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사라진 6년간의 행적, 그리고 고종 황제 망명 계획
이회영은 1913년 봄 국내로 밀입국한 이후 1919년 재망명하기까지 국내 각지의 주요 인사들은 물론 중국 관내 및 만주ㅡ와 미주 하와이, 일본 등에 산재한 해외 동포들과도 깊은 의견을 나눈 것으로 보인다. 그는 국내 천도교의 오세창(吳世昌)을 비롯해 기독교의 이승훈(李昇薰), 불교의 한용운(韓龍雲), 교육계의 김진호(金鎭浩)와 강매(姜邁), 그리고 재야인사인 이상재(李商在)·유진태(兪鎭泰)·안확(安廓)·이득년 등과 긴밀히 교류하였다. 또 박돈서·임경호·홍증식 등의 청년 동지들을 상하이와 베이징·만주·블라디보스토크 등으로 보내 서로 의견을 교환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회영(李會榮)이 국내에 머물던 약 6년간의 활동은 극히 비밀리에 추진되었으므로 아직까지 제대로 알려진 바가 없다. 지난 6년 동안 그의 국내 활동을 옆에서 도운 사람은 오직 윤복영과 이득년뿐이라 하는데, 이들은 이미 죽었거나 해방 후 북한으로 납치되어 구체적인 사항을 알 길이 없어졌다. 이회영의 활동을 어렴풋이 짐작하는 이관직은 “이처럼 선생이 국내에 6년간 있으며 한 활동은 오리무중(五里霧中)에 가려져 있으니, 참으로 애석하다”며 통분해 하였다.
그나마 이관직을 통해 알려진 진실 중의 하나는 이회영이 추진한 고종(高宗) 황제 망명 계획이다. 한국병합(韓國倂合)의 최종 인가자인 고종이 해외로 망명하여 병합의 부당성과 강제성을 증명한다면, 그 폭발성이란 가히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대한제국의 황제가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직접 피력하고 광복투쟁의 전면에 나선다면, 각처에 산재한 독립운동 세력의 일치단결은 물론 국내외의 동시 다발적인 무장봉기도 가능해진다. 더욱이 일본 제국주의 세력에 기대어 현실에 안주하던 친일파나 기득권 관료들도 일시에 명분을 송두리째 빼앗기고, 양반 지배층의 농민에 대한 지배력도 급속히 와해되어 일제의 조선 식민지 지배는 심각한 곤란에 처할 것이 뻔했다. 이회영이 고종 황제 망명 계획을 추진한 것은 이런 정치적 폭발성을 이용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사실 고종 황제를 러시아 등 해외로 망명시켜 독립운동의 구심점으로 삼고자 하는 계획은 이미 1910년에도 추진된 바 있었다. ‘의군별지휘(義軍別指揮) 전 종2품 가선대부 의정부 참찬 이상설’과 ‘13도의군(十三道義軍) 도총재 유인석’ 두 사람 명의의 ‘권황제아령파천소(勸皇帝俄嶺播遷疏)’는 경술병탄늑약(庚戌倂呑勒約)의 조인이 확실시되던 1910년 7월 28일경 작성되어 고종에게 품신(稟申)된 바 있다. 상소문은 고종이 러시아 땅인 블라디보스토크로 파천(播遷)하여 나라를 일으키자는 것이 주 내용이다.
그러나 이 상소문은 고종에게까지 전달되지 못했고, 주위의 경계도 삼엄하여 실현 가능성도 희박했다. 일제가 ‘조선보안법 위반사건’ 이후 고종을 더욱 철저히 감시했기 때문이다. 고종 망명은 일제가 모든 것을 걸고 막아야 하는 식민지 지배의 제1대 원칙이었던 것이다.
이회영은 포기하지 않고 기회를 엿보았다. 드디어 방안을 떠올렸으니, 첫번째 아들 이규학(李圭鶴)의 신부례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이규학은 1917년 이회영을 찾아 어머니 이은숙과 함께 국내로 귀국했다. 신부례 상대인 조계진은 대비(大妃) 조씨(趙氏)의 친족이자 고종 황제의 조카딸이었다.
이규학의 동생 이규창이 70년 전을 기억해 봐도, 신부례 의식은 매우 장엄하였다. 비록 망국대부(亡國大夫)라 하여도 궁궐의 의식을 가미했으므로 수일 전부터 그 절차가 범잡 다양하여 축제 분위기였다. “혼수를 다 궁내(宮內)에서 준비하여 궁내 나인이 우리 집으로 폐백 전일(前日)에 다 가져올 정도”로 신부례는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진행되었다. 이미 결혼한 지 3년이 지난 1918년 11월에 신부례를 올린 이유가 바로 이를 핑계로 궁궐에 출입하면서 고종의 망명 계획을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망명 계획에는 이회영·시영 형제와 이득년(李得年)·홍증식(洪增植)·민영달(閔泳達)·조완구(趙琬九) 등이 가담했다. 이회영이 고종의 시종 이교영(李喬永)을 통해 고종의 의사를 타진하자 고종은 선뜻 해외 망명 계획을 승낙했다. 당시 일제는 순종의 동생인 영친왕(英親王)을 일본의 황족 이방자(李芳子)와 혼인시키려 했다. 고종은 대한제국의 황태제(皇太弟)가 일본 여인과 혼인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순종이 후사가 없는 판국에 영친왕이 일본 여인과 혼인한다면 조선 왕실의 순수한 혈통이 완전히 끊기는 것이라고 판단한 고종은 이회영의 망명 제의를 선뜻 받아들였던 것이다. 남작 작위 거부자이기도 한 판서 민영달은 망명 계획에 고종이 찬성했다는 말을 듣고 선뜻 여기에 동조했다.
민영달은 5만원의 거금을 내놓았다.이회영은 1918년 말 무렵 이득년과 홍증식을 통해 민영달이 내놓은 이 자금을 북경에 머물고 있던 이시영에게 전달해 고종이 거처할 행궁을 임파하고 수리하도록 부탁했다. 이렇듯 자금이 마련되고 행궁까지 준비되어 구체화되어가던 고종의 망명 계획은 그러나 의외의 사태 때문에 성사되지 못했다. 계획이 진행되던 중 12월, 고종 황제가 밤중에 식혜를 먹은 후 갑자기 복통을 일으켜 괴로워하다가 반 시간 만에 서거하고 만 것이다.
③ 고종의 의문의 죽음, 그리고 3·1반일시위운동
고종의 급서에는 여러 가지 의문점이 있다. 당시 고종의 망명을 준비했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망명 정보가 누설되어 일본 정부의 음모에 의해 고종이 독살당한 것이라 회고하고 있다.
일제의 간섭 아래 편찬된《순종실록(純宗實錄)》의 기록도 의혹투성이다. 고종이 붕어(崩御)한 직후 이회영의 며느리 조계진이 운현궁(雲峴宮)에 다녀온 뒤 전한 예기는 고종의 반일 의지를 두려워 한 일제가 궁인(宮人)들을 매수, 극비리에 식혜에 독약을 타서 드시게 했으니 고종의 전선이 파열돼 절명하였고, 독약을 탄 궁인들은 행방불명되었다고 한다. 독살을 주도한 상궁들의 이름이 외국인 선교사들에게까지 알려질 정도로 고종 독살설은 구체적이었다. 고종의 죽음에 온 백성이 땅을 치고 통곡했다. 그때 이회영의 충격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고종이 갑자기 승하하자 이회영은 더 이상 국내에서 할 일이 없어졌음을 깨달았다. 그는 인산(因山) 전에 조선 땅을 떠나리고 결심했다. 이회영은 오세창·한용운·이승훈 등 종교 지도자들과 인산일에 전 민족적 봉기를 일으킬 것을 논의한 후 자신은 미리 출국해 해외에서 동조 거사하기로 하였다. 이회영은 아들 규학을 불러 놓고 “내가 고국을 떠났다고 절대 말하지 말 것이며, 내가 기별을 하면 가족을 인솔해 고국 떠날 것을 계획하고 매사를 주도면밀하며 황제 인산 때 절대로 가족들을 외출하지 못하게 단속을 엄히 하라”고 지시했다.
며칠 후 이회영은 전처 소생의 장남 이규룡(李圭龍)을 데리고 북경으로 떠났다. 그때가 1919년 음력 1월 21일이었다. 이회영은 이때 벌써 고종의 국장(國葬) 때 소요 사태가 일어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황제의 사돈인 집안사람에게 인산 구경 가지 말라고 당부했을 리가 없다.
이회영은 왜 고종의 승하 사실을 목도하고 국장 때 거대한 소요 사태가 일어날 것을 뻔히 알면서도 가족을 남겨둔 채 북경으로 서둘러 망명길을 떠나야 했을까? 그의 속내를 자세히 알 길은 없지만, 분명 3·1반일시위운동(三一反日示威運動)과 같은 국내에서의 거대한 항일투쟁과 국외에 망명 중인 동지들의 독립운동을 서로 연락하고 협의하려 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국내를 떠나기 전 이회영은 민족 대표의 한 사람인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과 만나 모종의 밀담을 나누었다. 이회영은 이미 만주의 신흥무관학교에서 만난 바 있는 만해와 여러 차례 상의하면서 기미독립선언서(己未獨立宣言書) 발표가 확정되면 북경과 상해에서 그곳 동지들에게 알려 중국 각지와 만주, 연해주 등지에서 이에 호응할 계획을 세웠다고 말했다.
국내에서의 거사는 만해가 맡고 이회영은 미리 북경과 상해로 가서 독립선언 발표를 계기로 한국 임시정부 수립을 세계만방에 선포하자고 하였다. 그런 다음, 항일독립운동의 최고 지휘본부를 설치하여 일사분란한 독립운동의 모체가 되어 각계 운동을 지도하려 했다. 이러한 계획 아래 이회영은 언제 돌아올지 모를 북경으로의 망명길에 올랐던 것이다.
♣ 출처 ☞ 김명섭 저술『자유를 위해 투쟁한 아나키스트 이회영』역사공간 편찬(2008년 출판)
☞ 이덕일 저술『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웅진출판사 편찬 (2001년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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