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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아나키즘 운동의 이면지도자 우당 이회영 지사 전기』15 두 아나키스트의 장엄한 순국 ⑵

대모달 |2011.07.05 04:45
조회 123 |추천 0

 

② 옥관빈(玉觀彬)과 이용노(李容魯)를 제거한 엄형순(嚴亨淳)

 

윤봉길(尹奉吉)의 홍구공원의거(虹口公園義擧)가 있은 지 한 달쯤 후에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은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와 손잡고 서간단(鋤奸團)이란 조직을 만들었다. 당초 이 조직은 임정의 자금지원으로 운영되었다. 남화한인청년연맹에는 이미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이 있었으므로 이런 행동단체를 중복해서 설치할 필요가 없었는데, 임정 측의 요청에 의해 결성한 것이었다.

 

홍구공원의거는 임정의 자금 사정을 일거에 호전시켰다. 장개석(蔣介石)는 중국의 4억 인민이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젊은이가 해냈다고 감탄하면서 임정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이로써 임시정부는 항상적인 자금 부족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반면에 백범(白凡) 김구(金九)를 비롯한 임정 요인들은 일제의 집중적인 추적을 받고 있었다. 그 결과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 같은 임정의 하부 조직이 마비되어 활동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래서 백범은 안공근(安恭根)을 통해 남화한인청년연맹의 화암(華岩) 정현섭(鄭賢燮)에게 새로운 행동단체를 하나 만들자고 제안했다. 당시 상해에서 언제라도 목숨을 던질 자세가 되어 있는 수십 명의 행동대원을 거느린 단체는 남화한인청년연맹뿐이었다.

 

백범은 화암에게 옥관빈(玉觀彬)을 반드시 처단해야 할 인물로 지목하고 그의 살해를 의뢰했다. 옥관빈은 한때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에 참가했으나 1911년 105인 사건 이후 변절하여 일제 관헌과 내통하고 있었다.

 

그는 상해에 불자제약회사를 차려서 큰 재산을 모았는데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가 조직한 흥사단(興士團)의 간부직에 있으면서 도산의 요청으로 임정이 운영하는 인성학교에 일부 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내 신문 등을 이용해 자신을 과대선전하고 독립운동가들을 비방하면서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독립운동한다고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은 먹고 살 길도 없고 무식하여 자신이 쌀가마니나 나눠 주고 돈 몇푼 던져 주면 모두 자기 밑에 와서 아부나 할 사람들이라고 멸시하고 다녔다. 그의 안하무인격(眼下無人格)인 태도에 교포들은 불쾌했지만 참는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그는 상해의 유력인사였다. 수백여명의 노동자를 거느린 제약회사의 CEO로 호화스런 저택에 살면서 상해의 고위 관리는 물론 재계와 종교계에까지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거물이었다. 또한 일제 문서에도 일본군에 약 2만원의 군수비용을 제공한 사실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친일파였다.

 

화암이 이런 옥관빈을 처단하는 데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백범이 자금을 제공하고 실행은 남화한인청년연맹이 맡기로 했다. 화암이 옥관빈 처단 임무를 맡긴 사람은 양여주와 엄형순이었다. 당시 옥관빈의 집은 영국 조계를 지나 북사천로(北四川路)의 일본 조계 안에 있었다.

 

백범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았지만 그다지 풍족한 것은 아니어서 자전거를 타고 옥관빈을 뒤쫓아야 했다. 그의 집은 일본 조계 안에 있어서 독립운동가들이 함부로 들어갈 수 없었고, 그나마 자전거로 자동차를 미행하려니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두 달 동안의 미행 끝에 양여주와 엄형순은 옥관빈이 자기 사촌동생 집에 사는 흥사단원 이씨의 부인과 불륜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아냈다.

 

망지로 끝 북영길리(北永吉里)와 남영길리(南永吉里)의 갈림길에 프랑스 공사관 공무국에 다니는 옥관빈의 사촌동생 옥성빈(玉成彬)이 살고 있었다. 그 집 뒤쪽 방에 흥사단원 이씨가 살고 있었다. 이씨는 한구(漢口)에 살고 있어서 바로 이 곳이 옥관빈과 이씨 부인의 불륜 장소였다. 양여주와 엄형순은 옥관빈이 이씨 처와 정을 통하고 나오는 순간 저격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옥성빈의 집 맞은편에 있는 중국인 집 2층에서 수일간 기숙하면서 감시하던 양여주가 드디어 연락을 해 왔다.

 

1933년 8월 1일 밤 12시, 엄형순은 옥관빈의 사촌동생 집이 있는 골목길에서 옥관빈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양여주는 폭탄을 들고 옥관빈이 나올 뒷문에 지켜 서 있었다. 잠시 후 정사를 마친 옥관빈이 뒷문을 열고 몸을 내밀었다. 그는 누가 볼세라 자기의 차량이 기다리고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때 엄형순이 옥관빈을 막아 서며 권총을 발사했다. 가슴을 맞은 옥관빈이 앞으로 쓰러지며 안간힘을 쓰자 엄형순이 다시 탄환 한 발을 쏘았다.

 

엄형순은 구둣발로 건드려 옥관빈이 절명한 것을 확인하고 유유히 몸을 돌렸다. 총성을 듣고 경찰관과 동네 주민들이 달려오자 엄형순은 “강도가 저 쪽으로 도망갑디다!” 하고 말했다. 경찰관들은 고맙다면서 그가 가리킨 쪽으로 달려갔다. 엄형순은 곧 안파 속에 파묻혔다.

 

상해의 거물 실업가가 암살당했으나, 중국 경찰은 피살 원인조차 밝히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흥사단에서는 옥관빈의 사인을 밝혀 내기 위해 소동이 일었다. 옥관빈 암살 사건으로 상해에 물의가 일자 백범과 화암은 한 여관에서 만나 대책을 협의했다. 그 자리에서 화암이 말했다.

 

“이 기회에 옥관빈의 죄상을 모두 공개하여 우리가 처단했음을 알려야 하겠습니다.”

 

그들은 서간단 명의의 성명서를 발표하기로 결정했다. 서간단은 옥관빈의 죄상을 열거한 후 서간단에서 그를 한간(韓奸)으로 규정해 처단했음을 선포했다. 덧붙여 앞으로도 이러한 행위를 자행하는 자가 있으면 똑같이 처단하겠다고 엄숙히 경고했다. 성명서가 발표되자 상해 교포사회, 특히 친일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러자 이 사건이 한국인들끼리의 정치문제임을 깨달은 중국 경찰은 긴장해 수사를 중지하고 떠들썩하던 흥사단도 조용해졌다.

 

우당 이회영 고문치사의 배후에는 또 다른 인물이 있옸다. 당시 상해의 조선인거류민회(朝鮮人居留民會)에서 회장을 맡은 이용노(李容魯)였다. 그 또한 한 발은 흥사단에 걸치고 다른 한 발은 일제에 걸쳐 놓은 인물이었다. 상해의 독립운동가들이 이용노가 밀정이란 확신을 갖게 된 계기는 그가 절대적 친일분자만 참여할 수 있는 거류민회의 회장을 맡으면서다.

 

이 단체는 한국인들의 자치기관 같은 이름과는 달리 실제로는 상해 거주 교포들, 특히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정보를 일본 영사관에 제공하는 일제의 어용기관이었다. 따라서 이용노가 갑자기 조선인거류민회장이 되자 그가 밀정이라는 의심이 확신으로 변했다. 회장이 된 그는 교민들을 괴롭혀온 깡패들을 모아 조직을 만들었다. 그런 다음 그들을 교민사회에 잠입시켜 독립운동 단체를 교란시키는 동시에 교민들을 이간, 모략하여 단합을 파괴하는 행위를 하고 있었다.

 

생활이 궁핍하고 순진한 청년들이었던 연충렬과 이규서 역시 이용노를 통해 번번히 일본 형사들과 접촉하고 금전도 지원받았던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화암은 남화한인청년연맹의 동지들을 모아 1935년 3월 18일 그를 살해할 구체적인 계획을 협의했다. 이용노 제거를 자청하고 나선 인물은 엄형순이었다.

 

엄형순의 비장한 각오를 들은 이규창은 그 일을 돕겠다고 나섰다. 그에게는 부친의 복수를 한다는 의미였다. 엄형순이 만류했으나 듣지 않았다. 결국 엄형순이 실행을 담당하고 이규창이 주위 경계를 맡기로 했다. 1935년 3월 25일 새벽 두 사람은 홍구의 거류민회 3층에 있는 이용노의 거주지로 찾아가 심부름을 왔다고 속인 후 그를 권총으로 살해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칼로 저항하는 이용노의 부인 박성신이 고함을 지르고 경찰을 부르는 바람에 현장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엄형순과 이규창은 연락선에 실려 국내로 압송되었다. 이들은 곧 혹독한 고문을 받아야 했으며, 당시 국내에 있던 이을규도 끌려와 관련 혐의를 추궁당하며 30여 차례나 가혹한 고문을 당했다. 이을규뿐만 아니라 최학주(崔學主) 등 10여명도 끌려와 고문을 받았다.

 

1936년 2월 18일 두 사람에 대한 선고 공판이 열렸다. 개정 30분만에 엄형순에게는 사형이, 이규창에게는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13년의 형량이 선고되었다. 그 해 4월 엄형순은 사형당했고, 이규창은 1945년 8월 15일, 11년 반의 긴 감옥생활 끝에 해방의 기쁨을 맞을 수 있었다.

 

♣ 출처 ☞ 김명섭 저술『자유를 위해 투쟁한 아나키스트 이회영』역사공간 편찬(2008년 출판)

           ☞ 이덕일 저술『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웅진출판사 편찬 (2001년 출판)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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