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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삼도수군통제사 충무공 이순신 장군 전기』3.히데요시의 야욕 ⑵

대모달 |2011.07.09 00:49
조회 89 |추천 0

 

우리 민족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수많은 외적의 침범이 있었으나 그때마다 우리 선조들은 뜨거운 구국(救國)의 의지와 비상한 투지로 국난(國難)을 극복해왔다. 국난을 당할 때마다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하여 민족적 기상을 높이 떨친 구국의 영웅은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지만, 이순신이야말로 그 숱한 영웅, 호걸, 충신, 열사 가운데서도 으뜸가는 위인이라는 사실에는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이순신(李舜臣)은 한국 역사상 최고의 전쟁 영웅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는 미증유의 재앙을 당해 나라와 겨레의 멸망이 눈앞에 이르렀을 때 조선 수군을 총지휘하여 갖가지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필승의 신념과 비상한 전략으로 연전연승(連戰連勝)을 올린 불세출의 명장이었다. 그는 가난한 선비의 아들로 태어나 54년의 길지 않은 일생을 보내는 동안 온갖 고난 속에서도 오로지 충효(忠孝), 인의(仁義)와 애국애족정신(愛國愛族精神)으로 일관한 민족의 큰 스승이었다.

영국 해군사관학교 교장을 지냈던 빌라드(G.A.Billard) 소장(少將)은 "조선의 이순신이라는 해군 제독이 넬슨(Horatio Nelson)에 버금가는 뛰어난 지휘관이라는 사실을 영국인들은 인정하기 힘들겠지만 이순신이 동양 최고의 해군 제독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라고 이순신을 평가하였다. 중국계 미국인 역사학자로 미국 워싱턴 주립대학교 교수인 레이 황(Ray Hwang) 박사는 동양사 3대 전쟁 영웅으로 조선의 이순신(李舜臣), 베트남 다이비에이 왕조의 첸 훈다오[千訓道], 중국 명나라의 원숭환(袁崇煥)을 들면서 그 중에서도 이순신이 가장 위대한 공훈을 남긴 영웅이라고 칭송하였다.

오늘날 나라 안팎의 정세, 특히 또다시 빠진 정치적, 경제적 위기에 비추어볼 때 이순신은 지금까지 알려져 왔던 절세의 명장, 구국의 영웅이라는 면모에 더해 비상한 리더십을 갖춘 최고 경영자였다는 사실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21세기라는 새로운 격변의 시대, 격동의 시대를 맞이하여 강대국들과의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도 우리는 동서고금(東西古今)의 그 어떤 위인보다도 위대했던 성웅(聖雄) 이순신의 리더십을 통해 국난극복의 지혜를 찾아야 할 것이다.

◆ 이순신의 치밀한 대비

임진왜란(壬辰倭亂) 발발 14개월 전에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로 부임한 이순신(李舜臣)은 장차 틀림없이 전쟁이 일어날 것을 예측하고 방비를 철저히 하고 있었다.

그는 피폐해진 군선과 무기를 정비하고, 화약을 만들어 비축하는 한편, 봉수대를 쌓고 큰 돌을 날라다가 구명을 뚫고 쇠사슬을 박 아 앞바다에 가로질러 놓았으며, 불철주야로 군사들을 훈련시키는 등 임전태세 정비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렇게 하여 자신의 휘하 수군을 전에 없던 정예군으로 변모시켰다.

그때 조선의 군사력은 건국 초기의 튼튼했던 국방체계가 거의 무너져 유명무실한 형편이었다.

본래 조선왕조는 군사를 중앙군과 지방군으로 나누었는데, 중앙군으로는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산하에 중위, 전위, 후위, 좌위, 우위를 두었다. 중위는 서울 중부와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황해도, 전위는 서울 남부와 전라도, 후위는 서울 북부와 함경도, 좌위는 서울 동부와 경상도, 우위는 서울 서부와 평안도의 지방군을 지휘했다. 그러나 이 오위도총부 체제는 임진왜란이 터지기 전인 중종(中宗) 때에 설치된 비변사(備邊司) 체제로 바뀌었다.

지방군은 진관제(鎭管制)라 하여 전국 8도의 감영이나 전략적 요충지 한두곳에 주진(主鎭), 도내 주요 읍성에 거진(巨鎭), 군현에는 제진(諸鎭)을 설치했는데, 이는 전쟁이 일어나면 각각 자기 진영은 자기 힘으로 지키도록 한 일종의 지역방어 전략 개념이었다. 이에 따라 경기도에는 한성에 주진, 광주, 수원 등 6개 읍성에 거진, 이천, 안성 등 38개 군현에 제진이 있었고, 경상도에는 상주, 울산 등 두 곳에 주진, 안동, 진주 등 7개 읍성에 거진, 양산 등 81개 군현에 제진이 있었다. 또 전라도에는 전주, 강진 두 곳에 주진, 나주, 순천 등 7개 읍성에 거진, 김제, 광주 등 66개 군현에 제진이 있었다. 이 밖에 다른 지방도 비슷했으며, 이들 진영은 주변에 성곽과 산성을 쌓아 비상시에 대비했다.

이러한 주진에는 병마절도사를 두어 군무(軍務)를 촐괄토록 했는데 1명은 반드시 문관인 그 도의 관찰사가 겸직하고, 나머지 1, 2개 병마사만 무관이 맡게 했다. 또 병마사 밑에는 조방장을 두어 보좌토록 했다. 한편 거진에는 절제사와 첨절제사, 제진에는 동첨절제사와 절제도위 등 무관의 보직이 있었으나 요새 책임자인 만호를 제외하고는 모두 문관인 그 고을 행정 책임자인 부윤, 부사, 목사, 군수, 현령, 현감 등이 겸직했다. 그러다가 전쟁이 나면 조정에서는 육군, 해군 총사령관 격인 도원수를 임명했는데, 이 또한 문관 가운데서 원로를 임명했으며, 왕명을 받아 현지를 순시하고 군무를 총괄하는 도순변사나 순변사 등도 모두 문관 출신을 임명했다.

처음부터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내세운 조선은 이처럼 철저한 문관 우위의 나라였다. 관직을 동반(문관)과 서반(무관) 등 양반으로 나누었으나 어디까지나 동반 즉 문관 중심으로 국가를 운영했다. 국왕 이래 최고의 의결기구인 의정부(議政府)에서는 문관만 들어갔고, 심지어는 국방을 담당하는 병조판서도 남이(南怡)의 경우처럼 한두명의 예외를 빼고는 대대로 문관이 차지했다.

또 모든 군사문제를 다루는 비변사에도 최고 책임자인 도제조(都提調)에는 문관인 전, 현직 영의정, 죄의정, 우의정이 도맡았고, 그 아래 제조들도 모두 문관인 이조, 호조, 예조, 병조판서와 강화유수 등 5명이 겸직했다. 다만 임진왜란이 일어난 직후에야 선조는 비변사 부제조에 무관을 임명했다.

◆ 육군보다는 비교적 강했던 조선 수군

그러나 조선 수군은 일찍부터 강군으로 발전했으니 이는 오로지 고대의 삼국시대부터 극성스럽게 침범해온 왜구 때문이었다. 수군은 육군의 진관제와 마찬가지로 각도에 수군절도사를 두고, 그 아래 첨절제사와 동첨절제사를 두었으며, 포구 요새에는 수군만호를 배치했다.

그러나 이러한 진관제는 군사들이 각 진영마다 분산 배치된 까닭에 수시로 침범해온 왜구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는 취약점이 나타났다. 진관제의 취약점이 노출되자 조정은 옛날 세종(世宗) 때에 여진족을 정벌하고 육진을 개척한 김종서(金宗瑞)가 주창하고 이일(李鎰)이 함경도병마사(咸鏡道兵馬使)로 있을 때에 발전시킨 제승방략(制勝方略)을 채택했다.

제승방략은 유사시 각 진영에 배치되었던 군사들을 전략적 요충지 한 곳에 모이도록 하고, 중앙에서 내려온 장수의 지휘를 받아 적군을 물리친다는 전략개념이었다. 그런데 이 제승방략 또한 실제로 전쟁이 터지자 한 곳에 집결시킨 부대가 궤멸당하면 주변 모든 진영이 무방비 상태가 되어버리는 허점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또한 성종(成宗) 때 편찬된 조선왕조의 헌법인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따르면 상비군이 20여만명은 잇어야 하지만 임진왜란 개전 초기까지 조선 육군과 수군은 모두 합쳐 채 10만명이 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징병 대상은 16세 이상 60세까지로 되어 있었지만 이 또한 정치의 문란에 따라 유명무실했다. 그런 까닭에 이율곡(李栗谷)이 죽기 전에 '십만양병설(十萬良兵說)'을 건의했던 것이다.

한편, 그러한 국방상의 여러 문제에도 불구하고 당시 이순신이 육성한 조선 수군은 당대 최강의 해군이라고 할만했다.

당시 일본 수군이 육군을 전장으로 실어 나르는 수송선단 역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고, 명나라 수군도 독자적인 편제와 작전 능력이 매우 부실했던 것과는 달리 조선 수군은 원양 해군이 아니었을 뿐, 독자적인 편제와 작전 능력을 갖춘 강력한 함대였던 것이다.

세종실록 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따르면 조선 수군의 편제상 군선은 총 829척이 전국의 수영(水營)에 배치된 것으로 나온다. 군선은 각각 대선, 중대선, 중선, 쾌선 등으로서 이 가운데 경상도가 285척으로 가장 많았으며, 수군 총병력은 50177명이었던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성종 때에는 대선, 중선 등의 이 편제가 맹선으로 바뀌어 정원 80명의대맹선이 80척, 정원 60명의 중맹선이 192척, 정원 30명의 소맹선이 216척 등 모두 488척에 평상시 군사가 배치되지 않은 무군 예비선으로 대맹선 1척, 중맹선 3척, 소맹선 245척 등 모두 737척이 배치토록 되어 있으며 수군 총병력은 48800명으로 나온다.

하지만 조선 수군은 일본의 내전에 따라 왜구의 침범이 뜸한 평화시를 맞음에 따라 그 기능이 전투함이라기보다는 단순한 세미 운반선으로 약화되어 버렸던 것이다.

한편 전함의 모습도 변화했다. 왜구의 배가 평면에서 갑판 위에 뚜껑이 달린 옥선(屋船)으로 바뀌고 높이도 높아지자 조선에서도 이에 맞서기 위해 배 위에 한층을 더 올려 갑판을 만들고 그 가운데에 판옥을 지어 지휘관이 지휘토록 하는 한편, 2개의 돛대는 전투가 시작되면 누일 수 있는 판옥선을 개발했다.

이에 따라 넓은 갑판은 배의 지붕 역할도 하고, 높은 갑판 위에 대포를 설치하여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며 포격도 할 수 잇어 전보다 훨씬 강력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승조원 수도 늘어나 판옥선의 정원은 164명이 되었고, 나중에 수군 총사령관인 통제사가 타는 기함인 판옥대선은 이보다 훨씬 많은 194명이나 탈 수 있었다.

판옥선의 정원 164명 가운데 100여명은 노 젓는 군사인 격군(格軍)이고, 24명은 포수(砲手), 10명은 화포장(火砲匠), 그리고 18명은 활 쏘는 군사인 사부(射夫)였다.

조선 수군의 주력함인 판옥선은 목질이 튼튼한 소나무 통나무 골조에 보통 목선의 2배에 이르는 두께 13cm나 되는 판재를 사용했으므로 일본의 전함에 비해 월등하게 견고했다. 그런 까닭에 해전에서 일본의 전함은 조선 수군의 전함과 마주 부딪치면 여지없이 부서지고 말았다.

일본의 전함은 전부터 노략질을 하다가 불리하면 재빨리 도망쳐야 하므로 가볍고 날씬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아주 약했다. 하지만 이와는 달리 조선 수군의 전함은 연안에서 침범해오는 왜구의 전함을 맞받아 공격하면 되었으므로 상대적으로 느린 대신 월등하게 튼튼했던 것이다.

임진왜란 때의 일본 전함은 가장 큰 것이 아다케후네[安宅船], 주력 전함이 세키부네[關船], 그리고 수송과 연락에 주로 쓰이는 고바야[小早] 등이 있었다.

참고서적; 황원갑(黃源甲) 저술 '부활하는 이순신' 에코비즈니스(EcoBusiness) 2004, 김종대(金宗代) 저술 '신(臣)에게는 아직도 열두척의 군선이 있습니다.' 북포스(BookFors) 2001, 최두석(崔頭錫) 저술 '임진왜란(壬辰倭亂)과 이순신(李舜臣)' 일각 1999, 김형광(金炯光) 저술 '인물로 보는 조선사(朝鮮史)' 시아출판사 2003.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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