 목을 조르면 어쩝니까?"
"원래 잘못을 한 사람은 혼나야 하는거에요"
"무섭습니다. 하하.."
"제 답을 설명하라구요? 이 어이없는 문제는 해일이가 만들었으니 본인에게 직접 들으세요. 게임에서
이런 문제를 내는 사람은 아마 이 놈밖에 없을껄요? 빨리 답을 말해 쓰나미!"
"왜 나름대로 깜찍한 문제구만.. 제 문제는 다들 너무나 잘 알고 계신 슈퍼그랑죠에 관한 문제입니다"
"헉.. 슈퍼 그랑죠"
"여랑씨. 왜요?"
"몰랐어요."
"정말요?"
"누가 슈퍼그랑죠에 대해 문제를 낼거라고 생각했겠어요?"
"그건 여랑 형 말이 맞아요. 저랑 지용 형도 이문제 보고 한참을 웃었다니까요?"
"그래? 아스카씨는요?"
"저는 전혀 몰랐습니다. 슈퍼그랑죠라면 마동왕 그란조트 말씀이십니까?"
"네. 맞아요"
"저 역시 생각도 못했습니다. 검이나 활을 다룬다기에 판타지쪽으로만 생각했습니다"
"거봐. 호수야. 이 문제 허를 찌른다고 했잖아"
"거참 희안하네"
문제가 쉽다며 펄펄 뛰던 호수도 의외의 상황에 어리둥절하고 있었다.
오히려 문제가 쉬우니 허를 찌른것이다.
"일본판 마동왕 그란조트. 한국판은 슈퍼그랑죠가 되겠죠. A는 주인공 다이치(민호) 입니다. 기계를
잘 다루고 오르골과 보드를 직접 만들었어요. B는 가스(용이) 입니다. 누구에게나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예의를 갖췄고 키가 작지만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단 배가 고프면 힘을 못쓴다는 단점이 있죠~
C는 라비(제롬) 입니다. 머리에 긴 귀가 달려있는 미소년으로 물을 싫어하고 고집이 셉니다. 당근을
싫어해요. 당근을 싫어하는건 다이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구리구리가 당근을 들고 나타나면
얼굴이 파랗게 질려서 도망가죠. 하하"
"또 삼천포 시작이네"
"세 사람에게 전투기가 있죠? 다이치의 전투기는 그란조트(그랑죠). 마법 뱃지를 총에 넣고 땅으로
날리면 마법진이 발동하면서 그란조트가 짠! 하고 나타납니다. 그의 주 무기는 검이죠"
"나 그 주문 알아. 「ジ-ク·ガイ·フリ-ズ」지크 ·가이· 후리즈 나와라! 엘디 카이져! 잖아~"
"큭큭.. 맞아. 지크 ·가이· 후리즈는 무기 소환 공통 마법이지. 검 이름이 엘디카이져"
"또 보고싶다. 재미있었는데.."
"그래서 다이치는 땅과 불의 기운을 지닌 전사입니다. 두번째로 가스는 활을 날려 전투기를 불러내는데
그 전투기 이름이 윈저트(피닉스) 입니다. 활 이름이 슈트럼카이져죠. 라비는 마법팽이를 물에 던져
전투기를 뽑는데 그 전투기의 이름은 아쿠아비트(포세이돈) 입니다. 창 이름은 웨이브카이져에요.
셋 중 라비루나 3대 마법사중 한명인 라마스의 손자가 있습니다. 바로 라비입니다. 그러므로 정답은
아쿠아비트입니다. 포세이돈이라고 써도 되요~"
만화영화 이야기가 나오자 언제 싸웠냐는듯 손뼉을 마주치며 웃는 해일과 호수때문에 사람들이 한바탕
배를 잡고 웃었다. 승현도 슈퍼그랑죠를 좋아하는지 그들의 대화에 동참하며 열을 올리고 있었다.
마지막 설명은 지용의 차례였다.
"첫번째 설명은 박테리아(세균) 에 관한 설명입니다. 가장 원시적이며 단순한 세포로 이루어져있는
박테리아는 식물에 가까운 생물입니다. 엽록소가 없기 때문에 광합성을 하지 못해 양분이 있는곳이면
어디든 기생합니다. 낮은 온도에서 자라는 저온성 세균과 높은 온도에서 자라는 고온성 세균. 산소를
필요로 하는 호기성 세균과 산소 없이도 자랄 수 있는 혐기성 세균등이 있습니다. 크기는 보통 1~2
마이크로미터(um .1백만분의 1m) 이고 유전물질이 DNA로 이루어져 있어 변이가 일어날 가능성이
낮습니다. 박테리아는 내성황색포도상구균. 속칭 슈퍼 박테리아라고 불리우는 나쁜 병원균부터
자연계의 복잡한 물질을 단순한 물질로 바꿔주는 좋은 일을 하는것 등 종류가 매우 다양합니다.
인류의 조상격이라고 할 수 있겠죠. 두번째는 바이러스에 관한 설명입니다. 올 여름 식중독 원인균인
노로 바이러스 때문에 떠들석했죠? 바이러스는 인간에게 해로 작용합니다. 크기가 보통 20~ 30
나노 미터(nm 10억분의 1m) 로 박테리아의 50분의 1 ~ 100분의 1정도 됩니다. 그래서 세균 여과기로도
잡아낼 수 없고 같은 이름의 바이러스라도 여러가지의 서브타입이 존재하기 때문에 백신을 만들기도
쉽지 않다고 합니다. DNA는 두개의 사슬로 이루어져 있는게 정상인데 바이러스는 한가닥의 DNA만
있거나 RNA 로 이루어져있어 변이가 자주 일어납니다. 반드시 숙주를 찾아 기생해야만 하구요.
두 자동차는 박테리아와 바이러스를 의미합니다. 단세포로 이루어져있지만 박테리아는 세포내의
기관이 존재하기 때문이 물질 대사가 일어납니다. 반면 바이러스는 핵으로만 이루어져있기 때문에
숙주를 찾기전에는 무생물상태로 존재하죠. 완벽한 자동차의 완성품이 박테리아라면 핵으로만 이루어
져있는 바이러스는 가장 중요한 엔진만 있는 셈입니다. 같은 기간동안 더 많은 개발을 한 A 기술자가
임금을 더 많이 받게 되므로 정답은 박테리아(세균) 입니다."
"후.. 문제 정말 복잡하네요"
시간이 흐르자 하루가 눈에 밟혀 집중을 할 수가 없던 여랑은 서둘러 정답표를 만들기 시작했다.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여랑 + 단 하루 = 세균 . 진주 . 포세이돈 (3문제)
*이 해일 + 신 호수 = 박테리아 . 진주 (2문제)
*아스카 + 송 나진 = 찬스 사용 (1문제)
*정 윤호 + 강 재중 = 아쿠아비트 . 레노 . 진주 (3문제)
1등 팀은 지용 승현과 여랑 하루. 꼴등팀은 한문제도 써 넣지 않은 아스카 나진이었다.
그들이 마음먹고 풀었으면 백지를 낼리 없으나 나진이 손을 놓고 자리에 누워버린데다 걱정이 된
아스카 마저 문제 풀 생각을 하지 않았에 한 문제도 풀지 못한 꼴이 되어버렸다.
규칙대로 지용과 여랑의 가위바위보로 1등은 여랑이 차지했다.
여랑은 정답 종이를 주섬주섬 챙기며 아스카에게 물었다.
"아스카씨. 벌칙을 받아야하는거 알죠?"
"네. 알고 있습니다. 지금 갈까요?"
"비가 점점 많이 내리고 있어요. 벌칙 장소가 비탈길이기 때문에 비가 오면 질퍽거리고 미끄러워요.
오늘 밤에는 못갈것같네요. 대신 다음 문제에서 맞춘 답 중에 하나를 제하는건 어때요? 벌칙대신"
"정답을 세개 맞추면 두개를 맞춘게 되겠군요?"
"맞아요. 그렇게 벌칙을 대신 해도 되요. 비가 오니 나갈 수도 없고 벌칙을 뒷날로 미루는건 불가능해요"
"좋습니다. 그렇게 해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저는 먼저 방으로 돌아갈테니 다들 좋은 꿈 꾸세요"
여랑이 서둘러 방 문을 빠져나가자 아스카도 내심 나진이 걱정되어 급히 방으로 돌아갔다.
비 바람은 더욱 거세져 나무로 된 문들이 덜컹거릴 정도였다.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가자 불이 켜져 있었고 자리에서 일어난 나진은 인기척에도 돌아보지 않고
머리를 손가락으로 빗어내리고 있었다.
"나진씨. 언제 일어나셨습니까?"
"........................."
"여전히 기분이 안좋으십니까?"
"........................"
"하루종일 식사를 거르셨습니다. 뭐라도 드시는게.."
"........................."
그는 의도적으로 말을 하지 않고 있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한 눈에 봐도 알 수 있다.
아스카는 잠시 말을 멈추고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는지 작은 소리가 귓가를
맴돈다. 그의 무시가 계속되자 화가 난 아스카는 그를 억지로 밀어 눕히고 차갑게 쏘아보았다.
그러자 나진도 같은 눈빛으로 시선을 보냈다.
"이유를 말해보십시오."
"비켜"
"비켜주길 원하면 이유를 말씀하십시오."
"저리 비켜!"
"기분나쁜게 있다면 말을 해야 알 것 아닙니까!"
"네가 깡패야? 왜 사람을.."
"송 나진!"
처음으로 그의 입에서 반말이 튀어나왔다.
같은 사람이 아니라고 느껴질만큼 무겁고 낮은 음성에 나진은 할 말을 잃고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교차되는 시선에 이질감이 느껴진다.
-five-
"저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재주가 없습니다. 그러니 왜 저에게 화가 나셨는지 말해주십시오. 나진씨"
"뭐하는 짓이야?"
"이렇게 하지 않으면 저를 봐주지 않을 것 같아서입니다. 얼굴을 마주봐야 대화를 할 수 있잖습니까"
"비켜!"
나진은 급한김에 아스카의 팔을 힘껏 깨물고 몸을 일으키려했다.
감정이 지나쳐 생각도 안하고 저지른 일이라 힘 조절을 못하고 물어버린 팔에 흐릿한 멍이 올라왔다.
아스카가 무표정한 얼굴로 물린 팔을 들여다보며 미간을 좁히자 나진도 자신의 행동에 놀라 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 역시 실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저기.."
"너무 멋대로 아닙니까? 나진씨와 저는 주종관계가 아닙니다. 착각하고 계신 것 같군요?"
"주종관계라니? 내가 그런 생각을 할 리 없잖아?"
"아니요. 나진씨는 머릿속 깊숙히 그 생각이 배어있습니다. 그런 생각을 갖도록 부추긴 건 제 잘못입니다
하지만 잘못 생각하셨습니다. 이젠 그 생각에서 벗어나십시오."
"아스카?"
"나진씨가 제게 도움을 받는 처지라는 사실을 일깨워드리지요"
"왜 이래!"
아스카는 손을 들어 나진의 턱을 위로 들어올려 꽉 움켜쥐었다. 저항 할 생각도 못할만큼 그의 눈은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당황한 나진은 한손마저 그의 손에 잡히고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두 사람은 한참이나 신경전을 벌이며 꼼짝없이 그 자세를 유지했다.
아스카는 그의 턱을 들어올린 채로, 나진은 아스카의 거친 행동에 겁을 잔뜩 집어먹은 채였다.
목구멍을 간지럽히는 말이 입 밖으로 나와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곤란한 자세군요.. 애정이 있으면 상관없지만 애정이 없다면 이것을 폭행이라고 하지요."
"놔.."
"제가 두렵습니까?"
"......................."
"이곳에 온 이상 약속은 지킵니다. 반드시 나진씨가 원하는 것을 얻도록 해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나진씨를 위해서라는 말은 취소하지요. 저를 위해서입니다"
"윽.........."
"이 자세로 밤을 새는 것도 재미있겠군요. 서로 눈을 마주하고.."
"도와준다면서! 그렇게 말했으면서 목적은 따로 있었잖아? 승현이란 애가 그렇게 대단해? 나
마주쳤는데도 품에서 놓지 않을만큼 그렇게 맘에 들어?"
"그렇다면요?"
".................."
"아니라고 해도 어짜피 믿지 않겠군요. 딱히 변명하고 싶지도 않지만 말입니다."
"돌아갈거야.. 내일 아침이 되면 서울로 데려다줘"
"왜 생각이 바뀐겁니까? 나진씨는 권 지용씨만 있으면 되지 않습니까? 제가 이 승현을 손에 넣는다면
오히려 잘된 일 아닙니까?"
"이런 식의 도움은 필요없어.. 결국은 이 승현을 얻고 싶어서 날 도와주는 척 했다는 소리잖아..
돌아갈래. 이제 가망없어.. 모든게 다 귀찮아.."
"남은 4일을 채우십시오. 그전엔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아스카!"
"의지가 약하군요? 지용씨가 없으면 죽을 것 같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벌써 포기했습니까?"
"나 혼자라도 가겠어! 넌 오든지 말든지 맘대로 해!"
한 사람의 몸 안에 두가지 인격이 공존하는게 이중인격이라고 했던가.
나진은 자신이 괴로울때 말없이 무릎을 빌려줬던 아스카를 떠올렸다.
그리고 눈 앞에 있는 아스카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두 모습을 일치시키려해도 조각이 맞지 않아
어긋나는 퍼즐같았다. 그의 이마위로 송글송글 맺힌 땀이 균형을 잃고 미끌어져내렸다.
"절대 혼자는 못돌아가십니다."
"걸어서라도 갈거야!"
"말이 통하지 않는군요. 그럼 말을 못하게 하는 수 밖에"
"............!"
감정 없는 입술이 거칠게 파고들었다. 조금이라도 예상을 했다면 이토록 당황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턱을 움켜쥔 손에 더욱 강한 힘을 주며 입술이 찢어질 정도로 몰아붙이는 아스카에게 심한 배신감을
느낀 나진은 온 힘을 다해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밥도 제대로 먹지 않은 체력으로 그를 밀어내긴
역부족이었다.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나진은 파고드는 차가운 혀를 힘껏 깨물었다.
"소용없습니다"
"미쳤어? 너!"
피가 흐를만큼 혀를 세게 깨물린 아스카는 멈칫할 만도 한데 그대로 그의 윗옷을 들어올려 가슴으로
입을 가져갔다.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느낌에 입술을 깨물고 발을 버둥거리던 나진은 도저히 힘으로
아스카를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고 저항하던 모든 근육의 힘을 풀었다. 가슴이 싸하게 저려오자
핏자국을 남기던 아스카의 행동이 멈췄다. 참고있던 눈물이 눈 앞을 뿌옇게 흐렸다.
"저항안할테니 손부터 놔.."
"왜 저항 안하십니까?"
"네 마음대로 해.. 어짜피 힘으로는 널 못이겨.. 반항같은 거 안할테니까.. 그러니까.."
"왜 우십니까?"
"난 네가 조금은 날 좋아해주는 줄 알았어.. 같이 지내온 세월동안 그정도의 애정은 쌓였다고 생각했어.
연인과 같은 감정은 될 수 없어도 형제나 친구 이상의 우정은 있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전혀 아니었네..
부탁을 하는 주제에 건방지게 굴어서 미안하다. 이걸로 화가 풀린다면 마음대로 해."
"....................."
"대신.. 그렇게 몰아붙이지 마.. 그동안의 정을 생각해서.. 부드럽게 해줘도 되잖아..흐윽.."
"그만 두겠습니다."
모든걸 체념하고 서럽게 우는 나진을 바라보던 아스카는 몸을 벌떡 일으켜 옷을 챙겨입었다.
몸은 사랑을 잃은지 오래. 아픔으로 가득한 심장이 상처를 받는 건 순간.
아스카가 휴대폰과 담배를 챙겨 바지 주머니 안으로 밀어넣으며 말했다.
너무 낮고 조용한 목소리라 서럽게 소리내어 울고 있는 나진은 듣지 못했다.
"계속 저항했으면 끝까지 할 생각이었습니다. 재미없군요.."
말을 마친 아스카는 손으로 눈 언저리를 지긋이 누르며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텅 빈방에 홀로 남겨진 나진은 급속도로 밀려드는 한기에 몸을 떨며 이불 위로 고개를 파묻었다.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것은 믿음에 대한 배신. 기대에 대한 실망. 그리고 후회였다.
"너무 해.."
"승현아~ 문 열어!"
자정이 넘은 시각. 요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잠겨있던 문이 덜컹거렸다.
지용의 만류에도 청소를 하겠다며 수건를 들고 설치던 승현은 자신의 이름이 들리자 반사적으로
문 앞으로 뛰어가 문고리를 잡았다. 그러자 의자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던 지용이 입을 열었다.
"너 왜 그렇게 무방비야? 네 이름이 불렸으면 누구냐고 물어보는게 먼저잖아?"
"목소리 들으면 알잖아요. 호수형이에요~"
승현은 지용의 말은 한귀로 흘려버리고 웃으며 문을 열었다. 습한 공기가 꾸역꾸역 밀려들어왔다.
비는 시간이 갈 수록 그칠 생각도 하지않고 무섭게 쏟아져내렸다. 사진기의 플레쉬가 터지듯 눈 앞이
번쩍 하더니 요란한 천둥소리가 정신없이 고막을 때렸다. 승현은 양쪽 귀를 틀어막으며 손님을 맞았다.
"호수형. 이시간에 왠일이에요?"
"놀러왔어. 지용씨 늦은 시간에 죄송해요~"
호수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안으로 들어서자 자리에서 일어난 지용이 손을 내저으며 웃어보였다.
승현이 이불을 들어올리고 손짓하자 뜻을 알아챈 호수가 잽싸게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해일 형은 왜 같이 안왔어요?"
"쓰나미 옷 갈아입어. 금방 올거야."
"아~ 그렇구나. 근데 형도 심심했어요? 나도 조금 심심했는데.. 아니면 나 보고싶었어요?"
"닭살 떨까봐 방해하러 왔다. 됬냐?"
"심술 맞으셔라.."
호수가 승현을 꼭 끌어안고 이불속에서 오들오들 떠는 사이 옷을 갈이입은 해일이 방으로 들어섰다.
그가 들어서자 호수는 승현의 뺨에 입을 맞추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해일은 그의 엽기행각에도 익숙한듯 웃음으로 일관했지만 승현은 기겁하며 지용의 눈치를 살폈다.
원래 호수는 스킨쉽을 좋아했다. 호감이 있는 상대에게 보이는 친근함의 표현이다.
"쓰나미! 나 오늘부터 승현이와 사귈려구"
"사귀다 다시 돌아오기만 해. 그럼 용서해줄게"
"그동안 심심할테니까 지용씨와 잘 지내봐. 억지로 같다 붙이면 어울리긴 하겠다."
"그럼 잠자리는 어떻게 해? 내가 지용씨에게 안겨?"
"좀 그렇다 야.."
"그럼 내가 지용씨를 안을까?"
"그건 더 그렇네.."
생각해보니 우스웠는지 두사람은 배를 잡고 웃어댔다. 언제나 즐거운 그들은 민박의 활력소였다.
해일은 웃음이 멈추자 지용에게 가까히 다가가서 그가 그리고 있던 그림을 집어들었다.
바닥에 엎드려 생각에 잠긴 사람의 그림은 한눈에 봐도 승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눈이 침침한지 종이를 높게 들어올려 불빛에 비추며 감탄했다.
"지용씨. 그림 진짜 잘그리네요? 미술 전공했어요?"
"그냥 취미입니다. 한때는 만화가를 꿈꾸기도 했지만 포기한지 오래에요."
"하긴.. 그 좋은 머리를 썩히긴 아깝죠."
"이 시간에 어쩐 일이에요? 잠이 안와요?"
"지용씨와 데이트하러 왔어요. 저 두사람은 버려두고 오늘밤은 나와 보내는게 어때요?"
"네?"
"사실은 호수가 절 버렸어요. 승현이와 놀고 싶데요. 승ㄴ혀이도 좋아하는 것 같으니 오늘은 제방에서
주무세요. 잠버릇 심하지 않으니 걱정마시구요"
"하하.."
"그럼 납치합니다?"
해일은 허락이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벽에 기대어 앉아 손가락을 튕기던 지용을 잡아끌었다.
그사이 호수는 승현이 지용을 따라가지 못하도록 목을 꽉 끌어안고 얼굴을 부볐다.
지용은 하루정도는 괜찮다는 생각에 잠시 시간을 얻어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고 흔쾌히 해일을
따라나섰다. 그때까지도 승현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호수가 친구가 많이 없어요. 늘 저와 지내니까 조금 외로운가봐요. 승현이는 성격도 차분하고
귀여우니까 동생같은 게 맘에 들었나봐요. 이해하세요"
"괜찮아요. 사실 승현이도 외롭게 자랐거든요. 가능하면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나게 하고 싶어요"
"그럼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좋은 밤을 보내볼까요?"
"하하.."
"어? 아스카씨네? 비도 많이 오는데 이 밤중에 뭐한데?"
방으로 돌아가던 해일과 지용은 대문 아래 서서 담배를 피우는 아스카를 발견했다.
지용도 지용이지만 해일도 무거운 분위기를 풍기며 홀로 서 있는 그에게 말을 붙이기가 뭐해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서둘러 방으로 돌아갔다. 늦은 시간이라 눈이 시큰하고 피로가 몰려왔다.
"비 많이 온다. 수고가 많네.. 이직은 모르겠어. 도움이 되지 못해서 미안하다. 하지만 계속 지켜보고
있으니 조만간 뭔가를 알 수 있을거야. 걱정말고 몸 잘챙겨. 비맞고 돌아다니지 말구.. 그래 나도 괜찮아
어짜피 도와주기로 한 거니 내 걱정은 하지마. 그정도로 모른척하거나 하진 않을테니까..그래..늦었으니
어서 자라. 나도 들어가봐야겠다. 이만 끊는다"
"내가 무서운 이야기 하나 해줄까?"
"귀신이야기라면 하지 마세요."
"뭐야? 너 겁쟁이구나?"
"그런게 있어요! 아무튼 하지 마세요. 하면 소리지를거에요?"
"비오는 날 물 근처에 가면 자신에게 붙어다니는 귀신을 볼 수 있데.. "
"아악!"
호수의 막무가내 귀신 이야기가 시작되자 승현은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쓰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남들 다 자는 밤중에 큰 소리가 나자 호수는 기겁을 하며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잠자코 들어. 무서우면 형아가 꼭 안아줄게"
"읍..읍!!"
"비가 오면 수면이 요동쳐서 모습을 비춰볼 수가 없잖아? 그런데 막상 들여다보면 안그렇데. 얼굴이
비춰지는 부분만 잠잠해지면서 귀신의 모습이 보인데. 간혹 도깨비 같은 형상이 보이기도 하지만
대부분 멀쩡한 사람 얼굴이 나타난데. 신기하지?"
"그거 미신이죠? 미신이라고 말해요 빨리!"
"나도 몰라. 들은 이야기거든"
"확실하지 않은 건 믿지 마세요. 비오는데 왜 그런 이야기를 해가지고서.."
"우리 확인하러 가보자"
"네에?"
"노천온천 있잖아. 거기 가보자"
"형.. 정말 왜 이러세요.."
"나 정말 궁금한 거 못참거든? 생각난 김에 확인해봐야지 아니면 잠이 안올 것 같아. 빨리 옷 입어!"
간밤에 봉창두드리는 소리도 아니고 귀신을 보러가자며 손을 잡아끄는 호수의 모습은 승현에게 있어서
엄청난 공포였다. 그는 죽어도 갈 수 없다고 바닥에 붙어 힘을 주고 버텼지만 호수의 우김에 결국
옷을 챙겨입고 방을 나섰다. 낮에 여랑이 가져다놓은 우산을 나눠쓰고 마당으로 나온 두 사람은
비바람에 따가운 눈을 반쯤 감고 조약돌이 깔려 있는 좁은 길로 들어섰다.
쉴 새 없이 번쩍거리는 번개에 서로 놀라 부둥켜 안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내리는 비에 넘칠 것 같은 온천은 아직도 김을 모락모락 내고 있었다. 비에 젖을까 팔짱을 꼭 낀
두 사람은 물가에 쪼그리고 앉아서 조심스럽게 아래를 내려다봤다.
"진짜 나타나면 기절할 지도 몰라요. 형이 책임져요"
"나도 조금 무섭다"
"궁금하다면서요!"
"집중해. 안그러면 버리고 도망간다? 나 달리기 빨라"
"제발 그러지말아요. 나 달리기 진짜 못한단 말이에요"
떨리는 마음으로 한참동안 물을 들여다 보았지만 귀신의 형상이 나타날 리 만무했다.
실망 반. 다행 반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승현이 미련이 남은 듯한 호수의 손을 잡아끌었다.
조금 더 지켜보고 싶었지만 승현의 절규가 빗속을 맴돌며 웅웅거리자 단념한 호수는 우산 손잡이를
꽉 움켜잡고 몸을 일으켰다. 바람이 거세져 자칫 잘못했다가는 우산이 뒤집힐 지경이었다.
그들은 미신은 믿을 것이 못된다느니 괜히 나왔다느니 쓸때없는 말을 주고받으며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그때 가슴을 덜컹 내려앉게 만드는 무언가가 스치고 지나갔다.
"아.. 놀래.."
"저게 누구야? 나진씨 아냐?"
"나진씨가 이 밤에 우산도 안쓰고 왜 나와요.."
"무섭게 왜 그래? 그럼 귀신이란 말야?"
"난 몰라도 형한테는 아는 척 했을 거 아니에요? 아.. 난 몰라.."
"돌아가자..빨리!"
나진으로 추정되는 사람의 모습을 본 두 사람은 우산도 내던지고 기겁하며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흠뻑 젖어버린 옷을 구석에 던져놓고 속옷만 입은 채 이불속으로 파고든 그들은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사실 호수도 호기심이 많아서 그렇지 의외로 겁이 많았다.
"그러니까 가지 말라고 했잖아요"
"궁금하니까 그렇지. 그런데.. 아까 그 사람.. 정말 나진씨였을까?"
"이 시간에 나진씨가 왜 나왔겠어요? 나왔다고 해도 비가 이렇게 많이 오는데 우산은 썼어야죠"
"그럼 정말 귀신을 본 거란 말야?"
"전 기척도 못느꼈어요. 다가오는지도 몰랐다구요.."
"몰라! 나 잘래"
호수는 자신이 저질러놓고 도리어 버럭 화를 내며 눈을 감았다.
불을 끄고 뒤척거리던 호수가 잠이 들 때까지도 복잡한 생각에 잠 못이루던 승현은 자꾸 일어나는
이상한 일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봤다. 우선 가장 이상한 것이 대양과 영원.
그들이 찾아왔을 때 분명 여랑이 문을 열어준 것처럼 말했었다. 하지만 여랑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 이후로 벌칙을 받기 위해 산을 올랐을 때도 그는 분명 영원으로 생각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또한 산을 내려올 때 들렸던 소리는 아무리 되새겨봐도 총소리라고 밖에 생각이 안됬다.
그들이 지용 몰래 자신을 데리고 가려 했던 점. 일어나지도 않은 위험을 일어날 것처럼 말했던 점.
모든게 의문 투성이었다. 게다가 전화까지 연결이 안되니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여랑 형이 나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어. 하지만 그건 영원이나 대영 형도 마찬가지야..
-내가 감기가 심해 헛것을 본걸까? 차라리 그렇다면 속 편할텐데..
그 다음은 밖에서 잠시 마주쳤던 나진의 모습이었다. 당시에는 귀신이라는 생각에 급히 뛰어
들어오느라 정확한 판단을 할 겨를이 없었지만 기억을 되돌려보니 그는 귀신이 아니었다.
승현은 한번 본 것은 무의식중에라도 잊지 않고 기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분명 질퍽- 하고 흙이 파이는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지나쳤던 사람이 그만큼의 무게를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다. 귀신이었다면 그런식의 소리는 나지 않았을 것이다.
생각이 하나 둘씩 떠오르자 환청처럼 흐느끼는 목소리가 들리며 배가 살살 아파왔다.
승현은 낮부터 복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심하게 아프지 않아 말은 안했지만 말이다.
무서운 건 싫어하지만 궁금한 건 해결해야 직성이 풀리는 승현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옷을 걸쳐입고
마루로 나가 우산을 하나 챙겨들었다. 오는 길에 버리고 왔던 우산도 찾을 겸, 겸사겸사였다.
그는 따뜻해졌던 몸이 다시 식어가는 것을 느끼며 신발을 신고 노천온천으로 향했다.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 설마 있으려구..
하지만 그의 설마 하는 생각과는 달리 온천 한 구석에 어렴풋이 고개를 숙인 사람의 형상 하나가 보였다.
그곳은 첫날 승현이 지용을 피해 앉아있던 널찍한 바위었다.
긴장한 승현은 발걸음을 재촉해 웅크리고 있는 사람에게 다가갔다. 역시 나진이었다.
승현은 나진과 안 좋은 사이라는 것도 잊은 채 들고 있던 우산을 그의 머리위로 들이밀었다.
"비가 이렇게 많이 오는데 뭐하세요? 감기걸려요"
"....................."
"혹시나 해서 와봤어요.. 아까 우리 마주쳤었죠?"
"신경쓰지 말고 들어가."
"우산 받으세요. 날이 얼마나 추운지 아세요?"
"혼자있고 싶다구! 신경쓰지 말고 들어가!"
"어떻게 신경을 안 써요? 나는 뭐 좋아서 왔는 줄 알아요? 아무리 사이가 안 좋아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잖아요! 못봤으면 모를까 봤는데 어쩌겠어요? 그러니 우산부터 받고 나서.."
"필요없어!"
"아악!!"
우당탕 -
나진이 승현을 노려보며 내민 우산을 빼앗아 집어 던지려던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바람에 우산이 뒤집힐까봐 힘을 주고 있던 승현과 그 우산을 세게 잡아당기던 나진의 힘이 서로
대립하다 휘청하며 중심을 잃었다. 바위 뒤로 넘어진 그들이 서로 뒤엉켜 정신을 못차리는 동안
진흙에 엉망이 된 옷이 흠뻑 젖었다. 넘어질 때 바위에 손을 부딪힌 승현이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숙이자
나진은 내심 미안했는지 말없이 그의 손을 잡고 문질렀다. 사실 알고보면 나진도 정이 많고 여린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단지 지용의 사랑을 잃고 화가 나 마음이 엇나간 것이지만.
"저게 뭐죠? 문 아닌가요?"
"문이네.."
나진에게 손을 잡힌 채 우산을 찾기위해 두리번거리던 승현이 무언가를 발견하고 눈짓을 하자 나진도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무성한 풀에 가려 형태는 불분명했지만 그건 분명 낡은 문이었다.
그제서야 승현은 온천이 높은 벽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빽빽히 들어서 있는 나무와
풀 때문에 보이지 않은 것도 있지만 그동안 계속 온천에만 관심을 두었기에 신경 쓰지 않았었다.
넘어진 충격에 인상을 쓰던 것도 잠시. 두 사람은 대단한 것을 발견한듯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발견한
문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사람의 흔적이 있는 나무문은 풀과 나무로 교묘히 가려져 있었고 힘을 주어
당기자 스르르 열렸다. 놀란 두 사람은 처음으로 같은 뜻을 담은 시선을 교환했다.
"지용씨! 일어나봐요. 쓰나미 일어나!"
한참 잘 자고 있던 지용과 해일을 흔들어 깨운 건 상기된 얼굴에 호수였다.
몽롱한 머리를 흔들며 겨우 눈을 뜬 지용이 시계를 봤을 땐 겨우 새벽 두시가 넘어있었다.
베게에 얼굴을 파묻고 짜증을 내던 해일까지 일어나자 호수는 근심 가득한 얼굴로 말을 꺼냈다.
"승현이가 없어요. 잠깐 잠이 들었는데 일어나보니 온데간데 없어요"
"화장실 간 거 아닌가요?"
"아니에요. 한참을 기다려도 안오길래 다 찾아봤어요. 아무데도 없어요"
호수가 손짓 발짓을 하며 있었던 일을 열심히 설명하고 있을 때 열려진 문 사이로 아스카가
스쳐 지나갔다. 해일은 급히 문을 열고 아스카를 불러세웠다.
"아스카씨. 어디 가세요?"
"나진씨가 안보여요. 찾고있는 중입니다."
"그래요? 잠시 들어오세요"
해일이 앞 뒤 설명없이 아스카를 방으로 끌고 들어오자 지용의 안색이 차갑게 변했다.
그건 아스카도 마찬가지었지만 서로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아스카는 방안에 승현의
모습이 보이질 않자 상황을 눈치챈듯 바닥에 앉으며 모두에게 질문했다.
"승현군도 안보이나요?"
"호수와 같이 자고 있었는데 없어졌어요. 나진씨는 언제부터 안보여요?"
"담배를 피우기 위해 자리를 비웠는데 그 사이에 나갔는지 방에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안들어와요"
"아까 아스카씨 대문 근처에 서 있는 거 봤는데.. 그럼 벌써 한참 됬잖아?"
"승현군은 언제부터 안보입니까?"
"한시간쯤 됬어요."
"그럼 저 좀 도와주십시오. 찾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여랑씨를 깨울까요?"
"시간이 너무 늦었어요. 우선 우리끼리 찾아보고 나서 결정합시다."
한참 곤히 자고 있을 여랑과 하루를 깨우기가 뭐했던 사람들은 각자 흩어져서 사람이 갈 수 있을만한
곳은 모조리 뒤지고 돌아다녔다. 지용은 승현이 마음에 걸려했던 영원의 방부터 빈 방을 모조리
열어보았고 호수와 해일은 공동 목욕탕. 창고. 식당 등을 뒤지기 시작했다. 아스카는 우산을 쓰고
노천온천 근처와 마당 구석구석을 살폈다. 한참을 이 잡듯 샅샅이 뒤지고 돌아다녔지만 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시 지용의 방으로 모여든 사람들은 서도 말없이 안찾아본 곳이 있나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제서야 상황의 심각함이 느껴졌다.
"온천으로 가는 입구에 우산이 떨어져 있었어요."
"빨간 우산이요?"
"네. 호수씨 뭐 아는 거 있어요?"
"그건 어젯밤에 승현이와 제가 떨어뜨린 거에요.. 그때 나진씨와 비슷한 사람을 보긴 했지만.."
"조금 더 자세히 말해봐요"
"잘못본 거겠죠. 한참 귀신이야기를 하고 있었거든요."
"흠.."
아스카는 호수의 말을 들으며 잠시 생각했지만 별로 신빙성이 없어보였는지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서로가 한참을 고민하며 가능성을 떠올리던 중 밖으로 나갔을지도 모른다는 의견까지 나왔다.
만약 밖으로 나갔다면 찾기도 불가능한 것.
"우리 어쩌죠? 문이 안 열릴 줄은 몰랐어요"
"그러게.. 들어올 때는 몰랐는데 안쪽에 손잡이가 없을 줄이야.. 밖에서 밀었던 힘 만큼 잡아당겨야
열릴텐데 손잡이가 없으니 방법이 없네."
"저.. 나진 형이라고 불러도 되나요?"
"뭐.. 마음대로 해.."
"형 추워요? 입술이 파랗게 질렸어요"
"그건 너도 마찬가지야. 감기도 심하게 걸렸었잖아"
"이제 괜찮아요. 체력은 약해도 감기는 금방 낫는 편이에요. 이렇게 하면 좀 덜 추우려나요?"
승현은 벽에 기대 떨고 있는 나진을 꼭 끌어안았다. 나진은 승현의 예고없는 행동에 놀라 몸을 움찔
했지만 체온이 느껴지자 기분좋은 듯 그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아스카나 지용의 품같이 푸근한
느낌은 아니었지만 강아지를 끌어안은 양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그 시각 밖에서 아스카가 나진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지만 문이 두꺼워 방음이 잘 되는 데다 비까지
심하게 내려 안에 있는 두 사람은 듣지 못했다.
나진은 승현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그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난 아직도 네가 싫어.."
"알고 있어요. 저도 형이 좋지는 않아요"
"그런데 이렇게 안고 있어도 기분이 전혀 나쁘지 않아..그래서 더 싫어.."
"원래 체온이라는 게 그렇잖아요. 생각이야 어느정도 의지를 담고 있지만 체온은 몸을 보호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움직이니까요. 지금은 제가 미워도 그냥 계세요"
"똑똑하구나..너?"
"미워했다가 칭찬했다가.. 헷갈리잖아요"
"사랑받을만 해.."
한참동안 서로를 끌어안고 있던 두 사람은 도저히 문을 열고 나갈 방법이 없자 안으로 들어가보기로
결정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비를 피할 수 있다는 점. 하나였다.
조금 걸어 안으로 들어가자 그들 앞으로 세개의 길이 보였다. 하나는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하나는
앞으로 쭉 이어지는 길. 나머지 하나는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었다. 두 사람은 어느길로 갈까 한참을
망설였다. 그곳은 하나의 큰 저택같았다.
"아! 휴대폰.. 형 휴대폰 가지고 있나요?"
"나 오랫동안 휴대폰 사용 안했어.. 아스카가 알아서 해줬기 때문에 안가지고 있는데.."
"저도 오는 도중에 기차 안에다가 두고 내렸어요. 둘 다 대책없는 건 마찬가지네요."
"그러게.. 그런데 이 민박에는 언제 왔니?"
"형이 도착하기 하루전에요. 사실 목적지는 따로 있었는데 기차사고가 나는 바람에 이곳으로 흘러
들어오게 된 거에요. 덕분에 고생만 엄청 하네요."
"그 기차사고. 나도 들었어. 기관사가 신호 무시하고 과속운전 했다던.."
"이상한 느낌이 들더라구요. 그래서 서둘러 내렸는데 내리자마자 다음역에서 사고가 났어요"
"다행이다.. 차라리 휴대폰을 잃고 말지 사고를 당했으면 어쩔뻔했어?"
"지금 걱정 해주는 거?"
"우선은.."
승현은 젖은 옷의 소매를 걷어올리며 씨익 웃었다. 그러자 나진이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이곳저곳
만졌다. 사실 별 거 아닌 행동이었지만 나진에게 있어서는 어느정도 경계를 풀었다는 뜻이었다.
승현은 나진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았다. 지용과의 관계부터 시작해서 어떻게 그를 따라 이곳을
찾아왔는지.. 산장 게임의 주최자가 따로 있다는 건 들어 알고 있었지만 주최자가 나진과 지용의
아버지인 건 아직 모르고 있었다. 사실 그들의 복잡한 관계를 설명하기엔 여러가지 무리가 따른다.
승현은 떠오르는 여러가지 질문을 하기 보다는 우선은 이곳을 벗어나는게 시급하다고 판단했다.
"어디로 갈까요? 어디로 가든 반대편으로 나갈 수 있어요"
"그걸 어떻게 알아?"
"느낌이에요. 문을 보니 손잡이가 떨어져나간 흔적이 없었어요. 일부러 만들어놓지 않은거죠. 들어올때
보셨겠지만 분명 사람의 흔적이 있었어요. 문은 추처럼 무게가 실려 닫지 않아도 저절로 닫히는 구조로
되어 있구요. 그러니 반대편에 출구가 있는게 당연하잖아요. 안그래요?"
"하긴. 그게 아니면 들어온 사람이 절대 나갈 수 없을테니까."
"길마다 도착지가 다를까요? 아니면 같을까요?"
"구조상으로는 같다고 봐야겠지. 지하에서는 위로 올라와야하고 위에서는 내려와야하니까. 하지만
이렇게 비밀스럽게 만들어놓은 걸로 봐서 아닐 가능성도 커. 왜 백화점 주차장 있지? 층마다 출구가
다른 것처럼 이곳도 층마다 전혀 다른 길로 빠질 수도 있어."
"그래도 무작정 기다리는 것보다 출구를 찾아서 나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응. 우선 밖으로 나갈 수만 있다면 민박을 찾아갈 수 있을거야. 그리고 사실 이 안이 궁금해."
"저두요. 그냥 돌아가기엔 왠지 미심쩍은 기분이 들어요. 그러니 형이 골라보세요. 어디로 갈까요?"
"윗층으로 가자. 지하는 위험부담이 크고 1층은 그냥 기분 나빠"
"그래요. 올라가요"
"저기..승현아."
"네?"
"내 손 잡아."
"손을요?"
"싫어?"
"형도 무섭구나? 사실 저도 조금 무서웠어요."
차갑게 식은 손을 꽉 잡은 두 사람은 천천히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나진이 윗층을 고른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지하는 위험이 닥칠 경우 지상으로 올라오는데 시간이 걸려서였고 1층은 그가 집에 갇혀 2년
동안 지냈을때 그의 아버지가 항상 감시하던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진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방과 같은 2층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들이 모르는 사실이 한가지 있었다.
온천이 있는 곳은 민박집보다 지형이 낮았다. 그리고 문 안으로 들어서 계단이 있는 곳까지 이어진 길은
평지로 보이지만 사실 눈치채지 못 할 정도로 조금씩 낮아지고 있었다. 결론은 그들이 올라간 2층이
사실은 지상과 가장 가까운 1층이었고 1층이라고 생각했던 곳은 반지하였다.
낡아 삐걱거리는 계단을 오르자 끝도 없이 이어지는 넓은 복도가 나타났다. 그리고 복도 양 옆으로는
방들이 일렬로 쭉 들어서 있었다. 두 사람은 계단과 제일 가까운 곳의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침실이네요? 침대도 있고 이불도 있어요."
"예상대로 집이었나보다. 우선 갈아입을 만한 옷이 있나 찾아보자"
"저기 문이 있네요. 욕실인가?"
승현은 방 한구석에 달려있는 작은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그동안 나진은 옷장 문을 열고 입을 만한
옷이 있나 살펴보기 시작했다. 시골집이라고 하기엔 가구나 장식이 굉장히 서구적인 느낌이었다.
"욕실 맞네요. 지저분하지만 청소하면 쓸만하겠어요. 따뜻한 물도 나오구요"
"물이 나온다구?"
"네."
"그럼 확실히 사람이 출입한다는 뜻이네.. 그렇지 않고서야 난방까지 되어있을 리가 없잖아. 수도가
끊어져 있지 않다는 것도 이상하구.."
"제가 청소할게요. 우선 씻고 잠부터 자요. 잠 잘 시간을 넘겨서 죽을 지경이에요"
"여자가 쓰던 방이었나봐. 옷이 여자옷뿐이야."
"바지는 없어요? 잘 고르면 여자옷도 맞긴한데.."
"그래도 어떻게 여자옷을 입어?"
"젖은 옷을 입고 있을 순 없잖아요. 그냥 입어요"
승현은 샤워기를 길게 뽑아들고 먼지로 가득한 욕실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사용한 흔적이 있어서
그런지 생각보다 오래걸리진 않았다. 샤워를 마친 두 사람은 옷장 앞에서 심각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옷을 뭘 입어야 할까.
"이 레이스 뭐에요.."
"말했잖아. 여자옷이라고"
"요즘은 남자옷이나 여자옷이나 별 차이 없던데.."
"여기 잠옷있다. 이거라도 입자"
"와.. 이방 주인 덩치 무지 컸나보다. 옷이 왜 이렇게 커요?"
옅은 꽃무늬가 있는 여성용 원피스 잠옷. 사실 마음에 내키진 않았지만 젖은 옷이 마르기 전까지는
방법이 없었다. 두 사람은 재빨리 젖은 옷을 갈아입고 침대로 누웠다.
이불은 여름용이었지만 매트리스의 쿠션이 워낙 좋아 푸근한 느낌이 들었다.
자리에 눕자 나진은 승현에게 몸을 밀착했다. 승현도 그의 행동에 몸을 돌리고 마주 누웠다.
"머리가 젖어서 차가워요."
"말리고 자야겠네"
"아뇨. 괜찮아요. 그나저나 엄청 좋은 냄새나네요"
"머리가 길어서 그런지 샴푸냄새가 잘 가시지 않아."
"우리끼리 이러고 있으니까 묘한 기분이 드는 게 웃겨 죽겠어요"
"웃겨도 그냥 자. 추워서 못견디겠어"
"욱.."
"이 승현. 왜 그래? 어디 안좋아?"
"저 사실 하루종일 속이 안좋았어요. 밥 먹은 게 잘못됬나?"
"오늘 낮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아.. 아이스크림 사러 하루형하고 슈퍼에 갔다가 이상한 사람들한테 끌려갔어요. 아스카씨가
도와주지 않았으면 큰일날 뻔 했어요. 그놈들이 몸에 손을 대려고 했거든요."
"아.. 그랬구나."
이제서야 자세한 설명을 들은 나진은 내심 아스카에게 미안해지기 시작했다. 승현이 미워서 화난 척
했었지만 사실 그는 아스카 본인에게 설명을 듣고 싶어했었다. 화가 난 아스카가 결국 자세한 이야기도
해주지 않고 나갔지만.
"많이 놀랐나보다. 그래서 먹은 게 잘못됬나봐. 왜.. 갑자기 놀라면 체하고 그렇잖아"
"그런가.."
"똑바로 누워봐. 내가 배 쓸어줄게."
"하하.. 괜찮아요"
"좋아서 해주는 거 아니니까 그냥 누워"
간지러움을 잘타는 승현은 몸을 돌리고 바로 누워 입술을 깨물고 키득거렸다.
하지만 울렁거리는 속을 조금이라도 달래기 위해서는 참아야혰다.
요령있게 명치와 아랫배 사이를 쓱쓱 문지르던 나진이 한숨을 내쉬며 조용히 말했다.
"우리 없어져서 난리 났겠지?"
"그러게요. 낮에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더 그럴텐데.."
"나도 몰라.. 권 지용, 아스카 고생 좀 해보라지"
아침까지 한 방에 모여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네 사람은 여랑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다시 그들을 찾기
시작했다. 여전히 흐렸지만 그래도 비는 거의 그쳐있었다.
대문은 열린 흔적이 없었다. 여랑이 문단속을 할때 문의 빗장위에 추가로 가는 철사를 끼워넣는데
그것이 그대로 있는 것만 보아도 두 사람이 밖으로 나간 건 아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는 모든 공간을 뒤진 그들은 마지막 남은 노천온천으로 향했다.
그리고 어렵지않게 구석에 떨어져 있는 우산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지용은 살이 부러져버린 우산을 집어들며 아스카를 바라보았다.
"아스카씨. 어제 이곳을 둘러보면서 우산을 못봤나요?"
"어두운데다 비가 많이 와서 자세히 살펴보지 못했습니다. 우산이 검은 색이라 못보고 지나친 것 같네요.
조금 더 주의깊게 살펴봤어야 하는데.."
"두 사람이 같이 왔던 것만은 확실하군요."
지용은 우산을 바위 위에 올려놓고 땅을 살폈다. 바닥은 진흙이 되어 질퍽거린 채 엉망이 되어있었지만
다행히 두 사람의 흔적이 조금은 남아있었다. 그는 바닥에 손을 가져다대며 말했다.
"분명 바위 뒤로 넘어진 겁니다. 보세요. 체중이 실려 바닥이 움푹 파였죠? 넘어지기 직전에 균형을
잡기 위해 발에 힘을 주다 미끌어진 거에요. 바위 뒤에 분명 흔적이 남아있을 겁니다."
그의 말대로 바위 뒷쪽에 사람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지용은 예상이 들어맞자 손가락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두 사람이 겹쳐 넘어졌나보네요. 땅이 깊이 파여있어요. 희미하지만 발자국도 보이죠?"
"그렇네요. 방향은 저 쪽."
짓이겨진 풀을 따라 이동하자 그 흔적 끝에 위치한 낡은 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발자국을 살피던 지용은 두 사람이 문 안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확신하고 거칠게 문을 열었다.
잡아당겼을 때는 꼼짝도 안하던 문이 힘을 주어 밀자 마찰음을 내며 손 쉽게 열렸다.
두 사람이 계속 한자리에 머물자 온천 근처에 서 있던 여랑과 하루. 해일과 호수가 가까히 다가왔다.
지용이 문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무게실린 육중한 문이 스르르 닫혀버렸다.
안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자 제일 가까히 서 있던 아스카가 문을 밀고 그를 꺼내주었다.
"문 안쪽에 손잡이가 없어요. 경첩에 장치가 되어있어서 손대지 않고도 문이 닫히는군요. 어쩌면
문을 열지 못하고 안으로 들어갔을 수도 있습니다."
"정말 손잡이가 없네요. 안에서는 문을 잡아당겨야 열리는데 손잡이가 없으니 절대 열지 못하겠군요"
"찾아봐야겠어요."
지용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수신이 되는지 확인했다. 역시 안쪽에서는 터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휴대폰이 안터지네요. 그럼 한시간 뒤에 이곳으로 와주시겠어요? 문을 열어주세요."
"지용씨. 같이 갑시다. 저도 가겠습니다."
"두사람이나 갈 필요 있습니까?"
"없어진 사람은 승현군뿐만이 아닙니다. 저도 가겠습니다."
아스카는 문을 밀때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지용을 스쳐지나 안으로 깊숙히 들어갔다.
사실 지용은 아스카와 같이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품고 있는 감정이 안 좋기 때문이다.
그가 해일과 자리에 서서 여러가지 가능성을 설명하고 있는 동안 안으로 들어갔던 아스카가 다시 걸어
나왔다. 그는 약간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생각보다 규모가 큽니다. 지하로 통하는 길. 윗층으로 통하는 길을 포함해서 얼추
짐작해봐도 꽤 넓은 것 같아요.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리겠습니다."
"그렇습니까?"
"지용씨는 저와 같이 가십시오. 해일씨와 여랑씨는 지용씨 말대로 한시간 후에 다시 와주세요"
"차라리 모두가 흩어져서 찾아보는 게 어떨까요?"
여랑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꺼내자 아스카가 그를 바라보며 질문했다.
"여랑씨. 이곳의 존재를 알고 계셨습니까?"
"전혀 몰랐어요"
"5년동안 민박을 운영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발견하지 못했습니까?"
"네.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민박의 부지가 넓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온천 뒤로 숨겨져 있는 공간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정말 난감하군요"
"그럼 이렇게 하죠. 저와 지용씨가 한팀이 되어 움직이고 수고스럽겠지만 해일씨와 여랑씨가 한팀이
되어 다른 곳을 살펴 봐주십시오. 문을 열어줄 사람이 필요하니 하루씨와 호수씨는 민박에 남으시구요"
"좋은 생각입니다. 그렇게 해요"
아스카에 말에 해일도 흔쾌히 동의하고 나섰다. 하지만 남겨진 호수와 하루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특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호수가 그랬다.
"여기.. 너무 기분 나빠. 토할 것 같아"
"호수야. 넌 하루씨와 돌아가있어. 승현이 찾고 금방 올께"
"미치겠어. 그냥 잘껄.. 괜히 방을 바꿔서.. 지용씨 미안해요"
"호수씨 책임이 아니에요. 승현이가 워낙 호기심이 많아요."
지용은 울상을 짓고 있는 호수를 위로하고 아스카와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해일은 여랑은 하루와 호수를 달래 밖으로 내보내고 급히 그들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안으로 들어가니 아스카의 말대로 저택을 연상시키는 넓은 거실이 나타났다.
"세 갈래길이네요? 정말 규모가 엄청나군요"
"나눠서 찾아보도록 합시다. 빨리 둘러본 팀이 나머지 한 곳도 찾아보구요"
"지하로는 절대 가지 않았을 겁니다. 승현이가 지하에 대한 안좋은 기억이 있기 때문입니다"
"2층도 아닐 겁니다. 나진씨 역시 2층에 좋지 않은 기억이 있어요"
지용은 승현이 산장 지하실사건 때문에 지하로 들어가지 않았을 거라 확신했다. 아스카는 2년동안이나
2층방에 갇혀 지냈던 나진이 다시 2층으로 올라가지 않았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스카의 생각은 틀렸다. 나진은 2층보다 오히려 송 회장이 거주하는 1층을 더 싫어했다.
지용과 아스카가 1층을 선택하자 여랑과 해일은 지하를 선택했다.
그들은 사라진 두 사람을 걱정하고는 있지만 숨겨진 공간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 오히려 신기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지용은 두려움을 느꼈다. 출구가 없이 막힌 공간. 그것은 산장과 너무나도 흡사했다.
과거의 기억때문에 자연스럽게 긴장 할 수 밖에 없었다.
무슨일이 있을 경우엔 큰 소리로 서로를 부르기로 합의 본 네 사람은 각자의 길로 흩어졌다.
지용과 아스카는 어색한 기분으로 묵묵히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커다란 쇼파를 지나 안으로 깊숙히 들어가자 형무소를 연상케하는 넓은 복도가 나타났다.
생각보다 내부의 규모가 엄청났다.
지용은 입술을 깨물며 미간을 좁혔다. 그것은 바닥으로 고개를 떨군 아스카도 마찬가지었다.
-six-
"우욱.."
"왜 그래?"
잠에서 깨어난 승현이 몸을 일으키다가 갑자기 입을 틀어막고 욕실로 뛰어들어갔다.
나진은 일찍 깨어났지만 기운이 없어 눈만 깜박이다가 자지러지듯 몸을 움찔하며 구역질을 하는 승현을
따라 욕실로 들어갔다. 전날 하루종일 한 끼도 먹지 않아서인지 현기증이 났다.
굶는게 익숙해서 참을만은 했지만 공복이 불러오는 몸의 여러가지 변화는 스스로 견뎌야했다.
승현이 고개를 숙이고 계속해서 구역질을 해대자 나진은 그의 등을 두드리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컥.."
"아직도 심해? 속은 비었네.. 아무것도 안올라오는 걸 보니까"
"나.. 점점.. 욱.."
"숨을 좀 쉬어봐. 이 승현!"
"쓴 물만.. 콜록.."
"피가 섞여 올라오잖아? 너 괜찮은거야?"
저녁을 먹는둥 마는둥 했기에 별 달리 토해내는건 없었다. 그런데도 승현이 급체를 한 사람처럼
진저리를 치며 몸을 떨자 겁을 집어먹은 나진이 등을 두드리며 안절부절 못했다.
분명 토해낸 약간의 물에 살짝 피가 섞여 있었다.
"이제 괜찮아요.."
"우선 눕자. 일어설 수 있겠어?"
"앗.."
"내 팔 잡아. 미끌어지면 다치니까 조심해"
승현은 세면대로 다가가 겨우 입만 행군 뒤 나진의 부축을 받으며 욕실 밖으로 나왔다. 침대에 눕자
머리가 핑 돌고 눈 앞이 노래졌다. 나진은 엄지손가락으로 그의 명치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단순히 체한게 아닌 것 같아. 어제 뭐 먹었어?"
"그냥 밥이요. 아침 먹고 점심은 거르고 저녁 조금 먹었어요"
"배는 언제부터 아파?"
"아침 먹고나서 부터요"
"쉰트림이 난다거나 명치가 쑤시거나 손 발이 차가워지지 않았어?"
"그런 증상은 없었구요.. 배가 아프면서 가끔 현기증이 나고 속이 울렁거렸어요"
"손을 잡아봐도 차갑진 않은데.. 밥 말고 먹은 거 없어?"
"네.. 전혀요.."
"나는 밥을 잘 안먹어서 모르겠는데 보통 식탁에 앉는 자리가 정해져있니?"
"아니요. 그날그날 내키는 자리에 앉아요."
"그럼 밥은? 들어갔을때 밥이 식탁에 놓여있었니? 아니면 누가 가져다줬니?"
"하루형이 밥을 퍼서 직접 가져다줬어요."
"그럼 반찬은? 공동으로 먹은 것 말고 혼자 다른거 먹은 적 있어?"
"음.. 없어요. 다같이 먹었어요"
"그럼 밥이 문젠가...."
"왜 그래요? 무슨 생각해요?"
"아니야.. 아무것도.."
나진이 갑자기 말을 멈추고 심각한 표정을 짓자 승현이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웅얼거리듯 말했다.
한바탕 소동을 벌인 후라 목소리에 기운이 없었다.
"누군가를 의심하지 말아요. 의심했다가 안맞으면 죄책감이.. 커져요.."
"무슨 소리야?"
"아니에요..욱.."
"또 그래?"
승현은 나진에게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더니 배를 부여잡고 몸을 웅크렸다.
또 다시 울렁거림이 밀려드는지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분명 전날까지는 배가 아프다고만
했지 이정도는 아니었다. 나진은 승현에게 손도 못대고 입술만 깨물다 결국은 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비틀거리며 계단을 단숨에 뛰어내려와 닫혀진 문을 힘껏 두드리며 소리질렀다.
"누구 없어요! 내 목소리 들리면 제발 문 좀 열어주세요!"
사람들이 온천에 올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비가 내린 직후 노천온천을 찾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진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찾고 있으리라는 강한 확신을 했다.
운이 좋아 이 소리를 듣는다면 분명 문을 열어줄 것.
"지용씨. 느껴지십니까?"
"네?"
"온천이 민박집보다 지형이 낮은건 알고 계시죠?"
"알고 있습니다"
"그럼 안으로 걸어들어오면서 계속 낮아지고 있는 것도 알고 계십니까?"
"그런가요? 몰랐습니다."
"자. 보십시오"
아스카는 주머니에서 담배 한가치를 꺼내 바닥에 가만히 내려놓았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담배가 앞으로 또르르 굴러가기 시작했다. 평지라면 담배가 앞으로 굴러가는 일은
없을 터. 윤호는 조금씩 움직이는 담배를 손가락으로 집어올리며 아스카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는 실험이 필요할 만큼 미세한 차이를 알아낸 아스카가 놀라울 뿐이었다. 하지만 눈은 여전히
경계심으로 가득했다. 같은 공간에 있어도 다른 생각을 하는 것 처럼.
"그렇게 보지 마십시오. 감이 좋은 것 뿐입니다."
"전 아무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말을 꺼낸데에는 이유가 있겠죠?"
"별다른 뜻은 없습니다. 지상과 멀어진다는 느낌이 들어 한번 말해봤습니다"
아스카는 담배를 들고 있는 지용에게 라이터를 불쑥 내밀었다. 담배를 피우지 않겠냐는 뜻이었다.
하지만 지용은 그의 행동에 쥐고있던 담배를 반으로 꺾어 구석으로 휙 던졌다.
아스카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역력했다.
"라이터 켜지 마십시오"
".................."
"담배를 집어들때 알았습니다. 이 바닥은 뭔가로 손질이 되어있습니다. 냄새는 남아있지 않지만 손끝이
따끔거리는 것으로 보아 바닥은 화학물질로 코팅되어 있는겁니다. 그러니 바닥을 굴렀던 담배를
피울 수는 없겠지요? 그리고 화학물질은 대부분 발연성. 불꽃이 나면 단숨에 타버립니다."
지용의 말을 들은 아스카는 허리를 숙여 바닥을 유심히 살폈다.
처음 들어올 때부터 미끈거린다는 생각은 했지만 단순히 바닥을 손질하는 왁스쯤으로 여겼었다.
그 역시 한번의 접촉만으로 화학물질임을 알아챈 지용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지용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보통 바닥에 발연성 물질을 발라놓는데는 한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위급상황에 손쉽게 증거를
없에려는 것. 말 그대로 한번의 발화만으로 집을 통째로 사라지게 할 수 있는 것. 이 숨겨진 공간은
역시 안좋은 느낌이 나는군요. 이정도로 철저한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복도가 꽤 길군요. 살펴보려면 시간이 걸리겠어요."
"그건 그렇고 아스카씨는 왜 왔습니까?"
"저는 오면 안됩니까?"
"서로가 껄끄러운 상대 아닙니까? 어째서 나를 따라온 겁니까?"
"나진씨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정말 그 이유 때문입니까?"
"사실 지용씨와 하고 싶은 이야기도 있고 겸사겸사입니다"
아스카가 지용과 할 말이 있다는 건 의외였다. 지용은 미심쩍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걸음을
멈춰섰다. 그것은 할 말이 있으면 당장 해보라는 암묵적인 표현이었다.
그들은 필요 이상의 대화를 주고 받지 않는다. 언제나 눈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해 왔으며 그것은
같은 목적으로 이곳에 들어선 이후에도 변함이 없다. 지용이 벽에 기대어 선 채 계속해서 같은 의미의
시선을 보내자 아스카는 자신이 하려던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때 마침 타이밍 좋게도 누군가의 목청 높여 도움을 청하는 소리가 넓은 거실을 울리며 비교적
또렷하게 들려왔다.
"나진씨 목소리.."
"문쪽인가봅니다. 어서 가봅시다!"
사람의 기척을 느낀 그들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는 사실도 잊은 듯 앞 다투어 현관으로 뛰기 시작했다.
낡은 바닥이 딱딱한 구두굽 소리로 진동했다. 그나마 깊숙히 들어오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호수씨. 우선 물 부터 드세요."
사람들이 모두 발견된 집 안으로 들어가버리자 민박에 남겨진 하루는 호수를 데리고 식당으로 돌아와
시원한 물 한잔을 그의 앞으로 밀어놓았다. 호수는 속이 울렁거리는지 연신 가슴을 쓸어내리며
인상을 쓰고 있었다.
"뭐라도 드셔야지요. 속 많이 안좋으세요?"
"......................."
"물을 마시면 좀 나아질거에요."
"이제 겨우 둘만 남았네.."
"네?"
"오랜만이야. 하루씨"
"네?"
"나 본 적 없어? 우리 만난적 있지?"
"무슨 말인지.."
"잘 생각해봐. 얼굴을 보지말고 말투나 성격을 떠올려 보란 말야"
"..........."
"힌트 많이 줬는데도 모르겠어?"
"호수씨?"
식탁에 턱을 괴고 불쾌한듯 인상을 쓰고 있던 호수가 금새 안면을 바꾸고 웃으며 일어났다.
그리고는 곧장 하루에게로 다가가 그의 긴 머리를 쓸어내렸다. 돌변한 호수의 태도에 당황한 하루는
한 걸음씩 물러서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식당은 철저히 둘만 존재하는 공간.
"왜 이렇게 긴장하고 그래? 너 이 정도로 떨 사람 아니잖아?"
"호수씨. 왜 이래요?"
"질려하는 네 얼굴이 보기 좋아서 그래. 이 얼굴로 여지껏 여랑씨를 붙잡고 있었던 거야?"
"호수씨!"
"음식에 약타는 것도 한번으로 그쳤어야지.. 두번째에는 내성이 생긴다구.."
"약이라니요!"
"시치미 뗄 생각이야?"
"미친거 아니에요?"
"미쳤다면 예전에 미쳤겠지. 난 아직도 이렇게 힘든데 넌 보란듯이 잘 살고 있잖아. 그런데 많이
둔해졌어.. 얼굴이 바뀌었다고 성격이나 말투. 목소리도 잊다니.."
"왜 그래요. 우리 그때는 사이 좋았잖아요"
"사이 좋았던 사람에게 그런 짓을 해? 내가 오늘 진짜 사이좋은게 뭔지 똑똑히 알려주지."
-하루씨. 너무 부지런하세요. 이렇게 일찍 일어나다니 존경스러워요!
-전 해야 할 일이 많잖아요. 좋은 꿈 꿨어요?"
-옆에서 자는 짐승같은 놈이 어찌나 잠꼬대가 심한지 자다가도 몇번이나 배를 누른다니까요?
기회봐서 죽여버릴까봐요.
-귀여워요. 두 분.
하루는 그제서야 호수의 기억을 떠올리고 몸을 휘청했다.
호수의 차가운 손이 천천히 목을 조여오자 다리가 풀린 그는 싱크대에 겨우 몸을 지탱하고 손을 더듬어
식칼을 집어들었다. 그러자 호수가 목을 조르던 팔을 거두고 팔짱을 끼며 씨익 웃었다.
"나 죽이려구?"
"가까히 오지 마! 조금만 더 다가오면 찌르겠어!"
"마음대로 해. 여랑씨가 도와주지 못하니 네 힘으로라도 저항해야지"
"오지마!"
하루는 칼을 두손으로 꽉 움켜쥐고 싱크대를 따라 조금씩 옆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틈을 봐서 식당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호수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덜덜 떨리는
식칼의 날 끝을 손가락으로 살짝 집었다. 마치 자신을 찌르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이라도 한 듯.
"왜 그랬어? 그때 나한테 왜 그런 짓을 했어?
"좋은 일이었잖아요. 좋은 일이라기에 호수씨를 추천한 것 뿐이라구요.."
"그게 좋은 일이야? 그렇게 좋으면 네가 하지 그랬어!"
호수가 정색하고 잡아먹을듯 노려보자 하루는 그의 몸을 힘껏 밀고 정신없이 식당 밖으로 나갔다.
다리가 후들거리는 탓에 이대로 달아나면 머지않아 호수에게 잡히겠다 싶었던 하루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잠그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잠시동안은 잠잠하니 밖이 조용했다. 하루는 입술을 세게
깨물며 호수의 기억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과거 기억과 현재 기억이 일치하지 않았다.
-분명 그 사람인데.. 왜 얼굴이 다른거지? 이름도 호수가 아닐텐데.. 도대체 어떻게 된거야..
왜 얼굴까지 바꾸고 날 찾아온거지? 도무지 모르겠어..
하루는 입술이 터지도록 잘근잘근 씹어대다가 여랑에게 연락을 해보기 위해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하지만 사용자가 전파가 닿지 않는 곳에 있다는 안내 메시지만 나올 뿐 연결되지 않았다.
그는 불안한 마음에 앉지도 못하고 방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가장
이해가 안되는 것은 호수가 자신의 목을 조르려고 했다는 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살기를 부를만큼
그에게 잘못한 적이 없었다. 그렇게 억지로 그와의 과거를 떠올리려고 머리를 굴리고 있을때 방문의
손잡이가 천천히 돌아가더니 문이 스스르 열렸다. 놀란 하루는 재빨리 문으로 뛰어가 손잡이를 잡고
버텼지만 열린 문 틈 사이로 호수의 얼굴과 마주치자 버티고 있던 몸에 서서히 기운이 빠졌다.
호수는 어깨를 사용해 문을 밀며 그를 향해 씨익 웃었다.
"내가 조금 빨랐지?"
"윽..."
"그러길래 왜 숨어. 찔리는 거 있어?"
"도대체 나한테 왜 이래!"
문이 점점 강하게 밀리자 하루는 몸을 숙여 바닥에 떨어져 있는 식칼을 집어들고 옆으로 비켜났다
동시에 방문이 벌컥 열리며 호수가 안으로 밀려들어왔고 그 틈을 타 하루는 신발도 신지 않고 온천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여랑뿐 아니라 자신을 도와줄 만한 사람들이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방심한 틈에 하루를 놓쳐버린 호수는 헝크러진 머리를 여유롭게 넘기며 천천히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시커멓게 몰려 든 먹구름이 번쩍 하고 빛나더니 천둥소리가 온 하늘을 울렸다.
탁 탁탁 -
계단을 오르던 나진은 아랫층으로부터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걷는것이 아니라 분명 급히 뛰는 듯한 발소리였다. 그는 너무나 반가운 나머지 다시 몸을 돌려
계단 아래로 뛰어내려갔다. 그 아래에는 가뿐 숨을 헐떡이며 위를 바라보는 지용과 아스카가 있었다.
"나진 형!"
"나진씨!"
두 사람이 동시에 이름을 부르자 그제서야 안도한 나진은 잠시 멈춰섰다가 나머지 계단을 마저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때 머리가 찡 - 하고 울리며 현기증이 일어났다. 심하게 굶은 이후 자주 겪는
몸의 변화였다. 그 때문에 중심을 잃은 몸이 힘없이 계단을 굴렀다.
"형! 괜찮아?"
"나진씨!"
나진이 한바탕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아래로 굴러 떨어지자 놀란 지용과 아스카는 그에게로 달려가
다급히 무릎을 대고 바닥에 앉았다. 다행히 다리가 긁힌 것 외엔 별달리 다친 곳은 없어보였다
엎드려서 다리를 잡고 쩔쩔매던 나진은 고개를 들어 아스카를 바라보았다.
그도 놀랐는지 부릅뜬 눈이 심하게 동요하고 있었다. 그 눈과 마주치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에
나진은 무의식적으로 지용의 목을 끌어안고 매달렸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형! 그렇게 급히 뛰어내려오면 어떻게 해? 다친데 없어?"
"괜찮아..윽"
"다리 많이 까졌네. 아무튼 무조건 뛰고본다니까.. 그것보다 옷차림이 그게 뭐야?"
"응?"
나진은 자신이 여성용 잠옷을 입고 있다는 생각을 잠시 잊고 있었다. 그만큼 승현에게 엄청나게
신경을 쓰고 있었다는 증거다. 그는 자신의 몸이 약하기 때문에 아픈 사람을 보면 금방 흥분하고 만다.
굴러 떨어질때 어딘가에 걸렸는지 넥라인이 엉망으로 찢어져있었다. 지용은 빨갛게 부어버린 목
언저리가 신경 쓰이는지 찢어진 옷을 정성스럽게 여미고 몸 이곳저곳에 붙어있는 먼지를 털어주었다.
자상한 성격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승현이가 아파. 빨리 가봐야 해"
"승현이가 왜?"
"계단 오르자마자 왼쪽 첫번째 방이야. 배가 아프다면서 구역질하고 토하는데 살짝 피까지 섞여나와.
미치겠어..체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것 같아. 빨리 가봐"
"먼저 올라간다. 아스카씨! 형 좀 부탁해요!"
나진이 굴러떨어지는 바람에 승현에 대해 묻는 걸 잠시 잊고 있었던 지용은 그의 말을 듣자마자
몸을 날려 정신없이 위로 뛰어올라갔다. 지용이 사라지자 남겨진 두 사람 사이에는 어색한 적막이
감돌았다. 나진은 아스카의 얼굴을 바라 볼 면목이 없었던지 고개를 숙이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자 그의 행동을 말없이 지켜보던 아스카는 손을 뻗어 허리를 끌어안더니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전날과는 다르게 부드럽고 따뜻한 기분에 나진은 마음을 놓고 그의 옷깃을 꽉 부여잡았다.
"죄송합니다. 나진씨"
"뭐가?"
"어제 일 말입니다."
"날 찾으러 왔으니 없던 일로 해줄게"
"고맙습니다"
"나도 오해해서 미안했어. 하지만 차근차근히 설명해줘도 됬었잖아. 어린애 같이 굴어도 말귀는 다
알아들으니까.. "
"................."
"앞으로 나도 노력할게. 널 곤란하게 만들지 않을게. 그러니 날 전처럼 형제 같이 대해줘"
"알겠습니다."
"너도 봤지? 지용이와 승현이.. 내가 끼어들 틈이 조금도 없어. 역시 쓸때없는 욕심을 부렸던 거야.
아버지탓으로 돌리려고 해봐도 떨어져있던 2년의 시간은 틈이 너무 커서 매울 수 없겠더라..
이제 포기할래. 아직도 좋아하지만 지용의 곁에는 나보다 승현이가 더 어울리는 것 같아.
그러니 너도 승현이가 마음에 든다면 포기해. 승현이도 너보다는 지용이가 훨씬 잘 어울려."
"이렇게 쉽게 포기하다니.. 괜찮겠습니까?"
"쉽게 포기하는 거 아냐.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아파. 하지만 어린 애도 아닌데 욕심을 부린다고
해결되는 건 아니잖아. 역시 돌아가지 않고 머물길 잘했어. 덕분에 확실한 정리를 할 수 있었어."
"이제야 나진씨답습니다. 눈물을 흘리지 않고 정확히 다짐하는 모습 보기 좋습니다."
"나 서울로 돌아가면 집에서 나오고 싶어. 지용이와 확실히 정리했으니 아버지도 반대하진 않으시겠지?
기운을 차리고 못했던 일들을 하면서 새로운 사랑을 찾을 생각이야"
"잘 생각하셨습니다"
"아스카도 이제 내 걱정 하지말고 홀가분한 생활을 하길 바래. 그동안 나 때문에 힘들었지? 내가 너무
응석을 부린 것 같아. 나이도 많은데 이게 무슨 창피람.."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형제라면 도움이 필요할 때 돕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고마워. 네가 있어서 언제나 든든해. 그런데 왜 대답안해?"
"뭐가요?"
"승현이는 포기하라니까? 인간적으로 나도 포기했는데 네가 포기안하면 곤란하잖아. 저 두 사람"
"아.. 걱정마십시오. 제가 좋아하는 사람은 승현군이 아닙니다"
"그래? 그렇담 다행이네. 상대가 누구든 잘 되면 소개시켜줘. 나도 좋은 사람 만나면 소개시켜줄게"
"좋습니다."
나진이 환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아스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부축했다.
하지만 나진은 그의 손을 멀리 밀어내며 혼자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혼자 간다니까?"
"다리 괜찮습니까?"
"긁힌 것 뿐이야. 그런데 넌 나보다 나이도 어리면서 왜 이렇게 어른스러워?"
"어른스러워요?"
"예전부터 느낀건데 넌 너무 어른스러워서 탈이야. 아무에게나 자상하게 굴면 오해받기 딱 좋아"
"그럴리가요"
"나도 너처럼 자상한 사람 만나길 기도해줘. 사실 지용이도 너에 비하면 새발의 피라니까?"
"하하.."
나진은 부축해 주겠다는 아스카의 손을 기어코 뿌리치고 잽싸게 윗층으로 뛰어올라갔다.
아스카도 그제서야 굳어있던 인상을 펴고 그를 따라 2층으로 향했다. 나진이 굴러 떨어진 충격으로
계단은 전보다 더욱 삐걱거렸다. 발에 힘을 주고 조금만 세게 구르면 무너질 정도였다.
"욱..."
"나진 형. 승현이 언제부터 이래?"
"아침에 일어나고부터 계속 이래. 잠시 멈췄다 싶었는데 또 시작이네.. 어쩌면 좋지?"
"이 승현!. 눈 뜨고 형 봐봐"
"쿨럭..."
승현이 배를 부여잡고 괴로워하자 나진이 울상을 지으며 침대맡을 서성였다.
이유를 모르는 지용도 안절부절하기는 마찬가지었다. 그때 아스카가 두 사람 사이로 고개를 불쑥
내밀더니 엄지 손가락을 세워 재중의 명치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승현군이 어제 뭘 먹었죠?"
"아침 먹고 그 이후로 계속 굶다가 저녁 조금 먹었습니다."
"증상은 급체인데 몸을 살펴보면 체한 것 같지 않습니다. 명치에 응어리도 잡히지 않아요. 평소에도
이런 일이 자주 있었습니까?"
"처음입니다. 배탈이 난 적도 없어요."
사실 지용은 승현이 잘 체하는 체질인지 아닌지 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산장에서 같이
지낸 일주일을 제외하고는 이번 여행이 만남의 전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승현이 한 말에 의하면
살면서 한번도 배탈이 난 적이 없다고 했다. 지용은 그가 한말을 그대로 아스카에게 전해주었다.
땀에 흥건히 젖은 승현의 몸 구석구석을 꼼꼼히 살피던 아스카가 다시 지용에게 말을 걸었다.
"탈수가 일어나기 전에 어서 민박으로 옮겨야겠습니다. 하루씨와 호수씨가 언제쯤 올까요?"
"한시간 후에 와달라고 했으니 아직 20분이나 남았네요"
"약을 먹이면 조금 나아지려나.."
"몸에서 받지 않아 약을 못먹는다고 했습니다."
"그럼 감기 걸렸을때 약을 안먹였습니까?"
"마땅히 먹일약도 없었으니까요. 어제 아침에 하루씨가 준 비타민을 제외하고는 약을 먹인 적이
없습니다. 어제는 별 이상이 없었는데 이상하네요."
"지용아 잠깐.. 어제 아침에 비타민을 먹였다구?"
"하루씨가 주길래 먹였어. 왜?"
"승현이 말로는 어제 아침부터 배가 살살 아팠다고 하던데? 심하지 않아서 말 안하고 있었데"
"그래?"
나진의 말에 지용은 그의 말을 내심 마음에 걸려하며 심각한 표정으로 승현의 이불을 고쳐 덮어주었다.
그러자 잠시 물러섰던 아스카가 지용의 어깨위로 손을 올리더니 고개를 문쪽으로 휙 돌렸다.
잠깐 나가자는 뜻이었다. 지용도 그 뜻을 짐작했는지 나진에게 승현을 부탁하고 문 밖으로 나갔다.
"할 말이 있으십니까?"
"지용씨. 일이 이렇게 된 거 솔직하게 말하겠습니다. 송 회장님께 복수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네?"
"그동안의 일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지용씨의 집안부터 산장 일. 전부 말입니다"
"............"
"제가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은 송 회장님의 명령 때문만은 아닙니다. 명령이 떨어진 건 우연이었지만
그 전에 이미 저는 지용씨가 이곳으로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설마.. 절 미행하신 겁니까?"
"그렇습니다. 지용씨가 산장에서 나온 이후 송 회장님의 감시를 받고 있었다는 건 알고 계시죠?"
"그정도는 예상했습니다. 송 회장님이 절 쉽게 풀어줄 사람은 아니지요. 산장일에 대해 자수를 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살려주었지만 평생 감시할 줄 알았습니다."
"예상대로 쭉 감시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사람을 시켜 지용씨와 이 민박 주변을
감시했습니다."
"이유가 뭐죠?"
"지용씨를 감시한 이유는 슬퍼하고 있는 나진씨를 도와주기 위해서. 민박 주변을 감시한 것은 송 회장을
회장자리에서 끌어내리기 위해서입니다"
"네?"
아스카의 입에서 튀어나온 의외의 말에 지용은 만지락거리던 문 손잡이를 놓고 눈을 치켜떴다.
그렇다면 그동안 아스카에게서 느꼈던 싸늘함은 무엇이란 말인가.
지용은 잠시 입을 다물고 머리를 굴렸다. 자세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꽤 많은 설명이 필요할 것 같았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우선 저희 집안에 대해 말씀드리지요. 나진씨는 저희 집안과 송아의 친분이 대등한 관계로 이루어
졌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닙니다. 처음부터 저희가 송 회장 손 아래에 있었습니다.
반강제적으로 충성하며 일을 돕고 있었지요. 저는 어린 시절부터 송 회장의 악행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어린 마음에 크면 부모님을 힘들게 하는 그에게 복수하고 싶었고 그떄부터 죽도록
공부하여 그의 신임을 받고자 노력했습니다. 결국 계획이 정확히 들어맞아 대학을 졸업한 뒤에 그의
여러가지 사업 대행을 도맡게 되었습니다. 하여 지용씨의 집안과 송아에서 벌이는 산장게임을 알게
된 겁니다."
"회장자리에서 끌어 내리겠다니.. 가슴이 두근거리는군요"
"산장 집사님을 기억하십니까?"
"송 회장의 동생분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이 계획의 배후에는 그분이 계십니다. 정식 명칭은 송 이사님이십니다."
"그렇군요"
"송 회장은 여러 방면에서 사람들의 숨통을 틀어쥐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지금 제 정신이 아닙니다.
그걸 보다 못한 송 이사님이 결국 그를 회장 자리에서 끌어내리기 위해 움직인 겁니다"
"하지만 그게 가능합니까? 쉬운 일이 아닐텐데요?"
"정당한 방법으로는 절대 그를 물러나게 할 수 없습니다. 대신 뒷조사로 그의 비리를 캐내는 것이지요.
오랜시간 공을 들여 조심히 알아 본 결과 그가 이 민박 주변에서 뭔가 수상한 일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그의 수하들이 계속해서 민박 일대를 맴도는데도 이곳 주인들과는 전혀 접촉이 없다.
그렇다고 사업상 이곳을 방문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숨겨진 무언가가 있겠죠? 저는 정확한 내막을
알고 싶어 조사를 한번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지용씨와 마주치게 된 겁니다."
"혹시.. 기차사고에 대해서도 뭔가 알고 있습니까?"
"그런 눈으로 보지 마십시오. 기차사고는 정말 우연이였습니다. 저 역시 기차사고 소식에 무척
놀랐으니까요. 100% 우연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그럼 그 말은 믿지요. 대신 제가 아스카씨를 신뢰할 수 있는 뭔가를 보여주십시오."
"역시 앞 뒤가 꽉 막힌 분은 아니군요?"
"저는 이미 송 회장으로부터 많은 일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그쪽 사람들의 말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솔직히 지금도 왜 아스카씨가 저를 도와주겠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좋습니다. 송 이사님과 전화 연결을 해드리죠. 그분 목소리라면 알아들을 수 있겠죠?"
"아마 알 수 있을 겁니다."
"제가 지용씨를 도와주는 이유는 나진씨가 모든 사실을 알고 괴로워할까봐 입니다."
아스카는 지용에게 송 이사와 연결해 줄 것을 약속했다. 그는 지용의 마음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송 이사는 그들을 살려준 적이 있는 사람이다. 그가 송아 사람 중 유일하게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다.
지용은 그의 말에 잠시 망설이더니 자세한 이야기를 요구했다. 이미 포기하고 있던 복수에 대한
희망이 생기자 눈과 귀가 번쩍 띄임은 물론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응어리져 있던 분노가 치솟는
기분이었다. 아스카는 문을 열어 승현의 상태를 살피고 지용을 옆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복도에 서서 이야기하기엔 조금 복잡했기 때문이다. 승현은 속이 가라앉았는지 잠들어있었다.
"아스카씨는 이 민박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저도 전혀 모릅니다. 사실 이렇게 숨겨져 있는 공간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럼 어떻게 이곳이 송 회장님과 관련이 있다는 걸 알았습니까?"
"저는 송 회장의 수하를 상대로 이중 감시를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용씨를 감시하기 위해
붙여놓은 사람이나 여러 회사에 풀어놓은 스파이들을 전문적으로 감시하죠. 그러던 중 송회장의
수하 하나가 이곳에 드나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민박에요?"
"아닙니다. 민박이 아니라 민박 뒷쪽 산입니다."
"산이라면 우리가 벌칙을 받기 위해 올랐던 벌칙장소 말입니까?"
"맞습니다. 그곳이 묘지라죠?"
"공동묘인 것 같았습니다."
"한번도 아니고 여러번 목격된 점이 이상하다고 생각한 저와 송 이사님은 사람을 풀어 좀 더 자세히
알아보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전혀 수상한 점을 밝혀낼 수가 없었습니다. 이곳 주인과도 전혀 접촉이
없으니까요. 우선은 제가 먼저 살피고 있는 중입니다."
"그럼 송 회장이 이곳으로 나진씨를 보낸 이유는 정확히 무엇입니까?"
"지용씨와 승현군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송 이사님과의 거래로 해치지 않겠다는 약속은
했지만 산장의 비밀을 모두 알고 있는 두 사람을 붙여놓을 수는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나진씨에게
사실을 알려 지용씨와 만나게 한 다음 지용씨가 나진씨에게로 돌아오길 바란 것이죠. 우선 그런식으로
승현군 먼저 떼어놓고 나중에 나진씨와 지용씨도 떼어놓을 작정인 겁니다."
"이런.."
"나진씨는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니 비밀로 해주십시오."
"그럼 한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나진 형도 송씨 집안 사람입니다. 아스카씨가 옆에서 그를 돕는 것
역시 복수를 위한 수단입니까?"
"아닙니다. 송 회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좋아하십니까?"
"하하.."
"그래서 절 그렇게 경계하신 겁니까?"
"그렇다고 칩시다."
"저에게 보였던 경계심. 그 이유 하나 뿐이라고 믿어도 되겠습니까?"
"제 이름른 윤 경진 입니다. 이름을 걸고 약속합니다."
대충 이야기를 전해들은 지용은 아스카의 웃는 얼굴을 보면서 의심을 풀고 긴장을 놓았다. 우선은
경계해야 할 사람이 줄었다는 것. 나진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이 생겼다는 것. 그리고 내용은 정확히
모르지만 복수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아직 완전히 그를 믿을 수는 없었지만 확실한건 마주친
눈에 거짓이 없었다는 점이다. 지용은 의미있는 시선을 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알아내야 할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니 나진씨와 승현군 두 사람에게는 비밀로 합시다."
"같은 생각입니다. 둘 다 호기심이 많아 말해주면 이 집을 다 뒤지고 돌아다닐지도 모릅니다. 특히
승현이라면 백번이라도 그러고 남습니다."
"하하.."
"생각보다 잘 웃는군요?"
"동지가 한명 늘었다는 기쁨 때문일까요? 아무튼 잘해봅시다. 제가 현재 믿을 수 있는 건 지용씨와
승현군 뿐입니다. 여랑씨나 하루씨. 해일씨나 호수씨는 우선 경계합니다."
"여랑씨나 하루씨면 몰라도 해일씨 커플은 왜요?"
"만약 이곳이 정말 송 회장의 손아귀에 있다면 분명 주인과도 연관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며칠을 지켜본 결과 호수씨가 필요 이상으로 하루씨에게 살갑게 대하더군요.그것은 해일씨도
마찬가지었습니다. 두 커플이 전부터 친분이 있다는 느낌이 든달까요?"
"관찰력이 정말 예리하시군요? 저는 전혀 못느꼈습니다만.."
"괜한 오해일 수도 있습니다. 만약 숨겨진 공간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여랑씨의 말이 진실이라면
송 회장측은 이곳의 주인도 모르게 뭔가를 꾸미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거짓이라면 두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죠. 여랑씨 커플이 송 회장과 한통속이라는 것. 또 하나는 여랑씨 커플 뿐 아니라 해일씨
커플까지 모두 같은 편이라는 것."
"두 커플은 이번이 처음 만남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모르는 척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군요. 우선은 송 회장이 이곳에 사람을 보내는 이유부터 알아야겠네요."
"네. 하지만 생각보다 힘드네요. 그의 밑에서 일하다 보니 생각보다 몸이 자유롭지 못합니다. 사람을
시켜 조사하게 하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까요. 그런 면에서는 지용씨와 만나게된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를 도와주십시오."
"아스카씨. 기억하십니까? 대양씨와 영원씨 커플"
"제가 온 첫날 떠난 커플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사실은 그 커플도 이상합니다"
"왜요?"
"그날 저녁 승현이를 저 몰래 데리고 나가려 했답니다. 저는 처음에 승현이가 열에 들떠서 환상을
본 거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생각할 수록 뒤끝이 남네요."
"떠난 사람들까지 생각하다간 일이 더욱 복잡해집니다. 크게 신경쓰지 마십시오"
아스카는 말을 마치자마자 몸을 일으키고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이제 남은 시간은 5분남짓.
슬슬 하루와 호수가 문을 열어주기 위해 올 시간이었다. 지용도 승현의 상태가 궁금해 급히 옆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승현은 계속 잠들어있었고 나진은 앉아서 그의 배를 쓸어주고 있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지용을 두고 싸웠던 사람들이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이제 괜찮은가봐. 한번 토하고 나서는 많이 좋아졌어"
"고마워 형. 신경써줘서"
"사실 너만 생각하면 승현이가 밉지만 보면 볼수록 그런 생각이 사라져. 꼭 동생같아"
나진이 지용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승현은 잠이 깼는지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이젠 어느정도
구역질이 멈추고 안색이 돌아오고 있었다. 지용은 승현을 업고 나가기 위해 침대로 다가가 등을
돌려 앉았지만 그는 업힐 생각은 하지 않고 침대에 걸터앉은 나진의 목을 끌어안고 매달렸다.
"고마워요. 추한 모습 많이 보였죠?"
"이제 살만해?"
"네. 배가 살짝 아프지만 참을만해요"
"다행이다.. 난 너 죽는줄 알았어"
"전 그렇게 쉽게 안죽어요. 생명력이 얼마나 끈질긴데요~"
"정말 살만한가보네? 농담도 하고"
"형.. 나..지용 형은 양보 못하지만 너무 미워하지는 말아요."
"싫어. 죽을 때까지 미워할거야. 그리고 저 지용이 놈은 이제 줘도 안가져"
"네?"
"세상에 남자는 많아. 더 멋진 사람을 찾아 떠날거야."
"미안해요.."
"미안하단 소리 하지마. 그럼 정말 미워한다?"
"헤헤~"
승현이 나진의 목을 끌어안고 놔줄 생각을 안하자 지용과 아스카는 그들의 잠옷을 보며 민박 시스터즈
라고 놀리기 시작했다. 기절초풍한 승현이 당장 옷을 벗겠다며 광분하자 세 사람은 한번 벗어보라며
음흉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결국 혼자 쑥스러워진 그는 스스로 침대를 벗어나 젖은 옷을 집어들고
걸어나갔다. 결국은 지용의 등에 업혀 나갔지만.
"여랑씨! 해일씨! 두 사람 찾았습니다!"
"대답이 없네요"
문 열릴 시간이 되자 지용은 지하 계단을 향해 큰 소리로 두 사람을 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듣지 못하는건지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생각 같아서는 찾아 나서고 싶었지만 우선
승현과 나진을 민박으로 옮기는 게 우선이었던지라 문 앞에서 시계를 들여다보며 계속해서 그들의
이름을 불렀다. 약속시간이 10분이나 지났는데도 문이 열릴 생각을 않자 지용은 업고 있던 승현을
바닥에 내려놓고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그 이후로 복통은 가라앉아 잠잠해진듯 했다.
"아악!"
문 옆에 서 있던 아스카의 팔이 부딧혀 멍이 들 정도로 거세게 문이 열리더니 하루가 뛰어들어왔다.
그의 얼굴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하얗게 질려 땀으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아스카가
부딧힌 팔꿈치를 비비며 인상을 쓰고 있을때 또 다시 문이 열리더니 호수가 뛰어들어왔다.
"두 사람 왜 이래요?"
"살려주세요. 호수씨가 이상해요!"
하루가 지용의 팔을 붙들고 매달렸다. 지용이 그의 행동에 할말을 잃고 멍하니 서있자 숨을 헐떡이던
호수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두 사람 다 얼마나 뛰었는지 숨이 차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지용씨! 떨어지세요!"
"네?"
"하루씨 칼을 가지고 있다구요!"
호수의 말에 반사적으로 주춤 물러난 지용은 하루의 몸을 뒤로 돌려 팔을 비틀었다.
그러자 정말 그의 말대로 시퍼런 날을 번뜩이는 식칼이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기겁한 승현과 나진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버렸고 아스카는 침착하게 문 앞으로 다가가 입구를
막았다. 만약에 있을 일에 대비해 빠져나갈 틈을 주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칼이 떨어지자 호수가 두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칼을 들고 절 죽이려고 했다구요! 하루씨 미쳤어요!"
"호수씨. 진정하고 천천히 설명해보세요"
"식당에서 대화를 나누던 중에 절 죽이려고 했다니까요?"
죽음이라는 말에 누구보다 민감한 지용은 하루의 팔목을 더욱 세게 비틀며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하루가 몸부림치며 저항하기 시작했다. 그도 잔뜩 흥분해 있는 상태였다.
"말도 안되요! 이건 호수씨의 거짓말이라구요. 저는 죽이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럼 왜 칼을 가지고 있습니까?"
"윽.. 죽이려고 한 건 호수씨에요. 저는 저항하기 위해 칼을 든 것 뿐이라구요! 보면 아시잖아요.
제가 호수씨를 죽이려고 했다면 왜 먼저 뛰어 들어왔겠어요!"
"........................"
"호수씨가 거짓말 하는 거에요. 믿으면 안되요!"
하루는 억울한지 눈물까지 뚝뚝 흘리며 하소연했다. 덕분에 민박으로 돌아가기 위해 대기했던 네
사람만 혼란에 빠져버렸다. 호수의 말대로 칼을 들고 있는 사람은 분명 하루였지만 쫓기듯 먼저
뛰어들어온 사람도 그였다. 죽이려는 사람이 도망치듯 사람이 많은곳으로 뛰어들어왔다는 것이
이상했다. 아스카는 무언가를 곰곰히 생각하더니 앞으로 걸어나와 호수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리고는 지용와 같이 그의 팔을 뒤로 돌리며 움직이지 못하도록 결박했다.
"갑자기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겠지만 우선은 흉기가 나왔으니 두분 모두 믿을 수 없습니다.
지용씨. 하루씨를 데리고 절 따라오십시오"
"알겠습니다."
"나진씨. 금방 뒤따라갈테니 승현군과 함께 민박으로 돌아가 계십시오.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대문
잠그는거 잊지마시구요."
"그래. 알았어"
"빗장 닫는 법은 아십니까? 밀어넣은 다음 위 아래 위로 움직여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해볼게. 근데 도대체 무슨 일이야?"
"저도 정확히는 모릅니다. 아무튼 돌아가 계십시오. 승현군 물 꼭 먹이시구요"
아스카는 지용에게 하루를 끌고와달라고 부탁하고는 호수의 손을 잡고 2층 방으로 향했다.
지용이 그의 말대로 하루를 끌고 방안으로 들어서자 아스카는 옷장에서 여성용 벨트를 꺼내
그들을 묶기 시작했다. 당황한 하루와 호수는 서로 억울함을 하소연하며 저항했지만 아스카의 행동에는
전혀 망설임이 없었다.
"해일씨와 여랑씨를 찾고 난 후에 풀어드리지요. 그 전에는 잠시 이곳에 계십시오"
"아스카씨! 왜 내 말을 못믿는거에요?"
"하루씨뿐 아니라 호수씨도 믿지 못합니다. 평범한 다툼이었으면 모르겠지만 흉기까지 발견되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저희가 두 분 중 누굴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럼 따로따로 묶어주세요. 호수씨와는 같이 있고 싶지 않아요"
"원하신다면 그렇게 해드리겠습니다."
하루의 부탁을 받은 아스카는 묶인 손목의 벨트를 풀고 그를 옆방으로 데리고 갔다.
그러자 지용은 묶여있는 호수를 안쓰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사실 지용의 입장에서는 하루보다
호수를 믿고 싶었다. 그만큼 그와 친분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도 지용의 시선을 느꼈는지
여느때와 다르지 않게 새침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전 정말 하루씨를 죽이려고 한 적 없어요. 사실 말은 안했지만 하루씨와 저는 서로 안면이 있어요.
좋은일로 얽히진 않았지만 어쨋든 아는 사람이라구요. 그래서 예전 이야기를 꺼내며 아는척을 한 것
뿐인데 예민하게 반응하더니 칼을 들고 자리를 피하지 뭐에요. 저는 당황해서 그에게 해명을 하고자
따라왔는데.. 정말 억울해요.."
"호수씨. 미안합니다.. 하지만 칼까지 들고 싸웠으니 풀어드릴 수는 없어요. 이해하세요"
"제발 풀어주세요. 저는.."
"전 호수씨 의심 안합니다. 그러니 풀어달란 말은 하지 말아주세요."
"알았어요. 어쩔 수 없죠..하지만 하루씨를 조심하세요. 얌전한 얼굴 뒤에 감춰진 모습이 상당해요.
제 말 흘려 듣지 마세요. 절대로 방심하면 안되요. 아셨죠?"
"네. 알겠습니다"
호수에게 미안하다는 인사를 전한 지용은 문을 닫고 어깨를 으쓱해보이며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복도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아스카가 욱신거리는 팔꿈치를 문지르며 가까히 다가왔다.
"두 사람이 왜 싸운걸까요?"
"호수씨 말로는 두사람이 원래부터 알던 사이랍니다. 안좋은 사이였는데 다시 만나서도 아는척을
안하고 있다가 둘만 남으니까 대화를 시도했고, 그 와중에 하루씨가 예민하게 반응하며 칼을
들고 위협하다가 결국 도망까지 쳤나봅니다. 하루씨가 해명하려고 뒤쫓아왔다는군요"
"지용씨는 그 말을 얼마나 믿으십니까?"
"믿지 않습니다. 단지 믿고 싶을 뿐입니다. 해일씨와 호수씨..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이니까요"
"역시 두 커플 모두 연관이 있는걸까요?"
"호수씨의 말을 들으며 문득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무슨 생각 말입니까?"
"숨기고 싶던 장소가 발각이 되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 장소를 조사하려고 한다. 그래서 싸우는 척
시선을 돌린다.. 대충 이런 생각입니다만..휴.. 사람을 의심한다는 것은 참 괴로운 일입니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생각이니 괴로워하지 마십시오. 우선 민박으로 돌아가 두 사람의 상태를 점검한
뒤에 다시 이곳으로 오죠. 나진씨도 끼니를 너무 많이 거른 상태라 승현이를 안심하고 맡길 수 없습니다
천천히 생각을 정리한 뒤에 조사해도 늦지 않습니다"
의견에 동의한 두 사람은 서둘러 계단을 내려왔다. 하지만 그들이 미처 생각 못한 것이 있었다.
문은 밖에서 열어주지 않으면 안에서 열 수 없는 구조. 호수와 하루가 안에있으니 더 이상 문을 열어 줄
사람이 없다는 것. 뒤늦게서야 그 사실을 깨달은 지용과 아스카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문 앞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그들의 걱정과는 달리 누군가가 식칼을 사용해서 문을 열고 문 사이에 틈까지
벌려놓은 상태였다. 안도한 지용은 칼을 집어들며 씨익 웃었다.
"문 틈으로 칼을 밀어넣고 열었군요? 둘 중 누굴까요? 이런 기특한 생각을 한 사람이.."
"그러게요. 하하.."
두 사람은 민박으로 돌아가기 위해 온천이 있는 곳까지 걸어나왔다. 비는 완전히 그쳤지만 아직
날씨는 을씨년스러웠고 하늘은 시커먼 구름으로 꽉 들어차있었다. 안에 두고 온 사람들은 문이
닫혔기 때문에 스스로 나오지 못할 텐데도 호수가 마음에 걸리는지, 자꾸 뒤를 돌아보던 지용은
안되겠다 싶은 마음에 아스카의 팔을 붙잡고 자리에 멈춰섰다.
"아무래도 한사람은 남아있는 게 좋겠어요. 아스카씨가 돌아가서 저 대신 승현이 좀 살펴주세요. 저는
안으로 들어가서 여랑씨와 해일씨를 찾아볼게요. 사실 칼을 들고 싸웠다고 해도 두 사람을 묶어놓은
것은 애인들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한 일입니다. 제가 여랑씨와 해일씨를 찾아 사정을 설명하고
뒷수습을 할테니 아스카씨는 민박에 들렀다가 나중에 와주십시오."
"지용씨 말대로 생각해보니 그렇네요. 지나치게 의심하고 있는 것은 우리 둘 뿐이니까요. 좋습니다.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그런데 지용씨도 식사를 하셔야지요?"
"아직까지는 괜찮습니다. 오는 길에 음료수나 챙겨다주세요"
지용은 재빠르게 말을 마치고 다시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칼 자루와 날 끝을 사용해서 문을 넓게
벌려놓은 것은 아니었지만 만약을 대비. 칼날을 문 틈에 끼워놓은 상태였다.그렇게 하는 것만으로
손가락이 들어갈 틈은 확보할 수 있다. 그는 우선 해일과 여랑을 찾기 위해 지하로 내려가볼 작정이었다.
계단을 하나씩 밟을때마다 산장의 기억이 떠올라 필요 이상으로 신경이 곤두서고 불쾌해졌다.
"요리를 하지 않으면 먹을 수 없는 음식들 뿐이네."
냉장고를 열어 먹을만한 것을 찾던 아스카는 마땅한 게 없자 급히 주차장으로 달려가 차을 타고 시내의
마트로 향했다. 시골이라 요령껏 운전만 잘하면 그다지 오래걸릴 거리는 아니었다. 그는 우유부터 시작
해서 조리를 하지 않고도 먹을 수 있는 포장음식과 빵. 죽 같은 것들을 손에 잡히는 대로 사들이기
시작했다. 당분간은 하루의 음식을 기대할 수 없다. 또한 승현의 상태를 보고 나서는 그럴 마음도
사라져버렸다. 급히 서두르는 모습에 사람들이 이상한 시선을 보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계산을 마친
아스카는 서둘러 민박으로 돌아왔다. 방으로 들어서자 승현과 나진은 바닥에 엎드린 채로 무언가를
열심히 적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방으로 사람이 들어왔다는 사실 조차 모르고 있는 듯 했다.
아스카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들고 있던 봉지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그러자 깜짝 놀란 두 사람이
기겁을 하며 어깨를 들썩거렸다. 머리는 좋은데 무방비라는 것이 단점이다.
"뭘 하고 있었길래 사람이 들어오는지도 모르십니까?"
"아..건물 구조를 그리고 있었어. 민박부터 온천. 새로 발견한 집 등등"
"그 집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봤으면 좋았을텐데 아쉬워요. 하지만 확실한 건 그 집 어딘가에 반대편으로
나갈 출구가 있다는 거죠."
"출구?"
"아스카씨 같으면 안에서 열지도 못하는 문이 달린 집을 쉽게 드나들 수 있겠어요? 분명 그 집 어딘가
에 밖으로 통하는 출구가 있는 거에요."
"그렇겠구나.. 한번 찾아봐야겠다."
아스카는 나진이 들고 있던 종이를 건내받아 내용을 살폈다. 막 그리기 시작했는지 전체적인 뼈대만
그려져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그림 솜씨가 엉망이라 완성이 되어도 쉽게 알아볼 수 없을 것 같았다.
아스카는 그림을 다시 돌려주며 피식 웃은 뒤 사온 음식들 중 죽 두개를 꺼내 전자렌지에 집어넣었다.
타이머가 종료되자 뜨거운 죽을 꺼내 일회용 숟가락과 함께 두 사람의 앞에 가져다 놓으니 서로
전복죽은 먹지 않겠다고 다투기 시작했다. 결국 아스카는 참치죽을 하나 더 꺼내 데워주고 자신이
전복죽을 먹었다. 빠른 시간안에 허기를 달래는 음식에는 죽 만한 것이 없다.
"아스카. 무슨 일 있지?"
"네?"
"우리에게만 뭔가를 숨기고 있는 거지? 그게 아니라면 왜 하루씨와 호수씨를 끌고 올라가? 두 사람이
칼을 들고 다퉜다지만 죄인 취급 할 필요는 없잖아. 민박으로 데리고 와서 우리에게 싸우나 안 싸우나
감시하라고 해도 되잖아"
"별일 아닙니다. 여랑씨와 해일씨가 그 집 안에 있으니까 알아서 해결하도록 두 사람을 잠시 떨어뜨려
놓았을 뿐입니다. "
"그럼 지용이는 왜 안와? 왜 혼자만 온 거야?"
"지하로 들어간 두 사람이 아직 돌아오지 않아서 지용씨가 찾고 있는 중입니다. 저도 가봐야합니다"
"우리 찾으려고 지하로 들어갔구나? 미안하네.."
"미안하면 여기서 꼼짝말고 계십시오. 돌아다니면 안됩니다"
"이 민박만 안 벗어나면 되는거지?"
"네."
"그래. 알았어. 얌전히 있을테니 빨리 다녀와"
아스카는 나진과 승현에게 민박을 벗어나지 말 것과 누가 찾아오더라도 절대 문을 열어주지 말 것을
신신 당부하며 작은 쇼핑백을 찾아 우유와 빵을 담기 시작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꼭 소풍
가기 전 간식을 챙기는 사람처럼 보였으리라.
그는 들어가서 송 회장의 흔적을 찾기 전까진 나오지 않을 작정이었다. 송 회장과 이 민박이 연관되어
있다는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seven-
"해일씨 정신차려봐요!"
지용이가 지하 계단을 내려가자마자 제일 먼저 발견한 것은 더러운 바닥을 뒹굴고 있는 해일이었다.
그는 계단을 오르려다 기절한 듯 몸의 절반가량을 계단위에 걸친채 정신을 잃고 쓰러져있었다.
지용은 급한 마음에 양쪽 뺨을 번갈아 때리며 소리 질렀지만 그는 눈을 뜰 생각을 안했다.
지하는 지독한 곰팡이 냄새로 진동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곰팡이 냄새라기 보다 군침이 돌 만큼
시금털털한 냄새였다. 지용은 우선 힘껏 그의 팔을 잡아 끌어 계단 위로 올려놓았다.
바닥이 검푸른 빛의 구정물로 흥건했기 때문에 계속 눕혀놓을 수는 없었다.
축 늘어진 해일의 몸이 계단 위로 올라오자 지용은 뻐근해진 팔을 이리저리 돌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난 것. 해일이 쓰러져 있을 정도면 여랑도 무사하다는 장담은 못한다.
"여랑씨! 내 말 들리면 대답해 보세요!"
목이 따끔거렸다. 먼지가 많은 곳이라 잠깐 소리 질렀을 뿐인데도 기관지에 무리가 왔다.
지용은 연신 기침을 해가며 복도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여랑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지저분한 곳에 발을 들여놓고 싶지는 않았지만 여랑을 찾지 않고 위로 올라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지용은 미간을 좁히며 천천히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쥐만 돌아다니면 딱 시궁창의 모습이었다. 구조는 2층과 다를 바 없어보였고 천장 한가운데 형광등이
일렬로 쭉 늘어서 있는게 특징이었다.
"여랑씨!"
그는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여랑에게 자신의 위치를 알리고자 목소리 높혀 이름을 부르며 먼지가
뽀얗게 앉아 있는 첫번째 방 문 손잡이를 돌렸다. 녹이 쓸어있어 생각보다 뻑뻑했다.
"욱.."
문을 열자마자 폭발 할 듯 밀려나오는 썩은내에 그는 입을 틀어막고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죽은 쥐가 썩는 냄새에 토악질을 한 적은 있지만 이정도는 아니었지 싶다. 지용은 잠시
문을 닫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시금털털한 냄새가 이토록 달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그는 눈물이 날 정도로 뒤집히는 속을 간신히 진정시키고 다시 문을 열어보기로 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른 채 무방비로 문을 열어 화를 당했지만 숨을 들이마시고 코를 틀어막으면 어느정도
견딜 수 있으리라. 정말 실종된 사람만 아니면 다 때려치우고 밖으로 나가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끼익 -
다시 문이 열리자 그는 숨을 참고 벽을 더듬어 전등 스위치를 찾았다. 보통 스위치는 문 근처에 있기
마련. 생각보다 쉽게 찾은 스위치를 옆으로 누르자 기분 나쁜 소음과 함께 천장에 매달린 소등에
불이 들어왔다. 형광등일 거라고 예상했지만 켜진 건 대롱대롱 매달린 백열등 하나였다.
보통 백열등은 전구 근처에 스위치가 있는데 번거롭게 전선을 끌어 스위치로 연결해놓은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쓸때없이 전등에 신경을 기울인 지용은 숨이 차올라 급히 복도로 뛰어나가 호흡을 한 다음
다시 방안으로 들어왔다. 귀찮은 행동이지만 지독한 냄새를 맡는 것 보다는 백배 나았다.
갓이 씌워진 백열전구의 시야는 좁았다. 더구나 빛 자체도 흐릿해 바닥은 보이지도 않았다.
지용은 여랑이 있는지만 살펴 본 다음 바로 나갈 생각이었다. 그는 어둠에 익숙해질 때까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눈을 혹사시켰다. 어둠에 적응하기 위해 터득한 그만의 방법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다시 숨이 차올랐다. 이제 겨우 어둠에 적응 되어가고 있는데 다시 밖으로 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라 그는 마음을 굳게 다잡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우욱.."
처음보다는 충격이 덜 했지만 여전히 지독한 냄새였다. 그는 어깨를 부르르 떨며 재빨리 바닥을 살폈다.
온통 시커먼 물체뿐이라 정확히 무엇이다. 라고 단정지을 순 없었지만 우선은 작게 띄엄띄엄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사람의 형상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전등 바로 아래에는 쇠로 만든 책상이 있었고
그 위에는 두꺼운 책과 서류철. 펜등이 정신없이 어지러져 있었다. 영화에서만 봐왔던 고문실 같은
느낌의 방이었다. 호흡의 한계를 느낀 지용은 그것으로 조사를 마치고 재빨리 복도로 뛰어나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냄새가 얼마나 지독한지 한참동안이나 코 끝에 달라붙어 떨어질 생각을 안했다.
그는 가시지 않는 악취에 치를 떨며 다시 큰 소리로 여랑을 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슬슬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방을 전부 돌아보려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 차라리 아스카씨를 기다렸다가 함께 내려오는 편이
훨씬 낫겠다. 우선 올라가서 하루씨와 호수씨를 만나 본 뒤에 생각하자.
지하실이라면 승현 만큼이나 질색하는 지용은 여랑 찾기를 포기하고 해일에게 다가갔다.
부름에 대답이 있으면 모를까 해일처럼 어딘가에 쓰러져 있다면 혼자의 힘으로는 해결하지 못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여랑은 덩치나 키가 지용보다 크다. 정신을 잃었을 경우 지용 혼자서 윗층으로
옮길 수 없다. 그것까지 파악한 시점에서 그를 찾아 나선다는 건 정말 무모한 짓일지도 모른다.
"해일씨! 정신차려봐요!"
축 늘어져 정신을 잃고 있는 해일은 정말 골칫덩어리었다. 지용은 스물스물 밀려드는 썩은내에 고개를
내저으며 온 힘을 다해 해일을 들쳐업었다. 그의 키와 몸무게는 지용과 거의 흡사했다.
게다가 정신을 잃고 축 늘어지기까지 했으니 느껴지는 무게는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지용은 그를 떨어뜨리기라도 할까봐 이를 악물고 계단을 올랐다. 다리가 후들거려 자칫하다간 둘 다
굴러 떨어질 판이었다. 겨우 1층에 다다른 지용은 해일을 바닥에 눕히고 자신도 쓰러지듯 그 옆에
누워버렸다. 척추에 무리가 갔는지 등줄기가 싸하게 저리며 땀이 비오듯 흘러내렸다.
"지용씨?"
아스카가 안으로 걸어 들어오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지용과 해일을 발견하고는 급히 달려와 곁에
앉았다. 지용이 잠시 머뭇거리자 아스카는 들고 있던 봉지에 담긴 차가운 우유를 꺼내며 말했다.
"두 사람 무슨 일 있었습니까?"
"지하실에 내려갔다가 쓰러져 있는 해일씨를 발견했습니다. 업고 올라오느라 기운이 빠져버렸네요"
"숨은 고르게 쉬고 있는 것 같은데.."
"뺨을 때리고 큰 소리로 불러봤지만 도저히 일어날 생각을 안합니다."
"여랑씨는요?"
"안보입니다. 찾아보려고 방을 둘러보다 기겁하고 올라왔습니다. 안에서 뭔가 썩는지 사람이 맡을 수
없는 냄새가 풍기더군요."
"고생하셨습니다. 우선 우유라도 드세요"
아스카는 친절히 우유를 따서 그의 손에 쥐어주었다. 해일을 업고 오느라 혹사당한 팔은 우유를
받자마자 부들부들 떨렸다. 흰 액체가 바닥으로 흘러내리자 아스카는 재빨리 우유팩을 받아 바닥에
내려놓고 지용을 일으켜세웠다.
"빨리 마셔요. 빈속으로는 아무 일도 못합니다."
"고맙습니다. 승현이는 좀 어떤가요?"
"많이 좋아졌습니다. 죽을 사다 먹였으니 걱정마세요"
"고생 많으셨어요"
지용은 그에게 고개를 까딱 해보이며 바닥에 놓여있는 우유를 단숨에 들이마셨다.
우유는 특유의 달콤한 향을 입안 가득 퍼뜨리며 윤활제처럼 쓰리고 빈속을 조금씩 채워갔다.
평소라면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을 우유 하나에 왜 이렇게 기분이 좋은걸까.
지용은 우유를 모두 마시고 버릇처럼 빈 팩을 접은 다음 바지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지하실에서
맡았던 냄새가 끈질기게 코를 자극하고 있었다. 그는 빨리 둘러보고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에
서둘러 2층으로 올라갔다. 급한 마음에 아스카에게 가자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계단은 공중에 매달린 나무 다리를 건너는 것 처럼 심하게 삐걱거렸다. 난간을 손으로 건드려 보았지만
그것 역시 계단에 뒤질 바 없었다. 마치 공포소설에 나오는 낡은 학교 처럼 말이다.
"경진씨!"
"..........."
"경진씨!"
"..........."
"아스카씨!"
"네?"
"본명을 부를땐 대답 안하고 아스카라고 불러야 대답하십니까?"
"아.. 못알아들었습니다. 어색하니 그냥 아스카라고 부르십시오"
"제가 경진씨라고 부르는 이유는 당신을 믿어보기로 작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어색해도 참고
익숙해지도록 노력해보세요"
"좋습니다. 그런 이유라면 제가 노력해야지요. 그런데 왜 불렀습니까?"
"하루씨가 없습니다. 사라졌어요."
"네?"
안으로 들어서던 지용은 텅 비어있는 방과 풀려있는 벨트를 보고 놀라 다급히 사실을 알렸다.
당황한 아스카는 반사적으로 옆 방문을 열었지만 호수 역시 자리에 없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분명 단단히 묶었습니다. 혼자의 힘으로는 절대 빠져나갈 수 없어요"
"혼자의 힘으로 나간게 아니에요. 보세요. 방이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죠? 혼자 벨트를 풀려고 발버둥
쳤다면 그 흔적이 남아있어야 합니다. 경진씨는 하루씨를 어디에 묶었습니까?"
"옷장에 벨트를 연결해서 묶었습니다"
"저는 침대 다리에 묶었습니다. 침대는 무게가 있으니 그렇다 쳐도 옷장이라면 분명 흔적이 남아야
정상입니다. 이건 다른 사람이 풀어줬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혹시 사라진 여랑씨가 풀어준 게
아닐까요?"
"그게 가장 가능성 있겠네요 여랑씨가 하루씨를 풀어주고 호수씨도 풀어주고.."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해지는군요. 호수씨 말에 의하면 두 사람이 별로 친하지 않다고 했는데 말입니다.
여랑씨가 하루씨를 풀어주었다고 쳐도 칼까지 들이대가며 싸웠던 호수씨까지 풀어 줬을까요?
보통 사람이라면 분해서라도 풀어주지 않을 겁니다.."
"여랑씨가 사람이 워낙 좋지 않습니까. 아는 사람이니 같이 데리고 갔을 거에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네요. 그게 아니라면 하루씨와 호수씨가 한패라는 결론 밖에 안나오니까요"
아스카는 지용의 말을 가만히 생각하더니 몸을 돌려 계단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방금전까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던 해일이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바늘도 아니고 순식간에 기척도 없이 사라지는게 가능할까? 아무리 소리를 죽여 이동한다고
해도 바닥이 워낙 낡아 조그만 소리도 쩌렁쩌렁 울리는데 말이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이나 아무말
못하고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지용씨. 어쩌면 사람들 민박으로 돌아갔을지도 몰라요."
"스스로 문을 열 수 없잖습니까?"
"승현군이 이 집에는 현관말고 다른 출입구가 있을 거라고 하더군요."
"문을 안에서 열 수 없으니까?"
"네. 큰 집에 현관문이 한 방향으로만 열린다는 것이 말이 안되지 않습니까? 어쩌면 다른 출입구를 찾아
민박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릅니다"
"그럼 우선 가보죠"
두 사람은 그들이 민박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가정. 다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문 사이를 벌려놓았던 칼을 안으로 던져놓고 밖으로 나가자 다시 어두워진 하늘을 만날 수 있었다.
금방이라도 비를 쏟을 것 같은 시커먼 구름은 보기만 해도 오싹한 기분이었다.
그들이 문을 닫고 나가자 집 어딘가에서 시커먼 그림자 두개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귀신 같이 사라졌던 해일과 벨트를 풀고 모습을 감춘 호수였다.
"갔네?"
"우리가 민박으로 돌아간 줄 알았나보다."
"너무 잘 숨어 있었나? 전혀 눈치 못챈다."
"그나저나 하루씨 만나봤어?"
"응. 단 하루.. 모른 척 딱 잡아 떼던데?"
"자기도 놀랐겠지. 갑자기 아는 척을 했으니 얼마나 당황했겠어?"
"웃겨. 뻔뻔해도 정도가 있지!"
"걱정마. 어짜피 진실은 밝혀지게 되어 있으니까. 신 호수답지 않게 왜 이리 조바심이야?"
"진실이고 뭐고 빨리 날이나 따뜻해졌으면 좋겠다. 점점 추워지니 미치겠어"
"추우면 그냥 안겨. 형이 꼭 안아줄게"
"형 같은 소리 하지말고 네 몸이나 잘 간수하셔. 나보다도 체온이 낮으면서 뭘 안아줘?"
들키지 않으려고 숨어있는동안 입이 근질거렸는지 두 사람은 지용과 아스카가 나가자 마자 다시
티격태격하며 수다를 떨었다. 호수가 팔뚝을 비비며 오들오들 떨자 해일은 그를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 꼭 안아주었다. 그러자 호수는 손가락을 허공에 들어 이리저리 살피며 중얼거렸다.
"바이올린 켜는 모습 보고 싶다고 했지?"
"응. 그 모습에 반한거니까"
"이제 볼 수 없는데 어떻게 하냐?"
"상상이라도 하지 뭐.. 네 모습은 항상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어. 필요하면 언제든지 재생이 가능하니
다시 안봐도 떠올릴 수 있어. 조금 아쉽긴 하지만~"
"쓰나미.. 넌 재수없게 가끔 날 감동시키더라?"
호수는 뿌듯한 마음에도 괜히 심술을 부리며 그의 팔을 꼬집었다. 해일은 호수가 어떤 장난을 쳐도
절대 화를 내지 않는다. 원래 화를 안내는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착한 척 연기를 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는 호수의 밝은 모습 속에 감춰진 상처와 외로움을 아주 잘 알고 있다. 남들은 성격만 보고
그저 활발한 사람. 만나면 기분 좋은 사람 쯤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 모습들이 전부가 아니다.
호수는 가벼운 말투와 달리 누구보다도 깊은 정신 세계를 가지고 있다. 그의 진정한 내면의 모습을
아는 사람은 유일하게 해일 뿐이었다.
"슬슬 돌아갈까?"
"아니. 이제부터 재미있어질텐데 가긴 어딜가?"
"기어코 여랑씨와 하루씨를 골탕먹여야겠어?"
"응. 기어코 해야겠어"
"그 사람들이 우리에게 왜 그런짓을 했을까?"
"이유를 모르니까 더 미치겠어. 그때는 내가 잘못했다. 그러니 용서해달라.. 이런식으로 나오면
차라리 아무말 못 할텐데 시치미를 떼니까 열받아."
"우리 호수씨.. 한번 화나는 일은 끝장을 보셔야지."
"가자. 조직의 쓴맛을 보여주겠어!"
"여기 안왔어?"
"안왔어요"
"놀다가 못본 거 아니고?"
"저는 정말 결백해요. 못믿겠으면 나진 형에게 물어보세요"
"권 지용. 너 웃긴다? 왜 승현이한테 생 트집이야?"
못보던 사이 급속도로 사이가 가까워진 승현과 나진은 서로를 감싸며 지용을 흘겨보기 시작했다.
불과 이틀전까지만 해도 서로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 나있던 그들이 반격하고 나오자 오히려 당황한
지용은 어이없음에 피식 웃으며 마루에 걸터앉았다.
"여긴 아닌가 보네요."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걸까요?"
"그 출구 이야기 맞나봅니다. 찾아봐야겠습니다"
"오늘 왔다 갔다 난리가 아니네요"
그들은 잠시 마루에 주저앉아 숨을 돌렸다. 서로 말은 안했지만 다시 돌아가야하나 말아야하나 곰곰히
생각하는 중이었다. 명목은 송 회장과 연관되어있는 무엇을 찾는 것이었지만 여러사람이 실종된
시점에서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질 리 없다. 그들이 계속해서 심각한 표정으로 인상을 쓰자 무언가를
눈치챈 나진이 드디어 질문공세를 펼치기 시작했다. 승현은 지용의 눈치를 살피며 당당한 나진을
조심스럽게 응원했다. 역시 나이는 무시할 수 없는 것.
"니들 감추고 있는 거 솔직히 털어놔"
"네?"
"우리가 바본 줄 알아? 아무데도 못가게 신신당부하고 니들끼리 조사 할 게 있다며 사라지고..
해일씨네나 여랑씨네는 어디로 없어졌는지 찾지도 못하고.. 그런데도 우리만 무슨일인지 모르고
있어야해? 계속 숨기면 화낼거야."
"나진씨"
"아스카. 내가 죽은 듯 지내왔다고 머리까지 굳은 건 아냐. 도움을 줄테니까 말해봐"
나진이 꽤 위협적으로 나오자 아스카가 지용을 바라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숨길 수 만은 없었다 실종된 사람만 아니어도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이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들도 알 건 알아야했다. 지용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의 의사를 밝히자 아스카는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나진에게 차근차근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나진이 그의 말을 알아들으려면 꽤 먼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야만 한다.
"제 말을 들으시고 중간에 이해가 안되면 바로바로 질문하십시오."
"알았으니까 빨리 말해"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으니 우선 방으로 들어가시지요. 승현군도 같이 들어와요"
구름이 잔뜩 껴있는 하늘은 낮인데도 태양의 따스함을 느낄 수 없었다. 마루에 앉아 이야기하기엔
길고 복잡해질 것 같아 아스카는 모두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겉모습은 구식 한옥이지만 보일러로 난방을 하는 내부는 훈훈한 열기로 가득차 있었다. 모두가 마음에
드는 자리를 차지하고 앉자 의자에 기대 앉은 아스카가 비밀로 묻혀있던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디서부터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우선 제 이야기부터 해드리겠습니다. 저희집과 나진씨의
집은 오래전부터 두터운 친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친분은 대등관계가 아닌 주종관계였습니다.
저희 집에서 나진씨의 집에 무조건적인 충성을 하고 있었지요. 그만큼 저희가 송 회장님께 금전적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송 회장님은 자금융통을 빌미로 저희 부모님께 상상 이상의 고통을
주었습니다. 안좋은 일은 모두 떠맡아야 했으며 심지어는 송 회장님이 저지른 죄도 대신 뒤집어써야
했습니다. 그때문에 저는 어렸을때부터 송 회장님께 엄청난 증오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
"그래서 남들 한창 뛰어놀때 저는 미친듯이 공부에 매달렸습니다. 송 회장님의 눈에 들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습니다. 그 결과 지금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고 그분의 깊은 신임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런 노력을 한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부모님이 받은 고통을 되갚기 위해서입니다."
"아스카.."
"그러던 도중 같은 뜻을 가진 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나진씨도 잘 알고 있는 분. 송 이사님이십니다"
"작은 아버지?"
"그렇습니다. 장남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송 회장님이 회장자리에 올라 있지만 실질적으로 회사를
움직이는 건 송 이사님이십니다. 그 사실은 나진씨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럼.. 아버지를 없에기 위해 너와 작은 아버지가 손을 잡았단 말야?"
"우선 저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그 다음은 지용씨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건 승현군도 알아야하니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승현군. 괜찮겠죠?"
"네. 뭔지는 모르지만 저도 알고 싶어요"
"전 카미아 그룹을 아십니까? 지금은 송아와 합병되어 이름이 사라졌지만 한때는 자리다툼이
치열했을 만큼 막강한 회사였습니다. 그리고 카미아 그룹의 외아들이 여기 있는 지용씨입니다"
"지용 형요?"
나진은 지용이 카미아의 외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승현은 처음듣는 이야기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용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지용이 그의 손을 꽉 잡고 자신의 무릎에 올려놓았다.
"송아와 카미아는 경쟁회사였을 뿐만 아니라 어이없는 계약으로 얽힌 관계였습니다. 한때 두 그룹은
치열한 경쟁으로 큰 피해를 입은적이 있습니다. 그때 역대 회장님들께서 제안하신 계약이 바로
산장 이벤트입니다."
"네?"
"산장 게임을 열어 내기를 하고 게임 우승자를 맞추는 쪽이 계약기간동안 실권을 장악한다는 약간
우스운 내용의 내기었습니다. 하지만 실제 문서로 이루어진 계약이라 역대 회장님들이 돌아가시고
나서도 계속 이벤트가 진행되었습니다."
"아스카. 이벤트 내용이 뭐야?"
"여러가지 심사를 거친 7명의 사람들이 산장으로 초대되어 추리게임을 벌입니다. 그중에는 문제를
내는 마스터가 섞여있으며 나머지 6명은 마스터를 찾아내고 마스터는 들키지 않게 자리를 지키는
지능 게임입니다. 7일동안 산장에 머물며 주어지는 문제를 풀게 되는데 그 문제를 맞추며 탈락하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는 자가 마스터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1대 6으로 벌이는 추리게임인가 보구나?"
"맞습니다."
"회사를 지키기 위해 그런 어이없는 게임을 했단 말야?"
"역대 회장님들께서 한 계약이니 어이없어도 따를 수 밖에요."
"내 머리로는 이해가 안가"
"아무튼 그렇게 이벤트가 진행되던 사이 카미아가 심각한 자금난을 겪게 되었습니다. 전부터 카미아를
손에 넣고 싶어 하셨던 송 회장님은 지용씨의 아버님인 정 회장님께 한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지용씨를 직접 산장 게임에 참가시키면 급한 자금을 융통해주겠다는 제안이었습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정 회장님께서는 울며 겨자먹기로 그 제안에 응했고 지용씨가 산장게임에 참가하게 되었습니
다. 정확한 계약은 지용씨가 1회 우승을 하고 마스터가 되면 급한 자금을 마련해주겠다는 것. 8회 연속
마스터 자리를 지켜낸다면 모든 계약을 종료하고 송아를 넘기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지용이가 성공 못하리라는 예상을 하셨군.. 그러니 그런 제안을 하셨지"
"맞습니다."
"그 산장 문제 어려워?"
"굉장히 어렵습니다. 저도 문제를 몇번 봤는데 혼자서는 도저히 풀 수 없겠더군요"
"그럼 나에게 지용이가 유학을 갔다고 거짓말한 것도 다 산장 이벤트 때문이야?"
"그런 이유도 있었습니다만 카미아를 눈엣가시로 여겼던 송 회장님은 그 집안의 아들과의 만남이
마음에 안든거지요"
"마음에 안들어 하는 건 알았지만 단순히 남자여서 그런 줄 알았는데.. "
"산장 이벤트에 참가하게된 지용씨는 첫번째 게임에서 우승합니다. 덕분에 카미아는 시급한 자금을
해결하게 되죠. 그리고 우승은 계속 되어 5회까지 이어집니다. 이 시점에서 불안해진 송 회장님은
나진씨가 죽었다고 거짓을 알리죠."
"............................"
"한번 기울어져버린 회사는 다시 되돌리기 힘든 법. 이때 카미아는 이미 재생 능력을 상실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지용씨가 6회 우승을 했을때 부모님이 갑자기 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설마.."
"저도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그 사고에 송 회장님이 은밀이 개입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분 움직임에 대해서는 저도 왠만큼 안다고 자부했는데 아니었던 겁니다"
"미쳐.."
"그리고 지용씨의 능력을 두려워했던 송 회장님은 6회째부터 참가자에 자신의 수하를 섞어 넣어
게임을 방해하기에 이릅니다. 그럼에도 지용씨가 당당히 마스터의 자리를 지켜낸거죠. 하지만 정 회장
내외의 죽음으로 카미아가 완전히 송아로 흡수되고 더이상 게임을 할 이유가 없어지자 그는 모든
계약을 종료하고 사실을 은폐하려 합니다. 하지만 지용씨가 송 회장님을 찾아가 마지막 이벤트를 열어
줄 것을 부탁합니다. 만약 그 게임에서 자신이 우승한다면 카미아 식구들을 지킬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인
계열사 하나를 인수해줄 것을 요구하면서 말이죠. 이때 송 회장은 지용씨를 없에기로 결정합니다."
"뭐?"
"나이는 어리지만 야심으로 가득찬 적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었던 모양입니다. 하여 자신의 사람을
은밀히 게임 참가자 중에 섞어 놓습니다. 지용씨는 이 7회 이벤트에서 승현군을 만나게 됩니다."
충격을 받은 승현은 자신이 알아들을 수 있는 7회 이벤트의 이야기가 나오자 손톱을 물어뜯으며
불안해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 보다 더 엄청난 사실이 숨어있을까봐 걱정이 되어서다.
"송 회장님이 개인적으로 7회 이벤트에 참가시켰다는 사람이 누구에요? 이름이 뭐에요?"
"료입니다."
"역시.."
"이벤트는 게임 이외에도 공포 이벤트가 있었습니다. 탈락자가 생기면 그의 허락을 받고 죽은 척 연기를
해 사람들에게 공포를 주는 것이지요. 일년에 두번, 100회가 넘는 게임을 진행하면서 빠지지 않고
등장한 이벤트 중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7회 게임에서 진짜 살인이 일어나게 됩니다. 다른 회와
다르게 참가자 전원을 친지 친척이 없는 사람으로 뽑은 이유도 그때문입니다. 송 회장님은 지용씨를
살인범으로 몰아, 전원을 그 산장에서 죽일 생각이었던 겁니다. 승현군도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셨죠?"
"네.."
"하지만 중간에 그의 계획을 어렴풋이 알아차린 지용씨는 자신의 목숨을 포기하고 승현군을 살려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결국 7회 마스터는 승현군이 되었고 지용씨는 송 회장님의 사람인 료와 싸우다가
상처를 입고 쓰러집니다. 그대로 두면 목숨이 위험했겠지요. 하지만 승현군이 산장 집사였던 송 이사님
께 사정하여 지용씨를 살려냈습니다. 지용씨만 살려주면 자신이 대신 죽겠다는게 조건이었죠.
송 이사님은 예전부터 송 회장님께 불만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지용씨를 늘 가엽게 여기고 있었구요.
그래서 그분은 산장에 대해 비밀로 해줄 것을 당부하고 두 사람 모두 살려주었습니다. 여기까지가
지용씨의 이야기입니다."
자신이 모르고 있던 이야기를 전부 알게된 나진은 어찌 할 바를 몰라하다가 결국 눈물을 쏟고 말았다.
그리고 자신의 비열한 아버지에게 강한 분노를 느꼈다. 아스카의 이야기는 승현에게도 충분히
충격적이었지만 그는 기특하게도 울고 있는 나진을 다독거리며 위로의 몸짓을 했다.
"나 정말 아무것도 몰랐어.. 미안해.."
"형. 울지 마요"
"지용아. 정말 미안해.. 아버지에게 그런 일을 당한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 못했어.."
"살았으면 된 거야. 그리고 형이 미안해 할 필요 없어."
존재가 변해버리면 정체성 자체가 바뀐다. 나진은 그것을 절실히 깨닿고 있는 중이었다. 2년이란
시간동안 송 회장을 충분히 미워하고 원망했지만 그 미움은 지금 느껴지는 증오와는 다르다.
혈육이라는 이름으로 간신히 이어져왔던 믿음마저 산산히 깨지자 남는 건 절망뿐이었다.
아스카는 그의 반응을 예상한 듯 잠시 말을 멈추고 분위기를 살폈다.
"아직 이야기가 끝난 게 아닙니다. 나진씨"
"나 두 사람한테 미안해서 어떻게 해.."
"....................."
"승현아. 미안해.. 네가 목숨걸고 지킨 것도 모르고 돌려달라고 해서 정말 미안해.."
"괜찮아요. 전 괜찮으니까 울지 마세요"
나진이 쉽게 진정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눈물을 흘리자 지용이 곁으로 다가가 그를 힘껏 끌어안았다.
그 행동은 애정이라기보다 그가 느끼고 있을 죄책감에 대한 용서이자 위로였다.
나진의 서러운 울음소리에 승현마저 눈시울을 붉히자 아스카는 꺼내려던 말을 잠시 멈추고 그가
진정할 때까지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울음을 멈춘 나진은 승현의 손을 잡으며
아스카에게 다음 이야기를 요구했다. 그의 눈은 눈물을 흘릴때와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자신의 입장에 대해 확실한 결심이 섰다는 뜻이다.
"그럼 다음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송 회장님이 나진씨를 이곳에 보낸 건 지용씨를 승현군와
떼어놓기 위함입니다. 산장의 비밀을 알고 있는 두 사람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만나게 해준다는 건 모두 거짓말이었네.."
"그렇게 해서 승현군을 먼저 떼어놓은 뒤에 나진씨와도 떼어놓을 생각이었던 겁니다. 요즘 송 회장님은
제정신이 아닙니다. 나진씨에게 이런 말까지 해서 정말 죄송하지만 이미 정신을 놓으신지 오래입니다.
최근에 안 사실이지만.. 약을 하고 계십니다. 생각보다 오래된 것 같습니다"
"마약?"
"무슨 약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마약의 일종이겠지요. 우연히 그 사실을 알게 된 송 이사님이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고 판단. 그분을 회장자리에서 밀어내기로 결심하셨습니다. 그 작업을 진행해오던 중
송 회장님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그것이 이 민박과 연관이 되어 있는듯
합니다. 아무리 악인이라도 아버님의 일인데 계속 이야기해도 되겠습니까?"
"괜찮아. 계속 해"
"약은 지용씨를 해치려고 하기 전부터 복용한 것 같고 이제는 회사일에 관심마저 끊으신 상태입니다.
그래서 은밀하게 뒷 조사를 한 결과 그분의 수하가 이곳에 드나든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조금 더 자세히 알아봐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중에 지용씨가 우연히 이 민박에 찾아왔고 그 사실을 안
송 회장님이 나진씨를 보내는 바람에 저도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되었습니다."
"그럼 여랑씨와 하루씨가 아버지와 무슨 일을 꾸미고 있다는 거야?"
"지금 알아보려고 하는 게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던 중 나진씨와 승현군이 우연히 숨겨져 있는 집을
발견하게 되었고 제가 지용씨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도움을 요청한 것입니다.송 회장님의 수하가
여러번에 거처 이곳을 방문했습니다. 사업상 이곳에 들를 이유가 없는데도 모습을 보였다는 건 역시
뭔가를 꾸미고 있다는 소리겠죠?"
"그렇겠네"
"우선 이곳 주인과 송 회장님 측 사람과의 직접적인 만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단서가 될 만한 것을
찾고 있는 겁니다. 그분을 회장자리에서 물러나게 할 만한 구실은 구속 뿐입니다"
"..............."
"이런 말 괴로우실 거 압니다. 하지만 상황이 꽤 심각합니다. 이대로 방치했다간 송아 전체가 위험
합니다. 저의 무례함을 용서하세요"
"한가지만 물어볼게. 네가 내 곁에 있는 이유도 복수 때문이야? 나도 송 회장님의 사람이니까?"
"아닙니다. 그것만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럼 나도 상관없어"
모든 이야기를 전해들은 나진은 그들의 앞에서 중대한 결정을 했다. 은밀히 이루어지고 있는 음모에
대해 침묵하겠다는 것. 그에게는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다. 혈육의 몰살을 돕겠다는 말이니까.
하지만 그만큼 송 회장은 많은 악행을 저질렀다. 아무리 혈육이라도 죄의 댓가는 확실히 치뤄야한다.
나진은 비통한 얼굴로 자신의 입장을 모두에게 밝혔다. 그의 결심을 굳게 한 결정적인 사람은
아스카였다. 그가 만약 나진을 버리겠다고 말했다면 이런 쉬운 결정은 내리지 못했을 터.
"그럼 이제부터 뭘 해야하지? 나와 승현이가 할 일을 알려줘"
"아직 확실한 것이 없습니다. 사실 저 집에 송 회장님의 흔적이 있을지도 미지수입니다. 그러니 두분은
나중을 위해 몸을 추스리는 일에 신경쓰십시오. 나머지는 저와 지용씨가 합니다."
"나도 뭔가 돕고 싶은데.."
"괴로우실 겁니다. 그러니 자신의 손으로 직접 일을 도왔다는 죄책감만은 덜어드리겠습니다.
나진씨는 이곳에서 쉬고 있다가 사람들이 오면 저에게 알려주십시오."
"그래. 알았어"
"이 일을 절대 다른 사람이 알아서는 안됩니다. 승현군이 호수씨와 친하다고 했나요?"
"네. 약간요"
"호수씨에게도 절대 내색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행동해주세요"
"걱정마세요. 그정도 센스는 있어요"
"좋습니다. 지용씨! 우리는 다시 안으로 들어갑시다. 날이 저물기 전에 단서가 될만한 것을 찾았으면
좋겠네요."
"네.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지용은 잠시 시간을 얻어 승현에게 다가갔다. 나진때문에 따로 신경을 써주지 못했지만 그도 분명
큰 충격을 받았을 터. 가기전에 인사라도 나누길 원했다. 지용이 곁으로 다가오자 승현은 더없이
애처로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형이 그렇게 슬픈 사람인 줄 몰랐어요. 그동안 어리광만 피워서 미안해요."
"슬픈일을 많이 겪었으니 앞으로는 행복해질거야."
"내가 노력할게요. 형을 위해서 많이 노력할게요"
"힘이 난다. 고마워"
"조심히 다녀오세요. 녹색을 띄고 있는 물건은 가까히 하지 마시구요"
"뭔가를 느끼는거야?"
"그 집 기운과 안맞아요. 그러니 되도록 가까히 하지 마세요"
"알았어"
"오늘 밤은 형을 끌어안고 잘 수 있게 해주세요. 나진 형은 따뜻하긴 한데 듬직하지가 않아요~"
"날이 저물기 전에 돌아올게. 어짜피 한번 둘러보기만 할테니 오래 걸리지 않을거야."
"좋아요. 다녀오세요"
"사랑한다 승현아"
"헤헤~"
"다녀올게"
"잠깐만요!"
"왜?"
"저도 무지무지 사랑해요~"
승현과 대화를 마친 지용은 더러워진 옷을 갈아입고 아스카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지하실에 내려갈 것을 대비해 방마다 걸려있는 후레쉬도 두개나 챙겨가지고 왔다.
그들은 마루에 널부러져 있는 봉지에서 빵을 꺼내 입에 물고 온천 입구로 향했다. 후덥지근한 김을
내는 온천의 초록빛 물을 보자 옷을 벗고 뛰어들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정말 그 사람들이야?"
"그래. 해일씨는 몰라도 호수씨는 확실해."
"성형 수술을 하고 찾아왔다는 건가?"
"뭐가 잘못된걸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방법으로 날 위협할 리 없잖아"
"피하지 말고 물어보지 그랬어?"
"처음부터 목을 조르는데 어떻게 물어봐. 눈이 너무 오싹해서 온몸의 기운이 다 빠졌는걸.."
"어쩐지 호수씨 성격이나 말투가 낯익다 했어.. 요즘 성형기술이 그렇게 발달했나? 전 얼굴은 조금 더
귀엽지 않았어? 지금은 그때보다 이목구비가 뚜렷해졌지만 왠지 날카로워 보이잖아"
"몰라. 생각하기도 싫어"
"그때 일이 잘못된 건가?"
지하실에서 해일이 없어져 찾다가 2층까지 올라온 여랑은 묶여있는 하루를 데리고 깊숙한 곳으로
들어와있었다. 밖으로 나가려 했으나 하루가 극구 거부하는 통에 잠시 진정할 시간을 주고자 함이다.
처음 하루를 봤을때는 묶어놓은 사람에게 강한 분노를 느꼈지만 전 후 사정을 듣고 나서는 호수의
대한 생각으로 분노는 잠시 접어둔 상태였다.
"배 안고파?"
"나야 뭐.. 너는?"
"괜찮아."
"그럼 조금만 더 있다가 나가자.. 혹시 지용씨가 와줄지도 모르고"
"그래."
하루는 떨림이 멈추지 않은 듯 가슴을 잡고 벽에 기대앉았다. 그는 스트레스에 매우 약하다.
처음 민박에 왔을때도 낯선곳에 대한 스트레스 때문에 한동안 고생을 한 적이 있다.
급격히 쌓인 스트레스는 신진대사의 불균형을 초래한다. 몸 안의 기력을 이리저리 분산시켜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몸이 뜨거워지며 혈액순환이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는다.
여랑은 애처로운 눈빛으로 하루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조금 진정되나 싶던 그가 어느 순간
격하게 몸을 떨며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또 다시 밀려드는 중압감.
"여기 있었네?"
"헉.."
"이왕 숨을거면 제대로 숨지 그랬어. 재미 없잖아"
특유의 억양으로 아는 척을 하며 모습을 나타낸 두 사람. 장난끼 가득한 눈의 해일과 호수였다.
호수는 팔을 교차시켜 팔짱을 끼고 있었고 해일은 그의 뒤에서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그들과 눈이 마주치자 극도로 긴장한 하루는 급히 여랑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 순간 천장에 달려있던 조명이 하나씩 터지기 시작했다.
"아악!"
퍽-
"소리지르지 마!"
"제발 그만 해.."
"내가 우습게 보였어? 팔아 넘길 만큼?"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말을 해줘야 저희도 인정할 건 인정하고 변명할 건 변명하죠!"
"여랑씨. 저는 여랑씨까지 괴롭히고 싶지 않아요. 당신은 그저 단 하루를 돕고 있는 것 뿐이니까"
"사랑하니까 돕는 겁니다. 지켜주고 싶으니까 함께 하는 겁니다. 팔아 넘기다니요? 저희는 부탁을
받고 두분을 소개해줬을 뿐입니다. 유능한 사람을 원한다기에 당신들을 추천했을 뿐이라구요!"
"해일아. 안되겠다.. 여랑씨 입 막아라"
"호수야. 그만 하고 차근차근 말해. 너무 흥분했어"
"내말 안들려? 이야기 할 가치도 없는 사람들이야! 너 그렇게 당하고도 정신 못차렸어? 차근차근
이야기하면 뭐가 달라지는데! 우리 상황이 나아져? 전처럼 평범하게 살 수 있어? 아니잖아!"
"그래도 이렇게 몰아붙이는 건 안좋아. 우선 진정하고.."
"너도 죽고싶어? 나 미치는 꼴 보고싶지 않으면 당장 저 입 막아!"
호수가 인상을 바득바득 쓰며 소리지르자 해일은 한숨을 푹 내쉬며 여랑에게 다가갔다.
다른건 몰라도 화난 사람을 잘못 건드렸다간 큰 해을 입기 마련이다.
"여랑씨. 미안하지만 그냥 아무말 말아요. 나 여랑씨 좋아했어요.. 해치지 않게 해주세요"
"해일씨. 답답해 미치겠어요. 그날 이후 무슨일이 있었는지 말해줘요"
"모르는거에요? 아니면 모르는 척 하는거에요?"
"정말 몰라서 그래요!"
"휴.. "
중간에서 입장이 난처해진 해일은 허공을 바라보며 목덜미를 긁적였다. 그가 난감하거나 답답할때
자주 하는 행동이다. 하지만 궁지에 몰린 사람에게 빈틈을 주면 안된다. 방심하는 만큼 반격의 폭이
넓어지니까.
해일이 잠시 마음을 놓자 기회를 보며 눈짓을 하던 여랑은 재빨리 하루의 손을 붙잡고 몸을 일으켜
달리기 시작했다. 눈 깜짝할 새 벌어진 일이라 지켜보던 사람이 오히려 황당해졌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내가 어떻게 해줄까? 호수야.."
"잡아! 저것들 잡아!"
"꼭 그렇게 해야 마음이 풀리겠어?"
"내가 몇번을 말해? 죽일거야.. 죽여서 내가 느꼈던 고통을 반드시 돌려줄거야!"
"그래. 어짜피 난 너 때문에 이곳에 온 거니까"
해일은 이쯤에서 호수가 그만 두길 바랬다. 그냥 평소대로 즐겁고 쾌활한 모습만 보여줬으면 했다.
하지만 도저히 말릴 방법이 생각나지 않자 그는 호수가 바라는대로 움직여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토록 바라던 일인데 내키지 않아도 눈감아주자.
그는 다짐하는 순간 몸을 일으켜 빠르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도망친다 한들 어짜피 한정된 영역.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사냥감을 옭아 맬 수 있다.
"저 사람들 뭐야?"
"보지마. 눈 감아"
"우리가 안보이는 거야? 사람이 들어왔는데 어떻게 저런 행동을 해?"
"단 하루. 조용히 해.. 밖에 들려"
해일과 호수를 피해 복도 끝에 위치한 방으로 몰래 숨어든 여랑과 하루는 쫓기는 것 이상의 기막힌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그것은 침대 위에 엎드려 몸을 섞는 남자 둘의 모습.
베개에 얼굴을 묻고 소리를 지르며 저항하는 남자는 하얀 피부에 마른 소년. 그의 등줄기를 핥아내리며
탐욕스러운 눈을 번뜩이는 남자는 어림잡아도 40대 중반은 넘어보이는 중년의 남성.
여랑은 급한대로 하루의 눈을 가렸지만 들려오는 신음성만은 참고 견뎌야했다. 실제로 타인의 성교
장면을 목격한 것도 처음이거니와 비정상적으로 강요적인 행위는 그로 하여금 구토를 불러일으켰다.
다리 사이로 뚝뚝 떨어져내리는 선혈과 그 사이를 억지로 비집는 남자의 뒤틀린 욕망.
사람이 들어왔음에도 멈추지 않는 행위와 끊임없이 울려퍼지는 비명소리. 그것은 몸으로 느껴지는
것보다 훨씬 강렬하고 지독한 충격이었다.
"나가자.. 못듣겠어.."
"진정될 때까지 조금만 견뎌"
"저 소리 안들려? 어떻게 참으라는 거야! 저건 사람이 아니야!"
"단 하루!"
듣는 사람이 괴로울 만큼 숨을 몰아쉬던 하루가 결국 참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하지만 복도에
기대어 서서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히 손짓하는 해일을 보자 그는 찢어질듯한 비명을 내지르며 옆방으로
몸을 숨겼다. 뒤따라나온 여랑도 해일과 눈이 마주쳤지만 이제 그들은 더이상 예전의 친한 친구가
아니었다. 위험이 닥치니 비로소 경계해야 할 대상과 그렇지 않은 대상의 구분이 확실해졌다.
여랑은 그에게 원망스러운 눈빛을 보내곤 바로 하루를 따라 옆방으로 뛰어들어갔다. 하루가 문고리를
잡고 있어 밀고 들어가는데 애를 먹었지만.
그러나 영혼이 오염될 만큼 지독한 장면은 끝이 아니었다. 문을 잠그고 방안을 두리번거리던 여랑은
구석에 앉아 한곳에 시선을 고정하고 얼어붙어버린 하루를 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그의 시선 끝에는 강제로 팔뚝에 주사를 놓는 중년의 남자와 수건으로 입을 틀어막힌 소년의 모습이
소리없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생생히 펼쳐지고 있었다. 이제는 여랑 마저 현실이 아니라고 생각 할
정도였다.
"제발 여기서 나가게 해줘.. 부탁이야.."
하루가 급기야 눈물을 흘리며 바닥에 엎드리자 여랑은 어떻게든 그를 민박으로 데리고 가야겠다는
생각에 신경을 바짝 곤두세웠다. 악에 바친 사람이라도 흉기를 가지고 있지 않으니 힘으로 밀어붙이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 여랑은 구석으로 다가가 공황상태에 빠진 하루를 힘껏 일으켜 세웠다.
걸어갈 힘이 없으면 업고라도 이곳을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철컥-
하지만 그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잠겨져 있던 문의 손잡이가 우습게 돌아가더니 그 틈으로
피를 뚝뚝 흘리는 손 하나가 쑥 밀려들어왔다. 호러영화속 귀신같이 긴 손톱과, 벗겨진 피부 사이로
흐르는 피는 보는 사람의 숨통을 강하게 죄고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본 하루는 크게 숨을 들이쉬며 한참동안 호흡을 멈추더니 결국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eight-
"비위가 약하면 미리 코를 막는 것이 좋습니다. 저도 나름대로 냄새에 강하다고 자부했지만 이건 도저히
사람이 맡을 수 있는 냄새가 아닙니다."
"지용씨가 그렇게 말하니 긴장되잖습니까. 저 비위 별로 좋지 못합니다"
"이번 기회에 강해지십시오"
"뭐라구요?"
밖에서만 열리는 이상한 구조의 문 안으로 진입한 지용과 아스카는 제일 먼저 지하실로 향했다.
지하는 누구나 꺼리는 곳. 매도 먼저맞는게 낫다는 심정으로 두 사람은 조심스럽게 지하실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이 끝나는곳부터 찰랑거리는 검푸른 빛의 물과 시큼한 냄새가 정체를 드러내자 벌써부터
기분이 안좋아진 아스카는 조용히 입을 막고 미간을 좁혔다. 안좋은것을 감지하는 능력은 영혼을
가진 생명체라면 다 같은 법. 지용은 들고 온 후레쉬의 스위치를 올려 아스카의 손에 쥐어주었다.
"해일씨가 쓰러져있던 관계로 방 하나밖에 못살펴봤습니다. 물론 그 이유가 전부는 아니지만 말입니다.
이 방은 형광등이 없어서 어둡습니다. 바닥에 무언가가 잔뜩 어지러져 있는 것 같은데 그것이 뭔지
다시 한번 살펴봐야겠습니다."
"이 방이 지용씨가 말했던 그 방입니까? 상상을 초월하는 냄새가 난다던?"
"맞습니다. 미리 심호흡하십시오. 경진씨마저 냄새로 질식하면 힘들어집니다"
지용의 말을 들은 아스카는 주머니에 있던 손수건을 꺼내 재빨리 코와 입을 막았다. 그는 언제나 반듯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으며 손수건도 예외없이 깔끔하고 심플한 디자인이었다. 윤호는 자신도 손수건을
챙겨가지고 다녀야겠다고 생각하며 조심스레 방 문을 열었다. 끼익거리는 문의 마찰음은 곤두서있는
신경에 적지않은 불쾌감을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스물스물 밀려드는 냄새에 비하면 애교라고 생각해도
나쁘지 않을 정도.
"욱.."
"바닥만 살펴보고 나갑시다. 어서 비춰봐요"
그들은 폐 안에 잔뜩 쑤셔넣은 시큼한 공기가 소멸하기전에 바닥을 확인하고 철수해야만 했다.
어둠을 가르며 쏘아진 후레쉬의 불빛 두개가 바닥의 이곳저곳으로 정신없이 엉켜든다. 그 빛에
허겁지겁 흩어지는 까만 물체를 쫓다보니 머리까지 어질어질하게 만드는 냄새의 근원을 알 수 있었다.
이미 부패가 심하게 진행된 쥐의 시체들. 뼈만 남을 정도로 오래된 것도 있었지만 대부분 녹은 초콜릿
처럼 흐물거리며 바닥에 끈적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속의 뒤틀림을 도저히 참아낼 수 없었던 아스카는
손수건을 꽉 움켜쥐며 복도로 나가버렸고 쥐의 시체 외에는 별다른 점을 발견하지 못한 지용도
토기를 참지 못하고 밖으로 뛰어나와 부족한 산소를 보충했다.
쥐의 썩는 냄새는 상상을 초월한다. 맡아보지 않은 이상 머리로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태어나서 이렇게 지독한 냄새는 처음입니다. 억지로 참았더니 눈물이 다 나네요"
"저는 두번째입니다. 이미 낮에 한번 경험했거든요"
그들은 울렁거리는 속을 가라앉히며 방문을 하나씩 열고 내부를 살폈다. 지하실을 쓰레기장으로
썼는지 대부분 악취가 나는 쥐의 시체와 쓰레기등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모든 방을 살펴보지도
않고 단정지을 수 는 없는 일. 그들은 인내심을 가지고 복도를 기준으로 양쪽으로 구역을 나눴다.
둘이 움직이는 것 보다야 따로 움직이는 것이 훨씬 시간을 줄일 수 있다.
예상대로 대부분의 방이 엄청난 쓰레기와 오물들로 뒤덮혀져 있었지만 안으로 깊숙히 들어갈수록
상황은 달라졌다. 최근까지 사람의 손길이 닿은적 있어보이는 거대한 보일러실을 시작으로 이상한
기계로 가득 찬 방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왜 안으로 들어갈수록 환경이 나아지는 걸까.
"입구와 가까운 방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것처럼 상태가 심각했습니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깨끗해 지고 있습니다."
"맨끝부터 거슬러 올라가는 기분이군요"
"그럴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집 어딘가에 출구가 하나 더 있을 거라고 예상했었죠? 어쩌면 우리가 들어
온 문은 가짜고 실제로 사람이 드나드는 문은 반대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안으로 들어갈수록
관리를 한 것처럼 깨끗해지는 거죠"
"쓰레기를 하나씩 뒤져볼수도 없는 노릇이고.. 난감하네요"
"지용씨! 이것 보십시오!"
서로 등을 맞대고 서서 방을 살피며 대화를 나누고 있을때였다. 아스카가 갑자기 흥분한 목소리로
지용을 부르며 방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지용은 자신이 살피던 방의 이상 유무를 확인하고 아스카를
따라 맞은편 방 안으로 들어갔다. 거의 복도 끝이라고 볼 수있는 위치였다.
"이건.."
"유골입니다.. 사람의.."
두개의 후레쉬 불빛이 가늘게 떨리며 한곳에 고정되었다. 그 불빛 끝에는 푸르스름한 인광을 내는
뼈들이 이리저리 흩어져있었다. 얼핏보면 사람의 뼈인지 동물의 뼈인지 구분 못할 만큼 형태가
엉망이었지만 두개골과 골반뼈로 짐작컨데 그것은 분명 사람의 뼈였다.
긴장한 그들은 방을 나와 몇개 안 남은 다른 방을 살펴봤다. 또 다른 유골이 나올 것을 예상했지만
그 방을 제외하고는 어느곳에서도 뼈가 발견되지 않았다. 대신 의료실로 보이는 방 두개가 발견되었다.
"주사기네요? 사용한 흔적은 있는데 내용물은 없군요"
"경진씨. 주사기 몇개 챙겨요."
"네?"
"송 회장이 약을 한다고 했죠? 혹시 알아요? 이 주사기와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조사하면 안에
들어있던 내용물을 알아낼 수도 있고 운좋으면 사람의 혈액형 체취도 가능하잖아요. 바늘이 몸속에
들어갔다 나왔다면 말이죠"
"정말 그렇겠군요?"
아스카는 지용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주사기를 담을만한 통을 찾았다. 바늘을 분리하지 않고 발견된
상태 그대로 가져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종이로 만든 상자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아무리 찾아도 마땅한
것이 보이지 않자 아쉬운대로 손수건을 꺼내 손을 대지 않고 주사기 몇개를 집어 돌돌 말았다.
바늘에 찔리지 않으려면 주머니에 넣을때나 가지고 이동할때 세심한 주의가 필요할 것 같다.
"송아 78주년.. 뭐라고 써있는 거지?"
"송아요?"
"경진씨. 이것 보세요. 만년필인데 희미하게 송아 어쩌구 라고 씌여있네요"
"줘보세요"
지용이 바닥을 살피다 우연히 발견한 만년필은 그들이 찾고 싶어하는 결정적인 증거처럼 보였다.
아스카는 눈을 가늘게 뜨고 불빛을 비춰 흐릿한 글씨를 읽으려 애썼다. 닳아 없어지긴 했지만 그것은
송아 기념파티때 만들어진적이 있는 만년필이었다.
"좋은 걸 찾아 냈군요?"
"그렇습니까?"
"이 만년필. 송아 기념일때 제작된 겁니다. 일반 사원들 것은 세공이 은색을 띄고 있고 부장 이상의
간부들 건 금 도금이 되어있습니다. 이건 분명 간부들이 가지고 있던 것 중 하나입니다"
"후.. 다행이네요."
"좋습니다. 이걸로 이곳에 송아 관계자들이 드나든다는 사실이 확실해졌습니다. 출구를 찾아보고 윗층
으로 올라가도록 합시다."
중요한 단서를 발견한 그들은 끈적한 바닥과 풍겨오는 악취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둘러 출구를 찾았다.
하지만 그 어느곳에서도 출구로 보이는 문을 발견하지 못했다. 결국은 비밀장치로 숨겨놨을지도 모른
다는 추측으로 지하실 조사를 접고 윗층으로 올라갔다. 우선 지하를 벗어나니 속이 진정되어 살만했다.
그들은 넓은 거실을 거쳐 욕실을 찾아 신발을 닦는 일부터 시작했다. 지하실의 흔적을 말끔히 제거한 뒤
유리병을 찾아 주사기를 옮겨담은 아스카는 신발의 물기를 닦는 지용의 어깨를 몇번 두드리더니
문 밖으로 나가 주위를 살폈다. 1층은 2층이나 지하와 달리 넓은 응접실로 이루어져 있었다.
여기저기 널려있는 카드와 칩들. 재떨이에 수북히 쌓여있는 담배꽁초와 술병들을 미루어 짐작해보면
이곳에서 도박이 벌어지고 있는게 분명했다. 그뿐만 아니라 어느 방은 pc방처럼 여러대의 컴퓨터가
일렬로 들어서 있었고 한쪽 벽에는 대형 화면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 방은 뭘까요 지용씨?"
"도박과 연관지어서 생각해보면 경마게임이 아닌가 싶습니다."
"경마게임이요?"
"성인 오락실 가본 적 있습니까?"
"한번도 없습니다만.."
"제가 철없던 시절 친구를 따라 몇번 가봤는데 컴퓨터로 하는 경마 게임이 있었습니다. 화면을 통해
경주를 보고 컴퓨터에 답을 입력하는 거죠. 아마도 이 방은 그런 용도로 만들어졌을 겁니다"
"그렇군요.."
방마다 다양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는지 어느방에는 공기총이 잔뜩 놓여 있기도 했고 당구대가 있는
방도 있었으며 체스나 장기, 바둑판이 있는 방도 있었다. 한마디로 1층은 도박을 위해 만들어진 거대한
공간이었다. 주방으로 들어가니 냉장고는 생수와 얼음으로 가득했고 술도 와인부터 브랜디까지
종류가 다양했다. 음식을 해먹은 흔적은 전혀 없었고 식기도 안주를 담을 수 있는 접시와 스트레이트,
온더 락, 글라스, 여러 크기에 아이스박스와 집게 뿐이었다. 이곳을 누가 사용했는지는 모르지만 엄청난
도박의 현장임에도 뒷처리를 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해놓은 것이 우스울 뿐이었다.
그들은 대범함에 박수를 보내며 2층으로 향했다. 1층도 마찬가지로 출구는 발견되지 않았다.
"2층은 전부 같은 구조의 침실이네요. 1층에서 도박을 하고 2층에 올라와 쉬었나봅니다."
"은밀한 장소에 갖출 건 다 갖췄군요? 이런 시골에 모여 도박판을 벌이니 아무도 모를 수 밖에.."
"하지만 확실히 연관만 되어있으면 이보다 더 좋은 증거는 없습니다."
"불법 도박에 약물복용.. 걸리면 연관되어있는 사람들까지 엄청난 피해를 입겠습니다."
2층은 전부 침실이었다. 지하와 마찬가지로 계단과 가까운곳은 사용한 흔적이 없는 것처럼 먼지가
뽀얗게 앃여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 수록 깨끗히 정리되어 있었으며 방마다 설치된 전기
방향제는 일정 시간마다 향을 뿜어대고 있었다. 지하실에 비하면 천국이 따로 없다.
그들이 지친 몸을 이끌고 복도 제일 끝방에 들어갔을 때였다. 문을 열때부터 왠지 위화감이 느껴지는게
기분이 영 이상했다. 지용은 방 안으로 쑥 들어가더니 작은 탁자 위에 올려진 담배꽁초를 집어들었다.
"담배냄새가 난다 싶더니.. 필터가 젖어있어요. 방금 전까지 누가 있었던게 확실해요"
그가 담배꽁초를 내밀며 고개를 돌리자 조심스럽게 방문을 닫고 들어온 아스카가 입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말을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눈치 빠른 지용이 상황을 알아채고 입술을 깨물자 아스카가 손짓으로
그를 부른 뒤 귓속말을 했다.
"지용씨. 옷장입니다. 옷장에 누군가 있습니다"
"어쩐지.."
"대답하지 말고 듣기만 하십시오.제가 문을 열고 끌어낼테니 지용씨는 빠져나가지 못하게 문을 막아
주세요. 운좋으면 증인까지 확보하게 될지도 몰라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이던 지용은 시계를 보며 문을 가로막고 섰다. 아스카는 날카로운 눈으로 옷장을
노려보더니 발소리를 죽이고 천천히 다가갔다. 하지만 쫓는 자 보다 쫓기는자의 눈과 귀가 더 예민한법.
아스카가 옷장에 손을 댐과 동시에 문이 벌컥하고 열리며 안에 숨어있던 남자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의 손에는 얼굴이 비춰다보일 정도로 손질이 잘된 잭나이프가 들려있었다.
"윽.."
"경진씨!"
"조심해요! 칼을 들었어요!"
잭나이프쯤이야 얼마든지 저지할 수 있다. 그정도 순발력은 충분히 발휘할 수 있다. 하지만 목 언저리를
감싸쥐며 고개를 숙인 아스카의 모습과 함께 승현의 말이 떠오르자 지용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문을 열고 도망치는 그를 막을 수 없었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녹색을 띄고 있는 물건은 가까히 하지 마시구요
하필 남자의 상의가 녹색이었다. 짧은 순간에도 지용은 승현의 당부를 기억해냈다. 작은 나이프라고
무시했다가 크게 다친다는 소리일까? 무언가에 몸을 찔린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고통인지 경험으로
잘 알고 있는 지용은 한발 물러나 아스카에게로 달려갔다. 감싸쥔 손 사이로 씨뻘건 피가 주르르 흘러
내리고 있었다. 피의 색은 언제봐도 울렁거린다.
"경진씨! 어디 좀 봐요"
"괜찮아요. 다행히 피부만 스쳤습니다. 하마트면 큰일날 뻔 했어요"
그의 말대로 칼날은 아슬아슬하게 피부를 베고 빗나간 것 같았다. 위치상 조금만 깊게 들어갔어도
경동맥이 끊어졌을 듯. 마땅한 지혈도구가 없어 손수건을 목에 둘러 매듭을 묶은 그들은 남자가 도망친
맞은편 방으로 들어가 열려져 있는 옷장 안에 숨겨진 철문을 발견했다.
"옷장이군요!"
"옷장 안에 문을 만들어놓다니.."
"지하나 1층도 이런 식으로 문을 숨겨놓았을 겁니다. 이렇게 철저히 폐쇄된 공간이니 내부를 엉망으로
어지러놓은 거죠. 참 대단한 사람들이네요"
"열고 들어가볼까요?"
"잠시만요...."
초록색의 압박은 생각보다 컸다. 하필 철문에 초록색 페인트칠이 되어 있어 지용의 마음을 흔들었다.
승현이 조심하라고 한 건 정확히 무엇이었을까. 초록색을 모두 조심하라는 뜻일까. 아니면 물건이라고
했으니 사람보다 철문인걸까. 판단이 빠른편에 속하는 지용도 승현의 예지에는 어쩔 수 없이 고민을
하나보다.
"왜 그래요?"
"아닙니다. 느낌이 별로 좋지 않아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그럼 그냥 돌아갈까요?"
"이왕 발견했으니 들어가봐야지요"
아무리 마음에 걸려도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출구를 두고 그냥 돌아갈 수 없는 일.
지용이 마음을 다잡고 천천히 문 앞으로 다가갔다. 녹쓴 철문이 기분나쁜 마찰음을 내며 조금씩 열리자
생각보다 두께가 두껍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때마침 들려오는 사람의 목소리.
"지용씨!"
어둠속에서도 그 목소리는 호수임을 짐작케 했다. 그들은 반가운 마음에 재빨리 문을 닫고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미끼를 던져주면 앞 뒤 구분 못하고 덥썩 문다니까? 애나 어른이나 다를 게 없어."
"하마트면 큰일날 뻔했습니다"
"빨리 송 회장님께 알려. 두 사람이 같이 있다고"
열려져 있는 옷장 틈 사이로 보이던 철문은 보기 좋은 미끼. 누군가의 힘에 의해 옷장문이 닫히자
벽 뒤로 감춰진 출구가 스르르 열렸다. 나이프에 묻은 피를 옷에 쓱쓱 문지르던 남자가 동료와
함께 밖으로 나가자 열렸던 문이 닫혔고 딱 들어맞은 문은 벽에 동화되어 처음부터 없었던 것 처럼
모습을 감췄다.
"분명 호수씨 목소리 아니었습니까?"
"저도 그런 줄 알고 뛰어들어왔는데 없네요"
"그나저나 경진씨. 아까 숨어있던 남자 본 적 있습니까?"
"송 회장이 부리는 사람입니다. 잡았어야 하는데.."
"아는 사람에게 칼을 휘두르다니 몹쓸 놈이로군요"
"아마 급한 마음에 확인도 안하고 그랬을 겁니다. 지금쯤 송 회장의 귀에 들어갔겠네요"
"미안합니다. 제가 잡았어야 하는건데.."
"아닙니다. 잘못하다 지용씨 마저 다치면 일이 더 커집니다. 잭나이프는 찌르기 위해 만들어 졌습니다.
그만큼 칼이 가늘고 날카로워 찔리면 치명상을 입습니다"
"사실 칼이 무섭진 않았습니다. 순간 승현이의 당부가 떠올라서 그만.."
"당부요?"
"기차사고에서 운좋게 살아난 것도 승현이의 예지 때문입니다. 약간의 신기가 있어 그런지 앞날에 대한
예지가 무서울 정도로 정확합니다. 아까 민박에서 나올때 녹색을 띄고 있는 물건은 가까히 하지
말라더군요 뛰어나온 남자가 하필 녹색옷을 입고 있어서 순간 움찔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들어온 철문도 녹색 아닙니까?"
"사실 그것 때문에 들어오길 망설였지만 어쩌겠습니까? 한번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죠"
"좋습니다. 위험한 일이 생기면 같이 막아봅시다."
하나로 통하는 마음에 뿌듯함을 느낀 두 사람은 달팽이의 등껍질처럼 꼬인 길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평지인듯 하면서도 내리막인 나선형의 길은 머리가 어지러울 만큼 한참동안 이어졌다.
벽은 곰팡이와 먼지가 한데 뒤엉켜 축축히 젖어있었고 바닥은 마른 모래가 수북히 쌓여있었다.
얼마나 길을 따라 내려갔을까. 드디어 출구가 나타났다. 그들은 문을 여는데도 신중을 기했다.
길은 오로지 하나. 입구를 착각한 두 사람은 칼을 든 남자가 떠나지 않고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면
자칫 위험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지용은 목을 다친 아스카를 자신의 뒤로 물러서게 하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무거운 철문은 들어온 문보다도 훨씬 심하게 녹이 쓸어있었다. 하지만 그들 눈 앞에 펼쳐진
곳은 어이없게도 1층 복도였다.
"뭐야!"
"여기는 1층 복도 아닙니까?"
"기가 막히는군요"
지용은 황당함의 표현을 너털웃음으로 대신했다. 애써 긴장하고 나왔더니 출구가 아니라 2층과 1층을
연결해주는 비밀 문이라니. 나오는건 한숨과 웃음뿐이었다.
"이쪽이야! 단 하루!"
"같이 가!"
긴장이 풀려 벽에 기대선 것도 잠시. 어디선가 우당탕 소리와 함께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에 꽂아놓은 칼을 떠올린 아스카는 배에 잔뜩 힘을 주고 큰 소리로 외쳤다.
나가는 사람이 칼을 다시 꽂아놓지 않으면 그들은 꼼짝없이 안에 고립될 판.
"기다려요! 나가지 마세요!"
"가봅시다!"
마음이 급해진 두 사람은 번갈아 소리지르며 입구를 향해 정신없이 달렸다. 다행이 목소리가 들렸는지
여랑이 문을 잡고 서 있었다.
"헉.. 헉.. 같이 가요"
"지용씨!"
"문이 닫힐까봐 정신없이 뛰어왔습니다.."
"빨리 나와요. 어서요!"
"해일씨와 호수씨는요?"
"그들은 미쳤습니다. 우리도 겨우 피해서 나왔으니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어서 나오세요"
"미쳐요?"
"빨리 안나오면 저희 먼저 갑니다?"
여랑의 다급한 목소리를 들은 지용과 아스카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밖으로 나왔다.
미쳤다는 말은 곧 두 커플이 대면을 했다는 뜻. 그렇다면 우선은 모두의 안전을 확인한 셈이니 민박으로
돌아가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고 돌아와 문을 열어줘도 늦지 않는다.
아스카는 송 회장의 수하가 마음에 걸렸지만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사람까지 해칠까.. 싶은 마음에
우선 여랑을 따라 민박으로 돌아갔다.
"형!"
"니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마루에 걸터 앉아있던 승현이 반가운 얼굴로 달려왔다. 오랫동안 찬바람을
쐬고 앉아있었는지 입술이 파랗게 질려있었다. 지용은 그를 품에 안고 등을 쓸어주며 말했다.
"왜 밖에 나와있어?"
"안이 너무 따뜻해서 졸렵지 뭐에요. 그래서 나와있었어요."
"속은 이제 괜찮아?"
"괜찮아요. 빨리 안으로 들어가요"
지용과 승현이 부둥켜안고 서로의 안부를 살피는 동안 나진은 아스카에게로 다가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아스카는 손을 뻗어 차가워진 나진의 긴 머릿카락을 만졌지만 피가 배어있는
손수건을 보고 인상을 쓰는 그의 눈과 마주치자 곧 행동을 멈추고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었다.
"목 왜 이래? 다쳤어?"
"차가운데 있으려면 옷을 단단히 챙겨 입어야 합니다."
"말 돌리지 말고! 많이 다쳤어?"
나진이 아스카를 마루에 앉히고 굳은 피를 닦는동안 지친 여랑과 하루는 신발을 벗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짧은 시간 동안 너무나 많은 일이 있어 지금은 아무생각 없이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조차 쉽게 허락하지 않은 이들이 있다.
"단 하루.. 이제 와?"
"아악!!"
하루의 찢어질듯한 비명소리가 온 집안에 울려퍼지자 흩어져 각자의 일을 하던 사람들의 눈과 귀가
단숨에 그에게로 집중됬다. 분명 온천 뒤 집 안에 갇혀있어야 할 호수가 그의 방안에 앉아있었다.
여랑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고개를 흔들었지만 정신적인 충격을 받은 하루는 뒷걸음질치며 맨발로
마당까지 걸어나왔다. 그러자 인형처럼 얌전히 앉아있던 호수가 피식피식 웃으며 천천히 마당으로
걸어나왔다. 그 역시 맨발이었다.
"오래 기다렸잖아~ 이제 그만 인정해"
"뭘 인정하라는거야? 설명을 해줘야 알 거 아냐!"
"해일아 이것봐. 내가 끝까지 인정 안 할 거라고 했지?"
"그러네.."
"이제 내 마음대로 한다?"
"좋아. 허락할게"
무엇을 허락한다는 건지는 몰라도 해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의 의사를 내비치자 호수가 안색을
바꾸고 하루에게 덤벼들었다. 놀란 여랑이 하루에게 달려가려 했으나 해일에게 가로막혀 옴싹달싹
못한 채 굳어버렸다. 이유는 그가 틀어잡은 손 때문.
"여 랑. 너는 얌전히 있어"
"이거 놔!"
"좋은말 할때 얌전히 있어라"
해일마저 안면을 바꿨다. 두 커플의 대립의 이유를 모르는 지용은 재빨리 승현과 나진을 온천과 가까운
곳으로 보내고 급히 하루에게로 달려갔다. 아스카는 해일의 손을 잡고 여랑을 빼내려고 했지만
맞잡은 손은 하나인 듯 좀처럼 떨어질 생각을 안했다. 오히려 잡아당기는 아스카의 손만 혹사당하는
기분이었다. 그사이 하루의 목을 움켜쥔 호수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빨리 말해! 너희가 저지른 일에 대해 말하란 말이야!"
"호수씨!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그만하십시오. 이러다 죽어요!"
"지용씨. 이건 우리끼리 풀어야 할 일이니 상관하지 마세요!"
"어떻게 상관을 안해요!"
"단 하루. 내말이 틀려? 난 너희를 좋아했어. 처음으로 마음이 맞는 커플을 만났다고 생각했어.
내가 얼마나 너를 좋아했는 줄 알아? 그러니 빨리 말해! 사람들 앞에서 네 잘못을 말하란 말야!"
"호수씨! 그만 두십시오!"
"지용씨가 이번 차례였다는 거 알아요? 우리가 없었다면 분명 같은 일을 당했을거라구!"
호수는 분노에 가득찬 목소리로 절규했다. 지용이 그를 말리기 위해 허리를 잡고 뒤로 끌어당겼지만
몸에 무게가 잔뜩 실려있는 것처럼 도무지 움직일 생각을 안했다. 그 느낌은 천근만근의 쇳덩이를
들어올리는 기분. 땅 속 깊숙히 뿌리 내린 나무를 맨 손으로 뽑아내기 위해 애쓰는 기분.
무게감이 심해서 오히려 존재하지 않는 듯한 기분.
지용은 그의 허리에서 오만가지 오묘함을 느끼고는 결국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사람들은 해일이 말려주길 바랬지만 왠일인지 그는 전혀 말릴 생각이 없어보였다.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한 표정과 행동. 도대체 그들 사이에 무슨일이 있었던 걸까.
쉽게 볼 수 없는 단편적이고 충격적인 영상. 그것은 현실이 아니라고 생각되어질만큼 억지스러웠다.
"계십니까! 경찰입니다. 안에 계신 것을 알고 있으니 문을 열어주십시오!"
모두가 방법을 못찾아 곤란해하고 있을때 난대없이 대문이 덜컹 흔들리더니 자신을 경찰이라고 밝히는
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그렇게 떨어뜨려 놓으려고 해도 꿈쩍하지 않던 호수가 신기하게도
제발로 물러나더니 해일의 귓가에 뭔가를 속삭이며 키득키득 웃었다.
강렬한 사념의 최후. 처음으로 만족한듯한 얼굴. 그 모습은 너무나도 해맑아 오히려 무서울 지경이다.
사람들은 갑작스런 방문객의 요구에 선뜻 응하지 못하고 얼빠진 모습들이었다. 아무도 문 열 생각을
않하자 문을 두들기던 자는 행동을 멈췄다. 사람이 없다고 판단한 모양.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우당탕 소리와 함께 객실의 맨 끝방문이 열리더니 흰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은
사내 두명이 날렵한 움직임으로 총을 겨누며 마당으로 뛰어들었다.
그들이 뛰어나온 객실은 얼마전 대양과 영원이 머물던 바로 그 방이었다.
-nine-
"대양 형! 영원아!"
그들의 앞으로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낸 건 다름아닌 대양과 영원이었다.
어리둥절한 이들의 틈 사이로 끼어든 두 사람은 각자 뒷주머니에서 신분증을 꺼내 모두가 볼 수 있도록
높이 펼쳐들었다. 승현은 소식을 궁금해했던 영원이 반가워 앞으로 나가려고 했지만 얌전히 있으라는
나진의 만류에 아쉬운듯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영원은 그들과 아는 척을 하기엔 조금 바빴다.
"저는 xx 경찰청 강력계 형사 오 대양이고 이쪽은 제 동료인 진 영원입니다"
"대양씨?"
"놀라게 해드린 점 죄송합니다."
자신의 신분을 밝인 대양은 놀란 얼굴의 사람들 틈으로 뛰어들어 여랑과 하루의 손목에 수갑을 채우고
마당을 한바퀴 빙 둘러봤다. 졸지에 범인 취급을 받은 여랑과 하루도 놀랐지만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나머지 일행들의 얼굴에도 핏기가 가셨다.
대양은 익숙한 걸음으로 여랑의 방으로 뛰어들어가더니 방을 샅샅이 뒤져 커다란 쇼핑백 하나를 들고
걸어나왔다. 승현에게 어깨를 으쓱해보이며 눈짓을 하던 영원은 대양이 나오자 그가 들고 있던
쇼핑백을 받아들고 내용물을 살피는가 싶더니 거꾸로 들어 바닥에 모두 쏟았다.
"오 형사님. 이게 뭐죠?"
"조사해봐야 하겠지만 좋지 않은 약인 건 확실해"
"약물 소지까지.."
대양이 바닥에 쏟아진 약을 집어들자 눈이 휘둥그렇게 된 지용이 걸어나와 낚아채듯 약을 빼앗아들고
무섭게 인상을 썼다. 그러자 눈치 빠른 아스카가 그의 어깨를 잡고 조용히 물었다.
"지용씨. 이게 하루씨가 준 비타민?"
"맞습니다."
"이런.. 약도 못 먹는 승현군에게 이런 걸 먹였으니 당연히 거부반응이 일어날 수 밖에.."
아스카의 말이 끝나자 화가 치민 승현은 수갑이 채워진 채 마당 한가운데 앉아있는 하루에게 달려가
멱살을 움켜잡고 고래고래 소리질렀다. 정확한 약의 명칭은 몰라도 비타민이 아니라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화가 치밀었다. 그는 잡아먹을 듯 눈을 부릅뜨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하루씨! 이런 위험한 약을 비타민이라고 속이다니.. 미쳤습니까?"
"저도 몰랐어요.. 정말 비타민인줄 알았어요.."
"그게 말이 되요? 어떻게 비타민도 구분 못합니까!"
"약을 받을때 그렇게 들었어요. 그래서 저도 가끔 먹었다구요.."
하루가 기운없는 목소리로 변명을 하자 지용은 그를 향해 주먹을 들었다가 차마 때리지도 못하고
잡은 멱살을 놓으며 일어섰다. 화를 내더라도 우선 상황 파악이 끝난 다음이라는 생각을 했다.
지용이 하루에게서 떨어지자 대양이 그의 곁으로 다가가 질문하기 시작했다. 여랑과 하루는 아직도
자신들이 결박당한 이유에 대해 모르는 눈치였다.
"조사도 안하고 수갑을 채운 점 사과드립니다. 이제부터 제가 하는 질문에 솔직히 답해주십시오."
"우선 수갑부터 풀어주세요. 저희가 왜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지금 풀어드릴테니 질문에 답을 해주십시오."
대양은 묶여있는 그들 역시 자세한 내용을 모른다고 판단. 몸 수색을 마친 뒤 채웠던 수갑을 풀어주었다.
물론 영원에게 대문 근처를 지키라는 명령도 함께 말이다.
그들이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몸을 일으키자 대양은 생각해뒀던 질문을 하나하나 던지기 시작했다.
"여랑씨와 하루씨. 두 분은 이곳에서 사람을 소개시켜주는 일을 하고 계시죠?"
"....................."
"이미 조사하고 왔습니다. 솔직히 말해주십시오"
"....................."
"게임을 열어 사람들을 초대한 뒤 한 커플을 외부로 소개시켜주는 일을 하고 계시더군요. 벌칙장소인
뒷산에 매단 편지로 결정여부를 알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죠?"
"네.. 그렇습니다"
"누구의 사주를 받았습니까?"
"....................."
"실종사건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 사건의 근원이 이 집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그러니 솔직히
말을 해주십시오. 만약 두 분에게 잘못이 없다면 더더욱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실종사건이라니.. 말도 안되요"
"어떻게 된 일입니까?"
"저희는 송 회장님의 부탁을 받았을 뿐인데.."
하루가 당황한 얼굴로 송 회장의 이름을 꺼내자 깜짝 놀란 지용과 아스카는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대화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의 이름을 듣고 놀란건 승현과 나진도 마찬가지었다.
"계속 말씀해보세요"
"저희는 아무 것도 몰라요. 그냥 사람을 골라달라는 부탁만 받았을 뿐인데.. 실종이라뇨?"
"송 회장이라고 하셨죠? 그분에게 무슨 부탁을 받으셨습니까?"
"사실 저희 아버지가 송 회장님께 큰 빚이 있어요. 도저히 갚을 길이 없자 아버지와 어머니는 저를
두고 도주하셨죠.. 그때문에 제가 모든 빚을 뒤집어쓰고 송 회장님께 잡혀갔는데 그분이 제안을 하나
하셨어요. 이 민박을 줄테니 사람을 모아 그 중 괜찮은 사람을 소개시켜달라구요..그래서 저와 여랑은
하던 일도 그만두고 여기로 내려오게 됬어요. 랑이가 저 때문에 생활을 포기한 거에요"
"어떤 사람을 소개시켜달라고 하던가요?"
"홈페이지를 하나 만들어주면서 저희와 같은 남자커플을 모아달라고 했어요. 그 중 머리가 좋은 커플을
민박으로 초대해 게임을 시키라고 했죠."
"그래서요?"
"초대된 커플 중에 외모가 뛰어나고 머리 좋고 사교성이 뛰어난 커플을 골라달라고 했어요. 대신 세가지
조건 중 하나라도 만족하지 못하면 안된다고 했구요. 만약 게임을 열었는데 마땅한 커플이 없으면
뽑지 말라고 했어요. 괜찮은 커플이 있으면 벌칙장소로 배달되는 편지에 표시를 해서 보내라구요.."
"그 사람들을 어디에 쓸 건지 들은 적 없습니까?"
"미심쩍은 제안이라 물어본 적이 있어요. 그러나 송 회장님은 여러가지 장점을 갖춘 인재를 뽑기 위함
이라고만 했습니다. 일반인들과 달리 잘 나서지 않는 동성애자 가운데 숨어있는 인재를 뽑고 싶다면서."
"흠.. 그럼 이 약들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처음 민박에 왔을때 받은 거에요. 제가 극도의 불안으로 몸이 많이 안좋았거든요. 잠도 제대로 못자고
밥도 못먹고 하니까 도움이 될 거라면서 주더군요. 비타민이라고 말했고 여지껏 그런줄 알았어요"
"얼마나 복용하셨습니까?"
"여랑은 한번도 먹은 적이 없고 저만 가끔 먹었어요. 하지만 뭘 챙겨먹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기에
먹은 숫자도 손에 꼽을 정도에요. 잊고 있다가 승현이가 감기에 걸렸다기에 하나 줬구요"
"약을 복용하면 어떤 느낌이 나던가요?"
"마음이 편해지고 나른한 기분이 들면서 졸렵더라구요. 나른한 느낌 때문에 좋아하지 않았어요"
"중추신경억제제 (진정제) 인가보군.."
"대양씨. 실종이라니 무슨 소리에요? 제가 소개시켜준 사람이 실종됬나요?"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하루씨와 여랑씨는 송 회장에게 속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소개시켜줄 커플이
결정되고 편지로 표시를 해서 보낸 다음 어떻게 했습니까? 결정된 커플이 문제를 잘 풀어서 벌칙을
한번도 안받을 수도 있는 일 아닙니까? 따로 송 회장님을 만나신 겁니까?"
"아니요. 저희도 이곳으로 내려와서 한번도 회장님을 만난 적이 없어요. 편지로 표시해놓으면 그쪽에서
연락이 옵니다. 그럼 결정한 사람의 이름과 인상착의를 알려줘요. 저희가 하는 일은 그게 끝이에요"
대양의 질문이 끝나자 아스카가 나서서 하루에게 질문을 시작했다. 졸지에 민박집 마당이 취조실로
변해버렸다. 하루는 아스카의 질문에도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하루씨는 온천 뒷쪽에 숨겨진 공간이 있음을 정말 몰랐습니까?"
"네. 정말 몰랐습니다. 저희도 보고 깜짝 놀랐어요"
"그럼 이번 게임이 시작되고 송 회장측에서 연락을 받은 적이 있습니까?"
"네 있습니다. 전화가 왔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아스카씨와 나진씨는 건드리지 말라고 하더군요"
"그 말 뿐이었습니까?"
"지용씨와 승현씨가 와있는 것도 알고 있었어요. 이번 커플은 두 사람으로 결정해달라고 했습니다"
"말을 들어보니 편지에 무슨 표시를 했다고 하던데 지용씨에게 준 편지에도 표시를 했습니까?"
"명령은 따라야하니까요. 표시를 해서 지용씨가 산에 올라갈때 건내주었어요"
"송 회장님이 부탁한 것이 분명 사실이지요?"
"네.."
솔직히 아스카와 지용은 그들 사이에 무슨일이 일어난 건지. 송 회장이 사람을 소개받아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 전혀 짐작할 수가 없었다. 단지 그의 질문은 사주한 사람이 송 회장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스카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다물자 지용이 질문했다.
"하루씨. 5년동안 민박을 지켜왔다고 했죠? 정정당당히 문제를 풀어서 지켜온 겁니까?"
"물론 문제는 직접 풀었어요"
"아무리 운이 좋아도 일년에 네번이나 열리는 게임을 5년이나 우승한다는 게 쉽지 않을텐데 말입니다"
"사실 저희방에 컴퓨터가 있어요. 그러니 머리로 푸는 사람들보다는 훨씬 많은 문제를 풀 수 있겠죠.
이것도 송 회장님이 알려주신 방법이에요. 민박을 상품으로 내걸어서 사람들을 꾸준히 모아라. 그 다음
눈치채지 못하게 적당히 한 두문제 틀려가며 1등자리를 지켜라."
"하긴.. 1등을 빼앗기면 그를 도울 수 없었겠군요"
지용 역시 아스카와 마찬가지로 여러가지 가능성에 대해 생각만 할 뿐 정확한 내막은 알 수 없었다.
그저 송 회장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다는 사실만 확실히 알아낸 셈이다. 하지만 두 사람에게 이것보다
좋은 수확은 없다. 심증만 있고 물증이 없는 상태에서 실종사건하고 연관되어 경찰까지 끼어들었으니
가만 두어도 그의 비리가 밝혀질 것이 아닌가. 지용은 이런저런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며 아스카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그의 어깨에 얼굴을 밀착하고 조용히 속삭였다.
"제가 아직 송 이사님과 통화를 못했습니다만.."
"아.. 정신이 없어 제가 깜박 했습니다. 지금 바로 연결시켜 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그냥 한번 해본 말입니다. 처음에는 당신을 신뢰할 수 없었지만 송 회장의 개입이 확실히
드러났으니 이제 아무래도 상관 없습니다."
"저를 믿으시나요?"
"그렇다고 치죠. 경진씨"
지용은 그의 본명을 간지럽게 부른 뒤 팔꿈치로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러자 살짝 몸을 기울이던
아스카가 고개를 숙이고 웃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대양과 영원은 바닥에 널부러져있는 약을 모두
쇼핑백에 담고 여랑과 하루를 데리고 나갔다. 자세한 조사를 위해서 서까지 연행할 생각이었다.
"영원아. 너 멋지다~ 총 들고 있으니까 영화 주인공 같더라"
"내가? 아부가 지나쳐."
"근데 저번에 적어준 휴대폰 번호. 연결 안되던데 어떻게 된거야?"
"잘 적어줬는데 왜?"
"아냐. 전화해도 없는 번호라고 나와. 지금 가지고 있는데 볼래?"
영원과 대화를 나누던 승현은 주머니를 뒤적거려 그가 적어준 종이를 꺼내들었다. 며칠밖에 안지났는데
있는대로 구겨져 너덜너덜 수건가 된 상태였다.
영원은 의아한 표정으로 종이를 건내받아 내용을 살폈다. 그러더니 혼자 피식피식 웃기 시작했다.
"왜 웃어?"
"잘못적어줬다. 내려오기 전에 휴대폰 바꿨는데 실수로 전에 쓰던 번호를 적어줬네"
"뭐?"
"미안~"
"그것도 모르고 난 네가 귀신인 줄 알았잖아!"
"멀쩡히 잘 살아있는 사람을 귀신이라니?"
"미쳐.."
영원은 미안한지 머리를 긁적이며 차에 올라탔다. 그들이 먼저 출발하자 주인도 없는 민박으로 돌아온
네사람은 그제서야 해일과 호수가 없음을 알아첐다. 생각해보니 대양이 하루를 심문 할 때부터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승현은 이상한 생각에 혹시 방으로 들어갔나 싶어 그들이 머물던 방 문을
열었지만 그곳은 처음부터 사람이 드나든 적이 없는 것처럼 텅 비어있었고 이불도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승현이 해일의 방에서 나올 생각을 않자 지용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왜 그래?"
"해일 형하고 호수 형이 안보여요.."
"그러고 보니 정말 안보이네? 어디 간거지?"
"형. 전에 해일 형이랑 이방에서 잔 적 있죠? 비오는날 말이에요"
"그랬지"
"그때 방안에 짐 있었어요?"
"옷과 가방.."
"텅 비어있어요. 사람이 드나든 흔적이 전혀 없어요"
"................."
지용은 비오는 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분명 해일을 따라 방으로 들어왔을때는 이곳저곳에 널려있는
옷가지들이 있었다. 그리고 더 생각해보니 그날 이후에 일어난 사건들 때문에 이불을 가지런히
정리할 틈이 없었다. 갑자기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니들 왜 그래?"
"나진 형. 해일씨와 호수씨 언제 마지막으로 봤어?"
"두 사람? 아까 하루씨 심문 받기 전에 봤는데?"
"어디 있었는데?"
"마루에 앉아서 웃고 있더라구.. 생각해보니 좀 섬뜩하네.."
"왜?"
"굉장히 기분 좋아보였어. 심각한 상황인데도 두 사람 다 밝게 웃고 있더라구"
"................."
나진의 말을 듣자마자 지용과 승현은 정신없이 이방 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대문 근처는 영원이
지키고 서있었으므로 밖으로 나간 건 분명 아니었다. 그렇다고 온천쪽으로 갔을 리도 없다. 온천으로
가는 입구쪽에 승현과 나진이 서있었기 때문이다.
해일과 호수의 흔적조차 찾지 못한 네 사람은 이상한 기분에 서둘러 짐을 챙겨가지고 민박을 나왔다.
"경진씨와 나진 형은 당분간 우리 집에 있어"
"아스카 이름이 경진이었어?"
"그건 나중에 직접 물어보고.. 아무튼 우리 집으로 갑시다."
"저도 집으로 돌아가긴 좀 곤란하다고 생각했는데 잘 됬네요. 그럼 당분간 신세 좀 지겠습니다."
"이사를 해서 아파트가 조금 좁긴 하지만 지낼만 할 겁니다"
"고맙습니다. 지용씨"
송 회장이 눈치를 채고 미리 불러들일까 염려했던 아스카는 지용의 제안에 흔쾌히 동의했다.
가지고 온 차는 송 회장이 보낸 차라 발각의 위험이 있어 네 사람은 기차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기차 안에서 계란을 까먹던 나진과 승현은 해일과 호수가 귀신이었느니 아니었느니에 대해 이야기
하기 바빴다. 승현은 나이가 어려 그렇다 치지만 나진도 나이에 비해 해맑은 구석이 있었다.
그들이 계란을 까줄 것을 기대하며 음료수를 마시던 지용이 목소리를 낮추고 아스카에게 질문했다.
"아직입니까?"
"네?"
"아직도 나진 형의 마음을 확인 못하신 겁니까?"
"................."
"잘 부탁합니다. 송 회장이 회장자리에서 물러더라도 나진 형을 잘 돌봐주십시오"
"하하.. "
의미있는 말을 들은 아스카는 멋쩍은듯 주먹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아스카가 지용의 집에 머물기로 한 이유는 본격적으로 송 이사와 일을 진행하기 위함이다.
송 회장이 자리에서 물러나고 최악의 경우 구속까지 된다 하더라도 나진은 그의 손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싶었다.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진은 승현과 떠드는데 여념이 없었다.
서울로 올라온 네 사람은 일주일 가까히 비워둔 집을 정리하고 방을 정했다.
방은 세개. 지용이야 당연히 승현과 같은 방을 쓸테고, 문제는 아스카와 나진인데 같은 방을 쓰라고 해도
나진이 통 말을 안듣고 고집을 피웠다. 그의 고집은 승현을 능가했다.
"형. 왜 말을 안들어? 경진씨와 같은 방 쓰라니까?"
"남는 방 두개잖아! 다 큰 남자끼리 왜 같은 방을 쓰냐구!"
"그냥 써. 아니면 내쫓는다?"
"내쫓으면 갈때 없을까봐?"
"응. 없을 것 같아"
"아무튼 난 이방 쓸거야!"
나진은 마음에 드는 방을 고르더니 획 돌아서서 문을 쾅 닫고 들어가버렸다.
그러자 아스카가 큰 소리로 웃으며 쇼파에 걸터앉았다. 지용은 그가 왜 웃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웃을 상황이 아니라구요"
"갑자기 웃음이 나오네요. 역시 나진씨답다는 생각이 들어요."
"빨리 따라 들어가세요. 좋은 기회를 마다할 셈인가요?"
"심심하면 알아서 찾아올 겁니다. 그러니 두 사람도 걱정말고 들어가 주무세요"
"아무튼 고집이 그냥.."
"하하.."
"그럼 저희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경진씨가 알아서 잘 해결보세요"
"네. 좋은 꿈 꾸세요"
지용은 걱정말라며 손짓하는 아스카에게 눈을 찡긋 감아보이고는 승현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는 달랑 옷장과 침대가 전부였다. 심플한 구조에 놀란 승현은 멍하니 서서 방을 둘러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구경 할 것도 없는데 한참이나 두리번거리며 실실 웃자 보다 못한 지용이 옷을 갈아입다말고
승현을 번쩍안아 침대 위로 눕혔다. 그래도 승현은 아랑곳하지않고 눈을 굴렸다.
"그만 두리번거려. 4차원 세계에 왔냐?"
"이렇게 간단한 방은 처음봐요. 아무리 귀찮아도 가구는 몇개 들여놓지 그랬어요?"
"이 집으로 이사올때 내가 제정신이었는줄 알아? 너 사라졌지.. 일 안풀리지.. 그럴만한 여유가 없었다"
"이제 나 여기서 살게되는 거에요?"
"마음에 안들면 이사갈테니 그만 두리번거려"
"아뇨. 어떤 가구가 어울릴까 생각중이었어요."
"그건 천천히 생각하고 우선 잠부터 자자. 며칠 못잤더니 피곤해 죽겠다."
"아스카 형이 나진 형 좋아해요?"
"넌 질문과 질문 사이에 틈이 아주 얇더라? 전환이 너무 빨라"
"대답해줘요"
"경진씨가 마음이 있지. 나진 형이 몰라줘서 문제지만"
"그랬구나."
"앞으로 경진 형 이라고 불러. 본명이 있는데 아스카라고 부를 필요 없잖아"
"알았어요. 근데 형.. 해일씨와 호수씨는 정말 귀신이었을까요?"
"하루씨와 호수씨가 아는 사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한번 물어볼걸 그랬나? 그리고 귀신이 어디 있어?
호수씨도 호기심이 많으니까 온천 뒤에 있는 집 구경하러 들어갔겠지."
"그냥 두고온 것 같아 마음에 걸리네요"
"마음에 걸리더라도 내일 걸려하고 우선 자자. 피곤하다"
"좋은 꿈 꿔요~"
승현이 그의 품안으로 파고들며 인사하자 지용은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몇번 쓸어내리는가 싶더니
바로 잠이 들어버렸다. 승현은 그제서야 돌아왔다는 것을 실감하며 그의 뺨에 살며시 입을 맞춘 뒤
잠을 청했다. 썰렁한 방이지만 이불만큼은 굉장히 푹신한 느낌이 들었다.
"아스카.. 자?"
방으로 돌아온 아스카가 침대위에 누워서 멍하니 벽을 바라보고 있을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예상이 맞아떨어지자 혼자 피식 웃더니 잠시 아무 말 없이 상황을 살폈다. 자신이 대답을 안하면
나진이 문을 열고 들어올 것을 알기 때문이다. 노크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오자 장난기가 발동한
아스카는 자리에 누워 눈을 감고 자는척을 했다. 그러자 잠시 후 문 열리는 소리가 나며 나진의
숨 죽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스카~"
그는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고 계속해서 자는 연기를 했다. 그러자 나진은 그의 곁으로 다가가
얼굴 위로 손을 여러번 흔들더니 침대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누웠다. 2년동안을 방에서 아무것도 안하고
지내던 나진도 그새 사람들과 어울렸다고 심심해하고 있었다. 아스카는 부스럭거리던 소리가 잠잠해
지자 새눈을 뜨고 상황을 살폈다. 나진은 등을 보인채 배게를 끌어앉고 잔뜩 웅크려있었다.
"나진씨."
"와앗! 깜짝이야!"
아스카가 손을 뻗어 어깨를 감싸안자 화들짝 놀란 나진이 몸을 들썩이며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힘을 주며 어깨를 흔들었다. 그걸 아스카가 가만히 놔둘 리 없다.
"어짜피 놀러올거면서 왜 다른방을 쓰겠다고 했습니까?"
"손부터 놔줘봐"
"대답먼저 하십시오. 그럼 놔드리겠습니다"
"그야.."
"제가 민박에서 한 행동 때문에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걱정마십시오. 다시는 그런 행동 하지
않겠습니다. 놀라게 하거나 거칠게 밀어붙이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게 아냐!"
"그럼요?"
"아스카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잖아.. 그러니 나와 같은 방을 쓰면 안되지."
"네?"
"좋아하는 사람을 두고 다른 사람과 한 침대에서 자는게 얼마나 나쁜짓인줄 알아?"
"우린 형제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형제끼리는 같은 방에서 자도 이상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
"그러니 고집 피우지 말고 그냥 여기서 주무십시오"
"너만 형제라고 생각하면 뭐해! 난 그렇게 생각 안하는데.."
"하지만 분명 나진씨가 형제처럼 생각해달라고.."
"그거야..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으니까 그렇게 말한거지.. 난 형제라고 생각한 적 없어.."
"그럼요?"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엇갈리는 질문과 대답속에서 서로 무언가를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쉽게 말을 꺼낼 수는 없다. 오래 알아온 사이일수록 진심을 말하기는 어렵다.
아스카의 질문에 한참을 머뭇거리던 나진이 몸을 빙그르 돌려 그를 바라보며 굳게 닫혔던 입술을
열었다. 긴 머리는 여전히 기분좋은 향을 풍긴다.
"애인이 생기면 소개시켜달라는 거 거짓말이야..내가 애인을 찾아서 네게 소개시켜준다 했던 것도
거짓말이야.. 네 곁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상상을 하면 자꾸 화가 나.."
"하하.."
"왜 웃어? 난 진지한데.."
"저도 진지합니다. 그러니 계속 말을 해보세요"
"처음에는 지용이 대신 네게 의지한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지용이를 깨끗히 포기하고 난 뒤에도 자꾸
네게 의지하고 싶어져.. 네가 자꾸 따뜻하게 대해주니까 착각을 하게 되잖아."
"그 착각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면 안됩니까?"
"뭐?"
"기분 좋은 착각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너 아직 이해 못했어? 난 널 형제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구 멍청아!"
"머리 좋은 제가 그 말을 못알아 들을 리 없잖습니까.."
"응?"
아스카는 민망함에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숙인 나진을 살며시 품에 안았다. 나진은 그동안
표현력을 잃었는지 횡설수설하며 자신의 입장을 헷갈려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리하고 보면 결론은
좋아하게 되었다는 말. 그 말 한마디가 어려워 이리돌리고 저리돌리고 정신없이 행동했던 것이다.
아스카는 가슴으로 그의 체온이 느껴지자 눈을 감고 긴 머리를 쓸어내렸다.
그제서야 가슴 깊히 쌓아두었던 감정들이 하나씩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머리 많이 자랐습니다."
"그 말은 전에도 했잖아. 내일 가서 당장 잘라야지"
"자르지 마십시오. 잘 어울립니다"
"그럼 뭐.."
"좋아합니다."
"응?"
"어렸을때부터 계속 나진씨를 좋아했습니다. 저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계셔서 정말 기쁩니다"
"아스카.."
"제가 그동안 왜 애인이 없었는 줄 아십니까?"
"....................."
"나진씨를 대신해서 제 마음을 채워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
"나진씨만큼 제 가슴을 뛰게 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나진씨를 바라볼때처럼 설레임을 느끼게 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변함없습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아스카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제가 다른 사람이라고 말한적 있습니까?"
"다른 사람 이야기 하듯 말했잖아..."
"물론 그랬지만 나진씨가 아니라고 말한 적도 없습니다"
"....................."
아스카의 고백을 들은 나진은 요동치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하고 이불 속으로 고개를 푹 쳐박았다.
2년만에 지용을 만났을 때보다 상태가 더 심했다. 이대로 계속 있다가는 얼굴도 못들 판이었다.
아스카는 손을 들어 이불을 아래로 내린 뒤 다시 그를 힘껏 끌어안았다. 끌어안은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뭐가.."
"살아줘서.."
"그런 걸 가지구.."
"키스해도 되겠습니까?"
"..................."
"거절하면 억지로 하지는 않습니다"
"전처럼.. 거칠게 하지 않을 거지?"
"물론입니다"
서로의 마음을 뒤늦게 깨닿고 사랑을 시작한 두 사람. 부드럽게 엉겨오는 체온을 느끼며 얼굴을
마주하고 한참을 웃던 그들은 간만에 기분좋은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이것으로 합의하에 같은 방을 쓰기로 결정. 아침에 지용과 승현에게 말하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목..말라.."
한참 잘 자다 목이 말라 잠에서 깨어난 승현이 거실로 나와 손을 더듬으며 냉장고를 찾을때였다.
난데없는 초인종 소리가 조용한 거실로 시끄럽게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승현은 잠결에 들은 소리라고
생각하며 물컵에 물을 따르고 한모금 들이키며 쇼파 깊숙히 몸을 뉘였다. 하지만 잠시의 틈을 두고
또 다시 울려퍼지는 초인종 소리는 분명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거실에 걸린 시계를 보니 자정이 조금 넘은 시각. 피곤에 지친 그들이 초저녁부터 잠이 들었기에
한참 잤다고 생각했는데도 시간은 얼마 지나있지 않았다. 승현은 눈을 비비며 현관으로 다가가
한쪽 눈을 찡그리고 도어 뷰를 들여다보았다. 자신의 집이라면 이 시간대에 누가 방문하는지 대충
알 수 있지만 지용의 집이여서 그런지 통 파악이 안됬다. 잠이 덜 깨 흐릿한 눈으로 한참을 들여다보니
방문한 사람이 아주 낯익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승현은 반가운 마음에 앞 뒤 생각 없이 문을 벌컥
열었다.
"아.. 추워"
"해일 형! 호수 형!"
"너희 너무한다. 우리 잠깐 자리비운 사이에 니들끼리 서울 올라오면 어쩌니?"
"미안해요. 저희는 형들이 먼저 떠난 줄 알았어요. 어서 들어오세요"
승현은 재빨리 어두운 거실의 불을 켜고 해일과 호수를 안으로 들였다. 밖에 날씨가 많이 추운지
두 사람은 얼굴이 파랗게 질려 떨리고 있었다. 승현은 그들을 쇼파에 앉히고 대접할 차가 없나 주방을
기웃거렸다. 한참을 찬장과 씨름한 끝에 녹차티백을 찾은 그는 주전자에 물을 올리고 쇼파로 다가가
앉았다. 바람이 많이 부는지 베란다 창이 덜컹거렸다.
"지용씨는 자니?"
"형은 피곤한지 예전에 골아 떨어졌어요"
"그렇구나~"
"그나저나 어떻게 찾아오셨어요? 주소 알고 있었어요?"
"지용씨와 대화하던 도중 집 이야기가 나왔어. 같은 아파트에 산다길래 물어봤었지"
"아~ 그랬구나"
승현은 자신도 몰랐던 주소를 그들이 알고 있다는 게 신기해 멋쩍게 웃어보였다. 그 사이 물이 다 끓어
주전자에서 피리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승현은 소리나는 주전자에 화들짝 놀라 사람들이 깰까봐
잽싸게 달려가 가스불을 껐다. 자신은 빨랐다고 생각했는데 소리가 너무 컸는지 방문이 딸깍 열리며
나진이 눈을 비비며 걸어나왔다.
"몇신데 이렇게 시끄러워.."
"미안해요. 깼어요?"
나진은 손으로 머리를 툭툭 때려가며 거실로 나오다 해일과 호수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기겁하며
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도 그럴 것이 낮에 두 사람이 귀신이라며 무서워했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자 승현이 녹차가 담긴 컵을 들고와 그들에게 건내며 나진의 어깨를 꽉 끌어안았다.
"깜짝이야!"
"뭘 그렇게 놀라요? 어서 앉아요"
"호수씨. 어떻게 된 거에요?"
"우리가 해일 형이랑 호수 형 버리고 먼저 올라왔데요."
"그랬구나. 그나저나 이 집 주소 알고 있었어요?"
"지용 형이 알려줬데요. 호수형네 집도 이 아파트인가봐요"
"아항"
그제서야 나진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쇼파에 몸을 기댔다. 해일은 손이 시려웠는지 컵을 양손으로
감싸쥔채 솔솔 풍겨나오는 녹차 향을 맡고 있었고 호수는 모락모락 나는 김을 후후 불어가며 뜨거운
차를 홀짝홀작 들이마셨다.
"나진씨도 여기 와있는 줄은 몰랐어요"
"사정이 생겨서 잠시 신세를 지고 있는 중이에요. 그나저나 밖이 많이 추운가봐요? 두 분 입술이
파랗게 질렸어요."
"얼마나 추운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요. 아직 겨울도 아닌데 이렇게 추우면 어쩐데요"
완전히 잠에서 깬 나진과 승현은 두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며 신나게 웃고 있었다. 호수의 말버릇은
민박에 있을때부터 알아봤지만 밖에서도 여전히 사람을 즐겁게 했다. 그는 화술과 사교성을 타고
났다. 하지만 왠일인지 해일은 그의 말을 듣고도 조용히 웃기만 할 뿐 통 말을 하지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서로 티격태격하며 한바탕 말다툼이 벌어졌을텐데.
"호수씨. 궁금한 게 있는데요.. 하루씨와 아는 사이라고 들었는데 어떻게 아는 사인가요?"
"아.. 학창시절부터 사이가 안좋았던 라이벌이었어요. 하루씨가 남자치고 얼굴이 예쁘게 생겼잖아요?
그래서 남자든 여자든 정신 못차리고 그랬어요. 좀 질투했었죠."
"제가 보기엔 호수씨도 잘생겼는데요?"
"나진씨가 뭘 먹고 싶길래 이렇게 아부를 하실까.. 좋아요. 언제 내가 크게 한턱 쏜다!"
"기대할께요~"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됬네? 이만 가봐야겠어요."
"호수 형. 지금 시간에 가겠다구요?"
"우리집도 근처라니까? 옆동이야"
"그래도 겨우 몸 녹였는데 다시 가기 좀 그렇잖아요.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가요"
"어떻게 그러니?"
"나진 형은 경진 형 방에서 나온 걸로 봐서 방을 같이 쓰기로 결정한 것 같고.. 방이 하나 남네요
그쵸 나진 형?"
"혼자 있으면 심심하니까.."
"어짜피 그럴 거면서 고집은.. 아무튼 방이 하나 비니 자고 가세요.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이시간에
돌려보낼 수는 없어요. 아셨죠?"
"그래도.."
호수가 약간 망설이자 승현은 그의 손을 잡아끌어 억지로 일으켜세웠다. 그리고 한참을 달라붙어
두 사람을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승현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한 호수와 해일은 손을 흔들며
방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들어가고 나니 거실이 갑자기 횡 해지는 느낌이었다.
"형도 다시 들어가서 자요. 깨워서 미안했어요"
"아냐. 재미있었어. 근데 승현아.. 두 사람 조금 이상하지 않니?"
"뭐가요?"
"이 밤중에 찾아온 것도 그렇고..해일씨가 통 말이 없는 것도 그렇고.."
"제가 보기엔 아스카 형 방에서 나온 나진 형이 더 이상해요"
"뭐라구?"
"헤헤~ 저 먼저 들어갈게요. 내일 아침에 봐요"
승현이 혀를 쏙 내밀고 방으로 들어가자 나진도 거실의 불을 끄고 방으로 돌아갔다.
침대에 눕고 이불을 끌어당기자 아스카가 잠결에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고개를 파묻었다.
나진은 따뜻한 체온에 몸을 맡긴 채 곰곰히 생각했다. 아무래도 호수와 해일의 방문이 미심쩍었다.
잠시 생각에 빠졌던 나진은 다시 밀려드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잠이 들고 말았다.
모두가 잠든 새벽. 사람의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온 집안에 울려퍼졌다.
"형! 일어나요"
날이 밝자 승현은 이방저방을 들쑤시며 단잠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깨우고 돌아다녔다. 덕분에
그들은 눈을 반쯤 감은 채 부스스한 머리로 하품을 해대며 쇼파로 모여 앉았다.
아직 피로가 완전히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승현의 행동은 피하고 싶을 만큼 방해가 되었다.
"무슨일이야. 왜 깨우고 그래.."
"형들은 배 안고파요? 배고파 죽겠어요. 밥 먹으러 가요"
"난 밥보다는 잠을 자고 싶은데.."
"나 역시.."
"잠은 또 잘 수 있잖아요! 빨리 옷 입고 나와요."
"쟨 젊어서 얼마 안자고도 기운이 펄펄나나봐. 난 졸려 죽겠는데.."
"나진 형도 외모만 보면 저와 비슷해 보이거든요?"
"칭찬은 고마운데.. 내가 여기서 제일 연장자야. 너 혼나볼래?"
"오늘은 추울테니 옷 두껍게 입으세요~"
승현의 협박을 받은 세 사람은 대충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예로부터 고집 센 사람과 목소리
큰 사람은 이길 수 없다더니 딱 그짝이다. 나진은 점퍼를 들고 거실로 나오더니 열리지 않은 방 문
앞으로 다가가 기웃거렸다. 밥을 먹으러 가는데 해일과 호수를 빼고 갈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승현아. 해일씨랑 호수씨도 깨워야지"
"아침에 일어났는데 벌써 갔는지 없더라구요. 행동도 빨라"
"불편했나?"
나진은 기어코 문을 열어 빈 방임을 확인한 뒤에야 현관으로 걸어가 신발을 신었다. 사실 그도 따뜻한
국물과 반찬이 있는 식사를 하고 싶었다. 추운날에는 얼큰하고 뜨거운 탕이 제격이다.
불만을 털어놨음에도 제일 먼저 준비를 마친 나진은 차가운 현관 문을 손으로 잡고 아래로 힘껏 내렸다.
하지만 잠금장치가 되어 있는 문이 열릴 리가 없다. 그는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잠금장치를 풀고
다시 문을 열었지만, 그와 동시에 잊고 있었던 생각이 떠오르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생각이 꼬리를 물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뭐야.."
"왜요?"
"너 해일씨랑 호수씨 가는 거 봤어?"
"아뇨. 저 일어나기 전에 갔나봐요"
"그럼 현관문이 열려 있어야지.. 왜 잠금장치가 그대로 있어?"
".................."
"두 사람 도대체 뭐야.."
나진과 승현이 동시에 몸을 떨며 인상을 썼다. 그의 말대로 두 사람이 아침 일찍 돌아갔다면 현관이
잠기지 않고 열려있어야 했다. 하지만 현관문은 굳게 잠겨있었고 방범사슬까지 걸려있었다.
무서운 이야기에 질색하는 승현은 짜증을 내며 쇼파위로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자 뒤늦게 옷을 입고 나온 지용이 의아한 눈빛으로 그에게 말을 걸었다.
"왜 그래?"
"어젯밤에 해일 형하고 호수 형이 왔었거든요?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없어요."
"해일씨하고 호수씨가?"
"우리가 산장에서 먼저 떠나는 바람에 뒤늦게 올라왔데요."
"그건 그렇다 치고 여길 어떻게 알고 찾아와?"
"형이 주소 알려줬다면서요?"
"아니. 알려준 적 없어"
"뭐야 정말!"
"또 잠결에 헛것 본 거 아냐?"
"아니에요! 나진 형도 같이 봤단 말이에요! 그쵸?"
"맞아. 나도 같이 있었어.."
"두 사람 왜 그래?"
"이것봐. 여기 차를 마신 흔적도.."
재중은 그들에게 차를 대접한 기억을 떠올리고 재빨리 탁자를 바라보았다. 치우지 않았으니 손님을
맞았다는 확실한 증거가 될 것. 하지만 얌전히 놓여있는 두잔의 컵 안에는 우러나다 못해 뿌옇게 흐려진
녹차가 가득 담겨 있었다. 이젠 소름이 돋다 못해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기분마저 들었다.
"나진 형.. 어제 두 사람이 차를 마셨던가요?"
"해일씨는 안마셨지만 호수씨는 많이 마셨어. 분명 봤단 말야.."
"미쳐.. 정말 귀신인가봐.."
그들을 귀신이라고 단정지은 승현과 나진은 괴성을 지르며 복도로 뛰어나갔다.
지용과 아스카는 그런 두 사람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는지 서로를 바라보며 눈썹을 씰룩거렸다.
네 사람은 찜찜한 기분으로 식사를 마치고 서로 할일을 찾아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용은 아스카를 따라 비밀리에 송 이사를 만났고 나진은 승현을 따라 오랫동안 비워두었던 꽃가게로
향했다. 모두가 미행의 가능성을 충분히 짐작하고 눈에 띄지 않게 조심히 움직였다.
지용은 송 이사를 만나 일이 성공하면 앞날을 보장해 주겠다는 약속을 얻어냈고 나진은 승현에게
여러가지 꽃 포장법을 배워서 그곳에 심취 중이었다. 그렇게 서로가 만족스러운 일을 하며 동거하게
된지 나흘째 되는 날 오전이었다.
"여보세요..."
"해가 중천에 떴는데 아직 주무세요?"
"누구..세요.."
"지용씨. 저 오 대양 입니다"
누적된 피로를 푸느라 늦잠의 자고 있던 지용를 깨운 건 밝은 목소리로 시작된 한통의 전화였다.
눈도 못뜬 상태로 전화를 받은 지용은 회로가 풀려버린 머리로 한참을 고민한 끝에 대양의 얼굴을
떠올리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나름대로 인사를 한다고는 했지만 잠겨있는 목소리는 그가 막 잠에서
깨어났음을 여과없이 알려주고 있었다.
"많이 피곤했나보군요? 깨워서 미안해요"
"아닙니다. 이제 일어나야죠. 그런데 어쩐 일이에요? 아침 일찍 전화를 다 하고"
"해일씨와 호수씨에 대해 알아냈습니다. 혹시 우리가 민박에서 떠난 뒤에 그들을 봤나요?"
"아뇨. 감쪽같이 사라져서 한참을 찾다 포기하고 올라왔습니다"
"놀라지 말고 잘 들어요. 하루씨의 이야기를 들은 결과 호수씨와 해일씨에 대한 엄청난 사실을
알아냈어요"
"네?"
"지용씨 벌칙받으러 산에 올랐다가 사람의 유골을 발견한 적 있죠?"
"그걸 어떻게 아시죠?"
"그때 저와 영원이가 근처에서 잠복중이었거든요. 몰래 지켜봤었습니다"
"그랬군요. 본 적 있어요. 두 사람이 끌어안고 있는 형상의 오래된 유골이었는데."
"제가 민박을 조사하게 된 이유가 실종자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죠? 유골 분석 결과 그 유골이 우리가
찾던 홍 태곤과 김 주석이라는 실종자의 것 임을 알아냈습니다."
"그 이름 본 적 있습니다. 나무에 걸려있던 편지에서"
"하지만 더 놀라운 건 하루씨가 주장하는 호수씨가 사실은 호수씨가 아니라 주석씨라는 겁니다.
두 사람이 성형수술을 한 뒤 찾아왔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주석씨라는 분은 유골임이 밝혀졌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이상하다는 겁니다. 하루씨는 분명 호수씨가 주석씨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신이 그 커플을
뽑았기 때문에 복수 하려고 얼굴과 이름을 바꾸고 나타났다구요."
"만약 하루씨의 말이 사실이라면 해일씨와 호수씨가 귀신이란 말입니까?"
"그렇게 되겠네요"
"......................."
"그리고 송아그룹의 송 회장에 대해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했습니다. 하루씨가 가지고 있는 약을
토대로 그가 마약 밀반입을 하는 사람과 연관이 되어있는지에 대해 조사중입니다. 또한 실종자와의 관
계에 대해서도 알아보고 있는 중입니다. 조만간 결과를 알 수 있을 겁니다."
"대양씨가 고생이 많으십니다"
"별말씀을요. 우선은 현장에서 아무말도 못들으셨으니 궁금해하실까봐 전화드렸습니다. 그럼 조금 더
주무세요. 목소리가 많이 피곤해보이네요"
"고맙습니다. 대양씨도 건강 조심하십시오"
지용은 대양의 말을 듣고 머릿속으로 내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산장에서 같이
지냈던 해일과 호수가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실종된 이후 무슨 이유에서인지 목숨을
잃었고 귀신이 되어 자신들의 앞에 나타났다는 것. 그동안 일어났던 이상한 일들을 한꺼번에 떠올린
지용은 사람들을 깨워 대양의 말을 전해주었다.
"거봐요.. 내가 귀신이라고 했잖아요.."
"귀신이라.."
"그럼 그 민박이 위험하니까 우리에게 알리기 위해서 나타났다는 건가?"
"미스테리 극장도 아니고.. 정말"
그들은 정말 민박에 위험을 알리기 위해서 사람의 형상으로 그들 앞에 나타난 것일까?
평생 잊을 수 없는 기억을 갖게 된 사람들은 해일과 호수를 가엽게 여기는 한편 귀신에 대한 무서움을
새삼 깨닿게 되었다. 특히 큰 충격을 받은 승현은 한참동안 그들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 이후로도 호수는 몇번이나 승현을 찾아왔다. 희안한 점은 지용이나 아스카에게는 보이지 않고 승현
이나 나진에게만 보인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본 날에는 고맙다며 인사까지 했다고 한다.
송 회장의 대한 조사가 속속 진행되면서 참고인으로 서에 불려간 지용과 아스카는 온천 뒷쪽에 숨겨진
집이 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증거물로 주사기와 만년필을 제출했다.
대양은 그 말을 듣고 급히 사람들과 같이 민박이 있는 시골로 내려가 조사를 시작했고 그 결과 그 집은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고문실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한참동안을 비밀속에 묻혀있다가 민박을 사들인 송 회장이 그 집을 발견하고는 개조해서 개인적인
목적으로 사용해 왔던 것이다.
"조사해본 결과 지하와 1층, 2층으로 되어있었고 각 층마다 외부로 연결되는 통로가 있었습니다"
"통로가 있을 거라고 예상은 했습니다"
"2층에 있는 통로가 벌칙장소였던 뒷 산 묘지로 연결이 되더군요. 1층은 마을을 경유하지 않고도 바로
진입할 수 있도록 기차역 근처 야산과 연결이 되어 있었습니다. 지하는 외부와 연결되어있지는
않았지만 숨겨진 공간에는 시체를 화장할 수 있는 화장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연기는 1층과
연결되어 있는 야산쪽으로 배출되게 만들어져 있더군요. 고문실이었다더니 정말 규모가 엄청났습니다.
산의 절반정도를 통째로 파서 만든 것 같더라구요."
"송 회장의 조사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소환되었다고 들었습니다만.."
지용의 관심사는 숨겨진 집이 아니라 송 회장의 대한 조사결과였다. 아스카와 송 이사의 처음 계획은
그의 비리를 밝혀내 경찰에 무명으로 고발을 하는 것이었는데 의외로 쉽게 덜미가 잡힌 송 회장 덕분에
손대지 않고 일을 손쉽게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하여 그들은 느긋한 마음으로 조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고 지용을 안타깝게 여긴 송 이사는 자신이 회장이 된 이후 그를 돌봐주겠다고 약속까지 한
상태다. 지용은 운이 좋아 민박으로 흘러들어가게 된 것을 행운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사실 힘이 없어서 억누르고 있었을 뿐 송 회장을 증오하는 마음은 누구보다도 강했다.
"우선 약물복용 테스트 결과 양성반응이 나타났습니다. 심각한 약물중독 상태더군요. 공격적이고
짜증을 잘 내는데다 가끔 현실도 혼동하곤 하는데 어떻게 여지껏 회장이라는 자리에 앉아있었는지
의문입니다. 약기운으로 버텨온 모양입니다."
"흠..."
"그리고 뇌물수수 혐의도 들어났습니다. 관련자들도 이미 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이제 남은 건 실종자에
대한 것 뿐입니다. 끝까지 부인하고 있지만 조만간 밝혀질 겁니다"
"여랑씨와 하루씨는 잘 있나요?"
"여랑씨는 괜찮은데 하루씨가 걱정입니다. 서울로 올라온 내내 극도의 불안상태를 유지하고 있는데
송 회장과 대면을 한 이후 상태가 더욱 심각해져버렸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일이 마무리 되기도 전에
병원 신세를 지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쪼록 좋은 결과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고생 하십시오"
"일이 해결되면 만나서 술이나 한잔 합시다."
"좋습니다"
송 이사가 아스카와 지용을 데리고 송아에 대한 일을 착착 진행하고 있을 무렵. 드디어 실종자에 대한
전말이 드러났다. 송 회장은 사교적이고 뛰어난 외모의 남자들을 데리고 도박을 벌이고 있었다.
하루가 사람을 정해 인상착의를 말해주면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던 회장의 비서가 그들을 보기좋은
구실로 유혹한다. 직장인이라면 송아 외국지사에 취직시켜 주겠다고. 학생이면 연수나 유학을
보내주겠다고 말이다. 하루와 여랑의 소개를 받았다고 말해도 사람들은 처음보는 사람의 말을 믿지
않는다. 그럼 비서는 명함을 한장 건네고 사라진다. 마음이 생기면 직접 송아로 찾아오라는 말까지
남긴다. 그럼 명함을 받은 사람들은 반신반의하면서 진짜로 찾아오게된다. 송아그룹 본사에 방문한
그들은 약간의 절차를 거처 직접 회장실로 불려가고 그곳에서 송 회장을 만나면 그 다음부터는 그들의
제안을 100% 신뢰하게 된다. 그렇게 본인의 동의를 얻으면 가족들에게 외국으로 나가게 되었다고
알리고 그들을 숨겨져있는 비밀의 집으로 인도한다. 외부의 잠복수사에도 걸리지 않았던 이유는 정문이
아니라 역주변으로 통해있는 비밀통로를 이용했기 때문이다. 이미 오랜 마약중독으로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는 송 회장은 그들을 그 집에 감금시켜놓고 사람들을 불러모아 돈을 걸고 여러가지 내기를
했다. 2층은 외부 손님이 머물며 쉴 수 있는 호텔같은 곳이었고 강간이 이루어지는 범죄 현장이기도
했다. 그곳에 찾아드는 사람은 얼굴과 이름이 널리 알려진 유명인사도 대거 포함되어 있었지만
돈많은 졸부나 마약거래상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약을 나눠하며 1층에서 큰 돈을 건 카드놀이나
경마, 체스등의 게임을 즐겼으며 실증이 나면 2층으로 올라가 잡아 온 사람 중 건장하고 머리 좋은
청년에게 안기기도 하고 작은 체구의 귀여운 청년을 안기도 했다. 취향대로 고를 수 있는 반 강제적인
강간인 셈이다. 잡혀온 커플은 반항하고 탈출을 시도하지만 불가능 하다는 사실을 깨닿고 포기하며
굴욕적인 상태로 하루하루를 보내게 된다. 그리고 더욱 충격적인 것은 그들을 처리하는 방법이다.
매일 소량의 약물을 투여하여 편도체를 포함 양쪽 뇌의 측두엽에 약간의 손상을 일으켜 역행성 기억
상실을 유발시킨다. 그리고 새로운 커플이 뽑혔다는 연락을 받으면 그들의 상태를 점검하고 집으로
돌려보낸다. 약간의 역행성 기억상실이기 때문에 생활에는 큰 지장이 없으며 약물에 의해 조작되었기
때문에 쉽게 기억이 돌아오지도 않는다. 만약 시간이 지나 기억이 되돌아온다 하더라도 몸 상태가
정상으로 돌아온 뒤에는 증거가 사라지기 때문에 발뺌하면 그만이다.
대양은 현장에서 관련자 전원을 체포하는데 성공했으며 그들이 4번째 참가때 실종되었던 화랑과 영호도
무사히 구해낼 수 있었다.
"제 정신이 아니었군요?"
"약물 중독이 심각한 상태였습니다. 돈 많은 사람들이 상식을 초월하는 짓을 저지르는 일은 자주 봤지만
이정도로 치밀하고 계획적인 범죄는 처음 봅니다"
"그럼 송 회장은 어떻게 되나요?"
"이미 구속되었고 재판을 받은 뒤 실형을 선고받게 될 겁니다. 사회에 큰 파란을 몰고 오겠군요."
"그럼 해일씨와 호수씨는 어떻게 된 걸까요?"
"죽은 사람들이기에 정확한 내막은 알 수 없으나 잡힌 이후 산으로 통하는 탈출구를 발견하고 도망치다
죽임을 당한 것 같습니다. 마침 그곳이 묘지였던 지라 그냥 파묻고 방치했는데 빗물에 흙이 씻겨 내려가
밖으로 유골이 드러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위험을 알리고자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군요.."
"그리고 하루씨는 자신이 소개시켜줬던 사람들의 피해사실을 알고는 정신을 놓아버렸습니다. 여랑씨는
직접적으로 범죄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정상참작 되어 불구속 입건 됬지만 하루씨는 당분간
병원 신세를 져야 할 것 같습니다. 알고 보니 하루씨도 송 회장에게 엄청난 압박을 받고 있었더군요.
따지고 보면 제일 안타까운 사람이 바로 그들인 것 같습니다. 피해자라고 봐도 무방하겠죠"
"송 회장.."
"죄송하지만 지용씨에 대해서도 조사를 해봤습니다. 전 카미아 그룹 외아들이셨더군요."
"네."
"왜 이렇게 송 회장의 일에 집착하는지 궁금했을 뿐입니다. 불쾌해 마십시오"
"아닙니다. 개인적인 원한이 있었던 건 사실이니까요"
시간이 흘러 재판이 있던 날 초췌한 모습으로 재판장에 모습을 드러낸 송 회장은 끝까지 자신의 잘못을
자각하지 못했다. 이미 많은 증거가 확보된 상황에서 대부분의 증인들은 있는 사실을 털어놓고
죄를 인정하였지만, 형이 확정되어 끌려나가던 송 회장은 허공을 바라보며 겁에 질린 눈으로 난동을
부렸다. 그가 계속해서 중얼거리던 한마디는 이 것.
"권 회장.. 내가 잘못했어.. 잘못했으니까 제발 용서해줘! 으악!!!"
그의 수감은 사회에 큰 혼란을 불러왔고 재판장에서의 마지막 모습을 담은 영상들이 대충매체를 통해
정신없이 보도되었다. 기자들은 그에게 질문을 하기 위해 한데 엉켜 아우성이었다.
우연한 기회에 게임에 참가하고 그곳에서 아스카를 만나 송 회장의 최후까지 지켜보게 된 지용은
재판이 있던 날 승현과 함께 부모님의 납골당을 찾았다.
그는 승현이 정성스럽게 포장한 향 좋은 국화를 바치며 한참동안 소리없이 눈물을 흘렸다.
이제서야 얽혀있던 모든 사슬이 깨끗이 끊어진 느낌이었다.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나진씨. 괜찮아요?"
"아스카.."
송 회장의 재판이 있던 날 비어버린 방안에서 혼자 멍하니 앉아있던 나진은 아스카의 모습이
보이자마자 그의 목에 매달려서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아스카는 그런 나진의 마음을 충분히 짐작하고 등을 두드리며 말없이 위로해주었다.
"정말 미워했어. 그래도 아버지라 그런지 막상 잡혀갔다니까 가슴이 아프다.."
"죄송합니다.."
"뉴스 봤어. 약물중독이 심각하다며.."
"우선 시설로 보내져 치료를 받으실겁니다. 그 이후에 형을 살겠지만 다시 복귀하기는 힘드실 듯 합니다"
"어머니는?"
"송 이사님께서 잘 처리하셨습니다. 사모님과 나진씨를 돌보는 일도 모두 그분이 알아서 해주실 겁니다.
걱정 마십시오"
"이제 작은 아버지가 회장님이 되는건가.."
"속상하십니까?"
"아니. 차라리 잘됬다는 생각이 들어. 알고보면 송아가 이만큼 성장한 것도 다 작은아버지 힘이잖아
아버지는 치료 잘 받고 정상으로 돌아와 평범하게 사셨으면 좋겠어."
"이제 그만 우십시오"
"아스카.."
"네. 나진씨"
"난 너와 같이 있으면 안될까? 돌아가기 싫어"
"걱정 마십시오. 저와 나진씨가 같이 살 수 있도록 송 이사님께서 집을 마련해주셨습니다. 나진씨는
그곳에서 마음 편히 공부나 취미생활을 하면 됩니다."
"다행이다..정말 다행이야.."
"기쁘십니까?"
"너무 좋아. 고마워 아스카"
그동안 쭉 지용의 집에서 신세를 지고 있던 아스카와 나진은 송 이사가 마련해준 새집으로 이사를 갔고
지용은 아스카와 같이 송아로 들어가 송 이사를 도와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나진은 경험과 재능을 살려 추리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승현은 꽃가게를 운영하며 입대를 준비했다.
틈만 나면 꽃가게를 들락거리는 나진덕에 입대을 앞두고 시무룩해있던 승현이 많은 위로를 받고 있었다
"너 같은 애가 입대해서 뭘 할 수 있겠어?"
"제가 힘으로 하는 일은 못해도 눈치는 빨라서 잘 지낼 수 있어요"
"과연 그럴까?"
"친구 중에 여우같은 녀석 하나 있는데 입대해서 잘만 버티던데요 뭘.."
"부디 제대할 때는 씩씩한 대한민국 용사가 되어 돌아오길 바란다."
"아.. 가기 싫어.."
"지용이와 떨어지기 싫어서 그렇지?"
"바람 피우면 어쩌죠? 사람들이 가만히 놔둘까 몰라.."
"지용이를 보고도 몰라? 절대 바람피울 타입은 아니니 안심해."
"형이 감시 좀 잘해주세요. 불안해서 내가 미쳐"
"내가 철저히 감시해줄게. 만약 이상한 것들이 꼬이면 몸을 바쳐 떼어내주겠어"
"몸을 바칠 것까지야.. 근데 형은 군대 왜 안가요?"
"나는 면제받았어. 몸이 많이 안좋았거든"
"사실 몸이 아니라 빽으로 면제받은거죠?"
"아니야! 정말 몸이 안좋았다니까?"
널부러져있는 포장지를 집어던지며 흥분하는 나진을 바라보던 승현은 허파에 바람이 든 사람처럼 실실
웃으며 그의 머리끝을 잡고 주변을 뱅뱅 돌았다. 나진의 머리는 더 길게 자라 거의 허리까지 닿아있었다.
"왜 머리 안잘라요? 남자가 머리 길러서 뭐한데요?"
"아스카가 자르지 말래. 이게 더 잘어울린다구"
"귀신같아요. 나 머리자를때 같이 잘라요. 빡빡"
"사양하겠어요. 승현양~"
"지금 뭐라고 했어요?"
"지용이가 가끔 승현양이라고 부르던데? 생각보다 깜찍한 별명이야"
"빨리 취소 안해요? 취소 해요!"
"승현양. 입대 스트레스로 미쳤다!"
외롭게 자라온 두 사람은 서로를 의지하며 좋은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처음 만남은 안좋았지만
마음이 통한 시점에서 우정은 변하지 않고 평생 지속될 것이다.
이것이 미움도 알고 보면 다 사랑에서 비롯된 것임을 증명하는 좋은 예가 아닐까?
"일은 할 만 한가?"
"안녕하십니까. 송 이사.. 아니 송 회장님"
"허허.. 그렇게 정색하고 바꿔부를 필요 없다."
"덕분에 조금씩 나아지고 있습니다. 열심히 노력할테니 지켜봐주십시오"
"처음 산장에서 봤을때부터 눈에 총기를 가득담고 있다 생각했건만.. 역시 내가 사람 보는 눈 하나는
정확하단 말이야. 그동안 너에게 많은 상처를 준 것 같아 미안하구나"
"아닙니다. 송 회장님 뜻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맙구나. 앞으로 아스카를 도와 열심히 공부하거라. 실력이 갖춰지고 때가 되면
네게 맡길 일이 많으니 긴장하고"
"감사합니다."
"이제서야 돌아가신 권 회장님께 사죄를 할 수 있겠구나."
경영공부를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는 지용을 어여삐 여긴 송 회장은 그의 아버지에게 강제로 빼앗다
시피 한 회사 중 일부를 돌려주기 위해 열심히 그를 교육하고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일을 떠맡아
눈코뜰 새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지용의 곁에서 힘이 되어주는 건 아스카도 마찬가지었다.
"지용씨. 어딜 그렇게 정신없이 가요?"
"일이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지 정신차려보면 가끔 허둥지둥 하고 있더라구요"
"너무 열심히 하는 거 아닙니까? 가끔 머리도 식혀줘야 합니다"
"하하.."
"오늘 약속 잊지 않았죠?"
"무슨 약속이요?"
"대양씨와 영원씨를 만나기로 했잖습니까"
"아.. 깜박하고 있었네요. 약속 시간이 몇시였죠?"
"저녁 8시 입니다"
"경진씨.. 저 아무래도 못갈 것 같습니다"
"이번에 대양씨가 경감으로 승진했잖습니까. 축하자리에 지용씨가 빠지면 안되죠"
"그때까지 일을 못마칠 것 같아서요"
"걱정 마십시오. 지금부터 고급인력 윤 경진이 투입되어질 예정입니다"
"네?"
"대신 고급인력이니까 나중에 사례는 톡톡히 하셔야합니다?"
"고급인력의 지원을 받다니.. 기대되는데요?"
"그리고 이제 말 편하게 하시지요? 그냥 형이라고 불러줬으면 좋겠다 이겁니다"
"우선 경진씨가 말을 놓고 절 동생으로 대해주신다면요"
"동생치고는 너무 강적입니다"
비틀려버린 수 년간의 생활들이 정상 궤도를 찾아가고 새로운 인연들이 탄생하고.
은하계의 수없이 많은 행성과 별이 서로 짝을 이루듯, 사람 사이에도 각자의 삶과 인연이 존재하기 마련.
피보다 진한 사이로 맺어진 이들은 앞으로 더 나은 관계를 위해 끝없이 달리며 노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