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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아나키즘 운동의 이면지도자 우당 이회영 지사 전기』5고종의 망명을 시도하다 ⑴

대모달 |2011.06.21 23:51
조회 172 |추천 0

 

① 국내로 밀입국하다

 

이회영은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의 발전을 다 지켜보지 못했다. 그는 신흥무관학교가 합니하로 이주해 전성기를 구가하던 1913년경 이 곳을 떠나야 했다. 같은 해 봄에 수원에 사는 동지 맹보순(孟普淳)에게서 급한 연락이 왔기 때문이다. 일제(日帝)가 이회영(李會榮)을 비롯해 이시영(李始榮)·이동녕(李東寧)·장유순(張裕淳)·김형선(金炯善) 등 망명 한국인 지사(志士)들을 체포 또는 암살할 목적으로 형사대를 파견했으니 급히 피하라는 내용이었다.

 

모여서 대책을 논의한 결과 일단 몸을 피하자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모두 이상설(李相卨)이 있는 블라디보스토크를 피선처로 꼽았다. 그러나 이회영은 이를 거절했다.

 

“우리가 조국 광복의 큰 계획을 이룬다면서 빈손에 알맹이 없는 얘기만 하면서 북쪽 땅 한 귀퉁이에 모여 있으니 어느 세월에 무슨 기회를 답답하게 앉아 기다린단 말인가? 동지 여러분은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몸을 보호하시오. 나는 고국에 돌아가서 자금을 구해 오겠소.”

 

고국으로 돌아가겠다는 말이 모두 깜짝 놀라 말렸으나 이회영은 듣지 않았다.

 

“내 뜻은 이미 결정되었으니 여러분은 다시 말할 것 없소.”

 

그러자 이동녕이 감탄해 말했다.

 

“옛날 중국 촉한(蜀漢)의 무장(武將) 조자룡(趙子龍)이 온몸이 모두 쓸개덩이라고 했는데, 오늘 보니 우당의 온몸이 쓸개덩이로구나!”

 

이회영은 장유순에게 같이 가자고 권고했다.

 

“야은(野隱) 형이 나를 깊이 알고 나도 형을 깊이 알라서 구국운동(救國運動)에 손을 잡고 함께 일해 온 것이 어느덧 20년이 가까우니 진실로 삶과 죽음을 같이하는 벗이라 할 것이오. 오늘 우리가 또 한 번의 역경을 만났는데 어찌 잠시인들 떨어질 수 있겠소? 바라건대 형도 나와 함께 고국에 돌아가서 자금을 구합시다.”

 

그러나 장유순이 같이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자며 거절하자 이회영은 홀로 행장을 꾸렸다. 안동현에서 기차를 탔는데 다행히 서울역까지 무사히 올 수 있었다. 3년만의 귀향이었다. 그러나 갈 곳이 없었다. 온 가족이 만주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회영은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 출신의 윤복영(尹復榮)을 떠올렸다.

 

다 쓰러져 가는 초가집에 살던 윤복영은 느닷없이 나타난 이회영을 보고 깜짝 놀랐으나 곧 사정을 눈치채고 집 안으로 맞아들였다. 함께 망명했다가 자금 마련을 위해 먼저 귀국해 있던 이관직(李觀稙)은 윤복영한테 소식을 듣고 황급히 찾아왔다. 이회영과 이관직은 서로 두 손을 맞잡았다.

 

“스승님께서는 무슨 일로 귀국하셨습니까?”

 

“내가 이 무궁화 강산에 다시 온 것은 몇몇 지우(知友)들을 만나 시국(時局)을 서로 논하고 자금도 모으기 위해서라네.”

 

“제가 먼저 환국한 이래 한 가지 일도 이룬 것이 없어서 스승님게서 직접 오시게 했으니 죄송스럽고 부끄럽습니다. 그런데 나라의 일이 지극히 중요하다고 하지만 왜적(倭敵)이 스승님을 적대시하니 매우 위험합니다. 잠시라도 염려를 놓을 수 있겠습니까?”

 

“내가 비록 큰 재주는 없지만 왜적이 쳐 놓은 그물에는 걸리지 않을 것이네. 또 장부가 세상에 태어나서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다가 죽은들 무슨 한(恨)이 있겠는가?”

 

윤복영과 이관직은 이상재(李商在)·유진태(兪鎭泰)·이덕규(李德圭)·유기남(柳冀男) 등을 개별방문해 이회영의 환국 소식을 전했다. 그 와중에서 이회영은 유진태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런데 차차 이회영의 귀국 소식이 알려져 일제(日帝)의 수사망에 포착되었다. 불시에 일본 경찰관 미쓰와[三輪] 경위(警衛)가 이회영에게 들이닥쳐 만주에서 조선 땅으로 다시 돌아온 이유를 물었다.

 

“대감(大監)께서 일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멀리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이제 조선으로 다시 돌아온 것은 무엇 때문이오?”

 

이회영은 이런 때에 대비해 준비해 둔 답변이 있었다.

 

“선영(先塋) 산소의 나무를 누가 함부로 베어 낸다는 소식을 듣고 조상의 산소에 성묘와 배례도 하고 동기자매와 친척도 만나고자 겸사겸사 돌아왔소.”

 

“언제 만주로 다시 갈 것이오?”

 

“아직 결정되지 않았소.”

 

“만일 만주에 가게 되면 미리 알려 주시오.”

 

미쓰와 경위는 이렇게 전하고 순순히 돌아갔다. 이회영은 의외라고 생각했으나 사실 일본 경찰 입장에서는 트집 잡을 것이 없었다. 아무런 물증이 없는데 귀족 가문 출신을 함부로 고문할 수는 없었다. 양반 사대부들은 독립운동 따위는 하지 않는다고 선전하던 일제로서는 굳이 사건을 크게 만들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회영은 그 후 상동 공옥소학교(攻玉小學校) 교사였던 이경혁(李卿爀)의 집으로 옮겼다. 그는 비밀리에 국내외 인사들과 교류하였는데, 이들에게서 받은 서찰은 즉시 불태워 버리고 태우지 않은 것은 땅 속에 파묻어 감추었다. 그리고 이경혁의 동생 중혁 이외에는 누구와도 함께 자지 않았다. 이런 조심스런 행동으로 꼬투리가 잡히지 않았기에 이회영은 귀국 후 살얼음판 같던 일제의 감시망을 무사히 견뎌 낼 수 있었다.

 

청년 동지였던 임경호(林敬鎬)와 관련해 이런 일이 있었다. 1915년 여름에 이회영은 임경호를 블라디보스토크의 이상설에게 보냈다. 임경호는 여러 날 후의 황혼 무렵에 다시 돌아왔다. 여비 때문에 여러 날을 걸어서 온 뒤라 무척 피곤했던 임경호는 이상설의 이야기를 전한 후 이회영의 방에서 눈을 붙이려 하였다. 그러나 이회영은 거절했다.

 

“여기서 자면 안 되네. 여관으로 가게.”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겠습니다.”

 

임경호는 불쾌한 기색이 되었다. 몇날 며칠을 걸오서 온 자기를 하룻밤도 재워 주지 않으려는 비정한 처사로 느꼈던 것이다.

 

“국내로 돌아온 이후 혼자 자는 것이 절대 바꿀 수 없는 나의 법규네. 임군은 비록 매우 피곤하겠지만 밖에 나가 자도록 하게.”

 

그러자 임경호는 무정한 선생이라고 혼잣말로 불평하며 방을 나섰다.

 

그런데 다음날 새벽 일본인 형사 5·6명이 갑자기 이회영의 방을 덮쳤다. 그들은 방 안을 수색하더니 이회영을 종로경찰서로 끌고 가 심문했다.

 

“당신은 어느 해에 만주로 나갔는가?”

 

“경술년(1910년) 겨울에 건너갔다.”

 

“만주로 간 것은 무슨 의도인가?”

 

“만주에 토지를 매입하고 개간해서 농업을 경영하러 간 것이다.”

 

“당신이 경학사를 설립했다는데 무엇을 하는 회사인가?”

 

“경학사에서는 농업과 학업을 권장하고 있다.”

 

“당신이 대고산 아래에다 무관학교(武官學校)를 설립했다는데 무관을 양성하여 무엇을 하려는 것인가?”

 

“그것은 낭설이다.”

 

“구한국의 해산 군대의 장교들이 모여 병서를 가르치고 전술을 훈련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지금 국내 각 학교에서 구한국군 장교들이 학생들에게 체육을 가르치지 않는가? 이와 같은 것이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이상설을 전부터 알고 있나?”

 

“이상설은 죽마고우(竹馬故友)다.”

 

“이상설의 소식을 들었나?”

 

“수천 리 밖에 있는 친구의 소식을 어디에서 들어 보겠는가?”

 

“이상설은 해외에서 무엇을 하는가?”

 

“피차에 왕래도 못 하고, 서신도 끊어졌으니 그가 무슨 일을 하는지 나는 모른다.”

 

“당신은 국내외 인사들과 체결하여 독립운동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게 무슨 말인가? 나의 지금 가장 큰 소원은 큰 부자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거짓말이다. 아마도 혁명가가 되고 싶은 것이 소원이겠지? 당신이 겉으로는 온화하고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말하지만 뱃속에 감춘 생각이 따로 있고 가슴에는 불평이 가득한 것을 알고 있다.”

 

“참으로 어이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대가 무엇이길래 함부로 남의 생각을 단정지어 말하는가? 일개 형사 따위가 독심술(讀心術)이라도 부릴 줄 안단 말인가?”

 

만약 임경호가 이회영의 방에서 자다가 체포되었다면 일본 경찰은 임경호를 고문해 그와 이상설이 비밀 연락망을 갖고 있는 사실을 포착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런 물증이 없었으므로 일본 경찰은 기소를 포기하고 3주일간 구류에 처했다.

 

구류 시절 경찰서 유치장 안에서 이회영은 동지인 나씨가 있는 것을 보았다. 나씨란 사람은 이회영과 연관이 있는 인물이었다. 이회영은 대책을 강구하다가 고육계(苦肉計)를 쓰기로 했다. 점심을 먹고 나서 나무 젓가락으로 코를 찔러 피가 나오게 한 후 젓가락 싸는 종이에 작은 글자를 썼다.

 

‘아불언군(我不言君)’. ‘나는 그대를 말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이회영은 경찰관들이 한눈을 파는 틈을 타서 철창 사이로 나씨에게 쪽지를 건네 주었다. 이회영은 나씨가 민첨하게 감추는 것을 보고 나서 안심을 했다. 이런 신중하고도 과감한 처신 덕에 이회영은 3주일간의 구금을 끝내고 석방될 수 있었다.

 

셋째 아들 이규창이 기억하는 우당의 보안 습성은 다음과 같다.

 

"부친께서는 성격이 주도면밀해 매사에 사려가 깊으시며, 험악한 정세이므로 어느 때에 왜놈들이 집안을 뒤질지 모르는 판이라, 각처에서 오는 편지며 또는 조금이라도 문제가 될 만한 문서는 즉시 소각하고 좀 중요한 문서는 담배 재떨이 밑에 다 풀로 붙여두니 제 아무리 간교한 왜놈이라 하여도 담배 재떨이 밑바닥은 보지 않는 것이다." ― 이규창,「운명의 여진」

 

이런 조심스런 행동으로 꼬투리가 잡히지 않았기에 이회영은 귀국 후 6년 동안 살얼음판 같던 일제의 감시망을 무사히 견뎌낼 수 있었다.  

 

♣ 출처 ☞ 김명섭 저술『자유를 위해 투쟁한 아나키스트 이회영』역사공간 편찬(2008년 출판)

           ☞ 이덕일 저술『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웅진출판사 편찬 (2001년 출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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