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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독립군단 총사령관 백야 김좌진 장군 전기』7아나키스트들과 연대하다 ⑷

대모달 |2011.06.16 11:23
조회 203 |추천 0

★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의 발족(發足)

 

백야(白冶) 김좌진(金佐鎭) 장군(將軍)은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신민부(新民府)·혁신의회(革新議會) 등을 거치며 만주에서 항일독립운동(抗日獨立運動)에 진력했던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고 반성해 보았다.

 

내부의 조직 모순으로 인한 파벌간의 대립, 교포사회에서의 갑작스러운 혼란과 사업기능의 마비, 중국 군벌의 독립군에 대한 무장해제 시도 등 자신의 구상이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모든 조직이 실패했다고 해서 동포들을 조직력 없이 방관할 수도 없었다. 김좌진은 정신(鄭信)·민무(閔武)·황학수(黃鶴秀) 등과 구수회의(鳩首會議)를 열고 여러 날을 거쳐 협의한 끝에 조직의 중앙집권제를 그만두고 개인의 자유의사를 존중하며 자유합의를 제창하는 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 이념을 수용하여 새로운 자치기구를 세워보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도출해 냈다.

 

한편 북만주에 있는 김야봉(金野蓬)·이달(李達)·김종진(金宗鎭)·이붕해(李鵬海)·이강훈(李康勳) 등 17명의 무정부주의자들은 중동로(中東線)를 근거지로 삼고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해림소학교(海林小學校)에서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在滿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을 결성하였다. 김좌진은 종제(從弟)인 김종진을 통해 이을규(李乙奎)나 이붕해 같은 무정부주의자를 가까이 두게 되어 그들과 많은 의견교환을 할 수 있었고 그로 인하여 무정부주의에 대한 이해를 더 한층 깊이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김좌진은 무정부주의운동 세력과 이심동체(二心同體)가 된다고 하여도 앞으로 혼란이나 마찰이 없이 협력할 수 있겠다는 확신을 갖게 되어 그동안 지켜오던 대종교적 민족주의를 일단 보류하고 무정부주의 이념을 수용하여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를 발족하게 되었다. 한족총연합회의 임원진을 살펴보면 총위원장에 김좌진, 부위원장에 권화산(權華産), 농무 및 조직선전부장에 김종진, 교육부장에 이을규, 군사부장에 이붕해, 민정위원에 한정암(韓貞巖)·정신·박경부(朴慶簿)·강석찬(姜錫璨), 검사원에 이달·김야봉·김야운(金野雲)·이덕재(李德載) 등이었다.

 

한족총연합회는 조직선전부를 중심으로 한 대원들을 지방에 파견하여 그들로 하여금 지방조직을 책임질 수 있는 적임자를 물색케 했다. 김좌진은 만주에 살고 있는 조선 교포들을 모두 하나의 강대한 자치집단으로 묶어 포악한 지주를 몰아내고 안거낙업(安居樂業)을 하면서 항일무장투쟁(抗日武裝鬪爭)을 준비할 수 있기를 다시 한번 기대했다.

 

1929년 9월 3일 한족총연합회는 본부를 산시(山市)에 두었다. 한족총연합회의 조직선전대가 각 지방으로 떠나간 지 얼마 지나서부터 도처에서 이 새로운 조직을 환영한다는 희소식이 연달아 들어왔다. 이는 새로 발족한 한족총연합회가 과거의 모든 단체처럼 권력과 위세로 동포들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동포 농민들 자체가 곧 주인이 되어 힘을 모아서 꾸려가는 자치기관이라는 인식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만주에 산재했던 농민들이 자진하여 모여들었다.

 

이와 같은 희소식에 김좌진은 정말 사실이 그렇다면 뜻대로 조선인의 집단부락을 만들어서 구국실력양성의 기반을 튼튼히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김좌진은 각지에 한족총연합회의 산하조직들이 세워지면 동일한 정신으로 활동할 일꾼이 필요했으므로 간부속성훈련을 통한 인재가 배양되어야 한다고 판단하여 이 업무추진을 교육부장 이을규에게 맡기고 조직선전부장 김종진이 그를 적극 돕도록 했다.

 

이을규와 김종진은 우선 중학기성회(中學期成會)를 중심으로 석두하자와 산시 중간의 고령자(高嶺子)에 있는 1천여평의 땅을 임대차 계약을 통해 학교부지로 사용하기로 하였다. 또한 한족총연합회는 조선 교포가 제일 많이 모여 살고 있는 계림을 중심으로 하는 중동로 일대와 독립군의 영향력이 미치는 기타의 각 지방에서 중국 상인들이 항상 동포들이 일년동안 땀흘려 지은 수만 석의 알곡을 헐값으로 수탈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공판제(公販制)를 실시하고 간부들이 위탁판매자로 나서서 좋은 결과를 보았다. 김좌진은 조선 농민들이 농사를 지은 곡물의 도정도 한족총연합회에서 직접 한다면 교포들의 손해가 없을 것이란 구상 아래 부근에 살고 있는 농민들의 편의를 도모하고 조직의 운영자금도 해결하는 목적으로 산시에 직접 정미소를 차려 운영하였다.

 

그런데 한족총연합회가 발족한 지 불과 2개월도 다 못되는 10월초 어느 날에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만주총국(滿洲總局)에서 일했던 김남천(金南天)이란 사람이 김종진을 찾아와 한족총연합회에 가입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김종진은 김좌진을 비롯한 기타 간부들과 상의도 없이 자기 혼자의 판단과 감정에 사로잡혀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공산주의를 청산하고 인간 본연의 자세로 돌아오라는 인신공격성 발언으로 김남천을 격분하게 했다.

 

이 일이 잘못 전해져서 며칠 후에는 어느 부농의 마당에서 두 사람간에 격렬한 공개토론과 변론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러므로 선의를 품고 찾아왔던 공산주의자 편에서는 뼈에 사무칠 정도의 상처를 입고 앙심만 품은 채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김종진을 지지하는 무정부주의자들은 주먹을 들고 구호까지 외치며 승리감에 기뻐했다.

 

그러나 이 일은 뒷날 후환을 만든 결과가 되었다. 1931년에 김종진이 중동선(中東線) 해림역(海林驛) 부근에서 조선공산당원 장병수(張秉洙)에게 암살당했던 것이다. 만약 김종진을 비롯한 무정부주의자들이 이념의 대립보다 민족통합을 우선시하였다면 자력으로 조국의 독립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참으로 불행한 사건이었다.

 

그 일이 있은지 얼마 안 되어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이 소련공산당(蘇聯共産黨) 측과 모의하여 한족총연합회 간부들을 제거하기 위한 계획을 진행시키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그러나 김좌진 장군은 일신의 안위에 대하여 아랑곳하지 않고 사업에만 열중하면서 부하들에게 새로운 지시를 내리는 등 침식을 거르면서 업무에만 열중하였다.

 

한족총연합회의 간부들은 김좌진을 중심으로 정미소 설치와 중학교 설립을 위한 공사 진행을 지도하고 조선인이면 어느 누구도 따로 없이 공사에 참여하니 공사의 진척은 시간마다 다르고 하루를 지내면 그 공적은 뚜렷이 나타나고 있었다. 세월은 약유파(若流波)라더니 벌써 1930년 새해가 밝아왔다. 김좌진은 동지들과 함께 신안진에 가서 김종진의 거처를 찾았다. 김종진은 자신이 공산주의자들을 냉대했던 행동으로 인해 한족총연합회가 추진하는 민족통합에 물의를 끼쳤던 사실에 대해 죄송스러운 마음으로 얼굴을 들지 못했다. 그러자 김좌진은 김종진의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하고 축배를 들며 처음 화기애애한 휴식을 취했다.

 

“자, 모두 한잔씩 드시오. 내 종제인 김종진이 내세운 무정부주의 이론에 동족들의 호응이 좋으니 만주 땅에 살고 있는 동족들이 이와 같이 합세한다면 조국 광복의 날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여러 동지들은 오늘 실컷 마시고 기대와 희망을 가지시오.”

 

★ 백야(白冶)를 암살한 범인은 누구일까?

 

1930년 1월 24일 김좌진은 부인 나혜국(羅惠國)이 마련한 아침상을 받아 식사를 하다가 사용하던 쇠수저가 홀연히 뚝 부러지는 기이한 현상을 경험하게 되었다. 나혜국은 김좌진의 손에 있는 부러진 수저를 보고 왠지 기분이 나빴고, 상당히 불길한 예감이 들어 김좌진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밖에서 기계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정미소에서 발동기가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 발동기는 하얼빈에서 사 온 것인데 중동로 지역에 살고 있는 조선 농민들은 기계 다루는 법을 잘 몰라 그동안 정미소에서 일을 하려면 김좌진만이 발동기에 시동을 걸었다.

 

“아니, 누가 와서 발동기를 돌리나?”

 

김좌진은 아침상을 물리고 정미소에 가보려고 밖으로 나왔다. 정미소는 김좌진의 자택에서 2백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다. 김좌진이 정미소의 서쪽 문을 막 열려는 순간 느닷없이 “탕! 탕!” 하는 두 번의 총성(銃聲)이 울렸다. 김좌진이 가슴과 배에 총상(銃傷)을 입고 현장에서 쓰러지자, 러시아제 모젤식 M1921 권총(拳銃)을 김좌진에게 겨누고 있던 괴한 하나가 재빠른 동작으로 정미소를 빠져나갔다.

 

“앗! 장군님... 이게 무슨 일입니까?”   

 

총성을 듣고 정미소로 달려온 강인수(姜寅秀)·유창덕(兪昌德) 등이 크게 놀라 김좌진을 부축해 안았다. 김좌진은 신음을 삼키면서 “아직도 할 일이 남았는데… 내가 이렇게 죽어야 하다니… 그게 한스러워서…” 하고 통탄의 눈물을 흘리다가 숨을 거두었다. 이 때가 오전 7시 10분경이었다. 두 사람은 김좌진의 시신(屍身)을 붙잡고 미친 듯이 괴성을 지르며 오열했다.

 

“안돼! 장군님, 이리 가시면 남은 우리는 어떡합니까?”

 

“개보다 못한 놈! 저 놈을 붙잡아 찢어 놓고 말리라.”

 

황백상(黃白常)이란 독립군 병사가 연자방앗간에서 매를 돌리고 있던 마필(馬匹) 한 마리를 풀어 타고 그 저격범을 추격했다. 그러나 그 저격범은 재빨리 몸을 숲 속에 숨기며 자기를 쫓아오는 독립군 병사를 총격하여 사살하고 말았다. 때마침 신안진 쪽에서 산시 방면으로 오던 조선인 농민들이 그 모습을 보고 몰려왔으나 저격범이 쏜 총탄 하나가 농민 한 사람의 머리를 궤뚫자 다른 농민들은 재빨리 엎드리거나 허겁지겁 달아나기에 바빴다. 저격범은 하루 아침에 세 명의 목숨을 빼앗고 기만하게 산시 마을을 빠져나가 자취를 감추었다.

 

불의에 최고 지도자가 살해되는 상황을 겪은 한족총연합회는 긴급히 임원들을 소집하여 부위원장 권화산의 주재하에 비상대책회의를 열었다. 비보를 들은 김종진도 신안진에서 급히 마차(馬車)를 타고 달려왔다. 황학수·정신·이달 등 중진들은 우선 암살범을 붙잡고 이번의 흉변(凶變)이 일어나게 된 원인을 규명하자고 말했다. 각지에 파견된 조직선전부 요원들도 소환되었다.

 

군사부장 이붕해는 임시 치안대를 조직하여 중동선(中東線) 일대를 방위하면서 저격범을 잡기 위하여 중국 치안당국에 수사를 의뢰하였다. 그리고 해림역(海林驛) 부근에 있는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의 한 사무실을 급습하여 김일성(金一星)을 체포하고 여러 문건을 압수했다. 이붕해는 이 곳에서 김일성이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에 소속된 박상실(朴尙實)을 사주하여 김좌진을 암살하도록 지시했다는 자백(自白)을 듣게 되었다.

 

김좌진(金佐鎭) 장군의 암살 배후로 알려진 김일성(金一星)은 6·25남북전쟁(六二五南北戰爭)의 전범(戰犯)이었던 김일성(金日成) 북한 주석과는 다른 인물로 본래 이름이 봉환(奉煥)이었으며,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의 행정위원이었다고 전한다. 이강훈(李康勳) 지사(志士)의 증언에 의하면 김봉환(金奉煥)은 여류 소설가 강경애(姜敬愛)와 동거하고 있었는데, 김좌진이 암살되기 직전에 하얼빈에 갔다가 일본영사관의 경찰대에 피체당했다. 영사관의 경찰관인 마츠시마[松島] 경부(警部)는 강경애를 꾀어내어 영사관 유치장 취조실에서 김봉환과 함께 취조했다. 이 과정에서 강경애가 마츠시마 경부의 변절 요구를 수용했고, 당시 일제의 형법대로 하자면 몇 년의 옥고를 치러야 할 두 사람이 쉽게 석방된 것은 일본 경찰관들에게 매수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김봉환은 일제가 가장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는 존재가 김좌진 장군이고 공산주의 세력도 최대의 기피인물로 김좌진 장군을 꼽고 있기 때문에 김좌진 장군을 없애면 자신을 처벌하지 않고 석방한 일본 경찰대에게 은혜를 갚고 자기 동료들에 대해 환심을 살 뿐만 아니라 애인인 강경애와의 달콤한 생활이 보장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자신이 믿는 박상실에게 권총을 건네주며 김좌진 암살을 부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상경 한국과학기술원 교수는 “김좌진 암살 배후가 불분명한 상황에서 김봉환이라는 인물과의 관계를 들어 소설가 강경애를 암살공모범으로 단정하는 것은 무리”라면서 이강훈의 진술에 신빙성이 없다고 일축했다.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은 “설령 강경애가 김봉환의 동거녀였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김좌진 장군 피살에 책임을 지울 수는 없다” 면서 강경애가 김봉환과 더불어 김좌진 암살을 모의했다는 주장을 반박했다.

 

한편 양환준(梁煥俊)은 김좌진이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 이후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정보를 일경(日警)에게 제공해주고 그 대가로 신민부(新民府)의 활동자금을 받았기 때문에 김봉환이 김좌진 암살 계획을 세웠다는 증언을 했으나 이런 주장 역시 사실로 받아들이기에는 근거가 너무 빈약하다.

 

그렇다면 김좌진을 암살한 범행의 주인공 박상실이란 인물은 대체 누구인가? 조선공산당 ML그룹에서 활동했던 지희겸(池喜謙)은 “김좌진이 일본영사관 측과 공모하여 좌익 인사들을 많이 죽게 했으니 만약 화요회(火曜會)에서 죽이지 않았다면 우리 ML파에서 죽였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암살범의 이름을 박상실이라고 진술하였다.

 

양환준은 1930년 3월에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소재지 아성현(阿城縣) 해거우(海沟禹)에서 공도진(孔道珍)이란 인물을 만나 그로부터 김좌진을 암살했다는 고백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또 만주총국 책임비서인 김백파(金柏杷)에게서 “내가 공도진을 파견하여 김좌진을 암살하게 하였다”는 발언을 들었다는 것이었다. 공도진은 1933년에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에서 조직한 항일유격대에 입대하여 대일항전을 펼치다가 1937년 통화현(通化縣)에서 전사한 이복림(李福林)의 본명으로 전한다. 그는 최동범(崔東範)이란 가명으로도 활동하였다.

 

이처럼 김좌진 암살 사건은 그 배후도 분명치 않거니와 암살범의 정체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밝혀진 것이 별로 없다. 또 한편으로는 일본 제국주의 세력이 조선 민족운동 세력의 분열을 꾀하기 위해 좌·우익간의 대립을 부채질했고 그 때문에 와전된 낭설이 퍼져 조선공산당에서 김좌진을 살해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항일독립운동사(抗日獨立運動史) 최대의 오점이며 비극으로 손꼽히는 김좌진 장군 암살 사건은 지금이라도 자세한 역사적 연구와 정확한 조사가 진행되어 분명한 진실이 가려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좌진이 순국한 지 3일이 지난 뒤에 한족총연합회의 임원과 회원 95명은 장례위원장으로 이을규, 대변인으로 이강훈을 선임하고 김좌진의 장례를 사회장으로 진행하기로 하였다. 김좌진의 묘소는 산시에서 가까운 칠가순 북산 기슭에 잡았다. 동아일보(東亞日報)와 조선일보(朝鮮日報)에서 특파원이 와서 정중히 조의를 표하고 거액의 부의금을 전달했다. 장례 날짜가 되자 애국지사들과 교포들이 구름 같이 운집하여 김좌진 장군의 영전에 애도했다.

 

장례위원회 대변인 이강훈의 약력보고에 이어 장례위원장 이을규의 추모사가 눈물 속에서 진행되니 참례자들은 대성통곡했다. 수백 폭의 만장(輓章)을 든 조문객이 상여 뒤를 따라 산시역전에서 묘지까지 10여리 길에 장사진(長蛇陣)을 이루었으며, 상여의 통곡소리는 장광재령 여맥의 산시동북쪽 야산을 진감(震感)시켰다. 중동철도 연변의 농촌 자치조직 구성도 고령자 북만중학교 설립 계획도 중단되었으며, 한족총연합회는 내부 분열로 흔들리다가 홍진(洪震)·신숙(申肅)·최호(崔灝) 등이 결성한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에 흡수되었다.

 

백야(白冶) 김좌진(金佐鎭) 장군이 암살된 사건은 그 당시 우리 민족에게 엄청난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일제(日帝)와 결탁한 중국 관헌의 탄압으로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이 점차 난관에 부딪치고 있는 상황에서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 승리의 주역인 김좌진 장군을 잃은 민족해방운동 진영은 군사력을 양성하여 대대적인 국내진공작전(國內進攻作戰)을 펼쳐 일제를 구축(驅逐)하겠다는 무장투쟁(武裝鬪爭) 노선을 사실상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주석인 백범(白凡) 김구(金九) 지사가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을 조직해 1932년 4월 윤봉길(尹奉吉)의 홍구공원의거(虹口公園義擧)를 성공시켜 중국 국민당의 장제스[蔣介石] 총통으로부터 독립군 양성을 위한 부지와 자금 지원을 약속받고 1940년 9월에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을 창군했지만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한 날짜에서 1주전에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이 종결되면서 임시정부가 승전국(勝戰國)으로 인정받지 못해 결국 미국 정부의 신탁통치를 받게 된 일은 결과적으로 장기적인 남북분단(南北分斷)의 원인이 되었다는 점에서 참으로 안타까운 역사가 아닐 수 없다. 당시에 우리 민족에게 군대가 없었기 때문에 38선 이북은 소련이, 38선 이남은 미국의 통치를 받는 남북분단이 시작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미 수십년 전에는 북만주에 수천명의 독립군 전투병력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 독립군의 군사력이 김좌진 장군 피살로 소멸된 것이니 참으로 민족적인 큰 손실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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