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포장된 상자 안에 다이아몬드가 들어있을 거라 생각했었고
그래서 그 상잘 받았고
상자를 비로소 열어보았을 때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실망감이 너무도 컸지만
빈 상자를 다이아몬드가 들어있는 것처럼 포장하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해서
내색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처음에 가졌던 그 생각을 눌러 놓는다는 게
나도 모르게 툭 툭 터져 나와서
서로 연락을 하지 않은 지 벌써 스무 날이 다 되어 가네요.
알고 있어요, 우린 이제 영영 남이 되었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답니다.
그래도 기다리게 되네요.
먼저 연락을 해 볼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나 이미 여러 번 그에게 매달렸었답니다.
그는 나의 몸에 이끌려 딱 한 번을 넘어왔었고,
그 후론 자기가 나쁜 놈이라고 하더니만
연락이 아예 없네요.
나도 안다니깐요.
이젠 영영, 이젠 정말 끝났다는 걸.
어쩌면 지금 내 핸드폰 번호는 그에게 스팸 번호로 지정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보내는 문자도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그러니깐 내게 연락도 할 수 없는 거에요.
나중에, 언젠가, 그가 호기심에서라도 내 번호에 걸려있는 스팸 설정을 풀고,
내가 지금 보냈던 문자를 보게 된다면...
연락 할까요?
<허세와 허영>
그와는 내가 대학교 이학년을 마치고 휴학한 지 일년이 다 되었을 때, 그 흔하디 흔한 소개팅으로 만났다. 아이러니 하게도 내가 가장 싫어하는 친구가 어느 날 뜬금없이 내게 외롭냐고 묻고는, 내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그 자리에서 바로 주선해 만나게 된 것이다.
내가 싫어하는 그 친구는 학교에서 알아주는 바람둥이 였기 때문에 나는 사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그녀는 한 학기에 열 명도 넘는 남자와 한꺼번에 연애를 했다!) 나는 그저 심심했고, 오히려 끼리끼리 논다고, 만약에 소개팅 자리에 선수가 나온다면-그럴 확률 99%!-나 역시 그에 맞대응해서 진지하지 않게 몇 번 놀다 끝내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친구가 그에게 문자를 보내고, 번호를 주고, 나에게 연락이 오고 하여서, 결국엔 내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난 지 겨우 이틀 만에 그를 만나게 되었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나는 솔로는 아니었다. 이 년 정도 연애를 하다 군대를 간, 아직 이병이고 삼일에 한 번 씩 꾸준히 전화가 오는 참한 남자친구가 있었다. 그가 군대에 갈 때 기다리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남자 친구는 내가 기다리고 있다고 믿고 싶은 듯 했고 나 역시 거기에 부정하는 말은 한 마디도 한 적이 없었다.
주위 친구들은 당연히 우리가 헤어진 줄 알았고, 난 거기에 대해서도 딱히 뭐라 말하지 않았다. 친구들은 내가 속이 상해서 말하기 싫어하는 줄 알고는 거기에 대해선 더 이상 묻지도,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다.
애매했다.
그러나, 나는 여자였다! 늘 사랑 받고 싶은, 왕성한 성을 가진 스물 세 살의 여자! 이제 열 흘정도만 지나면 새해가 밝고 그 땐 스물 넷이 된다! 나는 참기가 힘들었다. '잠깐 즐기다 말지 뭐...'가 가장 정확한 내 심리 상태였다는 것을 미리 밝혀 둔다. 욕 먹어도, 싸다.
바람둥이 친구와 헤어지고 나서 저녁 여덟 시 즈음에 내게 문자 한 통이 왔다.
[안녕하세요, 이번에 세희 소개로 연락하게 된 고 양 반이라고 합니다. 민진씨 핸드폰 맞으시죠?]
'역시 한 두번 해 본 솜씨는 아니군. 근데 이름이 참 양반스럽기도 하지.'
난 속으로 대충 비웃어 주고나서 바로 답장을 보냈다. 나의 신조는 남자들에게 '아, 이 여자는 밀당같은 건 안 하는 여자구나-'하는 이미지를 심어주는 것. 어쨌든 아직 만나보지 않았으니까.
[아, 네... 안녕하세요, 전 민진이에요^^]
[네, 저에 대해 얼마나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우선 A대학교 전전과 학생이구요, 지금은 병특으로 기업체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민진씨는 휴학 하셨다면서요? 뭐 시험 준비 같은 거 하셨나봐요?]
미안하지만 난 내가 대답하기 싫은 질문 같은 건 깔끔하게 무시해준다. 더구나 안 봐도 비디오인 너 같은 애한테? 됐다.
[아, 전전과 시구나... 저는 A대학 생명과에요^^ 그런데 병특이면 군인이신 거네요?ㅠ]
보통 여자들은 어떤 경우던 남자친구로 군인을 선호하지는 않는다. 당황이나 해버려라. 이왕 짧게 즐기기로 한 거 내가 가진 스킬을 총 동원해서 나 역시 즐겨주겠어!
[에이~ 아녜요~ 말만 군인이지, 보통 직장인들이랑 똑같아요. 퇴근도 여섯시면 하구요~ 군인 싫어 하시는 구나?]
여기에선 내가 당황해버렸다. 난 정말이지 군인은 싫어했으니까. 삼 일에 한 번 꼬박꼬박 전화해서 그곳 생활은 너무 단조롭고 지루하다며 나의 일상을 하나하나 듣고 싶어하는 남자 친구에게 나는 약간 짜증이 났다. 그것도 콜렉트콜로!
그러나 여기서 벌써 내 어두운 뒷모습에 대해 꼬리를 잡힐 수는 없지 않는가!
[어머 아니에요~ 병특도 군대 생활이랑 비슷한 줄 알았죠 뭐! 전 군대에 대해선 하나도 모르거든요... 세희가 다른 말 없이 병특에 계시다고만 하길래...]
그도 내가 만만치 않다고 느꼈을까?
우리는 얘기를 나누며 서로에 대한 호기심이 점점 커졌다.
난 '만만하지 않다. 대체 어떤 남자지?'하는 생각이 들었고, 어쩌면 그도 같은 생각 이었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남자도 날, 내 바람둥이 친구와 똑같이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우리는 결국 이틀 뒤인, 12월 21일 저녁 일곱 시에 종각 역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나는 마지막 멘트로 여자들의 전매 특허인 내숭 구단을 떨었다.
[근데, 저... 소개팅 너무 오랜만이라... 정말로 긴장되네요... 저 막 말 못하고 어리숙하게 굴어도 이해 좀 해주세요ㅠ]
[아, 소개팅 많이 안 해보셨나봐요?ㅎㅎ]
[네. 이 번이 사실 두 번째 소개팅이에요... 제가 또 낯을 많이 가려서ㅠ]
두 번째 좋아하시네!
[걱정하시지 마세요. 제가 낯 안 가릴 정도로 즐겁게 해 드릴게요.]
[아 정말요? 그러시니깐 더 기대돼요^^]
[그럼요. 제가 기대에 부흥하도록 잘 할게요.]
솔직히, 소개팅을 살면서 열 번은 해 보았지만, 이런 반응은 처음이었다.
보통 저렇게 보냈을 때의 반응은 '저도 소개팅 많이 안 해봤으니 걱정 마세요~, 마음 편하게 먹고 오세요~, 또는 처음이면 낯 가릴 수도 있죠 뭐~' 이 정도가 아니었었나?
대체 저런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은 뭐지?
나는 문자를 마치는 순간부터 이틀 뒤가 간절하게 기다려지기 시작했다.